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0년 역사 토속문화 마을수호신 당나무의 수문장역할을 했던 장승이 아레와 같이 복원되게 되었습니다.
100년만에 우리들 세대와 필연의 관계로써 복원하고 계승하여
결국 우리와 조우하게 하는 영광을 주었나봅니다.
인천의 고귀한 문화이며, 남동구의 자존심입니다.
도림동 당나무사당에서 장승제를 지내는 행사 와 잔치를합니다.
일시: 2013.10.22. 10:00
장소: 도림동 당나무 사당앞
참석대상: 남촌도림 전 주민
식순
장승3쌍 안치
장승세우기 전 제사
감사의 기원 (하울림풍물단 9시30분까지 도착)
점심식사
장승설치(도림동/남촌동/수산동)
각동 장승 설치 장소 현수막 3개소
구청지원
오봉산 전통문화 보존회 지원
제사장 대표
도림동 : 천영화
남촌동 : 최광천
수산동 : 송창영/한준택
[남촌 도림 수산동 장승의 연혁]
남촌동은 일찍 발달했던 문학리 남쪽에 새로 생긴 마을이란 뜻에서 남촌이라 불렸다고 한다. 1914년 부천군 남동면 와우리였으나 1940년 인천부 오보정으로 되었고 1946년 다시 남촌동으로 불렸으며 상촌, 중촌, 하촌, 범말 등으로 자연부락이 형성되어 왔으나 지금은 고층아파트인 1,2,3차 풍림아파트와 500여동의 빌라가 건축되어 도농복합 지역을 이루고 있다.
도림동 옛부터 복숭아밭이 많아 복숭아골 이라고 불려 온데서 생긴 동명이다. 인천부 남촌면 도림리였으나 1913년 부천군 남동면이 되었고 1946년 인천부에 다시 편입되어 신도림정으로 불리다 1946년 도림동이 되었고 1977년 수산동과 통합되었다가 1998년 남촌동과 통합되어 남촌 도림동을 이루고 있다. 소래포구와 가까우며 오봉산 주위의 과수원이 많은 한적하고 순수한 농촌지역으로 지금은 복숭아보다는 대부분 배를 많이 작목하고 있으며 맛과 당도가 높은 남동 배를 개발하여 전국에 공급하고 있으며 2003년 7월 24일 주공그린빌 아파트 1,356세대 입주로 인구가 급증하고 있다.
수산동은 산으로 둘러쌓인 마을로 ‘사람들이 오래 살 수 있는 터전’이란 뜻에서 수산리로 불렸으며, 원래 부천군 남동면발산리였으나 1940년 인천부로 편입되어 수정이라 불렸으며, 해방 후 1946년 수산동으로 되었다. 찬우물, 배래터, 능곡동 등 자연부락이 있으며 현재에도 지리적 여건으로 자연부락이 그대로 형성되어 있다.
그리하여 도림 남촌 수산동 3개 마을은 옛날부터 한 마을이었다.
그리고 인천도호부 주요행정 관리들이 식솔들과 거주하는 곳이기도 했다.
(능골 수골 장자골 덕골 주적골에 주로거주 했음)
이곳엔 마을수호신으로 불러지고 있는 은행나무와 엄나무가 있었다.
남촌동에는 당 할아버지(은행나무 수령 약 600년) 도림동(주적곡)에 당 할머니(엄나무 수령 약 600년)를 마을수호신으로 숭배되어 왔다.
도림동의 역사는 임진왜란 후 약 1620년경 정묘호란 병자호란의 매우 정세가 혼란할 때 생긴
마을이었다.
1620년경은 국가의 존폐가 달려있고 정세가 불안하고 백성의 민심이 혼란할 때이라
백성의 정서로는 옛 날부터 숭배하던 토속신앙인 마을수호신 힘을 필요함이 절실했다. 인천도호부에서는(지금의 시청 역할)북쪽의 해주는 청나라 군사의 만행을, 남쪽의 진주
왜구의 만행을 피하여, 지금의 논현동(소래포구),고잔 갯벌, 수산동 포구와 문학 승기천
을 통해서 많은 백성이 밀려와 밀집한 마을이 형성되자 질서유지 필요했고, 이들을 생존토록 하는 수단으로 갯벌 개간으로 농토 확장과 지금의 주적골(紬績谷)은 뽕나무를 심어 누에를 쳐서 비단실을 뽑게 만드는데 주력했던 곳이라 명칭을 주적곡이라 했다.(주적공원일대) 도림동은 5개 마을 중 가장 오래된 마을이며 도호부 행정을 맡았던 관리들이 거주하고 있었던 마을이다. 그리하여 都堂祭를 통하여 마을의 안녕과 번영과 풍년 풍어를 위한 祭를 지냈다. 각 포구에선 각 풍어제를 민속신앙으로(대동 굿)기원하고, 그 무당들이 都堂나무인 마을수호신에게 氣를 받는 곳이기도 했다.
마을 수호신이 있는 도림수산동과 남촌동은 주요 도로 중 만수동에서 도림동으로 들어오는 길목(수산동입구)과, 문학동에서 남촌동으로 들어오는 길목에(고가도로입구), 논현동에서 도림동으로 들어오는 길목에(동물이동통로교각 앞) 수호신에게 도당제를 지내는 신성시 여기는 곳이라 장승을 세워 문지기 역할을 하게 하였다.(신성한 마을임을 알리고 예를 갖추어(장승에 기도)출입을 하게 한 매우 역사 자료로써 주요한 가치가 있다.
장승의 모습을 본 사람은 모두 작고(作故)하고 현재 아무도 없다. 장승은 일제강점기 초기에 없어졌으며(민심의 모임과 민족의 얼이 깃든 토속신앙과 정체성말살)기독교문화가 들어오면서 장승을 우상이라 여겨 천대 시하여 이를 없애는데 일조를 하였으며, 더욱이 6.25전쟁으로 많은 유형무형 문화재가 소실하였음은 한국의 토속문화는 실로 안타깝게 사라지고 안타깝게 여기다가 남동구청에서 서둘러 복원하기에 이르렀으며, 관내 지역 토속문화를 계승발전 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자료발췌 윤 양 진 011-201-9233 y2y3595@hanmail.net)
인천시 남동지역 오봉산 전통문화보존위원회 기획 부회장
장승의 유래
장승의 기원은 솟대, 선돌, 신목, 등과 함께 신석기, 청동기 시대의 원시 신앙 물로서 유목, 농경, 문화의 소산으로 파악된다. 일종의 수호신앙으로서 씨족, 부족민의 공통적 염원을 담은 제정일치 시기 지배이념의 표상으로서 기능 하다가 삼국 시대 들어 중앙 집권적 국가 기틀이 마련되고 불교, 도교, 유교, 등의 통치 이대올로기가 체계화됨에 따라 불교의 습합되어 전승하게 된다. 통일신라와 고려 시대에 이르는 기간 동안 장승은 만간 신앙의 저변으로 흘러들었을 뿐 불교라는 제도권에 안착되지는 않았다. 외래 신앙이 토착화하는 과정에서 전래의 민속신앙과의 타협이 불가피한 가운데 이처럼 불교와 무관한 장승이 사찰에 등장한 것이다. 이는 장승이 민중의 삶과 정서 속에서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음을 반증해 준다. 조선시대에 들어오면 사대부 사회의 통치 이념인 유교가 현세적 도덕규범의 성격이 강함에 따라 생산, 죽음이나 질병, 고통 등의 문제와 연관되어 장승 신앙이 부활할 소지가 생겨난다.
장승은 주로 커다란 주도로 입구에 세워졌으며 주로 높은 지형이 아니라 낮고 평탄한 지형을 이루고 있었다. 또한 마을의 지도자들이 주민들을 위한 안녕과 번영과 건강을 기원하는 당제를 지내는 신성한 마을 어귀에 세워졌으며 출입하는 모든 사람들은 지 날 때마다 신성한 곳임을 알려는 알렸다.
이는 지배층 문화에서 소외된 불교, 도교가 민간 신앙과 결합하여 신석기 이래의 민속적 장승신앙이 부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조선 후기의 새로운 장승문화에서 그 이름이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 방어대장군, 지서대장군, 상원주 장군, 하원당 장군 등으로 붙여진 것이다. 이처럼 민간신앙의 한 형태로 면면히 이어온 장승은 16∼17세기 임진, 병자 양란을 거치면서 공동체 문화의 중심으로 부상하게 된다.
1. 장승은 왜 만드는가.
볼품없고 못생긴 장승을 정교한
조각품과 비교될 순 없지만 오늘날의 장승은 조상의 얼이 담긴 우리
문화유산의 발굴과 재현 그리고 전승하는데 중요한 뜻이 있음은
물론 전통적인 한국의 대표얼굴이라는 예술적 가치를 높여 국내는
물론 지구촌 곳곳에 우리고유의 장승문화를 알려 살아있는 한국인
의 뚜렷한 의지를 나타내 보이기 위한 것이라고 하면 되겠다.
2. 장승은 어디에 쓰이는가.
전통적 차원에서의 장승의 쓰임, 즉 기능을 간단히 표현하면,
-흉년 재앙 역병 등으로 부터 예방차원에 세운 부락수호(部落守護)의 기능
-방위가 허 한 곳에 오방신장을 세운 (防衛守護)의 기능
-국가의 안녕과 군왕의 장생을 기원한 (山川裨補)의 기능
-마을의 허한 지맥을 다스리기 위한 읍락비보(邑落裨補)의 기능
-불법도량의 청정과 존엄을 지키기 위한 (佛法守護)의 기능
-농경 ,수렵의 땅 경계를 표시하기 위한 경계표(境界標)의 기능
-이정표를 위한 노표(路標)의 기능
-외지의 역병이나 재앙의 침입을 문밖에서 제지 城門守護의 기능
-득남과 풍요를 기원하기 위한 기자(氣子)의 기능
(자료발췌 윤 양 진 011-201-9233 y2y3595@hanmail.net)
인천시 남동지역 오봉산 전통문화보존위원회 기획 부회장
구청에서 발주한 장승을 제작하는 곳에 검수차 방문하였다.
마지막 색칠을 하기위해 건조시키고 있다.
두번에 걸쳐 장승의 얼굴형태를 조율하며 결론지은 것이 수문장 역할을 하는 모습처럼 만드는 것이 좋다고 판단하였다.
장승을 검수하면서 [왼쪽은 장승조각가 이며 오른쪽은 필자이다]
장승길이 길이 6m 둘레의 지름은 40cm이다. 나무재질은 미송으로 하였다.
장승 조각가의 모습
첫댓글 가문의 영광 이군요
토속 문화를 보존 하고자 하는
도림동 님의 노고에 감사 드립니다 ! ~
축하와 무사번영다복을 축원을 드립니다...
예전에
무슨 날이면 어김없이 장독대에다 정한수 떠 놓고 빌으시던
할머님이 생각이 납니다...
그 옆에서 지켜보던 나는 "손주들 잘 되라"고 기원을 드리는 모습에
나쁜 짓도 피해가며 살아온 인생과 함께....
산속에 홀로 남겨져
불안에 떨 때에도
한낫 마른 나무가지 하나라도 쥐고 있으면
그나마 마음이 놓이던 시절도 생각이 납니다...
문화적 시각적 전통적 가치도 중요하면서
마을의 수호신이고
밥 늦게까지 공부하다 돌아오는 학생들에게도
장승은
무언의 수호신으로써 지역과 주민들을 지키고 이끌 것입니다...
좋은 자료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 ^*^
문화적가치를 높히 평가하시는 모습과 감성에 감동받았습니다.
역시 대종회 카페지기 답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