♣복음말씀의 향기♣ No4036
11월9일[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연중 제31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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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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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5dvyV8Gj4zc
[예수회 이헌준 베드로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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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작은 교회, 그러나 따뜻한 인간미와 환대의 영성이 흘러넘치는 아담한 교회!>
바야흐로 급격한 출산율 감소의 여파가 현실로 다가왔습니다. 지자체나 교회도 충격이 크겠지만, 저희 살레시오회처럼 청소년 사목을 주로 하는 단체가 받는 영향을 심각합니다.
신입생 감소로 인해 매년 학급수를 줄여나가야 합니다. 학교를 운영하는 재단이나 교사들, 실무자들의 고초도 만만치 않습니다. 점점 비어가는 큰 규모의 건물들 유지 관리하는데 드는 비용도 만만치 않습니다.
이제는 교회나 수도회 안에서도 축소 및 통폐합 전문가 양성이 필요한 순간입니다. 이제는 대대적인 성전 건립이나 부속 건물의 신축을 지양해야 할 때가 왔습니다. 작은 교회, 그러나 따뜻한 인간미와 환대의 영성이 흘러넘치는 아담한 교회 건설이 필요한 시기입니다.
오늘 우리 교회는 모교회로서 세상 모든 성전들의 원천이요 규범이 되는 라테라노 대 성전 봉헌 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로마에 머물 때 종종 라테라노 대 성당을 방문하곤 했습니다.
베드로 대성전만큼은 아니지만 아직도 그 위용과 규모가 대단합니다. 걸작의 성화들과 예술품들로 가득해 수많은 관광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라떼라노 대성전 축일을 제정한 이유는 세상의 모든 성당들을 라떼라노 대성당처럼 웅장하고 화려한 면모를 본받도록 하기 위함에 결코 아닐 것입니다.
그보다는 이런 축일에 진정한 의미의 성전이 과연 어떤 모습인지를 성찰하고 묵상하도록 초대하고 있다고 확신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성전과 관련해서 참으로 충격적이고 파격적인 말씀을 우리에게 건네고 계십니다.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이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보십시오. 진정한 의미의 성전은 우리 눈앞에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고색창연한 외형적인 성전이기보다는 내적인 성전이요 영혼의 성전입니다. 어찌보면 매일 예수 그리스도의 고귀한 몸과 피를 먹고 마시는 우리 각자가 또 하나의 성전입니다.
물론 이런 저런 죄와 악습으로 거룩한 성전인 우리의 몸과 마음이 훼손되고 오염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각자가 교회입니다. 이토록 부끄럽고 보잘 것 없는 우리의 영혼이지만, 그 안에 지속적으로 현존하고 계시는 주님으로 인해 우리는 어쩔 수 없는 거룩한 성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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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a0dttlZkvu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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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어떤 모습의 성전이 지어지기를 원하셨을까?>
오늘은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입니다. 사실 저는 이러한 축일이 썩 기쁘지 않습니다. 라테라노 성전 하면 떠오르는 것이 그 앞에 있는 성 프란치스코 상입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다미아노 성당에서 “나의 성전을 재건하여라!”라고 하시는 하느님의 음성을 듣고 돌로 된 성전을 재건합니다. 그러다 수도회 회칙을 승인받기 위해 라테라노 성전으로 옵니다. 그곳에 교황님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성당의 규모에 놀랍니다. 그런 모습이 청동으로 라테라노 성당 앞쪽에 있습니다.
교황은 거지로 지내는 탁발 수도회를 인정하기 싫었습니다. 하지만 꿈에 한 거지가 무너져가는 라테라노 성당을 어깨로 받치고 있는 모습을 봅니다. 그리고는 프란치스코를 다시 불로 회칙을 승인합니다. 나중에야 사람들은 주님께서 교회를 재건하라고 한 것은 눈에 보이는 다미아노 성당이 아닌 참 하느님의 성전을 의미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장사꾼들이 가득한 성전을 정화하십니다. 그리고 성전을 허물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당신이 사흘 안에 성전을 다시 짓겠다고 하십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성전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우리 각자는 하느님께서 사시는 성전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1코린 3,16) 여기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다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요한 2,19)
성전은 기도하는 집입니다. 하느님을 경배하는 집입니다. 첫 성전은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해 짓게 하신 성막입니다. 성막을 짓기 전에 그들이 가진 성전이 있었습니다. 바로 금송아지를 섬기는 성전입니다. 제단이 있으면 성전입니다. 이 성전을 허물지 않으면 새 성전이 지어질 수 없습니다.
돌로 된 성전은 그 크기가 커질수록 금송아지를 섬기는 성전이 되기 쉽습니다. 왜냐하면 그 성전을 유지하기 위해 많은 돈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도 커다란 성전을 지어놓고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장사꾼들을 들여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성전을 지으신 일이 없습니다. 사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가는 곳이 다 성전이었습니다.
사실 신약의 첫 성전은 성 목요일의 마르코의 다락방이라고 불리는 곳이었습니다. 성전들이 모이는 곳에 따로 또 다른 성전이라 불리는 돌로 된 것을 지을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사실 교회의 뜨거움이 식어가기 시작하였을 때는 커다란 성전이 지어지는 때부터였다고 생각합니다. 전설에 의하면 교황 이노첸시우스 4세와 토마스 아퀴나스가 교황청의 발코니에서 함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 중세 때의 교회의 부와 권력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교회는 더 이상 가난하지 않았고 낮은 위치에 있지도 않았습니다.
마침 교황청으로 돈 주머니가 수송되어 오는 행렬이 있었습니다. 교황은 그것을 보고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저기 봐요. 이제는 ‘금과 은은 내게 없노라’고 교회가 말하던 그런 시대는 지나갔소.”
이 말은 성전에서 교회의 수장이었던 베드로와 함께 요한이 지나갈 때 앉은뱅이가 자선을 청하자, 베드로가 대답했던 말을 인용해 그 때처럼 가난한 교회가 아니라는 뜻으로 한 이야기입니다. 토마스 성인이 이를 받아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앉은뱅이더러 ‘일어나 걸어라.’하고 교회가 말할 수 있던 시대도 지나갔습니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것들에 시선을 집중하면 멀리 있는 아름다운 것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처럼, 세상 것에 먼저 시선을 두면 세상 것 안에 머물러 주님이 주시는 초자연적인 은총은 얻지 못하게 된다는 의미로 토마스가 말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언제나 영과 육은 서로 반대이기 때문입니다. 육에 치우친 사람은 영적인 삶을 절대로 살 수 없게 됩니다.
솔로몬에 커다란 성전을 지었을 때부터 나라가 갈라졌습니다. 많은 세금을 거둬들여야 했기 때문입니다. 헤로데가 성전을 재건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 시대의 성전이 헤로데가 리모델링 한 성전인데 그 규모가 너무 커서 장사꾼들을 들여보내 세금을 거둬내야만 했습니다. 로마도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의해 종교가 자유를 갖게 되었을 때부터 커다란 성전이 지어지기 시작하였고 그 뜨거움이 식어갔습니다. 바티칸 성전을 지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돈이 매우 필요하여 어쨌건 개신교가 나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사실 성전의 크기는 신자들의 자존심이라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옆의 다른 성당과 비교해서 조금 더 크고 화려한 것을 원합니다. 그것을 위해 많은 돈을 냅니다. 이렇게 되면 성직자들은 그 성당을 유지하기 위해 돈에 집중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쩌면 자신도 모르게 가난한 사람들을 소외시키고 돈 있는 사람들과 어울리게 되기도 합니다.
요한 묵시록에는 참 하느님의 성전이 교회라고 합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이때가 되면 하느님의 거룩한 도성 천상 예루살렘에서는 성전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전능하신 주 하느님과 어린양이 도성의 성전이기 때문입니다.”(묵시 21, 22)
일본의 원폭피해를 전 세계적으로 알린 한 작가가 있습니다. 나가이 다카시입니다. 의사였던 그는 본인도 원폭 피해를 입고 백혈병에 걸려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았지만, 그 시한부 인생 동안 무려 17권의 책을 집필하여 전 세계의 독자들에게 전쟁의 참혹함을 알렸습니다.
그는 한 평짜리 집을 마련하고 ‘여기당(여기 애인(如己愛人: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의 줄임말)’ 이란 이름을 붙여 두 자녀와 함께 지내며 글을 썼습니다. 여기당은 유리로 돼 있는데 옆으로 보면 성당 성모상이 보여, 그 성모님을 보며 묵주기도를 바치고 글을 썼습니다. 매년 20만 명 가까이 순례객이 여기당을 찾고 있습니다.
한 평짜리 집이지만 매년 20만 명이 찾고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커다란 성당은 원자폭탄에 의해 무너졌습니다. 하지만 한 사람의 희생이 담긴 여기당은 지금도 건재합니다. 어쩌면 외적인 성전 건물이 커지면 내적 성전은 피폐하여가는 것은 아닐까요?
예수님은 먼저 멋지고 화려한 성전을 허물라고 하셨습니다. 유다인들은 그 크고 화려한 건물 때문에 그것을 유지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았을까요? 성전이 크기 때문에 장사꾼이 모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성전 유지 관리를 위해 그들을 허락하였을 것입니다.
만약 작은 성당이라면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성전이 크면 장사꾼이 모입니다. 우리 각자의 성전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쩌면 프란치스코가 묵었던 토굴, 그리고 여기당이 예수님께서 원하신 참 성전이 아닐까요?
성전이 우리들의 자존심을 상징한다면 그러한 성당은 무너져야 합니다. 그래야 그것을 유지할 돈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도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 그리스도의 희생이 담긴 참 성전이 세워집니다.
이태석 신부님은 돈이 들어왔을 때 성당을 짓지 않고 학교를 지었습니다. 그러한 학교에서 하는 미사가 주님께서 원하시는 성전의 모습이 아닐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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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2006년 캐나다 토론토에 살 때입니다. 한국에서 온 형제님이 제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신부님! 이제 영어 많이 느셨겠네요? ‘원님 덕분에 나팔 분다.’라는 말을 영어로 어떻게 하나요?” 저는 그때 당황했습니다. 한참 생각하다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Because of Jesus, I can live well in Toronto.” 형제님은 저의 이야기를 듣고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요즘 비슷한 일이 생겼습니다. 5년 동안 본당 신부로 있었던 전임 신부님이 달라스를 방문했습니다. 저하고는 동창 신부입니다. 교우들이 신부님을 따뜻하게 맞이했습니다. 신부님을 초대하는 자리에 저도 함께 초대했습니다. 덕분에 저도 즐겁게 지낼 수 있었습니다. ‘꿩 대신 닭’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신부님을 초대했는데, 신부님이 사정이 생겨서 못 왔습니다. 이왕 약속을 잡았으니, 제가 대신 자리에 함께했습니다. 혼인 잔치에 초대된 사람의 이야기가 생각났습니다. 잔치를 마련한 주인은 자리가 남으니, 길가에 있는 사람이라도 초대하라고 종에게 말했습니다. 멀리서 벗이 왔으니, 참 좋은 일입니다. 감사하면 감사할 일이 생깁니다. 기뻐하면 기뻐할 일이 생깁니다.
달라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은 3년 후면 50주년을 맞이합니다. 지금의 자리에 성당을 세울 때까지 2번의 이동이 있었다고 합니다. 처음 성당은 시내에 있는 성당이었다고 합니다. 독일계 이민자들이 세운 성당을 얻었다고 합니다. 교우들은 당시의 성당을 다운타운 성당이라고 불렀습니다. 공동체가 커지면서 새로운 성당을 찾았고, 임시로 성당을 얻었는데 창고처럼 생겼다고 해서 교우들은 ‘창고 성당’이라고 불렀습니다. 교우들은 지금의 성당 터를 매입했고, 40주년이 되던 2017년에 아름다운 성전을 완공했습니다. 넓은 주차장이 있고, 성당에는 아름다운 스테인드글라스가 있고, 공동체가 함께 머물 수 있는 친교실이 있습니다. 학생들이 운동할 수 있는 농구장이 있습니다. 지난 10월에 피정 강의를 왔던 수녀님이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성당이 무척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제 마음에 드는 것은 성당이라는 건물은 아니었습니다. 신부님, 수녀님 집무실 앞에 있는 사진이었습니다. 사제들이 환하게 웃으면서 형제처럼 함께 찍은 사진, 수도자와 성직자가 환하게 웃으면서 함께 찍은 사진이 무척 아름답게 보였답니다.” 그렇습니다. 성당이 아름다운 건 건물 때문이 아닙니다. 성당이 아름다운 건, 그곳에서 공동체를 이루는 교우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입니다. 라테라노 대성전은 교황님들께서 지내시던 성전입니다. 라테라노 대성전은 오랜 박해가 끝나고, 새로운 시대가 왔음을 알려 주는 성전입니다. 라테라노 대성전은 교회가 세상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았음을 알려 주는 성전입니다. 성전은 기도하는 곳입니다. 성전은 친교를 나누는 곳입니다. 성전은 지치고 힘든 사람들이 와서 위로를 얻는 곳입니다. 성전은 생명의 빵을 나누는 성사가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성전은 성전만으로 남으면 단순히 건물일 뿐입니다. 성전은 그곳에서 신앙생활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의 몸이 바로 생명의 물이 흘러나오는 성전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몸에서 ‘가난, 순결, 순명’의 물이 흘러나오면 세상에는 평화가 올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몸에서 ‘믿음, 희망, 사랑’의 물이 흘러나오면 우리는 이 세상을 살면서도 이미 하느님 나라를 사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베들레헴 성당 문에 있었던 글이 생각납니다. “여러분이 관광객으로 오셨다면 순례자가 되셔서 나가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이 순례자로 오셨다면 거룩한 사람이 되셔서 나가면 좋겠습니다.”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가 주님께서 머무시는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그릇은 그 안에 무엇을 담는가에 따라서 가치가 더욱 드러납니다. 탐욕, 거짓, 분노, 교만을 담으면 겉은 화려해도 속에서는 악취가 날 것입니다. 믿음, 희망, 사랑을 담는다면 비록 질그릇과 같을지라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전해질 것입니다.
“그분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뒤에야,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그분께서 이르신 말씀을 믿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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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라떼란 대성당 봉헌 축일은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로마 라떼라노에 세운 대성당의 봉헌을 기념하는 날이다. 라떼란 대성당은 로마의 주교좌 성당이다. 성 베드로 대성당은 사도좌 성당이다. 라떼란 성당을 들어가다 보면 라틴어로 “Omnium Ecclesiarum Urbis et Orbis Mater et Caput, 로마와 전 세계의 모든 교회의 어머니이며 머리”라는 글귀가 있다. 이 성당은 성 베드로 좌의 권위를 상징할 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대성당의 모델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성당의 봉헌 일을 기념하는 것은 사랑의 전 공동체를 이끄시는 베드로 좌에 대한 존경과 일치의 표지이다.
복음: 요한 2,13-22: 예수님은 당신의 몸을 두고 성전이라 하셨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과월절이 되자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셔서 성전을 더럽히는 모든 행위를 금하시고 정화하시는 장면을 소개하고 있다. 성전의 본 의미는 그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그분께 참된 예배를 드리며 그분의 선물을 받는 곳이어야 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형식으로 변하고, 성전이 이익집단이 모여 이권 전쟁을 하는 곳으로 변해버린 것을 보시고 예수께서는 대로하셨다.
파스카 축제는 이스라엘에서 가장 성대한 축제이다. 이 축제를 지내기 위해서 온 세상에 흩어져있는 유다인들은 이때 예루살렘 성전을 순례하며 파스카 축제를 지냈다. 그때 예루살렘에 모인 순례객들이 200만 명이 되었고, 제물로 바치는 양의 숫자도 30만 마리가 되었다고 한다. 이때 성전에서 제물로 바치는 가축들을 성전에서 준비한 것만 바치게 하였고 성전세도 성전에서 만든 돈으로만 바치게 하여 이런 횡포가 있었다. 거룩하신 하느님의 현존보다는 자신의 이익에만 정신이 팔려있는 그 모습을 보시고 노하셔서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16절)고 꾸짖으신다. 예수님의 이 행위는 유다인들에게 반감을 갖게 하기에 충분한 행위였다. 그래서 “당신이 이런 일을 해도 된다는 무슨 표징을 보여줄 수 있소?” 하고 말하였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18-19절) 이 말씀은 당신의 몸을 두고 성전이라고 하셨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두 가지 성전을 볼 수 있다. 하나는 46년에 걸쳐 지어진 예루살렘 성전이며, 다른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께서 당신의 몸을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깊은 의미가 있다. 성전이 하느님을 만나는 장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길을 통하여 아버지께로 갈 수 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을 언제나 체험할 수 있으므로 그분이 성전이시며, 아버지와 성령께서 항상 함께하시기 때문에 그 몸은 거룩한 성전이시다. 바오로 사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여러분의 몸이 여러분 안에 계시는 성령의 성전임을 모릅니까?”(1코린 6,19) 이제 어떤 의미에서 아들이신 그리스도 안에 자녀들인 우리 자신은 성령을 모시는 성전이다. 성령을 모시는 또 다른 성전이라면, 우리는 우리의 몸을, 우리 자신을 하느님의 뜻에 맞는 성전으로 항상 가꾸고 보존하여야 한다. 하느님을 모시고 있는 성전이 거룩한 것처럼, 그 안에서 하느님께 기도하는 우리 자신도 다른 사람에게 나 자신을 통하여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장, 성전이 되도록 하여야 한다.
우리 자신이 성전임을 알았다면, 오늘 복음은 바로 우리의 모습이 어떠해야 한다는 것을 말해주는 복음이다. 우리가 바로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이라고 하는 이 성전이 거룩할 때 우리 교회 공동체가 모두 하느님을 모시는 성전으로 변화된다. 우리는 이 성전에 생명을 심을 수도 있고, 멸망을 심을 수도 있다. 그것은 언제나 나의 삶을 어떻게 선택하느냐에 달려있다. 항상 주님을 모시는 거룩한 성전이 되는 삶을 노력하여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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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최정훈 바오로 신부님]
모든 교회의 어머니요 으뜸인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에 우리는 성전의 의미를 묵상하게 됩니다. 성전은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머무시고 있음을 드러내는 표지이며, 주님을 만나 기도하는 장소이고,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보이게 하는 곳입니다. 우리의 몸은 성령께서 머무시는 성전이기에(1코린 6,19; 2코린 6,16 참조), 우리도 이러한 성전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먼저 우리 몸은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머무시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주님께서 머무시도록 우리 자신을 깨끗하게 정화해야 합니다.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요한 2,16) 하신 예수님의 말씀처럼 세속의 정신이 우리 마음을 지배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 몸은 주님과 만나는 장소입니다. 자주 내면 깊숙이 들어가 그곳에 머무시는 주님과 만나야 합니다. 우리 내면은 주님과 만나는 장소입니다. 우리 몸은 성전이기에 언제 어디서나 내면 깊은 곳에 들어가 주님을 만나 대화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 몸을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를 드러내야 합니다. 라테라노 대성전처럼 큰 성당은 보이지 않는 크고 위대하신 하느님을 세상에 드러냅니다. 주님에 대해서 잘 모르는 이들도 장엄한 건축물, 화려하고 아름다운 장식들, 웅장한 조각상들을 보면서 하느님의 놀라운 권능과 거룩함을 느낍니다. 이처럼 우리도 삶에서 주님의 사랑과 거룩함을 세상에 드러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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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성전 건물’이 아니라 ‘신앙인의 삶’이 중요합니다.>
“유다인들의 파스카 축제가 가까워지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 그리고 성전에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자들과 환전꾼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끈으로 채찍을 만드시어 양과 소와 함께 그들을 모두 성전에서 쫓아내셨다. 또 환전상들의 돈을 쏟아 버리시고 탁자들을 엎어 버리셨다. 비둘기를 파는 자들에게는,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하고 이르셨다. 그러자 제자들은 ‘당신 집에 대한 열정이 저를 집어삼킬 것입니다.’ 라고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생각났다. 그때에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당신이 이런 일을 해도 된다는 무슨 표징을 보여 줄 수 있소?’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유다인들이 말하였다. ‘이 성전을 마흔여섯 해나 걸려 지었는데, 당신이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는 말이오?’ 그러나 그분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뒤에야,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그분께서 이르신 말씀을 믿게 되었다."(요한 2,13-22)
1) ‘성전’이 어떤 곳인가는 솔로몬의 기도가 잘 나타냅니다.
“어찌 하느님께서 땅 위에 계시겠습니까? 저 하늘, 하늘 위의 하늘도 당신을 모시지 못할 터인데, 제가 지은 이 집이야 오죽하겠습니까? 그러나 주 저의 하느님, 당신 종의 기도와 간청을 돌아보시어, 오늘 당신 종이 당신 앞에서 드리는 이 부르짖음과 기도를 들어 주십시오. 그리하여 당신의 눈을 뜨시고 밤낮으로 이 집을, 곧 당신께서 ‘내 이름이 거기에 머무를 것이다.’ 하고 말씀하신 이곳을 살피시어, 당신 종이 이곳을 향하여 드리는 기도를 들어 주십시오."(1열왕 8,27-29)
솔로몬이 성전을 지은 것은 ‘하느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들을 위해서’였고, ‘기도하기 위해서’, 또는 ‘하느님을 더욱 잘 섬기기 위해서’였습니다. 그의 기도에 대해서,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응답하셨습니다.
“만일 너희와 너희 자손들이 나에게서 돌아서서, 내가 너희 앞에 내놓은 계명과 규정을 따르지 않고, 가서 다른 신들을 섬기거나 예배하면, 나는 내가 준 땅에서 이스라엘을 잘라 버리고, 내가 내 이름을 위하여 성별한 이 집을 내 앞에서 내버리겠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모든 민족들 사이에서 속담거리와 웃음거리가 되고 말 것이다."(1열왕 9,6-7)
물론 하느님께서 이런 경고 말씀만 하신 것은 아니고, 이 말씀 앞에 축복의 말씀도 하셨습니다. 어떻든 하느님 말씀은, 성전이 본래의 목적대로 사용되지 않고 인간의 탐욕을 채우는 도구로 변질된다면, 성전을 버리시겠다는 경고입니다. 이 경고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살아 있는) 경고이고,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교 성전에만 해당되는 경고가 아니라, 우리 교회의 ‘모든 성전’에도 해당되는 경고입니다.
2) 공관복음에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 파괴를 예고하신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나가실 때에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말하였다. ‘스승님, 보십시오. 얼마나 대단한 돌들이고 얼마나 장엄한 건물들입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너는 이 웅장한 건물들을 보고 있느냐? 여기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허물어지고 말 것이다.’"(마르 13,1-2)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솔로몬에게 하신 말씀과 같은데, ‘모든 민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으니(마르 11,17), 하느님께서 이 건물을 다 허물어 버리실 것이라는 뜻입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그렇게 될 것이라는 경고입니다.>
오늘날 세계 각지에 예루살렘 성전보다 더 웅장하고 더 아름다운 성전들이 많이 지어져 있고, 앞으로도 지을 텐데, 중요한 것은 건물이 아니라 ‘삶’입니다. 아무리 집을 잘 지었더라도 강도들이 살면 ‘강도들의 소굴’일 뿐입니다. 신앙인들이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답게 살아야만 ‘성전’이 될 수 있습니다.
건물을 잘 지었다고 해서 하느님을 잘 섬기는 것은 아니고, 신앙인답게 잘 사는 것이 곧 하느님을 잘 섬기는 것입니다. ‘강도들의 소굴’이라는 말에서 ‘회칠한 무덤’이라는 말이 연상됩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속은 죽은 이들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는 회칠한 무덤 같기 때문이다. 이처럼 너희도 겉은 다른 사람들에게 의인으로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하다."(마태 23,27-28) 우리는 사회적으로 여러 가지 물의를 일으키는 사이비 종교들도 정말로 크고 멋있는 건물을 지어놓고 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3) “이 성전을 허물어라.”라는 말씀은, 허례허식과 탐욕으로 심하게 오염되어 있는 예배를 폐지하라는 뜻입니다.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라는 말씀은,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예배를 세우시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하느님 뜻에 합당하게 하느님을 섬기는 참된 신앙생활과 예배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예수님께서 세우신 교회이니 망해서 없어지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라는 자만심을 버려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세우셨으니, 예수님께서 없애실 수도 있습니다. 제대로 올바르게 살지 않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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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화하신 사건은 모든 복음서에서 전할 만큼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입니다. 또 신학적으로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보여 주는 사건이기도 합니다. 당시 예수님의 행동은 성전을 중요하게 생각하던 많은 사람에게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그분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 이후에 성전 정화 사건을 이렇게 이해합니다.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예수님의 행동과 가르침을 이해하는 열쇠가 됩니다.
성전 정화 사건은 우리에게도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하느님의 집이자 하느님께서 세상에 머물러 계시는 장소로 생각되던 성전은 더 이상 없습니다.
실제로 성전은 기원후 70년에 파괴되었고 그 이후 새로운 성전은 건립되지 않았습니다. 이제 성전을 대신하는 것은 예수님의 몸입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가시적으로 드러내시고 하느님의 뜻을 전하십니다. 하느님과 세상 그리고 사람들 사이의 유일한 중개자이신 예수님을 통하여 사람들은 하느님과 화해하게 됩니다.
이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만 이해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이 전하는 사건 또한 그렇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을 통하여 하느님을 뵙고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하느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허물어지지 않는 성전으로 우리 안에 계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성경과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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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성전의 진정한 의미를 알려 주십니다.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요한 2,16)
예수님이 성전에서 사고파는 장사꾼들과 환전상들을 내쫓으시며 말씀하십니다. 제물로 바칠 짐승이나 돈을 성전 안에서 고르고 또 바꾸다 보니 장사치들의 존재는 일상적인 일이 되었지만, 예수님께서 정면으로 문제를 제기하신 겁니다.
"아버지의 집"
아버지의 집은 외적으로 성전 건물을 가리키지만, 내적으로는 아버지께서 머무르시며 당신 백성과 통교를 나누시는 자리를 의미합니다. 외적인 예식과 제물도 중요하지만 하느님과 인간이 나누는 사랑의 침묵과 머무름도 간과할 수 없는 본질이지요. 아버지께 제물을 들이대기 전에 먼저 고요히 존재 대 존재로 마주하는 것이 우선일 겁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요한 2,19) 이번에는 예수님께서 당신 몸을 성전이라 일컬으십니다. 사람들이 알아듣건 알아듣지 못하건, 죽으시고 사흘만에 살아나실 당신의 앞날을 이 말씀으로 계시하신 겁니다. 아버지의 아드님이신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현존하시는 성전입니다.
제1독서에서 에제키엘 예언자는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환시로 봅니다. "이 강이 닿는 곳마다 모든 것이 살아난다. ... 이 물이 성전에서 나오기 때문이다."(에제키엘 예언서 47,9.12)
예언자는 천사에게 외적으로 이끌려 주님의 집 문지방 밑에서 물이 솟아 흐르는 장면을 봅니다. 그 물이 강으로 흘러가면서 온갖 생물을 살리고, 바다로 흘러가면 그 바닷물이 되살아납니다. 이 물이 지닌 힘은 그 원천인 성전의 생명력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해서 물과 피를 쏟으신 장면이 떠오릅니다. 성전이신 예수님의 몸에서 흘러나온 물과 피는 교회에 생명을 주는 성사입니다. 이 은총은 흘러가 닿는 곳마다 살리고 되살리며 거듭 생명을 줍니다.
또한 우리 자신도 예수님의 몸에서 흘러나와 세상에 보내어진 물이 아닐까 관상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말씀과 사랑을 가득 채워 우리를 세상으로 흘려보내시니까요. 주님의 생명력으로 충만해진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위는 아직도 죽음의 그늘 밑을 걷고 있는 이 세상에 은총의 도구가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파견되어 세상 구석구석으로 스며드는 물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그 물을 흘려보내는 또 다른 성전이기도 합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도 성령께서 현존하시는 성전이니까요.
사랑하는 벗님!
성전 중의 성전인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을 지내며 또다른 성전인 우리 존재가 예수님의 바람과 기대에 맞게 잘 정돈되고 질서와 조화 가운데 주님을 모시고 있는지 살피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주님께서 머무르시는 거룩하고 아름다운 성전으로 세상 안에서 조용히 주님의 생명을 퍼뜨리는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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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12,19)
오늘은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입니다. 성전은 하느님께서 계신 곳, 하느님을 만나는 곳입니다. 성전은 모든 생명이 자라는 곳, 모든 것을 살게 하는 기쁨과 평화의 자리입니다. 생명의 물이 넘치는 곳,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는 성령께서 머무시는 곳이 곧 성전입니다. 그러기에 성전을 지어 봉헌한다는 것은 단순히 건축물을 지어 주님께 바치는 일이 아닙니다. 성전을 봉헌한다는 것은 우리 삶의 그 모든 자리에 하느님께서 함께 머무시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인이란 저마다의 성전을 지어 주님께 봉헌하는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헛된 욕망을 비우고 내려놓으며 내 마음을 깨끗하게 만드는 일이 우리 안에 성전을 봉헌하는 일입니다. 그러기에 이런 관점에서 오늘 축일의 의미를 깨닫고 되살려야 한다고 봅니다.
오늘 축일은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이후 280여 년의 긴 세월 동안 계속되었던 로마 제국의 잔인했던 박해가 313년 밀라노 관용령 선포로 끝난 지 11년 후 324년에 당시 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라테라노 대성전을 지어 봉헌한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라테라노 성전 봉헌을 시작으로 세상의 모든 성전을 주님께 봉헌할 때마다, 많은 이들의 희생과 정성, 그리고 기도로 성전을 건립했으리라 믿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이 예루살렘 성전을 허물어라.”(2,19)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예루살렘 성전만이 아니라 모든 성전은 성도들의 온갖 정성을 쏟아 성전을 지어 하느님께 봉헌했지만, 막상 건립 후에는 다툼과 오만, 분열과 욕망, 탐욕과 착취가 가득 찬 타락한 육의 성전이 되어버렸기 성전을 허물어라, 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라고 봅니다. 성전은 단순한 건축물이 아니며, 그 성전에 하느님께서 머물지 아니하고, 하느님께 진리와 영으로 예배드리지 아니하며, 기도의 집이 되지 못하면 그 성전은 한갓 빈껍데기와 같은 건물에 지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탐욕과 착취로 가득 찬 장사꾼의 집이 아닌, 하느님 사랑과 그 사랑의 열정으로 가득 찬 생명의 영혼들이 모이는 거룩한 집이 되도록 가꾸어야 합니다. 그럴 때 주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입니다. (루19,46참조)
이런 관점에서 오늘 축일의 독서와 복음에 이어지는 말씀의 내용은 모두 성전에 관한 주제를 담고 있습니다. 특히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장사꾼의 소굴로 만드는 이들을 향해 성전을 향한 열정에서 거룩한 분노를 표출하시면서,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2,19)하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라고 하신 성전은 부활 이후 “당신의 몸”(2,21)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으며,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뒤에야,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이 말씀 하신 것을 기억하게” (2,22) 됨으로써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의도를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지금의 우리는 이 말씀을 쉽게 받아들이고 있지만 당대의 사람들에게는 허무맹랑한 소리로 들렸으리라, 생각됩니다. 이 말씀으로 성전의 의미가 건축물이 아닌 사람의 몸과 사람들의 공동체로 이해될 수 있고 이해되는 발판이 마련된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런 맥락에서 “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성령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누구든지 하느님의 성전을 파괴하면 하느님께서도 그자를 파멸시키실 것입니다. 하느님의 성전은 거룩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1코3,16-17)하고 고백하고 있으며, 이로써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사람이 곧 성전이라는 관점을 더욱 분명하게 확증하고 계십니다. 이러한 신학적 근거를 바탕으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교회헌장」에서도 교회를 건물이 아닌 신자 공동체의 모임으로 정의 내렸습니다. 공의회 이전 신자들은 성전이나 성당이라고 하면 단순히 교회 건물만을 생각했지만, 그것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자들 모임, 믿는 이들 모임 자체도 교회입니다. 이렇게 성전에 대한 개념도 서서히 변화되기 시작했습니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이 예수님 몸을 모시고 또 예수님 말씀을 실천하는 공동체가 바로 교회입니다. 사실 우리가 매일 주님의 성체를 모신 다음엔 우리 몸이 바로 움직이는 감실이다, 라고 해도 결코 영성적으로 틀린 표현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주님 성전인 우리 각자는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그 답을 오늘 제1독서인 에제키엘 예언서(47,1~2;8~9,12)는 이렇게 아름다운 비유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물이 솟아 흘러나옵니다. 이 물은 흘러나오면서 점점 그 양이 많아지는데, 그 물이 닿는 곳마다 온갖 생명(생물+물고기 등)이 우글거리며 살아나고, 온갖 과일나무도 자라나 숲이 번창하며 온갖 것들이 살아납니다. 그 과일은 양식이 되고 잎은 약이 됩니다.”
바로 에제키엘 예언서의 비유를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예수님의 몸을 모시고 예수님 말씀으로 생명과 사랑으로 충만한 우리 역시 생명의 물과 같이 되어 우리가 가는 곳마다 우리를 통하여 우리로 말미암아 만나는 모든 사람이 생명과 사랑으로 변하고 마침내 풍요로운 결실맺도록 하는 역할이 바로 우리가 해야 할 바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바로 하느님의 건물이며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하루 아를르의 성 체사리우스 주교의 다음 가르침을 기억하며 살아갑시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우리가 이 대성전 봉헌 축일을 기쁨 속에 지내고 싶다면 우리의 악한 행실로 하느님의 살아 있는 우리의 이 성전, 우리 각자의 영혼과 육신을 파괴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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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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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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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당신은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요한 2,13-22 (성전을 정화하시다)
유다인들의 파스카 축제가 가까워지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 그리고 성전에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자들과 환전꾼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끈으로 채찍을 만드시어 양과 소와 함께 그들을 모두 성전에서 쫓아내셨다. 또 환전상들의 돈을 쏟아 버리시고 탁자들을 엎어 버리셨다. 비둘기를 파는 자들에게는,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하고 이르셨다. 그러자 제자들은 “당신 집에 대한 열정이 저를 집어삼킬 것입니다.”라고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생각났다. 그때에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당신이 이런 일을 해도 된다는 무슨 표징을 보여 줄 수 있소?”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유다인들이 말하였다. “이 성전을 마흔여섯 해나 걸려 지었는데, 당신이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는 말이오?” 그러나 그분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뒤에야,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그분께서 이르신 말씀을 믿게 되었다.
<당신은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그분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요한 2,20)
작은 벗
기꺼이 북돋아주시지요
당신이 모신 하느님께서
당신을 통해 몸소 일하시니
당신은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낮은 벗
한껏 받들어주시지요
당신이 모신 하느님께서
당신을 통해 몸소 일하시니
당신은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갇힌 벗
활짝 풀어주시지요
당신이 모신 하느님께서
당신을 통해 몸소 일하시니
당신은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어두운 벗
환하게 밝혀주시지요
당신이 모신 하느님께서
당신을 통해 몸소 일하시니
당신은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외로운 벗
따뜻하게 품어주시지요
당신이 모신 하느님께서
당신을 통해 몸소 일하시니
당신은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보잘것없는 벗
정성스레 보살펴주시지요
당신이 모신 하느님께서
당신을 통해 몸소 일하시니
당신은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아파하는 벗
부드럽게 어루만져주시지요
당신이 모신 하느님께서
당신을 통해 몸소 일하시니
당신은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웅크린 벗
살며시 다독여주시지요
당신이 모신 하느님께서
당신을 통해 몸소 일하시니
당신은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쓰러진 벗
조심스레 일으켜주시지요
당신이 모신 하느님께서
당신을 통해 몸소 일하시니
당신은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버림받은 벗
너그럽게 받아들여주시지요
당신이 모신 하느님께서
당신을 통해 몸소 일하시니
당신은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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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우리는 하느님의 성전>
라테라노 대성전은 로마에 있는 최초의 바실리카 양식 대성전입니다. 324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세웠습니다. 로마교구의 주교좌성당으로 교구장인 교황좌가 있는 대성당입니다. 대성전의 공식이름은 “라테라노의 지극히 거룩한 구세주와 성 요한 세례자와 성 요한복음사가 대성전”입니다. 로마에 있는 가장 오래된 성당으로 첫째가는 지위를 가졌으며, 전 세계 모든 지역교회의 유대관계 안에서 “모든 성당의 어머니”로 불리 웁니다.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표현대로 “사랑의 전 공동체를 이끄는”베드로좌에 대한 존경과 일치의 표지로써 이날을 기념하게 되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성전이라고 하면 하느님을 찬미하고 기도드리기 위해서 건축한 외적인 건물을 생각하고 또 말합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는 “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1코린 3,16.17) 하고 말합니다. 단순히 눈으로 보이는 기도의 집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이 곧 성전입니다. 사실 우리는 세례성사를 통해서 하느님의 성전이 되었습니다. 사람의 몸은 성령님이 계시는 성전입니다. 더욱이 성체성사로 오시는 예수님을 모시고 있기에 성전입니다. 성체를 모시는 우리의 몸은 성전이요, 움직이는 감실입니다.
또한, 오늘 복음은 예수님 자신이 성전임을 가르쳐 줍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그러나 그분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요한 2,19-21) 당신 몸을 성전으로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사흘 안에 세우겠다.’는 말씀은 죽음에서의 부활을 상징적으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써 그 의미를 알아들었습니다.
성전이란 특정 건물만도, 내세에서 영적으로 성별 된 장소만도 아닙니다. 성전이란 하느님께서 현존하시는 곳, 하느님과 만나는 곳, 함께하는 곳이니 거룩한 곳입니다. 성전에서의 모든 만남이 거룩할 수 있도록 우리의 삶을 거룩하게 봉헌해야 하겠습니다. 거룩함으로 속됨을 정화해야 하고 우리의 거룩함이 세상의 속됨을 이겨가야 합니다. 그 힘은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어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이시고, 성체이십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참된 성전이신 주님을 제대로 모셔야 하고 그 주님을 모신 내가 거룩함을 지녀야 하며 그러한 준비된 마음으로 기도의 집에서 하느님을 경배하고 찬미를 드려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활 마지막에 하느님의 성읍인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그 성전을 정화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의노와 열정으로 정화하시는 예루살렘 성전은 이스라엘의 종교와 삶의 모든 것이었습니다. 그 안에 하느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계약의 궤가 모셔져 있었고, 이는 주 하느님의 현존과 그들의 선민과 구원을 상징하였습니다. 그러나 성전의 참된 의미는 환전상들과 제사에 필요한 물품을 파는 장사꾼들의 지나친 상혼에 가려져 있었고, 그 뒤엔 제사장들의 권력과의 결탁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성전의 상점은 올리브산 언덕에 있는 산헤드린의 상점과 경쟁하기 위해 대제관 가야파가 연 것이라고 합니다. 자기네 이익과 특권을 유지하고 증진시킬 목적으로 종교를 이용한 것입니다. 그야말로 돈이 되니까 장사를 하였습니다. 성전에 예물을 바치러 온 사람들을 잘 도와줘야 하는 데 그들을 이용하여 폭리를 취하고 부담을 주었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정성과 거룩한 마음이 모아져야 할 성전에서 정성껏 준비한 제물은 무시되고 부정과 부패, 착취가 난무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예루살렘 성전 앞에서 장사꾼들을 꾸짖으시고 환전상들의 돈을 쏟아버리시고 탁자들을 엎어버리셨습니다. 그리고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고 하셨습니다. 단호하게 꾸짖지 않으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결국 심판 날에 ‘손과 발이 묶여서 바깥 어두운 곳에 버려질 것’이 분명해 이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들이 쫓겨난 것은 그들 마음 안에 하느님은 없고, 물질과 개인적인 이득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기적인 욕망에 가득 차 있으니, 혼이 나는 것은 당연합니다. 성전에 하느님의 거룩한 영 대신‘돈’과 물질이 들어가서 주인행세를 하니 그 결과 46년이나 걸려서 지은 예루살렘 성전도 ‘장사하는 집’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람이 썩으면 산천이 썩고 사람이 무너져서 종교도 무너지고 모두가 망그러집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악한 행실로 하느님의 살아있는 성전에 흠을 내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아무리 아름답고 웅장한 성전이라도 그곳에 거룩함을 지닌 백성이 없다면 이미 성전의 품위는 없습니다. 그저 잘 지어진 건물일 뿐입니다. 성전은 겉모양이 아니라 마음의 성전이 더 소중합니다. 어느 성당 기공식에서 하신 주교님의 말씀이 생생합니다. “성전을 건축한다고 더 큰 성전인 마음의 성전이 무너지고 상처 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사실 우리가 성당에 앉아 있으면서도 물질적인 이익을 계산하고 있잖습니까? 개인적인 이득을 추구하며 이웃을 돌려놓기도 하고, 마음으로 미워하며 시기 질투하고 ‘너 어디 잘되나 보자’ 하고 괘씸하게 생각도 하고….. 남의 허물에는 ‘너 정말 그럴 수 있나?’ 하면서, 자기의 허물에 대해선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하고 합리화합니다. 이런 마음이 장사꾼의 소굴이죠. 주님께서는 이런 속마음을 아시고 엎어버리시는 겁니다. 그 마음을 바꾸지 않으면 성전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허물을 벗어야 합니다. 이기적인 허물을 벗고 그리스도를 옷 입듯이 입은 사람답게 새롭게 태어나야 합니다.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그분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를 분별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의 집인 성전은 그 안에 거룩함을 잃지 않으려 기도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느냐에 따라 그 아름다움이 결정됩니다. 초라한 마구간이 빛난 것은 예수님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웅장하지도 값진 예술품 하나 없어도 주님과 함께하는 사람, 기도하는 사람,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집은 아름다운 성전입니다. 그러나 많은 돈을 들여 지은 건물에 갖가지 값진 예술품으로 장식을 해 놓았다 하더라도 기도하는 사람이 없다면,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이 없다면 그 집은 그저 건물일 뿐입니다. 결코, 성전은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에 주님을 제대로 모시고 거룩함을 간직한다면 대성전이든 마당이든 무엇이 문제가 되겠습니까? 주님께서 친히 우리를 당신의 거처로 삼으셨다면 어디에서든 거룩함으로 빛나야 하겠습니다. 외적인 건물의 화려함보다도 마음의 성전을 빛내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우리 마음을 기도의 찬미, 말씀 선포의 성전이 되게 하시고, 우리 마음을 성모님의 발현장소로 강복하시길 청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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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일찍이 다윗은 주님의 현존인 “궤약의 궤”를 모실 집을 짓고 싶어 했었습니다. 그렇지만 주님께서는 그에게 성전 짓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시고, 솔로몬에게 성전을 지을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성전은 유다의 멸망과 더불어 파괴되었고 백성들은 바빌론에서 유배생활을 해야만 했습니다.
유배에서 돌아 온 유다백성들은 기원전 515년에 제2성전을 재건하고 성전을 중심으로 하여 새로운 출발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성전 역시 그리스시대와 로마시대에 종교적, 정치적 이유로 두 차례에 걸쳐(기원전 167년과 63년) 다시 유린당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시대 이후, 기원 후 70년에 유대인들의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또 다시 로마군들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은 다시 파괴되었다.
그리고 기원 후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 “밀라노 칙령”이 반포되고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가 끝나고 난 후, 324년에 황제는 자신의 별궁을 성전으로 세우고 봉헌하였다. 오늘은 바로 이를 기념하는 날입니다. 곧 오늘은 로마의 주교좌성당인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타락한 성전을 정화하시는 장면입니다. 그리고 성전 파괴를 예고하시면서, 진정한 성전이신 당신의 몸을 성전으로 제시하십니다. 곧 “당신의 부활하신 몸”을 성전으로 내어주실 것을 예고하십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목숨을 거두실 때에는 성전의 장막이 두 갈래로 갈라졌습니다. 더 이상 물리적이고 공간적인 성전주의에 갇히지 않으시는 당신의 몸을 성전으로 주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하느님 현존의 성전이 됩니다.
이를 사도 바오로는 <코린토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잘 표현해주고 있다.
“여러분은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십니다.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1코린 3,16)
그렇습니다. 우리의 몸은 주님께서 주신 거룩한 품위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비록 질그릇 같은 깨지기 쉬운 몸이라 할지라도,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값진 보화를 간직한 거룩한 몸입니다. 당신께서 우리 안에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마치 새가 나무에 둥지를 틀듯이, 우리 안에 끝이 보이지 않는 신비한 동굴을 파고 들어와 앉아 계십니다. 당신의 사랑에 응답을 요청하시면서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이끄시고 계십니다. 단지 우리 안에 계시기만 한 것이 아니라, 활동하시기만 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주인이 되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분께 속해 있는 존재요, 그분의 소유요, 그분의 것이 됩니다.
주인은 집을 어찌할 수 있으되, 결코 집이 주인을 어찌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주인이 집을 소유한 것이지, 결코 집이 주인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 대성전의 봉헌을 기념하면서, 동시에 그분의 거룩한 성전으로 살아가는 날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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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요한 2,16)
주님!
성령의 채찍을 휘두르소서.
아버지 집에 대한 열정이 저를 삼키게 하소서.
당신이 세우신 성전의 뜰이 장사치와 도둑들의 소굴이 아닌
사랑의 열매를 나누는 나눔 터가 되게 하소서.
저의 영혼이 당신의 사랑을 경배하는 예배와 기도의 집이 되게 하소서.
제 안에 계시는 당신을 경배하는 일, 그 아름다운 일을 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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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전정화>
-건물성전, 공동체성전, 개인성전-
“하느님은 우리의 피신처, 우리의 힘. 어려울 때마다 늘 도와주셨네.”(시편 46,2)
오늘은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입니다. 이축일은 324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라테라노 대성전을 지어 봉헌한 것을 기념하는 날이며, 12세기부터 오늘 11월9일에 지내게 됩니다. 로마 교구의 주교좌 성당이며 로마교구 교구장은 교황입니다. 로마에 있는 성당가운데 가장 오래된 성당이자 첫째가는 지위를 가졌으며 성당 중앙입구에는 라틴어로 “전 세계 모든 성당의 어머니이자 머리인 지극히 거룩한 라테라노 성당’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습니다.
라테라노 대성전은 현재의 베드로 대 성전으로 옮겨지기 전까지 거의 천 년 동안 역대 교황이 거주하던, 교회의 행정 중심지였습니다. 각 지역 교회가 로마의 모교회와 일치되어 있음을 드러내고자 교회는 오늘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축일을 지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은 공동체 삶의 중심을 상징하는 하느님의 집인 성전을 사랑합니다. 바로 다음 시편 84장 고백 그대로입니다.
“만군의 주님이여, 계시는 곳 그 얼마나 사랑하오신고 그 안이 그리워, 내 영혼 애태우다 지치나이다. 이 마음 이 살이 생명이신 하느님 앞에 뛰노나이다. 주여 당신의 집에 사는 이는 복되오니 길이길이 당신을 찬미하리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성전 사랑 역시 유감없이 발휘됩니다. 세상을 성화해야할 세상의 마지막 보루와 같은 성전이 속화되는 현실에 열화와 같이 분노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이런 분노는 하느님 사랑에서 발단된 의노라 할 수 있겠습니다. 가차없이 성전을 정화하시던 주님은 비둘기를 파는 가난한 자들에게는 다소 부드럽게 대하십니다.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제자들은 예수님의 당신 집에 대한 열정을 이해했으나 유다인들은 예수님의 행위에 이의를 제기했고 이에 대한 주님의 답변입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야 성전은 바로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임을 깨달았다 합니다. 건물 성전에서 주님의 몸인 공동체가 진정한 성전임을 천명하신 것입니다. 문득 매월 첫주일 성수예식이 생각납니다. 성수예식후 주례사제가 성수를 성전안 미사에 참석한 신자들이 있는 곳곳에 뿌릴 때 부르는 성가 67장이 바로 오늘 제1독서 에제키엘서에 근거함을 봅니다.
“성전 오른편에서 흘러 내리는 물을 보았노라. 알렐루야, 그 물이 가는 곳마다 모든 사람이 구원되어 노래하리라, 알렐루야.”
바로 성전정화가 3차원에 걸쳐 이뤄짐을 보여주는 참 은혜로운 장면입니다. 성수은총으로 성전건물이, 공동체성전이, 개인성전이 동시에 정화됨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이 3차원의 성전이 하나로 이뤄주는 성체성사의 은총입니다. 참으로 공동체가 성전에서 미사를 봉헌할 때 비로소 온전한 성전의 실현이라는 것입니다. 말그대로 3차원에 걸쳐 동시적으로 이뤄지는 성전정화에 성전성화의 미사은총입니다. 오늘 제1독서 에제키엘서 다음 말씀은 그대로 세상을 살리는 미사은총의 풍요로움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말그대로 은총의 강, 생명의 강입니다.
“이 강이 흘러가는 곳마다 온갖 생물이 우글거리며 살아난다. 이 강이 닿는 곳마다 모든 것이 살아난다. 이 강가 이쪽저쪽에는 온갖 과일나무가 자라는데, 잎도 시들지 않으며 과일도 끊이지 않고 다달이 새 과일을 내놓는다. 이 물이 성전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참 아름다운 예언이 그대로 성전미사은총을 통해 실현됨을 봅니다. 무엇보다 공동체 성전의 정화와 성화와 더불어 그 지체들인 개인의 정화와 성화도 참 은혜로롭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이 우리를 고무하고, 참으로 거룩하게 살아야하겠다는 다짐을 새로이 하게 합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하느님의 성전이며 하느님의 성령께서 자기 안에 살아 계시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만일 누구든지 하느님의 성전을 파괴하면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을 멸망시키실 것입니다. 하느님의 성전은 거룩하며 여러분 자신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이기 때문입니다.”(1코린 3,16-17)
만남중의 만남이 미사전례를 통한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성전건물은 물론 그리스도의 몸인 공동체 성전을 정화하고, 주님의 지체인 우리 하나하나의 성전을 정화하여 우리 모두 주님의 은총의 성전이 되어 살게 합니다.
"실로 당신의 궐내라면, 천날보다 더 나은 하루, 악인들의 장막안에 살기보다는, 차라리 하느님 집 문간에 있기 소원이니이다."(시편 84,1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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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성전 의식>
오늘은 대성전 축일에 성전에 관해 묵상해봤습니다.
성전에 관한 첫 번째 묵상: 성전은 기도하는 집이다.
오늘 미사에서는 요한복음을 읽었지만, 공관복음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라 불릴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드는구나.”
하느님은 성전에만 계시는 것이 아니고 어디든지 아니 계신 곳이 없이 계시고, 그러므로 우리는 성전에서만이 아니라 어디서든지 하느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성전을 하느님이 계신 곳이고 하느님을 만나는 집이라고 하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우리의 성별 의식과 관련이 있습니다. 성별(聖別. Consecratio)이란 성유 바름을 통하여 사람이든 장소든 그것이 더 이상 다르게 쓰이지 않고 하느님을 위해서만 쓰이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기름 부음 받아 사제로 성별이 되면 하느님을 위해서만 살아야 하듯이 성전도 하느님을 위해서만 쓰이도록 성유를 발라 성별한 곳이기에 성전은 다른 어느 곳보다도 하느님을 만나는 특전적인 공간입니다
그러므로 성전에서는 하느님만 만나겠다는 우리의 의지와 의식이 필요하고, 그러므로 오늘 주님께서 비난하시는 강도들에게는 이런 의식과 의지가 없기에 성전이 하느님을 만나는 공간이 아닐 것입니다.
강도들은 어디를 가나 훔칠 생각이나 하고, 그러기에 성전에 들어가서도 금붙이로서 성작이나 찾지 하느님을 찾지 않을 것이고 그러니 하느님을 만날 리도 없을 겁니다.
성전에 관한 두 번째 묵상: 나도 성전이다.
오늘 독서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하느님이 계신 곳이 성전이니 나도 또 너도 성전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또한 성전 의식이 중요하고, 그래서 바오로 사도도 여러분이 성전이란 것을 모릅니까? 하고 물음으로써 우리가 성전이란 것을 의식하라고 합니다.
이것은 또한 의지와도 연결됩니다. 나는 하느님께서 머무시는 성전이니 하느님 외에는 아무도 또 아무것도 내 안에 들이지 않겠다는 의지 말입니다.
욕망이 내 안에서 꿈틀거리지 못하게 하겠다!
악감정들이 나를 사로잡지 못하게 하겠다! 유혹자와 악령들이 내 안에 똬리를 틀지 못하게 하겠다! 이렇게.
성전에 관한 세 번째 묵상: 성전은 생명과 구원의 장소다.
오늘 독서는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물에 대해 이렇게 또 얘기합니다. “이 강이 흘러가는 곳마다 온갖 생물이 우글거리며 살아난다.”
우리가 성전이고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 안에 계신다면 우리는 그분의 사랑과 생명으로 가득하고 마침내 사랑과 생명이 넘칠 것이고 내 주변의 사람들은 살아날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한번 돌아보고 주변을 둘러봅니다. 나에게서는 생기가 나오나 살기가 나오나? 내 주변 사람들은 활기찬가? 기죽어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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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요한2,19ㄴ)
<성전의 기능과 정화!>
오늘 복음(요한2,13-22)은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화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이 장사하는 집으로 더럽혀진 것을 보시고 성전을 정화하십니다. "끈으로 채찍을 만드시어 양과 소와 함께 그들을 모두 성전에서 쫓아내셨다. 또 환전상들의 돈을 쏟아 버리시고 탁자들을 엎어 버리셨다."(요한 2,15)
유다인들이 이 모습을 보고 예수님께 말합니다. "당신이 이런 일을 해도 된다는 무슨 표징을 보여 줄 수 있소?"(요한 2,18)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요한 2,19)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성전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오늘은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입니다. '라테라노 대성전'은 '모든 성당의 어머니요 으뜸'으로 불리면서, 현재의 베드로 대성전이 있기 전까지 약 천 년 동안 역대 교황이 거주하던 '교회의 행정 중심지'였습니다. 그리고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의 창설을 구두로 인준받았던 대성전'(1209년. 인노첸시오 3세 교황)이기도 합니다.
'성전(성당)'은 '우리를 살리는 영적 생명수가 흘러나오는 곳'입니다. 우리는 성전에 와서 온 마음으로 미사에 참례하고, 기도하고, 조배함으로써, '성령의 성전인 우리의 몸과 마음을 정화'시킵니다. 이렇게 '다시 부활하는 은총을 체험'합니다. 그리고 받은 은총을 나의 성전을 통해서 이웃과 나눕니다.
이것이 바로 '성전의 기능'입니다.
날마다 성령의 성전인 우리의 몸과 마음을 정화합시다! 정화하려고 노력합시다! 이것이 바로 '신앙생활의 본질'이요, '영원한 생명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의 본질'입니다.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1코린 317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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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그분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요한 2, 21)
하늘 아래
라테라노
대성전이
있습니다.
삶의 현장에
또한
라테라노
대성전이
있습니다.
성전은
우리 신앙의
터전이며
신앙의
현장이며
기도하는
성스러운
공간입니다.
하느님을
모시는 삶의
역사와 세월을
우리는
성전에서
함께하며
성전에서
현실과 사실을
만납니다.
공통된 믿음을
고백하며
신앙의
귀중함을
우리는
체험합니다.
성전이
신앙의
현장에
있지 않으면
복음은 복음의
고유한 역할을
다할 수 없습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어 오셨듯이
거룩한 진리도
현실을 떠나서는
이룰 수 없습니다.
사람을 살리고
사람을
변화시키는
거룩한
성전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리마음의
자리에도
삶의 중심을
잡아주는
성전이 있기를
기도드립니다.
라테라노
대성전의 여정은
신앙의 여정이며
삶의 여정입니다.
여기에서
삶의 참교훈을
얻는
뜻깊은 날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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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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