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무생각' 박태준의 첫 사랑 이야기
사랑이 두렵고 설레고 심난한 것은 ‘맨 처음 고백’이 어렵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아름다운 가곡 ‘동무생각’을 고향 대구를 그리워하는 생각으로 오해를 한다. 요즘 청소년들은 사랑도 가볍게 한다.
그리워하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해 가슴에 묻어두고 끙끙 앓는 이도 별로 없다.
가곡 ‘동무생각’( 훗날 동무라는 말 때문에 ‘思友’로 고침)이 아름다운 것은 한남자의 애틋한 사랑 때문이다.
“박태준 선생님의 이야기는 언제나 고운 詩처럼 아름답습니다.”
1920년대 마산 창신학교,
한 학교 음악선생 박태준은 국어선생 이은상과 함께 노비산 언덕에 앉아있었다.
암울한 조국의 현실은 둘의 마음을 어둡게 하였다.
동무생각 노래비가 있는 청라언덕(사진-인터넷에서)
은상이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짓궂은 표정을 지으며,
“그런데 박 선생님, 선생님의 첫사랑은 어떤 분이셨나요?”라고 물었다.
박태준은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첫사랑은 뭐, 한번 제대로 이야기도 못했는걸요.”
“첫사랑이 다 그렇지요. 그러니까 영영 가슴속에 박제되는 사랑이고요.”
“제가 다니는 계성학교 가까이에 있는 신명학교의 여학생이 있었어요.
함께 교회에 다녔는데, 한번은 그 여학생이
자두를 한바구니 가져와 교회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었어요.
전 그 자두가 저한테까지 올까하며 가슴을 조이며 있었지요.
그러다 결국 나는 화장실로 달아나 버렸어요.
혹시 자두를 못 받게 되면 그 자리에 없었으니 받지 못했을 거라 위안하려고요,
그 후 돌아오니 오르간 위에 자두 두 알이 놓여 있었어요.
깨끗한 손수건이 자두 위에 덮여 있었지요.
그 자두를 한참 동안이나 책상위에 두고 날마다 바라보았어요.
더는 두고 볼 수 없을 만큼 썩고 말라버렸을 땐
꼭지를 따서 그 꼭지를 습자지에 싸서 보관했지요."
교회로 가려면 청라언덕을 지나가야 했어요.
여학생은 저녁 예배를 드리러 그 길을 지나가곤 했는데,
전 오르간 연습을 하다가도 그 시간이 되면
언덕으로 가 그 여학생이 지나가는 걸 바라보았어요.
손수건을 전해주어야 하는 데 그럴 수가 없었어요.
언젠가는 다가올 그 시간을 아껴두고 싶었거든요.
어느 날 굳은 결심을 하고 그녀를 기다렸어요.
‘자두 고마웠어요.’라는말을 수백 번도 더 연습했지요.
라일락 이파리가 잔뜩 무거워진 칠월 하순이었어요.
그 즈음 그런 말이 유행하고 있었어요.
‘사랑의 맛을 알려면 라일락 이파리를 씹어보라'라는 말이.
문득 저는 그 맛이 궁금했어요.
사랑의 맛이 궁금해졌던 것이지요.
여느 때처럼 그미를 언덕위에서 숨어 기다리다가,
손을 뻗어 연한 라일락 잎 하나를 떼서 잎에 넣어보았는데,
정말이지 죽을 것 같은 맛이었는데 뱉어버릴 수가 없었어요.
뱉어버리면 나의 사랑도 다 저 멀리 뱉어져 버릴 것 같았거든요.
그 때였어요.
멀리서 그녀의 신명여고 교복이 보였어요.
기다림은 그렇게 길었는데, 그녀의 걸음은 어찌나 빨랐던지
내가 이파리를 다 씹어 삼키기도 전에 그 녀는 제 코앞에 마주 서 있었어요.
아직도 입안에 가득한 라일락 잎 새 그 맛 때문에
혀가 얼얼하고 얼굴은 붉으락푸르락했지요.
그 때 제가 무슨 말을 한 줄 아세요?
바보스럽게도 ‘라일락 고마웠어요.’라고 말하고 말았어요.
어휴 그렇게 자두를 골백번 연습했는데 라일락이 고맙다니요. "
사진 출처 - 인터넷에서
순진한 아이처럼 귓불이 붉어진 태준을 바라보며 은상은 배꼽을 잡고 웃었다.
“아이고, 도대체 그 이파리 맛이 어땠게요?”
“그건 이 선생님이 직접 맛보셔야 압니다.
사랑의 맛이 그런 것이라는 걸 절감하게 될 테니까요.”
그리고 태준은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 그 여학생이 어떻게 한 줄 아세요? 절 보며 웃었답니다.
제게 눈을 맞추고 빙그레 웃었답니다.
그 후 그녀는 말 한마디 없이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버렸어요."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은상이 갑자기 생각난 듯 수첩을 꺼내 무언가 끄적이기 시작했다.
“박 선생님, 선생님 곡에다가 그 여학생의 이야기를 담으세요,
그러면 그 소녀와의 사랑을 노래 속에서나마, 이룰 수 있지 않겠어요.
제가 가사를 써 드릴 테니 곡을 붙여 보시겠어요?”
얼마 후 은상은 교무실에서 바라본 바다의 풍경과
태준의 고향 첫사랑 추억과 청라언덕을 담은 시를 태준에게 건네주었다.
받아든 태준의 눈동자가 따스해지는가 싶더니 어느새 촉촉이 젖어들었다.
“정말 아름다운 노랫말이군요.”
글 - 신광조 ·
【결혼을 앞둔 내 딸 申 帥(수)에게 보내는 네 편의 사랑에 관한 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