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파랑길 봄나들이
권채영
이토끼 산우회 등산하는 날, 가벼운 차림으로 봄나들이 삼아 집을 나선다. ‘이토끼’란 이름이 재미있다. 모이는 날짜를 외기 쉽도록 ‘이―둘째, 토―토요일, 끼―기수(奇數) 월’을 합성한 이름이다.
아홉시를 넘긴 느지막한 아침나절 흰 구름 외로운 백운포 고개를 넘으니 짓푸른 망망대해가 가슴을 확 틔운다. 부산을 상징하는 오륙도가 바다 가운데 둥둥 떠 있다.
종점에 내리자 아파트 숲을 벗어난 외딴 건물하나가 눈길을 끈다. 흑갈색 무늬목 바탕에 “해파랑길 관광안내소”라 새긴 하얀 글씨가 선명하다. 여기가 해파랑길 등정(登程)의 시작점이다. ‘해파랑길’은 이곳 오륙도에서 강원도 고성 통일전망대까지 770km에 달하는 보행 길을 이른다. 4km가 십리니까 물경 2천리에 가까운 최장거리 걷기 코스인 셈이다.
건물 안에 들어서면 영어와 중・일어 안내원 둘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발아래가 바로 바다다. 오륙도 여섯 섬이 여기에 서면 단 두 섬뿐이다. 이 뜻 깊은 곳에서 오늘 산행을 출발한다니 시작부터 설렌다.
해파랑길
물 파래 바다 파랑, 산 푸러 하늘 푸른
동해안 이천 리 길 청(靑)덤벙 파랑범벅
놀라서 질린 해마저 새파래져 해파랑.
붉은 해, 푸른 해(海)가 숨바꼭질 한다고
날 새는 줄 모르고 잠겼다 치솟았다
시퍼런 물이 들도록 푹 빠져 해파랑길.
갑자기 봄이 뭉텅이로 쏟아졌는지 유난히도 바람살이 부드럽다. 화창하다 못해 차라리 초여름답다. 그야말로 현대식 다방, 그 카페에 앉자마자 진한 향이 주문부터 하라고 이끈다. 다방식 커피는 블랙커피와 설탕커피, 밀크커피가 전부인데 비해 카페식은 아메리카노, 카푸치노, 카페라떼, 카페모카 등등 이름부터 낯설고, 별나다. 그런데 무엇보다 카페는 다방에 비해 커피 값이 지나치다.
입맛에 맞춰 주문한 커피를 받아든다. 유리방 다름없는 카페에서 쏟아지는 봄 햇살에 더운 커피를 더하니 이마에 땀방울이 송알송알 한다. 땀을 훔치며 기다리는 동안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는 카페, 그 문화에 낯선 노장층을 위하여 커피에 대하여 간단히 알아보고 넘어가자.
“커피의 원료가 되는 생두를 볶으면 원두가 된다. 이 원두를 기계로 가루를 낸 뒤에 높은 온도와 압력을 가하면 커피 원액이 나오게 된다. 커피의 메뉴는 원액인 이 에스프레소를 기본으로 하며, 여기에 물을 타면 아메리카노, 우유를 타면 카페라떼, 우유거품을 넣으면 카푸치노, 우유거품과 캐러멜을 첨가하면 캐러멜 마끼아또, 초콜릿 소스(가루)와 생크림을 넣으면 카페모카가 된다. 더 쉽게는 라떼는 우유, 모카는 초콜릿을 의미한다고 보면 된다.”
이밖에도 생두와 생산지 등에 따라 종류가 무척 많지만 커피 마니아가 아니라면 대략 이 정도면 카페에서 촌놈 취급은 면할 것 같다.
커피를 마시는 잠깐 동안에 일행이 다 모였다. 관광안내소를 거쳐 밖으로 나오니 오륙도를 어루만지고 오는 해풍이 상쾌하다. 해무에 잠긴 바다는 고요히 이는 바람 따라 고즈넉하리만치 잔잔하다. 이토록 잔잔한 봄바람이건만 그 누구도, 무엇으로도 막을 수가 없다. 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긴다고 했던가.
문득 이솝 이야기에 나오는 ‘바람과 해’의 나그네 옷 벗기기가 떠오른다. 바람이 볼이 터지도록 불어대도 단단히 옷을 여미고 끄떡도 않던 길손이 따사로운 햇살 앞에서 스스로 옷을 벗어재낀다는 우화. 여기서 바람은 해에게 지고말지만 겨울잠에 든 온갖 생명을 깨우는 봄바람의 힘은 보통 대단한 것이 아니다.
해파랑길 이정표를 따라 길을 간다. 꽃을 열매인 양 주렁주렁 달고 선 오리나무가 간간이 길가에 나와 춤을 춘다. 화려하지 않아 몰래 피는 듯 눈길을 끌지 못하지만 이 꽃이야말로 가장 이른 봄꽃 가운데 하나다. 푸르스름하면서 자갈색 같기도 한 꽃을 열매처럼 수 없이 매달고 연신 뿜어대는 향이 진하다.
바다 쪽 낭떠러지에는 금방 굴러 떨어질 듯 아찔한 바위가 보인다. 농짝을 재 놓은 듯하여 농바위라 부르며, 방향에 따라 부처의 형상으로 보여 부처바위라고도 한다. 그 바위를 지나자 칡넝쿨이 널린 헌옷가지를 챙기느라 주섬주섬 용을 써 깡마른 줄기에 파란 힘줄이 선다.
해안을 따라 조금 더 나아가면 치마를 벗어 펼쳐 논 듯한 반석, 치마바위 자락을 파도가 헹구고, 그 너럭바위 위에 강태공이 드리운 낚싯대는 살랑살랑 봄의 입질에 방울까지 야단법석을 떤다.
해안선을 따라서 바위를 희롱하는 파도가 하얀 이빨로 웃어댄다. 무뚝뚝한 바위는 표정 하나 변함없이 미동도 않고 쪼그리고 앉았다가 울컥 갯내 한바가지를 토한다.
치마바위를 지나서 복잡한 행렬을 피해 가파른 길로 접어들자 양지바른 길섶에 원추리 새싹들이 비좁은 자리를 다투며 쏙쏙 머리를 내민다. 눈치 빠른 찔레나무 새싹은 외출할 궁리에 여념이 없고, 조금 올라간 길가에 선 목련은 새끼 잃은 젖꼭지마냥 팅팅 분 몽우리를 바람살로 터져라하고 문질러 댄다.
나이 지긋한 분들과 함께 한 봄나들이에서 느림의 미학을 본다. 그럼에도 예상대로 해파랑길 한 구간도 못다 걷고 말 분위기다. 결국 어울림마당 위로 올라 길가 벤치에서 숨을 고른다. 아껴둔 막걸리를 따르자니 옆에 선 벚나무가 목마른 듯 곁눈을 점점 크게 뜬다.
막 봄방학을 끝낸 순환도로 언덕바지 운동장은 개나리들 함성이 자지러지고, 배짱 좋게 경계를 넘어 남의 집에 들어 한숨 자고난 민들레와 제비꽃도 눈 비비며 주인의 동정을 살피는데, 빛바랜 옷을 다 풀어헤친 주인장 잔디는 행여 자기 행색이 들킬까 걱정이 앞서 머리만 빠끔 내밀다말고, 침입자는 안중에도 없다.
그 위를 성미 급한 매화 꽃잎이 떼 지어 흰나비로 훨훨 난다. 소리도 없고 자취도, 흔적마저도 없이 찾아온 봄의 전령 봄바람에 이처럼 온갖 초목이 잠에서 깨어나고 있다. 다만 뾰족탑이 빛나는 아래쪽 성당의 종소리만 혼자 요란할 뿐.
중도에 빠져나오고 말았지만 어울림마당부터 해안으로 이어지는 동생말까지 해안산책로는 평탄한 길에 출렁다리가 자연과 잘 어울린 곳이다. 공룡이 남긴 흔적에 최계락, 김규태 선생이 시를 읊고, 자갈과 파도의 합창이 여기저기 울려 퍼진다. 고개를 들면 광안대교, 광안리해수욕장, 누리마루와 동백섬이 한눈에 찬다. 이름부터가 궁금증을 자아내는 신비한 이기대의 이기총 두 봉우리를 머리 위에 둔 채 걸어보고 싶지만 어쩌랴. 지척에 두고도 다음을 기약할 밖에.
그래도 날씨 좋고, 길 좋고, 꽃 또한 좋은 철에 길마다 파도가 소곤소곤, 따라오는 바람도 오순도순, 덩달아 우리도 이야기꽃을 피워 꾸며 본 해파랑길, 절경에 취하고 봄바람에 들떠 현기증 이는 탐방은 여기까지다. 성당을 지나 큰길로 나오자 간식한 떡과 막걸리는 어디로 갔는지 식당 간판들만 눈에 어른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