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치 ; 조천리 2494번지
시대 ; 일제강점기
유형 ; 위인선현유적(생가 터)
이문천 지사의 본관은 전주이며, 1892년 3월 17일 전라남도 제주도(濟州島) 신좌면(新左面) 조천리 2494번지에서 이영오(李英五)의 아들로 태어났다.
1919년 3월 21일부터 3월 24일까지 계속된 제주도 신좌면 조천리(朝天里)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휘문고보에 다니면서 3·1 만세운동에 참여하다가 귀향한 김장환이 ‘독립선언문’을 가지고 귀향함으로써 김시범, 김시은 등과 의논하여 만세시위운동을 계획할 때 만세시위의 계획을 듣고 적극 찬동하였으며, 신촌(新村) 함덕리(咸德里) 등 이웃 마을과 서당 학생들에게도 독립만세시위 계획을 알리며 다 함께 동참할 것을 권유하였다.
거사 당일인 3월 21일 오후 3시경, 이문천을 비롯한 5, 600여 명의 시위군중이 미모치에 모여들었다. 그런 가운데 김시범은 독립선언서 낭독하였고, 김장환이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자, 이문천을 비롯한 시위군중은 일제히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태극기를 흔들고 만세를 연창하면서 시가지를 향하여 시위행진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시위군중들은 신촌리까지 진출했을 때 출동한 일본 군경에 의해 강제 해산되었으며, 중심 인물인 고재륜, 김경희, 김시범, 김시은, 김용찬, 김장환, 김형배, 김희수, 황진식을 비롯해 12명이 붙잡혀갔다.
22일에도 시위는 계속되었다. 다시 많은 군중들이 모여 검속된 애국인사들을 석방하라고 외치며 신촌 방향으로 시위행진을 전개한 것이다. 2차 시위에서는 박두규와 김필원이 연행되면서 시위대는 해산했다.
23일에는 김년배, 백응선, 이문천이 주도하여 검속자 석방을 요구하며 조천 오일장터에서 시위를 시작했다. 특히 이문천은 약 100여명의 시위대를 지휘하여 함덕리로 시위행진을 했다. 함덕리에 이르자 이곳 청년들과 주민들이 합세하여 시위대는 800여명으로 확대되었다. 이문천은 이 날 주도적으로 활동하다가 백응선과 함께 일경에 체포되었다. 그 외에도 적극 참가자 6명이 함께 연행되었다.
3월 24일(음력 2월 23일)은 조천 장날이었다. 장날에는 일부러 동원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많이 모일 수 있는 잇점이 있었으므로 시위운동을 하는 게 유리했다. 이 날에는 김년배를 중심으로 검속자 석방을 요구하며 만세시위가 이어졌는데 참가자가 1,500명에 이르렀다. 김년배가 이 날 체포되자 조천 지역의 만세운동은 중단되었다.
이문천 지사는 이 일로 이해 4월 26일 광주지방법원 제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을 받고 상고하였으나 5월 29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1932년 충청남도 당진군 송악면 기지시리 157번지로 전적(轉籍)한 후 행적을 알 수 없다.(독립유공자공훈록, 제주항일인사실기)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0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작성 2205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