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의 포도
원제 : The Grapes of Wrath
1940년 미국영화
감독 : 존 포드
원작 : 존 스타인벡
각본 : 누낼리 존슨
제작 : 대릴 자눅, 누낼리 존슨
음악 : 알프레드 뉴만
출연: 헨리 폰다, 제인 다웰, 존 캐러다인
러셀 심슨, 프랭크 설리, 대릴 히크맨
워드 본드
아카데미 감독상, 여우조연상 수상작
가난한 사람들의 궁상스런 삶을 다룬 영화로 대표적인 것은 60년대 한국영화들과
40-50년대의 이탈리아 네오 리얼리즘 영화들을 꼽을 수 있습니다. 특히 네오 리얼리즘
영화들은 '자전거 도둑' '지붕' '움베르토 D' '밀라노의 기적' 같은 영화들을 통해서
전후의 가난하고 황폐한 이탈리아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묘사해서 영화사의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매김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부류의 힘든 사람들의 어려운 삶을 다룬 수작영화의 원조라 할만한
작품은 오히려 '헐리웃 영화'에서 등장했습니다. 바로 존 스타인벡 원작의 '분노의 포도'
입니다.
'분노의 포도'는 미국의 국민감독 존 포드가 연출한 작품으로 1940년에 발표되었습니다.
네오 리얼리즘 영화들보다 몇년 앞선 작품이지요. 아마도 비토리오 데 시카로 대표되는
이탈리아의 40-50년대 궁상스런 영화들도 이 영화의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20세기 미국을 배경으로 집없이 떠돌며 직업을 찾으려는 가난한 가족의 이야기입니다.
30-40년대 헐리웃 영화들을 보면 근사한 저택에서의 세련된 삶을 다룬 영화들이 참
많았는데, 시골의 서정적인 영화도 아닌 이렇게 힘들고 지친 가족들의 극도로 가난한
삶을 다룬 영화가 메이저 감독, 메이저 배우에 의해서 등장했다는 것이 참 주목할
부분입니다. 그것도 20세기의 이야기인데.
정당방위로 사람을 죽이고 4년을 복역하고 가석방된 톰(헨리 폰다)은 들뜬 마음으로
오클라호마의 고향집으로 돌아옵니다. 하지만 집은 텅 비어 있었는데 부모님들이
삼촌의 집으로 옮겨 살고 있었습니다. 톰의 가족은 소작농가였는데 극심한 가뭄과
모래바람때문에 농사가 어렵자 지주들이 소작농을 폐쇄하고 트랙터를 사용하기로
한 것입니다. 삼촌의 집도 곧 헐리게 되어 쫓겨날 처지가 되자, 톰 가족 일가는
낡은 트럭을 구해서 캘리포니아로 일자리를 찾아서 떠나기로 합니다.
대를 물려 농사를 짓고 평생 살아온 집에서 쫓겨나게 된 소작농가의 가족들, 이들은
막연히 일자리가 있을 거라는 믿음으로 서부의 캘리포니아 지역으로 먼 여정을
떠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들을 기다리고 있는 운명은 편안한 일자리가 아닌
하루 하루의 삶 자체가 보장되지 않는 험난한 고난의 길이었습니다. 악덕 지주와
경찰이 단합하여 노동자들을 강압적으로 착취하는 현실, 당장 한끼가 아쉬운
노동자들은 그런 지주의 횡포에도 어쩔 수 없이 일을 하게 됩니다. 일자리는
부족하고 몰려든 노동자들은 많고.... 12명이 출발한 톰의 일행은 나이가 많은
톰의 할아버지 할머니가 험한 여행을 버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이런 삶의
현실을 견디지 못한 매제마저 떠나면서 8명으로 감소됩니다. 홀로남겨진 임신한
동생, 아직 어린 철부지 자매, 나이가 든 아버지와 삼촌 등은 언제 퍼질러져도
이상할게 없는 낡은 트럭에 의존하여 잠자리와 일자리를 찾아 헤맵니다.
뭐, '자전거 도둑' '움베르토 D' '밀라노의 기적' '지붕'과 비교해도 전혀 뒤지지 않은
궁상스러움의 극치입니다. '오발탄' '만선' '산불' '혈맥' '마부' 같은 궁상스러운 한국
영화들은 오히려 상황이 훨씬 좋은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1차대전 이후에
엄청난 경제호황기를 누린 미국의 역사지만, 중서부 지역에 이렇게 가난한
사람들의 현실이 있었다는 것 자체가 참 대조적입니다. 존 스타인벡은 이런
어렵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훈훈하게 소설속에 담아내며 리얼리즘 소설로
호평을 받았고, '에덴의 동쪽'같은 작품도 유명합니다. 이런 존 스타인벡에게
1962년에 노벨 문학상이 수여되었고 '분노의 포도'는 20세기 미국문학의 대표적
작품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실제로 캘리포니아 출신의 존 스타인벡은 가난한
오클라호마 이주민들과 직접 만나고 대화하고 겪은 겸험을 토대로 이 소설을
지은 것인데 미국 노동자들의 비참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일종의
'사회주의 리얼리즘' 소설이었기 때문에 캘리포니아와 오클라호마에서는 금서로
지정되었다고 합니다.
존 스타인벡은 그렇게 진보적인 성향이 있는 노동자의 입장을 다룬 작가였지만
캘리포니아와 오클라호마에서 달가워하지 않았던 소설임에도 존 포드라는
유명감독에 의해서 영화화되었고, 당시 35세의 헨리 폰다가 주인공 톰으로
출연하여 좋은 연기를 보여주었습니다. 이 영화는 아카데미 감독상을 받았는데
당시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걸작 '레베카'와 경쟁을 하였고, '레베카'는 작품상을
'분노의 포도'는 감독상을 나누어 가졌습니다. 존 포드도 아일랜드계이긴 하지만
미국의 상징적인 감독으로 자리잡고 있었고, 영국에서 막 넘어온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에게 일종의 텃세가 적용할 수 있었기 때문인지 작품상을 가져가는 영화가
거의 감독상을 함께 수상하는 당시 아카데미상의 경향에도 불구하고 감독상은
존 포드에게 수여되었습니다. '레베카' '분노의 포도' 모두 어느 영화가 상을 받아도
손색이 없는 40년대를 대표하는 걸작입니다. 사회적인 문제를 다룬 '분노의 포도'가
아카데미 상을 받기에는 좀 더 유리한 장르일 수 있지만 워낙 '레베카'에서 보여준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빈틈없는 연출도 높이 평가되기 때문에 어느 한쪽으로
손을 들어주기 쉽지 않은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헨리 폰다 외에 엄마 역의 제인 다웰도 좋은 연기를 보여주었는데 주연상 후보로
올라도 할말없는 비중이었지만 아카데미 조연상을 수상했습니다. 역시 경쟁을
한 강력한 배우는 '레베카'의 주디스 앤더슨이었는데 주디스 앤더슨은 새로 온
안주인 조안 폰테인을 집요하게 괴롭히는 악덕 하녀 역으로 빈틈없는 차가운
연기를 보여주었는데 아깝게 제인 다웰에 밀렸습니다. 이래저래 '레베카'가
'분노의 포도'에 밀린 결과입니다.
아카데미 이야기를 좀 더 하자면 남우주연상은 '분노의 포도'에서의 헨리 폰다,
'레베카'의 로렌스 올리비에가 모두 후보에 올랐는데 수상은 의외로 '필라델피아
이야기'의 제임스 스튜어트가 가져갔습니다. 굳이 의외라고 표현한 이유는
'필라델피아 이야기'는 사실상 캐리 그랜트와 캐서린 헵번에게 비중이 맞추어진
영화이며 제임스 스튜어트는 그들의 들러리 같은 역할이었는데, 의외로 수상은
그가 하였습니다. 제임스 스튜어트는 그 이후 미국을 대표하는 명배우로
승승장구하게 됩니다. 같은 해 이렇게 아카데미에서 경합을 벌인 헨리 폰다,
로렌스 올리비에, 제임스 스튜어트 이런 세 거물배우들은 모두 아카데미 주연상
수상배우로 역사에 남았는데 헨리 폰다는 유작인 '황금 연못'으로 극적인 수상을
하고 얼마 뒤 타계했습니다. 무성영화의 전설로 취급받는 찰리 채플린도 주연상
후보에 올랐는데 '위대한 독재자'에서 였습니다. (개인적으로 후보자중에서
찰리 채플린이 가장 명연기를 보였다고 생각합니다.)
네오 리얼리즘 영화들의 궁상스럽고 현실적인 분위기에 비해서 40년대 헐리웃
영화들은 스튜디오 전성기 시절의 숱한 걸작들을 쏟아내며 세련되고 깔끔한
영화들이 많았고, 필름 느와르 영화라는 대표장르로 도시의 세련됨과 적막함을
동시에 표현하였는데 '분노의 포도'같은 장르는 당시 미국영화중에서 꽤 드문
내용이였습니다. 특히 메이저 영화로는. 그리고 이 작품은 40년대 미국영화의
대표적 걸작이 되었고, 존 포드 감독은 이듬해에도 '나의 계곡을 푸르렀다'라는
수작을 발표하면서 거장으로서의 확고한 지위를 확립합니다. 존 포드 감독이
이후에 서부극들을 참 많이 발표하며 다작의 연출을 했는데 '분노의 포도'나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같은 수준의 진실한 영화들보다 처지는 범작들이 의외로
많았다는 점도 개인적으로 그의 영화이력에서 아쉬운 부분입니다.
존 포드와 존 스타인벡, 그리고 헨리 폰다까지 미국 영화, 문학계의 세 거물들 모두에게 대표작이 된 영화입니다. 절망스럽고 궁상스런 내용이 영화내내 일관되게 흐르지만 이런 절망스런 현실 속에서도 작은 희망의 불씨를 키우는
좋은 대사가 말미를 장식하고 있습니다. 소설에서는 톰의 동생이 출산을 하고 새로 태어난 아기를 통한 희망적 내용으로 마무리되지만 영화속에서는 그 내용은 빠졌습니다. 명작소설을 각색한다고 해서 영화도 명화가 된다는 보장은 없는데
'분노의 포도'는 영국문학 '위대한 유산'과 함께 영미문학의 걸작을 영화화한 1940년대 작품중에서 영화도 걸작으로 남은 작품으로 문학의 명성에 걸맞는 체면을세워준 작품들입니다.
ps1 : 영화 종반부에 결국 경찰을 피해서 달아나는 톰이 어머니와 잠깐의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참 명장면이면서 의미있는 대사가 나옵니다. 오래전인
1940년 영화임에도 이 대사의 부분은 부자와 노동자의 상관관계가 여전히
존재하는 지금 시대에도 적용될 수 있는 대사입니다.
ps2 : 돈이 모자라서 샌드위치를 못 사고 식빵을 사가는(그것도 주인의 배려로)
톰의 아버지, 그를 따라온 어린 두 남매가 측은하여 일부러 캔디를 싼 가격에
내어주는 장면이 인상적입니다.
ps3 : 이 영화에 등장하는 가난한 이주 노동자들은 모두 백인들인데, 19세기
노예해방 이후에 자유를 얻은 대신 스스로 생계를 해결해야 할 상황이 된
흑인들을 얼마나 오랜 세월을 힘들고 참혹하게 살았을까요.
ps4 : 유명한 '홍하의 골짜기'가 주제곡으로 내내 흐릅니다.
[출처] 분노의 포도(The Grapes of Wrath 40년) 소설만큼 영화도 걸작|작성자 이규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