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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릉(崇陵)
제18대 현종(1641~1674)과 청풍(淸風) 김씨(金氏) 명성왕후(1642~1683)의 능이다. 현종은 효종의 맏아들로 1641년 봉림대군(효종)이 선양에 볼모로 가 있을 때 태어났다. 조선의 역대 왕 중에서 유일하게 외국에서 태어난 것이다. 1644년 귀국했고 봉림대군이 세자에 책봉됨에 따라 1649년 왕세손으로 책봉되었다가 1659년 19세에 효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특이한 점은 조선 역대 왕들 중 유일하게 후궁을 한 명도 두지 않았다는 것이다.
현종이 재위한 15년간 조선은 북벌 운동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문화적 중화주의라는 방향으로 무게 중심을 옮겼다. 청의 국력이 점점 강성해지면서 북벌 운동이 군사적, 정치적으로 무모해졌기 때문이다.
숭릉은 쌍릉으로 조영되어 왕릉과 왕비 능이 병풍석 없이 난간석으로 연결되어 있다.
외침과 내란은 없었지만 전염병과 기근이 계속되어 백성들이 고통 받자 정부는 경제 재건에 공을 들였다. 재정 부족을 메꾸기 위해 영직첩과 공명첩을 대량으로 발급했는데, 이는 이후 정부 재정을 보충하는 정책으로 보편화되며 조선 사회의 신분제 해체에 기여했다.
현종은 전란에 많은 사람이 죽었으므로 호구 증가를 위해 양민이 승려가 되는 것을 금지하고 사찰에 있는 동자들도 환속했다. 또한 대동법을 실시하고 관개 시설을 만들어 수리 면적을 늘렸다. 함경도 산악 지대에 장진별장(長津別將)을 두어 개척을 시도했고, 두만강 안에 출몰하는 여진족을 북쪽으로 몰아내고 북변의 여러 관청을 승격하는 등 실속 있는 국방 정책을 견지했다. 나름대로 조선의 실정을 감안한 것이었지만 격심한 당쟁과 우유부단한 성격으로 과단성 있게 실시하지는 못했다.
한편 1666년에는 예상치 못한 사건이 일어난다. 네덜란드 국적의 동인도 회사 무역선 스페르베르(Sperwer)호가 대만 해협을 거쳐 일본 나가사키로 항해 중 비바람을 동반한 폭풍을 만나 표류하다가 1653년 8월 제주 남쪽 해안에 좌초해 산산조각이 난 후 침몰했다. 이 배에 승선했던 68명 중 서기인 하멜을 포함한 34명만 살았다.
하멜 일행은 그 후 10개월가량 제주에 억류된 뒤 1654년 5월 강진 해남을 거쳐 서울로 압송되어 서울에서 2년여를 체류했고, 1656년 3월에 전라도로 다시 유배된 후 1663년 여수 좌수영, 순천, 남원 등 세 곳으로 분리 이송되었다. 이 중 여수 좌수영에 유배된 하멜을 포함한 8명은 1666년 9월 밤 미리 준비한 소형 어선을 타고 일본으로 탈출했다.
한국에서 14년 동안 억류된 뒤 극적으로 탈출에 성공한 하멜은 네덜란드에 귀환해 그동안의 난파 과정을 담은 『하멜 표류기』를 출간했다. 『하멜 표류기』를 통해 하멜은 한국을 유럽에 최초로 소개한 역사적 인물이 된다. 하멜이 병영에 억류되어 있을 동안 보곤 했던 은행나무는 아직도 강진에 살아 있고 현재 네덜란드에서 건립한 기념관도 인근에 세워져 있다.
현종의 비 명성왕후는 청풍 김씨 김우명의 딸로 효종 2년(1651) 세자빈에 책봉되어 가례를 치렀고, 1659년 현종이 즉위하면서 왕비에 책립되었다. 1674년 현종이 사망하고 아들인 숙종이 즉위하자 왕대비가 되었다.
명성왕후와 그의 아버지 김우명은 서인 편으로 당파적 입장을 숨기지 않고 궁내에 있는 남인 세력 추방에 관여했으며 특히 숙종의 여인 장옥정(훗날 장희빈)을 궐 밖으로 내치기도 했다. 이와 같이 명성왕후는 친정의 배경과 과격한 성격이 겹쳐 거친 처사가 많았고 조정의 정무까지 간여해 비판받기도 했다.
혹자는 현종이 후궁을 두지 않은 이유는 명성왕후의 사나운 성격 때문이라고 하지만 현종이 명성왕후를 사랑했기 때문이라는 주장 또한 힘을 받는다. 왕비가 아무리 시샘한다고 해도 후궁을 두는 것 자체를 반대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명성왕후에 대해서는 왕대비가 된 후 사망하기까지 악평이 주를 이룬다. 가장 잘 알려진 이야기는 그녀의 죽음과도 연관된다. 숙종이 원인 모를 병에 걸리자 그녀는 왕대비임에도 무당을 찾는다. 무당은 숙종이 병에 걸린 이유는 삼재가 들었기 때문으로 어머니가 아들을 대신해 삿갓을 쓰고 홑치마만 입고 벌을 서야 한다고 한다. 그녀는 아들을 사랑하는 어머니로서 무당의 주문대로 물벼락을 맞는 벌을 선다. 이것이 화근이 되어 감기에 걸렸고 결국 후유증으로 사망한다.
동구릉 입구에서 숭릉과 혜릉은 함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먼저 혜릉이 보이고 더 안쪽으로 들어가야 숭릉이 보인다. 남쪽이 저습해 진입로 등이 쉽게 물난리를 겪는 등 진입 부분이 지형적으로 취약하지만 능역은 비교적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홍살문 옆에 배위가 있고 참도가 시작되는데 숭릉은 홍살문에서 다소 떨어진 곳에서부터 참도가 시작된다. 배위도 참도가 시작되는 옆에 위치한다. 숭릉 정자각은 조선 왕릉 중 유일한 팔작지붕 정자각으로 정전 5칸, 배위청 3칸이다. 보통 정면 3칸, 측면 2칸인데 숭릉은 익랑이 붙어 규모가 큰 것이 특징이며 공포는 정전이 일출목 이익공, 배위청이 이익공이다.
창건된 1674년의 형태를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고 17세기 정자각의 다양한 유형을 확인할 수 있는 귀한 사례로 평가되어 보물 제1742호로 지정되었다. 건원릉과 목릉의 정자각도 2011년 12월 역사적, 예술적 가치가 큰 곳으로 인정받아 보물로 지정되었는데 모두 동구릉에 자리하고 있다.
숭릉은 쌍릉으로 조영되어 왕릉과 왕비 능 모두 병풍석 없이 난간석으로 연결되었고 능침 앞에 혼유석이 하나씩 놓여 있다. 난간석에는 방위를 나타내는 십이지 신을 글자로 새겼다. 석물은 민폐를 덜기 위해 1년 전 현종이 자신의 아버지 능을 여주로 천장하면서 묻어놓았던(현 동구릉 원릉터) 것을 이용했다. 이때 신하들이 "아버지가 먹다 남은 음식으로 아들의 제사를 하지 않는다"라며 반대 상소를 했으나 송시열과 유생 등의 변론에 따라 어린 숙종은 그대로 행할 것을 명했다.
장명등, 망주석에는 화려한 꽃무늬를 새겨 놓았고 문·무인석은 옷 주름을 비롯해 얼굴의 이목구비가 선으로 표현되어 있다. 숭릉이 남다른 것은 예감이 3개라는 점이다. 또한 능침을 지키는 석호의 꼬리가 배 아래에 양각으로 조각되어 생동감을 준다. 비각 안의 능표에 각인된 비문에는 '朝鮮國顯宗大王崇陵明聖王后附左(조선국 현종대왕 숭릉 명성왕후 부좌)'라 적혀 있다.
현종 사후 조선 왕조에서 특이한 일이 벌어진다. 왕이 사망하면 곧바로 실록 편찬에 들어가는데 이 작업이 선대와는 달리 지지부진해 숙종의 독촉을 받고 비로소 숙종 3년(1677)에 완성된다. 그런데 『현종실록』 편찬에는 현종 말년 이후 숙종 초년에 걸쳐 득세한 남인 측이 많이 참여해 서인 측은 불만이 많았다. 1680년 서인이 남인을 숙청하고 정권을 잡자 서인 중심의 실록개수청이 설치되었고 1683년에 『현종개수실록』 28권이 완성되었다.
조선 시대의 수정 실록은 『선조실록』과 『경종실록』이 있는데 개수5) 실록은 『현종실록』이 유일하다. 당쟁의 결과 부득이 수정되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현종개수실록』에 대한 평가가 고깝지 않은 것은 당연할지도 모른다
현종(顯宗)
이원(李棩), 경직(景直), 소휴(昭休)
출생 : 1641년(인조 19)
사망 : 1674년(현종 15)
관련 사건 : 기해복제(己亥服制)
요약 : 조선후기 제18대(재위:1659~1674) 왕.
개설
재위 1659∼1674.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이름은 이연(李棩)이다. 자는 경직(景直)이다. 효종의 맏아들로 어머니는 우의정 장유(張維)의 딸 인선왕후(仁宣王后)이다. 비는 영돈녕부사 김우명(金佑明)의 딸 명성왕후(明聖王后)이다.
효종이 봉림대군(鳳林大君) 시절에 청나라의 볼모로 심양(瀋陽)에 있을 때 심관(瀋館)에서 출생하였다.
생애 및 활동사항
1649년(인조 27) 왕세손에 책봉되었다가 효종이 즉위하자 1651년(효종 2)에 왕세자로 진봉(進封)되었다. 현종은 효종의 뒤를 이어 1659년에 즉위하여 재위 15년 동안 대부분을 예론을 둘러싼 정쟁 속에서 지냈다.
1662년(현종 3) 호남지방에 대동법(大同法)을 시행하였다. 1668년 동철활자(銅鐵活字) 10여 만자를 주조했으며, 혼천의(渾天儀)를 만들어 천문관측과 역법(曆法) 연구에 이바지하였다. 또, 지방관의 상피법(相避法)을 제정했고, 동성통혼(同姓通婚)을 금지시켰다.
1666년에는 1653년에 제주도에 표류해 온 하멜(Hamel,H.) 등 8명이 전라도 좌수영을 탈출하여, 억류 생활 14년 간의 이야기인 『화란선제주도난파기(和蘭船濟州島難破記)-하멜표류기(漂流記)』와 그 부록인 <조선국기 朝鮮國記>를 저술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현종은 효종대에 은밀히 계획해 놓은 청나라에 대한 보복정벌인 북벌을 국제관계와 국내 사정으로 중단하는 대신 군비(軍備)에 힘써 훈련별대(訓鍊別隊)를 창설하였다. 현종대에는 이미 망한 명나라를 숭모하는 경향이 강해졌다. 이런 숭명활동은 다음의 숙종 때부터 구체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다.
현종은 즉위하자마자 기해복제(己亥服制) 문제라는 예론에 부딪혔다. 즉, 효종의 상을 당하자 인조의 계비(繼妃)인 자의대비 조씨(慈懿大妃趙氏)의 복제문제가 정쟁으로 번진 것이다. 당시 일반사회에서는 주자의 『가례(家禮)』에 의한 사례(四禮)의 준칙을 따랐다. 그러나 왕가에서는 성종 때 제정된 『오례의(五禮儀)』를 따르고 있었다.
그런데 『오례의』에는 효종과 자의대비의 관계와 같은 사례가 없었다. 효종이 인조의 맏아들로서 왕위에 있었다면 문제가 없었겠지만, 인조의 둘째 아들로서 책립되었고 인조의 맏아들인 소현세자(昭顯世子)의 상에 자의대비가 맏아들의 예로 3년상의 상복을 이미 입[服]은 일이 있었기 때문에 다시 효종의 상을 당해 어떤 상복을 입어야 하는지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서인측은 송시열(宋時烈)과 송준길(宋浚吉)이 주동이 되어, 효종이 둘째 아들이므로 기년복(朞年服)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남인측의 윤휴(尹鑴)하와 허목(許穆) 등은 효종이 둘째 아들이라고 해도 왕위를 이어받았으므로 3년상이 옳다고 주장하였다.
이 무렵 정치계는 1575년(선조 8) 동인에게 배척되었다가 인조반정으로 정치계에 되돌아온 서인과, 동인 계열이지만 북인·남인으로 갈라진 뒤 북인에게 배척되었다가 역시 인조 때 조정에 복귀한 남인 사이의 대립이 심상치 않았다. 그래도 인조·효종 때는 감정적인 대립이 적어서 특히 학문에서는 교섭이 원활하였다.
그렇지만 예론이라는 당론의 대립이 극한으로 치달아 감정이 격해지고 논쟁이 장기화되자, 서인측의 주장대로 기년복이 조정에서 일단 결정되었다.
그렇지만 예론이 지방으로 번져 그 시비가 더욱 확대되었다. 그러자 1666년 조정에서 기년복의 결정을 재확인하고, 이에 항의하면 그 이유를 불문하고 엄벌에 처할 것을 포고하기에 이르렀다. 1674년 왕대비가 죽자 다시 자의대비의 복제문제가 재론되면서 예론이 또다시 거론되었다.
즉, 서인측의 대공설(9개월복)과 남인측의 기년설이 대립한 것이다. 그 뒤 이 문제가 기년복으로 정착되면서 서인측의 주장이 좌절되었다. 그리하여 현종 초년에 벌어진 예론도 수정이 불가피해졌고, 이 때 서인측이 많이 배척되었다.
이 문제는 현종이 죽고 숙종이 즉위한 뒤에도 계속되어 1679년(숙종 5) 20년 간에 걸친 기해복제 문제를 다시 거론하지 말라는 엄명이 있었다. 이로써 형식적으로는 조정에서 다시 거론되지 않았지만, 이후에도 많은 시비가 내면적으로 계속되었다.
이 예론은 예(禮)의 본질론(本質論-不可變性)에 입각한 서인측의 예 관념과, 행용론(行用論-可變性)에 치중한 남인측 예 관념의 학문적인 해석이 당론으로 발전하면서 당쟁의 비극으로까지 파급된 것이다. 이렇게 현종대는 예론의 시비로 일관하다시피 했고, 당론 싸움으로 날이 새고 졌다.
그리하여 현종이 죽은 뒤에 찬수된 『현종실록』도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현종실록』은 숙종 1년(1675)에 편찬에 들어갔으나 여의치 못하다가 숙종의 독촉을 받고 1677년에 겨우 완성된 졸속 실록이다. 아울러 『현종실록』 편찬에, 현종 말년 이후 숙종 초년에 걸쳐 득세한 남인측이 많이 참여했으므로 서인측은 불만이 많았다.
1680년 경신대출척을 계기로 서인이 다시 남인을 숙청하고 정권을 잡은 뒤 서인 중심의 실록개수청(實錄改修廳)을 설치하였다. 1683년에 28권의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이 완성되었다.
조선시대의 수정 실록(修正實錄)은 『선조실록』과 『경종실록』이 있고, 개수실록은 이 『현종실록』이다. 이 모두 당쟁의 결과 부득이 개수 또는 수정되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현종개수실록』의 성격과 당시의 당쟁 상황을 짐작할 만하다. 시호는 소휴순문숙무경인창효대왕(昭休純文肅武敬仁彰孝大王)이다. 묘호는 현종(顯宗)이다. 능호는 숭릉(崇陵)으로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있다.
명성왕후(明聖王后)
출생 : 1642년(인조 20)
사망 : 1683년(숙종 9)
경력 : 세자빈, 조선 제18대 왕 현종의 비
관련 사건 : 홍수의 변(紅袖之變)
본관 : 청풍(淸風, 지금의 충청북도 제천)
요약 : 조선후기 제18대 현종의 왕비. 조선 후기의 명성황후와는 다른 인물로, 청풍부원군 김우명의 딸이며 1651년 세자빈에 책봉되었고, 1659년 왕비에 책립되었으며, 슬하에 숙종과 명선, 명혜, 명안 공주를 두었다. 능은 경기도 양주의 숭릉이다.
개설
본관은 청풍(淸風). 서울 중부 장통방(長通坊: 지금의 종로1가 부근)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영돈녕부사 청풍부원군(淸風府院君) 김우명(金佑明)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651년(효종 2) 세자빈(世子嬪)에 책봉되어 어의동 본궁(於義洞本宮: 인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았던 사저)에서 가례(嘉禮)를 올렸다. 1659년(현종 즉위년) 왕비에 책립되고, 1683년 12월 5일 창경궁의 저승전(儲承殿)에서 42세로 승하하였다.
지능이 비상하고 성격이 과격하여 궁중의 일을 다스림에 거친 처사가 많았고, 숙종 즉위초에는 조정의 정무에까지 간여하여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특히 1675년(숙종 1)에 숙종의 외조부였던 청풍부원군 김우명이 복창군 이정과 복평군 이연이 궁녀들[홍수(紅袖)]과 간통하였다고 고발한 사건인 ‘홍수의 변(紅袖之變)’ 때에는 대신들 앞에 나와 울부짖는 등 불미한 일이 많았다.
숙종과 명선(明善)·명혜(明惠)·명안(明安) 공주를 낳았다. 명선·명혜공주는 일찍 죽고, 명안공주는 해창위(海昌尉) 오태주(吳泰周)에게 출가하였다. 시호는 현렬희인정헌문덕명성왕후(顯烈禧仁貞獻文德明聖王后)이고, 능호는 숭릉(崇陵)으로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동구릉 경내에 있다.
홍수의 변(紅袖之變)
발생 : 1675년(숙종 1) 3월 12일
성격 : 사건, 당쟁, 궁중음모
종결 : 1675년(숙종 1) 9월 16일
관련 인물/단체 : 이남(李楠), 이정(李㮒), 궁녀, 명성왕후(明聖王后), 김우명(金佑明), 허적(許積), 윤휴(尹鑴), 서인, 남인
관련 장소 : 서울 창덕궁
요약 : 1675년(숙종 1) 3월 종실 복창군(福昌君) 이정(李禎)과 복평군(福平君) 이연(李㮒)이 궁녀들과 간통하였다고 고발된 일로 남인과 서인의 당쟁을 격화시킨 사건.
개설
1675년(숙종 1)에 숙종의 외조부였던 청풍부원군 김우명은 복창군 이정과 복평군 이연이 궁녀들[홍수(紅袖)]과 간통하였다고 고발하였다. 남인들은 복창군과 복평군 형제와 가까웠으므로 그들을 구명하고자 하였고, 서인들은 남인들을 비판하여 당쟁이 격화되었다.
역사적 배경
복창군 이정과 복평군 이연은 효종의 아우인 인평대군(麟坪大君)의 아들로서 복선군(福善君) 이남(李楠)과 함께 흔히 ‘삼복(三福)’으로 불리었다. 그들은 효종과 현종의 사랑을 받아 어려서부터 궁궐에서 자라다시피 하였으므로, 장성한 후에도 궁궐을 무상출입하였고 행실이 오만하고 방탕하였다. 그들의 외조부는 남인 오단(吳端)이었으므로, 1674년(현종 15) 제2차 예송에서 서인이 패하고 남인 정권이 수립되자, 허적(許積) 등과 결탁하여 권력을 행사하였다. 1674년 8월, 현종의 국상이 일어나자 복창군과 복평군은 상례 일로 궁중에서 유숙하는 일이 많았다.
경과
1675년(숙종 1) 3월 12일에 숙종의 외조부였던 청풍부원군(淸風府院君) 김우명(金佑明)은 명성왕후(明聖王后)의 지시를 받고 종실 이정과 이연이 궁녀들과 간통하였다고 고발하였다. 조선시대 궁녀와 간통한 자는 누구나 사형에 처하였기 때문에, 남인들은 김우명이 근거 없이 왕손들을 해치려한다고 탄핵하였다. 이에 명성왕후가 어전 회의에 나와 그들이 궁녀 상업(常業)·귀례(貴禮)와 간통한 사실을 증언하였다. 이에 이정과 이연 및 궁녀들은 사형을 감하여 멀리 유배되었다. 그러나 남인 윤휴(尹鑴)와 홍우원(洪宇遠) 등은 대비가 조정에 간여하는 것이 옳지 않으므로 임금이 잘 보살피도록[조관(照管)] 건의하였다. 그러자 서인 김수항(金壽恒)은 남인들이 대비를 견제하려는 것이 옳지 않다고 비판하였고, 남인들은 그를 탄핵하여 영암으로 유배시켰다. 그해 7월에 큰 가뭄이 들자, 죄수들을 석방하면서 이정과 이연도 석방되었다.
결과
이정과 이연의 궁녀 간통은 명성왕후가 증언하였으므로 사실로 인정되어 유배의 처벌을 받았다. 그들은 몇 달 후 석방되었고, 9월에 서용되어 관작이 회복되었다. 1680년(숙종 6) 경신환국(庚申換局)이 일어나자 복평군 이연과 복선군 이남은 역모죄로 처형되었고, 윤휴와 홍우원도 대비 모욕죄로 사사(賜死)되거나 유배되었다.
의의와 평가
1675년(숙종 1)의 ‘홍수의 변’에서 명성왕후가 궁녀들의 간통을 고발하게 하고 증언하여 왕손들을 처벌하게 한 일은 조정에 간섭하는 것으로 인식되었으므로, 남인들은 이를 비판하였고 서인들은 남인들의 대비에 대한 불경을 공격하여 당쟁이 더욱 격화되었다.
숭릉(崇陵) 위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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