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도날
원제 : The Razor's Edge
1946년 미국영화
감독 : 에드먼드 굴딩
원작 : 서머셋 모옴
출연: 타이론 파워, 진 티어니, 앤 백스터
존 페인, 클리프톤 웹, 허버트 마샬
루실 왓슨, 프랭크 라티모어, 엘자 란체스터
아름다운 미모의 이사벨(진 티어니)은 미남 청년 래리(타이론 파워)를 사랑하지만,
이사벨의 부유한 외삼촌 엘리어트(클리프톤 웹)는 래리가 직업조차 없는 가난한 청년
이라는 이유로 탐탁치 않게 생각합니다. 래리는 1차 대전을 경험한 뒤, 상류사회의
따분하고 의미없는 삶에 염증을 느끼고, 삶에 대한 성찰과 자아탐구에 더 관심을
갖게 됩니다. 이사벨은 이러한 래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가 근사한 직업을 갖고
자신과 결혼해주길 바라지만 래리의 입장은 완고합니다. 결국 이사벨은 래리에
대한 깊은 사랑에도 불구하고 그를 포기하고 부유한 집 아들인 그레이(존 페인)와
결혼합니다.
영국작가 서머셋 모옴의 1944년 동명 소설을 1946년 영화화한 작품입니다. 톱 스타
타이론 파워와 40년대를 대표하는 여배우 진 티어니가 남녀 주인공입니다. 제목을
보면 무슨 스릴러나 필름 느와르 같지만 전형적인 '드라마 장르'입니다. 상영시간도
2시간 20분이 넘지요. 1919년부터 약 10여년간의 시기를 배경으로 하면서 시카고와
프랑스를 넘나들고 있습니다. 정서가 다른 우리나라에서 흥미롭게 보기는 좀체로
쉽지 않은 이야기입니다. 당시의 상황 등도 알아야 하고 번역의 묘미도 굉장히
중요하고, 대충 한 번 보면 제대로 소화하기 어려운 영화입니다. 상업성이 높은
작품도 아니고. 유명한 헐리웃 스타가 출연한 고전중에서는 보기 드문 장르지요.
1차 대전 이후 1920년대를 맞이하게 되는 미국은 세계적인 강국으로 부상하며
뉴욕, 시카고 등 대도시를 중심으로 번영하면서 고층 빌딩인 마천루가 들어섭니다.
그야말로 미국이라는 강국이 부상하는 중요한 시기였으며 전쟁후의 호황을
누리며 상류층의 사치스런 삶이 벌어지고(위대한 개츠비 같은 영화가 이런 배경을
잘 보여주죠) 금주법이란 제도가 전역에 시행됩니다. 시카고를 중심으로 갱들의
출몰이 판을 칩니다.
이 시기를 배경으로 한 30년대 영화들은 '갱스터 무비'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면도날'
같은 진지하고 성찰적 드라마는 참 보기 드문소재입니다. 흥미롭게도 이 이야기에는
원작 소설의 작가인 서머셋 모옴도 중요 캐릭터 중 한 명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물론 다른 배우가 연기했지요) 서머셋 모옴은 래리와 이사벨을 지켜보는 '1인칭
관찰자'의 역할입니다. 화려한 연회장에서 이사벨의 연인 래리를 처음 만나고 10여년
동안 그를 지켜보면서 서로 사랑하는 래리와 이사벨이 왜 결혼을 하지 못하고 서로
각자의 삶을 살게 되는가를 목격하는 역할입니다. 일종의 중재자 같은 역할이기도
합니다.
래리는 지금 봐도 비현실적인 인물입니다. 돈과 사치에 초월한 인물, 그것보다는
왜 사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나는 누구인가? 라는 다소 난해한 성찰에 더
관심이 많은 존재입니다. 잘 생긴 외모에 마음만 먹으면 부유한 상류층이 될 수
있는 인물이지만 그는 스스로 돈을 따라가는 것이 아닌 다른 길을 걷습니다.
진 티어니가 연기한 이사벨은 훨씬 보편화된 인물입니다. 돈과 화려한 상류생활을
좋아하고 사랑하는 남자와 결혼하고 싶어하고....그런데 서로 가는 길이 너무도 다른
래리를 어떻게 해서든 자신과 같은 길을 가게 만들려고 하지만 결국 포기하고
사랑하는 남자 대신, 돈 많고 부유한 남자 그레이를 선택합니다. 이사벨의 이런 결혼,
이 영화의 본론은 이사벨의 결혼 이후에 벌어지는 일들입니다.
10년의 세월을 겪으면서 이사벨은 두 아이의 엄마가 되고, 부유하던 남편 그레이는
주식 시장에서 피해를 입으며 파산하고, 그래서 이사벨 부부는 프랑스에 와서
외삼촌에게 얹혀 살게 되고... 그러는 동안 래리는 프랑스의 탄광에서 일하기도 하고
인도로 가서 성자를 만나서 산위에 올라 수양을 하기도 하고... 결국 래리와 이사벨은
프랑스에서 재회를 합니다.
이루어지지 못한 연인의 사랑을 다루고 있으며 그런 와중에 삶에 대한 성찰을 나름
다루고 있는데 아마도 영화는 소설의 깊이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게 아닐까
싶습니다. 영화가 끝날때까지 도대체 래리가 살아가는 삶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지요. 다소 철학적인 소설을 영화로 제대로 옮기지 못한 느낌인데
그건 소설을 읽어봐야 더 자세히 알 수 있을 것이고... 오히려 이사벨의 캐릭터가
훨씬 공감이 갑니다. 영화에서만 보여지는 래리는 그냥 불필요한 현실 도피자이자
사서 고생하는 인물 같기도 하고. 이런 래리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또 한 명의
중요한 캐릭터가 바로 이사벨의 친구인 소피(앤 백스터)인데 사실 이 영화로 제일
덕본 인물이 앤 백스터입니다. 앤 백스터는 존재감이 없는 평범한 외모에도 불구하고
일찌감치 주연배우가 된 여배우지만 여기서는 조연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아카데미
여우조연상과 골든 글로브 여우조연상을 동시에 수상하면서 연기력을 인정받았고
좀 더 메이저 영화에 출연하게 되면서 '이브의 모든 것' '십계'같은 대표작을 남기게
됩니다.
나름 래리라는 캐릭터와 소피 라는 캐릭터를 통해서 뭔가의 의미를 부여하려고 하는데
소피는 이사벨과 비슷한 부류로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다가 자동차 사고로 남편과
딸을 잃고 폐인이 됩니다. 술독에 빠져서 살고 있고, 프랑스의 어느 클럽에서 술에
취해서 망가진 소피를 래리와 이사벨 부부가 발견하게 됩니다. 그날 이후 래리는
소피의 구원자 같은 역할을 하게 되고 소피와 결혼을 약속하게 되지요. 그 소식을
듣고 이사벨은 난리가 납니다. 래리와 소피의 결혼발표 소식을 전화로 듣는 장면에서의
진 티어니의 연기, 이건 충분히 공감이 되면서도 진 티어니의 연기가 좋았습니다.
단면적으로 보면 도대체 결혼해서 아이까지 있는 유부녀가 왜 남이야 결혼하든 말든
간섭을 하고 날뛰는가 생각할 수 있지만, 래리와 이사벨이 어떤 사이였는지를 감안하면
100% 공감되는 행동입니다. (세상에는 옳은 행동만 공감되는게 아닙니다.) 이후
이사벨의 은근한 '결혼방해 공작'이 진행되지요.
영화는 어떻게 결론을 맺고 있을까요? 결국 래리와 이사벨은 다른 길을 가게 되고
그걸 존중하는 결말이지요. 두 사람의 10여년이 넘는 어긋난 상황은 결국 화자인
서머셋 모옴에 의해서 정리가 됩니다. 그 결론을 위해서 어긋난 두 연인의 삶을
긴 세월 동안 보여주게 되지요. 뭔가 큰 의미를 부여하려고 한 영화이고 평단에서
호평을 받았고, 아카데미상 몇 개 후보에도 올랐는데 시대의 간극, 서구의 삶에 대한
간극, 그리고 그 시대 상황의 이해의 간극 때문에 영화에 대한 온전한 공감도 어렵지만
덧붙여 에드먼드 굴딩 감독의 연출에 대한 한계와 타이론 파워의 연기 부족 등이
겹쳐지면서 다소 과평가를 받은 영화가 아닐까 싶은 생각입니다. 적어도 시대를
초월한 걸작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진정한 수작이 되려면 래리의 캐릭터와 목적이
좀 더 선명했어야 합니다. 관객에게도 제대로 설명이 안되니 이사벨의 입장은 더욱
답답했겠지요. 영화가 끝나고 나서 딱 이런 질문이 필요하게 느껴지더군요.
'래리, 당신은 그래서 결론적으로 뭘 어쩌겠다는 겁니까?'
평점 : ★★★ (4개 만점)
ps1 : 면도날 이라는 제목은 인도의 성자가 래리에게 "구원의 길을 걷는 것은 날카로운
면도날 위를 걷는 것처럼 어렵다" 라는 말에서 인용한 제목입니다.
ps2 : 타이론 파워의 연기 부족이 절실히 느껴지는 영화였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당시의 여러 유명 배우가 그랬듯이 2차대전 참전으로 몇 년의 공백기를 가진
이후 복귀작이 된 셈인데 이 작품이 호평을 받고 지속적인 인기 배우노릇을
더 할 수 있었습니다. 진 티어니는 굉장히 적절한 캐스팅으로 보이며 이 역할에
딱 걸맞는 미모와 적당한 속물적인 모습이 잘 어울렸습니다. 사생활에서의
불행만 아니었더라면 제 2의 캐서린 헵번 급의 여배우가 될 수 있었을텐데
많이 아까운 배우입니다. '로라 살인사건'과 '애수의 호수'에 이어서 출연한
영화로 이 시기가 그녀의 최고 전성기였지요.
[출처] 면도날(The Razor's Edge 46년) 엇갈린 두 남녀의 운명|작성자 이규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