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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천-경영
-분야: 어문 > 소설 > 중·단편소설
-저작자: 김남천
-원문 제공: 한국저작권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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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홉시에서 아홉시 반까지, 현저동 사식 차입집 앞까지 차 한 대만 꼭 보내게 해달라고 며칠 전부터 신신부탁이지만, 바쁜 틈에 혹시 잊어버리지나 않을까 근심되어서, 최무경(崔武卿)이는 사무실을 나오려고 할 때에 다시 한 번 자동차 영업소로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마침 말하는 중이었다. 다른 또 하나의 전화번호를 불러도 통화중이었다. 수화기를 걸고 의자를 탄 채 바람벽에 걸린 시계를 쳐다보고, 캘린더를 무심히 스쳐보고, 그러고는 다시 수화기를 쥐었으나, 그때에 전화는 밖으로부터 걸려와서, 책상 밑에 달린 종이 요란스럽게 울었다.
"야마도 아파트 사무실이올시다."
하고 언제나 하는 버릇대로 먼저 지껄여보았으나 이내,
"네, 저올시다. 제가 최무경이에요. 안녕하신가요? 네, 지금 막 나갈려던 참이었어요. 네? 내일루요."
그러고는 다시 대답을 이어나가지 못하고, 그저 들려오는 목소리에만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한참 만에야 가는 탁상전화를 틀어쥐듯이 하고 입을 바싹 들이댄 뒤,
"내일루 연기라지만, 그러다가 아주 틀어지는 거나 아닌가요?"
하고 따지듯이 물어본다. 그러나 한참 만에,
"글쎄요, 그렇다면 몰라두요. 무슨 본인의 잘못 같은 걸루 일이 시끄럽게 되는 건 아니겠지요? 네, 그럼 안심하겠습니다. 내일은 틀림 없겠죠? 그럼 그렇게 알구 있겠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맥없이 전화를 끊고 멍청하니 의자에 기대어본다.
클라이맥스를 향해서 한 장면 한 장면 접쳐 올라가던 판에 필름이 뚝 끊어진 때처럼 허파의 공기가 쑥 빠져버리는 것 같다.
내일 이맘때까지 스물네 시간, 눈이 뒤집힐 듯이 바쁘던 며칠이 있은 끝에, 갑자기 찾아온 텅 빈 공간 같은, 예측하지 않았던 시간이다.
회전의자여서 분김에 발부리로 책상다리를 차면, 몸은 핑그르르 돌아가 저절로 강영감을 보게 된다.
강영감은 꾸부리고 앉아서 손주딸이 날라온 벤또에 차를 부어서 훌훌 소리가 나게 젓가락질을 하고 있었으나, 전화 받는 품으로 대강 한 사연을 짐작은 하였다는 듯이, 힐끗 젊은 여사무원의 얼굴을 쳐다 보곤,
"그저 재판소 일이란 게 그렇다니께. 제에길."
그러더니 먹은 그릇을 덜그럭거리며 치우고 나선,
"그래, 도 무슨 까닭인구?"
하고 뻐끔히 주름살이 구긴 얼굴로 무경이를 바라본다.
"전들 무슨 심판인지 알 수 있에요. 변호사의 말은 예심판사가 아직 검사의 승낙을 못 받았단답니다. 언제는 검사의 승낙을 얻기에 힘이 들구 애가 쓰였다더니, 나와야 나오는 게지, 변호사의 말이라구, 제멋대로 주어섬기는 걸 믿을 수가 있어야죠. 그렇다구 하나하나 따져볼 수도 없는 일이구……"
"아무렴, 그런 일이란 건 으레 그런 법인걸. 이편은 바쁘지만 저희 들야 무어 바쁠 것이 있어, 제 볼일 다 보구 생각나믄 뒤적거려보는걸. 그러나 머 낙심허실 것 없이, 여태 기대렸으니께 그깟 것 하루쯤야, 또 그래야 만나뵈시는 데 재미두 더허구, 흐흐흐……"
이가 군데군데 빠져서 입김이 샌다. 선량한 늙은이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쓸쓸하고도 정다운 생각이 들어서, 무경이는 빙그레 웃음을 입술 위에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웃음은 강영감과의 오랜 생활에서 거의 습관처럼 되어진 것이기 때문에, 속으론 딴것을 희미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어떻게 할까? 집으로 가서 어젯밤의 되풀이를 또 한 번 치를 것인가? 저녁은 외식을 하고, 나오는 분을 맞아다가 아파트에 안내한 뒤, 일러도 열한시나 자정이 되어야 집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라고, 아침에 나올 때에 일러두었는데…… 역시 간단히 무어든간 사 먹고 가리라 생각하는 것이다.
무경이는 택시영업소로 전화를 걸고 사무실을 나와서 구내식당으로 들어갔다. 사무실에 강영감이 있듯이 식당에는 산쨩이라는 어린소년이 있어서, 그는 이 안에 들어설 때마다 반가운 표정을 짓게 된다. 새로 빨아서 깨끗이 다린 흰옷을 입은 어린 소년은,
"어유, 최선생이 어쩐 일이유. 저녁 진지를 식당에서 다 잡수시구."
그의 뒤를 달랑달랑 쫓아오면서 생글거리기 시작한다.
무경이는 구석진 테이블에 앉아서, 눈이 마주친 손님들께 가벼운 인사를 나누는데, 상머리에 서서 나막신 끝으로 시멘트 바닥을 울리면서 말끄러미 무경이의 눈동자를 지키고 섰던 산쨩은,
"사진 구경 가실려구. 어딘지 맞히리까?"
하고 똥그란 눈을 삼빡거린다.
"사진 구경은 누가 산쨩인 줄 아는 게군."
유쾌로운 얼굴로 백을 식탁에다 놓고 웃어 보이니까
"오오라 참, 부민관, 내 참 음악횐 걸 까빡 잊었네."
쉴 새 없이 핑글핑글 돌아가는 전기시계를 언뜻 쳐다보더니,
"늦었수. 어서 가세야지. 무어 잡수실려? 라이스모논 카레하구 하야시만 남았는데. 빨리 될 걸룬 가께운동."
무경이는 소년의 지껄이는 것이 재미나서,
"그럼 가께우동 하지."
마치 음악회나 가려는 것처럼 대답해 보내는 것이다.
음악회 ─ 참말 음악회의 표를 미리 사서 간직해두었던 것을 지금서야 생각한다. 깜빡 잊었다. 첫날치였으니까, 벌써 시효도 넘었다.
백에서 속갈피를 뒤적이니까 한편 구석에서 티켓이 나왔다. 일 년에 잘해야 한 차례씩이나 얻어들을 수 있는 교향악단의 밤이었다. 지금쯤은 차이꼬프스끼의 「파테티크」가 연주되기 시작하였을 것을. 그는 요즘 며칠 동안 제정신이 어디로 팔려버렸던 것을 새삼스럽게 생각해본다. 그러나 기뻤다. 어떤 숭고한 일이 정성을 썼다는 만족이 그의 마음을 느긋하게 어루만져준다. 음악회 티켓 같은 것, 열 장 스무 장이 무효로 되어버려도 그는 도무지 아깝지 않다고 생각해보는 것이다. 음악회라면 하찮은 학생들의 연주회에도 빠지지 않고 쫓아 다니던 것을……
우동이 왔다. 두어 젓가락으로 빨간 국물만 남는 깜찍한 우동 그릇이 오늘처럼 그의 마음에 합당한 때는 없었다. 그는 따끈한 국물을 마시고 식당을 나왔다. 그길로 삼층을 향하여 올라가는 것이다. 복도를 돌아서 그는 하나의 도어 앞에서 발을 멈춘다.
방 앞에 서면 언제나 감격이 새로워서 가슴이 울렁거림다.
이 년이 되어온다. 그런데 아직 예심 종결도 나지 않았다. 예심이 종결되기 전에 보석운동을 하기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처음은 면회도 할 줄 몰랐다. 변호사를 대고 차츰 이력이 나서, 졸라보고, 떼를 쓰고, 계교도 꾸며보고, 갖은 예를 써서 면회도 비교적 잦아졌고, 그러고 두 달 전부터는 보석운동에 손을 댈 욕심까지 가져본 것이다. 그러한 정성이 지금 여기에까지 이른 것이다.
핸드백에서 열쇠를 꺼내 잠갔던 문을 여니까, 쌍끗한 꽃의 향기가 몸을 안기는 것 같아서, 그는 그것을 함빡이 들이마시면서 눈을 감고 한참 동안 문지방에 선 채 움직이지 못했다. 서편 창으로부터 맞은 언덕을 넘어가는 낙조가 푸른 문장에 비쳐서 은은한 광선이 꽃병이 놓인 나지막한 서가를 비스듬히 비추고 있다. 서가의 두 칸대는 텅비었으나, 가운데 칸대에는 신간과 새달의 종합잡지들이 가지런히 꽂혀 있다. 그 가운데 경제연보가 두 책, 하얀 바람벽에는 흰 테두리 속에 든 수채화가 한 폭. 흰 요를 깔아놓은 침대는 북쪽 바람벽에 붙어서 누워 있고, 침대 머리맡에 전기스탠드, 그 밑에 철필과 잉크를 놓은 작은 탁자, 양복장과 취사장이 지금 무경이가 서 있는 옆으로 나란히 설비되어 있으나, 물론 그 안에는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았다. 훤하게 유리알이 발린 남쪽 창문을 옆으로 하고 간단한 응접세트와 사무 탁자. 응접 테이블 위에는 화분이 하나.
무경이는 구두를 벗고 신장을 열어서, 거기에 들어가 있는 새 슬리퍼를 꺼내어 신고 방 안으로 들어선다. 이 커다란 건물 안에서 그 중 좋은 방이거나 제일 큰 방은 아니지만, 조촐하게 독신자가 들 수 있을 남향으로 된 아파트의 한 칸이다. 침대 위에 놓인 옷보퉁이를 한 옆으로 밀어놓고 그 옆에 털썩 걸터앉아서, 그는 벌써 한 주일째나 하루 두세 번씩은 해보곤 하는 마음과 눈의 작은 절차를 오늘도 세번째나 되풀이해본다.
무어 부족한 거나 없는가? 방 안을 쭉 둘러 살피는 것이다. 옷보퉁이에는 새 잠옷이 있고, 침대는 이만했으면 쇠약한 몸을 편하게 가로 눕힐 만큼은 편안하고, 방 안의 장치도 설비도 만족할 정도는 아니지만 간소한 대로 정성을 다한 것, 오랫동안 새로운 지식에 굶주렸으니 그동안의 사회 정세의 변동이나 추세나 짐작할 정도의 신간, 경제를 전문하던 터이니 경제연보의 새것을 두 권, 그리고 복잡한 세계의 분위기나 두루 살피라고 종합잡지를 사다 꽂았다. 꽃을 한 묶음 화병에 꽂고, 집에서 정성 들여 기르던 꽃화분을 한 탁자에 준비하고…… 이만했으면 우선 그를 맞아들이기에 시급한 준비는 된 것이라고 그는 거듭 생각하는 것이다. 그는 한참 동안 입술 가에 만족한 웃음을 그리면서 앉아 있다가, 갑자기 생각난 듯이 핸드백을 들고 그 안에서 사내의 회중시계를 하나 꺼내었다. 커다란 크롬 껍데기의 월섬이 재깍 소리를 울리며 기다란 쇠줄을 끌면서 나타났다. 손에 쥐어보면 묵직한 것이 믿음성이 있다.
오시형(吳時亨)이가 학생 시대부터 차고 다니던 것이다. 사건의 취조가 끝나고 검사국으로 송치가 된 뒤, 검사 구류기간 열흘이 지나서 드디어 예심으로 회부가 되어 시형이가 영영 영어의 몸이 되어버렸을 때, 입고 들어갔던 옷가지와 함께 취하(取下)해 가져온 물건 중의 하나였다. 그때로부터 이년 가까이, 이 묵직한 회중시계는 주인의 품을 떠나서, 언제나 무경이의 핸드백 속에서 시간의 흐름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 장침과 단침은 대체 몇천번이나 빤뜩빤뜩한 흰 판을 달리고 돌았는가? 초침이 한 초 한 초씩 시간을 먹어들어가는 소리를 물끄러미 듣고 앉았다가 그 는 시계를 가만히 제 얼굴에다 비비어보았다. 차갑다. 그러나 가슴속에선 누르고 참았던 감정이 포근히 끓어올라서, 이내 그의 볼편의 체온은 크롬 껍질을 따끈하게 데우고야 만다. 가슴을 복받치는 울렁거리는 혈조를 가라앉히기 위해서 그는 한참이나 낯을 침대에 묻고 가만히 엎디어보았다.
어머니에게 저희의 관계를 승인시키기에 얼마나 애가 쓰였는가. 집과 인연을 끊듯이 한 시형이의 차입을 대고, 보석운동을 하느라고 얼마나 발이 닳도록 뛰어다니고, 뼈가 시그러지도록 일을 하였는가. 그 때문에 직업에도 나서보았다. 재판소, 변호사, 형무소로 통하는 길을 미친년처럼 쫓아도 다녔다.
그는 가슴속으로 맑고도 숭고한 쾌감을 포근히 느껴보면서 침대에서 낯을 들고 시계를 백에 챙겨 넣은 뒤 방을 나왔다. 내일, 내일 저녁이면, 그러한 정성이 하나의 보답을 받는다……
밖은 벌써 땅거미가 꺼멓게 기어들고 있었다. 아직도 채 식지 않은 공기가 바람에 불리어서 훈훈하게 움직인다. 그러나 땀발이 잡히려던 피부엔 넓은 언덕에서 흔들리는 저녁 바람은 선뜩하였다. 북아현정 쪽으로 푸른 주택지를 잠시 바라보고 섰었으나, 오랫동안의 습관으로 거리 위에 나서면 그는 늘 바쁜 사람처럼 종종걸음으로 서두른다. 감영 앞, 종로, 인사동 이렇게 세 군데서나 차를 바꾸어 타는 것도, 어쩐지 분주한 듯이 서둘러대고 싶은 마음에 합당한 것 같아서, 오늘 저녁의 그에게는 다시없는 가벼운 흥분으로 즐겁게 느껴지는 것이다. 화동 골목까지 치마폭에서 휘파람 소리가 날 지경으로 활개를 치며 걸어 올라간다.
어머니보고도 같이 가시자고 말해보리라. 처음엔 믿음직 못하다고 한사코 나무랐으나, 그런 것 때문에 이 년 만에 돌아오는 그를 대견하게 맞아주지 못할 것이 무엇인가. 인제 누가 뭐래도 장래의 사위가 아닌가. 어머니도 요즘엔 은근히 기다리고 계셨다. 같이 가시자면 기뻐하실 것이다. 나오는 당자의 기쁨은 말할 것도 없을 게구……
저의 집 대문을 들어설 땐 콧노래까지 흘얼거리고 있었다.
"엄마 있수?"
하고 응석을 담아서 불러본다. 꽃화분이 주런이 얹히어진 높직이 층계가 진 선반 옆에 선 채 무경이는 어머니 방을 향하여 불러보는 것이다. 그러나 대답이 없다. 식모방에서, 이 집에 들어온 지 겨우 한달밖에 안되는 식모가 툇마루로 뛰쳐나오며,
"아이구, 아가씨가 오셨네."
하고 얼굴에 크림이라도 바르고 있었는지, 당황히 옷 고의춤을 매만지고 섰다.
"마님은 손님이 오셔서 같이 나가섰는데, 인제 늦지 않게 곧 다녀 오신다구서…… 그런데 아가씬 웬일이세요?"
"내일 저녁으로 연기야."
하고 대답해주곤 무경이는 곧바로 제 방문을 열었다.
"대야에 물 좀 떠놔! 그러구 밥 있어?"
식모는 댓돌에서 해진 고무신을 발부리에 꿰면서 뜰로 내려선다.
"네. 그래두 찬이 시언찮으신데…… 아가씬 왜, 저녁, 밖에서 잡수신다구하시군……"
수도에서 물을 받아서 놋대야를 대청으로 나르고 비눗곽과 수건을 갖다놓고는 부엌으로 들어간다.
무경이는 낯을 씻었다. 다시 제 방으로 들어가서 볼편에 크림을 바르고 있는데,
"진짓상 이리루 들일까요?"
하고 식모가 문지방 밖에서 엿보듯 한다. 안방 어머니 방에서 함께 모여서 먹는 것을 알고 있는 식모는, 밥은 역시 그곳에서 먹는 것을 정칙으로 생각하고라도 있는 것 같다.
"그래. 내 인제 건너갈게. 어머니 방으로 들여다 놔."
"찬은 머, 굴비허구 장아찌밖엔 없는데 어떡허실까……"
하고 걱정하는 것을,
"그게면 되지, 찬물에 풀어서 한술 들면 될걸 뭐."
분첩으로 볼편을 두어 번 두드리고 무경이는 어머니 방으로 건너가서 상 앞에 주저앉았다. 밥술을 막 들려고 하는데, 길마리 머릿장 밑에 뵈지 않던 부채가 한 자루 있었다. 무경이는 그것을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이, 손님이 부채를 놓시구 가셨네."
무경이의 눈길을 따라가본 식모는, 대청마루에 엎드리듯이 턱을 받치고 주인 아가씨의 진지 드는 모양을 바라보려다가, 눈에 띈 부채에 대해서 그러한 설명을 들려주었다. 그러나 벌떡 상반신을 일으키더니 부채를 들어서 책상 위에 올려놓고 다시 뜰로 나가버렸다.
무경이는 술을 든 채 밥그릇으로 손을 옮기진 못하였다. 그는 술을 놓고 일어서서, 지금 식모가 챙겨놓고 나간 부채를 가져다 펼쳐보았다. 틀림없는 사내의 소유물이었다. 곱게 색채를 써서 그린 산수화가 있고, "위 하곡대인청상(爲河谷大仁淸賞)"이라고 쓴 밑에 "청산(靑山)"이란 화가의 낙관이 찍혀 있다. 이것으로 보아, 청산이란 화가가 그림을 그려서 하곡이란 분에게 선물로 보낸 부채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부채의 임자는 하곡이란 아호를 가진 분이다. 그리고 어머니는 이 하곡이란 분과 함께 외출하신 것이다 ─ 그런 것을 알 수 있었으나, 무경이는 첫째 하곡이란 분을 알지 못하였다.
"하곡? 하곡."
하고 입으로 두어 번 뇌어보았으나 그러한 아호와 함께 나타나는 환상은 아무것도 없었다.
‘낯도 잘 알고 이름도 잘 아는 분이면서도, 내가 그이의 호를 모르고 있는지도 모르지,’
그렇게 생각하면서 부채를 다시 책상 위에 놓은 뒤에 밥상 앞으로 돌아왔고,
"많지두 않은 찬에 어란을 잊었었네."
하고 변명하듯 하면서 가지고 들어온 식모의 손에서 접시도 그대로 묵묵히 받아놓았으나, 어쩐지 마음은 말끔히 가시지 않았다.
어머니와 같이 나간 손님이 어떻게 생긴 분인가를 식모에게 물어 보려다가 그것도 그만두었다. 그는 잠시 더 멍청하니 상 앞에 앉아 있었으나, 식모에게 눈치 채일까 저어하며, 이내 밥통을 열고 물대접에 밥을 말았다. 그러고는,
"나 혼자 먹을게 나가 있어."
하고 식모도 밖으로 쫓아버렸다.
마른반찬에 얼려서 두어 술 떠넣고 그는 다시 방 안을 살펴보지 않을 순 없었다. 장롱과 의걸이, 문갑, 책상 위의 성격책들, 모두 다 놓았던 자리에 놓여 있다. 그러나 책상 밑을 들여다보았을 때 무경이는 다소 마음이 뜨끔했다. 치렛거리로 놓아두던 놋재떨이에 피우다 버린 담배꽁초가 하나 비비어 꽂혀 있기 때문이다. 손님은 담배를 피우는 분이었다는 것을 그것으로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대수롭지 않은 발견은 아니었던 것이다. 어머니의 아는 분으로서 담배를 피우는 이는 무경이의 기억 속에는 들어가 앉아 있지 않았다. 이십여 년 동안 예수교 풍속에 젖어온 분이고, 그 속에서 청상과 부를 지켜온 어머니로서 끽연히 습관을 가진 사내 손님을 가지고 있었을 리 만무하다.
"다 먹었으니까 상 치어."
하고 외치듯 하고는 무경은 제 방으로 돌아와버렸다.
부채, 하곡, 담배 ─ 이런 것이 함께 엉켜돌면서 종시 그의 머리를 놓아주지 않는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의심은 다시금 얼마 전에 경험한 한 가지 사건을 그의 머리속에 불러내는 것이었다.
달포 전의 일이었다. 화창한 초여름의 공일날, 벌써 몇 해째의 습관에 따라 무경이는 오랜만에 만나는 휴일을 집에서 책을 읽었고, 어머니만 예배당에 가신다고 집을 나갔었다. 오정이 좀 넘으면 으레 예배당에서 돌아오셨으므로, 그는 돌아오시는 어머니와 함께 점심을 먹고, 잠시 본정이라도 다녀오려고 그 시간이 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어쩐 셈이신지 한시가 되어도 돌아오지 않았다. 강설이 길어져서 예배시간이 오래되는 것이라고 얼마를 더 기다렸으나 두시가 되어도 종내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서 무경이는 혼자서 점심을 먹고 집을 나왔다. 안국동 네거리를 거진 나왔는데, 예배당 전도부인을 길에서 만났다.
"오래간만이올시다."
하고 이 근년에 신통치 않아진 ‘타락된 교인’은, 목사나 전도부인을 만나면 다소 면구스러워져서 그다지 기다란 인사를 늘어놓지 않는 습관이 있었다. 그러면 도회인답게 경위가 바른 목사나 전도부인도 이내 무경이의 태도를 눈치 채고, 그 이상의 긴 수작을 늘어놓으려고 하지 않았었으나, 오늘만큼은 간단히 인사를 마치고 돌아서는데,
"어머님이 예배당엘 안 오셨게 무슨, 몸이래두 편치 않으신가 해서, 난 이따 저녁녘에 잠시 들러보려던 참인데……"
하고 무경이를 붙들어 세우려 들었다.
"아뇨, 별일 없으신데, 그리구 어머닌 예배당에 가신다구 오전에 나가셔서 여태 안 들어오셨는데요."
그러나 그 이상 이야기를 연장시키고 싶지 않아서,
"아마 도중에서 누굴 만나셔서 예배당에도 못 들르시구 어디 급한 일이 있어 그리로 가신 게구먼요."
하고 간단히 처치해버렸다. 그러니까 전도부인도,
"글쎄 그러신 게구먼."
하고 가버렸다.
초여름의 태양이 쨍쨍하고 유쾌해서 전차도 안 타고 본정까지 걸어가면서도 무경이는 그것에 관해서 별로 깊은 생각은 품어보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볼일을 보고 그는 두어 시간 만에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어머니는 그때에도 돌아와 있지 않았다. 참말 무슨 일이라도 생겼는가 해서 궁금했으나, 어머니는 해가 질 녘에야 낯이 좀 발그레 하니 그을린 것처럼 되어서 총총한 발걸음으로 돌아왔다.
"가정 심방에 같이 따라나섰다가 진력이 났다."
하고 묻기도 전에 어머니는 변명한다. 무경이는 깜짝 놀라 어머니의 낯을 건너다보지 않을 순 없었다. 가정 심방? 예배당에도 안 가셨던 분이 전도부인과 목사와 함께 가정 심방이라니 어떻게 하시는 말씀일까? 어머니는 그때 옷을 벗어서 옷장 안에 들여 걸고 있었으므로 다행히 딸이 변해진 눈초리와 놀란 표정을 눈치 채진 못하였으나, 무경이는 한참 동안 마루 위에서 움직이지 못하고 굳어진 조각처럼 서있었다. 다시 어머니가 마루로 나오면서,
"난 김장로 댁에서 저녁을 먹었는데 너희들이나 어서 먹어라. 그리구 얘, 나 물 좀 다우."
하고 서둘러댈 때엔 무경이는 낯을 돌리고 딴 쪽을 향하여 일부러 어머니의 얼굴을 피하였다. 어머니의 하는 말이 지어낸 공연한 거짓인걸 아는 바엔, 당황하고 부끄러운 마음을 감추려고 벙뗑하니 서둘러 대는 어머니의 표정을 정면으로 추궁하기가 계면쩍은 것이다.
어머니는 어디를 갔었기에 이렇게 나를 속이시는 것일까. 따져보면 아무렇지도 않은 일일 것 같으면서도, 홀어머니의 자식으로서 믿고, 의지하고, 응석을 부려오던 어머니인만큼, 자기를 속였다는 그것 한 가지 사실만으로 그는 한없이 쓸쓸하고 슬퍼지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이었다. 물론 그 뒤엔 그것을 깊이 기억하고 있지도 않았었지만, 그때로부터 달포나 지내었을까 한 지금, 추측할 수 없는 사내 손님이 어머니와 같이 외출을 하였다는 사실에 부딪히면, 민첩한 처녀의 예감은 벌써 어떤 길하지 못한 사태에 대하여 생각의 촉수를 뻗어 보게 되는 것이다.
무경이는 제 방에 와서도 일손이 잡히질 않아서 멍청하니 책상머리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어젯밤처럼, 세상에 나올 오시형이를 생각하면서 즐거운 환상을 향락하고 있을 마음의 여유도 생겨나지 않는다. 상상력이 뻗을 수 있는 턱까지 공상을 거듭하면서 사정의 이면으로 파고들려 애써보나, 엉클어진 생각이 붙드는 결론은 언제나 그의 마음을 쓸쓸한 구렁텅이로 떨어뜨리고 만다. 그럴 때마다 그는 다투기나 하듯이 머리를 흔들었다. 설마 어머니가…… 그럴 리는 없다. 나 하나를 믿고 청춘을 짓밟아버린 어머니가 아닌가. 모든 잡념을 떨어버리고 유혹의 손을 물리쳐버리기 위해서, 젊은 감정과 정서를 송두리째 뜯어서 파묻어버리기 위해서, 살림에 군색하지는 않은 처지면서 스스로 원하여 병자를 다루는 직업 가운데 자기의 위치를 선택하였던 어머니가 아니었던가. 스물다섯의, 서른의, 서른다섯의, 어려운 고비를 성스럽게 넘기고 사십의 고개를 이미 넘어버린 어머니가 설마 그럴 리야 있는가.
제 생각을 채찍질하고 제 마음에 모욕을 주면서 어머니가 돌아오는 것을 기다렸으나, 열한시가 가까워서 어머니의 발자국 소리가 대문 밖에 들릴 때엔, 그는 기계적으로 전기스탠드의 줄을 낚아서 불을 끄고 캄캄한 방 속에 숨어서 어머니의 얼굴과 마주 대하기를 스스로 피하여버렸다. 식모가 어머니에게, 그가 일찍이 돌아오게 된 사연을 아뢰는 것을 귓결에 들으면서도, 그는 귀를 틀어막듯이 하고 방바닥에 엎드려서 숨을 죽이고 어깻죽지를 가느다랗게 떨고 있었다.
[2]
어디까지나 어디까지나 끝이 없이 뻗어나간 것 같은 붉은 벽돌의 높직한 담장에 위압을 느끼듯 하면서, 불광이 흐릿한 굳이 닫힌 출입구 앞에서, 최무경이는 벌써 한 시간 동안이나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너무 일찍이 찾아왔었다. 그러나 다른 데서, 언제라고 꼭 작정이 없는 시간이 오기를 멍청하니 보내고 있을 수는 없어서, 그는 해가 그물그물할 때 아파트의 구내식당에서 간단한 저녁을 먹고는 곧 영천행의 전차를 잡아타고 예까지 쫓아와서, 이렇게 혼자서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사람의 내왕도 드문 언덕이었으나, 그가 와서 기다리고 있는 한 시간 남짓한 동안엔, 오늘 검사국에서 간단한 취조를 마치고 새로이 이곳에 입소하는 피의자의 패거리와, 공판정이나 예심정에 취조를 받으러 나갔던 피고들을 태운 자동차가, 두세 차례나 이 커다란 문을 드나들었고, 낮일을 여태까지 보고 늦게야 집으로 돌아가는 간수들도 작은 문을 열고는 안으로부터 꾸부정하니 허리를 꾸부리고 불쑥 양복 입은 몸뚱어리를 나타내곤 하였다. 이럴 때마다 문 열고 닫는 소리는 깜짝깜짝 무경이의 신경을 때리고 가슴을 울렁거리게 하는 것이었다. 이 년 가까이 차입을 하느라고 드나든 관계로 그중에는 안면이나 어렴풋이 있는 간수도 있었으나, 문밖에서 만나면 그들은 언제나 처음 보는 사람들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지나치곤 하였다.
밖으로부터 들어갈 사람이 다 끝났으니까, 인제 안으로부터 석방되는 사람이 나올 시간도 되었을 게다, 혹시 오시형이를 석방하라는 검사와 예심판사의 영장을 아까 재판소에서 돌아오던 간수부장의 커다란 가방이 가지고 들어간 것이나 아닌가, 지금쯤은 오랫동안 친숙해진 미결감의 한 방에서 영장을 받아들고 밖으로 나올 준비에 바쁘고 있는 것이나 아닌가 ─ 이런 공상에 취하였다가, 덜커덩하고 문에서 쇠 여는 소리가 나면 그는 깜짝 놀라서 그편으로 쫓아가보곤 하였으나 그때마다 문으로 나타나는 것은, 간수거나 사식집 사환아이거나, 그런 사람들이어서 그는 번번이 속아 떨어지지 않으면 안된는 것이었다.
아홉시가 넘어서 한참이 되니까 부탁하였던 자동차도 왔다. 자동차가 세가 나는 요즘 같은 때에 오랜 시간을 기다리게 하는 것이 미안해서 그는 자동차에서 내려서,
"안직 시간이 멀었습니까?"
하는 운전수에게로 가까이 가며,
"인제 얼추 시간이 되었을 거야요. 미터를 돌려서 시간을 계산해주세요. 바쁘신데 자꾸 무리를 여쭈어서 죄송합니다. 그러나 머 딱히 정한 시간이 아니니까 따로 도리가 있어야죠. 대개 아홉시가량이면 나올 수 있다니까 인제 얼마 기다리지 않을 거예요."
자꾸만 시계를 불에다 비추어보면서 운전수에게 미안의 변명을 늘어놓아보는 것이었다. 아파트에서 특약하고 쓰는 곳이어서 안면이 있는 운전수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다시 운전대에 올라가선 카드를 들고 연필로 무엇을 끼적거려보고 앉았다. 미터의 시계가 짤각거리다가 딸깍하고 십 전씩 넘어서는 소리가 조용한 가운데서 무경이의 초조한 신경을 자극하고 있었다. 그러나 십 분이 넘고 이십 분이 되어도 아무러한 소식이 없었다. 이러다가 오늘도 또 헛물을 켜는 것이나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면 꼭 그럴 것만 같이 생각되어 그는 더욱더 초조하게 바직바직 타는 심정을 누를 길이 없었으나, 누구에게 물어볼 수도 없고, 저만큼 전찻길 있는 데까지 뛰어내려가서 변호사 한테 다시 전화를 걸어보고 싶은 조바심까지 생겨나는 것을 인내성 있게 안타까이 참아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고 있는데 아래쪽에서 어떤 양복 입은 신사가 하나 휘우청휘우청 올라오고 있었다. 맥고자를 벗어 들고 조끼 입지 않은 가슴을 부채질하면서 자동차의 옆을 지나다가 가벼운 양장으로 몸을 꾸민 무경이를 발견한즉, 그곳으로 가까이 오면서,
"당신 누구요?"
하고 퉁명스럽게 물었다. 미처 대답할 말이 없어서 멍청하니 서 있으려니,
"당신 이름이 무언가 말요?"
하고 신사는 다시 제 물음을 설명하였다.
"최무경이에요."
"최무경? 누구 나오는 걸 기다리구 있소?"
"녜, 오시형이란 사람이 보석으로 나온다구 마중 왔습니다."
신사는 수첩을 꺼내 들고 불빛 밑으로 무경이를 오라고 하였다.
"나는 서대문경찰서 고등계에 있는 사람인데 성함이 누구라구 했지요?"
그러고는 무경이가 말하는 대로를 수첩에다 옮겨서 썼다.
"주소는 화동정…… ×십오번지."
그렇게 나직이 흥얼거리다가,
"오시형이가 당신의 무엇이 됩니까?"
하고 말한다. 무경이는 돌연한 물음에 잠시 말문이 막힐 듯이 되었으나 이내,
"약혼한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한다. 그러니까 형사는 한참 묵묵히 붓방아를 찧고 있다가,
"나이엔노쯔마(內緣[내연]의 妻[처])와는 그럼 다른 셈이죠?"
하고 묻더니, 대답도 별로 기다리지 않고 무어라고 수첩에 기록하고 있었으나,
"연령은요?"
하고 또다시 질문을 던졌다.
"스물넷입니다."
"그럼, 오시형이가 나오면 이 주소에 묵게 되는가요?"
뻐끔히 무경이의 낯을 건너다본다.
"아니올시다. 죽첨정에 있는 야마도 아파트 삼층 삼백이십삼호실에 있게 되겠습니다. 바루 경찰서에서 마주 바라다뵈이는……"
그러나 형사는 연필을 든 채 머리를 끼우뚱하고 있다가 다시 무경이를 쳐다본다. 어째서 거처할 곳이 그리로 되는가를 채 이해하기 곤란하다는 표정이었다. 그래서 무경이는,
"아직 예식을 올리지 않았다구 조선 풍속에 따라 그때까지 아파트에 드는 겁니다."
하고 설명을 첨부하였다.
"그럼, 이 아파트에는 아무도 같이 있지 않는 거지요?"
"네."
"그럼 좀 곤란한데요. 이렇게 되면 당신이 책임 있는 신원의 책임자가 되기가 힘들게 됩니다. 물론 자기가 저지른 사간에 대해서 개전(改悛)의 빛이 확실히 나타났으니까 재판소에서도 보석 같은 걸 허가한다고 생각합니다만, 다만 일단 형무소 밖으로 나오면 책임은 그 시각부터 경찰에게로 옮겨지는 거니까요. 만약에 행방이라도 자세하지 않아지는 경우가 생기면 큰일이 아니여요? 똑똑한 인수자가 없으면 경찰서에서 당분간 신원을 보호해주어야 합니다. 주소가 다른 당신을 믿고 미가라(身柄)를 석방하기는 힘들지 않습니까? 형식상으로라도……"
"제가 낮에는 거기서 사무를 보고 있습니다."
하고 무경이는 다시금 생기는 난관을 넘어서려고 열심한 태도로 말해본다.
"그런 게야 무슨 조건이 될 수 있습니까?"
하고 미소를 띠더니 잠시 어떻게 하나? 하는 자세로 머리를 끼우뚱 하고 생각한다.
"모처럼 재판소에서 허락해서 세상에 나오는 분이고, 또 몸도 몸이려니와 그만큼 판사나 검사도 인격을 신용하고 석방하는 것이니까, 나오는 날로 불쾌스럽게 다시 유치장 잠을 재운다든가 해서야 피차에 유쾌하지 못한 일이 아닙니까? 그러니까 이건 법칙상 위법이지만 내일 안으로 아파트의 책임자라든가, 누구 한 주소에 사는 분을 보증인으로 정해서 알려주시오. 그렇게한다면 오늘 밤으로 최선생을 신용하고 그대로 데려내다가 맡겨버릴 터이니까요. 내일 아침에 보고서를 작성해서 주임께 바쳐야 하니까 그전에 알려주십쇼."
"아이. 고맙습니다. 내일 아침에 말씀하시는 대로 하겠습니다."
하고 마치 이 형사가 오시형이를 석방해주는 권리를 가진 거나처럼 무경이는 그에게 대하여 감사의 마음을 표하여 보였다.
"그럼, 잠깐 동안 기다리십쇼. 대개 준비하고 있을 테니까 인제 들어가서 곧 데리고 나요죠."
하고 수첩을 접어 넣고 문 있는 데로 걸어가는 뒤에서, 무경이는 다시 공순히 머리를 수그리었다.
형사는 문지기 간수에게 안내를 구하고, 문이 열려서 이내 안으로 사라졌다.
"인제 곧 나온답니다. 경찰서에서 오질 않아서 이렇게 늦었던가봐요. 너무 기대리게 해서 미안합니다."
무경이는 다시 운전수에게로 와서 사례의 말을 건네었다.
이러구러 한 십여 분이 지난 뒤에 형사와 함께 양손에 짐을 들고서 휘뚝거리며 시형이가 문밖에 나타났다. 짐이 많아서 문안에 섰던 간수가 몇 차례씩을 내보내주는 것을 시형이는 허리를 꾸부리고 받아서 옮겨놓고 있었따. 무경이와 운전수는 그편으로 쫓아갔다. 운전수는 무거운 책꾸러미를 양손에 들고 그것을 자동차로 날랐으나, 무경이는 손으로 짐을 거들 생각도 미처 못하고 그곳에 서 있는 오시형이를 잠시 멍청하니 바라보고 있다. 시형이도 흐릿한 불광 밑으로 잠시 무경이를 건너다보았으나, 이내 형사를 향하여,
"그럼, 그렇게 하죠."
하고 말하였다. 그러니까 형사는
"최선생, 틀림없도록 해주시오. 난 그럼 여기서 갑니다."
하고 무경이 쪽만 바라보며 맥고자를 잠깐 들었다. 놓고 그곳으로부터 언덕 밑을 향하여 사라져 없어졌다.
짐을 차에서 옮겨 싣고 두 사람은 나란히 자리에 앉았다. 시형이는 흥분을 고즈넉이 숨기고 가만히,
"아, 저 불 봐라!"
하고 웃는 표정으로 시형이를 쳐다본다. 사내는 눈을 떨어뜨려 옆에 앉은 애인의 눈길을 받아서 비로소 오래간만에 그의 얼굴을 자세히 바라보았으나,
"그럼."
하고 대답하곤, 이내 낯을 돌리고, 이어서 궁둥이께를 움칠거리면서 자리를 도사리고 창밖에 지나치는 거리의 풍경을 물끄러미 내어다보고 있다.
무경이는 나직이 숨을 짚으며 앞을 바라본다. 왼편 옆구리에는 안에서 보던 책들이 어깨에 닿도록 쌓여 있다. 창고에서 풍기는 냄새가 옷보퉁이와 책과, 그리고 시형이의 몸에서까지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흥분이 가슴속으로 가라앉고 안심과 만족이 포근이 떠오르는 것을 그는 향락하듯이 느끼고 있다. 이윽고 차는 커단 아파트의 앞에 와서 멎었다.
강영감이 자지 않고 기다리고 있다가 찻소리를 듣고 나와서 짐을 옮겨주었다. 그러나 승강기도 없는 수면시간에, 짐을 삼층까지 끌어 올리는 것은 여간만 거추장스러운 일이 아니어서 그들은 강영감이 생각대로 짐을 일단 사무실로 들여놓았다가 내일 아침에 끌어올리기로 하였다.
자동차가 돌아간 뒤에 무경이는 오시형이를 강영감에게 소개하고, 그를삼층 아파트의 한 칸으로 안내하였다. 오래간만에 걷는 걸음이라고, 생각처럼은 쇠약한 것 같지 않았으나, 후들거리는 다리가 못미더워 무경이는 시형이에게 높직한 층층계를 올라가는 동안 자기의 어깨와 팔을 빌려주었다. 삼층의 마지막 계단을 돌아 올라가면서,
"제칠천국 같으네."
하고 무경이가 웃는 것을, 시형이는 그저 벌씬하니 감회가 깊은 미소로 대하였고, 복도를 돌아서 어떤 방 앞에 마주 섰을 때, 잠시 동안 주런이 나란히 하여 있는 문들로 하여 지금 다녀 나온 구치감을 연상하는 듯하다가,
"가만, 내 문을 열게."
사내의 어깨 밑에서 빠져나와서 쇠를 열고 잠갔던 문을 젖혔을 땐,
"이런 좋은 방을 다 준비했어."
하고 판장문의 핸들께를 한 손으로 붙들고 의지하듯이 서 있었다.
"인제 불을 켤게요."
무경이는 가볍게 뛰어들어가서 바람벽에 설비된 스위치를 켰다. 천장에서 드리운 불과 침대 옆 작은 탁자 위에 놓인 스탠드의 불이 일시에 켜져서 크지 않은 방 안은 구석구석까지 대번에 시형이의 두 눈 속에 들어왔다.
시형이는 잠시 동안 방 안과 방 안에 장식된 도구를 물끄러미 바라다보다가, 제 발을 굽어보며,
"이 년 전에 벗어놓은 구두를 맨발에 신었더니 발에 곰팽이가 묻었는걸."
하고 쪼그라진 구두 속에서 발을 뽑았다.
"가만 계세요. 내 걸레 갖다드릴게."
먼저 방 안에 들어가서 문을 활짝 열어놓고 시형이가 들어오는 것을 기다리고 있던 무경이는 취사장께로 가서 낡은 타월에 물을 축여들고 와서 발을 닦아주었다.
그러고는 신장에서 슬리퍼을 내놓고,
"이걸 신구……"
모시 적삼에 베 고의를 입은 사내를 이끌듯이 해서 침대에다 앉히면서,
"어때요? 비둘기장처럼 또 좁은 방으로 모시는 건 안됐지만 무경이가 한 주일이나 걸려서 준비한 거래누."
하고 응석을 섞어서 제 두 손을 사내의 무릎 위에 얹는 것이다. 오시형이는 무릎 위에 손을 잡아서 만지면서,
"무경씨껜 너무 수골 시키구 욕을 뵈서 어떡허나."
하고 나직이 감격을 넣어서 말하였다.
"별소릴 다아."
그렇게 말하면서, 그때에 사내가 힘있게 쥐어주는 손을 저도 꼬 쥐어보고는, 두 손을 쏙 뽑아서 호들갑스럽게 두어 발자국 물러나선,
"내가 뭐, 그런 소릴 듣겠다누."
하고 일부러 샐쭉해 보인다. 그러나 그의 얼굴에 떠오른 칭찬에 대한 만족한 자긍은, 무엇을 쫓아가다가 놓쳐버린 때처럼 손 둘 곳을 모르고 멍청하니 쳐다보고 있는 젊은 사내의 눈에는 적지 않이 교태를 띤 것으로 느껴졌다. 시형이는 아무 말도 입 밖에 내지 못하고 가슴속으론 우심한 갈증을 의식하면서 무경이의 눈만 쳐다보고 있었다. 눈을 바라보던 시형이의 눈이 입술로, 그리고 턱밑으로 떨어져서 가슴패기로 이동할 때, 무경이는 영리하게 사내의 마음을 낚아채듯이 발딱 몸을 옮겨서 방 가운데 놓은 탁자 뒤로 돌아가며,
"이게 무슨 꽃인지 아시죠? 제가 봄부터 여름내나 손수 길른 거예요."
코를 꽃 속으로 묻고 발름발름 향기를 맡듯 하다가, 시형이가 나직이 한숨을 지은 뒤,
"수국이지, 내가 그걸 모를라구."
하고 대답을하였을 때, 다시 낯을 들면서.
"아이, 수국을 다 아시네. 상당하신데."
사내가 픽 하고 웃으면서,
"그럼, 그것두 모를라구. 빨간 잉크를 부으면 빨개지구 푸른 물감을 쏟으면 파래지구 한다는 걸……"
하고 침상에 앉은 채로 말을 받을 때엔,
"아아주, 그런 식물학도 경제학에 있는감!"
무경이는 기쁨이 온몸을 붙든 때처럼 다시 책상 옆으로 가면서,
"이 테이블에선 편지 쓰구 공부하구, 저기선 세수하고 양치하구, 또 저기에단 책을 쭈루루니 꽂아놓구……"
양복장 있는 데로 가서는 잠옷 한 벌을 꺼내서 침상 위에 놓는다.
"웬 돈이 있어 이렇게 호사를 하구 치레를 했어."
시형이는 무경이의 애정에 대하여 감격하는 기쁜 마음을 그러한 핀잔으로 표현하고 싶었다. 그것이 더 무경이의 마음에 드는지,
"피."
하고 그는 침대에 앉으면서,
"아아주 주인인 체하시네. 허긴 인제 주인이지 머. 어머니도 금년부턴 진심으로 허락하셨으니까…… 인제 또 평양 댁의 허락이 있어야지만……"
또다시 시무룩해지다가 시형이의 왼팔이 제 어깨에 감기니까,
"평양 댁에서도 잘 말하면 허락하실 테지. 그렇죠?"
하고 낯을 들어 사내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글쎄, 그 안에 있는 동안 아직 아버지 친필룬 한 번두 편지가 온 일이 없었구, 또 무언가 그전 그러든 약혼 이야기도 그러하고 있는 모양이니깐…… 그러나 그런 게 무슨 소용이 있수. 나를 그 속에 있는 동안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먹여 살린 게 무경씨구, 또 그속에서 이렇게 나를 내온 게 우리 무경인데……"
시형이는 감격조로 말하였다. 그리고 안았던 팔을 그대로 꽉 지리 싸면서 뜨거운 입김을 무경이의 얼굴에 퍼부었다. 오랫동안 기다렸던 감격 속에 휩쓸리듯이 취하여버리면서도, 무경이는 사내에게 입술만을 주고는 꽉 붙드는 두 팔뚝의 억센 포옹에서 빠져나왔다.
감정과 정서에 주리었던 사내는 미칠 듯한 어조로,
"왜? 왜 도망해? 내가 미덥지가 못해서 그리우?"
하고 침사에서 쫓아 일어났다. 무경이는 시형이의 감정과 신경의 상태에 깜짝 놀라면서, 그러나 열심스러운 낯으로,
"일어나지 마세요. 일어나면 전 가겠어요. 다시 거기 앉으세요."
하고 명령하듯 외친다. 이러한 기세에 질리어서 사내는 추춤하니 선채 잠시 동안 자신의 마음을 돌아보는 태도였다. 시형이는 다시 침상에 걸터앉는다. 흥분된 제 가슴의 불길을 끄려곤지 낯을 슬며시 외면 한다.
무경이는 시형의 낯에 수치심의 색조가 떠오르는 것까지 보고는 그 이상 더 사내의 태도를 지키고 앉았을 수가 없어서 창문께로 몸을 피하였다. 그의 가슴도 달락거리는 소리가 들리리만큼 한없이 뛰고 있었다. 맞은편 캄캄한 언덕의 주택지에는 불빛이 빤짝거린다. 하늘에도 까만 호리쫀트 위에 뿌려놓은 듯한 별들. 마포로 가는 작은 전차가 레일을 째면서 언덕을 기어올라가는 것이 굽어보인다. 산뜻한 밤공기에 낯을 쏘이면서 천천히 가슴의 동계를 세어본다.
‘역시 그렇게 하는 것이 온당하다. 건강도 건강이려니와, 결혼식까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는 이 이상 감정의 닻줄을 늦춰서는 아니 된다.’
어느새에 땀이 났었는지, 블라우스의 속갈피를 스치는 바람에 등이 차랍다. 어떤 가볍지 않은 의무를 단행한 때처럼 그는 달콤한 자위 속에 안겨서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이렇게 높은 삼층의 들창으로부터 하늘과 길과 언덕을 바라보고 싶은 심리였다. 그런데 등 뒤에서,
"몇 시나 되었을까. 이 년 동안이나 시간을 모르구 지냈는데 밖에 나오니까 어느새 시간이 알구 싶어지는군그래."
하는 느직느직한 오시형이의 소리. 깜짝 놀라듯이 제정신을 부르며 무경이는 몸을 돌렸다. 시형이의 다정스런 미소.
무경이는 금시에 두 눈을 반짝거리며 핸드백이 놓은 테이블로 쫓아간다. 백을 들고 와선 시형이의 앞에 마주 서며,
"내, 무어 드릴려는지 아세요?"
하고 입술과 눈이 함께 생글생글 웃으려는 걸 꼭 참고 있다.
"거, 알 수 있나."
하고 능청맞게 대답하니까,
"피, 것두 몰라."
그러고는 백을 열고 크롬 껍데기의 묵직한 회중시계를 꺼내서 기다란 쇠사슬의 한끝을 쥐고 대롱대롱 쳐들어 보이고,
"이거! 이걸 제가 이 년 동안이나 갖구 다녔에요."
침판을 들여다보고는,
"야유, 열한시 반, 이렇게 늦었어!"
그러나 시형이는 학생시대부터 졸업한 뒤 여기, 증권회사 조사부에 취직한 후에까지 언제나 몸에 붙이고 다녀서, 그것을 꺼내볼 적마다,
"아유, 무겁지도 않은감!"
하고 무경이가 놀려먹던 것을 생각하고, 지금 소리를 내어 유쾌하게 웃고 있었다. 이윽고 무경이가 두 발을 모으고,
"그동안 덕택에 지각도 안하고 착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인제 관리인으로부터 소유자에게."
시계를 두 손으로 치켜들고 꾸뻑 인사를 한다. 시형이가 건네주는 물건을 기쁜 웃음과 함께 받으니까,
"보관료는 톡톡히 내셔야 해요."
하고 또다시 웃음조로 다짐을 받고, 핸드백을 챙긴 뒤에 갈 차비를 차렸다.
"내일 아침 일르게 들를게요. 허긴 시계가 없어져서 지각할런지두 모르지만…… 이내 불 끄고 푸욱 쉬이세요."
그러나 시형이는 시계를 놓고 뒤따라 일어섰다. 잊어버린 것을 채근하려는 듯한 성급한 표정이다. 구두를 신고 섰는 무경이의 곁으로 쫓아올 때, 무경이는 그러나 그러한 것에는 일부러 신경이 미치지 못하는 척, 이내 도어를 열고 복도로 빠져나오면서 손가락을 제 입술에 대어 키스를 건넬 뿐, 이미 가라앉은 두 사람의 가슴에 다시금 불을 지르려 하진 않았다.
조용해진 아파트를 나와서 안전지대 위에 섰다. 전차를 기다리며, 삼층, 오시형이가 들어 있는 방을 쳐다보니 불이 꺼졌었다. 무경이는 안심한 마음을 품고 돌아갈 수가 있 것 같았다.
‘아침 일찍이 짐을 올려다가 방을 정돈해주고, 의사를 불러다가 건강진단을 시키고, 어머니와도 정식으로 대면시키는 기회를 만들고, 옳지, 신원보증인으로 아파트의 주인을 교섭해서 경찰서로 알리 일이 무엇보다 바쁘고……’
안국동에서 전차를 버리고 그는 그러한 생각에 잠겨서 집을 향하여 걸었다. 길에는 사람의 내왕조차 드물다. 그는 집이 가까운 것을 느낀 뒤에야 비로소 젊은 여자가 거리를 걷는 시간으로선 지나치게 늦은 시각인 걸 생각하고 걸음을 재게 놀리며 골목 어귀를 휙 돌았다. 그때에 어떤 신사와 마주칠 뻔하고, 그는 깜짝 놀라 비켜섰다. 노타이 셔츠에 회색 양복을 입고 파나마를 쓴 뚱뚱한 신사 ─ 그는 잠시 손을 모자 차양에다 대고 실례의 인사를 표하고는 무경이의 옆을 돌아 큰거리로 걸어나갔다. 그러나 무경이는 움직이지 못하고 한참 동안 자리에 서서, 신사가 섰던 곳에 신사의 환영을 붙들어 세워 놓고, 가슴이 받는 충격을 가라앉히기에 애을 쓰는 것이다.
골목 안에는 물론 저희 집만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스무남은 집이나 남아 주런이 문패가 달려 있다. 지금 골목을 나간 신사가 어느 집 대문으로부터 나온 사람인지, 혹시 집을 찾으러 골목 안에 들어왔다가 허물을 켜고 돌아나가는 사람인지, 그것은 모두 무경이에게는 알수 없는 일인지 모른다. 그러나 무경이는 첫눈에 그 신사가 자기 집대문에서 나오지 않았는가 하는 착각을 받았고, 긜고 지금 그 신사는 하곡이라는 아호를 가진 부채의 주인공은 아니었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에 붙들려 있는 것이다.
무경이의 가슴은 다시 무거운 압력 속에서 불쾌스런 동계를 시작 하였다. 대문이 저만큼 보인다. 문은 닫혀 있고, 문등은 떼꾼하게 요강덩이처럼 달려 있고…… 언제나 즐거움을 가지고 드나들던 이 대문이 어쩐지 께름칙하게 느껴져서 견딜 수 없다. 그러나 그는 그쪽을 향하여 걷지 않을 순 없었다.
대문은 미니까 달랑달랑하는 종소리를 내면서 제대로 열려졌다. 식모가 나왔다. 자던 눈이다.
"아가씨, 지금 오세요?"
무격이는 대답치 않고 대청으로 올라서서 어머니 방을 건너다보았다. 자리에 누었다가 일어난다. 아무 구석을 맡아보아도 사람이 다녀나간 기척이 없어서 그는 비로소 의심에 붙들렸던 가슴을 가라앉힌다. 그러나 제가 쓸데없는 억측에 붙들렸던만큼 제 마음에 대하여 염증과 혐오감이 따르는 것은 어떻게 할 수도 없었다.
"지금 오니?"
하고 어머니는 푸른 등을 끄고 촉수가 강한 전등으로 실내를 밝힌다.
"네."
나직이 무경이는 대답할 뿐. 그러나 대청 한복판에 유쾌하지 못한 심화를 품고 서 있는 채 그는 움직이지 못한다.
"그래, 오늘은 나왔니?"
"네."
"응, 참 잘 됐다. 그래 얼굴이 과히 못되진 않었든?"
어머니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다. 잠옷도 입지 않고 얄따란 속옷만 입었다. 무경이는 머리가 헝클어진 어머니의 살을 처음으로 보기나 한 듯이, 안방으로부터 눈을 돌리고 캄캄한 제 방으로 뛰어들어갔다. 어머니가 또다시 무엇이라고 묻는 소리가 들려왔으나, 캄캄한 암흑 속에 떠오르는 것은, 여자로서의 살의 냄새를 잃지 않은 군살이 목과 배와 허벅다리에 알맞게 오르기 시작하는 어머니의 육체뿐, 만복한 식욕이 지방이 많은 음식물을 대했을 때처럼, 느끼한 군침이 입안에 돌고 비위가 불쑥 목구멍을 치밀어오르는 것을 무경이는 참을 수가 없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