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시문 (가)와 비교하여 볼 때 제시문 (나)의 가장 큰 특징은 인간에게 있어 가장 필요하고 중요한 것이 사회성임을 강조하고, 그 사회성을 매우 중요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가)는 사회성이 없는 인간을 "물질적 아", "육체적 아", "가아", "소아"로 표현함으로써 진정한 인간인 "정신적 아", "영혼적 아", "진아", "대아"와 비교하고 있다. 사회성이 없는 "소아"는 오직 생물학적인 의미에서의 인간으로 단순히 100년 정도를 살다가 사라지는 유기체일 뿐이다. 그에 반해 "대아"는 영원불사하는 존재로 그 육체가 사하여 사라진다 하더라도 그의 영혼은 영원할 수 있다고 한다. 제시문이 국가를 위해 눈물을 흘리는 진아를 높이 평가함도 국가라는 공동체를 구성할 줄 아는 인간은 사회성이 있음을 그 전제로 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생각이 얕은 사람은 하나의 목표를 위해 협동하는 꿀벌이나, 개미 따위의 동물들에게도 인간과 같은 사회성이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들에게도 인간의 사회인 국가공동체의 통치자 역할을 하는 여왕벌이나 여왕개미가 있고, 일정한 질서에 따라 생활해야 한다는 규칙이 있으며, 종족의 유지와 번식이라는 일정한 공동목표가 있기 때문이다. 제시문 (가)를 보면 어떤 동물은 자신의 종족을 보존하기 위한 방법이 인간보다도 훨씬 완벽하게 갖춰져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측면만을 보고 동물에게도 인간과 비슷한 사회성이 있다고 판단하는 사람은 중요한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동물의 사회성은 본능에 기반한 것임에 반해 인간의 사회성은 이성에 기반하는 것이라는 점이 그것이다.
우리는 인간의 무리를 일컬어 "사회"라고 하지 동물의 무리를 보고 "사회"라는 용어를 사용하지는 않는다. 동물의 무리를 지칭할 때에는 "군집"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아마도 그 이유는 앞서 설명한 이성에 기반한 인간의 사회성을 높이 평가하고, 그를 동물과의 차이점으로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동물의 군집이 일정한 생존의 틀을 갖추고 살고, 대단히 과학적인 방식으로 그들의 종족을 보존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그들의 유전적 본능을 그 바탕으로 한 행동일 뿐, 그들이 생각하고 판단하는 이성적 능력을 가져서 그러한 행동을 한다고 보기는 힘들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보아 인간의 사회성이란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이성을 바탕으로 종족유지와 생존이라는 단순한 목표뿐만 아니라, 그보다 한단계 높은 생활을 할 수 있게 해주는 기본 바탕이 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러한 인간의 사회성은 그들의 과거에 살았던 사람들과 그들의 업적을 기억하고 미래를 준비할 수 있게 하는 역사라는 것을 존재하게 해 주었다. 단순히 본능에만 충실해서 한평생을 사는 동물은 그 세대가 거듭하는 동안에도 끊임없이 똑같은 행동만을 반복한다. 따라서 그들은 그들의 윗세대가 했던 행동들을 한치의 오차도 없이 반복하고 있다. 그들의 과거란 현재와 똑같은 것이고, 미래 또한 천만년전의 과거와 똑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이성에 기반한 사회생활이라는 것이 있어서 세대를 거듭할수록 그 생활상이 달라지고, 따라서 현세대의 앞세대인 선조들의 업적이나 흔적들이 그 자손들의 기억에 의해 전해지게 된다.
중간고사를 끝내고 해운대로 엠티를 갔다왔다. 인적이 드문 새벽녘에 모래사장에 나가 언젠가 들은적이 있는 해운대라는 지명의 유래에 대해 생각했다. 해운대라는 지명은 신라말 사람이었던 최치원이 남긴 것으로, 이점이 인간이 이성을 가진 존재라는 점을 한번 더 생각하게 해 주었다. 최치원이라는 인간이 이성에 기반한 사회성을 가진 인간이 아니라 동물 군집의 일원이었다면, 그는 해운대 해수욕장에서 자신의 군집을 위해 먹이를 찾아 나르거나, 젖은 모래사장을 깊게 파 그 구멍으로 알을 낳았을 것이지, 그 절경에 감탄하여 바다와 구름을 뜻하는 해운대라는 지명을 남기지는 못했을 것이다. 또한 그 지명을 수세대를 거듭하는 동안에도 기억하여 사용하는 일은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군집의 일원이 지은 지명 따위를 유전자에 새겨 그를 그 후손들이 본능적으로 알 수 있도록 할 만한 가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위에서 살펴본 인간과 동물의 생존방식을 비교해보면 인간이 매우 이기적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동물의 군집은 공동목표인 종족보존을 위해 자신의 일생을 헌납하지만 인간은 각자 개개인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삶을 살기 때문이다. 홉스가 인간사회를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의 장으로 보았을 정도로 인간은 서로를 경계하고, 만인으로부터 자신의 이익을 얻으려하는 이기심을 갖고 있다. 그러나 메트 리들리의 "이타적 유전자"를 읽고 이러한 생각이 조금 바뀜을 느꼈다. 리들리는 동물의 협동생활로 인한 이타심은 그의 유전자가 보내는 정보때문에 생기는 것이지 그 동물자체가 이타적인 것은 아니라고 했다. 이점은 동물이 이성을 가지지 않는다는 점을 또다시 증명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그는 인간도 이타적으로 보면서, 본성은 한없이 이기적인 인간이 어떻게 이타성, 상호부조, 협동성과 같은 덕목을 지닐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이는 인간의 이성적 측면을 부각시키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정리하건데, 인간에게는 동물과는 다른 인간만의 사회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동물군집에도 사회성과 비슷한 속성이 있기는 하나 그것은 그들의 본능에 기인한 것이지 그들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이성적인 사회성을 갖는 것은 아니다. 물론 인간에게도 종족번식이라는 동물적인 본능이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인간은 그러한 본능적 행동 이외에도 이성에 바탕을 둔 여러 형태의 사회생활을 하며, 인간의 내재적 본성인 이기성을 제어하고 타인을 배려할 줄 아는 이성을 갖는다. 이는 인간과 동물과의 가장 큰 차이점이며 제시문 (가)에서 보여주는 동물사회의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생존방식을 인간사회의 사회성과 같은 것으로 인정할 수 없게 하는 중요한 이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첫댓글 [3] 참신한 생각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3) 최치원이 인간이길 정말 다행이네요.. ^^;; 좋은 의견에 ㄳ
[3] 수고하셨습니다
[3] 수고하셨습니다
[3]조나단 리빙스턴 시걸... 우화적인 표현이지만... 대비될 수 있는 소재인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