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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3일 [성 필립보와 성 토마스 사도 축일]
요한 14,6-14
‘부족하기에’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길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길’이시라는 말씀은,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라는 말로 설명이 됩니다.
예수님을 통해야만 아버지께 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진리’는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라는 말씀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생명’은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이다”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이신 그리스도보다 더 큰 일을 하게 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바로 하느님의 본성, 곧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예수회 정제천 신부님은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우리나라를 방문하셨을 때 통역을 맡으셨던 분입니다.
이분이 사제가 되도록 이끌어 주신 분을 이분은 그리스도라 확신하십니다.
광주 민주화 운동이 터졌을 때 이분은 우선 출세와 정의 중, 어떤 편에 서야 할지를 결정해야 했습니다.
당시 군부 독재와 그 군부 독재를 지지하는 지식인층, 그리고 이를 묵인하는 시민들이 있었습니다.
정제천 신부는 그들 부류에는 들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출세는 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사법고시를 준비하는 중에 “내가 왜 사는가?”라는 문제는 짚고 넘어가고 싶었습니다.
이것을 알지 못하고 산다면 60, 70세가 되어도 인생이 허무할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이상한 환시 같은 것을 봅니다.
기차를 타고 가는데 옆자리에 앉아있는 누군가가 창밖의 노을을 가리키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제천아 봐라. 저것이 인생이란다”라고 말해주었습니다.
누구인지 보이지는 않았지만, 이분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불교, 개신교, 천주교를 이리저리 공부한 후에 세례를 받지 않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사제까지 된 것입니다.
시간이 많이 흘러서 교황님과 함께 헬기를 타고 오는 도중에 석양의 노을이 아름답게 물들어 오고 있었습니다.
그때 정 신부는 교황님께 노을이 아름답다고 말했고, 교황님은 그 노을을 보며 예수회에서 살다가 간 위대한 성인들을 떠올리며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합니다.
정 신부는 그리스도께서 여기까지 자신을 이끌어 주신 분이 그리스도라고 확신한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십니다.
영원한 생명으로 이끄시기 위해 참 진리의 삶을 선택하는 길이 되어주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왜 정 신부에게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완전히 드러내지 않으셨을까요?
만약 그랬다면 정 신부는 그때 노을보다도 그리스도라는 존재에 압도되어 온전한 길을 가지 못했을 것입니다.
진리와 생명으로 이끄는 분은 항상 도달한 분이 아니라 ‘도정’에 있는 분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부담 없이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인간이 되신 이유이고
직접 그 길을 가시며 우리에게 보여주신 이유입니다.
이태석 신부를 생각해봅시다.
얼마 전 이태석 신부의 제자인 토마스가 의사가 되어 유퀴즈에 나온 적이 있습니다.
이태석 신부는 토마스에게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었습니다.
신부님은 토마스에게 그리스도께 가는 길이었고, 그리스도의 삶의 계시였으며, 또 그리스도의 생명을 전해주었습니다.
물론 히틀러와 같은 반대 경우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히틀러는 폭력적인 아버지 밑에서 자랐습니다.
히틀러의 아버지, 알로이스 히틀러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었습니다.
아니, 길이고 거짓이고 죽음이었습니다.
알로이스는 술을 좋아하고 권위주의적이었으면 난폭했습니다.
아이를 열등감의 길로 가게 만들어 그리스도가 아닌 거짓된 진리를 드러냈고 결국엔 자살로 이르게 하였습니다.
히틀러가 훗날 독일 수상이 되고 비서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나는 아버지의 매일같이 계속되는 매질 속에서 더 이상 울지 않게 되었으며, 나중에는 나의 인내심을 시험하며 조용히 매질의 회수를 새어 나갔다.”
중요한 것은 우리는 누구나 원하든 원하지 않든 ‘자신이 향하는 방향으로 누군가의 길이 되어준다’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려면 나는 항상 그리스도의 십자가 삶을 지향하고 있어야 합니다.
『꽃들에게 희망을』은 그 좋은 예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간단한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줄무늬 애벌레는 다른 애벌레들이 하는 것처럼 살아갑니다.
알에서 태어나서 나뭇잎을 먹으며 몸집을 불립니다.
그리고 남들이 하는 것처럼 애벌레 탑을 올라갑니다.
경쟁에 뛰어든 것입니다.
거기에서 노랑 애벌레를 만납니다.
둘은 경쟁에서 잠시 떨어져 사랑에 빠집니다.
하지만 줄무늬 애벌레는 탑의 꼭대기에 무엇이 있는지 궁금하였습니다.
그래서 다시 탑을 오릅니다.
노랑 애벌레는 나뭇가지에 매달린 위태로워 보이는 한 애벌레를 만납니다.
그는 고치를 만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노랑 애벌레에게 그 고치를 만들고 있던 애벌레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어줍니다.
그는 말합니다.
“나를 보렴. 나는 지금 고치를 만들고 있단다.
내가 마치 숨어 버리는 듯이 보이지만, 고치는 결코 도피처가 아니야.
고치는 변화가 일어나는 동안 잠시 들어가 머무는 집이란다. 고치는 중요한 단계란다.
일단 고치에 들어가면 다시는 애벌레 생활로 돌아갈 수 없으니까.
변화가 일어나는 동안, 고치 밖에서는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나비는 이미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란다.
다만 시간이 걸릴 뿐이야!”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노랑 애벌레에게 나비에 대해 말해줄 수 있는 대상은 나비가 아니라 나비가 되어가는 과정에 있는 같은 애벌레라는 것입니다.
나비는 애벌레와 말이 통하지 않습니다.
설사 말이 통한다고 하더라도 믿지 못할 것입니다.
변화의 과정에 있는 자라야만, 곧 내가 십자가를 통해 그리스도께 가고 있는 사람이어야만
그 사람을 이미 나비가 되신 그리스도께 초대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를 파견하신 이유입니다.
당신이 직접 우리에게 나타나서 하느님처럼 될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보다, 예수님처럼 물 위를 부족하게나마 걸어본 베드로가 말하는 것이 우리에겐 더 설득력이 있습니다.
이태석 신부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이태석 신부가 되어 사는 것보다
이태석이 예수님의 모습으로 살려고 하는 모습이 토마스에겐 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일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어디론가 향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누군가의 길입니다.
하지만 내가 진리로 가고 있는지, 거짓으로 가고 있는지 살펴야 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몸을 가리며 거짓으로 향했습니다. 진리는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
있는 그대로 말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진리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나를 거짓으로 이끄는 것은 죽음입니다.
거짓이 없으면 그 사람을 통해 진리가 우리를 생명으로 이끕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5월3일 [성 필립보와 성 토마스 사도 축일]
요한 14,6-14
우리의 결핍은 하느님의 측은지심을 불러 일으킵니다!
길에 대해서 묵상하는 날입니다.
사막의 교부들은 그리스도교 영성의 핵심인 고독과 침묵 기도의 길을 걸으라고 가르칩니다.
그것은 참된 나를 만나는 길인 동시에 우리 속에 감춰진 가장 큰 생명과 만나는 길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을 만나는 길은 어려우면서도 쉬운 길입니다.
어떻게 해서든 하느님과 나 단둘이 만나기 위해 노력하고, 어떻게 해서든 그분의 현존 안에 머무를 때만이 그분께서 내 삶의 근원이 되고, 내 정체성의 유일한 근원이 될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하느님을 바로 눈앞에 뵙듯이 만나게 될 것입니다.
결국 하느님을 만나는 길은 기도해야 걸어갈 수 있는 길입니다.
아주 크고 사납고 나이도 먹어 산전수전 다 겪은, 그래서 사는 것도 지루해 보이는 큰 개와
인형같이 작고 아직 어려서 세상 물정도 모르고, 세상 모든 것이 신기한 새끼강아지가 있다면
아이들은 어느 쪽으로 달려가서 놀겠습니까?
아마도 선택의 여지가 없을 것입니다. 당연히 아이들은 작고 어린 강아지 쪽으로 달려가겠지요.
살레시오 회원으로 살아가면서도 비슷한 체험을 합니다.
잘 성장해서 체격도 이젠 당당하고, 공부도 곧잘 따라가고, 제 갈 길을 잘 가고 있는 아이와 어린 시절부터 못 얻어먹어 체구도 또래 아이들과 크게 비교될 정도로 왜소하고, 자주 아프고,
늘 뒤처지는 아이가 있다고 할 때, 먼저 시선이 가는 쪽은 어느 쪽일까요?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당연히 덜떨어진 아이에게로 시선이 먼저 가겠지요.
우리와 하느님과의 관계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는 가장 큰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우리가 잘나고 똑똑해서일까요? 우리가 그간 쌓아온 업적 때문일까요?
우리의 성공, 승승장구해온 빛나는 삶 때문일까요?
제 생각은 반대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구원하시는 가장 큰 이유 중에 하나는 우리의 결핍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부족함, 우리의 나약함, 우리의 한계, 우리의 죄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우리의 결핍은 하느님의 측은지심을 불러일으키며, 우리를 향한 한량없는 하느님의 측은지심이 우리를 구원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주변을 한번 둘러봤습니다.
결핍, 작음, 나약함, 연약함, 소박함...이런 단어들이 설 자리가 없습니다.
물질만능주의, 성장제일주의 경제우선주의 구호에 파묻혀 철저하게 외면당하고 홀대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께서는 철저하게도 좁고 작은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작은 모습으로 오셨고 인간으로서 더 이상 내려갈 수 없는 겸손의 삶을 일관되게 살아가셨습니다.
그분은 풍요로운 물질문명 속에 빠져들지 않으시고 초지일관 가난과 소박함을 바탕으로 한
무소유의 삶, 영적 삶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가리켜 ‘길’이라고 지칭하십니다.
오직 그 길만을 총해 하느님 아버지께로 나아갈 수 있다고 강조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선택하신 그 길, 오늘 우리의 묵상 주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 길은 작음과 겸손함, 한없는 자기 낮춤, 가난을 배경으로 한 빛나는 작은 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느님 아버지를 계시하심을 통해, 당신 친히 우리를 하느님 아버지께로 인도하는 길이 되셨습니다.
예수님만이 우리를 하느님 아버지께로 인도하는 정도(正道)임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이 세상에 파견하신 하느님 아버지는 사랑이시라는 진리를 우리에게 계시하시고, 동시에 그 사랑을 몸소 체현(體現)하신 이유로 진리 자체, 진리의 화신이 되신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5월3일 [성 필립보와 야고보 사도 축일]
복음: 요한 14,6-14 : 나를 보았으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
오늘은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사도 축일이다. 성 필립보는 벳사이다 출신으로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다가 예수님을 만나 사도가 되었다(요한 1,43-44). 최후의 만찬 때에 주님께,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8절)하고 청한 분이다. 성 야고보도 역시 열 두 사도 중의 한 분이며 알패오의 아들로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후 야고보에게 나타나셨고(1고린 15,7), 야고보 서간을 저술하신 분이시다.
오늘의 복음은 어제의 복음이 다시 읽혀지고 있는데,예수님이 바로 우리가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는 길이며, 당신이 하시는 말씀은 모두가 진리이고, 살아있는 모든 생물에게 생명을 주시기도 거둘 수도 있는 권한을 가진 분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그러한 권한을 가지신 분은 하느님뿐이신 데 하느님께로 나아가고자 하는 자는 누구도 예수님을 거치지 않고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을 알았기 때문에 예수님을 통하여 아버지 하느님도 알게 될 뿐 아니라 하느님을 “이미 뵌 것이다.”(7절)고 하신다.
그러니까 이번에는 필립보가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8절)하고 있다. 예수님은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9-10절)하신다.
즉 예수께서는 아버지와 당신은 하나이시며 예수님을 통해서 아버지이신 하느님이 어떠한 분이신가를 우리는 잘 알 수 있다는 것을 깨우쳐 주신 것이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참 모습을 우리 인간의 눈으로는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눈으로 볼 수 있다면 그것은 하느님의 모습은 아닐 것이며 믿음도 필요 없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우리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다. “내가 예수님을 한번만이라도 내 눈으로 볼 수 있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열심히 살 수 있을 텐데!” 그러나 나의 근본적인 변화가 없이는 그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래서 하느님은 우리 인간이 하느님을 알 수 있고 볼 수 있도록 우리와 같은 육신을 취하시어, 사람이 되셨고 이 세상에 오셨는데 바로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의 중심은 바로 예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셨고 어떻게 하라고 말씀하셨는가에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 어떻게 말씀하셨고 어떻게 행동하실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보면서 순간을 위해 노력한다면 그 안에서 우리는 참된 길을, 진리를, 생명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대단히 어려운 큰 일이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 있는 조그마한 일들 안에서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