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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04. 묵상글 ( 연중 제 8주간 화요일. - 주님 때문에, 복음 때문에. 등 )
* 호명환 신부님 글 일부 : 08:28 추가
* 조명연 신부님 글 : 08:28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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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04. 연중 제 8주간 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5.03.04 04:18
- 주님 때문에, 복음 때문에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베드로 사도의 이 말은 모든 것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주고
당신을 따르라는 주님 말씀을 부자가 거부하고 떠난 뒤에 한 말이고,
부자는 재물을 버리지도 주님을 따르지도 못했는데 자기와 동료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다는 우월감이 배어있는 말입니다.
우월감에서 나온 말이 아니라면 적어도 자부심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런데 진정 모든 것을 베드로와 동료들이 버렸을까요?
버렸다면 오늘 주님 말씀대로 주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버렸을까요?
제자들이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른 것은 맞지만 나중에 드러났듯
주님 때문에 그리고 복음 때문에 버리고 떠난 것이 아님은 분명합니다.
모든 것을 버렸던 그들이 나중에는 주님을 버리고 도망쳤잖습니까?
그러니까 그들이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른 의도가 따로 있습니다.
그래서 그 의도가 순수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건 것은 맞는데 그것이 이 세상에서 백 배를 얻으려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마치 집을 담보로 도박한 것과 같고,
돈을 탈탈 털어 주식을 산 것과 같습니다.
곧 단박에 대박 나려고 한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이런 베드로의 의도가 담긴 말에 주님께서 맞장구치십니다.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백 배의 보상을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도 얻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단 주님 때문에 그리고 복음 때문에 그러할 경우지요.
그리고 현세에서 백배 보상을 받는 것도 다른 뜻이지요.
집과 토지를 백배로 받는다는 것이 그것들을 백 배 주신다는 뜻이라고 쳐도,
형제와 자매와 아내와 자식을 백 배 주신다는 것은 어떤 뜻이겠습니까?
아내 하나를 버리면 백 명의 아내가 생긴다는 뜻이겠습니까?
형제와 자매와 자식도 그런 뜻이겠습니까?
제가 자주 진담 반, 농담 반 얘기하듯 제가 결혼하지 않으니
수많은 주님의 여인들이 제 애인이 되는 것과 같고,
수많은 주님의 자녀들이 제 자녀가 되는 것과 같고,
제가 저의 집을 버리니 비록 전세지만 집이 몇 채 생긴 것과 같은 뜻이겠지요.
사실 저는 그런 기적들을 수없이 체험합니다.
전에 세 살던 집에서 쫓겨났을 때 복음 때문에 소송 거는 것을 포기하니
주님께서 더 좋은 주인을 만나게 해주시어 더 좋은 전셋집이 생기고,
복음 정신으로 선교 협동조합을 하니 매년 40명이 넘는 아이들에게 주는
장학금이 생기고, 식당 봉사자들과 한글학교 봉사자들이 생깁니다.
그런데 그것이 주님과 복음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라면
다시 말해 그것이 내 일이고 내 배 채우기 위한 거라면 누가 도와주고,
주님께서 누구를 보내주시겠습니까? 하나도 보내주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적인 순수성이 없는 일은 망할 것이고 망해야 합니다.
‘주님 때문에, 복음 때문에’라는 말이 그래서 더 마음에 와닿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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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04. 연중 제 8주간 화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슬픔의 물이 우리 안에서 흐르게 합시다!
하느님의 숨
2025.03.03. 20:13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 2025년 3월 3일 월요일 (호명환 번역) 열 번째 주간: 존재들의 눈물
슬픔이 넘쳐 흐르면 과거가 치유됩니다.
하나 됨(ONENING): 예언자의 길이라는 글에서: 오클라호마의 촉토 부족 사람인 픽시 라이트호스(Fixie Lighthorse)는 어떻게 해서 슬픔이 우리를 변화하게 해 주는 힘을 실어 주는지에 대해 말합니다:
외적인 혼돈이 일어날 때 내적인 혼돈도 생겨납니다. 그런데 이 때가 바로 "더 큰 그림을 보고" 믿음을 보전하기 위한 내면의 힘의 필요성이 더 커지는 때입니다. 내면의 힘을 얻게 되면 외적으로도 힘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저 바깥 세상은 내면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반영해 주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내면에는 치유될 필요가 있는 슬픔, 즉 치유가 필요한 어떤 억압된 부분이 있습니다. 이를 인식하게 될 때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내면 깊숙한 곳에 있는 이 슬픔을 치유해 줄 강물이 더 깊이 의식되고, 진실이 표면으로 드러나며, 그와 함께 공동체적이고 개인적인 책임이 무언지가 드러나게 됩니다....
슬픔은 느껴지고 인지될 때 비로소 그 슬픔이 오히려 그 날의 안정제가 될 수 있습니다. 이 치유를 통해 우리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우리의 감정에 대한 진실을 받아들이게 되고, 우리로 하여금 이 치유가 현실과 물질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인식만큼 가치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해 줍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외적으로 느낄 수 있게 해 주는 몸을 대개 그림자 정도 치부해 버렸고 저 멀리 치워버렸나 봅니다. 아마 우리는 우리의 느낌이 우리를 취약하게 만든다고 여기기 때문에, 우리가 사회 안에서 살아가기 위한 조건으로서 감정을 가리는 모든 방법을 배워왔는지 모릅니다.
라이트 호스는 우리에게 오늘 우리가 경험하는 슬픔에 대해 성찰하라고 촉구합니다:
우리의 느낌은 우리 내면에서 흐르는 물입니다. 사실 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 있어 물은 가장 근본적인 치유제입니다. 오랜 시간 동안 우리 땅이 유럽 사람들에게 의해 식민지가 되고 개척할 땅이 됨에 따라 우리 내면의 진정한 감정이 우리 내면 깊숙한 곳으로 숨겨지게 되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이를 치유하기 위한 근본적인 치료제는 우리와 우리 조상들이 저지른 크나큰 잘못이 아무리 불편하더다로 그것을 받아들이는 데서 생겨납니다. 만일 우리가 어떤 중대한 변화를 위한 전환점에 다다랐다면 우리는 무엇이 우리의 상처인지늘 알아내야 하고, 우리가 잃었던 것에 대해 애도해야 하며, 이에 대한 대규모 수리를 어떻게 해야 할지를 배워야 합니다! 구원이라는 것은 우리가 진 빚을 다 갚기 위해 새로운 선택을 하는 과정입니다. 정서적인 측면에서 말하자면 우리가 겪은 불의가 무언지를 알아내고 명명하게 되면 우리는 오늘에서 시작해서 참으로 신성한 것을 찾게 될 것입니다....
슬픔을 느끼고 치유하며 개인과 공동체의 더 깊은 차원의 목적이 무언지를 깨닫게 해 주는 새로운 차원이 필요하고 또 그것이 여러분에게 여러분이 원하는 어떤 변화를 요구한다면 그게 무얼까요? 여러분은 여러분을 신성하게 지켜 주고 존중해 줄 물이 어떤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여러분은 우리 다음 세대를 위해 어떤 세상을 바라고 계십니까? 여러분 안에 있는 무의식의 강물에서 여러분을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하는 두려움이 무엇입니까? 과거의 어떤 일들이 여전히 지속되는 여러분의 슬픔과 연결되어 있습니까?....
슬픔이 흐를 때 과거도 치유됩니다. 우리는 이미 우리에게 주어져 있지만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지혜를 물려받았습니다. 슬픔을 통해 이루어지는 치유를 존중할 때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지혜를 기억하게 되고 우리 자신을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상처를 방어하고 숨기기보다는 우리 내면 깊숙한 상처에서 벗어나 밖으로 나오려 노력할 때 우리의 상처를 치유하는 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이 과정을 통해 우리와 우리 세상의 모습은 조금 더 온전하게 재창조되는 것입니다. 과거가 치유되고 공감되며 용서될 때, 미래에는 우리가 발을 담글 수 있는 좋은 물이 생겨날 것입니다.
우리 공동체 이야기
저는 몇 해 동안 저에게는 참으로 고마웠던 익명의 알코올 중독자 모임의 회원이었습니다. 저는 저를 후원해 주던 분이 저에게 그 모임에서 제 이야기를 하라고 부탁했던 날을 절대 잊지 못할 것입니다. 저는 그날 크게 눈물을 터트릴 뻔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전에는 누구도 저에게 저의 이야기를 해 달라고 초대해 준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저의 연약함으로 인해 제 이야기를 하게 되면 다른 사람들이 저에 대한 존중심을 잃을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제 이야기를 하는 것이 두려웠었습니다. 그런데 실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 모임에서 우리가 나눈 모든 이야기가 우리의 사회-경제적 차이와 성과 인종의 다름을 다 초월하게 해 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 이야기를 서로 나누는 행위는 우리 자신을 넘어서서 우리 인간의 이야기를 모두 아시며 이를 존중해 주시는 더 높은 힘(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도록 우리를 들어 높여 준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Eileen H.
Pixie Lighthorse, “When Grief Flows, the Past Heals,” ONEING 12, no. 2, The Path of the Prophet (2024): 56, 59. Available in print and PDF download.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Noé Barnett, Untitled (detail), 2024, oil paint, Albuquerque. Click here to enlarge image. 노에 바넷(Noe Barnett)이 그린 위 그림의 이미지가 리처드 로어의 책 존재들의 눈물에 영감을 주었습니다. 특별히 엄청나게 다정다감하고 엄청난 배려심으로 눈물 한 방울을 붙들고 있는 저 손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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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영성 묵상글
사랑에는 그 자체 안에 이미 보상이 들어 있다고 합니다!
2025.03.04. 05:29
2025년 3월 4일 화요일 - 연중 제8주간 화요일
마태오 복음에서는 베드로가 주님을 따르는 데서 오는 이득이 무언지에 대해 더 노골적으로 질문합니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니 저희는 무엇을 받겠습니까?"(마태 19,27).
오늘 우리에게 선포되는 마르코 복음에서는 이 뒷 부분이 생략되어 있지만, 베드로가 이렇게 말한 의도에는 이 질문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 문맥상 분명하기에 마태오 복음 저자는 이 내용을 덧붙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정말로 자기-이득을 전적으로 추구하지 않아야 하는 걸까요? 사실 우리는 뭔가를 보상받을 심산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아닐까요?! 그러니 베드로의 질문은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당신을 따르게 되면 "현세"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우리 노력에 대한 대가나 보상을 하느님께서 주시기를 바라는 것이 과연 "이기적인 것"일까요? 그렇다면 우리가 끝없이 청하는 "영원한 생명"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12세기의 클레르보의 성 베르나르도는 이 주제에 대해 분명한 설명을 합니다. "비록 하느님은 보상에 대한 생각 없이 사랑받으셔야 하지만 하느님은 보상 없이 사랑받지 않으십니다. 참된 사랑에는 분명히 어떤 결과가 있긴 하지만, 그 사랑은 이득을 추구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무례하지 않고 자기 이익을 추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1코린 13,5). 사랑은 정(情)이지 계약이 아닙니다. 사랑은 서로의 동의에 의해 주어지거나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공짜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사랑은 자발적인 것입니다. 참된 사랑은 그 자체로 우리를 만족시켜 줍니다. 그러니까 사랑은 사랑하는 바 안에서 이미 그 보상이 주어져 있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사랑을 하긴 하는데, 다른 무언가를 위해 사랑한다면, 우리는 실제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추구하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 사랑하는 것입니다."
14세기의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합니다. 종교에서 무언가를 얻기를 원하는 사람들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은 하느님이 아니라 다른 뭔가를 위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유다처럼 말입니다."
이 두 사람은 우리가 신앙생활을 해가면서 상거래적 정신을 피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정말로 사랑 그 자체에 보상이 이미 들어있다는 사실을 믿으며 살아가나요?? 아마도 참으로 사랑을 해 본 사람은 이 사실을, 이 진리를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추구하는 "영원한 생명"은 그 자체로 사랑 안에 이미 그 보상이 들어있다는 사실을 믿는 이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의 화두처럼 정채봉 작가의 [그대 뒷 모습]에 나오는 "호주머니가 삼키는 인생"이라는 에세이를 함께 묵상해 보면 좋겠습니다.
소년에게는 아무도 모르는 혼자만의 궁전이 있었다. 백살도 더 먹어 보이는 소나무가 양산처럼 멋진 그들을 퍼뜨리고 있는 벼랑 아래였는데 우뚝우뚝 둘러선 바위들이 흡사 망루 같았고 어쩌다 날아와 앉는 물새는 파수병 같았다.
소년은 그 성곽 안에 의자처럼 생긴 바위에 앉아서 바다가 연주해 주는 교향악을 들었다. 바람과 파도와 물새 노래가 어울린 음악을.
그 비밀의 궁전에서 소년은 수평선에 떠오르는 흰구름을 만나곤 했다. 흰구름이 소년에게 말을 걸었다.
"무엇이 필요한지요, 어린 왕자님. 말씀만 하시면 대궐도 지어 올릴 수 있고 사자도 빚어 드릴 수 있습니다."
"아니에요. 나는 그렇게 큰 것은 싫어요. 젖 짜는 염소나 한 마리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할머니가 캐러 다니시는 조개들이 많았으면 좋겠어요."
"어린 왕자라서 작은 것을 좋아하는군요. 그러나 왕자님, 큰 것은 빚기가 쉬우나 작은 것은 어려워요. 빌딩 같은 것은 어떻습니까?"
"싫어요. 나는 작으니까 작은 것이 좋아요. 초가집이 좋고 외돛배가 좋아요."
아아, 그러고 난 후면 하늘에 나타나는 것들. 염소, 초가집, 외돛배, 그리고 조개들....
소년은 고향을 떠났다. 얼마 후엔 또 읍내에서 작은 도시로, 그리고는 더 큰 도시로 흘러 들어갔다.
학교가 높아 갈수록 소년의 꿈 또한 점차 거대해졌다. 나중에는 남들처럼 대궐 같은 집을 원했고, 사자와도 같은 권력을 원했다. 빌딩 같은 지위에 오르기 위해 남을 밟았고 또한 밟혔다.
세월이 흘렀다.
소년은 문득 가을비 내리는 날 밤에 날아간 혹은 삭아 버린 옛날의 음표들에 대해 생각했다. 오선마저도 낡아서 희미해져 버린 지금에.
창 밖의 빗줄기 주렴에 실루엣처럼 어리는 소년의 궁전.
'오오, 거기 있었구나.'
소년은 밤차를 타고 고햐으로 내려갔다. 아침해가 떠오를 무렵에야 바닷가 그만의 궁전에 이르렀다.
벼랑 위의 소나무는 아직도 푸른 빛 그대로였으나 소년의 머리는 이미 하얗게 변해 있었다.
소년은 가만히 예전 그 바위 위에 걸터 앉았다. 물새들이 반가운 듯 어깨를 스치며 날았다. 파도는 팡파르를 연주했다. "안녕히 다녀오셨습니까?" 하고.
수평선에 뜬 흰구름이 대궐처럼, 사자처럼 부풀어올랐다. 빌딩처럼 층층이 빚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이내 그 거대한 것들은 소리없이 스러져 가없는 하늘에 새털처럼 흩어져 버렸다.
소년의 잔주름 많은 눈가에 이슬 방울이 맺혔다.
'아, 허망한 꿈이었어.'
이 글 속의 소년은 오늘의 당신일 수도 있고 나일 수도 있다.
처음에는 유리 구슬 몇 개만 들어 있어도, 만 원짜리 한 장만 들어 있어도 만족해 하던 호주머니가 아닌가. 허나 이제는 넓고도 넓어져서 호주머니 속에 우리 인생이 침몰당할 위험도 있는 것이다. 당신의 포켓에 행복이 들기 위해서는 당신의 호주머니를 당신에 맞게 줄이는 길밖에 없다...
오늘 복음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 하고 말씀하신 후 나오는 이야기라는 점을 전제하고 묵상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과 함께 정채봉 작가의 감동 언어를 묵상해 보고 싶었습니다. 아주 단순한 진리이지만 상거래적 사고방식에 깊이 젖어 살아가는 우리의 마음에는 자취를 찾아 보기 힘든 진리는 아닌지....
오늘 우리 함께 소박한 사랑의 꿈을 꿔 보도록 합시다! 사랑에는 그 자체 안에 이미 보상이 들어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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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04. 연중 제 8주간 화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25.03.04 06:03
본당 수녀님께서 본원 행사로 인해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자리를 비워도 되는지를 물으셨습니다. 당연히 괜찮다고 했습니다. 아마 수녀님께서는 본당 일에 차질을 빚지 않을까 걱정하셨던 것 같습니다. 저는 걱정하지 마시라고, 봉사자들이 잘하실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자기가 자리를 비우면 일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고 여기저기 구멍이 날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한 사람이 자리를 비웠다고 해서 제대로 진행되지 않는 곳이라면, 그 조직은 문제가 있는 곳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기가 없어지는 위험을 피하지 못하고 무너지는 조직이라면 정상적인 조직이라 할 수 없습니다.
자기 없으면 안 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없어도 잘 되는 곳을 만들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적절한 권한 위임과 책임 분산입니다. 이는 겸손한 삶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그런데 자기 없으면 안 되는 곳으로 만들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권한 위임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책임 분산이 정착되지 않도록 방해하는 것입니다. 교만한 모습 때문입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사람들과의 모임 안에서 리더의 역할이란 함께 사는 공동체를 만드는 것입니다. 나 없으면 안 된다는 생각은 독재로 나아가게 해서 공동체의 발전에 큰 해가 될 뿐입니다.
예수님은 혼자서 충분히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제자단을 만드시고 제자들에게 많은 은총과 사랑을 주셨습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이 주님 안에서 함께 사는 공동체를 만들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제자단의 역할은 남에게 인정받고 존경받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교만을 버리고 진정한 겸손을 갖추어야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을 버리고, 박해를 받더라도 당신을 따라야 할 것을 명령하십니다. 아마 베드로는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으니 인정해달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리는 것뿐 아니라, 박해를 받아야 하늘에서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라고 이야기하십니다.
모든 것을 버리는 겸손의 삶을 통해서만 가능했습니다. 나 없으면 된다는 교만의 마음이 아니라, 자기를 낮추면서 사람들과 함께하는 겸손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세상에서는 첫째가 최고고, 많은 것이 제일 좋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꼴찌라 할지라도 자기를 낮추고 함께하는 사람을 첫째로 만들어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예수님만이 우리 구원의 유일한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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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자신의 가치를 모른다면 다른 사람이 그걸 알려줄 것이고, 그건 실제 가치보다 더 저렴할 것이다(버나드 홉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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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04. 연중 제 8주간 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부자청년 이야기’에 이어지는 장면입니다. 부자청년은 재산 때문에 예수님 따르기를 포기하고 떠나갔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말합니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마르 10,29-30)
예수님께서는 ‘버린다는 것’, 그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예수님 또는 복음 때문에’ 버리는 것이어야 함을 말해줍니다.
이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복음의 가치가 무엇인지’를 암시합니다. 곧 ‘예수님과 복음’이 그 모든 것들을 버릴만한 의미와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끊임없이 복음과 예수님을 더 사랑하려고 애쓰면서, 그 의미와 가치를 깨달아 갑니다. 그러니 결국, 우리는 ‘내가 알고 있는 예수님, 내가 알고 있는 복음’을 넘어, ‘진정한 예수님, 진정한 복음’을 알아가는 여행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렇게, 차차 예수님과 복음을 깨달아가면서, 우리는 예수님 이외의 것들을 조금씩 버려가게 됩니다. 아무리 값지고 좋은 것들도, 그것들이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주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갑니다. 또한 나에게 소중하다고 여겨지는 것들이 오히려 내려놓아야 할 것들임도 알아갑니다. 사실, 우리가 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그분에 대한 사랑이 작아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이야말로 진정 소중한 것을 위해 자신이 소중하다고 여기는 것을 버릴 수 있게 합니다. 진정 소중한 것을 발견하게 되면, 우리도 성녀 아빌라 데레사처럼 이렇게 노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무 것도 너를 혼란케 하지 말고 아무 것도 너를 두렵게 하지 말라.
모든 것은 다 지나갈 뿐, 하느님은 변치 않으시니 인내는 모든 것을 얻는다.
하느님을 소유한 이는 부족함이 없으니(사람은 모든 것을 소유한 것이니) 하느님만으로 만족하도다.”
그렇습니다. 만약, 우리가 진정 예수님과 복음을 사랑한다면,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대변혁이 생길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위해 하느님 나라와 그 의로움을 구하는 데는 첫째가 되고, 자기 자신을 위해 다른 것을 구하는 데는 꼴찌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언제 어디서나 어떤 상황에서나 ‘예수님’과 ‘복음’과 ‘사랑’이 늘 첫째가 될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마르 10,28)
주님!
모든 것을 버리되,
버리고 온 제 자신도 버리게 하소서.
당신을 따르되,
당신을 따르고 있는 제 자신도 버리게 하소서!
저의 희망이 아니라,
당신의 희망이 이루어지게 하소서!
온전히 당신의 것이오니,
오로지 당신만을 향하여 있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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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04. 연중 제 8주간 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No pain, No gain’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수고하지 않고는 열매 맺기 어렵다는 뜻입니다. 세상의 일만 그런 것이 아니라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기도하지 않고, 말씀을 가까이하지 않고, 자선을 베풀지 않고, 십자가를 지지 않고 신앙이 열매 맺기는 어렵습니다. 교우들과 ‘인공지능(AI) 시대와 신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한 자매님이 인공지능의 발전이 인류에게 해로울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니 인공지능의 개발을 막거나, 규제를 강화하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새로운 것이 등장하면서 사라지는 것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자동차가 등장하면서 ‘우마차’는 사라졌습니다. 스마트 폰이 등장하면서 거리에 있던 공중전화가 사라졌습니다. 카세트테이프의 자리는 ‘CD’가 차지했습니다. ‘CD’의 자리는 ‘MP3’가 차지했습니다. 지금은 대부분 ‘유튜브’를 통해서 음악을 듣습니다. 검색의 시대가 열리면서 두꺼운 사전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내비게이션이 등장하면서 지도도 사라지고 있습니다. 미국이 독점하던 인공지능의 시대를 중국의 ‘딥 시크(Deep Seek)’가 등장하면서 새로운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피할 수 없다면 대한민국도 인공지능이라는 새로운 혁신을 받아들이고, 개발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 삶과 신앙 안에서 어떤 의미를 가질까요? 세상에서는 첫째가 되기 위해 경쟁하고, 높은 자리에 오르려 애씁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나라는 이와 다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겸손과 섬김을 강조하시며, 세상의 기준과 정반대의 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성경 속 이야기들을 떠올려 봅니다. 다윗은 형들보다 작고 힘없는 목동이었지만, 하느님께서 골리앗을 물리칠 용사로 선택하셨습니다. 또한, 마리아의 찬가에서 “권세 있는 자를 내치시고 비천한 이를 들어 올리셨다.”라고 노래하듯이, 하느님께서는 세상의 논리와 다르게 역사하십니다. 그리고 그 절정은 바로 십자가입니다. 가장 수치스러운 형벌이었던 십자가가, 구원의 상징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을 우리의 삶 속에서 어떻게 받아들이고 실천할 수 있을까요? 먼저, 우리 주변의 작은 이들에게 눈을 돌려야 합니다. 교회 공동체에서나 사회에서 ‘꼴찌’처럼 보이는 사람들, 가난한 이들,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우리는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나요? 그들을 무시하거나 외면하지 않고, 그들과 함께 걸어가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또한, 우리 자신의 태도를 돌아봐야 합니다. 우리는 때때로 세상의 성공과 인정만을 좇으며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길은 섬김과 겸손의 길입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라고 하신 말씀처럼, 우리가 진정으로 높아지는 길은 다른 이들을 섬길 때 열립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과학과 자연의 원리에서도 발견됩니다. 물리학에서는 작은 미립자들이 거대한 물질의 근원이 되고, 생물학에서는 힘센 동물이 아니라 환경에 적응하는 동물이 살아남습니다. 경제에서도 전통적인 대기업이 아니라, 작은 스타트업들이 혁신을 주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세상도 결국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원리 안에서 ‘역전의 법칙’을 따르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길은 세상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들과 다릅니다. 우리가 높은 자리를 탐하기보다 낮아지고, 다른 사람을 섬기며, 사랑과 정의를 실천할 때, 하느님 나라에서 우리를 첫째로 세우실 것입니다. 오늘 하루,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 안에서, 특별히 도움이 필요한 이들 안에서 예수님을 발견하고, 그분의 길을 따르도록 하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가슴에 새기며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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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04. 연중 제 8주간 화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베드로 사도는 어떤 마음으로 오늘 복음에서와 같은 말을 했을까요? 청년이 주님께 영원한 생명에 관한 말을 했을 때 주님은 분명 나눔에 관해 들려주셨습니다.
그런 후 베드로 사도는 주님께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청년에게 모든 것을 나누고 나를 따라오라고 하셨던 주님의 말씀은 베드로 사도는 어떻게 받아들인 것일까요? 모든 것을 버리고 따라오라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했을까요? 베드로 사도나 다른 사도들처럼?
그러나 청년도 그렇고 베드로 사도를 포함한 모든 사도가 아직 버리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다 버렸다고 말하지만 버리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나’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나’를 버리지 못했습니다.
당신도 저 사람의 제자가 아닙니까? 당신도 갈릴레아 사람 아닙니까? 라고 묻는 사람들에게 베드로는 ‘나는 아닙니다.’라고 세 번이나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마지막까지 버리지 못하고 있었던 것은 바로 ‘나’입니다. 그런 베드로 사도가 순교로써 버린 것 또한 ‘나’입니다.
우리 중에도 ‘나는 주님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했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신있게, 거들먹거리며, 그것이 꼭 자랑거리라도 되는 것처럼, 훈장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아직 ‘나’는 버리지 못한 것입니다.
‘나’를 버리지 못하면 언젠가 그 ‘나’는 주님 자리에 올라 주님을 저버리게 될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며 우리가 얻게 되는 것 중 가장 기뻐해야 하는 것은 바로 ‘나를 버림으로 얻게 되는 주님’입니다.
⭐우리끼리 통하면 되는 것을….
친구를 기다리려 카페에 앉았습니다.
커피를 마시는데 장년의 남성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어~ 이따가 저녁 7시에 거기서 보자고,
거 골목 지나면 나오는 곳 있잖아.
그 뭐냐….
그래…. 669 치킨~
오랜만에 치맥 하자고~~~
한참을 생각했습니다. 669 치킨~ 새로 나온 치킨 브랜드인가?
저도 치킨을 좋아해서 웬만한 치킨 브랜드는 다 알고 있는데…. 669는 처음이라서….
그때 그 남성은 이렇게 말하며 크게 웃었습니다.
아~~ 669가 아니라 bbq~~~
뭐 우리만 통하면 되지 않을까요?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과 통한다면….
하늘과 우리가 통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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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04. 연중 제 8주간 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과 일치의 여정중인 교회 공동체
“따름과 보상, 전례와 삶”
“올바른 길을 걷는 이는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시편50,23ㄴ)
오늘 화답송 후렴이 위로와 힘을 줍니다. 내일 부터는 사순시기가 시작됩니다. 사순시기를 살아가는데 오늘 말씀도 좋은 격려가 됩니다. 올바른 전례는 올바른 삶에 결정적 영향을 줍니다. 전례와 삶은 함께 갑니다. 삶은 전례로 표현되고 전례는 우리를 주님을 닮은 꼴로 형성해 줍니다. 전례없는 삶은 공허하고 삶이 없는 전례는 맹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일치의 여정과 함께 가는 전례와 삶입니다. 이 자체만으로도 보상인데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 약속한 보상은 놀랍고 우리 수도자들이 체험하는 바이기도 합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을 때 결과에 대한 베드로의 물음에 주님의 거침없는 답변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백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주님 때문에, 복음 때문에 지상 것들의 집착에서 벗어나 모든 것을 버리고 홀가분하게 주님을 따랐을 때 자유로움과 더불어 그에 따른 축복이 상상을 초월합니다. 서로 독점하지 않고 나누고 섬기며 공유하니 어느 하나 부족한 것이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 수도자들이 모든 것을 버리고 수도원에 들어와 하느님을 아버지로 교회를 어머니로 둔 교회 가정 공동체의 품안에서 형제자매들로 살아갈 때의 은혜로운 체험이기도 합니다.
비단 당대의 제자들이나 오늘의 수도자들처럼 문자 그대로의 버림은 아닐지라도 우리 믿는 이들에게도 끊임없이 내외적으로 버리고 비워가며 주님을 따르는 여정은 필수입니다. 우리의 버림과 따름은 단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평생 과정입니다.
모든 것을 버렸다는 수도자들 역시 평생 버림과 따름의 여정중 주님과의 일치도 날로 깊어질 것입니다. 주님을 믿는 모든 이들 역시 별다른 보상이 없어도 이 버림과 따름중에 날로 깊어지는 주님과 일치의 삶이, 일치의 공동체 자체가 최고의 축복이란 생각이 듭니다.
평생 버림과 따름을 통한 주님과 일치의 여정에 전례의 역할이 결정적 중요성을 지닙니다. 집회서의 말씀을 통해 전례와 삶이 하나된 최고의 경지에 절대적으로 공감하게 됩니다. 이런 삶자체가 전례요, 이런 삶 자체가 축복이자 보상입니다. 오늘 집회서 말씀이 참 적절하여 많은 부분을 인용합니다. 전례와 삶이 하나임을 보여줍니다.
“계명에 충실한 것이 구원의 제사를 바치는 것이다.
자선을 베푸는 것이 찬미의 제사를 바치는 것이다.
악을 멀리하는 것이 주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이다.
불의를 멀리하는 것이 속죄하는 길이다.
주님 앞에 빈손으로 나타나지 마라.
의로운 이의 제물은 제단을 기름지게 하고, 그 향기가 지극히 높으신 분께 올라간다.
제물을 바칠때는 언제나 즐거운 얼굴을 하고, 십일조를 기쁘게 봉헌하여라.
그분에게 뇌물을 바치지 마라.
불의한 제사에 기대를 갖지 마라.
주님께서는 갚아 주시는 분이기에 일곱 배로 너에게 갚아 주시리라.”
삶의 중심을 잡아주고 삶의 의미를 선명히 해주는 주님께 바치는 예배이자 전례임을 깨닫습니다. 바른 삶은 바른 전례로 표현되고 바른 전례는 바른 삶의 꼴을 형성해 줍니다. 하루하루 평생 버림과 따름을 통한 주님과 일치의 여정에 결정적 도움이 되는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전례의 은총입니다.
“은혜를 베푸신 주님께 노래하리이다.
지극히 높으신 주님 이름 찬양하리이다.”(시편13,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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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04. 연중 제 8주간 화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까닭>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마르 10,29)
당신을 품으러
나를 비웁니다
당신을 따르러
나를 멈춥니다
당신을 닮으러
나를 지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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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04. 연중 제 8주간 화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백 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마르 10,29-30).
가족을 버린다는 것의 영적 의미
이 말씀으로 혼란스러워하지 마시고, 이보다 더 심한 말씀이 다른 곳에 나온다 하여 충격을 받지도 마십시오. “누구든지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와 자녀,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26 참조). 원수마저 사랑하라고 촉구하시는 평화의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너무나도 사랑하는 사람들을 글자 그대로 미워하거나 저버리라고 막무가내로 요구하지는 않으십니다. 우리가 원수를 사랑해야 한다면, 피로 맺어진 가장 가까운 사람들도 마땅히 사랑해야 한다고 추론할 수 있습니다. … 자기 아버지나 아들이나 형제가 믿음에 방해가 되거나 경건한 삶에 걸림돌이 된다면, 그런 유혹과 손잡아서는 안 됩니다. 육적인 일보다는 영적인 것에 힘쓰라는 것이 이 명령의 뜻입니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16
의지를 버려라
모세는 그의 하느님 야훼께 애원했다(탈출 32,11).
하늘나라와 지상 나라의 하느님이 뜻을 우리와 주고받을 때라야 하느님은 우리의 하느님이 된다. 자기의 의지를 완전히 포기하는 사람은 하느님으로부터 하느님의 의지를 보답으로 받는다. 그리고 하느님의 의지는 그 사람의 의지가 된다. 이런 일이 일어나려면 어찌해야 하는가? 우리의 의지를 버리면 된다.
이 때문에 사람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 특히 자신의 아집을 하늘나라를 위해 버려야 합니다. 여전히 자신의 아집을 어느 정도 붙들고 있는 사람은 하늘나라를 얻을 수 없습니다. 반면에 자신을 버리고 자신의 아집을 버린 사람은 모든 물질적인 것을 버리기가 수월할 것입니다.
우리의 의지가 하느님의 의지로 변화되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우리 자신을 버리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은 이렇게 말한 다: ‘영으로 가난한 사람 , 곧 의지가 가난한 사람은 ‘복되도다’ . … 그대 자신을 돌아보고, 그대 자신을 발견하거든, 그대 자신을 버려라. 그것이야 말로 최상의 비결이다.” 우리 자신을 버리는 것이야말로 하느님을 사로잡는 비결이다. 선한 사람이 하느님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보기 바란다. 자신의 의지를 언제나 하느님께 완전히 복종시키는 사람은 하느님의 마음을 사로잡고. 하느님을 단단히 붙잡는다. 그러하기에 하느님은 그 사람이 바라는 것만을 바란다. 그리고 이 바람은 언제나 우리의 행복을 위한 바람이다.(342)
✝️ 화요일 성령(성시간)의 날✝️
거룩한 성심에 대한 묵상, 요셉 맥도넬 신부
성심에 대한 묵상
첫 번째 시리즈
첫 금요일 신심
II. 성심을 둘러싼 가시관
서론1. 예수님의 성심이 가시관에 둘러싸인 모습을 바라봅니다.
서론2. 이 가시관의 의미를 이해하고, 그것이 가르치는 교훈을 배우도록 은총을 청합니다.
성 베르나르도는 그리스도의 이마를 둘러싼 네 가지 종류의 관을 구분하였으며, 우리는 이 네 가지 관을 성심 주위에 둘러싸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요점- 슬픔의 관
두 번째 요점- 자비의 관
세 번째 요점- 정의의 관
네 번째 요점- 영광의 관
첫 번째 요점- 슬픔의 관
성찰
구세주의 성스러운 머리를 찌르고 말로 다할 수 없는 육체적 고통을 가져온 잔혹한 가시관에는 그보다 더 잔혹한 슬픔의 관이 몰래 감돌고 있어, 그분의 가장 온화하고 사랑하는 심장을 찌르고 찢었습니다. 그 가시들은 그분에게 충실해야 했던 이들의 죄와 불성실함, 배신, 무관심 또는 냉정함이었습니다. 그분은 말씀하셨습니다, "모욕이 제 마음을 바수어 저는 절망에 빠졌습니다. 동정을 바랐건만 허사였고 위로해 줄 이들을 바랐건만 찾지 못하였습니다." (시편 69,21).
"원수가 저를 모욕한 것이 아닙니다. 그랬다면 제가 참았을 것입니다. 저를 미워하는 자가 제 위에서 거드름을 피운 것이 아닙니다. 그랬다면 제가 그를 피해 숨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너, 내 동배 내 벗이며 내 동무인 너." (시편 55,13-15).
적용
그리스도께서 어느 날 복된 마르가리타 마리아에게 피투성이로 덮이고 상처로 가득 찬 모습으로 나타나셨을 때, 그분은 자신이 이 상처를 특히 그분의 봉사를 위해 헌신된 영혼들로부터 받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그들 중 하나였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앞으로 저의 행동은 어떠해야 합니까?
애정과 결심
나의 예수님, 제가 나의 죄로 당신의 성심을 상하게 했다면, 저의 사랑으로 보상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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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04. 연중 제 8주간 화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버리면 더 많이 얻는다는 진리를 /
박윤식 [big-llight] 250303. 19:58 ㅣNo.180471
선물과 뇌물의 차이는? 선물은 주는 이의 기쁨이 담겨야. 환한 얼굴로 상대의 기쁨을 내가 먼저 맛본다. 하지만 뇌물은 상대의 기쁨보다 나의 이기적 욕심이 있다. 행여 기대한 만큼의 돌아올 대가가 작다면 서운함 갖는 게 선물과는 다르리라. 물론 아무 조건 없는 순수한 선물은 없을 수도. 순수하게 전한 것이라도, 언젠가 상대방이 다른 식으로라도 그것에 대한 보답을 줄 것을 기다리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니, 사실 우리는 뇌물 같은 선물을 주고받는지도 모르겠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고백했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 버리고 스승님만 따랐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나 때문에 집이나 가족, 토지를 버린 이는 현세서 백배 받을 것이고, 내세서는 영원한 생명 누리리라. 또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제자들은 스승님을 메시아로 확신해 모든 걸 버리면서 에 상응하는 것을 은근히 기대했을 게다. 그래서 스승 예수님께 노골적으로 자신들 요구를 들이대는 것이다.
평생 초등 교사로 봉직한 분이 계셨는데, 중년까지 벽지로만 다녔단다. 도시로 갈 기회가 있었지만 늘 변두리였다. 어느 해에는 본당 교우 협조로 제법 큰 도시 갈 기회였지만 그 발령 역시나 촌이었다나. 그런데 훗날 벽지 근무자에게 우대 제도가 도입되어, 그간의 근무로 동료보다 훨씬 빠른 승진을 하였단다. “주님께서는 우리보다 생각이 훨씬 깊습니다. 지난날 화낸 일들은 너무 부끄럽습니다.” 그분 회고다. 아무튼 그분 속내 미리 아는 이는 과연 몇이나 될지?
사실 집과 가족을 버릴 정도의 신앙생활 해야 한다는 복음에 동의하고 싶지 않아, 매번 미사 때마다 부담 느낀 우리이다. ‘나와 복음을 위한 이는 박해 받겠지만 넘치는 보상도 받으리라.’ 라는 예수님 말씀에서 시련의 의미를 깨닫는다면, ‘꼴찌가 첫째 되는 일’도 의당 겪을 게다. 심지어는 가정과 부를 저버린 현세의 그 고통이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마저 보장 받을 수도.
이처럼 예수님 따르려면 육적인 차원을 떠나 영적인 것에 온 힘 쏟아야만 하리라. 그래서 믿음의 삶을 사는 우리는 많은 걸 포기해야만 한다. 주일 아침 늦잠 포기하고 미사 참례하자. 신앙을 반대하는 부모, 형제 친척들의 눈치도 뒤로하고 십자가만 보고 나아가자. ‘원수마저도 사랑하라.’ 하신 예수님을 따르려면, 믿음의 걸림돌이 되는 그 어떤 유혹도 뿌리쳐야 할 게다.
신앙인이기에 삶에서 해야 할 것과 말아야 할 행위의 선택에는 많은 고민이 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내세의 영원한 생명의 원하는 이들에게 지금은 꼴찌지만 첫째 되는 멋진 복음을 주셨다. 누구든지 당신과 복음 때문에 모든 것을 버린 이에게는 정말 놀라운 선물이다. 이는 예수님만을 바라보며 그분의 십자가와 멍에를 지고 따르는 우리에게 약속하시는 큰 축복이다.
지금 우리의 신앙생활도 너무 많은 욕망을 가졌는지 점검할 필요가. 혹시 우리 기도와 봉사에 때로 너무 많은 조건을 기대하는 뇌물은 아니었는지? 우리와 하느님 셈법에서 ‘첫째가 꼴찌,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 가운데 우리는 과연 어느 쪽인지? 예수님 따르고자 천추의 원수지간인 이에게 다가가 신앙으로 하나가 된 우리이다. 오랜 불화로 멀리한 이에게 같은 믿음에 영적인 굶주림을 마음껏 달래며 자존심마저 내던진 처지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만을 믿고 바라보면서 얻는 보상이리라. 버리면 더 많이 얻는다는 예수님의 이 말씀은 꼭 새길만한 진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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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04. 연중 제 8주간 화요일. 한창현 모세 신부님.
오늘 복음을 어제 복음 말씀과 함께 바라봅니다.
어제 복음에서 부자는 예수님께 영원한 생명에 대한 답을 얻기를 기대하였지만, 가진 것을 팔고 당신을 따르라는 말씀을 듣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가 그렇게 한다면 하늘 나라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어쩌면 부자는 하늘이 아니라, 지상에서 보물을 차지하고 싶었을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이미 모든 것(집, 가족, 토지 등)을 버렸으니 부자와 달리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라고 기대하였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축복을 약속하시는 대신에, 현세에서는 박해를 받고 내세에서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어쩌면 제자들 또한 현세에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싶었을지 모르겠습니다.
부자와 제자들은 저마다 예수님께 자신들이 바라는 것을 얻을 수 있으리라 기대하였지만, 전혀 생각하지 못한 충격적인 답변을 듣습니다. 기대한 것과 정반대의 답변이었습니다.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가 되는 이들이 많을 것”(마태 19,30)이라는 말씀의 뜻이 여기에 담겨 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얻으려 노력하고 희생하면서 때로는 엄청난 것을 포기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부자와 제자들을 보면 그 무엇을 우리가 바라는 때에, 바라는 방식으로 얻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오늘 복음을 들으며 우리 신앙의 자세를 돌아봅니다. 우리는 마음의 평화와 관계의 회복을 지금 당장 얻고 싶어 합니다.
그러다 안 되면 쉽게 실망하고 신앙의 의미를 되묻기도 합니다.
예수님께 모든 것을 맡긴다는 뜻을 다시 한번 마음에 새겨 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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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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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04. 연중 제 8주간 화요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기 위해서
그리고 복음을 살아가기 위해서
자신이 가진 것을 버린 사람은
박해도 받겠지만
보상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박해라는 표현으로
가진 것을 버리는 것이
현세의 삶을 거스르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원하는 삶의 모습과 다르기에
박해가 일어납니다.
가진 것을 버리는 사람이
조금이라도 더 움켜쥐려는 사람을
비난하거나 판단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가진 것을 버리는 사람을 보면서
움켜쥐려는 사람은
그가 버리지 못하는 나를 무시하고 낮게 평가한다고
생각합니다.
버리지 못해서 무시당한다고 생각이 들면
가진 것을 버리면 되는데
오히려 그는 더 움켜쥐는 쪽을 선택합니다.
그러면서 생기는 마음의 불편함 때문에
가진 것을 버리는 사람을 미워합니다.
물질에서 자유로워지고 싶다고 말하지만
정작 그것이 없으면 불안합니다.
당장 먹고 살 걱정에서 오는 불안도 있지만
많은 경우 그것이 없으면
사람들이 나를 무시할 것 같아서 불안합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물질을 포기하는 경우
명예나 권력을 가지려는 강한 욕구가 나타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버리는 이에게 보상을 약속하십니다.
물론 오늘 복음에서는
내가 버린 것을 그대로
아니 양은 백 배로 늘어나지만
집을 버리면 집을 받는 식의 보상을 말합니다.
하지만 가장 큰 보상은
자유로움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소유는 안정감을 줍니다.
그래서 없으면 불안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의 불안감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얽매이지 않는 상태입니다.
어느 단체에 속해있다는 소속감은 안정감을 주지만
그 단체에서 나오는 것이
불안을 선택한다기보다는
자유로움을 선택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복음을 살아가기 위해서
가진 것을 버릴 때
불안함도 느끼겠지만
우리는 자유로움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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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04. 연중 제 8주간 화요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그런데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마르 10, 31)
봄은
그리 쉽게
오지 않습니다.
우리가 사는
현재를
받아들이고
현재를
우리가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느님을 위해
현재를
사는 사람은
이 모든 것을
버리고
하느님만을
따릅니다.
하느님을
따르는 것만으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됩니다.
버린다는 것은
관계맺음의
우선순위를
아는 것이며
우선순위의
맨 위에 계시는
하느님의 뜻을
우리자신이
실천하는
것입니다.
살기 위해
버리는
것입니다.
겨울나무도
살기 위해
나뭇잎들을
모두 버렸습니다.
버려야
얻게 되는
생명의 참된
지혜입니다.
하느님을
따르기 위해
하느님
아닌 것을
모두
버립니다.
눈과 귀를
멀게하는
집착을 버려야
하느님의 뜻이
우리의 삶에서
이루어집니다.
흐르는 물처럼
흘러가야 할
우리의
삶입니다.
영원한 생명의
진정한 자유는
집착을 버리는
진정한
자유입니다.
마음을
빼앗겨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가야 할 곳은
첫째가 되는
하느님
나라이며
영원한
생명입니다.
버림이
믿음이며
비움이
구원입니다.
이끄심이
있기에
따름이
있습니다.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흐름의 날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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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04. 연중 제 8주간 화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아마도 주님께서는 우리의 나약함과 연약함을 너무도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비록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순례 여정이지만, 기쁘고 설레는 마음으로 모든 것을 뒤로 하고
길을 떠난 수도자이지만, 오늘 복음 묵상할 때 마다 부끄럽기도 하고 송구스럽기도 합니다.
수제자 베드로 사도는 수시로 예수님께 이런 고백을 되풀이했습니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마르 10,28)
비록 그 장엄한 고백이 며칠 가지 않는 선언이라 할지라도, 그의 순수한 마음과 타오르는 열정이 부럽습니다.
아마도 주님께서는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금강석보다 더 단단한 언약과 서원을 당신께 드리지만, 인간적 나약함과 연약함으로 인해, 그리 오래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때 우리의 그 열정과 순수성을 크게 평가하시고, 우리의 결핍과 헛된 맹세조차 기쁘게 받아주시리라 확신합니다.
베드로 사도의 모습을 묵상하며 제 개인적으로 참 부끄러웠습니다.
너나 할 것 없이 흔들리는 갈대 같은 우리들이기에 나중에 지키지는 못할망정, 일단 그리도 열렬히 그리고 용기 있게 선언하는 베드로 사도의 고백이 부럽기도 합니다.
돌아보니 저도 목청 높여 외치기는 했습니다.
“하느님 아버지, 당신께서는 세례 때에 저를 당신께 봉헌하도록 하셨으니, 당신을 보다 가까이 따르도록 저를 부르시는 당신의 아들 우리 주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응답으로, 빛과 힘이신 성령의 인도 아래, 저는 온전한 자유로 당신께 저를 바치나이다.”
눈물까지 글썽이며 주님 외에 모든 것을 버리겠노라고, 그리고 남아있는 삶과 젊음과 에너지 모두를 그분께 남김없이 바치겠노라고 금강석보다 더 단단한 각오로 다짐했습니다.
그러나 뒤를 돌아보니 버리고 바치기는커녕 끝도 없이 쌓아 올리느라 정신없었습니다.
교만과 허영의 탑이 이미 높이 쌓아 올려졌습니다.
쓸모없는 가지들을 주렁주렁 매달고 그렇게 피곤한 인생을 허덕이며 살아왔습니다.
근사한 새집을 짓기 위해서는 낡고 오래된 집은 허물어야 마땅합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새 성전을 건설하기 위해 높이 높이 쌓아 올린 거짓과 위선의 탑을 과감하게 허물어버려야겠습니다.
참 주님의 제자로 거듭나기 위해 아쉽지만 또다시 버리고 또 버려야겠습니다.
거짓말처럼 또다시 봄이 찾아왔습니다.
성령의 봄바람이 불어오길 기대합니다.
성령의 바람을 타기 위해서 몸집을 줄여야겠습니다.
홀씨처럼 가벼워져야겠습니다.
그래야 성령의 바람이 부는 대로, 성령께서 이끄시는 대로 홀연히 날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버렸다고 하지만 아직도 멀었습니다.
좀 더 버려야겠습니다.
주님의 따뜻한 품에 온전히 안기기 위해 좀 더 과감히 버려야겠습니다.
쓸데없는 자존심도 버리고, 일생에 도움이 안 되는 교만함도 버려야겠습니다.
오랜 세월 쓰고 있던 위선과 거짓의 가면도 벗어 버려야겠습니다.
부단히 버리고 버림을 반복하던 어느 날 가벼워진 우리는 그토록 고대해왔던 강렬한 주님 현존을
체험할 것입니다.
버리고 또 버린 우리, 그래서 이제 남은 것이라고는 그저 주님 당신 밖에 없게 된 우리를 향해 주님께서는 활짝 미소 지으시며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백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마르 10, 2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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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04. 연중 제 8주간 화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10,28-31: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오늘 복음말씀은 어제의 결론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는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기보다 어렵다고 하신다. 베드로가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28절). 예수님은 예수님과 복음을 위하여 무엇인가를 버린 사람은 백 배의 보상을 받을 것이라고 하신다. 무엇을 버리는 것일까? 그것은 나를 버리는 것이다. 나의 능력, 나의 재물 이 모든 것을 이기적인 마음으로 나 자신만의 안위와 쾌락을 위하여 사용하여 하느님께서 원하지 않으시는 모습으로 살려고 하는 나의 인간적인 모습을 버리는 것이다. 이렇게 나를 버리는 것이지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버리라는 말씀이 아니다. 그러므로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내가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중요하다. 이에 대한 보상은 세상에서도 갚아주시고 또한 영원한 생명으로 이어지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초대교회에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은 현세의 보상을 많이 체험하였다.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은 재물이란 사용한다는 말에서 나온 것이지, 주인이 된다는 것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예수님께서도 이미 재물이란 자기의 것으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맞게 사용하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 봉사하기 위해 주어진 것으로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뜻보다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봉사보다는 그 재물에 대한 집착 때문에 그 재산이 그를 불행하게 한다고 하셨다. 지금, 이 순간, 나에게 베풀어주신 모든 은혜에 감사드리며, 나의 재능과 내가 지금 잠깐 관리하는 것들 모두가 하느님께서 나에게 세상에 사는 동안 맡겨주신 것임을 알고 그것들을 맡겨주신 하느님의 뜻에 맞게 사용하도록 노력하며 살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많은 경우에 우리는 그것들에 대한 집착 때문에 나의 관념이나 재물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기도 한다. 인간은 재물이나 사상이나 관념의 노예가 되면 자신의 주변을 올바로 보지도 못하고, 이웃을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도구로밖에 여기지 않게 된다. 주님 뜻에 맞는 삶을 살아가는, 주님 안에 복된 우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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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04. 연중 제 8주간 화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왜 가톨릭 신자는 부자가 되는 데 죄책감을 느낄까?
최근에 어떤 분과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분은 살 곳이 있는데도 그냥 넣어서 감사하게도
10억 초반에 아파트를 분양받았고 그 아파트는 지금 30억이 넘습니다.
그런데 가톨릭 신자는 너무 돈에 집착해서는 안 되니 너무 욕심내지 않으려 그냥 1억 정도의 웃돈만 받고 분양권을 팔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그 아파트를 보며 후회합니다.
가톨릭 신자분들 중에 어떤 분들은 부자가 되는 데 죄책감을 느끼는 분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가톨릭 신자는 가난해야 한다고 여깁니다.
어제 복음은 자기 재산을 다 팔 수 없었던 한 부자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부자였기에 우울했습니다.
그가 부자였기에 우울하였을까요? 그의 재산을 사랑을 위해 투자할 용기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돈을 좋아하면서도 동시에 많은 돈을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부자는 돈의 액수이지 돈에 집착하는 마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가장 친한 친구였던 라자로와 그 가족은 수천만 원짜리 향수를 쓰는 매우 큰 부자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재산을 나무라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에게 도움을 받으십니다.
그들은 그러나 그 재산 모두를 예수님을 위해 언제라도 포기할 수 있는 마음이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가난해지려는 마음으로 게으름을 합리화하지 말고, 100배의 축복을 얻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백 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예수님은 여기에서 형제, 자매의 관계는 물론이요, 집과 토지 등의 축복도 100배를 약속하십니다.
당신을 위해 포기한다면 재정적인 측면에서도 부자가 되고 그것이 내세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데 지장을 주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오히려 오늘 복음을 따르면 집과 토지와 인맥까지도 백 배를 받는 방법을 아는 것이 영원한 생명을 보장받는 길과 다르지 않습니다.
수많은 가톨릭 신앙으로 100배의 축복을 얻은 이들이 있지만, 두 현대인만을 소개합니다.
매니 파퀴아오(Manny Pacquiao)는 필리핀 남부의 극심한 가난 속에서 태어나 어려운 유년 시절을 보냈습니다.
부모님의 잦은 다툼과 별거로 인해 안정적인 가정을 꾸릴 수 없었고,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어린 시절부터 거리에서 일을 하며 생계를 유지해야 했습니다.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한 그는 필리핀에서 대중적인 스포츠인 복싱을 접하게 되었고, 이를 통해 자신의 삶을 바꿔 보고자 노력하였습니다.
천부적인 재능과 강인한 투지를 발휘하여 점차 두각을 나타냈지만, 그가 자신을 변화시킨 가장 중요한 요소로 꼽은 것은 하느님의 은총이었습니다.
파퀴아오 선수는 여러 차례 인터뷰에서 “나를 여기까지 이끈 것은 하느님의 은총이 큽니다.
하느님께서 저에게 재능과 기회를 주셨고, 저는 그것을 잘 활용하려고 애썼을 뿐입니다”
(ABS-CBN, 2013년 인터뷰)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실제로 그는 경기 전후로 기도하는 모습을 자주 보이며, 대중 앞에서도 “제 모든 업적은 하느님께서 제 인생을 이끄시는 덕분입니다.
저는 그분께서 허락하신 길을 걷고 있을 뿐입니다”(GMA News, 2019년 방송)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한때 폭음과 도박, 여성 편력 등으로 인해 많은 논란을 빚었던 시기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저는 잘못된 삶을 살았지만, 고해성사와 미사에 참례하면서 조금씩 자신을
되돌아보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만일 신앙이 없었다면 그 수렁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입니다”(ABS-CBN, 2012년 인터뷰)라고 고백하며, 가톨릭 신앙이 자신의 삶을 바로잡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밝혔습니다.
그의 신앙은 정치 활동에서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필리핀 상원의원으로 활동하면서 그는 빈곤층 복지 정책을 최우선으로 삼았으며, “더 나은 필리핀 사회 건설”이라는 목표를 세웠습니다. 그는 이에 대해 “가톨릭 신앙이 가르쳐 주는 형제애와 봉사 정신을 실현하는 것이야말로 정치가 해야 할 일입니다”라고 말하며 신앙이 자신이 품은 이상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강조하였습니다.
이처럼 매니 파퀴아오 선수의 삶은 가톨릭 신앙이 어떻게 한 사람의 내면을 변화시키고, 그것이 다시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좋은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톰 모나건(Tom Monaghan)은 미국 미시간주의 한 고아원에서 자라며 가난과 불우한 환경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가톨릭 수녀회가 운영하는 시설과 위탁가정을 전전하며 자랐던 그는 “어릴 때는 무절제함과 반항심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하지만 수녀님들께서 제게 책임감과 절제를 강조하셨고, 미사와 기도를 통해 마음을 가다듬도록 이끌어 주셨습니다.”(자서전 『Pizza Tiger』, 1986)라고 회고하였습니다.
그는 사관학교에 진학하려 했으나 재정적인 문제로 실패하였고, 군 복무를 마친 후에도 변변한 일자리를 찾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작은 피자 가게를 인수하면서 그의 인생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그는 자서전에서 “저는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해 시작했지만, 곧 이 일도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기회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열심히 일해 번 돈은 결국 다른 사람들에게도 도움이 되어야 한다.’라는 확신이 들었고, 그것이 매일의 동기가 되었습니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이후 그는 피자 배달 시스템을 혁신하며 도미노 피자를 미국 전역으로 확장시키는 데 성공하였고,
1980~90년대에는 억만장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한때는 호화 요트와 고급 자동차를 사들이며 사치에 빠지기도 하였는데, 그는 같은 책에서 “제가 이룬 부가 하느님의 뜻과 어긋나는 방식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모든 것을 정리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재물은 하느님께서 제게 맡기신 것이지, 제 마음대로 휘두를 것이 아니었습니다.”(『Pizza Tiger』)라고 회고하였습니다.
이 깨달음 이후 그는 고가의 수집품을 처분하고 대학교와 수도회, 가톨릭 자선 단체에 재산을 기부하는 데 집중하였습니다.
또한 직접 ‘아베 마리아 대학교 (Ave Maria University)’를 설립하여 신앙에 기반한 교육을 확산시키고자 하였습니다.
그는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곳에 쓰이지 않는 돈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1986년 Forbes 인터뷰)라고 강조하면서, “가톨릭 신앙이야말로 제가 삶의 목적을 다시 세우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라고 여러 차례 밝혔습니다.
결국 그의 신앙은 단순한 종교적 소속감을 넘어, 자신이 가진 재능과 부를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준 나침반과 같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부유해지는 것보다 그 부를 의미 있게 사용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이를 실천하며 살아갔습니다.
이처럼 톰 모나건의 삶 역시 가톨릭 신앙이 한 사람의 가치관과 삶의 방향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음을 보여 주는 좋은 사례입니다. 신앙이 단순히 내면의 위안을 주는 것이 아니라, 삶을 바로잡고 더 큰 목표를 향해 나아가게 하는 힘이 될 수 있음을 그의 이야기는 분명하게 증명하고 있습니다.
탈렌트의 비유를 생각해봅시다.
하느님으로부터 재능과 돈을 받은 세 하인 중 하나는 자기 한 탈렌트를 땅에 묻어놓았습니다.
그렇게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지 못하는 유일한 하인이 되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주신 능력과 재물을 투자할 능력을 키우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이 당신을 믿고 이웃을 사랑하는 일에 사용됨으로써 이 세상에서부터 100배의 축복이 주어지는 법칙을 깨닫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니 능력을 발휘하여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히려 그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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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04. 연중 제 8주간 화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영원한 생명을 원한다면 버림과 따름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때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백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그런데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마르 10,28-31)”
1) 신앙생활은 “모든 것을 버려서, 모든 것을 얻는
생활”입니다.
‘모든 것’을 버린다는 말은, ‘구원의 길’에 걸림돌이 되는 현세적이고 세속적인 것들과 물질적인 것들을 모두 버린다는 뜻입니다.
재물이든지 권력이든지 명예든지 간에 믿음 없는 사람들이 가지려고 애를 쓰는 그런 것들은 구원의 길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고, 구원받는 데에 도움도 되지 않는 것들, 도움이 되기는커녕 방해만 하는 것들이기 때문에, 구원받기를 바란다면 모두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얻는다는 말은, 하느님 나라에서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그 나라에서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은,
영원한 행복과 기쁨과 평화와 안식을 얻는 것이기 때문에 ‘모든 것’을 얻는 것입니다.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면 다른 것을 더 얻을 필요도 없고, 다른 것을 얻으려고 애쓸 이유도 없습니다.
2) “모든 것을 버려서, 모든 것을 얻는다.”는 말은,
“모든 것을 바쳐서, 모든 것을 얻는다.”가 아닙니다.
‘바치는’ 것이 아니라 ‘버리는’ 것입니다.
어떤 부자가 와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법을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가진 것을 모두 나에게 가져와라.” 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르 10,21).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예수님께 무엇인가를 많이 바치는 길이 아니라, 사도들처럼 ‘모든 것을 버리고 빈손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길입니다.
루카복음 5장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시기 전에 기적을 일으키셔서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매우 많은 물고기를” 잡게 해 주셨습니다(루카 5,6).
그런데 그 어부들은 예수님을 따라나설 때, 예수님께서 잡게 해 주신 그 많은 물고기들도 버려두고 따라나섰습니다.
<무엇인가를 많이 바치면 바칠수록 복을 더 많이 받는다고 강조하는 종교라면, 그 종교는 백퍼센트 사이비 종교입니다.
사무엘 예언자가 사울 왕을 꾸짖을 때 한 말은,
오늘날에도 살아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번제물이나 희생 제물 바치는 것을 주님께서 더 좋아하실 것 같습니까? 진정 말씀을 듣는 것이 제사 드리는 것보다 낫고, 말씀을 명심하는 것이 숫양의 굳기름보다 낫습니다(1사무 15,22).”>
3) 예수님의 말씀에서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라는 말씀은, 모든 것을 버리는 이유와 목적은 ‘구원과 영원한 생명’이라는 것을 분명히 밝히신 말씀입니다.
‘모든 것을 버리는’ 행위 자체가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이유와 목적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 가운데에는, 또 다른 종교에서는
‘무소유’ 자체에 큰 의미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무소유 자체에만 의미를 두고 있다면, 그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길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될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부자에게 하신,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라는 말씀에도 그런 가르침이 들어 있습니다.
가지고 있는 것들을 ‘그냥’ 버리라는 뜻이 아니라,
사랑 실천을 위해서 사용하라는 뜻인데, ‘버림’ 자체가 아니라, ‘사랑 실천’을 위해서 ‘버림’을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가르침입니다.
그 사랑에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모두 포함됩니다.
또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라고 말씀하셨는데, ‘모든 것을 버리는’ 일은 시작 단계일 뿐이고, 그 ‘버림’은 ‘따름’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모든 것을 버리기만 하고 예수님을 따르지 않으면, 그 경우에도 버리는 일은 아무 의미 없는 일이고, 그렇게 해서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합니다.
4) “박해도 받겠지만”은, “박해를 받아야 한다.”가 아니라, “박해를 받을 수도 있다.”이고, “박해를 받더라도 참고 견뎌야 한다.”입니다.
집, 형제, 자매, 어머니, 자녀, 토지를 백배나 받을 것이라는 말씀은, 내세에서 큰 은총을 받게 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내세에서는’이라는 말은, ‘박해도 받겠지만’의 뒤로 옮겨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현세의 복을 약속하신 적이 없습니다.>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현세에서의 처지와 내세에서의 처지가, 부자와 라자로처럼(루카 16,25) 정반대로 역전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그런데’는 ‘그러므로’로 바꿔야 합니다.>
“많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정반대로 역전되는 일이 무조건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바로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느냐에 따라서(신앙생활을 어떻게 하고 있느냐에 따라서) ‘버림’과 ‘따름’을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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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04. 연중 제 8주간 화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마르 10,28-31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백 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어제 복음은 많은 재물을 소유한 젊은이가 그 재물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지 못해 그토록 원하던 영원한 생명을 포기하고 슬퍼하며 돌아갔던 이야기였습니다. 그에 비해 오늘 복음 속 제자들은 그와는 대조적인 모습입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그분께서 주시는 더 좋은 것들을 받아 누리기 위해 자신이 소유한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른 것입니다. 문제는 제자들이 기대하는 ‘더 좋은 것’이 세상의 기준을 완전히 넘어서지 못했다는데에 있었지요. 기존에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으니 이 땅 위에 그분 나라가 실현되면 그 공을 인정받아 더 많은 재물, 더 강력한 권력, 더 큰 영광을 누리게 될 거라 기대했는데, 오히려 ‘부자는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어렵다’고 하시니 자기들의 희생과 노력이 허사가 되지는 않을까 걱정되었던 겁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제자들의 입장을 대표하여 예수님께 말씀드립니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을 따랐습니다.” 그 말에는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린 자기들의 노력과 희생을 알아달라는 뜻이, 또한 그에 대한 보상으로 ‘한 자리’ 달라는 기대와 바람이 담겨 있지요.
그런 제자들의 불안한 마음을 헤아리신 예수님은 그들에게 당신을 따르기 위해 버린 것의 ‘백 배’를 보상해 주리라고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그 보상의 정도는 당신 뜻을 따르기 위해 버리고 희생한 정도에 따라 결정된다고 하십니다. 주님을 따르기 위해 많은 것을 버림으로써 세상에서 ‘꼴찌’가 된 사람은 그만큼 하늘나라에 보화를 쌓았기에 하늘나라에서는 누구보다 큰 은총과 복을 누리는 ‘첫째’가 될 것이고, 주님을 따르기를 주저하며 최대한 버리지 않고 버틴 사람은 세상에서는 그렇게 움켜쥔 많은 재물을 가지고 ‘첫째’가 되어 떵떵거리며 잘 살지 모르나 그 시간은 오래가지 않을 것이며, 영원한 생명을 위한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기에, 하느님으로부터 너무나 멀리 떨어져있기에, 하늘나라에서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과 복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늘 결핍 속에 살아가는 불행한 처지, 즉 꼴찌가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보상은 정확히 말하면 ‘버림’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따름’에 대한 보상입니다. 즉 얼마나 버렸는지 그 양이 중요한 게 아니라, 주님을 따르는데 방해가 되는 것들을 과감하게 버린 만큼 그분 뜻을 얼마나 충실하게 따르는가 하는 그 노력의 정도가 중요한 것이지요. ‘버림’ 자체가 신앙생활의 목적이 아니라, 주님을 더 잘 따르기 위한 방법이자 과정으로서 의미가 있다는 뜻입니다. 신앙생활의 목적은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하느님 나라를 향해 머나먼 여정을 떠나야 하는데, 이것저것 지닌 게 많아 무겁고 비대해진 상태로는 그 힘든 여정을 끝까지 갈 수 없으니 버리라고 하시는 겁니다. 복음을 선포하기 위한 길을 떠날 때에 아무 것도 지니지 말라고 하시는 말씀과 그 뜻이 일맥상통하지요.
저 또한 본당 신부로 살면서 그런 점들을 아주 뼈저리게 체험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얼마 안되는 재물을 버렸더니, 꼭 필요한 곳에 필요한 만큼 충분하게 채워주시는 하느님의 놀라운 섭리를 만났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가족을 버렸더니, 제가 본당을 떠난다는 소식에 아쉽고 슬퍼서 울고 다시 남게 되었다는 소식에 기쁘고 좋아서 우시는, 선물처럼 소중하고 귀한 형제 자매들을 만났습니다. 하느님 뜻에 순명하기 위해 제 뜻과 고집을 버렸더니 제 모자란 능력과 조건을 훨씬 뛰어넘는 충만한 결실과 보람을 맺어주시는 하느님의 기적을 만났습니다. 이보다 더 기쁘고 행복한 삶이 있을까요? 그러니 여러분도 눈 딱 감고 저처럼 한 번 해보시면 어떨까요? 절대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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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04. 연중 제 8주간 화요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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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04. 연중 제 8주간 화요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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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04. 연중 제 8주간 화요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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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04. 연중 제 8주간 화요일.
오직 믿음으로만 살아가는 삶
<2025.3.4> 아침을 여는 묵상 (눅 8:40~56절)
❝오직 믿음으로만 살아가는 삶❞
❚ 오직 믿음으로 주님께 나아가는 사람만이 주님의 능력과 기적을 경험하게 됩니다.
✔ 필요한 믿음은 무엇입니까?
➲ 확신하는 믿음이 필요합니다(40~42절).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기다렸다면서 환영합니다(40절). 이들의 기다림은 질병등으로 인해 고통당하는 자들이 예수님의 치유를 바라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기다리고, 환영을 했던 것입니다. 이때 유대 사회에서 꽤나 영향력이 있었던 회당장 야이로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간청합니다. 열두 살 된 자신의 외딸을 살려달라는 간절한 외침이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야이로의 집으로 가십니다(41~42절).
예수님이라면 죽어가는 자신의 딸을 살릴 수 있을 것이라는 아버지의 확신을 담은 그 간절함을 예수님은 외면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간절한 믿음은 역사하는 힘이 있습니다. 동시에 기복신앙에만 치우친 우리의 신앙생활은 아닌지 살펴야 합니다. 그저 주님과 함께 함이 행복이고, 그 자체로 만족할 수 있는 성숙한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만이 당면한 현재의 절박한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질 때, 주님은 우리를 결코 외면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 행동하는 믿음이 필요합니다(43~48절).
그런데 가는 도중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12년 동안 혈루증으로 모든 것을 잃고, 절망의 고통 속에서 살아왔던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댔습니다. 그런데 그 즉시 그 여인의 병이 나았습니다. 그녀 역시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고백합니다. 예수님의 옷 가에 손만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는 확신(막 5:28)이 들어서 이런 행동을 했다고 말입니다(43~47절). 그녀의 믿음의 행동이 곧 기적을 만들어 냈습니다. ‘...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48절).. 예수님의 치유는 전인적 치유입니다. ‘딸아’ 이 호칭은 곧 이스라엘 공동체로의 복귀를 의미합니다. 단순히 육체의 질병만을 고침 받은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공동체의 일원으로 그리고 구원의 기쁨 속에서 평안을 누리는 삶까지 보장받았습니다.
예수님 주변에 엄청난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그러나 그 어느 누구도 기적을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던 여인만이 육신의 질병뿐만 아니라 영혼의 구원까지 얻는 놀라운 기적을 경험했습니다. 결국엔 믿음입니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이 여인이 예수님의 옷 가에 손을 대었기 때문에 병이 나은 것이 아니라 이 여인의 믿음 때문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믿음 그 자체는 모험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행동하지 않고서는 믿음을 통한 역사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다소 무모해 보일지라도 믿음의 행동을 통해 우리 삶에 당면한 현실의 문제를 해결 받을 뿐만 아니라 내면 깊숙이 자리하고 있는 아픔과 상처등도 치유 받는 은총 아래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신뢰하는 믿음이 필요합니다(49~56절).
예수님은 그만 시간을 지체하고 말았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이 와서 말합니다. ‘당신의 딸이 죽었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예수님을 괴롭게 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49절). 야이로는 하늘이 무너져 내린 것 같은 절망에 직면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그런 야이로를 향하여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50절)..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혈루증을 앓던 여인을 고쳐 주심으로 야이로의 믿음을 더욱 강화시켜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기적적인 치유 사건을 목격한 야이로에게 그 사건의 증거를 근거로 믿음을 가지도록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적은 인간의 상식과 이성을 뛰어 넘는 초월적인 것입니다. ‘...울지 말라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아이야 일어나라...아이가 곧 일어나거늘...’(52~55절)..
야이로는 하늘이 무너져 내린 것 같은 절망에 직면하게 되었고,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삶의 의욕마저 잃어버렸습니다. 시간을 지체했던 예수님이 원망스러웠습니다. 그리고 혈루증에서 고침을 받은 그 여인도 원망스러웠습니다. 그러나 ‘나의 가는 길 오직 그가 아시나니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아오리라...’ 인생의 고통과 역경을 통하여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정화 시키십니다. 온갖 것들로 오염이 되어 있는 우리의 믿음을 주님은 고난의 통로를 걷게 하심으로 씻어내 주셔서 정금처럼 우리의 믿음을 새롭게 만들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죽음도 두렵지 않은 것은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으로 나아가는 문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새로운 생명을 얻게 합니다. 절망 속에서 주저앉아 있는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능력이 있습니다. 야이로의 죽은 딸과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인을 고치신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살아 계셔서 동일한 능력으로 우리의 삶에 임하심을 믿고, 신뢰합니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에서도 오직 예수님만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혹, 믿음의 삶 때문에 비웃음을 당하는 일이 있어도 말입니다(53절)...
오늘도 확신을 가지고 행동하는 믿음의 삶을 통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는 삶을 살아갈 뿐 아니라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믿음만을 가지고서 일상의 자리로 나아가 하나님 나라를 증거 하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눅 8:40~56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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