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12. 22 - 4. 7 국립현대미술관서울관(T.02-3701-9500, 삼청로)
현대 미술의 혁명가_마르셀 뒤샹전
마르셀 뒤샹(1887-1968)은 프랑스계 미국인으로 일상 속의 오브제를 작품으로 탈바꿈시키면서 미술에 대한 전통적인 선입견에 도전한 현대 미술의 혁명가로 변기에 사인을 한 〈샘〉과 모나리자의 엽서에 수염을 그려 넣은 〈L.H.O.O.Q〉 등 일견 엉뚱하고 부조리해 보이는 그의 작품들은 미술품의 생산과 유통에 중대한 고찰을 던지며, 누구도 짐작하지 못한 쪽으로 현대 미술의 방향을 전환시켰다.
화가의 삶
뒤샹은 1902년 청소년 시절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며 당시 프랑스에서 일어나고 있던 혁신적인 미술 양식들 사이를 오가며 8년을 보냈다. 모더니스트로서의 그림을 배우던 이 기간은 파리의 입체파 그룹과의 짧지만 대단히 독창적인 교류로 이어졌고, 이때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No.2)>를 포함한 많은 핵심 작품들이 생산된다. 이 그림은 아모리 쇼에 전시되며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1913년 미국 관객에게 현대미술을 각인시킨 이 기념비적인 전시로, 뒤샹은 미국에 도착하기도 전에 이미 뉴욕에서 유명 인사가 되었다.
‘예술적’이지 않은 작품을 만들 수 있을까?
1912년 가을, 뒤샹은 회화 기법과 화가라는 직업을 포기하고, 예술가로서 작업하는 새로운 방식을 창안하기 시작했다. 기념비적인 구조물 <그녀의 독신남들에 의해 발가벗겨진 신부, 조차도(큰 유리)>의 개념을 그리기 시작한 것이다. 1913년에는 <자전거 바퀴>를 만들었는데, 이는 평범한 기성품으로 만든 예술품, 즉 레디메이드의 첫 번째 작품에 해당한다. 레디메이드는 그 무렵 뒤샹이 자신의 노트에 쓴 질문에 대한 대답이었다. “‘예술적’이지 않은 작품을 만들 수 있을까?” 1915년 여름, 뒤샹은 전쟁에 휩싸인 파리를 떠나 뉴욕으로 향했고, 수집가 루이즈와 월터 아렌스버그 부부 주변에 모인 재능 있는 예술가, 작가, 지식인 무리에 합류했다. 루이즈와 월터 아렌스버그는 이후 뒤샹의 주요 후원자가 되었다. 1917년, 뒤샹이 <샘>이라는 제목을 붙인 논쟁적인 오브제가 전시회에 출품되면서 레디메이드라는 개념과 그것의 의미에 대한 대중적 논의가 촉발됐다.
에로즈 셀라비
1920년대와 1930년대에는 다시 파리가 뒤샹의 창작 근거지가 되었다. 뒤샹은 이 시기 초반에 미술에서 체스로 직업을 바꾸겠다는 생각을 했고, 이후 근 20년간 직업정신을 가지고 체스 활동을 이어 나갔다. 하지만 동시에 에로즈 셀라비라는 여성 자아를 만들어 새로운 예술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회전하는 광학기계로 아이디어를 표현하면서, 그 영역이 미술에서 공학 및 기구 쪽으로 한층 더 옮겨가기도 했다. 또한, 작품의 미니어처 복제판을 담은 이동식 미술관을 선보여 예술에 대한 급진적 문제제기를 이어나갔다. 그가 만든 이동식 미술관은 <여행가방 속상자>라는 제목으로 1941년 여름, 이번에는 2차세계대전을 피해 파리를 떠나 다시 뉴욕으로 갔을 때 뒤샹의 망명자 처지를 상징하게 되었다.
우리 욕망의 여인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뒤샹은 자신이 아방가르드 예술의 원로로 널리 알려졌음을 깨달았다. 여러 미술관이 그의 작품을 소장했고, 특히 필라델피아 미술관은 1950년 월터와 루이즈 아렌스버그 부부가 기증한 현대 미술 컬렉션의 일부로 뒤샹의 전작 중 다수를 입수했다. 급격히 늘어난 전시, 출판, 잡지 및 신문 보도 역시 그의 명성을 한층 드높였다. 당시 많은 사람들은 뒤샹이 기본적으로는 은퇴한 상태이며 그의 예술에 대한 이야기도 끝났다고 생각했다. 사실, 이런 유명한 예술가로서 공인의 이미지가 널리 퍼지는 동안 뒤샹은 20년에 걸쳐 아무도 모르게 최후의 예술적 선언에 힘을 쏟았다. 1968년 그가 사망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하나의 방 만한 크기의 디오라마 작품 <에탕 도네>가 공개되자, 그가 말년에 남긴 작업의 통일성이 확연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