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037
11월10일[연중 제32주일(평신도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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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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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7SuNK3eabIU
[서울대교구 조승현 베드로(가톨릭평화방송.평화신문 보도주간) 신부님 집전]
강론:안재홍 베다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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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세상 안에서도 충분히 거룩하게 살 수 있습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크게 착각하고 있는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교계 제도 안에 성직자·수도자들은 평신도들보다 훨씬 더 하느님 가까이 있고, 평신도들보다 훨씬 거룩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착각입니다.
교회나 수도회, 수녀회는 거룩한 곳이고, 결혼생활이 이루어지는 가정이나 세상은 속된 것으로 여기는 착각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런 그릇된 생각을 완전히 새롭게 혁신한 은총의 사건이었습니다. 교회 안에서 교황님이나 주교님들은 1중대, 사제나 수도자들은 2중대, 평신도들은 3중대가 아님을 공의회는 명확하게 강조했습니다.
“평신도들은 교회의 주체이자 교회의 주인공입니다. 교회의 위계 제도, 다시 말해서 주교직, 사제직이 하느님의 백성인 평신도 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존경하는 성 요한 23세 교황님께서는 평신도들 역시 성화의 길로 불림받았음을 명백히 강조하셨습니다.
“평신도들은 세상 안에서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평신도들은 세상 안에서 거룩함을 지향하는 신앙생활을 해나가야 합니다. 성화(聖化)된 삶을 교회 밖 세상 안에서 실천하는 것이 평신도에게 주어진 소명입니다.”
훌륭한 평신도들을 만나면서 저는 늘 확신합니다. 신분이 절대로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진흙탕 같은 세상 한가운데서 살아가면서도, 한 송이 청초한 연꽃처럼 살아가시는 분들도 많이 존재한다는 것을.
끝도 없는 고통의 세월 속에서도, 언제나 거룩함을 갈망하며,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평신도들은 이미 성화의 길로 접어들었다는 것을.
오늘 평신도 주일을 맞아 꼭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세상 안에서도 충분히 거룩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을. 평신도들께서도 간절히 열망한다면, 거룩한 갈망을 마음에 품고 살아가신다면, 세상 안에서 충분히 봉헌생활을 해나가실 수 있다는 것을.
특별히 평신도들께서는 매일 수행하고 계시는 작은 사랑의 실천을 통해, 저희 사제나 수도자들이 수행하는 직무 못지 않은 성직을 수행하실 수 있습니다.
평신도들께서 매일 행하고 계시는 가까운 사람들 가족들을 향한 봉사의 현장에서, 짜증내면서 억지로 하시는 것이 아니라, 최대한 기쁜 얼굴로 봉사하실 때, 여러분들은 이미 성화의 길을 걷고 계시는 것입니다.
‘나를 찾아오는 이웃들 한 명 한 명이 다 변장하고 찾아오시는 예수님이다.’ 생각하고, 그들을 대한다면, 여러분들은 그 어떤 위대한 주교님이나 수도자들이 수행하는 직무보다도 훨씬 고귀한 성직을 수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알쏭달쏭하면서도 참 진리의 말씀이 하나 있습니다. “스님이 술집에 들어가면 술집이 절간이 되고, 술꾼이 절간에 들어오면 절간이 술집이 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평신도들께서도 술집에 들어가시면 그 술집을 주님의 성전으로 변화시키고자 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여러분들 발길 닿은 곳마다 주님의 성전으로 변화시켜나가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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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oQ1j5D0z28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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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직자들의 선생은 언제나 평신도들이었다>
오늘은 평신도 주일입니다. 오늘 복음은 렙톤 두 닢을 바치는 과부의 믿음과 길거리에서 인사받기를 좋아하는 종교 지도자들을 비교하시며 예수님은 사도들을 가르치십니다. 예수님은 평신도를 통해 당신 미래의 사제들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사실 교회의 운명은 사도들에게 달려있습니다. 교회는 성직자들에 의해 좌지우지됩니다. 오죽하면 하느님께서 성전을 떠나시며 성직자들부터 죽이라고 하셨겠습니까?
“너희는 저 사람의 뒤를 따라 도성을 돌아다니며 쳐 죽여라. 동정하지도 말고 불쌍히 여기지도 마라. 늙은이도 젊은이도, 처녀도 어린아이도 아낙네도 다 죽여 없애라. 그러나 이마에 표가 있는 사람은 아무도 건드리지 마라. 내 성전에서부터 시작하여라.”(에제 9,4-6)
여기서 성전부터 시작하라고 한 것은 사제들부터 죽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쓰인 ‘성전’은 거룩한 성소를 의미하는 단어이고 성소는 사제들만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제들은 사제들에 의해 거룩해지기 쉽지 않습니다. 다른 사제가 잘 살면 질투가 나지
본받기 어렵습니다. 여러 이유로 그런 사제처럼 되지 못하는 자신을 합리화합니다. 그러나 평신도가 자신보다 잘하면 ‘평신도도 이만큼 하는데, 나는 뭐지?’라며 뉘우치게 됩니다.
예수님은 성 프란치스코를 통해 돈과 명예로 타락해 가는 교회를 뉘우치게 하셨습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교회를 재건하라는 하느님 음성을 듣기는 하였지만, 그저 시골의 작은 경당을 재건하라는 뜻으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알고 봤더니 무너지는 라떼란 대성당을 어깨로 받친 인물이 되었습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부제품까지 받았습니다. 부제를 받아야 사람들 앞에서 강론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프란치스코는 평신도로 남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서 더욱더 사제들에게 본보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는 성직자라는 명예를 바라지도 않으면서 성직자가 되어서도 살 수 없는 가난과 겸손의 삶을 실천했기 때문입니다.
주문모 야고보 신부를 생각해 봅시다. 박해받는 땅에 처음으로 들어와 미사와 고해성사를 해 주었습니다. 그를 보호하기 위한 우리 신자들의 노력은 대단했습니다. 평신도 최인길 마티아는 주문모 신부가 피할 시간을 벌기 위해 자신이 사제복을 입고 대신 체포되어 무수한 고문을 당했습니다. 쫓기는 주문모 신부를 목숨을 다해 보호한 강완숙 골롬바도 있습니다.
그가 체포령이 발효된 주문모 신부를 숨겨주고 있다는 사실이 발각되면 수많은 가족이 다 위험할 수 있어도 용기를 낼 수 있었습니다. 주문모 신부는 목숨을 걸고 은총을 신자들에게 베풀었습니다. 주문모 신부는 압록강까지 도망하여 자신의 고국으로 넘어가기 전에 뉘우치고 돌아와 순교합니다.
이탈리아 로피아노라는 동네에 사제들의 수련소(Scuola di formazione)가 있습니다. 사제로 일정 기간 살다가 무언가 부족하다고 느낀 이들이 와서 스스로 권위와 명예와 재물을 다 내려놓고 낮은 자세로 수련받는 곳입니다. 그런데 이곳을 만든 이는 키아라 루빅(Chiara Lubich)(1920–2008)이라는 평신도입니다.
2차 세계 대전 중 1939년 로레토의 마리아 성지를 방문하는 동안 그녀는 하느님께서 자신을 특별한 사명으로 초대하신다는 것을 느끼며 심오한 영적 소명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젊은 여성 그룹을 만들어 사랑과 일치에 초점을 맞춰 복음의 가르침에 헌신하는 공동체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지금 포콜라레 운동의 시작입니다. 저도 평신도들에 의해 시작된 ‘꾸르실료 운동’의 수원교구 지도신부를 6년간 하며 봉사자들의 모습을 보고 많이 배웠습니다. 그리고 사제와 수도자들도 이 교육을 많이 받고 변화되고 있습니다.
사제가 본받을 평신도가 줄어들면 교회는 더는 희망이 없어집니다. 사제는 그 위치상 쉽게 타락하게 됩니다. 그만큼 많은 대우를 받고 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평신도들이 눈에 보이게 큰일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늘 복음의 과부처럼 조용히 자기 일을 하면 됩니다.
성체의 기적을 온라인에 기록하여 시복을 받은 이탈리아 청년은 복자 ‘카를로 아쿠티스’가 있습니다. 그는 16세에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났지만, 그 이전에 3년의 공을 들여 세계에서 일어난 성체 기적들을 인터넷에 올렸습니다. 이는 인터넷은 잘 모른다며 말로만 강론하며 성체의 중요성을 말하는 사제들에게 커다란 본보기가 되었습니다. 아이도 할 수 있는 것을 다 했기 때문입니다. 과부처럼 조용히 섬깁시다. 그러면 주님께서 교회를 위해 그 모범으로 성직자들을 가르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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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수학 시간에 ‘공약수와 교집합’을 배웠습니다. 공약수는 두 수 사이에 공통으로 들어있는 수를 의미합니다. 교집합은 두 개 이상의 집합에서 공통으로 포함된 원소들로 이루어진 집합을 의미합니다. 즉, 두 집합에 모두 속한 원소들의 모임이 교집합입니다. 사람들은 문화나 역사가 다르더라도 인간으로서 공통된 가치를 지닙니다. 예를 들어, 사랑, 정의, 평등과 같은 가치들은 인류의 공약수와 같습니다. 여러 사회와 문화가 다르게 작동하지만, 그 안에서 발견되는 보편적 가치가 바로 공약수입니다. 현대 사회는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는 다문화 사회입니다. 각기 다른 문화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생기는 ‘교집합’은 새로운 통찰과 발전을 가능하게 합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서로 다른 문화에서 배울 수 있고, 공통의 목적을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만나서 공유할 수 있는 가치를 발견하는 것이 공동체 형성의 핵심입니다. 이러한 교집합을 통해 사회가 더욱 풍요롭게 발전합니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가 공약수와 교집합을 찾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하마스와 이스라엘도 공약수와 교집합을 찾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만 될 수 있다면 서로의 가슴에 총을 겨누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가슴에 장미를 달아 줄 수 있을 겁니다.
오늘은 ‘평신도 주일’입니다. 교회에는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가 공동체를 이루고 있습니다. 삼위일체인 하느님께서 조화와 균형을 이루면서 사랑을 주십니다. 성부인 하느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하느님을 닮은 모습으로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성자인 하느님은 몸소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가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돌아가셨지만 부활하셨습니다. 성령인 하느님은 교회와 함께 하십니다. 효경, 굳셈, 의견, 지혜, 지식, 통달, 두려움의 은사를 주십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의 최대공약수는 ‘사랑’입니다. 그 사랑이 모든 걸 가능하게 합니다. 성직자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복음을 전하고, 성사를 집전합니다. 병자를 위해 기도하고, 마귀를 쫓아냅니다. 예언의 직무, 성사의 직무, 봉사의 직무가 있습니다. 수도자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서 천국의 삶을 보여주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는 사람입니다. 수도자는 복음 삼덕을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정결, 순종, 청빈의 삶을 드러내는 사람입니다. 평신도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세례를 통해서 하느님의 자녀가 됩니다. 예수님은 그런 평신도를 무척 사랑하셨습니다. 강도당한 사람을 도와준 착한 사마리아 사람을 칭찬하셨습니다. 겸손한 세리의 기도를 칭찬하셨습니다. 믿음이 강했던 백인대장을 칭찬하셨습니다. 회개하고, 가진 걸 나누었던 자캐오를 칭찬하셨습니다.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는 모두 같은 하느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의 최대공약수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동반자입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 우리는 두 명의 과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과부는 남편이 먼저 세상을 떠난 미망인입니다. 남편이 없기에 가정도 돌봐야 하고, 돈도 벌어야 합니다. 특별한 직업이 없다면 과부들의 생활은 궁핍하고 힘들기 마련입니다. 누군가로부터 도움을 받아야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이 과부들의 삶이었습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 보여준 과부의 용기와 사랑의 실천은 그 뒤에 과부의 남다른 노력이 있었습니다. 어떤 것일까요. 첫째는 올바른 가치 기준을 확립하는 것입니다. 나의 개인적인 욕망을 따를 것인가 또는 나의 욕망을 희생하고 타인을 사랑하라는 그리스도의 요구를 따를 것인가 하는 문제는 매 순간 우리에게 다가오는 문제이며 이러한 문제에 직면할 때 우리 안에 어떤 가치 기준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서 선택하기 쉬울 수도, 어려울 수도 있는 것입니다. 둘째 자기 수양이 필요합니다. 비록 올바른 가치 기준을 내 안에 갖게 되었다 하더라도 우리는 충동적인 자신을 발견하게 되며 평소 나의 기준에 따라서 해서는 안 되는 것을 이 충동에 의지하게 되는 경우를 만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보고, 듣고 말하고 만지고 싶은 욕구를 자제하는 훈련을 쌓아야 합니다. 셋째로 기도가 필요합니다. 자신을 이기려고 노력하고 남을 위해서 우리의 재능을 제공하려는 삶을 살고 있다 하더라도 우리 안에는 많은 내면적인 어려움을 만나게 되고 결국 실패하고 말리라는 두려움을 안고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기도로서 하느님께 모든 것을 의탁하고 맡기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올바른 가치 기준을 확립하고 끊임없이 자기 수양을 하는 사람이 하느님께 꾸준히 기도 한다면 오늘 독서와 복음의 가르침을 생활 속에서 쉽게 실천할 수 있고 하느님으로부터 많은 축복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세상은 어쩌면 아름다운 사람들이 있기에 더욱 아름다운 겁니다. “전능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느님, 저희에게 해로운 모든 것을 물리쳐 주시어 저희가 평안한 몸과 마음으로 자유로이 하느님의 뜻을 따르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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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12,38-44: 과부의 헌금
오늘 전례의 주인공들은 가난한 두 과부이다. 두 과부는 하느님 앞에 믿는 이들의 상징적 표상이다. 하느님 앞에 자랑할 수 있는 부(富)는 많든지 적든지 다른 사람들과 나누기 위해 가지고 있는 것을 내어놓을 수 있는 마음의 부(富)이다. 즉, 자비로움이 부이며, 어떤 것에 대한 지나친 집착은 항상 불행이요 가난이다. 우리는 사렙타 과부에게서 두 가지 모습을 볼 수 있다. 하나는 보다 필요한 사람에게 베풀고자 하는 자비로운 마음, 즉 이웃에 대한 사랑 때문에 사물을 끊어버리는 마음이고 또 하나는 우리에게 남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까지도 요구하실 수 있는 하느님의 사자로서 그 예언자를 믿는 마음이다. 이것으로 그녀는 애덕을 실천하였으며 그것으로 몇 배의 보상을 받는다. 모든 것을 주는 사람은 모든 것을 받는다고 인도의 시성 타고르가 말했다.
“나는 이 집 저 집 문전걸식을 하며 어떤 마을을 지나고 있었다. 그때 멀리서 꿈속에서나 볼 수 있는 찬란한 빛의 황금마차가 나타났다. 나는 왕 중의 왕이신 분이라고 생각하고 기쁨으로 가득 찼다. 나는 희망에 벅차 있었고 ‘불행한 날들은 다 지나갔다’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분의 자선을 기대하면서 먼지 속 어디에 떨어질지 모르는 동전을 주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마차가 내가 있는 곳에 와서 멈춰 섰다. 그분의 시선이 나에게 와 멈추면서 미소를 지으면서 그분은 마차에서 내렸다. 나는 내 인생의 행운이 왔다고 확신했다. 그런데 그분은 즉시 나에게 오른손을 내밀며 이렇게 말했다. ‘내게 무엇을 줄 수 있겠느냐?’ 거지에게 왕이 동냥하다니 될 말인가? 나는 어리둥절하여 얼떨결에 내 식량 자루에서 조그만 곡식 한 톨을 꺼내 그분에게 드렸다. 그런데 그날 저녁 나는 내 자루에 든 얼마 안 되는 곡식 중에서 금으로 된 작은 곡식 한 톨을 발견하고서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나는 비통한 마음으로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생각했다. ‘왜 나는 모든 것을 그분께 드릴 용기를 갖지 못했었을까?’”(R. 타골)
과부의 헌금에 관한 이야기는 신학적으로 더 풍부한 의미를 담고 있다. 무엇보다도 과부의 동전에 관한 이야기가 율법학자들에 대한 가혹한 표현과 직접 연결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신앙생활을 겉꾸미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남에게 대우받기를 원하면서도 뒤로는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 먹는다.”(40절). 이렇게 위선에 가득 찬 율법 학자들과 단순하고도 충만한 과부의 믿음을 비교하고 있다. 과부는 생계를 꾸려나가기 위하여 꼭 필요한 것까지도 바쳤다. 두 번째로 과부의 봉헌은 하느님께 드리는 예배의 행위였기에 아무런 보답을 요구하지 않는 사심 없는 봉헌이었다. 가난하였지만 가진 것 모두를 하느님께 바쳤다. 헌금 궤 앞에 계신 예수께서는 헌금하는 것을 보고 계셨다. 거기에 나오는 부자들의 행위는 하느님께 제물을 봉헌한다기보다는 자신을 드러내 보이기 위한, 그리고 하느님의 자비를 돈으로 살 수 있다는 듯이 거들먹거리는 자세였다. 반면에 과부는 겨우 동전 한 닢 값어치인 렙톤 두 개를 바쳤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녀를 칭찬하신다. 생계유지를 위해 꼭 필요한 것을 다 바쳤기 때문이라고 하신다(44절).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있는 그대로의 삶과 진실성을 요구하신다. 과부는 자기의 삶과 마음을 봉헌했고, 부자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서 모아들인 것일지도 모르는 것의 부스러기를 바쳤을 따름이다.
히브리서에서 역시 계속해서 그리스도의 사제직의 새로움에 대하여 발전시키고 있다. 구약의 사제들은 매년 소나 양을 제물로 바쳤지만(히브 9,25), 예수께서는 단 한 번 당신 자신을 봉헌하시어 죄를 이기신 후 천상의 성소로 들어가셨다(히브 9,26). 그리스도께서는 오늘의 두 과부와 같이 모든 것을 받기 위해 모든 것을 내어드릴 마음의 준비를 하고 당신을 사랑하며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구원을 주시어 죄에 대한 승리를 드러내시는 분이 될 것이다. 두 과부의 이야기는 “하느님의 자비를 믿고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신, 그리고 말없이 완전히 봉헌하신 예수님 공생활의 결론이라고 할 수 있다”(E. Schweizer, Il Vangelo secondo Marco, Brescia 1971, p.274).
오늘 두 여인의 모습에서 자비로운 마음과 믿는 마음을 즉 신앙으로 자기의 모든 것을 바친 것과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 당신의 모든 것을 즉 당신 자신을 온전히 바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사제직에 참여한다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께 봉헌할 수 있는 삶이 뒤따라야 한다는 것을 오늘의 독서를 통해서 우리는 알아들을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자비로운 마음과 신앙을 우리에게 주시도록 청하여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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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최정훈 바오로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과부의 정성을 눈여겨보십니다. 부자들은 자신이 가진 것에서 얼마씩을 넣었지만, 과부는 생활비를 모두 봉헌하였습니다. 만일 교회가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한다면, 어떤 모습일지 생각해 봅니다.
평신도는 성직자가 아닌 모든 신자를 뜻하고, 교회 안에서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합니다. 그런데 교회에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이들이, 봉헌은 제 몫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자신을 봉헌하지 않는다면, 자신이 가진 것 가운데 얼마씩만 봉헌하는 부자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교회의 봉헌이 과부의 봉헌과 같게 되려면 교회의 대부분을 구성하는 평신도들도 자신을 주님께 바쳐야 합니다.
예전에는 성직자나 수도자처럼 봉헌을 서약한 이들만 주님께 봉헌할 수 있었고, 교회에 주어진 사명에 대한 책임도 그들에게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교회의 사명은 평신도를 포함한 온 교회의 책임이며, 온 교회 구성원이 헌신하고 봉헌하여 함께 이 사명에 참여해야 한다고 여깁니다. 물론 새로운 교황님 한 분이 일으키시는 변화가, 교회가 나아가는 방향을 바꿀 만큼 영향력이 매우 큽니다. 그러나 다른 모든 신앙인이 그 변화에 함께하지 않는다면, 교회는 바뀌지 않습니다. 새로 부임한 한 사제가 본당 공동체의 변화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당 신자들이 변화하지 않는다면, 그 공동체는 바뀌지 않습니다.
평신도 주일을 맞이하여 모든 평신도 그리스도인이 교회에 자신을 봉헌하고 교회의 선교 사명에 책임을 다하여 참여하는 주님의 일꾼이 되기를 주님께 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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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중요한 것은 ‘사랑’과 ‘정성’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르치시면서 이렇게 이르셨다. ‘율법학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긴 겉옷을 입고 나다니며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즐기고,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잔치 때에는 윗자리를 즐긴다. 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으면서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한다. 이러한 자들은 더 엄중히 단죄를 받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헌금함 맞은쪽에 앉으시어, 사람들이 헌금함에 돈을 넣는 모습을 보고 계셨다. 많은 부자들이 큰돈을 넣었다. 그런데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이 와서 렙톤 두 닢을 넣었다. 그것은 콰드란스 한 닢인 셈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마르 12,38-44)
1) 율법학자들에 관한 예수님 말씀을 가난한 과부에 관한 말씀에 연결해서 생각하면,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은’ 그 율법학자들이 곧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만 바친’ 부자들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남의 것을 빼앗아서 그 가운데 일부를 하느님께 바친 자들이 되는 셈인데, 남의 것을 빼앗는 것도 죄이고, 그것을 하느님께 바치는 것은 ‘더 큰 죄’입니다. <‘선한 것’을 바쳐야만 봉헌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악한 것’을 바치는 것은 봉헌이 아니고, 하느님을 모독하는 죄를 짓는 일이 될 뿐입니다.>
2)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는다는 말씀에서, 야고보서에 있는 다음 말씀이 연상됩니다. “자 이제, 부자들이여! 그대들에게 닥쳐오는 재난을 생각하며 소리 높여 우십시오. 그대들의 재물은 썩었고 그대들의 옷은 좀먹었습니다. 그대들의 금과 은은 녹슬었으며, 그 녹이 그대들을 고발하는 증거가 되고 불처럼 그대들의 살을 삼켜 버릴 것입니다. 그대들은 이 마지막 때에도 재물을 쌓기만 하였습니다. 보십시오, 그대들의 밭에서 곡식을 벤 일꾼들에게 주지 않고 가로챈 품삯이 소리를 지르고 있습니다. 곡식을 거두어들인 일꾼들의 아우성이 만군의 주님 귀에 들어갔습니다. 그대들은 이 세상에서 사치와 쾌락을 누렸고, 살육의 날에도 마음을 기름지게 하였습니다."(야고 5,1-5)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고, 일꾼들에게 품삯을 주지 않고 가로채고, 그렇게 해서 부자가 되었다면, 부유함 자체가 죄입니다. <사람들 가운데에는 ‘부자로 사는 것 자체가 죄는 아니다.’라고 말하는 이들이 더러 있는데, 그런 말을 하기 전에, 어떤 방법으로 재물을 모아서 부자가 되었는지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3) 이야기에 나오는 과부는 특정 개인만은 아닐 것이고, 율법학자들이 등쳐먹은 ‘과부들’ 가운데 한 사람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과부를 칭찬하신 것은, 가진 것을 다 바친 그 ‘비율’ 때문이 아니라, ‘온 마음’을 바쳤기 때문입니다. 만일에 ‘비율’만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누구든지 가진 것을 다 바치라는 단순한 가르침으로 오해하게 됩니다. 만일에, 나쁜 방법으로 부자가 된 자들이, 회개하지는 않고, 이웃 사랑을 실천하지도 않고, 가지고 있는 것을 다 바치기만 하면, 그것만으로 ‘좋은 사람’이라고 칭찬할 수 있을까?
이야기에 나오는 가난한 과부는 하느님을 참으로 사랑하고, 하느님 뜻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신앙인이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칭찬하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옳습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르 12,30)
가난한 과부가 바친 동전 두 닢은, 마음과 목숨과 정신과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그의 마음을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마음과 사랑을 칭찬하신 것입니다.
4) 바오로 사도는 “내가 모든 재산을 나누어 주고 내 몸까지 자랑스레 넘겨준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1코린 13,3).” 라고 말합니다. 사랑이 없으면, 모든 것이 다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따라서 ‘사랑’에 초점을 맞추면, 부유하든지 가난하든지, 가진 것 가운데 일부만 바치든지 전부 다 바치든지 간에, 그런 것들은 중요한 것이 아닌 것이 됩니다. 중요한 것은 ‘온 마음’을 다하는 ‘사랑’과 ‘정성’입니다. 사실, 부유하든지 가난하든지 간에 가지고 있는 생활비를 모두 바치는 것은 누구에게나 현실적으로 몹시 어려운 일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열의만 있으면 형편에 맞게 바치는 것은 모두 기꺼이 받아들여지고, 형편에 맞지 않는 것은 요구되지 않습니다."(2코린 8,12)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각자 형편대로 바치라는 뜻입니다. 또 가지고 있는 생활비를 모두 바치는 것은, 모든 사람이 반드시 지켜야 할 계명은 아니라는 것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5) 사도행전 5장의 ‘하나니아스와 사피라’ 부부는 전 재산을 봉헌했다는 칭찬을 듣고 싶어 하면서도 재산을 다 바치고 싶은 마음은 없어서 일부만 바쳤고, 그러면서 전부 다 바치는 것이라고 거짓말을 했습니다.(사도 5,1-2) 그때 베드로 사도는 그들이 전부 다 바치지 않은 것을 꾸짖은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속이려고 한 것을 꾸짖었습니다.(사도 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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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김인석 시메온 신부님]
<세상 속에 새겨 놓는 신앙인의 반전>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너무나 유명한 ‘과부의 헌금’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공공장소에서 눈에 띄는 옷을 입고 높은 자리를 즐기며 대접받기에 익숙해져 있는 율법학자들을 조심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는 헌금함에 다가선 과부를 언급하십니다.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 먹으면서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하는 이들 눈에 ‘가난한 과부의 헌금’은 보잘것없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가“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헌금한 것이라고 평가하십니다.
궁핍한 가운데 자신이 가진 것을 봉헌한 과부에게 주어지는 상급은 오늘 첫 번째 독서에서 암시되고 있습니다. 굶어 죽기 직전의 한 과부가 엘리야에게 대접한 물 한 모금과 빵 한 조각은 결국 떨어지지 않는 밀가루와 마르지 않는 기름으로 되돌아왔다는 것입니다.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우리 교회는 방역 당국에서 권고했던 거리두기 지침에 따라 미사 참례할 수 있는 인원을 제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성전을 아름답게 울리던 신자들의 성가 소리도 없이 넓은 성전에 드문드문 앉은 채 미사를 봉헌하는 일은 낯설고 어색하기만 했습니다. 미사 참석 인원이 줄어드니, 당연히 주일 헌금도 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하나 있습니다. 주일 헌금이 줄어든 만큼 교무금도 줄어야 하는데, 그 감소 폭이 그다지 크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한 본당만의 사례가 아니라, 대부분의 본당에서 확인된 일입니다.
그리고 주일 헌금 역시 미사에 참례하는 신자 숫자에 비하면, 그 액수가 큰 폭으로 준 게 아니었습니다. 매 주일 성당에 못 오더라도 헌금을 꾸준히 모았다가 미사에 참례하시는 날 한 번에 다 봉헌하신 분들이 많았던 덕분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 천주교 신자들의 저력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오늘은 전 세계 가톨릭교회가 평신도의 지위와 역할을 특별히 기억하는 ‘평신도 주일’이기도 합니다. 특히 우리나라 교회 역사 안에서 평신도들의 헌신은 대단했습니다.
순교 성인과 복자 대부분도 평신도였습니다. 그리고 본당의 경우, 시간이 되면 임지를 이동하는 사제와 수도자와 달리, 지속적으로 본당 공동체를 지키고 향기로운 열매를 맺는 주인공 역시 평신도입니다.
이제 더욱 하느님께 소중한 시간과 마음을 봉헌함으로써 세상 사람들에게 하느님 나라를 살아가는 설렘을 전하도록 합시다. 위기의 시기마다 놀랍도록 긍정적인 일을 만들어내는 신앙인의 반전으로 주님의 나라는 세상 안에 더 깊고 굳건히 자리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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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주보》 생명의 말씀
[서울대교구 문종원 베드로(주교좌기도 사제)]
<예수님의 화>
종종 우리는 자신의 욕구나, 자신이 믿는 정의. 가치를 관철시키기 위해서, 혹은 자신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서 등등 그럴만한 다양한 이유로 화를 내지만, 자칫 잘못 화내는 습관을 들이면 분노 조절 장애자가 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제대로 화를 내기란 쉽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자들을 조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마태오복음에서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꾸짓으시며 강하게 화를 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눈먼 인도자', '윗자리를 좋아하는 자', 길과 속이 다른 자' 등 위선자라고 꾸짓으시고, '회칠한 무팀', 독사의 족속'이라고까지 하시며 열불을 토하십니다. 그들은 하느님께 선택받았고 율법을 철저히 준수하며 거룩하게 살고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었는데, 왜 그들에게 그토록 화를 내셨을까요?
복음은 다른 구절에서도 예수님을 연민의 정으로 가득찬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지니신 동시에, 종종 분노하시는 분으로 묘사합니다. 그분은 성전에서 환전상을 내쫓으실 때 하느님의 진노를 보여 주셨습니다.(요한 2,183-15 참조) 또한 안식일에 누군가를 치유하신 것에 대해 적대자들이 시비를 걸자, "안식일일지라도 그 속박에서 풀어 주어야 하지 않느냐?"(루카 13,16) 하시며 화를 내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화를 소통의 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치시는지 당신을 지켜보는 이들을 '노기 띤 얼굴로 둘러보시고'마르 3,5 참조) 슬퍼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잘못된 행위에 대항해 화를 내셨기에 그분께서 내신 화는 올바르고 정당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화를 올바로 사용하라고 하셨지, 금하지는 않으셨습니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마태 5.22)라고 말씀하신 것도, 적개심에서 비롯되어 살인까지 유발하는 화를 멀리하고 정당하게 내야 할 화와 그렇지 않은 화를 구분하라는 의미에 가깝습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도 화를 내셨습니다. 일종의 '친근감 있는 화'입니다. 가령, 그분은 예루살렘 입성을 준비하시며 제자들에게 당신의 수난과 죽음, 부활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기 시작하자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마태 16,23)고 하시며 화를 내셨습니다. 예수님의 분노는 유혹을 물리치고 고통스러운 결정을 따르도록 도외주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우리는 해가 지기 전에 화를 풀어 악마에게 발붙일 기호 등)를 주지 말이야 합니다.(에페 4,28 참조) 될 수 있는 한 빨리 논쟁과 씨움을 해결하는 것이 좋기 때문입니다. 죄가 되는 행동이나 적개심을 품은 화를 내버려 두어 뿌리를 내리거 한다면 인간관계를 망치기 쉽습니다. 화를 표현할 때는 늘 인내와 자제력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화가 선으로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성령께 도우심을 청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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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벤저민 프랭클린을 아십니까? 미국 건국의 아버지로 알려져 있고, 미국 화폐 100달러에 새겨진 인물이기도 합니다. 여기에 많은 발명품을 만들었습니다. 피뢰침, 다초점 렌즈, 민간형 비행기, 뇌파 측정기, 홀리 그램 기술 등입니다. 그런데 그는 자기 발명품에 전혀 특허를 내지 않았습니다. 엄청난 부자가 될 수 있는 길을 스스로 포기한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발명품을 통해 큰 혜택을 누리고 있듯이 자신의 발명품으로 타인을 도울 기회가 있음에 감사해야 하며 이러한 봉사를 거리낌 없고 아낌없이 행해야 한다.”
이런 말도 남겼습니다. “쓸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재산은 실제로 소유하고 있다고 해도 정당한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의 인생철학은 ‘선(善)은 나누어야 한다’라는 것입니다. 시대의 큰 어른임이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미국 100달러에 새겨진 것이며, 지금도 많은 이의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성직자로 사는 저도 금전적 문제에 자유롭지 못했음을 솔직히 고백합니다. 사실 본당 부채가 많아서 신자들에게 직접 이야기하지는 않지만, 늘 ‘돈’을 생각하고 있거든요. 그러면서 주님께서 칭찬한 사람은 여유 있는 가운데 봉헌한 사람이 아니라, 자기 생활비 전부를 봉헌했던 과부였음을 떠올리게 됩니다.
예루살렘 성전에는 성전세와 십일조세를 받아들이기 위한 성전 금고가 마련되어 있고, 이 금고에는 열세 개의 헌금함이 배치되어 있는데 그중 하나가 자진해서 내는 헌금함으로 누구나 볼 수 있도록 공개적이었습니다. 당연히 부자는 많이 넣고 가난한 이는 조금밖에 넣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부자는 돈을 많이 넣고 그 대가를 얻습니다. 즉, 많이 헌금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바치기보다 자기에게 바치는 것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가난한 과부는 두 렙톤을 넣었습니다. 렙톤은 그리스 화폐 중 가장 작은 단위로, 성인 노동자 하루 일당의 64분의 1에 해당하는 액수입니다. 올해 최저임금이 9,860원이고, 하루 8시간 일한다고 하면 78,880원입니다. 이의 64분의 1이면 1,233원이 나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남들은 자기를 드러내기 위해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이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도 생활비 모두를 다 넣은 것입니다.
하느님은 헌금을 받을 때 돈의 액수를 따지지 않고 그 바치는 마음을 헤아리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느님께 먼저 드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먼저 쓰고 남은 것을 드리는 우리의 모습은 아니었을까요?
선(善)을 나누어야 합니다. 나눌 수 없는 이유보다 나눌 수 있는 이유를 봐야 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나눔을 적극적으로 실천해야 주님께서 나머지를 채워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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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봉헌>
마르코 12,38-44 (율법 학자들을 조심하여라, 가난한 과부의 헌금)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가르치시면서 이렇게 이르셨다. “율법 학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긴 겉옷을 입고 나다니며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즐기고,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잔치 때에는 윗자리를 즐긴다. 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 먹으면서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한다. 이러한 자들은 더 엄중히 단죄를 받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헌금함 맞은쪽에 앉으시어, 사람들이 헌금함에 돈을 넣는 모습을 보고 계셨다. 많은 부자들이 큰돈을 넣었다. 그런데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이 와서 렙톤 두 닢을 넣었다. 그것은 콰드란스 한 닢인 셈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
<봉헌>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마르 12,44)
숨김없이
그대로
하느님과 벗님들께
나를 드리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늘
하느님과 벗님들께
나를 드리는 것입니다
아낌없이
기꺼이
하느님과 벗님들께
나를 드리는 것입니다
남김없이
오롯이
하느님과 벗님들께
나를 드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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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계산법을 달리하라>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언제나 변함이 없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우리를 사랑하시고 또 지켜주십니다. 그러나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늘 불안하고 또 부족합니다. 이 시간 하느님께서 사랑의 마음을 키워주시고 더 많이 헌신할 수 있는 은총을 내려주시길 간구합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응답을 기쁨으로 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교회는 하느님을 섬기는 곳이지 돈을 벌기 위한 장소는 아니다." 그런데 "지금 교회에 하느님을 섬기기보다 돈의 노예가 된 사람이 있다. 성직자들이 돈에 얽매인 것을 보면 매우 슬프다."고 하셨습니다. 이 시간 물질에 대해서 좀 더 초연할 수 있기를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은 과부의 헌금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헌금함에 돈을 넣는 것을 보고 계셨는데 마침 부자와 가난한 과부의 대조적인 모습을 보았습니다. 부자들은 여럿이 와서 큰돈을 넣었는데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은 렙톤 두 닢을 넣었습니다. 렙톤 두 닢은 오늘날 200원 정도 되는 아주 적은 돈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큰돈을 넣은 부자들을 제쳐두고 가난한 과부를 칭찬하셨습니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넣었기 때문이다.”(마르 12,44)
부자들은 가진 것의‘일부’를 내었고, 가난한 과부는 있는 것‘전부’를 바쳤습니다. ‘일부’는 그 액수가 얼마든 ‘전부’보다 결코 많을 수 없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가졌다 해도 소유물이 그것을 소유한 사람보다 크지는 못합니다. 그런데 가난한 과부는 렙톤 두 닢과 함께 자기 자신을 바친 것입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돈을 바친 것입니다.” 우리는 헌금을 할 때 ‘각자 자기 분수대로 하면 되지’하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 분수나 여분의 문제가 아닙니다. 모든 것은, 하느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땅히 하느님께 바쳐져야 하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 써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것을 잠시 관리할 뿐입니다. 관리자이지 소유자가 아닙니다.
계산법을 달리하면 값이 달라집니다. 어떤 기업인이, 대통령이 자기 재산을 사회에 환원한다고 대대적으로 홍보하고 재단을 설립했는데 그 재단의 돈을 자기의 미래를 준비하는 데 사용하며 자기 마음대로 좌지우지할 수 있도록 해놨습니다. 겉모양은 환원이지만 속을 보면 재산축적입니다. 세계 부자 워렌버핏은 재산(440억 달러)의99%를 기부하기로 약속하였는데 자기 부인이 운영하는 자선재단에 기금을 기부하지 않고 세계 부자 2위인 빌게이츠재단에 거금을 기부했습니다. 자기가 운영하는 재단, 부인의 재단보다 가슴이 따뜻하고 더 잘 운영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진정한 부자가 누구인지를 알게 합니다.
과부의 헌금에 대한 말씀은 가족의 생계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이 재산을 다 팔아 성당이나 교회에 바치는 것이 최고라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그분께 모든 것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재산이나 시간, 근심 걱정, 내면의 상처,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까지도 봉헌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헌신을 뜻합니다. 하느님은 언제나 우리 삶의 첫 자리를 차지하셔야 합니다.
성경을 보면 사렙다 마을의 과부는 극심한 가뭄으로 고생하다가 마지막 남은 음식으로 아들과 함께 그 음식을 먹고 죽을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어렵고 고통스러운 처지에서 하느님의 사람 엘리야를 만났습니다. 그러고는 생명과도 같은 마지막 음식을 자기들이 먹지 않고 그에게 바칩니다. 그는 그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대접했는데 그로 인해 그 집 “단지에는 밀가루가 떨어지지 않고 병에는 기름이 마르지 않았습니다.”(1열왕 7,16) 그는 그야말로 나그네를 대접하다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하느님의 천사를 대접하게 되었고 그로부터 넘치는 축복을 얻게 되었습니다. 만약 이 과부가 자기가 살아남기 위해 하느님을 믿지 않고 음식만을 의지했다면 아마도 한 끼의 음식을 먹고 굶어 죽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렙다 마을의 과부는 배고픔과 굶주림 속에서도 하느님의 사람 엘리야 예언자에게 사랑을 베풀어 죽음의 위기에서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결국 사렙다의 과부는 자기 자신을 다 바침으로써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느님께 바치는 것은 반드시 하느님께서 넘치도록 채워주십니다. “너희는 십일조를 모두 창고에 들여놓아, 조금도 덜지 말고 성전 곳간에 가져다 넣어 내 집에 양식이 넉넉하게 하여라. 그렇게 바치고 나서 내가 하늘 창고의 문을 열어 너희에게 복을 넘치도록 쏟아붓지 않나 보아라. 만군의 주님께서 말씀하신다.”(말라기 3장10) 반드시 갚아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있는 사람은 그대로 행해야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행함을 통해서 약속을 지키시는 하느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감사함을 잊지 않고 살아가는 은혜가 함께 하길 기도합니다. 사도행전에는 “믿는 사람들은 모두 함께 지내며 그들의 모든 것을 공동 소유로 내어놓고 재산과 물건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만큼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한마음이 되어 열심히 성전에 모였으며 집집마다 돌아가며 같이 빵을 나누고 순수한 마음으로 기쁘게 음식을 함께 먹으며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이것을 보고 모든 사람이 그들을 우러러보게 되었다. 주님께서는 구원받을 사람을 날마다 늘려 주셔서 신도의 모임이 커갔다.”(사도2,44- 47)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 것을 내놓음으로써 하느님을 찬양하고 구원받을 사람이 늘어갔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하느님의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맡겨주신 것을 이 세상에서 잠시 관리할 뿐입니다. 생각해 보면, 하느님께서는 알몸으로 태어난 우리에게 먹을 것도 입을 것도 다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가진 가장 좋은 몫을 하느님께 바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사실 십일조라는 것은 물질에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하루 24시간 중에 하느님과 함께하는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묵상하며 기도하는 시간, 말씀을 실천하는 시간을 말입니다. 또한 공간도 살펴보십시오. 우리 집이 넓은데 주님과의 만남을 위한 공간을 특별히 배려하고 있는지요? 그저 십자고상을 걸어두고 성모님을 모셔놓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시간과 공간, 물질, 하느님께서 주신 탈랜트를 봉헌하는데 결코, 인색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번 한 주간도 하느님께서 흔들어 넘치도록 주신다는 약속을 믿는 가운데 행복하시길 빕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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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연중 32 주일입니다. 가을의 끝자락입니다. 이해인 수녀님의 “이 가을엔 따뜻한 눈물을 배우게 하소서”라는 시가 떠오릅니다
이 가을에는/ 따뜻한 눈물을 배우게 하소서.//
내 욕심으로 흘리는 눈물이 아니라/ 진정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소리 없이 함께 울어줄 수 있는/ 맑고 따뜻한 눈물을 배우게 하소서.//
이 가을에는/ 빈 가슴을 소유하게 하소서.//
집착과 구속이라는 돌덩이로/ 우리들 여린 가슴을 짓눌러/ 별처럼 많은 시간들을 힘들어 하며/
고통과 번민속에 지내지 않도록/ 빈 가슴을 소유하게 하소서.//
이 가을에는/ 풋풋한 그리움하나 품게 하소서.//
우리들 매 순간 살아감이/ 때로는 지치고 힘들어/ 누군가의 어깨가 절실히 필요할 때/
보이지 않는 따스함으로 다가와/ 어깨를 감싸 안아 줄수 있는/ 풋풋한 그리움하나 품게하소서.//
이 가을에는/ 말 없는 사랑을 하게하소서.//
'사랑'이라는 말이 범람하지 않아도/서로의 눈빛 만으로도/간절한 사랑을 알아주고 보듬어주며/
부족함조차도 메꾸어 줄 수 있는/ 겸손하고도 말없는 사랑을 하게 하소서.//
이 가을에는 정녕 넉넉하게 비워지고/ 따뜻해지는 작은 가슴 하나 가득/
환한 미소로 이름없는 사랑이 되어서라도/ 그대를 사랑하게 하소서.//
평신도 주일인 오늘 <말씀전례>는 ‘참된 봉헌’의 의미를 일깨워줍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예언자 엘리야는 이방인 시돈 여인 이세벨을 부인으로 맞이하여 우상숭배를 전념시켰던 북이스라엘의 아합 왕에게 예고한 3년간의 가뭄이 진행될 때, 시돈지방의 사렙다의 한 과부 집에 들어가 물 한모금과 먹을 것을 청합니다. 과부는 자신과 아들이 마지막으로 먹을 수 있는 한 끼니 분량의 밀가루와 기름 밖에 없었는데도, 음식을 청한 엘리야의 요청을 따랐으며, 엘리야의 말대로 밀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오늘 <복음>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렙톤 두 닢을 봉헌한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높이 칭송하십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마르 12,44)
그러니, “렙톤 두 닢”은 비록 액수로는 작지만, ‘자신의 전부를 담은 사랑의 크기’인 ‘내면적 헌신의 외적인 표시’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가난한 과부는 <제1독서>의 사렙다의 과부가 마지막 음식마저 내어주었던 것처럼, 자신이 가진 ‘생활비 모두’를 내어놓았습니다. 단지 다른 점은 <제1독서>의 사렙다의 과부는 엘리야의 요청에 따르는 믿음을 보여주었고, <복음>의 가난한 과부는 자발적으로 자신의 전부를 내놓았습니다. 어쩌면, <제1독서>의 사렙다 과부는 타인을 위하여 내놓았다면, <복음>의 과부는 자신을 위한 감사헌금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사렙다 과부’에게는 나눔의 의미가, ‘가난한 과부’는 속죄의 의미가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결국, 이 둘 다 모두, 마치 나중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당신 자신을 통째로 내어놓으셨듯이, 자신의 전부를 봉헌했습니다.
오늘 <말씀전례>는 ‘교회를 위하여 헌금을 많이 하여야 한다.’는 돈 모금을 위해 제시하고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렇다면, ‘참된 봉헌’이란 무엇일까?
오늘, 예수님께서는 ‘봉헌의 참뜻’을 일깨워 주십니다. 곧 “참된 봉헌”은 타인을 위해 자신을 내어놓는 ‘사랑’에 있음을 말해줍니다. 그것은 봉헌예물의 ‘액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향의 순수함’에 걸려 있음을 말해줍니다. 곧 이 가난한 과부들의 마음은 헌금의 액수에 있는 것이 아니라 ‘타인을 위하는 마음’과 ‘그 진실성(순수성)’에 있습니다. ‘자신의 전부를 내어놓는 마음의 진실성’ 말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몸을 하느님께 제물로 바칠 것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자신을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아주실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그것이 여러분이 드릴 진정한 예배입니다”(로마 12,1)
사실, 우리는 먼저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우리의 몸도, 재물도, 마음도, 모두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것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그러니 우리 자신 전부를 봉헌 제물로 드리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오늘 하루도 “산 제물로 드리는 진정한 예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오늘 <제2독서>는 더 나아가서, “산 제물”의 신학적 깊은 의미를 일깨워줍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당신 자신을 제물로 내어놓으신 예수님의 대사제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대사제의 직무로서 당신 자신을 다른 이들을 위한 사랑의 속죄제물, 곧 다른 이들의 죄를 짊어지시고 제물로 봉헌하십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단 한 번’으로 온전하고 완성된 속죄 예식이 됩니다. 오늘 우리의 삶이 바로 이러한 “산 제물”로 바치는 진정한 예배, ‘살아있는 진정한 사랑의 예배’가 될 수 있기를 바래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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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다 넣었기 때문이다.”(마르 12,44)
주님!
제 마음의 지향을 깨끗하게 하소서.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사랑의 마음으로 하게 하소서.
전부를 내어놓은 가난한 과부처럼, 목숨을 내어놓은 당신처럼,
산 제물이 되게 하소서.
오직 당신이 저의 전부이오니, 전부를 내어주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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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봉헌의 여정>
-회개와 주 그리스도 예수님 중심의 삶-
“내 영혼아, 주님을 찬양하여라.”(시편146,1ㄴ)
가슴 섬찟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어제 나눈 강론은 “성전정화”였고 오늘 복음의 주제는 “가난한 과부의 헌금”입니다. 이어지는 복음 주제는 “예수님, 성전의 파괴를 예고하시다” 뭔가 서로 관련되어 있는 불길한 느낌을 받습니다. 성전정화의 필요성이 더욱 크게 부각되는 작금의 현실입니다.
어제 저녁 식사중 수도원에 잠시 머물고 있는 교구 신부님의 “2027 서울 세계청년대회(WYD)”를 앞둔 애로사항과 더불어 수사님들에게 기도를 청하는 이야기를 잠시 들었습니다. 이야기를 듣는 순간 “아, 교회는 물론이고 나라에 청년이, 젊은이들이 없구나! 이를 어쩌나!” 탄식과 더불어 고달픈 삶의 현장에서 희망을 잃고, 길을 잃고 헤매는 수많은 청년들이 생각났습니다. 전적으로 기성세대의 책임입니다. 세계 청년대회 주제 성구가 우리의 용기를 붇돋웁니다.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16,33)
신부님의 “전 교회가 회개하는 자세로 청년대회에 임해야 한다, 교회가 영적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요지의 말에 전폭적으로 공감했습니다. 새삼 건물 잘 짓는 것보다 사람을 잘 키우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본질적인지 깨닫습니다. 정말 성전정화와 반드시 함께 가야할 “주님 중심의 회개와 봉헌의 삶”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복음에 이어지는 성전파괴에 대한 제자와 예수님의 주고 받는 대화가 예사롭게 들리지 않습니다.
“스승님, 보십시오. 얼마나 대단한 돌들이고 장엄한 건물들입니까!”
감탄하는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즉각적인 주님의 답변이 우리의 교회 현실을 들여다 보게 합니다.
“너는 이 웅장한 건물들을 보고 있느냐? 여기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지고 말 것이다.”
내적으로 타락하고 부패해 있는 모래위 교회 공동체라면 그 위용을 자랑하는 성전건물도 텅 비워지고 날도 쇠락해 질 것입니다. 요즘 교회는 물론이고 곳곳에 빈 건물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도대체 사람들이, 특히 청소년들이 없다는 것입니다. 새삼 중요한 것은 건물이 아니라 사람임을, 돈이 아니라 하느님임을 깨닫게 됩니다. 성전건물이 아니라 공동체 건물의 끊임없는 정화와 쇄신이, 기도와 공부가 참으로 절박한 시절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은 내적으로 부패한 교회 현실을 보여주는 듯합니다. 예나 이제나 여전히 반복되는 악순환의 사회 현실입니다. 앞서 복음은 율법학자들을 조심하라는 내용입니다.
“율법학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장터에서 긴 겉옷을 입고 나다니며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즐기고,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잔치 때에는 윗자리를 즐긴다. 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 먹으면서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한다. 이러한 자들은 더 엄중한 단죄를 받을 것이다.”
이런 유형의 성직자들은 없는지 우리 자신을 들여다 보게 됩니다. 진실과 겸손이 결핍된 무지와 허영의 율법학자들입니다. 무지와 탐욕과 더불어 내적으로 열정과 순수도 사라진, 길을 잃은 병든 종교지도자들의 모습을 상징하는 듯 합니다. 이어 등장하는 부자들의 헌금 장면과 가난한 과부의 헌금이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부자들과 가난한들이 공존하는, 여전히 교회내의 빈부의 격차를 실감하게 되는 작금의 현실입니다. 빈부의 격차보다 더 심각한 것이 이념에 의한 좌우, 진보와 보수의 분열입니다. 흡사 심리적 내전상태를 방불케 합니다. 여전히 기상하자마자 바치는 만세칠창에 이어 내 신원의 고백입니다.
만세칠창중 더욱 정성을 쏟는 “대한민국, 한반도 만세!” 기도입니다. 무엇보다 최악의 전쟁은 무조건 피해야 할 것이고 평화가 최상의 가치임을 절감하는 현실입니다. “나는 좌파도 우파도 아닌 예수님파 주님의 전사, 평화의 전사다!” 만세칠창후 고백하는 제 신원입니다.
주님은 졸지도 잠들지도 않습니다. 늘 깨어 우리를 살펴 보시며 돌보시고 계신 주님을 상징하는 바로 오늘 복음의 예수님입니다. 늘 주님의 현존을 의식하며 살려는 노력으로 단풍 장엄하게 물든 불암산을 볼 때 마다 되뇌는 두 고백입니다. 9-11월 기도의 계절, 공부의 계절, 가을에 저를 행복하게 하는 고백입니다.
“늘 앞에 있는 산, 늘 앞에 있는 당신, 이 행복에 삽니다!”
“산앞에 서면, 당신앞에 서듯 행복하다!”
"꽃같은 하루 꽃같이 살자!"
성전안에 헌금하던 부자들도 가난한 과부도 주님께서 주시하고 계심을 까맣게 몰랐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주목하는 장면은 많은 부자들이 큰 돈을 넣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과부의 헌금입니다.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가 연상되는 장면입니다. 당당하게 많은 돈을 헌금하는 부자들과 렙톤 두 닢을 부끄러이 바치는 가난한 과부입니다.
그러나 세리의 팔을 들어주었던 주님은 가난한 과부의 팔을 들어줍니다. 또 인용하고 싶은 내용입니다. 언젠가 지금은 세상을 떠난 가난한 자매가 꽃 한송이를 들고 왔을 때 드린, 하루 종일 저를 행복하게 했던 답시도 생각납니다.
“꽃이 꽃을 가져오다니요.
그냥 오세요.
당신은 꽃보다 더 예뻐요!“
아마도 가난한 과부의 헌금에 이보다 더 기뻐했을 주님이십니다. 가난한 과부의 하느님 향한 순수한 믿음의 봉헌에, 순수한 사랑의 봉헌에 감동하신 주님의 고백입니다. 제1독서에서 엘리야를 대접하던 사렙타의 과부 그 이상입니다. 참으로 우리를 부끄럽게 하는 빛나는 회개의 표지인 가난한 과부입니다. 제자들을 불러 말씀하시니 이를 교육의 기회로 삼는 주님의 처사가 참 기민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
참으로 누가 내적으로 넉넉하고 자유롭고 행복한 참 부자인지 성찰하게 하는 내용입니다. 가진 것이 많아서 부자가 아니라 필요한 것이 적어 참 부자라는 말도 생각납니다. 가진 것들중 극히 작은 일부를 바친 인색한 부자들보다 가진 것을 다 바친 신망애(信望愛)의 과부가 참 넉넉하고 자유롭고 행복한 부자임을 깨닫습니다. 우리 죄인들의 구원을 위해 외아들 예수님 전부를 봉헌한 하느님 아버지를 연상케 하는 가난한 과부입니다. 히브리서 말씀도 연상됩니다.
“이제 그분께서는 마지막 시대에 당신 자신을 제물로 바쳐 죄를 없애시려고 단 한 번 나티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많은 사람의 죄를 짊어지시려고, 당신을 고대하던 이들을 구원하시려고 단 한 번 자신을 바치셨습니다.”
봉헌의 여정 중심에 영원한 봉헌의 모범이신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님이 자리잡고 계십니다. 이 거룩한 미사중 이런 주님의 봉헌에, 하느님의 아드님을 바치신 봉헌에 참여하는 참 거룩하고 아름다운 가난한 과부요 우리들입니다. 누구보다 하느님의 마음에, 예수님의 마음에 정통해 있는 가난한 과부는 교회의 빛나는 회개의 표지가 됩니다.
정말 절박한 것은 장엄하고 화려한 건물 성전의 봉헌이 아니라 회개의 봉헌입니다. 깨어 있는 성전 사제라면 생활비 전부를 바친 가난한 과부의 삶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본의 아니게 가난한 과부를 착취한 것같은 봉헌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럴 경우 라면 성전 사제의 죄가 참으로 엄중합니다. 정말 건물성전관리보다도 가난한 이들을 섬기고 배려하는 공동체성전관리가 우선적임을 봅니다.
가난한 과부들의 헌금이 모인 성전사제의 생활비라면 정말 써야 할때면 아낌없이 써야 하겠지만 절제는 몸에 배여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어지는 주님의 성전파괴의 예언도 작금의 교회가 내적타락과 부패의 늪에서 벗어나라는, 우리를 회개에로 부르시는 경고처럼 들립니다. 정말 교회나 수도원, 성지들의 거대하고 화려한 건물들을 보면 가난한 신자들이 연상되고 우려하는 마음 큽니다. 정말 우선적인 것이 건물성전보다 공동체성전이기 때문입니다.
유럽 성지들을 순례할 때도 옛 신자들의 크고 순수한 믿음에 감격하지만 그 이면에 얼마나 가난한 민초 신자들의 땀과 피를 흘렸을까 생각하면 마음 편치 않을 때도 참 많습니다. 병들고 시들어 죽어가는 공동체성전인데 장엄하고 화려한 건물성전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지요!
참으로 믿는 이들의 순례 공동체에 속한 우리들이요 봉헌의 여정중의 우리 삶임을 깨닫습니다. 회개와 더불어 주님 중심의 교회공동체로 끊임없이 정화되고 숙성(熟成)되고 새로워질 수 있도록 이 거룩한 미사중 주님의 도움을 청합시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5,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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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중시, 경시, 무시 가운데서 나는?>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
오늘 연중 제32주일의 첫째 독서와 복음의 공통점은 가난한 과부의 봉헌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복음에서 가난한 과부와 비교되는 부자는 주인공이 아닙니다. 부자가 주인공이 아니라면 오늘 연중 제32주일의 주인공은 과부란 말인가요?
부자보다는 과부가 주인공인 것은 맞습니다. 세상에서는 부자나 한다하는 사람이 주인공이지만, 오늘 복음에서는 그리고 주님에게는 부자보다 과부가 주인공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부자보다 과부가 주인공인 것이 복음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을 보면 주님의 모습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예수님께서 헌금 함 맞은쪽에 앉으시어, 사람들이 헌금함에 돈을 넣는 모습을 보고 계셨다.”
헌금하는 것을 보고 계시는 주님은 누가 더 많이 내나 보고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많이 내는 사람을 반기고 사랑하고 중시하는 눈으로 보고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 반대로 누가 더 겸손하게 그리고 사랑과 정성으로 봉헌하는지 보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최고 주인공은 보고 계시는 주님이시고, 과부를 중시하시고, 과부의 얼마 안 되지만 전부를 봉헌하는 그 봉헌을 높이 치하하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리고 이런 치하를 통하여 주님께서는 우리가 지녀야 할 시각을 가르쳐 주시는데 그런데 그것은 우리가 개인적으로나 공동체적으로 여전히 비 복음적인 시각 곧 세속적 시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겠지요.
사실 그래서는 안 되지만 주님의 공동체라고 하는 데에서도 주류와 비주류가 있고, 주류에 속한 사람과 비주류에 속한 사람이 있으며, 주류에 의해 비주류는 경시나 무시를 당하는 일이 빈번합니다.
그렇습니다. 세속적인 시각은 주류가 비주류를 경시하거나 무시합니다. 경시와 무시는 하지 않더라도 연민의 눈으로 보곤 합니다.
제가 저를 봐도 일생 관구장이나 원장을 많이 하였으니 주류적인 삶을 살아왔다고 할 수 있는데 의도하지 않았어도 주류적인 시각으로 비주류를 보고 판단하였으며 경시와 무시는 하지 않았더라도 연민의 눈으로 보곤 했지요.
그런데 연민의 눈은 경시와 무시보다는 낫지만 미천하고 비천한 이를 중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복음에서는 미천한 이들이 늘 가운데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어린이 하나를 가운데에 세우시고,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가운데에 세우셨으며, 그들 가운데 계셨고 늘 그들과 함께 계셨습니다.
그리고 미천한 이를 가운데 세우시고 그들 가운데 계셨을 뿐 아니라 더 나아가 미천한 이들을 늘 중시하고 높이 올리셨습니다.
이런 주님을 찬미하는 대표적인 분이 마리아십니다. 마리아 찬가는 이렇게 노래하지요.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고 내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고 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 불리셨습니다.”
미천한 이를 연민의 눈으로 굽어보실 뿐 아니라 들어 높이시는 주님임을 찬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과부에게서도 배우고 주님께도 배워야 합니다. 과부에게서는 미소할지라도 온 사랑과 정성으로 봉헌하는 것을 배우고, 주님께는 미천한 이를 경시나 무시하지 않고 중시하는 것을 오늘 배워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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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마르코 12장 43절)
<온 정성을 담자!>
오늘은 '연중 제32주일'이자 '평신도 주일'입니다. '평신도'는 예수님께서 선택하신 백성으로서, 성직자를 제외한 모든 신자를 가리킵니다. 먼저 여러분 모두에게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오늘 복음은 '율법 학자들을 조심하여라.'는 말씀과 '가난한 과부의 헌금'에 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헌금함에 돈을 넣는 것을 보고 계시다가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 이렇게 이르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가운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넣었기 때문이다."(마르코 12장 43절-44절)
예수님께서 '동전 두 개'를 헌금함에 넣은 가난한 과부의 봉헌행위를 칭찬하십니다. 이는 봉헌행위에서 중요한 것은 봉헌 금액이 아니라, 그 봉헌행위에 얼마나 나의 정성과 마음을 담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메시지입니다.
교무금이나 헌금, 전례봉사나 다른 희생과 봉사를 통한 봉헌행위는 '하느님께 드리는 행위'이고, 지금 여기에서 하느님의 나라 건설과 관련되어 있는 '신적행위'입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예수님의 첫 번째 오심(탄생)과 두 번째 오심(재림)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고, 이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당신의 모든 것을 하느님 아버지께 봉헌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오십니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하느님께 드리는 나의 봉헌행위에 '온 정성'을 담아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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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이 와서 렙톤 두 닢을 넣었다."(마르 12, 42)
어우러져
사는 우리들
공동체이다.
가톨릭의 빛은
공동체의 빛이며
공동체의 핵심은
우리
평신도들이다.
평신도들이
평화로우면
교회도
평화롭다.
평신도들의 빛은
세상을 밝히는
내면의 빛이다.
탄생과 성장
아픔과 죽음
이모든 여정에
함께하는 것이
우리들
신앙이다.
신앙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십자가를 통해
잘 보여주고 있다.
십자가와
함께 살아가는
삶의 봉헌이
신앙이다.
사람을
잘 대하는 것이
예수님의
정신이며 바로
평신도의 길이다.
사람이
공동체이며
사람이
길이 된다.
우리 가톨릭에게
필요한 것은
외적인 성장보다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들 내면의
성장이다.
내면이
아름다워지는
그 만큼
세상도 더
아름다워질
것이다.
생활 속에서
복음의 삶을
살아가는
신앙인들이
바로 평신도의
정체성이다.
신앙은 생활을
끌어안고 생활은
복음을
풍요롭게 한다.
생활과
복음 사이에
평신도가 있다.
교회 구성원들은
세상을 향해
열려있고
깨어있어야 한다.
깨어있는 길은
사람을 존중하고
사람을 위해
끝까지
기도하는 것이다.
기도가 간절히
필요한
요즈음이다.
건강한 바탕은
건강한 기도이다.
건강한 기도는
생활을 살아가는
평신도들의
중심이다.
다시 기도의
끈을 다시
내면의 여정에
충실해야 할
우리들은 모두
한국 천주교회의
소중한
평신도들이다.
신앙은 생활을
건너뛸 수 없다.
복음의 생활
그 치열한 현장에
우리 평신도들이
살고 있다.
소중하고 소중한
삶의 스승들인
평신도분들을 위해
기도하는 은총의
주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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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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