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미국등반대 북서벽 루트.
-
8월 2일, 선등조는 눈 속에 깊이 파묻힌 고정자일을 파내며 등반했는데, 그 자일은 얼음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로스켈리가 그들의 최고 도달지점에서 경사도 50도의 빙벽 90여 m를 선등한 후, 눈 덮인 암벽을 올라 거대한 오버행 바위 밑 5,821m 지점에 제1캠프를 설치했다. 스테이츠와 언솔드 양이 제1캠프로 올라와 부근에서 동굴을 발견하고 자신들의 캠프로 삼았다. 눈사태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엘리어트는 등반대를 탈퇴하고 귀국했고, 며칠 뒤 공동 등반대장 아담스 카터도 대원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귀국했다.
그런 상황에서 윌리 언솔드 대장과 스테이츠, 피터는 등로 개척에 나섰다. 스테이츠가 180여m를 선등한 후 세 사람은 제1캠프 위쪽 244m 지점(6,066m) 지점에서 낙석과 눈사태의 방패막이가 될 만한 높이 9m의 오버행 암벽을 발견했다. 그들은 이 독수리 횃대 같은 오버행 벽을 ‘캐쉬 레지(Cache Ledge)’라고 명명했는데, 나중에 이곳에 제2 캠프를 구축했다.
피터와 윌리는 최대 난코스인 얼음 덮인 암벽을 돌파하고 북릉에서 2피치 아래 지점까지 루트를 개척했다. 로스켈리가 스테이츠의 확보를 받으며 가루눈이 들어찬 여러 개의 가파른 걸리, 암벽, 빙벽, 심설을 돌파해 북릉 조금 못 미치는 지점까지 진출했다.
8월 20일, 6일간의 폭설이 그쳤다. 라이차트, 로스켈리, 키란, 니르말이 허벅지까지 빠지는 심설 속에 파묻힌 고정자일을 파내며 제2캠프로 짐을 운반했고, 다음날 라이차트와 로스켈리는 설사면을 지나 심설 속으로 드디어 북릉에 진출했다. 창가방, 칼랑카, 카메트, 다울라기리 연봉들이 멀리 솟아 있었다.
북릉상의 800m 떨어진 곳에는 거대한 버트레스(필라)가 솟아 있었다. 라이차트는 그 버트레스가 미국 요세미티계곡의 돌기둥인 워싱턴 컬럼(Washington Column) 남벽과 흡사하다고 말했지만, 높이가 더 높아 300여 m에 달했다.
8월 22일, 라이차트, 로스켈리, 스테이츠는 북릉 상의 6,706m 지점까지 짐을 운반하고 제3캠프를 구축했다. 지원조의 활동이 부진해 선등자들도 제2캠프까지 내려가 장비와 물자를 운반해 왔다. 로스켈리는 스테이츠의 확보를 받으며 3일간 최대 난코스인 버트레스 루트 개척에 매달렸다. 로스켈리는 허리까지 빠지는 심설을 헤치고 버트레스 밑에 도달해 절벽을 76m를 오르고, 사방 30cm의 스탠스(stance·발판)에 확보한 후, 파트너를 그곳으로 불러올렸다.
7,000m 지대에서의 절벽 등반은 너무나 힘겨웠다. 로스켈리는 암벽 위에 덮인 가루눈을 제거하며 드문드문 위치한 핸드 홀드와 풋 홀드를 찾아내며 등반했다. 홀드가 전혀 없는 록밴드가 나타나 루트가 두절되자 그는 좌측으로 트래버스하여 얕은 침니를 오르고 다시 우측 루트로 되돌아와 스테이츠를 불러 올리고, 걸리로 23m를 오르고 벽에 돌출한 암반에 도착해 다시 스테이츠를 불러올렸다.
-
- ▲ 파미르의 한 봉우리 정상에 오른 난다데비 언솔드, 러시아 유명 산악인 블라드미르 샤타예프, 윌리 언솔드.
-
알프스의 아이거 북벽 상의 크럭스인 ‘엑시트 크랙’ 같은 피치(pitch, 비탈)가 나타났다. 루트 양쪽으로 가루 눈사태가 계속 쏟아져 내렸고,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크랙도 홀드도 없는 반반한 수직 암벽이 다시 나타났다. 그는 측벽으로 트래버스하기 위해 아래쪽 좁은 레지로 내려가야 했다. 그는 절벽 틈에 양쪽 팔다리를 벌려, 날개를 편 독수리 자세를 취하며 홀드를 잡고 아래로 내려섰다. 그곳에서 길이 9m, 넓이 90cm, 경사도 70도의 빙벽이 위쪽 오버행 벽 밑으로 이어져 있었다.
구간을 통과하자 폭이 주먹이 들어갈 정도인 수직 크랙이 나타났다. 그는 배낭 속의 짧은 줄사다리를 꺼내 벨트에 차고, 아이스 액스도 허리에 매달고 크랙에 주먹을 재밍(jamming·밀어 넣기)하며 6m를 올랐다. 크랙이 오버행 벽으로 이어졌다. 그는 왼쪽 주먹을 크랙에 밀어 넣고 거기에 매달려 60cm 위쪽 크랙에 두께 6cm의 봉 피톤(bong piton·큰 피톤)을 때려 박고, 카라비너를 걸고 줄사다리를 설치해 발판으로 삼고 올랐다.
그는 두 개의 피톤을 더 박고 그 오버행을 돌파한 후 가루 눈밭에 도달했다. 그는 게걸음으로 트래버스해 다른 벽의 꼭대기에 올랐다. 그는 경사도 60도의 사면, 여러 개의 바위 스텝을 오르고 붉은 오버행 규암(硅巖) 밴드 밑에 도달했다. 오후 4시였다. 그는 버트레스의 측면으로 자일하강을 하면서 등반할 때 설치했던 피톤을 모두 회수했다. 짐의 턱수염과 콧수염에 얼음이 엉겨 붙어 유령처럼 하얀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드디어 버트레스의 최대 난코스를 돌파했다.
난다데비 양, 제4캠프에서 사흘동안 복통 앓다 아버지와 연인 앞에서 절명
다음날 로스켈리와 스테이츠는 버트레스 루트 개척을 계속했다. 로스켈리는 전날의 최고 도달 지점에 도착해 측면의 트래버스 구간에 설치했던 고정자일을 줄넘기 돌리듯이, 버트레스 가운데 암반 쪽으로 넘겨 고정자일을 직선으로 수정했다. 그는 위쪽의 오버행 밴드를 돌파하기 위해 먼저 오른쪽 가루눈이 덮인 경사도 70도의 암벽으로 내려가 측벽을 9m 오르고 좌측으로 트래버스해 오버행 밴드를 가르는 넓은 침니 밑에 도달했다.
그는 오버행 침니 벽의 좁은 크랙에 면도날 두께의 칼날 피톤을 박고, 줄사다리를 설치해 발판으로 삼고 올랐다. 그가 무거운 짐을 짊어졌기 때문에 오버행이 그의 몸을 자꾸만 바깥쪽으로 밀어내려고 했다. 그는 두 개의 피톤을 더 설치한 후 침니 꼭대기의 바위 선반으로 올라섰다. 그가 위쪽의 사방 60cm 크기의 볼더(boulder·둥근 돌)를 잡았을 때, 그것이 곧 빠져나오려고 해서 깜짝 놀라 재빨리 제자리로 밀어 넣었다. 만일 그것이 굴러 떨어졌다면 15m 아래쪽의 후등자 스테이츠를 박살냈을 것이다.
-
- ▲ 난다데비 초등대.
-
그가 바위 선반에서 좌측으로 6m를 트래버스해 걸리 밑에 도달한 후 그 걸리를 등반하는 도중 30m 위쪽의 설원에서 가루 눈사태가 30초 간격으로 쏟아져 내렸다. 그는 걸리의 벽에 두 개의 피톤을 박아 확보하고 스테이츠를 불러 올렸다. 그들은 무시무시한 가루 눈사태를 뒤집어쓰며 걸리 등반을 계속했다. 로스켈리는 스파게티처럼 꼬인 자일을 풀면서 또 한 피치의 등반을 시작했다. 그는 침니와 크랙을 오른 후, 나머지 절벽을 프리클라이밍으로 올라 설원에 도달해 그 설원을 ‘슈거 딜라이트 설원(Sugar Delight Snowfield)’이라고 명명했다. 그들은 자일 하강을 하여 제3캠프로 돌아왔다.
다음날 로스켈리, 라이차트, 스테이츠는 전날의 최고 도달지점에 올랐다. 로스켈리는 나이프 하켄을 설치해 확보한 후, 30cm 넓이의 레지로 9m를 이동하여 심설이 들어찬 걸리로 들어섰다. 그 걸리로 무릎 깊이의 가루 눈사태가 쏟아져 내렸다. 걸리의 좌우측 벽은 모두 수직벽이어서 그는 높이 120여m의 그 걸리를 등로로 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15분 만에 걸리 속의 난코스 15m 높이의 암빙 구간을 돌파한 후, 90m를 오르고 걸리 속의 눈사태 구간을 벗어나 작은 스탠스에 도달해 크랙에 피톤을 설치하고 스테이츠를 불러 올렸다.
로스켈리는 걸리의 우측 허리까지 빠지는 심설 속으로 등반을 재개했다. 그는 마지막 장애물 오버행 촉스톤을 돌파하고 9m를 더 올라 걸리를 돌파했다. 스테이츠와 라이차트도 올라와 합류했다. 로스켈리는 경사도 75도의 빙벽을 가로질러 좌측으로 트래버스하고 얼음이 덮인 암벽에 도달한 다음 여러 개의 바위 선반을 올라 12m를 돌파했다. 이어 그는 여러 개의 오버행 밑에 도달해 피톤을 설치하고 눈 덮인 둥근 바위 덩어리들을 지나 바위선반을 이용하며 홀드 없이 15m를 올랐다. 그는 아이스 해머로 빙벽에 홀드를 깎고 전진하여 크랙에 칼날 피톤을 설치하고 스노 립 상의 사방 30cm 크기의 스탠스에 도달했다.
그는 수직의 스노 침니로 들어서, 그 침니 벽의 바위에 피톤을 설치했다. 이제 버트레스 정상까지 20여 m만 더 오르면 되었다. 그는 스노 침니 속에 파묻힌 홀드를 파내며 6m를 올라 경사도 75도의 설사면에 도달했다. 그는 수영자세를 취하며 심설 속으로 15m를 더 오르고 드디어 버트레스 정상의 설원에 도달했다. 돌출된 큰 바위에 피톤을 박고 남은 피톤을 거기에 매달아 보관했다. 오후 5시 반이었다. 그들은 자일하강하여 제3캠프로 돌아왔다. 난다데비 언솔드, 앤디, 피터, 니르말, 키란이 제 3캠프에 텐트를 설치하고 머물고 있었다.
다음날 로스켈리, 피터, 스테이츠, 라이차트는 버트레스 상의 설원인 슈거 딜라이트에 도달했으나 거기서 피터는 등반을 포기하고 제3캠프로 하산했다. 세 사람은 로스켈리의 선등으로 등반을 계속해 버트레스 상부의 설원 7,315m 지점에 2인용 텐트를 설치하여 제4캠프를 구축했다.
9월 1일 아침 8시 반 세 사람은 선등을 교대하며 무릎까지 빠지는 심설, 가파른 눈처마 능선, 당장이라도 눈사태가 일어날 것 같은 허리까지 빠지는 경사도 50도의 심설 벽을 통과했다. 스테이츠가 허리까지 빠지는 심설 속으로 선등하여 높이 6m의 뾰족한 암봉(gendarme)을 넘어 사라졌다.
-
- ▲ 등반 중인 난다데비 언솔드.
-
두 사람은 그 뒤를 따랐다. 그들은 여러 개의 첨봉들 옆을 통과했다. 눈처마가 늘어선 높이 9m의 검은 바위 밴드가 나타났다. 로스켈리가 얼음이 들어찬 바위 걸리로 밴드를 돌파했다. 그들의 루트 우측 설벽에서 두께 60cm의 판상 눈사태가 발생해 북서벽으로 쏟아져 내렸다. 라이차트가 등반을 포기하려고 하여 로스켈리가 설득해 설원에 함께 도달했다. 그들 앞의 눈처마가 정상인 줄 여러 번 속고 난 후, 그들은 오후 2시에 난다데비 정상을 밟았다. 그들은 악수를 나누고 서로의 어깨를 두드리며 격려했다. 그들은 빈 물병에 성조기를 꽂아 정상 눈밭에 깊이 묻고 사진을 촬영하고 구름 속에서 하산해 오후 4시 제4캠프로 귀환했다.
다음날 그들이 제3캠프로 하산했을 때 에반스와 피터가 축하의 인사를 했다. 로스켈리는 기침을 계속하는 앤디와 설사를 계속하는 언솔드 양의 등반을 만류했지만, 자신의 부친과 함께 자신의 이름과 같은 산을 등정하려는 난다데비 양에게는 소귀에 경 읽기였다.
9월 4일, 피터, 앤디, 난다데비 언솔드 양이 버트레스 상부의 제4캠프로 올라갔고, 이튿날 피터 혼자 등정을 시도했으나 록밴드 밑까지 진출하고 제4캠프로 귀환했다. 그 날 제3캠프의 윌리, 에반스, 키란, 니르말은 버트레스를 오르려고 시도했으나 키란과 니르말의 동작이 너무 굼떠서 실패했다.
9월 6일 윌리는 혼자 딸이 있는 제4캠프로 올라갔고, 다음날 기상이 악화되어 피터와 앤디는 등정을 포기했다. 3일 전부터 복통과 심장통을 호소하던 언솔드 양이 9월 8일 오전 10시 얼굴이 새하얗게 변하며 의식을 잃었다. 그녀의 연인 앤디가 인공호흡을 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끝내 생기발랄하던 그녀는 자신의 부친과 연인 앞에서 갑자기 절명했다. 폭풍이 몰아치는 가운데 세 남자들은 그녀의 시신을 침낭에 싸서 밖으로 끌어낸 뒤, 간단한 의식을 치르고 난다데비 북서벽 여신의 품속으로 던졌다.
1994년 롱 스태프 콜에서 알파인 스타일로 동봉 등정
2년 후인 1978년 루 라이차트와 존 로스켈리는 K2 북동릉 무산소 등정자가 되었고, 사랑하는 딸을 난다데비에 묻은 윌리 언솔드 교수는 1979년 미국 마운트 레이니어 등반 중에 눈사태로 사망했다.
1983년 라이차트는 에베레스트 캉슝 벽(동벽)을 등정했다. 질병으로 인해 등반대를 떠났던 마티 호이는 1984년 에베레스트 북벽 그레이트 쿨와르 등반 중에 8,000m 지점에서 갑자기 안전벨트가 풀리며 추락사했다.
1983년 난다데비 성소의 생태계를 보존하기 위해 성소가 다시 폐쇄되어 주봉의 등반이 중단되었다. 1994년 폴란드 대의 파이네와 클리마 두 대원은 난다데비 동봉의 롱 스태프 콜에서 남릉으로 동봉을 알파인 스타일로 등정하는 데 성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