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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한 13세 소년이 쓴 탈북 수기
<탈북한 13세 소년이 남조선에 보내는 편지>
(2004년 10월 게시 글 펌)
남조선 분들에게 드립니다. 북조선에서 도망쳐서 여기 지금 중국에서 이 글을 씁니다.
저의 고향은 평양입니다. 아버지는 김일성종합 대학에서 정치학부 선생이였고
어머니는 김형직 사범대학에서 외국어학부 선생이였습니다.
누나는 평양음악무용대학에서 기악을 배우는 학생이였습니다.
저의 가족은 평양시 동대원구역에 살았습니다.
저는 중학교 1학년에 올라오자마자 인차 아버지,어머니,누나와 함께
정치범 관리소에 가게 되였습니다. 평양에 살 때 우리는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친구들과 술마시다가 술에 취해 로동당에 어긋나는 정치적 발언을 하여
반당, 반혁명분자로 되여 우리집 식구들은 함경북도 명천군인가하는 곳에 정치범관리소에
잡혀가게 되였습니다.
밤에 자는데 갑자기 문을 쾅쾅 두드리며 사람들이 밖에서 소리쳤습니다.
아버지가 나가서 문을 열었는데 밖에서 기다리던 사람들이 4명이 시꺼먼 안경을 끼고 있었는데 아버지 가슴을 쎄게 때리더니 량쪽에서 팔을 비틀어 뒤로하여 족쇄를 채우고 두사람은 아버지를 끌고나가고 두사람은 우리집을 수색하였습니다. 집안이 전부 마사지고 부억에 내려가 사발까지 다 깨버리더니 어머니와 누나,나를 방바닥에 앉으라고 하더니 아버지가 집에서 반혁명적 소리들을 하지 않았는가, 나쁜 사람들과 접촉하지 않았는가, 록음기로 라지오를 듣지 않았는가, 하면서 여러가지를 자꾸 물어보았습니다.
아버지 당증을 찾아서 그것은 자기네들이 건사한다고 하면서 주머니에 넣었고 아버지가 전국지식인대회에서와 사로청대회, 그리고 군대때 대회에 참가하여 찍은 기념사진 4개를 몽땅 벗겨서 보자기에 싸가지고 자기비판을 할 준비를 잘 하고 있으라고 하더니 밖에 나오지 못하게 밖으로 열쇠를 채우고 가는 것이였습니다. 우리 어머니는 건강하지 못한데 그때 사람들이 나가자 마자 기절하면서 쓰러졌습니다. 누나와 나는 울면서 어머니를 흔들었지만 새벽에 날이 밝아서야 어머니는 깨나더니 누나와 나를 안고 계속 울었습니다.
아침에 9시 되여서 까마즈차가 오더니(러시아제 화물트럭) 우리집 물건을 다 실어가고 어머니와 누나,나는 갱생에 (68년 북한산 찦차) 타라고 하더니 평양시 보위부에 싣고가 거기서 2일밤 감방 안에 있으면서 나는 그냥 있고 어머니와 누나가 계속 불리워나가 조사를 받았습니다.
손도장이랑 여러번 찍더니 3일되는 아침에 랭동차에 타라고 (북한에서 자체로 철판으로 차 적재함에 철집만들어 쒸운 차인데 호송이나 포약,탄약 등 중요 물건 나를 때 이런 차를 쓴다)하였습니다.
그 안에 들어가니 아무 것도 없고 군대 4명이 총을 메고 앉아 있다가 우리를 끌어올려 놓았습니다. 그때 우리 가족 뿐아니라 젊은 남자 3명, 녀자 2명도 함께 갔습니다. 그 사람들은 손과 발에 족쇄를 다 채우고 우리 가족은 그냥 갔습니다
쉬지않고 계속 가다가 모를 곳에서 밖에 나가 변소(소변)보라고 하면서 우리 가족은 차에서 내리게 하여 길옆에서 변소를 보고 족쇄에 묶이운 사람들은 차에 물넣을 때 쓰는 바게쯔를 올려보내 거기다 오줌을 누게 하였습니다, 우리 식구를 타라고 하더니 문은 하나만 닫고 하나는 열어놓고 군대 4명과 운전수(운전기사), 별을 단사람 2명이 밥싸온 걸 펼쳐놓고 밥을 먹으면서 <먹고싶지? 그러게 왜 당을 반대하나? 당을 배반하면 너희들은 짐승 보다 못해!>하면서 쌍욕을 하면서 자기들끼리만 밥을 먹더니 별을 단 사람 한명이 나를 보고 <야! 거기 새끼 반동! 이리와!>하더니 <네 애비, 에미 반동이여서 너두 고생하는거야>하면서 밀빵 두개와 절군 오이반찬 한 젖가락 크게 집어서 내 손바닥에 주면서 다 먹은 다음 올라가라고 했습니다, 저는 오이만 씹어 먹고 빵은 먹는 것처럼 하면서 춤( 침)을 발라 꽉 쥐여 쪼꼬마게 덩어리 두개를 만들어 쥐고 <잘 먹엇습니다>인사하고 차에 올라가자마자 한덩어리는 엄마 입에 넣고 다른 한덩어리는 누나 입에 쑤셔 넣었습니다
어머니는 아무 말도 못하고 내 손을 꽉잡고 빵 덩이를 입에 문채 나를 보면서 눈물 흘렷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새벽 2시쯤 해서 관리소에 도착했는데 정문 앞에 사람들이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 아이가 들어간 수용소는 함경북도 화성군에 있는 16호 관리소인데 원래는 중요 범죄자들만 취급하던 곳이다. 반당반혁명분자,반당반혁명 종파분자들로써 관모봉 기슭에 있던 정치범 관리소를 없애게 되면서 거기에 있던 김창봉,허봉학 등도 여기에 있다가 화성관리소로 왔다고 한다.
관모봉 관리소를 없애게 된 근원은 6군단을 해산하면서 9군단사령부를 관모봉 기슭에 건설하면서 그 안의 정치범 관리소를 없애게 되었다. 또한 온성군 종성구의 정치범 수용소도 그 안에 인민군 담배농장을 건설하면서 인원을 각 정치범 관리소들에 분활 배치했는데 여기 인원 중에서 엄중 범죄자들이 화성 관리소로 가게 되었다
6군단 사건 마무리 하면서 체포된 사건 관계자들도 모두 화성으로 옮겨졌는데 당시 그 인원들을 실어나른 사람이 본인과 혈연관계이다. 이때부터 화성의 정치범 관리소는 부피가 커지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꿱꿱 소래기 치며 우리를 보고 머리를 들지말고 손을 올려 머리 뒤에 붙이라 하면서 초대소에 들어가더니 족쇄에 묶이운 사람들은 그냥 그길로 차에 싣고 들어가고 우리 가족은 방바닥에 무릅꿇고 앉으라고 하더니 이것저것 물어보며 책에다 쓰는 것이였습니다.
사람 4명이 오더니 어머니와 누나를 먼저 데려 내가고 우리를 데려온 사람들에게 이젠 다 됐다 돌아가도 된다고 하자 그 사람들은 자기네 끼리 말하면서 나갔습니다
사무실 바닥에 혼자 앉아있는데 어떤 보안원이 오더니 나를 데리고 가더니 감방에 가두었습니다. 들어가기 전에 입고 온 옷들을 다벗기고 거기서 죄수복을 주었는데 너무 커서 마대처럼 너덜거리고 너무 낡아서 다 구멍이 뚫리고 때가 너무 껴서 옷처럼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안에는 20살부터 10살까지 남자 아이들만 30명 있었는데 그런 반이 6개였습니다. 나는 4반이였습니다. 내가 있는 데는 3구역이라고 했습니다. 새벽에 반장이 기상하고 소리쳐서 다 깨여나 밖에 나가 줄을 섰습니다.
그때 밖을 보니 량옆이 다 벼랑인데 벼랑에다 동굴을 파고 거기에 기관총을 걸고 군대들이 보초를 섰습니다. 내가 거기 있을 때 벼랑 초소를 세여보니 12개가 3구역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 날부터 가구 만드는 조에서 목수일을 배워 주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가족은 다 갈라져서 아버지는 1구역, 어머니와 누나는 2구역에 갔는데 1구역 아버지 방은 손과 발에 족쇄를 차고 있어야 하는 엄중한 죄수 구역이고 2구역은 허리굽히고 들어가는 콩크리트 창고인데 계단으로 해서 땅속으로 내려가면서 방들이 있었습니다.
천정은 살창을 치고 그우에 보초병이 총을 메고 보초를 섭니다. 2구역은 강제로동을 시키는 곳인데 남자들은 벌목과 제재일을하고 (통나무를 판자로 만드는 곳) 녀자들은 농사일을 하였습니다, 3구역은 나이 많은 사람들과 어린아이들 그리고 1.2구역의 가족들이었는데 죄수들을 치료하는 진료소도 있었습니다.
밥은 하루 두끼주었는데 한끼는 감자 1개와 소금 몇알을 주고 다른 한끼는 통강냉이 삶은 것을 한줌 주거나 벼겨,강냉이겨를 가루내여 범벅을 만들어서 한덩지씩 주기도 햇고 통밀을 삶은 것을 한줌 주기도 했습니다. 나는 일을 잘 하지 못한다고 하면서 반장이 자꾸만 절반씩 빼앗아 갔습니다.
그래도 선생님들에게 말하면 안되였습니다, 감옥 주변에는 풀도 제대로 나지 못하게 약을 쳐서 배가 고파도 풀뜯을 데가 없었습니다, 어쩌다가 빽빽이풀과 고마리풀,도꼬마리풀과 강태나무풀을 보면 선생들에게 들키지 않게 뿌리까지 다 뽑아서 먹고 나머지는 씹어서 덩지 만들어 숨겻다가 밤에 잘 때 몰래 먹었습니다. 3구역 안에 사는 사람들 중에는 산에서 도토리를 잘 줏거나 송이버섯을 잘 따는 사람들은 그래도 산에서 일하면서 칡뿌리,머루,다래,돌배도 먹는데 우리 처럼 평양에서 살던 사람들은 아무 것도 모르니 관리소 안에서 시키는 일만 했습니다.
작년에 관리소에 들어왓을 때 몇달 동안은 우리 가족이 모두 검토 기간여서 남들보다 고생을 숱해 했습니다, 일주일에 2번 아니면 3번씩 아버지와 우리 가족을 한 자리에 모이게 하고 여러 가지를 물어보았으며 감시원 선생들이 아버지가 제대로 불지않는다고 하면서 우리 가족이 보는 앞에서 각자 몽둥이로 아버지를 때리엿으며 메고잇는 총에서 소제대를 뽑아서 때렸습니다.
또 어떤 때는 전동기에 끼우는 피대를 잘라서 만든 채찍으로 때렸습니다. 아버지가 맞아댈 때마다 어머니는 기절하였습니다. 어머니가 기절하면 선생들은 물 한 바게쯔를 떠다가 나에게 주면서 엄마에게 부으라고 하기에 나는 무서워서 떨면서 엄마의 몸에 물을 부엇습니다. 아버지가 그때마다 소리치면 선생들은 <이새끼 아직 정신 덜 들엇다>면서 량옆에서 달려들어 아버지의 관절사이에 각자 나무를 끼우고 무릅을 밟아대였습니다, 어떨 때는 아버지를 거꾸로 매달아놓고 <여기 자료가 다있다, 돈 얼마를 받았어. 안기부 요원 대라, 너희 단체를 대라>하면서 때렸습니다. 너무 맞아대여 아버지는 이발이 남은 것이 없고 입이 터져서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였습니다, 머리를 다 깍아놧는데 머리가 너무 맞아대여 성성한 데가 없었습니다.
온몸이 상처가 가뜩 했고 제대로 걷지못하니까 선생들이 량옆에서 끌고 다녔습니다. 선생들도 때리고 조사 나온 양복 차림의 사람들도 때렸습니다, 자꾸만 대라고 하면 아버지는 그런 일이 없다고 하면서 선생들에게 대들고 그러면 여러 명이 달려들어 거의 죽게 때렸습니다.
작년 겨울 12월
설날 며칠 앞두고 우리 가족을 모두 불러내여 <설전에 네 새끼 일 끝내야 한다, 골아프다, 야 이 새끼야! 시원히 확 불어버리믄 너두 편안하구 나두 편안할 거 아니냐>면서 1구역 안에 잇는 작업장 창고 앞 돌배나무에 묶어놓았습니다, 양복 입은 사람이 동복(외투) 큰거 걸치구 나와서 앉아있고 다른 선생들은 옆에 서 있었는데 양복 입은 사람이 다른 선생에게 가서 각자 6개를 가져오라구 시켰습니다
그 선생이 한쪽에 메고 잇던 총을 목에다 걸어 가로메더니 (인민군에서 지어총! 자세를 보고 하는말) 가서 제재소에서 켜둔 각자나무를 가져옸습니다. 어머니와 누나,나에게 하나씩 쥐라고 하더니 <이제부터 한마디 물어봐서 말 안하면 한 사람이 3대씩 힘껏 때리라>고 하였습니다.
저도 3번이나 9대를 아버지를 때렸습니다. 그래도 아버지는 <나는 그런 걸 모른다. 나는 당에 떳떳하다> 하면서 겨우겨우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선생들은 <이 새끼 이래서는 안되겟다> 하면서 어머니와 누나를 발가벗기더니 마당에 광산에서 쓰는 광차가 4개 있었는데 거기에 물을 꼴뚝(가득) 채워둔 것이 얼어서 곡괭이로 깨더니(까더니) 그 안에 들어가라고 하였습니다. 어머니와 누나는 울면서 발악하니까 선생들이 얼음속에다 엄마와 누나를 넣고 나오지 못하게 꼭대기에서 발로 누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아버지 앞에 다시 세우고 아버지의 죄를 불게하면 <너희는 집에 갈 수 잇다> 하면서 시켰습니다, 제대로 말을 하지 않는다고 꽁꽁 언 어머니와 누나의 온 몸을 군관 혁띠로 때렸습니다.
또다른 선생 한명은 우리 어머니의 두 다리 사이를 벌리게 하고 <이년 까치둥지 멋잇다>하면서 엄마의 아래도리 털을 당기면서 뽑았습니다. 다른 선생은 누나에게 <야, 너 대학다닐 때 아 새끼들(청년들)과 몇판 했나?>하고 물으니까 누나가 울면서 <한번도 그런 일이 없습니다> 하니까 거짓말 한다면서 <벌려라 보자, 검열하겠다>하면서 맨땅바닥에 눕게 하더니 다리를 하늘 공중에 벌리라고 하더니 신발 신은채로 누나의 아래도리를 후벼대며 그리고는 각자 몽둥이로 비비면서 <쌍년 많이 놀아봤구만 그래도 거짓말이야>하더니 <거짓말한 대가다, 너 처벌이다> 하더니 가스 라이타를 크게 올리더니 <움직이면 밟아죽인다> 하면서 소리치며 누나의 밑에 불을 달아놓았습니다.
누나가 악! 소리치며 비트니까 선생들은 와 하고 재밋다고 하면서 고아댔습니다. 그날 우리 가족은 모두 죽는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가 기절한 후 정신을 차리지 못하자 그때에야 조사가 끝났습니다,
그후 10일이 지나서 또 가족이 모여 조사를 받았는데 저녁때까지 하다가 생활총화 한다면서 (북한에서는 한주일에 한번씩 당생활총화,청년동맹생활총화,지맹원총화 등을 한다) 다른 선생들은 다 가고 두명이 남아서 아버지는 기둥에 묶어 놓고 어머니는 나무무지에다가 바줄로 두손을 묶어놓은 다음 나는 어머니와 함께 묶어놓더니 누나를 보면서 <이 년은 이 안에 온지 1년 돼 오는데두 아직 고기 좀 붙어잇구나, 뭘 도적질해 먹구 고기 안빠졌나?>하더니 누나에게 <네년 이상하다 왜 고기가 안빠지는지 검열해 봐야겠다>하면서 억지로 옷을 벗겼습니다.
아버지가 묶이운 곳에 가마니와 갈대로 만든 나래가 있었는데 (갈대를 엮어서 두루마리처럼 한 것임) 선생들이 그걸 끌어다가 누나에게 그우에 누으라고 하더니 한 선생이 <이 간나 때 호미루 긁을 지경이다. 더러워서 못보겟다>하더니 지하족을 벗고 발사개 하나를 주면서 광차 속에 잇는 물에 적셔서 밑을 깨끗이 닦으라고 했습니다 (자기는 새 발사개를 품에서 꺼내 갈아신었다고 함)
누나가 발사개를 적셔서 닦고 또 닦자 시뻘겋게 되엿습니다. 누나가 접어드는 두 선생에게 반항하자 누나를 몇대 때리더니 다른 한 선생은 말아피우던 독초꽁초를 (북한군은 권연이 없어 잎담배를 신문지로 말아피움) 누나의 젖꼭지에 비벼대며 죽여버린다고 하면서 누나를 땅바닥에 쓸어뜨리고 누나의 얼굴 우에 엉뎅이를 대고 눌러앉아 두손을 발로 눌럿습니다, 그래도 누나가 발버둥 치자 손과 발을 따로따로 묶엇습니다.
발 하나는 아버지가 묶인 기둥에 묶고 다른 발 하나는 어머니의 몸과 나무무지에 묶고 두 손은 기둥과 광차손 잡이에 묶어 놓더니 <네 간나, 오늘 걸레 만들겟다>하면서 강간햇습니다.
그리고는 엄마와 나에게 다른 선생들에게 말하면 너희는 그 시간부터 이 세상에 없을 줄 알라고 윽박질럿습니다, 아버지에게는 이래도 불지않느냐 하면서 이런 독종 새끼니까 안기부 밀정 한다면서 아버지를 풀어 얼음 물에 잠그려고 하엿습니다
그때 순간에 아버지는 최대의 힘을 다하여 한 선생의 옆구리에 매달려잇는 총창을 비틀어 잡고 자기 배에 힘껏 찔러 자살햇습니다. 군대들 자동 보총에 칼꽃는 것을 혁띠에 매달아서 옆구리에 달고 다닙니다. 칼집채로 박히다보니 아버지 주변에 피가 숱해 흘럿습니다. (북한군 AK자동소총에는 육박전을 위한 총창이 있는데 혁띠에 차게끔 되여잇다)
선생들이 급해서 연락해서 의사들이 와서 담 가에 싣고 가는데 그 때까지는 아버지가 숨이 붙어잇다가 가는 도중에 사망햇습니다. 그때 엄마가 또 기절하면서 신경이 돌아 다음날 정신병자 병동에 들어가 있다가 어느날 변소칸에서 인분을 세 사발되게 먹고 죽었습니다. (그 사건으로하여 처녀를 강간햇던 군인 두명은 강직처벌되여 다른 부대로 갓다고함. 그 문제로 하여 우에서 검열까지 내려왓으며 관리소내 군인들 사상투쟁회의도 잇엇다고함 )
누나도 잡병이 많이와서 계속 앓앗는데 아버지,엄마가 죽은 후 머리가 돌아 정신이 들락날락 햇습니다, 나는 하나 남은 누나를 살려보려고 내게 나오는 음식을 몰래몰래 숨겨 제재소에 심부름 갈 때마다 누나의 호실에 던져넣엇습니다. 매일 저녁 사상 개조 회의를 햇는데 남자들 따로, 녀자들 따로 앉히고 공부시키다보니 누나와 나는 마주보며 소리도 내지 못하고 울기만 햇습니다.
누나는 점점 약해져서 정말 귀신처럼 되엿습니다. 머리도 뜿어먹개처럼 (마구 헝클어짐) 깍아 놔서 어떨때는 누나를 찾기도 힘들엇습니다.
평양에 잇을 때 우리 누나는 너무 고와서(예뻐서) 화보(잡지)에도 나고 청년문학에도 나고 하엿습니다, 아빠트 사람들이 정말 영화배우감이라고 (북한에서는 예쁜 여성들을 영화배우감으로 비유하여 표현한다) 하면서 성격도 조용하고 말이 적고 례절이(예의) 밝아서 대학에 서랑 누나를 아는 사람들은 다 칭찬햇습니다. 그러나 감옥에 온 후 별의별 고생을 다 당하고 별의별 일을 다 당하면서 누나는 병신이 되고 페짝(페인,식물인간 이름)이 되엿습니다.
그러면서 8월달이 되엿는데 그때부터는 관리소에서는 먹을 것이 없어 감자밭에서 감자를 캐서 죄수들에게 주엇습니다. 감자 캐는 건 녀자들이 호미로 감자를 캐놓으면 남자들이 삼태기에 담아 선생이 지키는 곳에 가져다 모아 놓으면 소달구지가 와서 실어갓습니다.
점심시간이 되여 선생들이 모여앉아 감자구워 먹는다고 경비 서던 선생 가지 불더미에 간 사이 남자죄수 3명이 누나에게 달려들어 강간하는데 누나가 저 혼자 죽엇습니다.
계속 앓는데다가 며칠동안 먹지 못하고 있다보니 감자 캐러 나와서 경비선생의 눈을 피해 생감자를 정신없이 먹엇는데 그게 탈이 난데다가 남자들이 달려드니 너무 혼이나가 정신발작까지 일으킨 것입니다. 선생들이 달려와서는 뻔히 기색을 알 면서도 <도적질해 먹으니까 죄 만나 죽지>하면서 감자캔 줄기로 덮으라고 햇습니다. 그리고 남자죄수 3명은 호송선생들이 데려갓습니다.
그때 나는 감자 캐는데 없고 산나물 다듬는 조에서 일하다보니 누나가 죽은 줄 몰랏습니다. 계속 안보이기에 선생들에게 누나를 찾아달라고 하면 머리를 때리면서 모른다고만 햇습니다. 나와 친한 영수가 알려주어서야 나는 누나가 죽은 줄 알앗습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잇엇는데 사람이 없어지면 관리소가 야단칠텐데 조용하기만 햇습니다
며칠동안 비가 계속 오니 밖에 내보내지 않고 감방 안에 가둬두기만 하다보니 소식을 알 수가 없엇습니다. 그게 8월 10일 전인데 20일이 다 되여서야 다시 감자 캐기가 시작되면서 나도 감자 캐는데 나갓습니다. 밭에 먼저 들어간 사람들이 밭정리 하면서 누나의 시체를 찾앗습니다.
관리소에서는 10일 그때 죽은 걸 처리해야겟으나 그 사이 비가 계속오니까 다시 감자 캐기할 때 가서 날라다 처리하려 한 것이엿는데 우리 담당선생이 그걸 모르고 나를 그만 감자 캐기에 내보낸 것입니다, 나는 울면서 선생들에게 우리 누나 묻어달라고 햇지만 선생들은 가마니에 둘둘 말아 죄수들 보고 들라하더니 나를 따라오지 못하게 하고 그날 화장터에 갓다가 화장해 버렷습니다.
관리소 안에 화장터가 잇는데 한달에 10명이 넘게 화장햇습니다. 누나의 시체를 보니 한 손에는 감자줄기가 썩어 잇엇고 다른 손에는 흙이 잇엇습니다 입 안에는 감자 썩은 것이 흙과 함께 잇엇습니다.
그래서 손가락으로 입안의 흙과 썩은 감자를 파내면서 누나를 안고 우는데 선생들이 달려와 나를 때리면서 반장에게 소리쳐 나를 데려가라 하더니 가마니에 말아서 누나를 가져갓습니다. 나는 며칠을 몰래 울며 보냇습니다.
우는 것이 선생들에게 들키면 반혁명분자를 동정한다 하면서 사상투쟁 무대에 세우기 때문에 우는 것이 들키지 말아야 햇습니다. 나와 제일 친한 애가 영수인데 내보다 두살 더 먹엇는데 <남자새끼 그만한 건 참고 견뎌내라. 그리구 잊어버려라. 어떻게 하나 살아야한다, 통일되면 무슨 일이 오겟지> 하면서 나를 생각햇습니다.
영수네는 할아버지가 전쟁 때 악질 치안대로 사람들을 많이죽엿는데 월남한 것이 들켜 가족이 모두 중국에 가서 숨어잇엇는데 3년만에 잡혀서 여기온지 4년 되엿고 아버지는 그 때 인차 죽고
어머니는 2년 전에 죽엇다고 함니다. 형과 누나는 소식을 모른다고 햇습니다. 누나가 중국에 잇다고 하면서 자기네가 중국에 잇을때 못 먹어 본 것이 없다 하면서 중국 자랑을 많이햇습니다
9월부터 버섯 뜿는 조를 만들엇는데 나도 거기에 뽑히게 되엿습니다. 아직 버섯이 나지않아 먼저 산나물을 뜾기 시작햇는데 한 사람이 하루에 두 배낭을 꽈 채워야 햇습니다, 영수도 함께 다니게 되엿는데 그 애는 자꾸만 도망가자고 햇습니다.
무섭기도하고 길도 모르고 선생들이 총을 들고 지키는데 어떻게 도망치겟는가고 하자 고사리 뜿는 체하면서 저산만 넘으면 된다고 햇습니다, 자기가 3년 넘게 여기를 다녀서 잘 아는데 어디에 철조망 잇고 어디에 구뎅이가 잇고 어디에 지뢰 묻은 것까지 다 안다고 햇습니다. 산나물 뜾으러 8일 다녓는데 풀이라도 실큰 먹으니 힘이 좀 낫습니다. 우리가 도망치기 전날인데 그날 영수는 큰 뱀을 잡앗습니다.
대가리만 뜿어버리고 절반을 돌로 끊어버리더니 손가락을 배에넣고 밸을 쏟아버리고 껍질채로 우리는 풀뜾는 흉내내면서 씹어 먹엇는데 가죽이 너무 질겨 잘 넘어가지 않앗습니다. 나는 할 수 없이 가죽을 버리고 몸뚱이만 꿀꺽 꿀꺽 넘기엿습니다. 영수는 래일은 꼭 뛰자고 햇습니다, 다음 날 보슬비가 많이 내렷습니다.
선생들은 비옷을 쓰고 사회 사람들이 물건들을 들고와 산나물과 바꾸는데 술과 바꾸어서 저희들끼리 몰켜서서 마시엿습니다. 감시조장들이 사방에서 보고 잇지만 우리는 대담하게 봐둔 곳으로 기여 나갓습니다, 때마침 저쪽에서 지키던 감시조장 한명이 나무 꼭대기 올라가 지키다가 비에 나무가 젖어 미끄러지면서 떨어졋는데 그 바람에 선생들이 우리에게 신경을 쓰지 못하고 거기로 몰켜갓습니다. 그 사이 영수와 나는 철조망을 나무가지로 벋치고 그밑으로 넘어가 반대켠 산꼭대기로 정신없이 뛰엿습니다. 영수가 미리 한말이 몇 사람이 이렇게 도망치면서 아래로 뛰는 바람에 잡혀 총에 맞앗다고 하면서 산꼭대기에는 관리소 보초들이 보이기 때문에 거기로 도망갈 생각을 못한다고 하면서 우리는 쪼꼬만하기 때문에 잘보이지도 않고 보슬비가 내리면서 안개가 껴 쌍안경으로도 잘안보일 거라 하면서 등잔 밑이 어둡다면서 거기로 가자고 햇습니다. 산꼭대기 거의 올라갓는데 총소리가 여러번 낫습니다.
우리가 없어진 걸 알고 찾기 시작한 거 같습니다. 영수와 나는 죽을 힘을 다하여 뛰고 또 뛰여 산 2개를 넘엇습니다. 골짜기에 물이 흘럿는데 영수는 개들이 혹시 냄새 맡을수 잇으니 물속에 숨자면서 물에서 우리 둘은 저녁 어두어 질 때까지 잇엇습니다. 그런데 군대들이나 개들이 오지 않앗습니다.
영수는 저 산만 넘어가면 화성 역전이 보인다고 햇습니다. 나는 그때에야 여기가 함경북도 화성군인 걸 알앗습니다. 관리소에서 칠보산이 가깝다는 소리는 들엇지만 살고잇는데가 어데인지 모르고 잇엇습니다. 산에서 마을로 내려오면서 산나물 뜿는 사람들이나 소토지(산에 일군 땅에서 부업일 하는 사람들)
일하는 사람들을 보면 멀리 피해서 마을까지 와서 밤이 된 다음 영수와 나는 유치원을 습햇습니다. 거기서 속도전 가루 한중태기와 강냉이쌀 3키로 되게 훔쳐가지고 나와서 한 집을 또 털어 옷을 갈아입엇습니다. 그 집에는 먹을 것이 없고 배를 삶아서 식장 안에 둔 것이 잇엇는데 우린 영수와 둘이서 다 먹어버렷습니다. 영수는 기차 타면 안된다고 하면서 길로 가지말고 철길을 따라가자고 햇습니다. 세상에 나서 함경북도에는 처음 왓는데 청진까지 오는데 정말 무섭구 힘들엇습니다.
걸어서 생기령이라는 곳에까지 왓다가 화물방 통타고 청진 수성에 갓는데 거기서 철이형을 만나게 되엿습니다(중국에 같이 온 청진내기 아이 18살)
철이형은 자기 혼자서 중국에 7번이나 갓다 왓고 중국에 친척이랑 아는 사람이랑 많다고 하면서 자기가 데려다 주겟다고 햇습니다. 장마당에서 영수와 싸웟는데 영수가 이겻고 또 영수가 먼저 철이형에게 친구하자고 하는 바람에 우리는 3명이 친구가 되엿습니다.
철이 형이 남양교두에서 기다리다가 중국 들어가는 석탄방통에 붙자고 햇습니다. 나와 영수는 수영을 할줄 모르기 때문에 두만강 물이 깊은데 빠지면 죽는다고 하면서 정광이(광석 1차가 공 분말가루, 무산광산에서 캔 쇠돌 가루내여 청진제철소에서 철 생산하는 원료임) 중국에 많이 들어가는데 이제 정광방통이 남양역에 들어오면 거기에 동굴을 파고 숨으면 된다고 햇습니다. 먼저 온성에 갓다오자고 햇습니다. 돈을 만들자면 장마당 큰데가서 한탕해야 되는데 철이와 영수는 그런 도적질에 펄펄 날앗습니다.
온성 주원 장마당옆 다리밑에서 자면서 3일동안 장마당에서 쓰리(소매치기)한 돈이 3만원이나 되엿습니다. 이제 정광방통 들어오면 검사원에게 돈을 주고 우리가 파고들어간 데는 쇠꼬쟁이로 찌르지않게끔 약속한답니다. 먼저 남양군당 학교 뒤산에 올라 중국쪽을 보앗습니다.
아래로 내려가면 결핵병원인지 간염병원인지 잇엇는데 거기로 사람들이 많이 다녀서 우리는 위험해도 벼랑끝에다가 나무로 벋치고 그날 밤 거기서 잣는데 영수가 태질하면서 그 기둥을 차는 바람에 아래로 떨어졋습니다. 그 아래에는 철길이 지나가고 군대들의 잠복초소도 잇엇는데 악! 소리치며 영수가 떨어지자 사방에서 전지 불(후래시)들이 달려오더니 왁작왁작 햇습니다.
철이 형은 내입을 틀어막으며 빨리 빠져나가야 한다면서 나를 끌고 반대켠산으로 도망쳣습니다. 나는 울면서 영수를 찾지못한채 도망쳐야 햇습니다. 깊은 산속에서 나는 영수를 부르고 또 부르며 울엇습니다.
억울하게 아버지,어머니,누나를 관리소에서 빼앗기고 죽으려고 할 때도 영수가 없엇으면 나도 죽엇을 것인데 지금까지 영수 때문에 살아남앗는데 이제는 내 친형이고 형제인 영수마저 죽엇으니 어떻게 합니까
불쌍한 영수는 이렇게 두만강을 앞에놓고 죽엇습니다. 그 다음날부터 영수가 죽은 주변의 불룩한 웅뎅이와 묘지는 다 뚜져보앗지만 끝내 영수의 시체를 찾지못햇습니다.
그렇게 4일이 지나서 철이형과 나는 중국 들어오는 정광방통에 숨어서 10월 5일날 중국 안도라는 곳에 도착햇습니다. 안도에 잇는 철이형 친척은 돈 350원 주더니 집에 들여놓지 않앗습니다.
거기서 뻐스를 태워줫는데 목단강 나가는 차라고 햇습니다.
철이형과 나는 목단강에 7일날 도착햇다가 다시 버스를 타고 철이형이 아는 사람의 도움으로 천진에 오게 되엿습니다. 북경에서는 위험하기 때문에 천진에서 기차를 타던지 버스를 타라고 그래서 먼 데 안쪽으로 들어가라면서 철이형이 아는 사람이 알려주엇습니다.
조선 사람 식당에서 밥먹고 나오는데 이렇게 한국에서 온 기자 삼춘을 만나게 되엿습니다.
지금도 눈앞에서 아버지,어머니,누나,영수의 모습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저는 지금 이팝에 고기를 배불리 먹고 잇습니다. 먹으면서 항상 생각합니다. 나는 크면 꼭 복수하고야 말겟습니다. 아직은 내가 어려서 잘 모르지만 중국에 와서 남조선 영화도 많이보앗고 남조선 사람도 보앗습니다.
기자 삼춘이랑 여기 고마운 사람들을 만나면서 많이 알게 되엿습니다. 저는 크면 꼭 죽은 아버지,어머니,누나,영수의 복수를 할 것입니다. 기자 삼춘이 편지를 쓰라고 해서 지금 쓰는 이 편지가 남조선 사람들에게 전달된다고 하니 아버지,엄마.누나 생각이 더 나면서 울음 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저를 도와 주십시오 은혜를 잊지 않고 꼭 갚겟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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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지난 주 탈북 13세 소년이 남조선에 보내는 편지 전문"
<2004년 10월 15일 블로그 게시글>
https://t.co/b5o2PKy12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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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약~ 공산화 적화통일이 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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