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싫다는 건데요?"
얼마전 그의 고백에 나는 미안하다는 말로 거절을 표했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바
로 지금처럼 그날도, 어제도, 오늘도 왜 자신과 만나기 싫으냐고 묻고 또 물으며
나를 곤란하게 만들고 있었다.
"Alvin씨야 말로 저한테 왜이래요? Alvin씨 정도면 굳이 싫다는 사람한테 이렇게
매달릴 필요없잖아요. Alvin씨 때문에 저도 지금 많이 곤란해요. 이제 그만 찾아
오세요."
그렇게 까지 말해도 소용없었다. 그는 매일매일 찾아왔다. 어느날은 그냥 앉아서
내가 하는 냥을 지켜보고만 있다갔고, 어느날은 원장님을 만나 한참 얘기를 나누
다 가는 날도 있었다. 또 어느 날은 저녁이나 점심을 같이 먹자며 무작정 나를 끌
고 맛이 좋기로 유명한 레스토랑 같은 곳에서 식사를 대접하기도 했다. 물론 그
런 날은 어김없이 진심으로 좋아한다고, 진지하게 만나보고 싶다고 자신의 마음
을 표현해왔다. 그렇게 지내기를 두 달 가까이. 그동안 미용실에도 크고 작은 일
들이 일어났다. 그중 가장 큰 일이었던 원장님과 정수혁씨의 스켄들로 한동안 시
끄러웠던 미용실이 조금 안정이 되었고, 오랜만에 나는 창가에 앉아 여유로움을
느끼며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여기서 뭐해요?"
갑자기 들려오는 원장님의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돌렸다. 아마도 방금 혜나씨 일
행을 배웅해주고 돌아오는 길인 모양이었다.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실
력만으로 지금의 자리에 오른 분. 비록 나보다 어리긴 하지만 원장님은 내가 존
경하는 분 중 한 분이다.
"아. 그냥 여유가 좀 되길래 커피 한 잔 하고 있었어요. 원장님도 한 잔 드려요?"
"아니요. 방금 마셨어요."
"그래요..."
나는 원장님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지만 끊임
없이 느껴지는 원장님의 시선에 다시 원장님을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하실 말씀 있으세요?"
"음... 뭐 하나 물어 보려구요."
"뭘 물어 보실려고 그렇게 뜸을 들이세요?"
조금 뜸을 드리시던 원장님이 곧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요즘 제 친구가 부원장님 따라다니죠?"
'역시...' 나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그저 생각지 못한 질문을 받은 냥 대
답했다.
"네? 아... 그 Alvin이라는 분?"
"네. 그 친구가 좀 힘들어 하길래. 제가 부원장님 이상형 물어봐 준다고 했거든요."
"아~. 그래서 그렇게 뜸을 들이신 거예요?"
"그것도 있고... 이유도 좀 알고 싶어서요."
"이유요?"
조금은 뜻밖의 질문. 나는 당황스러움을 감추려 노력해야만 했다. 아직은 아픈
기억이니까...
"이상하잖아요. 부원장님 같이 능력있고, 성격 좋고, 얼굴도 예쁘고, 친절하기
까지 한 사람이 애인이 없다는 게. 그리고 솔직히 Alvin 정도면 욕심 낼 만한 남
자잖아요..."
"풋... 제가 원장님 친구분 무시하는 것 같아서 기분 나쁘셨어요?"
"아니, 뭐... 그런 건 아니고..."
"저도 제 나름대로의 고충이 있어요. 원장님도 원장님 나름대로 고충이 있으실
테고, 박 선생은 박 선생대로, 강 선생은 강 선생대로의 고충이 또 있겠죠. 그런
것일 뿐이에요."
다시 떠오르는 씁쓸한 기억. 나도 한때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 역시
나를 많이 사랑해주었고 우린 서로 결혼을 약속했다. 하지만 그 사람의 부모님은
우리 사이를 심하게 반대했다. 내가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는 것이 문제였다.
내가 중학생 시절 술주정뱅이 아버지와 이혼을 하고 어머니는 혼자서 힘들게 나
를 키우셨다. 그런 어머니를 나는 단 한번도 창피하다고 생각한 적 없었다. 오히
려 나는 그런 상황에서도 나를 올곧게 키워주신 어머니를 가장 존경하게 되었다.
그런 어머니를 문제삼는 그 집안을 나 역시도 받아드릴 수 없었고, 결국엔 내가
먼저 이별을 고했다. 평생 나 하나만을 바라보시며, 나 하나만을 위해 노력하신
분. 그분을 욕되게 하는 사람이라면 아무리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나는 함께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 아픔은 쉽게 치유되지 않았다. 이미 많은 시간이 흘
렀는대도... 이렇게 겁이 나니까.
"그 Alvin이라는 분은 어떤 사람이에요?"
다시 떠오른 씁쓸한 기억에 빠져있던 내가 애써 밝은 척 말을 건냈다. 문뜩 그 사
람에 대해 아주 조금 궁금해졌다.
"네? 아, 좋은 사람이죠! 내 친구라서가 아니라, 객관적으로 봤을 때도 어디 내놔
도 빠지지 않을 사람이에요. 자기가 일 하는 분야에서 확실하게 인정 받고 있고,
외모도 그 정도면 준수하고, 성격은 일 할 때를 제외하면 좋은 편이에요. 솔직히
일 할 때는 좀 많이 까탈스럽거든요."
"그래요?"
"그럼요. 얼마나 까다롭다구요. 그치만 뭐, 그게 매력이기도 하죠. 자기 분야에서
만큼은 다른 사람 못지 않은 열정이 있다는 거니까."
원장님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일에 열정적인 사람. 나는 그런 사
람을 매우 좋아한다. 그 역시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그래서 그를 사랑하게 되었
던 거니까...
"일 할 때를 제외하면 성격은 좋은 편이에요. 대인 관계도 원만한 편이고. 그치만
좋아하는 건 많지 않아요."
"왜요?"
"글쎄요. 그냥, 뭔가를 좋아하는데 굉장히 신중해요. 사람도 마찬가지고. 하지만
그런 대신에 뭔가를 좋아하게 되면 계속 좋아하죠."
"으음-."
"저요. Alvin이 여자한테 이렇게 적극적인 거 처음 봐요."
"......?"
왠지 그에 대해 하나씩 알게 된다는 게 기분 좋았다. 그래서 고개까지 끄덕이며
원장님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을 때 쯤 원장님의 뜬금없는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원장님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Alvin을 안지 올해로 7년 짼데 여자한테 관심을 갖는 것도 처음 봐요, 저는."
"......"
"강요 할 순 없겠지만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봐요. 저는 제가 좋아하는 두 사람이
잘 됐으면 좋겠어요... 잘 어울릴 것 같기도 하고."
"......알았어요. 진지하게 생각해볼게요."
"와-. 정말이죠?"
원장님의 진지한 표정에 나는 순간적으로 긍정적인 대답을 하고 말았고, 그런 내
답변에 만족한 듯 원장님은 너무나 환한 웃음을 지으며 기뻐했다. 그리고는 한결
마음이 놓인다는 듯 그제서야 일과 관련 된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셨다. 역시 마음
따뜻한 원장님은 일 보다 친구가 더 걱정되었던 모양이다. 맨 마지막엔 잘 생각
해보라는 말도 잊지 않고 해주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