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 禪의 종류 種類와 정의 正義 불교 佛敎의 수행법 修行法하면 누구나 참선 參禪을 떠올린다. 선 禪은 언급했던 수행법 修行法 과는 차이가 있다. 물론 간경 看經 염불 念佛 주력 呪力 등을 통해서도 선 禪에 들어 설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이 자력과 타력의 요소를 지니고 있다면 지금부터 언급하는 선 禪은 철저히 내부 지향적 이며 자력적 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밖을 향해서 무언가를 간구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돌이켜 비춘다는 데 선 禪의 특징이 있다. 참선 參禪이란 선 禪에 참입 한다는 뜻이다. 참입 參入 이란 마치 물과 우유처럼 혼연 일체가 된다는 의미로 선 禪에 깊이 들어 선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좌선 坐禪 이란 앉아서 선 禪에 드는 것을 말 하는데 우리 나라에서는 보통 선 참선 參禪 좌선 坐禪을 구분하여 않고 있다.
그 이유는 앉아서 선 禪에 드는 모습이 참선 參禪의 대표적인 유형으로 굳어졌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 나라에서 선 禪 이라고 하면 조사선 祖師禪이니 간화선 看話禪을 떠올리는 이유도 그것들이 참선 參禪의 전통적인 형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 禪은 이보다 훨씬 넓은 개념이다. 선 禪은 산스크리트어 드야나 dhyana와 팔리어 쟌나 jhana 를 중국에서 선나 禪那 혹은 선 禪으로 음역한 것이다. 한국, 중국, 일본이 모두 선 禪으로 표기 하지만 우리 나라에서는 선 禪으로 중국은 찬으로 일본은 젠으로 각각 다르게 읽고 있다. 드야나 라는 말은 사유수 思惟修를 뜻한다. 사유 思惟 하면서 닦아 간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여기서의 사유 思惟는 어떤 사태에 직면해서 그것을 분석 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알수없는 마음을 모름지가 모아 집중해 들어가며 닦는 것이다. 이러한 사유 思惟 과정이 깊어지다 보면 마음이 한 가지 대상에 집중되어 안과 밖이 전일한 생태에 이른다. 외부의 어떠한 소리나 변화에도 흔들리지 않고 나와 대상이 온전하게 하나가 된 상태 그것을 삼매 參昧 또는 정 定이라고 부른다. 마치 맑은 거울과 같은 모습 한 점 티끌도 없는 잔잔한 물과 같은 모습이다. 그러한 물 속에는 모든 것이 그대로 투영되어 나타난다. 선 禪은 이렇게 어느 한 가지 대상에 집중해 들어가 삼매의 상태에 이르러 마음의 깨끗한 모습을 보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에는 그 마음의 본래 자리로 들어가는 것이다. 바로 자성 자리를 밝히는 것이며 참나를 보는 것이다. 내가 누구 인지를 보는 것이다. 그래서 두려움 없이 걸림이 없이 막힘이 없이 행복하고 평화롭게 사는 것이다. 선 禪의 종류는 조사선 祖師禪 간화선 看話禪 묵조선 默照禪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 밖에 위빠사나 대승 불교의 관법 수행도 선 禪의 일종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태국, 스리랑카, 미얀마 등 동남 아시아의 남방 불교 권에서는 위빠사나가 한국을 비롯한 중국 일본 등 북방 불교 권에서는 조사선 祖師禪 간화선 看話禪 묵조선 默照禪 등이 실천되고 있다. 일반 적으로 선 禪이라고 하면 이 조사선 祖師禪 간화선 看話禪 묵조선 默照禪을 지칭하며 이것들이 선종의 주요 흐름을 형선하고 있다. 위빠사나는 이러한 선 禪과 구별하여 관법 觀法 이라고 한다. 위빠사나 에는 오정 심관을 비롯한 여러 종류가 있다. 대승 불교의 관법에는 일상관, 일몰관, 천태지관 등 다양하다. 선 禪도 간화선 看話禪 묵조선 默照禪 뿐만 아니라 염불선도 유행하고 있다. 앞서 언급한 간경 看經 주력 呪力 등도 선 禪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간경선 看經禪 주력선 呪力禪으로 자리매김 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대한불교 조계종에서는 간화선 看話禪을 핵심 수행법 修行法으로 삼고 있으며 여타의 수행법 修行法으로 삼고 있으며 여타의 수행법 修行法을 섭수 통합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 나라의 불교계는 염불 念佛 주력 呪力 간경 看經 대승 관법 등을 간화선 看話禪에 들어가기 이전의 기초 수행으로 정립할 수 있다고 본다. 위빠사나는 동남 아시아 및 구미에 널리 퍼져 있으며 근래 우리 나라에서도 수행 인구가 늘고 있다. 위빠사나는 남방 상좌부 불교 佛敎의 수행법 修行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초기 불교 수행의 원형적인 모습을 간직하고 있기도 하다. 위빠사나 에서 위 란 분리하다 쪼개다 관통하다 라는 의미이며 빠사나 는 관찰 식별 봄을 의미한다. 즉 어원적 의미를 분석해 보면 위빠사나는 꿰뚫어 봄 통찰을 뜻한다. 이것을 한자로 관 觀 혹은 관법 觀法 이라 번역 했다. 이 위빠사나와 어울리는 개념이 사마타 라는 말이다. 사마타 란 마음을 하나의 대상에 집중하는 수행으로 대상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위빠사나 수행을 위한 준비 단계이자 전제 조건이다. 사마타는 마음을 오로지 한 대상에 모아 집중해 들어가기 때문에 삼매에 들어 온갖 번뇌와 망상 분별 작용을 그치게 된다. 그래서 지 止 라고 번역한다. 다시 말해서 마음이 어느 한 대상에 집중 되어 선 禪에 들어 삼매 상태에 이른 것이다. 이를 선정 禪定이라 한다. 수행을 하면서 마음이 여러 가지로 흔들려 정신이 집중되지 않으면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없다. 마음에서 모든 분별 작용이 사라져 고요해 졌을 때 즉 사마타가 이루어 졌을 때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되는 위빠사나의 작용이 이루어 지는 것이다.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면 지혜가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사마타와 위빠사나 즉 지 止와 관 觀 선정과 지혜는 떨어질 수 없다. 그래서 지관쌍운 止觀雙運 성적등지 惺寂等持 정혜균등 定慧均等이라 한다. 마음이 지의 상태에 이르면 오락가락 흔들리는 마음의 동요가 사라지고 고요해 진다. 그 상태에서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관하는 지혜가 나온다. 이 사마타와 위빠사나에 의거한 대표적인 수행의 형태가 오정심관 五停心觀 이다. 오정심관 이란 다섯 가지 중생의 이 마음을 정지 시키는 관법 이다. 부정관 不淨觀은 우리 몸의 부정한 모습을 보는 것을 말 한다. 이것은 탐욕이 많은 사람들이 닦는 관법 이다. 물질적인 욕망과 애욕에 눈 먼 사람들은 우리들의 육체가 얼마나 더럽고 부질없는 모습 인가를 봄으로써 탐욕을 멈추게 된다. 이 방법으로 우리들이 애지중지하는 육신의 덧 없음과 더러운 모습을 관하는 것이다. 자비관 慈悲觀은 사람들이 성내고 다투는 마음을 그쳐 자비로운 마음을 내게 하는 것이다. 자기 마음에 거슬리는 순간적인 불쾌감을 참지 못해 우리는 무심코 화를 내게 되고 그 결과 인간 관계가 불편해 지고 신뢰가 깨지며 싸움과 분쟁이 일어 난다. 상대방을 괴롭힐 뿐만 아니라 그로 인해 결국은 자신의 마음도 괴롭다. 이러한 성내는 마음을 뒤집으면 자비가 된다. 자비심으로 화내는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다. 인연관 因緣觀은 욕망과 화보다 더 근본적인 인간의 번뇌는 어리석음 이다. 이 어리석음으로 인하여 사태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욕망을 일으키고 화를 내는 것이다. 이러한 어리석은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으로 인연 따라 생기고 사라지는 이치를 깊이 관찰하면 모든 것을 고정된 관점에서 보고 집착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난 지혜가 열리게 된다. 이와 관련하여 계분별관 界分別觀 이라는 관법도 있다. 계분 별관까지 포함하여 오정심관 이라고 하지만 이 계분 별관과 인연관이 유사한 까닭에 계분별관 대신 불상관을 든다. 불상관 佛相觀 이것은 부처님의 자비로운 모습을 관하여 중생의 업장을 다스리는 관법 이다. 부처님의 원만한 상호를 관함으로써 그 결과 부처님의 모습이 내 머릿속에 명확하게 각인되어 나의 중생업이 소멸되고 부처님을 닮아가게 되는 것이다. 수식관 數息觀은 들어가고 나가는 숨을 관찰 한다고 해서 입출식념 入出息念 이라고도 부른다. 주로 마음이 산란한 사람들이 닦는 것으로 자신의 마음을 안정 시키는 역할을 한다. 이 밖에 위빠사나에서는 몸과 마음을 관찰하는 사념처관 四念處觀도 중요시 한다. 조사선 祖師禪은 여래선 의리선과 함께 삼종선의 하나로 불립문자 不立文字 교외별전 敎外別傳 직지인심 直指人心 견성성불 見性成佛을 표방하는 육조 六祖 혜능 慧能 하의 남종계의 선 즉 남종선 南宗禪을 말한다. 이 조사선 祖師禪은 일반 적으로 중국선 中國禪을 가리키는 대명사로도 쓰이고 있는데 조사 祖師란 선종에서 불 佛에 대신하는 이상적인 인격자 이다. 조사선 祖師禪 이라는 호칭이 정착하게 된 것은 조사선 祖師禪의 계보라고 할 수 있는 보림전 寶林傳 801년 이 등장한 뒤의 일이다. 조사선 祖師禪 이라는 말을 최초로 사용한 이는 혜적 慧寂으로 추정되고 있다. 혜적은 동문인 지한 智閑에게 자네는 다만 여래선을 얻었을 뿐 아직 조사선 祖師禪을 체득 하지는 못했다고 하였다. 종밀 宗密은 선을 오종으로 나누어 외도선 外道禪 범부선 凡夫禪 소승선 小乘禪 대승선 大乘禪 여래 청정선 如來淸淨禪 여래선 如來禪이라 하고 이 중 여래청정선이 달마가 전한 것으로 최상선 最上禪 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후세의 선자 禪者는 종밀의 여래선도 또한 이 理에 매달려서 참된 선을 보인 것은 아니라 하고 진선 眞禪을 전한 남종선 南宗禪을 조사선 祖師禪 이라고 이름하며 이를 여래선의 위에 놓은 것이다. 마조 馬祖의 즉심시불 卽心是佛과 평상심시도 平常心是道는 조사선 祖師禪의 기본 사상이 되며 임제 臨濟에 이르러 조사선 祖師禪의 전성 시대를 이루었다. 이러한 조사선 祖師禪은 우리 나라에서도 크게 융성 하였다. 신라 말 고려 초에 개산된 구산선문 九山禪門도 거의 남돈선 南頓禪 계통이다. 조사 祖師인 진귀 眞歸가 석존의 스승 이라는 진귀 조사설 眞歸祖師說까지 있으며 천책 天頙의 선문 보장록 禪門寶藏錄은 조사선 祖師禪 사상을 크게 부각 시키는 데 공헌 하였다. 그 뒤 선교 양종 속에서 격외선 格外禪 중심의 조사선 祖師禪 풍이 차츰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조선 후기에는 선을 의리선 義理禪 여래선 如來禪 조사선 祖師禪의 삼종 선 禪으로 구분하고 선문의 시비가 일기도 하여 조사선 祖師禪이 한국의 선풍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조사선 祖師禪 참선의 진정한 의미는 태고적 부터 자리 잡고 있는 본래 부처로서의 내 마음 자리를 밝히는데 있다. 이 본래 부처로서의 참나 는 어느 누구에게나 갖추어져 있으며 허공처럼 청정하고 한계가 없어 풍진에 물들지 않고 손상되지 않는다. 어떠한 가식과 꾸밈도 없고 인위적인 발자취 조차 남기지 않는다. 삼라 만상과 다투지 않고 서로 어울려 고요한 평화로움만 감돌 뿐이다. 세파에 찌들고 시달려 살아 가는 인생이라 할지라도 본래의 성품은 조금도 이지러 짐이 없다. 이것을 본래 마음 본래 면목 이라고도 하고 참 나라고도 하며 자성 청정심 自性淸淨心 이라고도 한다. 조사선 祖師禪은 이러한 자성 청정심에 관한 확고한 믿음에 출발 한다. 즉 내가 본래 부처요 완벽 하다는 데서 출발하는 수행이다. 따라서 완벽을 향해서 나아 가는 수행 즉 불완전한 나를 완전한 나로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미 부처임을 확인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인위적인 수행이 아니라 조작과 시비 분별을 떠나기 위한 수행이다. 이렇게 조사선 祖師禪은 조작과 시비 분별을 떠나기 위한 수행 이다. 이렇게 조사선 祖師禪은 우주 만물은 모두 본래 부처이며 이미 그대로 다 완성되어 있다는 본래 성불을 내 세운다. 자기 자신이 본래 부처이니 바로 이 자리에서 자기가 완성되어 있는 모습을 보는 것이다. 그래서 임제 선사는 외친다. 바로 네 얼굴 앞에서 위없는 참 사람이 왔다갔다 하고 있으니 그것을 보라. 이러한 임제 선사 같은 분을 조사 祖師라 한다. 조사 祖師란 석가모니 부처님 이래 불심을 체득하여 사람들을 깨달음으로 이끄는 수행력과 안목을 갖춘 선지식 을 이르는 말이다. 이러한 조사 祖師들은 부처님과 같이 위없는 깨달음을 보여 주며 조사 祖師 들의 위치는 부처님과 다를 것이 없다. 선 禪은 문자 이전의 참 마음을 곧바로 보여 준다. 선지식은 어떤 매개도 통하지 않고 제자의 눈앞에서 그것을 역력히 보여 준다. 제자가 그것을 보고 깨치는 순간 이심 전심의 미소가 번지는 것이다. 영축산 정상에서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꽃을 들어 보이자 오직 백발이 성성한 가섭존자 한 분만 그 뜻을 알아 듣고 고요히 미소 짓듯이 말 이다. 부처님께서 꽃을 들어 보인 것은 바로 본래 마음을 진리를 보여준 것이다. 그 마음을 보면 깨닫는 것이요 이러한 도리를 일러 자기 마음을 직관하여 성품을 보아 부처가 된다. 이것이 조사선 祖師禪에서 말하는 깨달음의 특징이다. 조사선 祖師禪에는 스승과 제자 사이에 오간 선문답이 많이 있다. 이 모든 선문답은 스승이 제자에게 보여준 문자 이전의 참 마음이요 본래 면목을 가리킨다. 제자는 선사가 제시한 그 말을 그 자리에서 곧바로 알아 차리는 순간 깨닫는 것이다. 바로 그 자리에서 깨닫는 것 말 끝에 바로 깨닫는 것을 언하변오 言下便悟 라 한다. 말을 듣자마자 어떤 행위를 보자마자 그 자리에서 즉각 깨닫는 것이다. 이러한 언하변오 또한 조사선 祖師禪의 큰 특징이다. 중국 선종의 제2조가 되는 혜가 487~593대사는 달마의 심법을 이어 선의 대하를 이룬 분으로 그가 생존하던 기간은 이른바 남북조 시대의 초중반 부터 수의 초반에 이르는 복잡 다단한 시기였다. 혜가는 원래 노장학을 익히다가 40세가 넘어 달마 대사를 만나 스승으로 섬겼다. 스승과의 만남은 설중단견 즉 눈속에서 팔을 자르면서 까지 법을 구하려 했던 유명한 일화를 전하고있다. 그것은 혜가의 투철하고 신념에 찬 구도 정신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예화다. 당시 달마 대사는 위나라 효문제가 인도의 불타 선사를 위해 세워 놓았던 숭산의 소림사에 들어가 9년동안 면벽 정진하고 있었다. 혜가는 소림사에 와서매일 법을 물었으나 달마 대사는 전혀 입을 열지 않았다. 혜가는 생각 하기를 옛사람들은 법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도 아끼지 않았는데 나 또한 무엇을 아끼랴 혜가는 달마 대사의 방문 앞에서 밤새 눈을 맞으며 꼼짝도 않고 날을 새웠다. 이윽고 동이 트고 꼼짝도 않고 있는 혜가의 모습을 발견한 달마 대사가 말했다. 너는 눈속에 서서 무엇을 구하려 하느냐. 혜가는 꼿꼿이 선 채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바라옵 건대 감로의 문을 활짝 열어 뭇 중생을 널리 제도해 주소서. 이에 달마 대사가 말했다. 부처님 들의 위없는 지혜는 여러 겁을 수행 해야만 얻어지는 것이다. 너의작은 뜻으로는 큰 법을 얻으려 해도 얻을 수 없다. 이말을 듣고 혜가는 즉시 날카로운 칼을 뽑아 자신의 왼팔을 잘라 달마대사 앞에 놓았다. 그제사 달마 대사는 입을 열었다. 여러 부처님 들과 보살들이 법을 구할 때 육신을 육신으로 보지 않았고 목숨을 목숨으로 보지 않았다. 네가 이제 팔을 끊었으니 법을 구할만 하다. 이렇게 해서 혜가는 달마 대사의 제자가 됐다. 혜가의 설중 단비는 부처님이 전생시절 야차에게 몸을 던져 법을 구하던 살신구법 殺身求法과 잘 비견된다. 이로써 혜가는 스승 달마 대사와의 심법 거래가 이루어 진다. 하루는 혜가가 달마 대사에게 말했다. 저의 마음이 불안하니 부디 제 마음을 편케 해주십시오. 달마 대사가 말했다. 그 불안한 마음을 가져 오너라. 내 마땅히 편케 해주리라. 아무리 찾아도 마음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 찾아지면 그것이 어찌 너의 마음이겠느냐. 나는 벌써 너의 마음을 편케 해주었느니라. 달마 대사는 이렇게 말하고 혜가에게 되물었다. 너의 마음을 이미 편하게 해주었는데 너는 보고 있느냐. 이말에 혜가는 활짝 깨달음을 얻었다. 혜가는 즉시 절을 하며 이렇게 말했다. 오늘에야 비로소 모든 법이 공적하고 그 지혜가 멀리 있지 않다는 것을알았습니다. 보살은 생각을 움직이지 않고 지혜의 바다에 이르며 생각을 움직이지 않고 열반의 언덕에 오르나이다. 스승 이시여 이법을 문자로 기록할수있습니까. 이때 달마 대사는 다음과 같이 일렀다. 나의 법은 마음으로써 마음을 전하니 문자를 세우지 않느니라. 선종의 종지가 된 이말은 문자를 세우지 않고 不立文字 언어 밖의 마음과 마음을 전하며 교외별전 敎外別傳 바로 사람의 마음을 직관해서 직지인심 直指人心 부처를 이룬다 견성성불 見性成佛 하는 것이다. 이같은 안심의 법과 불입 문자로 통하는 선종의 종지는 눈속에서 팔을 끊은 혜가의 처절한 구법 정신이 있어서 비롯된 것임을잘 알아야 할 것이다 혜가 선사는 달마 선사의 불안한 마음을 가져 오라는 말을 듣자마자 그 자리에 깨쳤다. 자신의 불안한 마음을 단박에 떨쳐 버리고 깨달음을 연 것이다. 이 언하변오 言下便悟와 관련하여 우리는 돈오 頓悟 라는 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돈오란 단박 깨닫는 것이다. 단번에 핵심 알맹이 바닥 샘물 뿌리로 들어간다. 서서히 차츰차츰 깨달아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전광석화 처럼 단박에 완전히 깨닫는 것이다. 인도의 선이 점차로 깨달아 가는 선이라면 중국의 조사선 祖師禪은 이렇게 단박에 깨닫는 돈오를 내건다. 이러한 돈오의 가치를 최초를 표방한 선이 달마조사로 부터 시작된 조사선 祖師禪 이다. 간화선 看話禪의 간 看이란 잘 살펴 본다는 의미이며 화 話란 화두 話頭를 말한다. 즉 화두를 살펴 깨달음을 얻는 하나의 방편이다. 이는 송대에 임제종 臨濟宗의 전통을 이은 대혜종고 선사가 제창한 방법으로 오로지 화두만을 보는것으로 수행 방편을 삼았다. 조동종 曹洞宗의 묵조선 默照禪에 반대하는 대혜종고 선사의 활약에 힘입어 간화선 看話禪은 임제종의 전통적인 수행법이 되었다. 한반도에서는 고려 시대에 보조국사 지눌의 간화결의론 에 의해 전파 되었고, 임제종의 전통을 직접 이어받은 고려말 태고보우 국사를 통해 현재까지 선수행의 전통으로 보존되어 내려오고 있다. 간화선 看話禪은 조사선 祖師禪의 정신을 고스란히 받들고 있다. 다만 조사 祖師들의 선문답을 화두로 정형화 시켜 수행하고 있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우리 나라는 이러한 조사선 祖師禪과 간화선 看話禪 전통을 원형 그대로 간직하고 발전시켜 나가고 있는 대표적인 나라이다. 특히 우리나라 불교에서는 간화선 看話禪을 중심 수행으로 내걸고 있다. 우리나라 조계종은 해마다 90여 개의 선원에서 2,000여 명의 수행자 들이 정진하고 있으며 시민 선방에서 화두 話頭를 들고 수행하는 많은 재가 불자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간화선 看話禪 이라고 할 때 간화는 볼 간 看자 말 화 話자가 결합된 단어이다. 여기서 화자는 화두 話頭를 의미 한다. 화두 話頭를 간 看하는 것 즉 화두 話頭를 보는 것이 간화선 看話禪이다. 화두 話頭는 말이다 그런데 그 말은 말이되 생각의 길과 말길 알수없는 마음의 길이 끊어진 말이다. 그것은 생각과 말이 나오기 이전의 본래 자리를 일컫는다. 한편 화두 話頭의 두 頭자를 해석하며 말머리 라고도 하는데 이 또한 말이 나오기 이전의 근본 자리를 일컬는 근원인 키워드를 의미하는 것이다. 선 禪은 부처님의 마음이다. 간화선 看話禪에서는 화두 話頭를 들고 부처의 자리를 확인 한다. 그 일련의 과정을 일러 화두 話頭를 든다고 하고 화두 話頭를 참구한다 화두 話頭 공부를 한다 고도 한다. 화두 話頭를 간할 때 그것을 객관 적인 대상으로 분석하여 헤아려 보는 것이 아니라 그 화두 話頭속으로 사무치게 들어가야 한다. 화두 話頭와 나 사이에 빈틈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화두 話頭를 든다고 하면 그것은 화두 話頭가 내 마음의 중심에 딱 걸리는 것을 말한다. 내 마음뿐만 아니라 삼백육십 개의 골절과 팔만 사천개의 털구멍으로 온몸이 화두 話頭 하나로 뭉쳐 있어야 한다. 화두 話頭는 말길과 생각의 길이 끊어진 것이기에 화두 話頭가 마음에 걸리면 그것이 무엇일까 이 뭣고 하는 간절한 의심이 내면 깊숙한 곳에서 솟아 나온다. 이렇게 화두 話頭에 대해 커다란 의심을 일으켜 그 화두 話頭에 몰입해 들어가 화두 話頭와 내가 하나가 되어 화두 話頭와 함께 움직이는 것이 간 看하는 것이며 참구이다. 우리의 본래 마음 자리는 생각과 말로는 찾을 수 없다. 헤아리고 분석하는 알음 알이로 내 자신의 본래 모습은 물론 진리를 바로 볼 수 없다. 본래 그 자리는 말과 생각을 떠나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사찰 입구에 이문 안에 들어 와서는 알음 알이를 두지 말라 이차문내 막존지해 以此門內 莫存知解 라는 글귀가 붙어 있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알음 알이란 지금까지 보고 익힌 머릿속에 간직해 놓은 온갖 지식과 분별심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옳고 저것은 그르다 던가 이것은 맞고 저것은 틀리다 던가 이것은 이익이 되고 저것은 손해가 된다는 등의 판단 분별이 모두 알음 알이에 불과한 것이다. 수행자 修行法의 화두 話頭는 이러한 알음 알이의 작용 모든 생각이나 판단의 작용을 단칼에 베어 버린다. 화두 話頭는 우리를 생각이 끊어진 자리로 인도하여 부처의 자리를 보게 해준다. 그래서 간화선 看話禪에서는 화두 話頭를 들고 모든 사유 思惟 작용을 끊고 그 생각이 끊긴 자리에서 진정한 나를 찾아가는 것을 특징으로 삼는다. 인도의 선 禪이나 그 밖의 선 禪이 마음을 어느 한 대상에 집중하여 차례차례 깊이 관찰해 들어 간다면 간화선 看話禪은 화두 話頭를 들고 단박에 마음의 본바탕으로 들어 간다. 쉽게 말해 간화선 看話禪은 마음 바닥으로 곧바로 들어가 그 깨끗한 본바탕을 가리고 있는 모든 쓰레기를 치워내고 그 본바탕이 살아 움직이게 하는 것이다. 나무 가지 하나 잎사귀 하나 하나를 윤기있게 하기 보다는 뿌리와 줄기 그자체의 생명이 드러 나도록 하는 것이다. 그래서 가지가 무성하게 뻗어 나가고 잎사귀에서 풀은 생명을 발하게 하는 것이다. 곁가지를 가지고 왈가 왈부 하는 것이 아니라 근본을 바꾸는 것이다. 화두 話頭를 들고 화두 話頭 삼매에 이르러 화두 話頭를 타파하게 되면 본래 내 자신을 발견 한다. 나의 모든 고정관념 생각 판단 가치기준 무의식 까지 철저히 타파되어 본래 내 자신 속에서 밝게 빛나는 태양을 보는 것이다. 예로부터 화두 話頭 참구의 중요한 세 가지 요소로서 대신심 大信心 대분심 大憤心 대의심 大疑心을 들었다. 이것을 삼요 三要라고 한다. 대신심 大信心이란 내가 본래 부처라는 믿음이다. 내가 본래 성불해 있다는 인간에 대한 큰 긍정이다. 본래 부처란 우리가 있는 그대로 조금의 가감도 없이 완벽한 부처로 서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있다가 없어지는 것도 아니요 없다가 어떤 계기를 만나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돈 많은 사람이나 높은 관직에 있는 사람에게는 있고 가난하고 무식한 사람에게는 없는 것이 아니다. 지위 고하 신분 성별 능력에 관계없이 누구나 본래 부처로 서의 마음을 갖추고 있다. 비록 일시 적으로 큰 죄를 지어 지옥같은 고통을 받는 죄인이라 할지라도 그 사람의 마음속에는 부처의 생명이 숨기고 있기에 언제라도 부처의 마음을 회복할 수 있는 지혜와 능력 용기가 충만해 있다. 비록 착각과 망상속에서 중생 놀음을 하고 있지만 내가 본래 부처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이러한 내가 본래 부처라는 커다는 믿음 위에서 간화선 看話禪은 출발 한다. 그리고 나를 진리의 길로 인도하는 선지식 善知識에게 철저히 하심하고 믿고 따라야 한다. 여기에 하나 더 화두 話頭에 대한 철두 철미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 즉 화두 話頭는 본래 면목과 연결되어 있으며 이 화두 話頭를 타파하면 반드시 본래 부처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대분심 大憤心 이란 내가 본래 부처인데 현재 중생 놀음을 하고 있는 나 자신에 대한 분한 마음이다. 하루하루 망상과 착각 속에서 눈앞의 탐욕과 육체적 안락에 젖어 숨가쁘게 살아가고 있는 나 자신에 대한 철저한 반성이다. 서로 상처를 주고 받으며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중생으로 서의 삶에 대한 자책이다. 그래서 이러한 욕망과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나 확철대오 하겠다는 서원이 마음에서 울컥울컥 솟구쳐 나와야 한다. 내 자신의 본래 모습을 확인하여 당당하고 걸림 없이 살아 가겠다는 마음이 가슴 절절히 우러 나와야 한다. 대의심 大疑心 이란 화두 話頭에 대한 철두 철미한 의심이다. 화두 話頭는 말길과 생각의 길이 끊어진 것이기 때문에 어떠한 방법으로도 알 수가 없다. 잡을 수도 없고 놓을 수도 없다. 이리 갈 수도 없고 저리 갈 수도 없으며 뒤로 물러 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렇게 모든 사유 思惟의 통로가 차단된다. 어떠한 접근도 허용하지 않는다. 들어갈 만한 문이 없다. 그래서 무문 無門이라 한다. 이렇게 철저하게 닫힌 문 앞에서 도대체 그것이 무엇인가 철두 철미하게 의심해 들어가야 한다. 이렇게 큰 의심의 일어났을 때 온 몸과 마음이 하나의 화두 話頭 덩어리가 되어 화두 話頭로 눕고 화두 話頭로 잠들게 된다. 온통 내 마음을 지배하는 것이 도대체 이것이 무엇인가 이뭣고 왜 그런가 어째서 무 라 했는가 하는 사무치는 의심 이다. 그래야만 화두 話頭에 탁 고리가 걸려 화두 話頭와 나 사이에 빈틈이 없다. 그렇게 하다 보면 화두 話頭를 드는 데 힘을 얻게 된다. 화두 話頭드는 힘을 얻게 되면 동시에 힘을 덜게 되어 화두 話頭와 내가 하나가 되어 움직 인다. 이 밖에 화두 話頭 참구에서 중요한 것은 발심 이다. 영원히 변치 않는 나, 죽음도 어쩌지 못하는 나. 걸림 없는 나. 자신을 찾아야 겠다는 발심이 마음속에서 우러 나와야 한다. 이러한 발심이 되려면 우선 정견이 확보 되어야 한다. 정견이란 무아 연기 공에 대한 바른 이해이다. 이러한 부처님 말씀에 대한 바른 이해 속에 이 도리를 머리가 아닌 온 몸으로 실천해 보겠다는 마음이 솟고쳐 나와야 한다. 이러한 발심과 앞서 말한 화두 話頭 참구의 세가지 요소가 연결될 때 화두 話頭가 제대로⁰ 걸린다. 그리고 선 禪이 무엇인지, 화두 話頭가 무엇인지, 화두 話頭 를 어떻게 들어야 하는 지, 화두 話頭를 들 때 경계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답해 줄 수 있는 스승 즉 선지식 善知識의 지도가 있어야 한다. 이러한 선지식 善知識으로 부터 화두 話頭를 받았을 때 화두 話頭 드는 힘이 생긴다. 그렇다면 선지식 善知識은 어떻게 만나는가 열심히 기도하고 수행하면 그 하는 만큼 선지식 善知識이 보인다. 재가자 들도 화두 話頭를 들고 일상 생활을 활기 있게 해나갈 수 있다. 그것은 자기 주변에서 전개가 되는 역경계와 순경계를 화두 話頭로 다스리고 현실에 깨어 있는 것이다. 화가 나려 할 때, 정신이 혼미해 질 때, 어떤 대상에 한없이 집착하려 들 때, 화두 話頭를 들고 화두 話頭에 역력히 깨어 있게 되면 그러한 경계를 극복하게 된다. 그래서 하루하루 근심 걱정 없이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다. 간화선 看話禪은 본래 생활 선 禪이다. 참선 參禪 수행 修行을 하면서 수행 修行이 제대로 되고 있는지 스스로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굳이 선지식 善知識에게 묻지 않아도 어느 정도 점검이 가능 하다. 그것은 우선 스스로 마음이 점차 너그러워 지고 있는지 좁아지고 있는지 확인하면 된다. 시간이 갈수록 세간사에 담담해 지고 공부가 재미있어 지면 제대로 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절이나 이웃에 망설임 없이 보시 하고싶고 그 보시하는 마음에 걸림이 없으면 그야 말로 열린 사람이다. 이와는 다리 남의 허물이 눈에 더 잘 보이고 세간사의 시비에 관심이 끊이지 않고 보시하는 일에 인색해 진다면 이는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또한 배우자나 아이들에게서 우리 남편 부인 혹은 어머니가 절에 다니더니 사람이 많이 달라 졌다는 소리를 들으면 좋다. 그래서 주위의 다른 이에게도 우리 배우자 혹은 어머니 처럼 절에 보내라고 추천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더욱 좋다. 절에 다니면 생활에 변화가 있어야 한다. 5년을 다니거나 10년을 다니는 데도 전혀 변화의 조짐이 없거나 주위에서 변화를 느끼지 못한다면 돌이켜 반성할 여지가 있다. 화두 話頭를 들고 참선 參禪을 하는 것은 아집을 없애는 것이다. 그것은 작은 나를 없애고 큰 나의 입장에서 살아가는 행복하고 평화로운 삶이다. 그리하여 부처님 앞에서 겸허해 지고 공경심을 갖듯이 집이나 직장에서 겸허 함과 공경심으로 모든 이들을 대할 수 있다면 제대로 수행 修行하는 것이 된다. 궁극 적으로 배우자나 직장 동료 만나는 모든 이들을 부처님 대하듯 하면 절에 다니는 보람이요 진정 수행 修하는 불자라고 할 수 있다. 간화선 看話禪은 일찍이 가장 가치 있는 수행 修行이요 질러가는 수행법 修行法이라 해서 많은 이들로 부터 찬사를 받아왔다. 불자들은 이러한 간화선 看話禪과 만난 것을 감사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재가 불자들은 매일 일정한 시간에 화두 話頭를 들고 정진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수행 修行을 할 때는 주변 환경에 구애받지 않아야 하겠지만 처음 시작하는 사람은 조용한 곳이 좋다. 예를 들면 절에서는 부처님 모셔진 법당이나 선방 등의 정해진 공간에서 하고 집이나 직장에서는 특별히 참선 參禪을 할 수 있는 장소가 없기 때문에 조용하고 정갈한 일정한 곳을 선택해서 하면 될 것이다. 선 禪의 자세도 가거나 머물거나 앉거나 서거나 어떤 자세를 취해도 되겠지만 가장 안정적인 결가부좌나 반가부좌를 하는 것이 좋다. 참선 參禪을 한다고 억지로 오래 앉아 있다 보면 몸에 무리가 생기는 경우가 있다. 이때는 잠시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법당이나 방 안 또는 도량을 거닐면서 몸의 균형을 맞추어 조절해 주어야 한다. 이것을 방선 放禪 또는 경행 經行이라 한다. 이 때도 화두 話頭를 잊고 잡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방선 또한 참선 參禪이 연장이기 때문이다. 또한 생활인은 걷거나 누군가를 기다릴 때도 화두 話頭 드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무심코 걸어 가거나 누군가를 기다릴 때 나를 지배하는 것은 쓸데없는 망상과 잡념이다. 화두 話頭로 이러한 망상과 잡념을 거두어 내고 마음 속 깊이 나를 찾아가는 공부를 해나가면 비록 깨치지 못한다 할지라도 그 화두 話頭드는 힘으로 일상생활을 편히 해나갈 수 있다. 일상생활에서 스트레스를 받거나 정신이 혼미해 질 때 화두 話頭를 들어 보면 마음이 편해지고 생활에 중심이 잡힐 것이다. 오늘도 행복한 날 되소서 [출처] 선 禪의 종류 種類와 정의 正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