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TV조선에 고대규(연애부기자겸 TV조선 패널) “탈렌트 이서진을 독립운동가 석주 이상룡선생의 후손이다.
안동에 생가가 있는데 99칸짜리 기와집으로 보물로 지정돼 있다.
이상룡은 일제강점기 1911년 당시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분노에 99집을 팔아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했다”라고 하고
또 탤런트 윤문식(배우겸 TV조선 패널)도 “이상룡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역임하신 굉장히 훌륭한분이다.
이서진씨 가문이지만 경상도에 고성 이씨 집안에서 독림유공자가 아홉 명이나나왔다는 것은 명문가의 후예인 것은 틀림없다.
이렇게 방송은 이서진이 독립운동가 석주 이상룡의 선생의 직계인양 묘사했다.
이런 택도 아니게 사실을 왜곡하여 방송을 내 보내는 것을 보고 공공의 이기인 방송에서 이래도 되냐하는 정의감(?)과 서글픈 생각에서 이 사실을 바로잡기 위해서 몇 자 적어 봅니다.
물론 이서진을 깍아내리기 위함은 절대 아니라는 것을 먼저 밝혀둡니다.
이서진은 귀염상이고 잘 생긴 외모와 좋은 매너, 근육질의 몸매 등으로 인기 연애인인 것은 틀림없다.
그러기에 인기있는 여자 연애인들이 너도나도 줄줄이 달려가 육탄세례(?)를 하였지 아니하였던가? ㅎㅎㅎ 허나 공공의 이기인 방송이 아무리 인기 연애인을 띄워도 분수가 있지 이렇게까지 허위사실로 포장하여 띄울 일이 뭐가 있는가?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먼저 여기서 언급된 99칸 집과 이상룡선생에 대하여 알아본다.
우리나라에서 대문 앞에 배가 닿던 고택이 두 군데 있다. 강릉의 선교장(船橋莊)과 안동의 임청각(臨淸閣)이다.
선교장은 효령대군(孝寧大君)의 11대손인 가선대부(嘉善大夫) 무경(茂卿) 이내번(李內藩) 1703년에 건립한 103칸의 조선후기의 전형적인 상류주택이다.
이내번이 경포대 근처 저동에 살적에 어느 날 쪽제비 떼를 쫓다가 우연히 이곳을 발견한 명당자리를 발견하고 이 곳에다가 집을 지어 가세가 번창하여 여러 代에 만석군을 배출하였다고 한다.
경주 최부자와 쌍벽을 이루는 거부이기도 하다.
경포호수가 메워지기 전에는 선교장 대문 앞까지 이름 그대로 배를 타고 도착할 수 있었다고 한다.
또 임청각은 낙동강 상류의 물줄기와 반변천의 물줄기가 합해지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낙동강이 내려오다가 임청각 앞에 이르러서는 물줄기가 좁아진다.
강 건너의 산 이름이 무산(巫山)이다.
이는 중국 양자강의 삼협(三峽) 가운데 가장 절경이라고 일컬어지는 무산 밑의 무협(巫峽)과 풍광이 비슷하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 아닌가 싶다.
그러니까 임청각은 한국의 무협을 집 앞에 두고 감상할 수 있는 위치에 자리 잡고 있었던 고택이었다.
역대 종손들은 날씨가 좋을 때에 친구들과 함께 집 앞에서 술과 음식을 실은 배를 타고 반변천 상류를 거슬러 올라가는 주유벽(舟遊癖)을 즐기곤 하였다.
그 낭만적인 뱃놀이 그림이 지금도 전해진다.
99칸 집으로 알려진 이 집은 그 전체적인 건물배치 형태가 쓸 '용(用)' 자를 닮았다.
집주인이 건물배치를 하면서 미학적인 의미뿐만 아니라, 주술적인 의미까지를 고려했던 것이다. 이처럼 화려했던 임청각은 집주인인 종손 3대가 내리 만주에 가서 독립운동을 하는 바람에 일제의 집중적인 탄압을 받았다.
일제는 임청각 바로 앞으로 중앙선 철도를 내버렸다.
이로 인하여 임청각은 늘 붉은 철가루를 덮어 쓰고 있다.
석주 이상룡의 가계는 다음과 같다.
임청각 종손 석주 이상룡(李相龍·1858~1932)선생이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것에 대해 보복하기 위해서였다.
석주 이상룡 선생(1858. 11.24 ~ 1932. 6. 15)은 안동 명문가의 종손으로 큰 새산을 가지 거부였다.
선생이 살던 임청각은 99칸짜리 집(사대부가 지을 수 있는 가장 큰 집. 단 강릉에 있는 선교장만 103칸 예외라고 함)으로 유명하며 보물 182호로 지정되어있다.
1911년 국권 침탈로 나라가 망하자 선생은 이희영, 허위 등의 다른 독립운동가들처럼 전재산을 팔아 만주로 가서 독립운동을 하게 된다.
선생은 초대 국무령(제3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반)을 지내기도 하지만 1932년 만주에서 병사한다.(향년75세) 이상룡은 유언으로 “조선 땅이 해방되기 전에는 내 유해를 데려갈 생각을 마라.
조선이 독립되면 내 유골은 유지에 싸서 조상 발치에 묻어 달라.
외세 때문에 주저하지 말고 더욱 힘써 목적(나라의 독립)을 관철하라”라는 유언을 남겼다.
유언에는 죽은 후에도 일제와 타협하지 않으려는 선생의 기상이 잘 드러나있다.
선생은 아들 이준형(외아들)을 남겼는데 이준형은 아버지를 따라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나중에 국내로 돌아오게 된다.
그러자 일제는 명망 놓은 이준형에게 지속적으로 회유를 했고 결국 이준형 선생은 “일제하에 사는 것은 치욕이다”하는 유언을 남기고 칼로 자기 목을 찔러 자결하게 된다.
이준형의 아들(이상룡의 손자) 이병화는 끝까지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감옥에서 해방을 맞이한다.
그리고 해방 이후에는 남로당원으로 활동하다가 전쟁 중에 병사했다.
이병화는 외아들 이항증(현 71세 내외)(이상룡의 증손자)을 두었다.
선대 3대가 모두 독립운동을 하느라고 가문은 그야말로 멸문지화가 되었다.
돌보는 이 없는 이항증은 말할 수 없는 어려움에 시달리며 돌보는 사람이 없어 어린시절 고아원에서 자랐다.
명문가의 후손이지만 배운 것 없이 자란 이항증은 고아원을 나와서 청년시절에 생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양 손과 지게에 석유통을 지고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안동지방 오지의 각 마을을 돌아다니며 석유장사를 하며 어렵게 생활하였다.
해방 이후에 임청각파 이상룡 후손들이 각성하여 십시일반 돈을 모아 임청각을 다시 구입했지만 결국 관리할 여력이 없어서 2002년 국가에 헌납하였다.
가슴 저미는 참 안타까운 사연이다.
이서진 집안을 살펴 보면 할아버지 이보형은 금융인이다.
1960년대 은행이 국가경제를 쥐락펴락 하던 시대에 조부인 이보형이 제일은행장을 했다면 한국경제계에서는 대단한 인물임에는 틀림없다.
아버지 또한 할아버지에게 물러 받은 안흥상호금고 이사장이다.
해방 이후 할아버지 덕에 경제력을 쌓은 말 그대로 경제력으로는 빵빵한 집안이다.
이런 집안은 대개 친일파에 속하는 집안들이 많다.
여기서 한 가지 눈여겨 볼만한 것은 임청각 후손들이 그렇게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격으면서도 자존심 때문인지 이서진 집안에 손을 벌린 일은 결코 없었다.
또 하나 만약 이서진 집안이 임청각 후손들이라면 흩어진 후손들이 그 어려움을 격으면서도 십시일반 모금하여 임청각을 재매수 할 때 당연히 얼마의 돈을 기부했어야 했고, 또 분명히 기부할 위치에 있었음에도 한 푼 기부한 사실이 없다.
임청각 후손으로서 막강한 경제력으로 기부할 돈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기부금을 내지 않았다면 우리의 정서상이나 윤리적으로 비난받아 마땅하다.
따라서 내가 생각하기에는 탈랜트 이서진이 고성이씨임에는 틀림없으나 임청각파 직계 후손은 아니라고 보는 것이 마땅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독립운동가 후손들은 마땅히 존경받아야 하고 또 우리가 돌봐야할 사람들이다.
그들의 고초와 어려움이 없었다면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었겠는가?
또 친일파 후손들이 득의양양하게 호의호식할 때 독립운동가 후손들은 草根木皮로 연명하며 배고픔과 못 배운 한을 곰씹으며 이항증(이상룡의 증손자)처럼 이들은 그늘에서 일제로부터 핍팍받고 많은 어려움을 격었기 때문이다.
맺는말로서 또나 개나, 어중이 떠중이..... 죄다 독립운동가 후손이라고 자화자찬하는 서글픈 사연은 없었으면 한다.
독립운동가들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존경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천방지축(天方地軸) 처럼 말이 왔다 갔다 했네요.
졸필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꾸벅!!
첫댓글 좋은글 잘 보고갑니다. 감사합니다.
우리같이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좋은정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