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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정의 말에 윤호가 어쩌지 못하고 입을 다문다. 이곳으로 오기 전 만일의 상황을 대비하여 자신들을 이곳으로 안내한 사내가 생각해낸 방도였다. 제 아무리 흉악한 도적과 사기꾼이라 하나, 결국은 먹고 살기 힘들어 그리 된 서민이고 백성들이니. 아이를 가진 여인과 그 서방을 어쩌지는 않을 것이라 하였다. 아니나 다를까. 사내의 말대로 연정이 임신한 시늉을 하자, 노름꾼들이 이내 관심을 끊고 다시 패를 집어 들었다. 다만 주모 여인은 조금 전과는 완전히 얼굴을 바꾸어 떨떠름한 얼굴로 말하였다.
“부부가 묶을 방말이오? 있소. 따라오시오.”
그리하여 연정과 윤호가 함께 주모를 따라 방으로 향했다. 작은 방 안에는 아무 것도 없이 그저 두 사람이 누울 수 있는 크기의 침대 하나가 있는데, 이불이 남루하여 거적때기인가 싶었다. 방을 안내해준 주모가 가고, 두 사람을 안내해준 사내가 목소리를 낮추어 말하였다.
“연정아. 어쩔 것이냐? 아무래도 너도 예서 있어야 할 것 같은데…….”
그러더니 요상한 눈으로 윤호를 노려보았다. 이에 윤호가 기 막혀 하는데, 연정이 말한다.
“괜찮습니다. 공자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런 인품이 아니십니다.”
“흐음…….”
남자는 한 번 더 미심쩍은 눈으로 윤호를 보더니 말하였다.
“허면, 내 가보마.”
“이리 신경을 써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아니다. 니가 때마다 가져다주는 것들이 아니면, 우리 식구는 진즉에 굶어 죽었을 것이야.”
그렇게 사내가 가고 방문이 닫히자, 고요한 방 안에 닫힌 문 너머로 간간히 노름꾼들의 소리가 들려왔다.
“허면, 네가 예서 자면 되겠다.”
윤호가 연정에게 침대를 가리키자 연정이 물었다.
“대장군은 어쩌시려고요?”
“나는 장수이다. 전쟁 중 흙바닥에서도 눈을 붙여보았다. 그러니 걱정 말거라.”
그리고는 바닥에 그대로 드러누웠다. 이에 연정이 당황하여 머뭇거리다 천천히 걸음을 옮겨 침대 위로 올라앉았다. 문도 달려 있지 않은 창으로 달빛이 서슬 푸르게 비추고 있었다. 연정은 그렇게 앉아 달을 보다가 다시 고개를 돌려 윤호를 보았다. 눈을 감고 있는 얼굴이 반듯했다. 노름꾼의 말처럼 남루한 옷을 입었다고 가려질 태가 아니었다. 그런 이가 이리 허름한 먼지투성이의 바닥에 아무렇지 않게 누워 잠을 청하는 것을 보니, 어색하고 이상하여 웃음이 났다.
“색주가(色酒家)입니다.”
연정의 목소리에 윤호가 눈을 떴다.
“그 여인 말입니다.”
“그렇구나.”
“아십니까? 기생도 관료들처럼 급이 있습니다.”
“그렀느냐?”
윤호가 연정을 보며 묻자, 연정이 고개를 끄덕인다.
“이년과 같은 기생은 일패라 하여, 서른이 넘으면 시집을 가거나 혹은 기생 어미가 되지요.”
이는 윤호도 알고 있는 터였기에 그저 말없이 연정을 바라보았다. 달에 비춘 새하얀 얼굴에 서슬 푸른 빛을 띠었는데, 그것이 진기하여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은근자는 이패라 하며, 기생 출신으로 은밀히 몸을 파는 이들을 말하지요. 삼패는 탑양오리라 하고 접객을 하는 이들이지요. 그 아래로 화랑유녀가 있고, 여사당패가 있고. 그리고 가장 아래가 색주가입니다.”
한남국은 정조(貞操)를 중시 여기는 나라였다. 황제조차도 마음에 든다 하여 무조건 여인을 품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하여 사내가 첩을 들임에 있어서도 절차와 법도를 중시하였는데, 부인이 혼인하고 두해가 넘게 아이가 없을 경우에는 첩을 들일 수 있었고, 또한 그때에도 부인의 동의가 필요하였다.
황제는 황후와 혼인 후 두해 동안 합방이 없었기에 화비를 후궁으로 맞을 수 있었고, 같이 이치로 승상 또한 화향의 행수를 어여뻐 하여도 쉽게 첩으로 맞을 수가 없었다. 그러니 일패기생 이하로는 한남국에서는 사람대접을 받기 힘든 이들이었다. 윤호 역시 그런 이들은 응당 그런 대접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였다.
과연 그러한가.
이 밤. 갑자기 그동안 자신이 응당 옳다고 생각하였던 근본이, 문득 의심스러워졌다. 인간이 사는 일과 존엄을 지키는 일. 그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절박한 순간이 왔을 때, 어떤 것을 선택하는 것이 옳은가. 서책에 적힌 대로, 누군가의 가르침대로 죽는 순간 까지 존엄을 지키며 사는 것이, 정녕 옳은 것인가.
내 부친이 그리 어머니를 보내었던 것처럼?
“이년도.”
연정의 목소리에 깊은 생각에 빠져 있던 윤호가 번뜩 하여 다시 연정을 보았다. 서슬 푸른 달에 비춘 얼굴이 어쩌면 그리도 처연한지. 그럼에도 분명 그 미색은 감추어지지 않았다.
“어쩌면 제 기생어미와 같은 말년을 보내게 될지도 모르지요.”
연정이 윤호를 보았다.
“대장군은 어떠하십니까?”
“…….”
“대장군의 말년은, 홍복(洪福)이 가득하겠지요.”
연정이 사르륵 미소를 지어보여도 윤호는 웃을 수 없었다. 그 웃음이 눈물보다 처연하여…….
18.
연정이 잠든 것을 확인한 윤호가 조용히 방에서 나와 탁자에 앉아 술을 시켰다. 노름꾼들도 다 자러 가고 늙은이들 둘이 남아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이 사람, 천천히 들게. 그러다 골로 가는 수가 있어.”
한 노인이 마주 앉은 이의 잔을 내리누리며 말하자, 그가 손을 치워내며 말하였다.
“내 그러고자 이러는 걸세. 더 살아 무엇하겠노?”
“그것도 그러네. 마시고 죽어버리세!”
“망할 놈의 황제도 죽어버리라지!”
그 말에 윤호는 화들짝 놀라 하마터면 검을 빼어들 뻔하였다. 아무리 배우지 못한 미천한 중생이라 하나, 감히 황제를 능멸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어처구니가 없고 황망하여 손이 떨려 술잔을 들 수도 없었다. 윤호가 감정을 추스르기 위해 미동 없이 탁자 위에 놓인 술잔만 보고 있으니, 그 노인 중 하나가 윤호를 보며 말하였다.
“이보시게, 젊은이.”
“.....?!”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윤호가 고개를 돌리니, 노인이 인상 좋은 얼굴로 웃으며 손짓하였다.
“그리 외롭게 혼자 있지 말고, 이리 오시게.”
“…….”
윤호는 잠시 눈을 내리고 생각했다. 황제를 능멸한 이들이다. 당장에 목을 쳐야 할 극악무도한 이들이다.
목을 쳐야할…….
“…….”
윤호가 시선을 들어 노인들을 보았다. 여기 저기 찢기고 구멍이 난 거적 데기 같은 옷을 입고 안주도 없이 술만 덩그러니 놓여 있는데, 한 눈에 보아도 저 술 한 병치 밖에 돈도 없을 듯 했다.
“그러지요.”
대답하며, 윤호가 제 자리에 있던 술병을 들고 노인들과 합석하였다.
“어디서 왔소?”
노인이 물으니, 잠시 고민하던 윤호가 대답하였다.
“초이란 국경 근처에서 왔습니다.”
“그 먼데서 예까지 왔소? 하기야, 그곳은 망자의 터가 되었다지.”
“……예.”
노인의 말에 윤호가 조금 뜸을 들이다 대답하였다.
“황제가 얼마나 원망스럽겠노.”
노인의 말에 의아하였으나, 표정을 감추기 위해 눈을 내리고 잔을 들어 술을 한 모금 마시었다.
“그래도 그 쪽에 사는 이들은 초이란으로 물건도 팔고 하면서 그런대로 먹고 살았던 것 같은데, 초이란이 그리 망하였으니. 살 길이 없어졌지.”
“…….”
노인의 말을 윤호는 잠자코 듣고 있었다.
“서북도 그러해. 오랑캐라 하나, 그 쪽에 사는 이들은 그들과 적당히 협의하여 거래도 하고 장사를 하면서 그럭저럭 먹고 살았었는데 말이야. 황제가 오랑캐를 쫓아낸다고 전쟁을 해서는 그들하고 사이도 틀어지고, 거래로 사가던 이들이 약탈을 해가니. 살 수가 없어 고향을 버리고 떠나간다고들 하오.”
“중앙 도성에서는 지들끼리만 배불리 먹고 사니! 우리처럼 눈에 보이는 곳에 도성이 있어도 황제는 우리같은 것은 뵈지도 않는 게지!”
“…….”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에 윤호는 어쩔 줄을 몰라 그저 또 술만 들이켰다. 노인이 말한 초이란도 서북 정이도 모두 윤호가 했던 전쟁이었다.
“자네가 보기에는 대장군과 승상 중에 누가 더 나쁜 놈인가?”
“......?!”
윤호가 화들짝 놀라 노인을 보는데, 노인은 태연하게 술잔을 들이키고는 다시 윤호를 보며 말하였다.
“황제가 제일 나쁘고! 그 다음은 누구 같냐는 말이오. 황제랑 동조해서 여기저기 땅 놀이만 하는 승상이오. 아니면 황제의 명에 따라 땅을 따먹어 오는 대장군이오?”
“거 말해 뭐하나! 다 똑같지!”
마주 앉은 노인의 말에 윤호는 할 말을 잃고 황망한 얼굴을 했다. 목숨을 걸고 전장에 나갔었다. 매번. 매 순간. 이곳에서 생(生)을 마감할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전쟁을 했다.
무엇을 위하여?
굳게 믿어왔던 근본이 흔들리고 있었다.
+
“폐하, 기침하실,”
“쉿.”
내관이 문 앞에 서서 조용히 황제를 부르는데, 조용히 문을 연 황제가 내관을 향해 손가락을 들어 입술에 가져다대며 목소리를 한 것 낮추어 말하였다.
“알고 있으니, 조용히 물러나 기다리라.”
“예, 폐하.”
덩달아 내관도 목소리를 낮추고 속삭이듯 대답하였다.
“화비가 깨지 않도록 처소 궁인들에게도 단단히 이르거라.”
“예, 폐하.”
그렇게 내관이 물러나자, 다시 문을 닫고 침대로 올라온 황제가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는 화비를 바라보았다. 새근새근 내뱉는 숨소리마저도 고와서, 천상의 새가 노래하여도 이보다 고운 소리일까 싶었다. 뽀얗고 고운 어깨에 지난 밤 황제가 만들어낸 애정의 흔적이 가득하였다. 아플까 싶어 황제가 살짝 미간을 구기고 어깨를 쓸어보자,
“으응…….”
잠투정을 하며 황제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어허. 이를 어쩐다.”
황제가 작게 혼잣말을 하였다. 어서 일어나 오늘도 해야 할 일이 산더미 같은데, 품에 안긴 부인을 떼어 놓고 나갈 엄두는 도저히 나지 않았다. 황제는 그런 부인을 조심스럽게 품에 안고 붉은 자국이 가득한 어깨에 살포시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간신히 돌려 화비의 처소를 나섰다. 황제가 하루 일과 중 가만 먼저 해야 할 일은 태후 전에 문안인사를 가는 것이었다. 평소보다 조금 늦어 걸음을 서두른 황제가 태후 전에 도착하니, 황후는 이미 와서 태후를 마주하고 있었다.
“어마마마, 문인인사 드리옵니다.”
황제가 태후 앞에 예를 갖추니, 태후가 미소를 지으며 황제의 인사를 받아주었다. 그리고는 말하였다.
“간밤에 평안 하셨습니까?”
태후의 물음에 황제가 괜히 머쓱하여 슬핏 웃어보았다. 황제와 화비가 합방을 한 것을 태후가 모를 리 없었다.
“예, 어마마마”
황제가 애써 웃음기를 감추며 대답하니, 태후가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어서 황자가 태어나야 할 텐데요.”
“곧 안겨드리겠습니다.”
황제가 대답하니, 태후는 한 번 더 고개를 끄덕이며 웃어보았다. 황제가 나간 후 태후 전에는 황후와 태후만이 남았다. 태후는 조금 전과는 전혀 다른 차가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황자가 반드시 황후의 몸에서 나야 한다는 법은 없지요, 허나!”
태후가 앉아 있는 의자의 팔받이를 탁 소리가 나게 치며 분노를 표시했다.
“한남국의 황자입니다. 한남국의 피가 흘러야지요!”
“태후마마. 송구하옵니다.”
황후가 차분히 이어 대답하였다.
“하오나, 이제 화비도 한남국 사람이 아닌지요.”
“황후!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시는 겝니까?!!!”
태후의 진노한 목소리가 태후 전 밖까지 들려 궁인들이 잔뜩 몸을 떨었다.
“황제를 모시는 것 또한 황후의 소임임을 잊지 마세요! 황후로서의 소임을 게을리 하지 마시라는 겁니다!”
“예, 태후마마.”
“하이고!”
무슨 얘기를 하여도, 감정의 변화를 보이지 않는 황후의 모습에 질린 듯이 태후가 한 숨을 쉬었다. 태후 전에 물러난 황후는 긴 산책을 하였다. 황후를 따르는 궁인들은 황후의 기분을 헤아려 한 참을 뒤에서 걸었다.
“…….”
연못에 꽃잎이 떨어져 잔잔히 떠내려가고 있었다.
‘어째서 옷을 버리려 하니?’
‘이런 옷 입어도. 난 귀족이 아니니까.’
그 말을 하던 윤이 떠올라 황후가 슬핏 웃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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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재미있게 잘 보고 있습니다.^^
황후도 안쓰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