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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05. 묵상글 ( 재의 수요일. - 하느님과 나와 벗 . 등 )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아직 / 04:46 추가
*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 일부 - : 아직 / 08:20 추가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 아직 / 08:20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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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05. 재의 수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느님과 나와 벗>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
그렇게 하여 네 자선을 숨겨 두어라.”(마태 6,3-4)
“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마태 6,6)
“너는 단식할 때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어라.
그리하여 네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지 말고,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보여라.”(마태 6,17-18)
기도
하느님께로
자유
나를 떠나
하느님께 가다
하느님을 만나다
하느님을 만나는 나를 만나다
나를 만나시는 하느님을 만나다
나의 하느님과 하느님의 내가 만나다
하느님과 나 사이에
오직 하느님
오직 나
그밖에 아무도 없게
그리하여 오롯이 만날 수 있게
단식
나의 것으로부터
자유
나의 것을 치우고
나에게 가다
나를 만나다
나를 만나는 나를 만나다
하느님 품에서 나와 내가 만나다
나와 나 사이에
오직 하느님
오직 나
그밖에 아무도 없게
그리하여 오롯이 만날 수 있게
자선
나로부터
자유
나를 열어
벗에게 가다
벗을 만나다
벗을 만나는 나를 만나다
나를 만나는 벗을 만나다
하느님 품에서 벗과 내가 만나다
벗과 나 사이에
오직 하느님
오직 벗
오직 나
그밖에 아무도 없게
그리하여 오롯이 만날 수 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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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05. 재의 수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5.03.05 04:41
- 재만 남기고
재의 수요일입니다.
재를 머리에 얹으며 우리가 재와 먼지에 불과한 존재이고,
재와 먼지로 돌아가게 될 것을 기억하라고 권고받는 날입니다.
그래서 이따가 재를 얹는 예식을 하며 오늘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대신
‘사람아,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여라.’라고 권고하겠습니다.
그런데 재란 무엇이고 재로 돌아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재란 불에 타고 남은 것이지요.
그러니 이런 권고를 받는 우리는 오늘 자신을 불태우겠다는 마음을 가져야 하는데
자신을 불태운다는 것이 구체적으로는 어떤 의미이겠습니까?
크게 두 가지이겠습니다.
하나는 부정적인 의미이고 다른 하나는 긍정적인 의미이겠습니다.
부정적인 의미를 먼저 보면 욕망을 불태워 재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보통 욕망을 불사른다고 할 때의 뜻과는 다릅니다.
욕망을 불사른다는 것은 욕망을 충족시킨다는 뜻이지만
불태운다는 것은 욕망이 사그라들어 재가 되게 하는 겁니다.
지금의 저는 욕망이 거의 다 타버린 재처럼 사그라들었지만
젊을 때는 끓는 피와 같았기에 어떻게든 사그라들게 해야 했는데
제일 좋은 방법이 무덤에 가는 것과 양로원에 가는 것이었습니다.
술 한 병 사 들고 묘지에 가 아무 무덤이나 돌아가신 분께 한잔 올린 다음
그 무덤을 베고 무덤의 그분과 함께 한잔하면 욕망이 사위어지고
양로원에 가 어르신들과 어울리다 보면 욕망이 정화되거나 순화되었습니다.
그러나 욕망이 이미 사그라든 지금은 진정한 사랑을 불태워야 할 때입니다.
욕망이 사그라들며 사랑도 같이 사그라들게 해서는 안 되고
앞에서 봤듯이 지금이 오히려 욕망이 정화되어 참사랑을 할 때란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육신만 화장하지 않고 저의 사랑도 영혼도 화장하고 싶습니다.
남은 생애 제게 있는 사랑을 내 몸뚱이를 위해 아껴두거나 남겨두지 않고
아낌없이 남김없이 다 주고 재만 남기고 떠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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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05. 재의 수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우리의 화와 슬픔을 존중합시다!
하느님의 숨
2025.03.04. 17:20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 2025년 3월 4일 화요일 (호명환 번역) 열 번째 주간: 존재들의 눈물
우리는 변화를 위해 노력할 때 슬픔을 느낍니다.
리처드 신부는 우리에게 궁극적인 치유를 가져다주는 화와 슬픔 사이의 본질적인 연관성에 대해 성찰합니다:
영적 지도는 물론이고 상담과 피정을 위해 일하면서 한 생애를 보낸 후 저는 분노가 대부분 무엇보다 먼저 깊은 슬픔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몇 년 전 제가 뉴 멕시코의 고스트 랜치(Ghost Ranch)라는 곳에서 남성 입문 의식을 지도할 때 이에 대해 언급하자 거기에 참석한 남성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얼굴이 창백해지기까지 하였습니다. 우리 인생은 우리 모두를 실망시키기도 하고 우리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는데, - 어린이들이 그러하듯 - 사람들, 특히 남성들 대부분은 화와 분노로 이런 실망과 상처에 대응하는 것 외에 어떤 다른 방식으로 대처해야 할지를 모릅니다. 이는 방어적이고 반동적이며 전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자세이기에, 종종 이런 자세는 아무런 성과를 내지 못할 뿐 아니라 오히려 비통함과 보복의 악순환만을 만들어냅니다.
여러 세대를 거치면서 히브리 예언자들은 슬픔과 화 사이의 심오한 연관성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들로 하여금 진리를 말하는 이들로 만들어 준 동기입니다. 그들은 처음에 불의와 억압, 그리고 잔혹한 전쟁에 대해 화를 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여기서 분노를 일으킨다는 것은 마땅한 일이었고, 심지어 덕으로까지 여겨졌는데, 특히 그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변화를 추구하도록 동기를 부여할 때 더욱 그랬습니다. 그러나 오로지 해지기 전까지만 분노하라고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에페 4,26). 만일 너무 오랫동안 분노와 노여움을 품고 있게 되면 우리는 별 생각 없이 전혀 새로운 곳에 그 상처를 전해 주면서 그것을 옳다고까지 여기게 되는데, 이때 우리는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우리 자신의 영혼에 상처를 주게 됩니다.
오티스 모스 3세 목사(Rev. Dr. Otis Moss III)는 예언자들의 슬픔이 어떻게 해서 그들로 하여금 정의를 추구하도록 힘을 실어 주는지에 대해 이야기해 줍니다:
우리는 우리 세상을 보면서 예언자들이 했던 것처럼 슬퍼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심지어 이 세상의 가장 어두운 모습을 보면서 히브리 성경의 예언자들이 지녔던 영과 에너지를 견지한 채 슬퍼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이 옛 스승들은 세상이 균형을 잃었고 이를 바로잡기 위해 우리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경고하듯 선포하였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그들과 함께 슬퍼하고 그들과 더불어 울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냉소주의와 증오, 그리고 폭력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변화를 위해 노력할 때 슬픔을 느낍니다.... 여기서 도전이 되는 것은 우리가 분노를 정당화할 때마저도 모욕을 모욕으로 갚고 악의를 악의로 갚는 것이 모든 사람에게 상황을 더 악화시킨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틴 루터 킹 박사의 이야기를 기억해야 합니다: "어둠은 어둠을 몰아낼 수 없습니다; 오직 빛만이 그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언자들처럼 슬퍼할 때 우리는 소소한 것이든 파괴적인 것이든 상처나 화를 불러온 사람들의 영혼에 해를 가한 더 거대한 힘을 바라봄으로써 우리 자신과 세상을 치유하게 됩니다. [1]
리처드 로어는 예수님을 예언자적 눈물의 모델로 여깁니다:
이렇게 해서 모든 존재는 눈물을 지니고 있고, 존재들 대부분이 눈물을 흘릴 자격이 있다는 깨달음에 이르게 되는데, 이것 역시 우리 자신으로부터의 해방과 우리의 환상으로부터의 구원의 한 형태가 되는 것입니다. 예언자들은 화가 무엇보다 먼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내면에 너무 깊이 들어 있어 찾아내기 어려운 슬픔의 표현으로 인지되어야 하고 받아들여져야 하며 - 심지어는 사랑받기까지 해야 한다는 사실 - 을 알았고 또 그렇게 가르쳤습니다. 우리를 깨달음으로 이끌어 주시는 예수님마저도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며 우셨고(루카 19,41), 당신 친구 라자로의 죽음 앞에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요한 11,35). 그분은 게세마니 동산에서 마지막으로 크나큰 "슬픔과... 고뇌"를 겪으실 때(마태 26,37), 그분에게서 땀이 핏방울처럼 되어 땅에 떨어졌습니다(루카 22,44).
우리 공동체 이야기
저는 제 에고의 분노로 가득 찰 때 제 내면에서 울 수 있는 공간을 찾습니다. 눈물이 나오게 되면 그 눈물이 저로 하여금 화와 노여움, 그리고 두려움을 거쳐 해방에 이르게 해 줍니다. 그런 다음 모든 것을 내려놓는 단계에 이르게 됩니다. 우리에게 마음으로부터 말하고 배울 공동체의 공간을 마련해 주신 데 대해 감사드립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Claire H.
[1] Otis Moss III, Dancing in the Darkness: Spiritual Lessons for Thriving in Turbulent Times (Simon and Schuster, 2023), 74, 76.
Adapted from Richard Rohr, The Tears of Things: Prophetic Wisdom for an Age of Outrage (Convergent, 2025), 4–5.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Noé Barnett, Untitled (detail), 2024, oil paint, Albuquerque. Click here to enlarge image. 노에 바넷(Noe Barnett)이 그린 위 그림의 이미지가 리처드 로어의 책 존재들의 눈물에 영감을 주었습니다. 특별히 엄청나게 다정다감하고 엄청난 배려심으로 눈물 한 방울을 붙들고 있는 저 손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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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영성 묵상글
참된 사랑은 '나'로 '남'을 보충해 주고 채워 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숨
2025.03.05. 05:59
2025년 3월 5일 수요일 - 재의 수요일
재의 수요일에 우리는 이마에 재를 바릅니다.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사제가 우리의 이마에 재를 발라 줍니다. 그리고 사제 본인에게도 다른 사람이 재를 발라 줍니다. 말하자면 이 재는 본인이 직접 바르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이 '나'에게 발라 주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 재는 [화장]과는 정 반대의 의미를 지닙니다. 화장은 '내' 얼굴에 뭔가를 덧붙여 '나'를 위장(?)하는 것이라면 이 재는 불에 완전히 타고 남은 거짓 없는 '나'의 본 모습을 드러내 주는 역할을 합니다.
오늘 재의 수요일에 우리 이마에 발린 재는 우리가 일부러 거울을 보지 않는 한 나에게 발린 재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를 우리는 알 수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이마에 발린 재만을 볼 수 있을 뿐입니다.
이 재는 우리의 본 모습, 즉 불에 완전히 타고 남은 가장되지 않은 우리의 본 모습을 보여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남'의 이마에 발린 재를 보면서 가장되지 않고 온전히 순수해진 우리 본래의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그게 또 '나'의 본래의 모습인 것이고요.... 가장되지 않은 우리의 본래 모습!!
장영희의 [나와 남]이라는 글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아주 옛날,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을 빚으면서, 각자의 목에 두 개의 보따리를 매달아 놓았다고 한다. 보따리 하나는 다른 사람의 결점으로 가득 채워 앞쪽에, 또 다른 보따리는 자신들의 결점으로 가득 채워 등 뒤에 달아 놓았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앞에 매달린 다른 사람의 결점들은 잘도 보고 시시콜콜 이리 뒤지고 저리 꼬투리 잡지만, 뒤에 매달린 보따리 속의 자기 결점은 전혀 볼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따지고 보면 우리 평판 좋고 훌륭한 사람일지라도 마음만 먹으면 비난거리는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다. 인간 성향이라는 게 모두 양면적이라서 마음먹기에 따라 얼마든지 서로 상반되는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아주 겸손하고 나서기 꺼려하는 사람은 카리스카가 부족하고 자신감이 없다고 비난하고, 반대로 박력 있고 당당한 사람은 겸손하지 못하고 되바라졌다고 욕한다. 그런가 하면 쾌활하고 잘 웃으면 사람이 가볍고 진중하지 못하다고 욕하고, 잘 웃지 않고 진중하며 괜히 무게 잡는다고 욕한다. 상냥하고 사근사근하면 내숭 떨고 여우 같다고 욕하고 상냥하지 못하면 뻣뻣하다고 욕한다. 너그럽고 많이 베푸는 사람에겐 잘난 척하고 우월감을 갖고 있다고 비난하고 잘 베풀지 않는 사람은 또 구두쇠이고 편협하다고 욕한다.
처음으로 영문학 과목을 듣는 1학년 학생들에게 문학 작품 분석법을 가르칠 때 나는 '역할 바꾸기'를 역설한다. 이번 학기 영문학 개론 시간에는 학생들에게 윌리엄 포크너의 [에밀리에게 장미를]이라는 각품을 읽혔다. 남부 귀족 가문의 마지막 혈통인 에밀리 그리어슨은 빠르게 변화는 현대의 도시 속에서 완전히 고립된 삶을 산다. 그러다가 북부에서 온 십장 호머 배론이라는 남자와 사랑에 빠지고, 떠나려는 그를 붙잡기 위해 그에게 극약을 먹인다는, 아주 기괴한 이야기이다.
작품 분석을 하면서 에밀리의 성격을 이야기하라고 하면 학생들은 보통, "그 여자는 제정신이 아니에요.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그런 행동을 할 수 없지요."라고 한다. 그렇게 말하면 토론이고 분석이고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어떤 작품에서 작중 인물이 그저 '남'이고, 그의 행위는 괴팍스러운 성향을 가진 '남'의 일이라고 단정해 버리면, '나'와 '남' 사이에 공존하는 인간의 보편적 성향을 공부하는 문학은 애당초 의미를 잃는다. 학생들 말마따나 에밀리의 경우는 단지 하나의 정신병 사례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럴 때, '역할 바꾸기'를 통해 스스로 에밀리가 되어 보라고 하면, 학생들의 관점은 달라진다. "에밀리도 가문의 전통을 지키는 귀족이기 이전에, 사랑하고 싶고 사랑받고 싶은 하나의 인간이지요."라든가 "에밀리의 고립된 삶은 지독한 자기와의 투쟁이었고, 그래서 코크너가 장미를 바치는 거지요."라는 등.... 에밀리의 입장을 변호하면서 꽤 그럴듯하게 비평적 접근을 한다...."
오늘 재의 수요일에 우리는 '남'의 이마에 발린 재를 보며 '내' 이마에 발린 재를 볼 필요가 있습니다. 긍정적인 것이든 부정적인 것이든.... 그 재가 말끔하지 못한 우리의 모습을 보이든, 우리 본래의 순수한 모습을 보이든, 어쨌든 그 재는 '나'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남에게 보이려고"와 "숨겨 두어라"라는 말씀을 여러 번 반복해서 언급하십니다. 오늘 사순시기를 시작하는 재의 수요일에 이 말씀들을 다시, 또 다시 반복해서 우리 자신을 위해 읽어 보면 좋겠습니다.
제가 그렇다고 해서 "좋은 게 좋은 거고.... 나도 그렇고 너도 그러니 그냥 나둬!"라고 말씀드리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의 부족함은 사랑을 위한 재료라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쉽지 않지요?!
사랑은 '나'를 위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사랑은 '나'로 '남'을 보충해 주고 채워 주는 것입니다. 어제 언급해 드렸듯이 '남'을 보충해 주고 채워주는 사랑에는 그 자체로 보상이나 대가가 주어져 있습니다!
'남'에서 점 하나를 빼면 '님'이 되고, 남에서 받침 하나를 빼게 되면 '나'가 되지 않습니까?!
그러니 '나'와 '남'은 별반 다르지 않은 [우리]요 [나]인 것입니다.
이 사순시기에 우리는 참된 [나]와 [우리]를 찾아가는 작업을 해 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 나머지는 책임자이신 하느님께서 알아서 처리해 주실 것이니, 조바심이나 걱정과 근심을 내려놓고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이 사순시기를 지내면 좋겠습니다.
적어도 우리가 지금까지 "'내'가 해야 해!~" 하며 살아왔다면, 잠깐은 숨돌릴 시간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이게 바로 회개요 전환입니다. 그래서 사순시기를 암울한 때가 아니라 밝은 은혜의 때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이번 사순 시기는 더 밝고 더 희망 찬 시기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일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영어의 lent는 "봄"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러니 모든 것이 생명을 움트는 때, 희망이 시작되는 때가 바로 사순시기인 것이지요!~
Happy Lenten Season! 여러분 모두 밝고 복된 사순시기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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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05. 재의 수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25.03.05 06:17
전쟁은 수천 년 전부터 끊임없이 계속됐고, 지금도 지구상에서는 여기저기서 전쟁이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그 전쟁의 원인에는 사람의 탐욕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탐욕이 커지고 커져서 전쟁을 일으켰던 것입니다. 이런 가운데에서도 우리가 편안한 삶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사랑’ 때문입니다. 탐욕에 당당히 맞서 희생하는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평안(평화)을 누립니다.
국가 간의 문제에서만 이 원칙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각자의 삶 안에서도 탐욕이 점점 커지면서 크고 작은 다툼이 계속됩니다. 이 다툼에서 이겨야 나의 욕심을 채우면서 평화를 얻겠다고 생각하지만, 사랑이 없다면 어떤 다툼도 끝낼 수가 없습니다.
누구는 세상을 움직이는 것이 ‘돈’이라 하지만, 결국 ‘사랑’입니다. 사랑으로 전쟁을 멈추고 진정한 평화를 누릴 수 있게 됩니다. 사랑이 있을 때, 우리가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은혜이며 감사할 일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그토록 사랑만을 강조하셨던 이유를 묵상하게 됩니다. 진정한 평화를 위해, 세상의 탐욕 속에서 멈추지 않는 전쟁을 당장 멈출 수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재의 수요일인 오늘입니다. 참회의 상징인 재를 축복해서 신자들의 머리에 얹는 예식을 하면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깊이 묵상하는 사순시기를 시작합니다. 사순시기를 시작인 재의 수요일 복음에서는 자선과 기도와 참회에 대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당연히 해야 할 자선과 기도와 참회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가장 중요한 한 가지가 빠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즉, 사랑입니다. 사람들은 남에게 보이려고, 또 칭찬받으려는 마음을 갖고 이 중요한 덕목을 실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이려는 자선, 기도, 참회이기에 사람들이 이 모습을 보고서 “열심히 산다.”라고 칭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 안에 사랑이 없기에 하느님에게서 그 어떤 상도 받지 못한다는 것이지요.
머리에 재를 얹으면서 창세기의 말씀인 ‘사람아,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여라.’(창세 3,19 참조)라는 말씀을 묵상하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흙으로 사람을 만드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어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즉, 인간의 생명은 오로지 하느님께 달렸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를 지향하면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과 연결된 우리는 하느님 나라를 지향하면서 하느님 뜻인 사랑에 맞게 살아야 합니다. 사람들에게 잘 보이는 삶이 아닌, 하느님께 잘 보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랑에 집중하는 은총의 사순시기가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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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용기를 내면 잠시 길을 잃는다. 용기를 내지 않으면 자기 자신을 잃는다(쇠렌 키르케고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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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05. 재의 수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사순시기가 시작되는 오늘 <제1독서>에서는 ‘회개’를 <제2독서>에서는 ‘화해’를, <복음>에서는 ‘의로움’에 대한 말씀을 들려줍니다.
<제1독서>에서 예언자 요엘은 ‘옷이 아니라 마음을 찢고, 단식하고, 울면서, 마음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께로 돌아오너라.”(요엘 2,13)라고 말하며,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과 화해하고 은혜로운 구원의 날을 맞이하라.’고 말하며,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위선자들처럼 자신의 의로움을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자선과 기도와 단식하지 말고, 숨어계신 하느님의 의로움으로 돌아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회개’는 몸과 옷을 찢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찢는 뉘우침이며, 자신을 드러내는 의로움이 아니라 하느님에게로 ‘돌아옴’ 입니다.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회칙 <신앙의 빛>에서, ‘회개’를 “주님을 향해 거듭 되돌아가는”(13항) 것으로, “하느님의 자비로운 사랑에 우리 자신을 맡기며 ~하느님의 부르심에 따라 거듭해서 기꺼이 변모되려”(13항)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두 가지 사실을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회개’가 첫째는 ‘지속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며, 둘째는 ‘새로운 부르심에 대한 응답’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결국, ‘지속적인 회개’는 부르심에 대한 끊임없는 응답으로 지속됩니다. 이를 수도승들은 ‘제2서원’으로 삼아 살아갑니다.
이처럼, ‘회개’는 ‘뉘우침’이라는 내적현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돌아옴’이라는 외적 실행을 요청합니다. 곧 마음만 찢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로 돌아오는 행동의 요청이요, ‘새로운 부르심’에 대한 삶을 불러옵니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마태 6,1)
이는 의로움의 본질이 하느님 앞에 놓인 처지, 곧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임을 말해줍니다. 그러기에 하느님께서는 사람들 앞에 드러난 행동이나 결과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마음 속’ 생각을 보십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의로운 생활의 중심은 ‘자선’과 ‘기도’와 ‘단식’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의로움을 사람들에게 드러내고, 인정받고 칭찬받고 보상 받고자 했습니다. 혹 우리도 그러고 있지는 않는지 보아야 할 일입니다.
혹 우리도 기도나 봉사나 사랑을 통해서도 그럴 수 있습니다. 만약 그것이 나의 경건함을 사람들에게 드러내기 위한 것이라면, 말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하느님께 헌신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자신을 사람들에게 드러내고 있다면 말입니다. 진정, 우리는 겉모양이 그리스도인인 것이 아니라, 뼈 속에서부터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그러니 늘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마태 6,6)의 현전을 마주하고 있어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마태 6,6)이시기 때문입니다.
사실, 저희는 어둠이 아니지만 어둠과 놀면 어둠이 되고 말 것입니다. 또한 저희는 빛이 아니지만 빛 앞에 머무르면 빛의 옷을 입게 될 것입니다. 저희는 천사는 아니지만 하느님 앞에서 노래하고 하느님을 섬긴다면 천사가 와 같이 될 수 있고, 마귀는 아니지만 마귀의 영을 따라 산다면 마귀 같은 사람이 되고 말 것입니다.
하오니, 주님! 하지도 않은 선을 행한 것처럼 과시하지도,
저지른 악을 가리고 숨기며 거짓으로 치장하지도 말게 하소서!
마음의 단식으로 당신을 섬기고, 기도로 마음이 순결하게 하소서!
늘 빛이신 당신 앞에 머무르고, 당신의 영으로 차오르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마태 6,1)
주님!
선을 과시하지 않고, 악을 거짓으로 치장하지 않게 하소서!
사람들 앞에서 의로움을 내세우지 않고,
숨어 계신 당신 앞에 다소곳이 머무르게 하소서.
마음의 단식으로 제 마음이 씻기어 지고
기도로 마음이 순결하게 하소서.
일상의 모든 삶이 당신의 영으로 벅차오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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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05. 재의 수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잇몸 치료를 받았습니다. 작년 2월부터 했으니 1년이 되었습니다. 치료받으면서 늘 감사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마취’입니다. 만약에 마취가 없었다면 잇몸 치료 과정이 엄청난 ‘고통’의 시간이었을 겁니다. 저는 마취의 도움을 몇 번 받았습니다. 2012년 다리에 골절이 있었을 때도 척추 마취를 받고 수술받았습니다. 의학 분야에서 마취가 있을 때와 마취를 할 수 없을 때는 인류의 삶의 질에 엄청난 차이가 있었습니다. 마취의 고마움을 생각하며 예전에 읽었던 책이 떠오릅니다. 인류의 건강과 생명에 도움을 준 10가지 발명품입니다. 여러분도 ‘아!’ 하면서 수긍할 것입니다. 의학과 과학 기술의 발전으로 현대인들은 많은 혜택을 받고 있습니다. 삶의 질이 높아졌고, 수명도 늘었습니다.
‘마취제 (Anesthesia)’가 있습니다. 19세기 중반 에테르와 클로로포름 등의 마취제가 도입되면서 외과 수술이 혁신적으로 발전했습니다. 이는 극심한 통증을 동반하던 수술을 안전하고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항생제 (Antibiotics)’가 있습니다. 1928년 알렉산더 플레밍이 페니실린을 발견하면서 감염성 질환 치료의 혁명을 가져왔습니다. 이후 다양한 항생제가 개발되면서 세균 감염으로 인한 사망률이 크게 줄었습니다. ‘백신 (Vaccines)’이 있습니다. 천연두, 홍역, 소아마비 등 치명적인 질병을 예방하는 백신의 개발은 인류의 건강을 지키는 데 필수적이었습니다. 에드워드 제너의 천연두 백신(1796년)이 그 시작이었고, 이후 다양한 백신이 개발되었습니다. 지난번 코로나 팬데믹도 백신이 개발되면서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X선 (X-ray)’이 있습니다. 1895년 빌헬름 뢴트겐이 X선을 발견하면서 내부 장기를 비침습적으로 볼 수 있는 혁신적인 기술이 생겼습니다. 이는 질병 진단과 치료에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인슐린 (Insulin)’이 있습니다. 1921년 프레더릭 밴팅과 찰스 베스트가 인슐린을 발견하면서 당뇨병 환자들이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치약과 칫솔 (Toothpaste & Toothbrush)’이 있습니다. 구강 위생은 건강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특히 19세기 이후 치약과 칫솔이 대중화되면서 충치와 잇몸병 예방에 이바지했습니다. ‘페니실린 외 기타 항균 소독제 (Antiseptics & Disinfectants)’가 있습니다. 조지프 리스터가 1860년대에 소독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외과 수술에서 감염률이 급격히 감소했습니다. 이는 병원 위생과 수술 성공률을 크게 향상했습니다. ‘심장 박동기(Pacemaker)’가 있습니다. 1950년대에 개발된 심장 박동기는 부정맥 환자들의 생명을 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심장이 정상적으로 박동하도록 전기 신호를 보내는 기기입니다. ‘MRI (Magnetic Resonance Imaging, 자기공명영상)’가 있습니다. 1970년대에 개발된 MRI는 인체 내부를 정밀하게 스캔할 수 있는 기술로, 뇌졸중, 암, 신경계 질환 등의 진단과 치료에 필수적인 도구가 되었습니다. ‘정수기 및 상하수도 시스템 (Water Purification & Sanitation Systems)’이 있습니다. 깨끗한 물의 공급은 건강 유지에 필수적입니다. 정수기, 하수 처리 시스템, 염소 소독 기술 등의 발전으로 수인성 질병(콜레라, 장티푸스 등)의 발생이 크게 줄었습니다.
신앙생활에 도움을 주고, 위로를 주는 것들을 생각해 봅니다. 성사가 있습니다. 그중에서 성체성사는 신앙생활의 정점입니다. 그 밖에도 묵주, 십자가, 성경, 성가, 성수, 성모상, 초, 성지순례, 구유와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우리의 신앙을 풍요롭게 합니다. 오늘은 재의 수요일입니다. 오늘부터 교회는 ‘사순시기’를 시작합니다. 사순시기는 신앙인이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고, 하느님께 돌아가는 회개의 시간입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느끼는 은혜의 시간입니다. 교회는 사순시기를 지내면서 4가지를 실천할 것을 권고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희생입니다. 희생의 방식은 다양할 것입니다. 하고 싶은 것을 참는 것도 희생입니다. 먼저 손을 내미는 것도 희생입니다. 양보하는 것도 희생입니다. 신앙은 희생이라는 밭에서 피는 꽃입니다. 둘째는 기도입니다. 교회는 ‘십자가의 길’을 할 것을 권고합니다. 본당에서도 사순시기 금요일에는 십자가의 길을 함께 하고 있습니다. 본당에서 마련한 사순 특강에 참여하는 것도 기도입니다. 셋째는 단식입니다. 단식하는 의미는 몸과 마음을 하느님께로 향하기 위해서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하기보다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는 것입니다. 단식을 통해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신 주님의 수난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넷째는 자선입니다. 본당에서는 사순 저금통을 나누어 주기도 합니다. 선을 베풀면 좋은 일이 생긴다고 하였습니다.
2025년 사순시기를 시작하면서 나의 허물과 잘못을 정화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희생, 기도, 단식, 자선을 통해서 주님의 수난에 함께 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절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권고하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여러분에게 빕니다. 하느님과 화해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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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05. 재의 수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은 재의 수요일입니다. 사순시기를 시작하는 날이지요. 우리가 모두 알고 있는 것처럼 사순시기는 주님의 수난에 동참하는 시기입니다. 주님의 수난에 참여하고 그분과 함께 고난의 길을 걸으며 부활의 의미를 다시 한번 확인하는 시기인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이마 위에 재를 얹습니다. 재를 얹는 예식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 의미로 다가옵니다. 그중 하나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재를 얹는 예식은 우리에게 늘 하늘나라로 돌아가리라는 것을 기억하라고 말합니다.
숨 쉬고 웃으며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살고 있는 우리들이지만 언젠가는 하늘나라로 돌아갈 것입니다. 그때는 세상에서 얻었던 어떤 것도 가져갈 수 없으며 동시에 누구도 나를 도와줄 수 없습니다.
세상에서 얻은 보이는 것도, 보이지 않는 것도 가져갈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재의 예식을 통해 기억해야 합니다.
그럼 우리는 무엇을 가져갈 수 있을까요? 우리가 가져갈 수 있는 것은 이곳에서의 삶 안에서 하나하나 미리 쌓아 놓은 보화만 가져갈 수 있습니다. 즉 살아생전에 쌓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곳에서의 삶이 끝나면 우리는 더 이상 아무것도 쌓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하루는 참으로 중요합니다. 참으로 소중합니다.
재의 수요일입니다.
우리는 언젠가 하늘로 돌아갈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허락하신 오늘을 기쁘게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수난에 동참하는 하루를 지내며 우리의 작은 나눔과 선행으로 하늘에 보화를 쌓는 하루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스트레스에도 종류가 있다?
어떤 글을 보았는데 스트레스에도 두 가지가 있다 합니다.
1. 유스트레스
즐겁고 좋은 일이지만 처음 접하는 일이어서 어찌할 바 모를 때
2. 디스트레스
감당하기 어렵거나 불행한 일을 겪었을 때
유스트레스는 긍정적이고 합리적인 스트레스지만 디스트레스는 우리를 불안감에 빠뜨리고 심한 경우 신체 질환까지 불러올 수 있다 합니다.
디스트레스 극복을 위한 정신과 의사의 조언은
-현실적 목표 설정하기
-부정적 사고가 들 때 이를 기록하여 긍정적 사고로 전환하는 연습하기
-신뢰가 있는 지인들의 지지를 구하기
-내가 한 작은 성공을 스스로 축하하기
스트레스가 없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를 어떻게 대처하는지에 따라 결과는 크게 달라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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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05. 재의 수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사순절동안 해야 할 일
“회개, 화해, 재계”
“하느님,
자비하시니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애련함이 크시오니 내 죄를 없이하소서.”(시편51,3)
오늘 재의 수요일부터 은혜로운 사순시기가 시작됩니다. 삶을 재정비하여 심신을 새롭게 하는 특별한 영적수행의 시기가 참 고맙습니다. 베네딕도 성인의 사순절에 대한 관심도 각별하여 당신의 수도승들에게 다음과 같은 충고를 줍니다.
“사순절 동안에 모든 이들은 자신의 생활을 온전히 순결하게 보존하며, 다른 때에 소홀히 한 것을 이 거룩한 시기에 씻어내기를 권하는 바이다. 이것은, 우리가 모든 악습들을 멀리하고, 눈물과 함께 바치는 기도와, 독서와, 마음으로부터 우러나는 통회와 절제에 힘쓸 때, 합당하게 이뤄지는 것이다...
그리하여 각자는 성령의 기쁨을 가지고 자기에게 정해진 분량 이상의 어떤 것을 하느님께 자발적으로 바칠 것이다. 즉, 자기 육체에 음식과 음료와 잠과 말과 농담을 줄이고 영적 갈망의 기쁨으로 거룩한 부활 축일을 기다릴 것이다.”
절대로 우울하고 어둔 분위기에서 사순절을 지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성령의 기쁨으로 수행생활에 힘쓰고, 영적갈망의 기쁨으로 거룩한 부활 축일을 기다리며 사순절을 보내라는 것입니다. 규칙서에 ‘기쁨(gaudio;joy)’이란 말마디도 오직 “사순절을 지킴에 대하여”라는 제49장에서 단 2회 나옴이 주목됩니다.
어제 참 기쁘게도 1989년 1월27일 부제품을 받고 이어 2월8일, 그러니까 36년전 재의 수요일에 최초로 한 강론을 찾아 냈습니다. 1989년 다해 재의 수요일은 오늘 3월5일보다 거의 한달 앞섬이 참 신기했습니다. 반가운 마음에 강론중 서두 부분을, 그리고 끝에서는 마지막 부분을 인용합니다.
“어느 수도승이 평생동안 하느님을 찾았지만, 마지막 숨을 거둘 때에야 비로소 그는 줄곧 하느님이 그를 찾고 있었음을 깨달았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흔히 수도승을 일컬어 ‘하느님을 찾는 사람’이라 하는데 ‘사람을 찾는 하느님’을 잊을 때 위 수도승처럼 죽을 때까지 하느님을 찾다가 인생 마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성서의 하느님은 철저히 사람을 찾아 나서시는, 돌아오라 목메어 부르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여기까지 첫부분입니다. 사순절 우리가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이 드러납니다.
첫째, “회개하라!”입니다.
요엘 예언자의 외침이 참 간절하여 우리의 심금을 울립니다. “주님의 말씀이다. 이제라도, 너희는 단식하고 울고 슬퍼하면서, 마음을 다하여 나에게 돌아오너라. 옷이 아니라 마음을 찢어라, 주 너희 하느님에게 돌아오너라. 그는 너그럽고 자비로운 이, 분노에 더디고 자애가 큰 이, 재앙을 내리다가도 후회하는 이다. 너희는 시온에서 뿔 나팔을 불어, 단식을 선포하고, 거룩한 집회를 소집하여라.”
그대로 사순절을 시작하며 재의 수요일 미사집회에 참석한 우리를 두고 하시는 말씀같습니다. 사순절이야말로 회개의 시기입니다. 아니 그리스도교야 말로 ‘회개의 종교’라해도 무방합니다. 평생 ‘회개의 여정’중에 우리를 찾아오시는 하느님께 돌아가는 회개의 종교입니다. 회개와 함께가는 겸손과 지혜의 삶입니다.
둘째, “화해하라!”입니다.
사도 바오로의 화해하라는 권고가 교회 어른들의 말씀처럼 참 간절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절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권고하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여러분에게 빕니다. 하느님과 화해하십시오...우리는 하느님과 함께 일하는 사람으로서 권고합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헛되이 받는 일이 없게 하십시오.”
하느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은혜로운 때에 내가 너의 말을 듣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와주었다.” 사순절 하루하루 오늘 지금이 바로 하느님과 화해하는 매우 은혜로운 때이자, 바로 구원의 날입니다.
세계적 신화학자 조셉 캠벨의 “죽음을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죽음과 화해하라.”는 말도 생각납니다. 회개와 더불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과 화해할 때 모두와 화해할 수 있는 사랑도 힘도 주어집니다.
셋째, “재계(齋戒)하라!”입니다.
부정한 일을 멀리하고 심신을 깨끗이 하라는 말입니다. 우리의 모든 수행이 여기에 해당되겠지만 교회는 전통적으로 자선과 기도, 단식을 권합니다. 오늘 재의 수요일은 아침 단식이 있고 십자가의 길 기도도 있습니다. 셋 모두가 자발적 사랑과 자유, 비움과 소통의 표현입니다.
인위적 과시나 자기자랑이 없는, 하느님 중심의 모두에게 숨겨진, 오직 하느님만이 아시는 참 아름답고 향기로운 겸손한 재계이자 수행인 자선, 기도, 단식입니다. 자선을 통해 이웃과의 소통과 나눔이요, 기도를 통해 하느님과 소통과 나눔, 그리고 단식을 통해 이기적 나를 비워 나와의 소통이요 나눔입니다. 모두가 회개의 열매이자 화해의 증거입니다.
이런 자발적 사랑과 자유의 자선과 기도와 단식의 봉헌이요 전통적 재계인 이들은 회개와 화해의 진정성을 보장합니다. 주님은 매 수행의 재계마다 못을 박듯이 후렴처럼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아 주실 것이다.”
바로 이런 주님과 내적일치를 이루는 순수하고 한결같은 믿음이 참으로 하느님 중심의 겸손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게 합니다. 이어 36년전 재의 수요일 미사시 첫 강론 마지막 부분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강론후 우리는 머리에 재를 얹으며, “사람아,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여라.”사제의 말씀을 들을 것입니다. 인생무상이 아닌 하느님께 전적으로 의존해 있는 나약한 인간의 실상을 보여줍니다. 이 말씀 안에서 “나에게 돌아오라.”는 주님의 호소를 들어야 합니다.
사순절은 주님께 돌아와 화해하는 시기이자, 부활의 주님을 기다리는 기쁨의 시기입니다. 사순절이 끝나는 부활축일에 우리는 주님을 기쁨으로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회개와 화해, 재계의 삶에 충실하도록 도와 주십니다. 바오로 사도의 다음 말씀을 사순절 동안 내내 마음에 담고 사시기 바랍니다.
“지금이 바로 매우 은혜로운 때이며,
오늘이 바로 구원의 날입니다.”(2코린6,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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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05. 재의 수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그러므로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위선자들이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듯이, 스스로 나팔을 불지 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마태 6,2)
자신의 선행을 떠들어 대다
선행을 자랑하는 말이나 행동은 모두 니팔 소리와 같습니다. 사람들 앞에서는 선행을 하고 아무도 없을 때는 하지 않는 사람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나팔과 같습니다. 자신의 행동으로 자기 자랑을 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누가 청할 때는 선행을 하고 아무도 청하지 않을 때는 하지 않는 사람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런 나쁜 습관은 나팔입니다. 또 자신의 호의에 보답을 할 수 있는 상류층 사람에게 귀한 것을 주는 사람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나 그는 고통에 묶여 있는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이들에게는 아무것도 주지 않습니다. 남이 안 보는 데서 선행을 했더라도 칭찬받을 만한 사람으로 보이려고 (첫째는, 그런 일을 했다는 이유로, 둘째는 몰래 그런 일을 했다는 이유로) 그렇게 했다면, 그것도 나팔입니다. 이런 경우는 몰래 그 일을 한 것 자체가 자신의 자선 행위를 나팔 부는 행동입니다. 자신을 눈에 띄게 하거나 눈에 띄려는 마음으로 하는 모든 행동은 ... 나팔입니다. 실제로 친절을 베풀었다 해도, 친절한 행동은 그 자체가 나팔을 붑니다. 그러므로 숨겨야 할 것은 그런 행동이나 장소보다는 베풀려는 뜻입니 다.
-마태오 복음 미완성 작품-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16
의지를 버려라
모세는 그의 하느님 야훼께 애원했다(탈출 32,11).
버리고. 자유 속으로 곧 하느님의 의지 속으로 가라앉는 것이야말로 신뢰를 얻는 길이다. 그 이유는 선한 창조주야말로 신뢰받을 만한 분이기 때문이다. 피조물에 근본적인 것은 악이 아니라 선이다.
악은 비본질적입니다. 그것은 밖에 서서. 사물을 끌어내어 밖을 향하게 하고, 주의를 딴 데로 돌리고, 다름 · 구별 • 퇴보 혹은 파괴의 냄새를 풍깁니다. 따라서 악은 흠이거나 결점일 뿐입니다.
악은 궁극적인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악한 것이 다른 사람 내지 우주에게는 선할 수도 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악 때문에 손해를 본 사람이 나중에 다른 자리에서는 이익을 얻을 수도 있다." 이와 같이 악은 상대적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악이 절대적인 것이라도 된다는 듯이 생각하여 악이 들러붙게 해서는 안 된다. 선한 대지의 선한 창조주는 순수한 악을 너그러이 보아 주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어떠한 고통도 순수한 고통이 아니며, 어떠한 아픔도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하느님과 자연은 순수한 악이나 아픔이 존재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343)
✝️ 수요일 그리스도인 일치의 날✝️
세계 교회사, 아우구스트 프란츤
제 2부 중세 그리스도교
제 4기 : 1300 ∼ 1500년
서구 통일 붕괴 시대의 교회
제 2절: 콘스탄츠 공의회와 공의회 우위설
전사(前史):
그레고리오 7세는 그의 「교황 훈령」 16조에서 공의회의 권리를 오로지 교황에게 유보하였다. 그래서 제 1차 라테란 공의회가 1123년 갈리스토 2세에 의하여 소집되었고, 이 “공의회”는 보름스 정교조약을 전 교회를 위하여 유효하게 만드는 데 기여하였다. 제2차 라테란 공의회는 인노첸시오 2세가 1139년에 아나룰레투스 이교를 종식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제3차 라테란 공의회는 1179년에 알렉산데르 3세가 소집하였다. 제4차 라태란 공의회는 위대한 인노첸시오 3세가 1215년에 소집하였는데 전 교회의 개혁을 위하여 중요한 의미를 지닌 공의회였다. 다음 공의회는 1245년에 인노첸시오 4세가 리옹에서 개최하였는데, 이 공의회에서 황제 프리드리히 2세를 폐위시켰다. 1274년의 제2차 리옹 공의회에서는 그레고리오 10세의 지도하에 십자군과 그리고 동방교회와의 일치문제가 심의되었다. 동시에 유명한 콘클라베 제도가 공포되었다. 이 제도는 추기경들이 교황의 사망 후 10일 이내에 엄격한 격리(Conclave) 상태에서 후계자의 선거를 위하여 사망 장소에 모여야 하고, 또한 점차 식사량을 줄임으로써 선거를 빨리 끝내도록 재촉되어야 함을 규정하였다. 다음 공의회는 1311년에 프랑스 왕권의 압력하에 비엔에서 개최되었다. 그것은 이미 아비뇽 교황직의 허약성올 지니고 있었다(성전 기사 수도회 소송). 하지만 교황은 여전히 공의회의 거행자였다. 교황이 없는 공의회는 불가능한 것으로 생각되었다.(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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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05. 재의 수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자기다움을 회복하는 정화의 사순 시기 /
박윤식 [big-llight] 2025-03-04 ㅣNo.180496
사순 시기는 재의 수요일부터 성목요일의 주님 만찬 저녁 미사 전까지 사십 일간이다. 주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며 부활을 기다리는 시기다. 하느님 만남을 위한 정화의 기간에, 차분히 우리 부활을 준비하자. 해마다 이즈음이면 나누고 베풀자는 외침을 곧잘 듣는다. 가족과 이웃을 떠올려보자. 그들에게 먼저 베풀지 않으면, 달라는 삶으로 바뀔 수도. 거지는 단순히 얻어먹는 이가 아닌, 무조건 달라는 이다. 그래서 주지 않는다고, 그들은 늘 섭섭하게만 생각한다.
사순절을 시작하는 재의 수요일인 오늘, 기도와 단식과 자선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또 주위의 작은이에게 시선을 두라신다. 배품은 선행으로 하되, 내세우지 않고 숨겨 두는 거란다. 다른 이의 인정을 받기 위한 선행은 인정받는 것으로 끝날 뿐, 더 이상의 열매는 없기에. 하느님께서 보시는 선행이라 다른 이에게서 아무런 갚음도 받지 않기에. 오직 그분께서 우리에게만 꼭 갚아 주신다나. 그러니 가까운 이들께 먼저 베풀자. 오른손 하는 일 왼손마저 모르게. 아무도 안보는 데서 그들 위해 기도하면서. 물질이든 애정이든, 그렇게 주고는 잊어야만 한다.
중국 연나라에 활 잃어버린 이가 있었다나. 그는 활을 찾으려 하지 않았단다. 이유는 연나라 사람이 잃어버린 것을, 연나라 사람이 언젠가 주울 것이기에. 공자께서는 여기에 한마디 더하셨다. “연나라라는 말을 뺐더라면 참 좋았다.” 그러자 노자께서 공자님 말씀에 토를 달았다. “사람이라는 말까지 뺐더라면 더 좋았을 걸.” 이렇게 적선이라면, 돈과 재물로 도와야만 된다고 너무 쉽게 연관 짓기가 십상이다. 늘 만나는 이들과 달리 사랑의 관계를 맺지 못하면, 늘 만나는 주님과도 올바른 관계가 될 수가 없다. 남 돕는다 해서 다 적선이 되는 게 아니리라. 진정한 적선은 남모르게 하는 거다. 오른손도 왼손도 모르게. 그래야만 하늘의 힘이 함께한다.
그렇다. 자선을 베풀 때, 오른손 하는 일을 왼손 모르게 하자. 그렇게 자선은 숨겨 두자. 그러면 숨은 일 보시는 그분께서 보태주실 게다. 이렇게 자선은 남모르게 하는 거란다. 남이 알면 자선이 아닌, 자랑이 될 테니까. 그런데도 자선이란 명분으로 자기를 선전하는 이들이 쾌나 많다. 그래도 안하는 것보다는 좋다나. 그렇지만 숨은 일도 보시는 그분께서는 분명히 아신단다.
사실 배품에서 진정으로 요구되는 것은 돈보다 사랑이다. 물질이 아닌 애정이다. 다정한 말 한마디와 따뜻한 미소가 바로 적선이다. 남 위한 작은 기도가 배품이다. 이렇듯 적선은 나눔이며 진정한 사랑의 실천이다. 갚음을 바라지 않고 베풀면, 늘 하늘의 기운이 따른다. 밝아지는 인생을 체험할 게다. 이는 마음이 우선이기에. 그래서 ‘적선하는 이는 귀신도 어쩌지 못한다.’ 라는 속담도 있다. 악한 기운마저 가까이 못 온다나. 그만큼 하늘의 보호를 받는 것으로 여겼다.
“오늘은 나, 내일은 너!”(Hodie mihi, cras tibi!) 서양인 묘지에 종종 등장하는 비문이다. 언제 다시 하느님 품으로 갈지 모르는 우리다. 오늘 지금은 어제 죽은 이가 가장 살고자 한 바로 그 내일이다. 하루하루가 머무는 지금의 소중함을 되새기자. 하느님은 숨은 일도 보시는 분이시기에. 오늘 우리는 머리에 재를 받으며, “사람아,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다시 돌아갈 것을 생각하여라.” 라는 권고를 듣는다. 은총의 사순시기를 시작하면서, 그분께 자신을 정직하게 보여주는 기회가 되면 참 좋겠다. 그러기에 이 사순은 진실을 추구하는 수행의 때다. 참 그리스도인으로 솔직한 제자의 삶을 추구하며, 말 그대로 자기다움을 회복하려는 정화의 시기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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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05. 재의 수요일. 한창현 모세 신부님.
사순 시기를 시작하는 오늘, 복음은 자선과 기도와 단식을 실천하며 이 시기를 잘 계획하도록 초대합니다.
특히 자선과 기도와 단식, 이 세 가지를 실천하려면 무엇보다도 숨은 일도 보시는 분께서 갚아 주실 것(마태 6,6 참조)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이를 위하여 구체적으로 자선을 베풀 때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고, 기도할 때는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아야 하며, 단식할 때는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어야 합니다.
자신이 자선, 기도, 단식을 하고 있음을 사람들에게 드러내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하느님과 내밀한 인격적 관계를 맺는 데 방해되는 요소들을 피하려는 노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하느님과 맺는 관계에 집중하려는 노력의 다른 표현이기도 합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는 하느님과 맺는 인격적 관계를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인간은 자신의 능력으로 인격적인 하느님의 존재를 깨달을 수 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당신과 친밀해지도록 당신 자신을 인간에게 계시하시고, 그 계시를 신앙 안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은총을 주시고자 하셨다”(35항).
이 같은 교회의 가르침 안에서 사순 시기에 우리는, 숨은 일도 보시는 아버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총을 믿고 하느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도록 애쓰는 신앙의 여정을 걸어야 합니다.
이 과정이 너무 어렵게 느껴진다면, 예수님께서 자주 산 위에 혼자 올라가셨던 것을 떠올려 보면 좋겠습니다.
하느님과 함께 머무는 시간은 그 자체로 그분과 인격적 관계를 맺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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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2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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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05. 재의 수요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올바른 자선, 기도 그리고 단식의 방법을
말씀하십니다.
그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지 말고
숨기라고 말씀하십니다.
자선, 기도, 단식에 대한 사람들의 칭찬은
그것을 계속 이어갈 수 있는 힘을 주기도 합니다.
칭찬이 아니더라도
사람들에게 내가 무엇 무엇을 한다고 말하고 나서는
사람들의 시선이 의식이 되어
하기 싫고 귀찮은 상황이 왔을 때
한 번이라도 더 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금연이나 금주 같은 것은
오히려 시작하면서 사람들에게 알리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물론 사람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부분이 있지만
그것으로 놓치게 되는 부분도 있습니다.
자선, 기도 그리고 단식은
결국 하느님께 향하는 방법인데
사람들에게 알리면서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다보니
결국 하느님의 시선은 놓치게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느님과의 관계도 놓치게 됩니다.
기도를 하는데 하루 종일 합니다.
남들은 대단하다고 말하지만
정작 본인은 기도 말고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생활이 되지 않습니다.
그가 하지 않는 일은
결국 다른 사람이 떠맡게 됩니다.
단식을 하다보니 점점 살이 빠집니다.
그러다보니 인상이 편안하게 바뀌는 것이 아니라
점점 날카롭게 바뀝니다.
옆에 있는 사람들이
처음에는 단식하는 그를 좋게 보지만
날카롭게 바뀌어가는 그의 인상과 태도를 보면서
무엇을 위한 단식인지 생각하게 됩니다.
자선을 베풀지만
결국 내가 주고 싶은 사람에게만 줍니다.
내 옆에 정작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지만
그를 돕지는 않습니다.
그를 도와주는 것은 사람들에게 드러나지 않으며
그것으로 받을 칭찬도 거의 없기에
하지 않습니다.
본인 스스로도 편안해지지 않는 단식은
결국 자기 학대이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하느님께서 정말 그런 방식을 원하실까 의문이 듭니다.
오히려 본인 스스로
하느님께서는 그것을 원하시는 분이라고
잘못 생각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됩니다.
하느님께 향하려다가
내가 만든 황금송아지에게 향할 수 있습니다.
나는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내가 향하는 그분은
우리 신앙이 말하는 하느님이신지
돌아보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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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05. 재의 수요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마태 6, 18)
기승전결
먼지입니다.
먼지로
돌아가는
우리들
삶입니다.
한낱
먼지일 뿐인
우리는
우리 삶을
보아야 합니다.
사람의
참모습을
만나는
재의 수요일이며
은혜로운 사순의
첫 시작입니다.
사순시기는
사람의 길이
어디에 있는지를
진실한 회개로
사람의 길을
우리에게
가리킵니다.
삶이라
불렀던 것이
더 이상
삶이 아니었음을
절실히
깨닫습니다.
이와 같이
마지막은
먼지로
돌아가는
우리들
삶입니다.
산다는 것은
하느님의
구원을 바라는
간절한 기도이며
간절한
용서입니다.
회개와 용서를
안고 가는
삶입입니다.
먼지를
바라보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우리의 삶이란
하느님께
목마른
먼지의
삶입니다.
먼지에게
하느님의
기적이
하느님의
은총이
일어납니다.
새 생명의
부활이
일어납니다.
예수님께서
알려주십니다.
이 사순시기는
특별히
먼지로 돌아갈
우리가
잃어버린
하느님을
되찾는
은혜로운
때입니다.
죽음이 끝이
아님을
뜨겁게 만나는
은총의 빛이며
새로운 삶의
시작입니다.
죄의 용서를
구하는
간절한 회개가
우리 가운데에서
선포됩니다.
구원을 체험하는
먼지의 뜻깊은
새날 되십시오.
“사람아,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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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05. 재의 수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언젠가 반드시 우리 모두 흙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기원전 5세기경, 남유다는 휘황찬란한 예루살렘 성전도 재건하고, 높고 든든한 성벽도 쌓아 올리며 정치적, 문화적, 종교적 차원에서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고 있었습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그런 것 같습니다. 잘 나갈 때 더 겸손하고, 더 노력해야 하는데, 매사가 안정적이다 보면 즉시 나태해지고 안주하려는 경향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이런 순간에 등장한 예언자가 있었으니 요엘이었습니다.
그는 경신례에도 밝고 언어 구사가 탁월한 문학가였습니다.
그는 옛 예언자들의 가르침을 적극적으로 인용하며 주님의 날에 이루어질 심판과 구원을
힘차게 선포했습니다.
별 탈 없이 잘 지내고 있는데, 요엘 예언자가 불쑥 등장해서 강력한 경고성 메시지를 남발하니, 군중의 반발이 만만치 않았지만, 그는 조금도 흔들림 없이 가야할 길을 걸어가며, 외쳐야 할 말을 가감 없이 외쳤습니다.
예언자로서의 삶은 늘 외롭고 고달프고 황량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에게서 달콤한 하느님 위로의 말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격려나 칭찬, 해방의 기쁜 소식을 기다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그의 입에서 흘러 나온 말은 섬뜩하기 그지 없는 메시지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에 대한 신랄한 고발과 강력한 경고, 공포로 가득한 멸망의 예고였습니다.
그러면서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가슴을 쥐어 뜯으면서 울부짖으라고 외쳤습니다.
“사제들아, 자루옷을 두르고 슬피 울어라. 제단의 봉사자들아, 울부짖어라.
내 하느님의 봉사자들아, 와서 자루옷을 두르고 밤을 새워라.
너희 하느님의 집에 곡식 제물과 제주가 떨어졌다.”(요엘 1,13)
그러나 요엘 예언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계속해서 코너로 몰아넣지만은 않습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진정성있는 회개와 참된 단식을 통해 하느님의 자비가 베풀어질 것임을 선포합니다.
“주님의 말씀이다.
이제라도, 너희는 단식하고 울고 슬퍼하면서, 마음을 다하여 나에게 돌아오너라.
옷이 아니라, 너희 마음을 찢어라.
주 너희 하느님에게 돌아오너라.
그는 너그럽고 자비로운 이, 분노에 더디고 자애가 큰 이, 재앙을 내리다가도 후회하는 이다.”(요엘 2,12-13)
요엘 예언자는 이스라엘에게 닥친 대재앙, 그로 인한 시련의 원인이 바로 자신의 죄와 부족함이라는 것을 인식하라고 가르칩니다.
또한 옷만 찢지 말고 마음을 찢어라고 강조합니다.
형식적이고 외적인 회개가 아니라 진정성 있는 내적 회개를 촉구합니다.
또한 그는 특정한 한 사람이나 한 집단의 회개가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 모두의 범국민적, 범국가적 회개를 요청했습니다.
또 다시 재의 수요일입니다.
재를 머리에 얹으며 생각해보니, 우리 모두는 영원하신 하느님 앞에, 너나 할 것 없이 손톱만한 도토리들입니다.
티격태격, 아옹다옹하면서 ‘내가 더 높네. 내가 더 크네. 내가 더 대단하네.’ 외치지만, 하느님 눈에는 모두가 그놈이 그놈입니다.
결국 우리 모두는 잠시 떠다니다가 하느님 자비의 품을 향해 사라질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
광대무변하시고 영원하신 주님,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무한하신 주님 앞에 우리는, 너무나 작고 미약한 존재라는 진리를 잊지않고 살아간다면, 우리 공동체의 삶이 한결 부드러워질 것입니다.
내가 선배인데, 내가 연장자인데, 내가 원장인데, 내가 회장인데, 하며 어깨에 힘줄 이유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언제나 인간 존재의 영원한 결핍성과 티끌보다 작음을 잊지 않는다면, 서로를 향한 날카로운 시선도 조금은 부드러워 질 것입니다.
결국 우리에게 남는 것은 이웃을 향한 측은지심이요, 진한 동지의식일 것입니다.
재는 무엇을 상징합니까? 타고 남은 것, 아무것도 아닌 것, 무가치한 것, 허무한 것, 보잘것없는 것을 의미합니다.
재를 머리에 얹을 때 우리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외쳐야겠습니다.
“본래 저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습니다.
먼지요, 티끌, 무(無)였습니다.
주님께서는 이토록 보잘것없는 제게 큰 은총을 베푸셔서 생명으로 불러주셨습니다.
오늘 지금 저는 여기 서 있지만, 주님의 흘러넘치는 자비가 아니라면, 단 한 순간도 스스로 설 수 없는 미약한 존재입니다.
과거에도 저는 흙이었지만, 지금도 흙과 다름없는 존재요, 언젠가 반드시 흙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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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05. 재의 수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6,1-6.16-18: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아주실 것이다
오늘은 사순절이 시작되는 재의 수요일이다. 성경에서 40이라는 숫자는 여러 가지 의미를 가리키는 숫자이다. 하느님께서는 노아 홍수 때 40주야 동안 폭우가 내리게 하여 심판하셨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400년을 종살이하였으며, 모세가 십계명을 받기 전에 40 주야를 단식과 기도로 지냈고, 또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를 떠나 가나안에 도착하기까지 40년이나 걸렸다. 예수께서도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 40 주야를 광야에서 기도와 단식으로 준비하신 것을 알 수 있다. 오늘 시작되는 사순절도 오늘부터 시작하여 부활 때까지 주일을 제하고 세어보면 40일이 된다. 교회가 이렇게 사순절을 제정한 의미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사순절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으로 차지하신 영광스러운 부활의 기쁨을 누리고 그분의 영광에 우리도 참여하기 위하여 그분의 수난에 우리가 참여하는 시기다. 그리고 우리의 삶을 하느님께로 돌리는 회개와 보속의 시기이다. 이럼으로써 우리 자신이 진정으로 하느님 아버지께 사랑받는 자녀들이 되어 그 영광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시기이다. 그래서 교회는 오늘 “재의 예절”을 거행한다. 이 재의 의미는 회개와 보속, 죽음과 겸손을 잘 보여준다. 우리가 머리에 재를 받는 것은 우리 죄로 인한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 및 부활에 참여하기 위하여 우리 자신을 돌아보며 보속 하겠다는 약속의 표시이다.
이 재의 예절은 우리가 우리의 죽음을 미리 묵상하게 한다. “사람아,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다시 돌아갈 것을 생각하여라”. 이것은 우리의 현세적인 삶의 종착점인 죽음을 생각하게 함으로써 이기적인 생활과 그럼으로써 하느님을 멀리 떠난 삶에서 회개와 이웃에 대한 사랑의 실천으로 돌아서게 하는 데 있다. 죽음의 의미를 아는 사람은 어떤 사람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그리고 어떻게 죽음을 맞을 것인가를 알며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게 될 것이다. 이 재는 한 줌의 흙이다. 우리가 죽어 땅에 묻히면 한 줌의 흙이 된다. 그 자리에는 아무런 형체도, 권세도 명예도 볼 수 없다. 이러한 의미를 가진 재를 교만과 명예의 자리인 머리에 얹음으로써 인생무상과 자신의 나약함을 깨닫고 겸손하라고, 자신의 본 모습을 찾으라고 하는 것이다. 겸손하지 못하면 회개와 보속의 실천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남에게 보이기 위한 선을 행하지 말라고 경고하시면서 자선과 기도, 단식에 관한 세 가지 본보기를 알려주신다. 자신의 덕을 내보임으로써 사람들의 칭찬을 얻으려 하지도 말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 넘치게 기도하면서 자기의 신심을 자랑하지도 말라고 하신다. “스스로 나팔을 불지 마라”(2절). 내가 하는 일을 떠벌이지 말라는 뜻이다. 인간의 찬사를 얻으려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은 신앙의 자세가 아니기 때문이다. 친절한 행동은 자체가 나팔이다. 숨겨야 할 것은 그런 행동이나 장소보다도 베풀려는 뜻이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3절). 이 말씀 역시 사람들 눈에 띄지 않도록 하라는 말씀인데, 할 수 있으면 우리가 선을 베풀 때, 베푸는 손조차도 그 사실을 모르게 하라는 말씀이다. 이 말씀은 오른손은 의인과 의로운 행위를 뜻하고 왼손은 죄인과 죄가 되는 행동을 의미한다. 어떤 일이 주님의 가르침에 따라 이루어지려면, 의인인 오른손은 왼손이 하는 일을 몰라야 한다. 우리가 충실하고 신심 깊게 행하기 위해서는 죄인들 앞에서 자랑하지 말아야 한다.
“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6절). 우리의 기도는 인간에게 하는 것이 아니다. 기도는 어디에나 계시며 우리가 말하기도 전에 들으시고 마음의 비밀을 이미 알고 계시는 하느님께 기도하는 것이다. 그분께 기도하면 우리는 큰 상을 받을 것이다.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주실 것이다”(6절). 사람들에게서 상을 받으려 하는 자들은 하느님으로부터 또 다른 상을 받을 수는 없다. “너희는 단식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침통한 표정을 짓지 마라”(16절). 교회도 또한 이 시기에 극기와 절제를 통하여 이웃에게 선을 베풀어 그리스도를 닮고, 어느 때보다 기도를 많이 하여 은총을 받고자 마음을 모으는 때이며, 예수님의 부활 영광을 우리도 누리기 위해 속죄하도록 초대하고 있다. 이 사순시기를 통하여 우리가 더 하느님의 자녀로서 부활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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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05. 재의 수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육체를 태우면, 심장은 사랑을 위해 뛰기 시작한다
오늘은 재의 수요일입니다.
오늘 복음은 자선과 단식과 기도에 대한 필요성을 말씀하십니다.
이는 세속과 육신과 마귀라는 신앙인이 싸워야 할 세 욕망을 이기는 무기입니다.
이 세 욕망을 한 마디로 육체적 욕망이라고도 합니다.
이 유혹을 이길 때 청빈과 정결과 순명이라는 덕이 맺히게 됩니다.
이 욕망에게 힘을 주는 것이 심장입니다.
그런데 심장이 육체를 위해 뛸 때는 영혼을 위해 뛸 에너지를 잃습니다.
심장이 육체를 위해 뛸 필요가 없어질 때만 사랑을 위해 뛰기 시작합니다.
에너지는 한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 공동체 평화의 오아시스, 임 파우스티나 수녀가 쓴 ‘복녀 끼아라 루체 바다노’에 관한
내용을 소개합니다.
좀 길지만 원문 그대로 써 봅니다.
어떻게 육체를 향한 심장이 약해질수록 사랑을 향해 심장이 뛰는지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복녀 끼아라 루체 바다노는 2010년에 시복되었습니다.
끼아라 루체는 1971년 이탈리아 사셀로에서
늘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바를 찾는 신심 깊은 부부의 외동딸로 태어났습니다.
결혼 후 몇 년이 지나도록 바다노 부부에게 아이가 생기지 않았습니다.
아이가 없는 결혼 생활은 상상할 수 없었던 아빠 루제로는 성모님께 봉헌된 성지에 가서 11년 동안 하느님께 생명의 선물을 주시길 기도하여 오랜 기다린 후에 드디어 끼아라를 품에안게 되었습니다.
투명하고 큰 눈을 지닌 끼아라는 “맑고 밝다”는 뜻을 지닌 이름처럼 삶도 그러했습니다.
생기있고 활발한 끼아라는 스케이트, 자전거 타기, 테니스 등의 스포츠를 좋아했고 특히 바다를 좋아했습니다.
끼아라는 9살 때 포콜라레 운동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포콜라레는 끼아라 루빅 여사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폐허가 된 세상에 ‘서로 간 사랑과 모든 이의 일치’를 위해 1943년에 창설한 영성 운동입니다.
끼아라는 포콜라레 운동의 창시자 끼아라 루빅과 영적 모녀 관계를 맺었습니다.
특별히 투병 중에 끼아라 루빅 여사로부터 “끼아라 루체”라는 새로운 이름과 편지를 받기도 합니다.
17살 때 테니스 경기 도중 어깨에 강한 통증을 느꼈습니다.
여러 가지 검사 후 결과는 암 중에서 가장 고통스럽기로 악명높은 골육종이였습니다. 이름대로 뼈에 생기는 종양이었습니다.
진단 결과를 알게 된 끼아라는 울지도, 반항하지도 않았습니다.
즉시 침묵 속에 깊이 잠겼지만, 25분이 지난 후 그녀의 입에서는 하느님의 뜻에 “네”라는 응답이 흘러나왔습니다.
새로운 고통이 닥칠 때 마다 “예수님, 당신을 위해서입니다.
당신이 원하시면 저도 원합니다.”라고 하며 단호하게 말하며 자신의 고통을 바침으로써 모든 사건들 안에서 하느님의 뜻에 따르겠다는 항구한 결심을 보여주었습니다.
끼아라는 매일 미사를 통해 성체 모시며 다시 힘을 얻었습니다.
항암치료로 머리가 한 줌씩 빠지기 시작했을 때 끼아라는 “예수님, 이 고통을 십자가에서 저를 구원하신 당신을 위해서예요.” 라 말하며 그 모든 것을 예수님께 드렸습니다.
육신의 고통의 강도는 점점 커졌으나 끼아라는 예수님과 함께 그 고통을 잘 이겨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끼아라가 예상치 못한 커다란 시련이 닥쳐왔습니다.
이제 두 다리를 쓸 수 없게 되었습니다.
힘들었던 두 번째 수술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이는 그녀에게 엄청난 고통이었습니다.
엄마는 끼아라를 위로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끼아라야, 예수님께서는 다리가 없는 너에게
날개를 주실거야.” 끼아라는 “엄마, 제가 걷는 것과 천국에 가는 것 중에 선택해야 한다면 주저 없이 천국 가는 걸 선택할 거예요.
지금 제 마음을 끄는 것은 천국뿐이에요.”라고 말했습니다.
친구들에게는 “너희들은 지금 예수님과 내 관계가 어떠한지 결코 상상할 수 없을 거야…
하느님께서 내게 무언가 더 큰 것을 원하신다는 것을 느껴. 어쩌면 오랫동안 이 침대에
누워있어야 할지도 몰라.
하지만 내게는 하느님의 뜻만이 소중하고 현 순간에 그것을 잘하는 것이야.
지금 사람들이 내게 걷는 것을 원하는지 묻는다면, 나는 ‘아니오’라고 답할 것이야.
이 상태의 내가 예수님께 더 가까이 있기 때문이야.”라고 말했습니다.
그녀의 일기에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마치 어두운 굴 안에 갇혀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온 힘 다해 사랑하려고 나 자신을 다시
던졌고 빛은 되돌아왔다.”
“순간을 잘 산다면 모든 것은 의미가 있다. 만약 그 끔찍한 고통의 순간을 예수님께 선물로 드린다면, 이 끔찍한 순간까지도…. 모든 것은 상대적이다.
그러므로 고통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고 예수님을 위한 의미 있는 선물로 바친다면 고통은 그냥 고통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의 요청에 따라 끼아라는 작은 종이에 성모님께 바치는 글을 적었습니다.
“천상의 어머니, 제가 회복될 수 있는 기적을 당신께 청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하느님의 뜻에 합당한 것이 아니라면, 결코 굴복하지 않는 힘을 제게 주시기를 청합니다.”
끼아라는 투병 중에도 빛나고 환한 미소를 절대 잃지 않았습니다.
평온하고 강하게 남으며 고통스러운 치료를 감수했고 그녀를 찾아오는 이들을 사랑이신 하느님께로 이끌었습니다.
몸을 움직일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끼아라는 아주 활동적이었습니다.
그녀는 전화를 통해 또 그녀를 찾아오는 이들을 사랑을 다 해 맞음으로 오히려 그녀를 방문하는
이들에게 밝은 모습으로 힘과 용기가 되어 주었습니다.
그녀를 위로하기 위해 찾아간 친구들은 도리어 그들이 위로받고 돌아갔습니다.
1990년 여름, 의료진은 끼아라에 대한 치료를 중단하기로 하였습니다.
병의 진행을 막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끼아라는 예수님께 대한 사랑으로 그분의 십자가상의 수난을 나누고자 하는 원의와 명료한 정신을 유지하고자 진통제인 모르핀 투약을 거부했습니다.
"저는 예수님께 고통만을 바칠 수 있는데 모르핀은 제 정신을 흐리게 해요.
지금 제가 할 수 있는 오직 한 가지 일이 있습니다:
제 고통을 예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저는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서의 고통을 가능한 한 많이 나누고 싶습니다.”
그런 끼아라에게 하루는 햐안 옷을 입은 천사가 찾아왔습니다.
빛으로 싸인 천사는 끼아라의 손을 꼭 잡아주며 “힘을 내렴!”하고 말하고선 조용히 사라졌습니다.
병은 진전되었으며 고통도 늘어났습니다.
불평 한마디 없이 그녀의 입에서는 “예수님, 당신과 함께; 예수님, 당신을 위해서”라는 말만 나왔습니다.
끼아라는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엄마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더 이상 예수님께 오셔서 천국으로 나를 데려가시기를 청하지 않아요.
그분과 조금이나마 십자가를 나누기 위해, 그분께 내 고통을 계속 바치고 싶기 때문이에요.”
그녀 없이 홀로 남게 될 것을 걱정하는 엄마에게 계속해 말하기를 “하느님께 믿고 맡기세요.
끼아라는 모든 것을 다 생각해 두었습니다. 장례식에서 부를 노래, 꽃들, 머리 모양, 신부가 입는 흰 드레스에 분홍색 리본 허리끈까지. 그리고는 어머니에게 부탁하였습니다.
“저를 준비시킬 때 이렇게 계속 말하셔야 해요: 지금 내 딸 끼아라는 예수님을 만나고 있다.”
아주 고통스런 밤이 지난 후 1990년 10월 7일 새벽 정배는 그녀를 데리러 왔습니다.
끼아라는 아직 18살. 그녀의 19번째 생일 파티는 하늘에 준비가 되어있었습니다.
마지막 순간이 되자 끼아라가 어머니에게 말했습니다.
“엄마, 나는 천국으로 갈 거야. 그곳에서 나는 더 이상 아프지 않고 정말 행복하게 살아갈 거야.
안녕! 엄마! 나는 행복하니까 엄마도 행복해야 해.”
키아라가 병에 걸리기 전에 하던 일들을 계속했다면 그만큼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육체는 영과 반대입니다.
사랑의 에너지를 빼앗습니다.
그래서 육체에는 최소한의 에너지만 써야 합니다. 이를 기억하기 위해 머리에 재를 얹는 것입니다.
복녀 키아라 루체는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 저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저에게는 아직 심장이 있고 그렇기에 언제나 사랑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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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05. 재의 수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누구든지 ‘위선’이라는 ‘함정’에 빠질 수 있습니다.>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에게서 상을 받지 못한다.
그러므로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위선자들이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듯이, 스스로 나팔을 불지 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
그렇게 하여 네 자선을 숨겨 두어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마태 6,1-4).”
“너희는 기도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회당과 한길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마태 6,5).”
“너희는 단식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침통한 표정을 짓지 마라.
그들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얼굴을 찌푸린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마태 6,16).”
1) ‘재의 예식’은, 인간이라는 존재는 먼지처럼 사라질 존재라는 것을 묵상하라는 예식이고, 동시에 먼지처럼 사라지지 않으려면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예식입니다.
구약성경의 시편 작가는 이렇게 찬미합니다.
“당신께서는 인간을 먼지로 돌아가게 하시며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아, 돌아가라.’ 당신께서 그들을 쓸어 내시면 그들은 아침잠과도 같고, 사라져 가는 풀과도 같습니다.
아침에 돋아났다 사라져 갑니다.
저녁에 시들어 말라 버립니다(시편 90,3.5-6).”
여기서 “당신께서 그들을 쓸어 내시면”이라는 말은, 인간이 먼지로 돌아가거나 돌아가지 않는 것은 ‘하느님의 권한’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창조주 하느님은, 우리를 먼지처럼 허무하게 사라지게 하실 수도 있고, 반대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셔서 영원히 살게 하실 수도 있는 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법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내 아버지의 뜻은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릴 것이다(요한 6,39-40).”
예수님을 믿는 것, 그것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법입니다.
2) 그런데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기만 하면 그것으로 다 되는 것은 아닙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믿는다고 말만 하는 것으로는, 또 믿는다고 생각만 하는 것으로는 아무 소용이 없고, ‘온 삶으로’ 믿음을 실천하는 생활을 해야 제대로 믿는 것입니다.
그 실천 가운데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 바로 ‘회개’입니다.
‘회개’는 믿음의 방향과 신앙생활의 방향을 올바르게 바로잡는 일이고, 하느님께 자비를 간청하는 일이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에서 자신의 부족했던 부분을 채우는 일이고, 잘못된 부분을 고쳐서 바로잡는 일입니다.
사실 믿음과 회개는 하나입니다.
믿는다면 당연히 회개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일에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회개하지 않는다면, 믿는다는 말은 거짓말입니다.
혹시, 회개는 하지만 믿지 않는 경우가 있을까? 없습니다.
믿음이 없다면 회개 자체를 아예 하지 않을 것입니다.>
3) ‘재의 수요일’에 듣는 복음 말씀은 “위선자들처럼 하지 마라.”(위선자가 되지 마라.)
라는 가르침입니다.
자선, 기도, 단식뿐만 아니라, 무엇을 하든지 간에
‘위선’은 하느님을 속이려고 하고, 사람들을 속이는 죄입니다.
사순 시기는 예수님의 수난을 묵상하면서, 극기고행으로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에 참여하는 시기이기 때문에 은혜로운 때인데, 동시에 위선자들이 가장 많이 생기는 때입니다.
진심으로 행하지 않고 겉으로 보이는 극기고행으로만 멈추면, 그것은 모두 위선입니다.
<외국의 일부 국가나 지역에서 벌이는 카니발,
즉 ‘사육제’는, 지금은 하나의 문화로, 또 전통으로 자리 잡은 모습이지만, 원래는 사순절의 극기고행을 앞두고 미리 실컷 먹고 마시려는 ‘불순한 의도’로 시작한 일이었습니다.
그런 경우에 사순절의 극기고행은 위선이 되어버립니다.
금요일에 금육재를 지켜야 하니까 목요일에 미리 고기를 먹거나 토요일에 고기를 먹는 것, 단식재를 지키기 전에 미리 배불리 먹거나 지키고 나서 배불리 먹는 것, 그런 경우에도 그 금육재와 단식재는 모두 위선입니다.
금육재를 지키려고 고기를 안 먹지만, 그 대신에
고기보다 더 비싼 횟집에 가서 회를 먹는 것도 위선입니다.>
4)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 라는 말씀은, “다른 사람들 모르게 하여라.”인데, “너 자신도 모르게 하여라.”이기도 합니다.
자기가 자선을 베풀고 있다는 것 자체를 의식하지 말고,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하면서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루카 17,10)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자기가 자선을 베풀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을 필요가 없고, 잊어버리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사람은 자기가 실천한 선행을 잊어버려도 하느님께서 기억해 주신다는 것이 예수님 말씀의 뜻인데, 거꾸로 표현하면, “하느님께서 기억해 주시니까 너 자신은 잊어버려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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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05. 재의 수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마태 6,1-6.16-18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오늘은 사순시기가 시작되는 재의 수요일입니다. 오늘 전례에서 우리는 머리에 재를 얹으면서 ‘흙에서 왔기에 흙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는’ 우리 삶의 유한함에 대해 묵상했지요. 그렇습니다. 유한한 존재인 우리는 하루 하루 죽음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즉 우리는 매일 조금씩 ‘재’가 되어가고 있으며, 아무리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어도, 아무리 높은 자리에 올라 있어도 그 엄연한 ‘진실’은 변하지 않는 겁니다. 그러니 그 진실을 마음에 깊이 새긴 채, 과연 나는 무엇을 위해 ‘재’가 되어가고 있는지를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남들 앞에 보이려고 하는 거짓된 선행, 즉 ‘위선’을 떨지 말 것을 강조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위선자’로 번역된 그리스어 단어는 원래 무대 위에 서서 관중들에게 박수를 받으려고 공연을 펼치는 배우를 지칭하는 단어이지요. 그러나 그런 ‘보여주기식’ 삶은 그의 진짜 삶이 아닙니다. 공연이 끝나고 무대 아래로 내려오면 그때부터 비로소 그의 진짜 삶이 시작되는 겁니다. 그러니 남들 눈치를 보며 그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노력하는, 그러는 사이 정작 자기 자신을, 자신이 추구해야 할 본질을 잃어버리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위선은 내가 아닌 모습으로 사는 것이고, 그런 위선을 떨면서 재가 되면 내가 살아온 그 자리에 아무것도 남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해야 할까요? 무엇을 하면서 재가 되어야 삶이 허무하게 끝나지 않고 삶의 참된 의미와 보람을 찾을 수 있을까요? 어떤 사람들은 그 답을 ‘꿈’에서 찾습니다.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최종 목표를 정해놓고 그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달려가는 겁니다. 그런데 이 꿈이라는게 참으로 아이러니합니다. 열심히 노력했는데도 이루어지지 않으면 실패라는 생각에 슬퍼지고, 열심히 노력한 끝에 이루고 나면 목표를 상실해 버려 허무해지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꾸는 꿈에는 구체적으로 도달해야 할 목표만 있지 무엇을 위해 그 목표까지 달려가야하는지에 대한 ‘큰 그림’은 빠져있는 것이지요. 그러니 꿈을 쫓되 무엇을 위해 쫓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무엇을 위해”라는 질문에는 누군가가 나를 창조했으며 이렇게 창조한 뜻이 있다는 전제가 깔려 있습니다.
우리 삶의 참된 의미와 기쁨은 우리를 창조하신 하느님만이 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니 그것을 찾고 누리려면 먼저 하느님과 깊은 친교를 맺어야 합니다. 그 친교 안에서 무엇이 나를 위한 하느님의 뜻인지를 올바르게 식별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세 가지 종교 행위, 즉 자선과 기도와 단식이 바로 하느님과 사랑을 바탕으로 한 친교를 맺는 방법입니다. 나의 탐욕과 교만, 실수와 잘못으로 멀어져버린 그분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방법입니다. 자선과 기도와 단식은 각각 따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기도는 하느님께 내 요구사항을 통보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느님의 뜻을 알아 들으려고 하는 것이기에 단식이 수반될 때가 많습니다. 단식과 같은 재계를 철저히 실천함으로써 나도 모르게 감당할 수 없이 비대해진 욕망에서 벗어나 하느님을 향하게 됩니다. 그리고 단식을 실천하는 동안 절약되어 쌓인 몫을 힘 없고 가난한 이들과 함께 나눔으로써 그들 안에 계시는 하느님과 가까워지게 되지요. 내가 자선을 베풀면 물질적으로는 그 자선을 받은 이들이 도움을 받은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하느님과 가까워지는 큰 은총을 입게 되는 건 나 자신인 겁니다. 그 큰 은총이 내 삶을 충만한 기쁨과 보람으로 채워주지요. 그러니 이번 사순시기에는 기꺼이, 기쁜 마음으로 기도와 단식, 자선을 실천해야겠습니다. ‘숨은 일도 보시는 아버지’께서 큰 은총과 축복으로 우리에게 갚아주시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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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05. 재의 수요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흙에서 왔으니”
오늘은 사순절을 시작하는 재의 수요일입니다.
교회는 성지주일에 축성했던 나뭇가지를 다시 모아 태워서 재를 만들어
교우들 이마나 머리에 얹어서 회개이 표시를 하며 사순을 준비하게 합니다.
재라는 것은 주로 나무가 타서 남는 찌꺼기를 말합니다. 나무의 흔적은
그야말로 무(無)의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으로 버림을 받고 자신에게 속한 재물, 심지어는 자식들까지 죽고 나서 자신의
비부병이 도진 몸을 질그릇 조각으로 긁으며 잿더미에 앉아있는 욥의 모습(욥 2,8)이
바로 모든 것을 읽어 무(無)의 상태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또한 요나가 니느웨가
망한다고 예언했을 때 왕은 모든 신하들과 백성들까지 회개의 뜻으로 자루옷을 입고
잿더미에 앉습니다. (요나 3,6)
이런 구약의 배경에서 교회는 사순절을 시작하며 전례에서 재를 얹으며
‘사람은 흙에서 왔고 다시 흙으로 돌아간다.’(창세 3,19)는 말을 사제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요엘 예언자는 이스라엘 백성이 회개의 표시로 잿더미에서 옷을 찢는 관습을 들어
다음과 같이 말씀을 선포합니다. “옷이 아니라 너희 마음을 찢어라.”(요엘 2,13) 외적인
관습보다는 내적인 회개가 더욱 필요하기에 예언자는 이렇게 선포했던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사람이 하느님의 뜻을 따르며 특히 하느님과 화해하도록 독려합니다.
그리고 이 일을 미룰 것이 아니라 바로 당장 오늘 할 수 있기에 사실 다행이지요.
남이 미래에 할 것이라면 내 권한 밖이지만 지금 내 자신이 할 수 있다는 것은
권한과 자유가 있다는 뜻이겠지요. 주님께서 해야 할 일이 어제도 그리고 내일도
아닌 바로 “오늘”임을 일깨워 주시네요.
마태오 복음사가는 진정한 ‘희사’, ‘기도’, ‘단식’에 대해서 주님의 가르침을
전하고 있습니다. 남들에게 드러내거나 생색을 내는 것이 아니라 바로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하느님 앞에 조용히 하는 것입니다. 우리 천주교 신자들이 자랑스러운 것은
다른 종파에 비해서 사람마다 다르기는 해도 대부분 이 복음대로 한다는 것입니다.
이번 사순시기에 우리의 새로운 결심을 주님께 바쳐야 하겠습니다.
제일 먼저 성경을 통독하자는 것입니다. 성경읽기 표를 준비하고 있지만 각자가
주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날들이기를 함께 노력하고요, 또 하나는 고쳐도고쳐도
힘든 나의 악습 하나를 고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 두 가지만해도 사순절의 큰 과제라고 봅니다. 기도와 희생, 이웃을 위한 단식과
희사를 실천하면서 거룩한 재의 수요일을 맞아 재를 받읍시다.
이 세상은 사라지고 나의 욕망도 헛된 것으로 사라지겠지만
하느님의 사랑은 영원하심을 회개하는 이 가슴에 새기는 하루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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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05. 재의 수요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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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05. 재의 수요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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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05. 재의 수요일.
하나님 나라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삶
<2025.3.5> 아침을 여는 묵상 (눅 9:1~17절)
❝하나님 나라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삶❞
❚ 고난과 핍박속에서도 하나님 나라는 계속 확장되어 가도록 복음의 증인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 증인이란 어떤 삶이어야 합니까?
➲ 권능을 통해 훈련되는 삶이어야 합니다(1~6절).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불러 복음 전도 사역의 길로 파송하기에 앞서 귀신을 제어할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질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세를 주셨습니다.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현장에 주님은 결코 홀로 그리고 빈손으로 보내시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보내시면서 복음 전도자로서 지켜야 할 행동들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아무 것도 가지지 말라 지팡이나 배낭이나 양식이나 돈이나 두 벌 옷을 가지지 말며..’(3절)..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절대적으로 신뢰해야 합니다.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거기서 머물다가 거기서 떠나라..’(4절).. 복음은 확장되어 가야 합니다.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지 아니하거든 그 성에서 떠날 때에 너희 발에서 먼지를 떨어 버려 그들에게 증거를 삼으라..’(5절). 복음을 거부함으로 그들이 받을 심판에 책임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얻은 자들의 헌신과 열정과 충성스러움을 통해 확장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의 증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이 주시는 권세와 능력을 힘입지 않고는 감당할 수 없습니다. 날마다 하늘의 권능과 권세를 구하므로 삶의 자리에서 떳떳하게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아갈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잘 훈련 되어져야 합니다.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에 너무 염려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이루는 일에 힘과 열정을 쏟아야 합니다. 무엇보다 우리 자신의 이익이나 안위보다는 어떻게 하면 복음을 효과적으로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을지에 더 많은 관심을 쏟는 훈련된 삶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과감한 결단력과 지혜로운 판단력을 가지고 복음을 찾고, 기다리는 사람들을 향해 당당하게 다가갈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늘의 권능을 힘입어 잘 훈련된 하나님 나라의 증인의 삶을 살아갈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 회개의 길로 인도하는 삶이어야 합니다(7~9절).
제자들은 어느 곳을 가든지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복음을 증거하는 일과 병을 고치는 일에 힘을 썼습니다. 이들의 이러한 행동은 그 지역 내에 큰 파장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결국 이러한 소식이 분봉 왕 헤롯의 귀에까지 들어갔을 뿐만 아니라 온갖 소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퍼져 나갔습니다. 사람들은 ‘죽은 요한, 엘리야, 옛 선지자 한 사람이 다시 살아났다...’고 술렁거릴 정도였습니다. 헤롯은 ‘...심히 당황..’했습니다. 당황 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서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거늘...지금 이 사람은 누구란 말인가?...’(9절)...라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보잘 것 없었던 열두 명의 제자들의 행동은 가히 엄청난 파장을 불러왔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능력입니다. 말씀의 능력입니다. 우리 자신은 질그릇처럼 연약하지만, 우리 안에 값진 보배를 담고 있기에 이 보물이 세상 가운데로 드러날 때, 세상은 놀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있는 보배를 꺼내보려는 노력도 하지 않은 채, 눈앞에 보이는 현실의 높은 벽만을 바라보며 낙심하고, 절망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전도를 할 수 없는 사회적 환경이라고 하는 그럴싸한 합리화를 들이 내밀면서 한숨만 내쉬고 있는 답답한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 안에 있는 보배는 지금 당면한 현실의 문제보다 더 크고 능력이 많습니다. 복음의 능력이 제대로 선포될 때, 세상의 권력자라도 그 앞에 무릎을 꿇을 수 밖에 없습니다. 나 한 사람의 영적 당당함이 많은 이들의 마음을 요동치게 하여 자신들의 지난날을 회개하므로 복음의 진리를 받아 드릴수 밖에 없도록 할 것입니다. 긍정의 믿음을 가지고 당당하게 전도의 현장으로 그리고 삶의 현장으로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 복음이 먼저 선포되는 삶이어야 합니다(10~17절).
예수님께서는 사역을 마치고 돌아온 제자들과 번잡하고 할 일이 쌓이게 하는 무리들을 잠시 떠나 벳새다라는 고을을 가셔서 쉼과 한적함을 얻고자 하셨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그곳까지 따라와서 잠시의 쉼을 방해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외면하시지 않으시고 영접하여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가르치셨고, 병 고칠 자들은 고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날이 저물어서 저녁 먹을 시간이 되도록 쉼 없이 무리들을 돌보셨습니다(10~12절). 남자만 오천 명이 되는 저 많은 사람들의 저녁거리를 염려하고 있던 제자들을 향해 예수님은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말씀하십니다.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오천 명 이상을 먹인다는 것은 도저히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일을 행하셨습니다. ‘떼를 지어 한 오십 명씩 앉히라... 먹고 다 배불렀더라 그 남은 조각을 열두 바구니에 거두니라...’(13~17절)..
예수님은 병자들을 고치시고, 어떤 이적과 기사를 펼치시기 전에 하나님 나라 복음을 먼저 가르치셨습니다. 그런 후에 육신적 필요를 채워 주셨습니다. 복음의 능력을 믿고, 순종할 때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 오병이어의 기적을 경험하게 됩니다. 인간의 이성이나 지식이나 경험으로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지만, 주님의 명령에 순종했을 때 놀라운 결과를 낳게 됩니다. 우리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이 그리고 우리의 길과 하나님의 길이 다름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믿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복음이 먼저 우리 자신의 삶 가운데 선포될 때에, 상식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나타내게 될 것입니다. 오병이어와 같이 작고 미약한 삶이지만 이러한 삶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계획과 하나님이 이루시고자 하시는 뜻이 있습니다. 그 계획하심을 믿고 확신하기에 오늘도 인내하며 복음의 능력을 품고,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명의 길을 묵묵히 걷습니다.
오늘도 주께서 주시는 힘과 능력과 권세를 힘입고, 잘 훈련되어서 하나님 나라 복음의 증인된 삶으로 나아갈 뿐 아니라 복음의 능력 안에서 담대한 믿음과 용기를 얻어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증인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눅 9:1~17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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