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038
11월11일[투르의 성 마르티노 주교 기념일/연중 제32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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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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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Fs_UoikB4nA
[수원교구 한용희 대건안드레아(광북성당 주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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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 마음은...>
연자매란 돌로 만든 방아입니다. 크고 둥근 돌판 위에 그보다 작고 둥근 돌을 옆으로 세워 얹는 것이지요. 이것을 소나 말이 끌어 돌려서 곡식을 찧고 빻습니다.
따라서 연자매 사이즈가 만만치 않았습니다.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즉시 사망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 말씀, 얼마나 섬뜩한지 모릅니다. “나를 믿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자는,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오히려 낫다.”(루카 17,2)
강경한 예수님 말씀 저는 이렇게 이해했습니다. 참으로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라면 마냥 오냐 오냐 하지만은 않습니다. 물론 때로는 칭찬과 격려도 아끼지 않습니다. 온 마음과 몸을 다 바쳐 자녀를 위해 헌신합니다.
그러나 때로 자녀가 그릇된 길을 갈 때, 그 길이 정말 가지 말아야 할 길이라 할 때 그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그 길에서 되돌리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타일러보기도 하고, 눈물로 호소도 하겠지만, 그게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면 준엄하게 꾸짖기도 하고 강하게 외쳐보기도 하고 정신 번쩍 들게 혼도 낼 것입니다.
이런 극진한 자녀 사랑을 배경으로 예수님께서는 손을 잘라버려라, 발을 잘라 버려라, 눈을 빼 던져버리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유다 문화 안에서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버리는 사형 방법이 없었지만, 로마인들은 이런 방식으로 사형을 집행하고 있었습니다. 십자가형과 함께 로마로부터 도입된 끔찍한 사형 방법 중에 하나였습니다.
유다인들은 이러한 사형 방법을 끔찍이도 싫어했는데 그 이유는 수장 후 시신을 되찾을 수 없어서였습니다.
차라리 연자매를 선택하라고 강조할 만큼 예수님께서는 이웃에게 죄를 짓게 하는 죄를 중히 여기셨습니다. 일시적인 쾌락으로 지옥을 얻기보다는 불구가 됨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게 더 낫다고 역설하셨습니다.
죄를 짓게 되면 다른 무엇에 앞서 가장 가치 있고 고귀한 영혼의 구원, 하느님 나라를 잃어버리기 때문에 그토록 강조점을 두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명심해야 할 사항이 한 가지 있습니다.
새삼 설명할 필요도 없겠지만 예수님께서는 글자 그대로 손발을 잘라버리고 눈을 뽑아버리라고 요구하시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만일 그렇게 한다면 밥 먹듯이 일상적으로 죄를 짓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는 다들 불구자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죄의 유혹 앞에서 있는 힘을 다해서 투쟁하라는 권고 말씀입니다. 죄 앞에서 목숨 걸고 맞서 싸우라는 격려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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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uiRnCXRtwK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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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용서 안 하면 그 사람을 지옥에 버리는 것이다>
오늘 복음은 내용상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남을 죄짓게 하는 자는 불행하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낫다고 하십니다. 지옥에 간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죄를 짓게 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나오지 않습니다.
이야기의 주제는 이제 용서로 나아갑니다. 마치 용서하지 않으면 남을 죄짓게 만드는 것처럼.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 그가 너에게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합니다.’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
이제 세 번째 주제입니다. 세 번째 주제는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하고 말하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
이 상관도 없어 보이는 세 주제를 이어보면 어떻게 될까요? “사람이 남을 죄짓게 할 수 있는데, 그것은 그 사람을 용서하지 않는 것이다. 그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는 이유는 겨지씨 한 알만한 믿음도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용서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어야 용서할 수 있는데, 용서해 주지 못하면 그 사람은 영원히 죄에 매이게 된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먼저 용서받지 못한다면.
용서받지 못하는 시스템에 있다면 그 사람은 자신과 타인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그런 곳이 군대가 될 수도 있겠습니다. 영화 ‘용서받지 못한 자’에서 군대는 용서가 안 되는 시스템으로 그려집니다.
승영은 자대에 배치되었을 때 강한 신념과 이상주의적인 가치관을 지닌 청년이었습니다. 거기에서 친구이자 상관인 태정을 만납니다. 태정은 군대 시스템에 적응한 선임으로서 친구인 승영을 보호해주려고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는 승영을 혼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후임들에게는 가차 없는 폭력도 가하기도 하였습니다.
승영은 갈등합니다. 용서하는 사람이어야 하는지, 그럴 수 없는 존재인지. 그리고 군 시스템에 적응하기로 결심합니다. 그리고 태정이 한 것처럼 선임에게는 복종하고 후임에게는 어쩔 수 없이 야단을 치기도 합니다. 후임이 애인과 헤어지고 힘들어할 때 승영은 자신이 살자고 후임을 때리고 후임은 자살합니다.
승영은 본래 군 시스템에 저항하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리고 태정이 산 것처럼 살지 못하는 자신을 한탄합니다. 태정은 밖에서 잘만 삽니다. 아무 일 없었듯이. 승영은 그럴 수 없습니다. 자신이 용서하지 못해 죽은 후임 때문에 자신도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도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용서받지 못하면 용서받지 못하는 시스템에 매이게 됩니다. 거기에서 아무리 발버둥 쳐도 나올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용서받지 못하면 자신이 용서할 수 있는 존재라는 믿음이 생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이 시스템을 깨고 자신을 용서해 주는 존재를 만나야 합니다. 그래야 다른 이들도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자신도 용서하지 못하는 존재가 어떻게 타인을 용서할 수 있다고 믿을 수 있을까요?
전에 락 토마스(Rock Thomas)의 사례를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사랑받지 못해 항상 자기 자신을 ‘패배자, 노동자, 애정결핍’으로 정의했습니다.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는 존재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것을 넘어서기 위해 아버지에게 애정을 구걸하였습니다. 새엄마로부터 아버지가 암으로 위독하다는 전화를 받고 자신이 죽도로 일해 번 돈으로 아버지의 병원비와 세금을 내주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여전히 아들을 인정하지 않았고 아들은 여전히 패배자이자 노동자이며 애정 결핍자라고 여기며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부동산 회사에 취직하여 야근하던 중 지배인이 그를 보고 칭찬해 주었습니다. 태어나서 처음 듣는 칭찬이었고 그는 자신의 모든 이야기를 털어놓았습니다. 지배인은 그에게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 클린트 이스트우드라는 것을 알아내고는 하루에 이 말을 500번 반복하라고 하였습니다.
“나는 터프하고 핸섬한 사람이다.” 정말 500번이냐고 놀라며 되물었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잘 듣게. 인간의 뇌는 언제든 원하는 방향으로 변화할 수 있어. 자신이 되고자 하는 모습을 끝없이 반복해서 상기시킨다면 자네가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았다고 해도 바뀔 수 있다는 것이지. 문제는 많은 사람이 자신이 되고픈 게 아니라 ‘남들이 자신에게 원하는 모습’을 만들기 위해 뇌를 길들인다는 거야.”
돌아오는 차 안에서 그는 “나는 터프하고 핸섬한 사람이다.”라는 말을 수없이 되풀이했고 가슴이 북받쳐 한없이 울었습니다. 그는 사업에 성공하였고 다른 이들에게 영감을 주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믿음은 누군가의 용서로 주어집니다. 믿게 되면 용서할 수 있게 되고 그러면 그 누군가를 지옥에서 해방할 수 있습니다. 만약 내가 용서하지 않으면 그 사람은 영원히 지옥에 매일 것입니다. 그러면 자신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하느님 자녀가 지옥에서 나오지 못하도록 그 사람을 용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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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미국과 한국의 집 구조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한국에는 ‘현관(玄關)’이 있습니다. 현관에서 신발을 벗고 거실로 들어옵니다. 현관에는 신발장이 있고, 우산 거치대가 있고, 구둣주걱이 있습니다. 현관은 ‘정화(淨化)’의 장소라고 생각합니다. 직장에서 화나는 일이 있어도, 힘든 일이 있어도 현관을 지나면서 모두 털어버리면 좋겠습니다. 현관을 통해서 가정으로 돌아오면 그 가정이 작은 교회가 되면 좋겠습니다. 성당에도 현관의 역할을 하는 것이 있습니다. ‘성수(聖水)’입니다. 달라스 성당에는 성전 입구에 세례대가 있습니다. 세례대에는 늘 일정량의 물이 흐르게 하였습니다. 성수를 찍거나, 세례대에 손을 적시면서 성전 안으로 들어옵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깨끗한 몸과 마음으로 하느님 앞에 나서는 겁니다. 가톨릭 교리 중에 ‘연옥’이라는 가르침이 있습니다. 연옥은 일종의 현관입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성인들의 통공과 우리의 기도가 함께 하면 연옥 영혼들은 정화될 겁니다. 그리고 천국으로 초대받을 겁니다.
제가 있는 사제관은 복층으로 되어 있습니다. 1층에서 2층으로 올라가거나 내려오는 계단에 ‘난관(欄干)이 있습니다. 난간은 공간을 구분하는 장치로, 실내와 실외, 안전과 위험, 자유와 제한 사이의 경계를 형성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난간은 인간의 본질적인 경계 설정 욕구를 반영합니다. 난간은 어떻게 우리에게 안정감을 주면서도 동시에 자유를 제한하는 존재가 될 수 있을까요? 우리는 난간을 넘어서거나 경계를 무너뜨리려는 욕구를 어떻게 경험할까요? 아담에게 에덴동산은 낙원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그 난간을 뛰어넘었습니다. 난간은 보호자나 사회적 안전망과 같은 역할을 상징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인생의 어려움에서 안전을 찾을 때 '난간'과 같은 존재를 필요로 합니다. 인간의 삶에는 많은 보이지 않는 난간이 있으며, 우리는 항상 어떤 경계 내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난간은 규칙과 질서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사회는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다양한 규범과 법적 ‘난간’을 세워 둡니다. 이러한 난간이 보호 역할을 하지만, 때로는 억압으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원로와 감독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원로는 현관과 같은 사람이면 좋겠습니다. 감독은 난간과 같은 사람이면 좋겠습니다. 원로는 세상 속에 살고 있는 교우들이 하느님께로 갈 수 있도록 안내해 주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감독은 세상 속에 있는 교우들이 하느님께 갈 수 있도록 이정표가 되어 주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원로와 감독의 역할을 두 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하지 말아야 할 일이고, 다른 하나는 꼭 해야 하는 일입니다. 하지 말아야 할 일은 이렇습니다. “거만하지 않고 쉽사리 화내지 않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술꾼이나 난폭한 사람이나 탐욕스러운 사람이 아니어야 합니다. 방탕하다는 비난을 받지 않아야 합니다.” 해야 할 일은 이렇습니다. “흠잡을 데가 없어야 하고 한 아내의 충실한 남편이어야 하며, 자녀들도 신자이어야 합니다. 손님을 잘 대접하고 선을 사랑해야 하며, 신중하고 의롭고 거룩하고 자제력이 있으며, 가르침을 받은 대로 진정한 말씀을 굳게 지키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원로와 감독에게 요구되는 덕목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비난하고 평가하기보다는 먼저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라.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 그가 너에게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합니다.’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 우리가 말과 행동으로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할 수 있다면, 그리고 나에게 잘못한 이를 기쁜 마음으로 용서할 수 있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아름다운 인연을 만들 수 있습니다. 그 인연이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잡이가 될 것입니다. “저희에게 해로운 것을 모두 물리쳐 주시어 저희가 평안한 몸과 마음으로 자유로이 하느님의 뜻을 따르게 하소서. 내가 이렇게 부르심을 받은 것은 하느님께 선택된 이들의 믿음을 돕고 신앙에 따른 진리를 깨우쳐 주기 위한 것으로, 영원한 생명의 희망에 근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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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7,1-6: 죄의 유혹과 용서, 믿음의 힘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라고 경고하신 다음 형제자매를 용서하라고 하신다. 나약한 인간은 누구나 실수를 저지르고, 그래서 많은 일에 걸려 넘어지기 때문이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남을 죄짓게 하는 사람은 불행하다고 말씀하신다. “불행하여라, 그러한 일을 저지르는 자!”(1절) 예수님은 이어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회개하는 사람들을 용서하라고 하신다.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3절) 만일에 용서해 주지 않아 절망한다면 한 사람을 죄악에서 소생시킬 수 없게 만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가 너에게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합니다.’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4절) 우리는 병을 한두 번 치료해주고 마는 것이 아니라, 몇 번이라도 아플 때마다 치료해주는 의사들과 같아야 한다. 우리가 모두 나약한 존재들이기 때문에 실수할 수 있다고 한다면, 우리를 꾸짖고 벌할 수 있는 이들이 자비롭고 쉽게 용서하는 사람이기를 기도하여야 한다.
사도들이 주님께 청한다.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5절) 사도들은 믿음을 더해 주십사고, 그래서 믿음 안에서 더 강하게 해 주십사고 청한다. 믿음은 우리에게 거룩한 은총의 선물이다. 믿음의 시작은 우리에게 달려있고, 하느님을 믿고 의지하는 가운데 유지되지만, 그러기 위한 확신과 힘은 거룩한 은총에서 온다. 그래서 “믿는 이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마르 9,23) 겨자씨 한 알은 아주 작아 보인다. 겉모습은 보잘것없어도 맛은 이보다 강한 것이 없다. 교회가 지닌 신앙의 뜨거운 열정과 내적인 힘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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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최정훈 바오로 신부님]
오늘 복음은 교정과 용서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루카 17,3). 형제의 죄는 꾸짖어 바로잡아야 하고, 그가 뉘우치면 기꺼이 용서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가끔 형제의 잘못을 보고도 이를 바로잡지 않고, 그냥 혼자 용서해 버리기도 합니다. 이것은 진정한 의미의 용서가 아닙니다. 그 형제는 자신의 잘못을 모르기에, 회개하지 못한 채 죄에 머물게 됩니다. 혼자서 용서하고 마는 것은, 그를 꾸짖을 때 예상되는 갈등과 다툼이 싫어서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용서는 상대에 대한 사랑이 없고, 불편함의 회피일 뿐입니다. 사랑이 없기에 그에게 진정한 형제가 될 수 없습니다. 형제가 잘못을 저지르면 그것을 멈추게 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와 불편해지는 결과까지도 감당하기로 결심하면서, 형제를 올바른 길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만일 죄를 저지른 형제가 자신의 잘못을 알고 뉘우친다면, 곧바로 용서해야 합니다. 하느님처럼 용서해야 합니다. 우리가 용서받기 어렵다고 생각한 큰 죄도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는 용서하십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우리의 죄보다 늘 더 큽니다. 또 되풀이되어 고백하기도 부끄러운 죄도 하느님께서는 그때마다 처음처럼 용서해 주십니다. 주님께서는 용서하시는 데 지치시지 않습니다. 우리도 하느님과 같이 형제가 어떠한 큰 잘못을 저지르더라도, 또 같은 잘못을 되풀이하여 저지르더라도, 그가 진심으로 회개한다면 큰 사랑으로 용서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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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용서를 청하는 입장에서도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그러한 일을 저지르는 자!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것보다,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내던져지는 편이 낫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라.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 그가 너에게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합니다.‵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 사도들이 주님께,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주님께서 이르셨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루카 17,1-6)
1)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다.”라는 말씀은, 그런 일이 일어나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그런 일이 자주 일어나는 것이 인간 세상의 현실이라는 뜻입니다. <신앙인은 “세상 사람들이 다 그렇게 살고 있으니 나도 그렇게 하는 것이다.” 라고 자기의 잘못된 행동을 정당화하거나, 세상 사람들 핑계를 대면 안 됩니다.>
“불행하여라, 그러한 일을 저지르는 자!”라는 말씀은, “남을 죄짓게 하는 죄를 짓는 자는 구원받지 못하고 멸망을 당하게 될 것이다.”라는 경고입니다. <‘불행하여라.’는 ‘멸망할 것이다.’입니다.> 여기서 ‘작은 이들’은 ‘나보다 작은 이들’, 즉 나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사람들, 나의 말을 듣고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내던져지는 편이 낫다.”라는 말씀은, ‘남을 죄짓게 하는 죄’는 정말로 ‘큰 죄’이고, 그 죄를 짓는 자는 엄한 처벌을 받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2) 마태오복음에서는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라는 말씀을 더욱 자세하게 풀어서 전하고 있습니다.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그러나 그가 네 말을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 ‘모든 일을 둘이나 세 증인의 말로 확정 지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가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교회에 알려라.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마태 18,15-17) <이 말씀에서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은 ‘네 형제가 죄를 짓는 것을 네가 보거든’이고,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는, “파문하여라.”입니다.>
죄 지은 형제를 꾸짖고 타이르는 것은 그를 회개시켜서 ‘함께’ 구원받기 위한 일입니다. 그래서 형제를 꾸짖고 타이르는 일은 ‘사랑 실천’입니다. ‘사랑 실천’이기 때문에 ‘사랑으로’ 해야 합니다. 만일에 사랑 없이 형제를 심판하고 단죄하는 일을 한다면, 그것 또한 죄를 짓는 일이 됩니다.(마태 7,1-2) 루카복음의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라는 말씀에는, “회개하지 않으면 용서하지 마라.”, 또는 “회개하는 경우에만 용서하여라.”라는 뜻은 들어 있지 않습니다. 형제의 회개 여부와 상관없이 용서를 실천해야 합니다. ‘회개’는 용서하기 위한 조건이 아니라, 용서를 받기 위한 조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박해하고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이 회개하지 않았는데도 그들을 용서하셨습니다.(루카 23,34) “그가 너에게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합니다.’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 라는 말씀이, 마태오복음에는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 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로 표현되어 있고(마태 18,22), 회개는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3) 우리는 용서에 관한 예수님 말씀을, 용서하는 입장에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용서받는 입장에서도 생각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용서하는 입장’에만 두고서, 자기도 용서를 청하는 입장이 될 수 있음을 생각하지 않는 것은, 어리석은 위선이고 교만입니다.
용서를 청해야 하는 입장에서 예수님 말씀을 다시 읽으면, “형제가 너를 꾸짖거든 달게 받아들이고 회개하여라.”입니다. 그런데 ‘내가’ 하루에도 일곱 번이나 죄를 짓고 죄를 지을 때마다 회개한다고 하면? 하느님께서는, 또는 형제들은 그때마다 나를 용서해 주는데, 그렇게 하루에도 일곱 번씩이나 반복해서 죄를 짓고, 회개한다고 말하는 그 회개는 과연 진정성이 있는 회개일까?
고해성사 5단계에서, 통회와 고백 사이에 ‘정개’가 있습니다. 잘못된 것을 고쳐서 바로잡고, 같은 죄를 반복하지 않으려는 굳은 결심을 하지 않으면, 형식적인 회개가 될 뿐이고, 그것은 회개가 아닙니다. 물론 살다 보면 죄를 짓고, 또 본의 아니게 의지와 상관없이 같은 죄를 반복해서 짓는 일이 누구에게나 생길 수 있는데, 그럴 때라도 진심으로 회개하기를 포기하지 말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어떻든 시간이 걸리더라도, 나를 사로잡고 있는 죄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고, 또 노력해야 합니다. 진심으로, 간절하게 노력한다면, 주님께서 도와주시고, 형제들이 도와줄 것입니다.
4)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에 관한 말씀을 ‘용서’에 관한 말씀과 합해서 생각하면, “너희가 참으로 하느님의 자비를 믿고, 형제의 회개와 구원을 위해서 기도하고 노력하면, 구제불능처럼 보이는 죄인도 구원받을 수 있다.”, 또는 “너희가 참으로 하느님의 자비를 믿고, 진심으로 회개하고 보속하면, 구원받는 것이 불가능하게 보이는 상황이더라도 구원받을 길이 열릴 것이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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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김상우 바오로 신부님]
오늘 복음은 공동체 생활에 관한 예수님의 세 가지 말씀을 소개합니다. 남을 죄짓게 하지 말라는 경고와 형제의 죄를 몇 번이고 용서하라는 권고, 그리고 믿음의 힘에 관한 말씀입니다.
첫 번째 말씀에서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라는 표현을 직역하면 “(남을)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들”이 됩니다. 스스로 죄를 짓는 것도 문제지만 권모술수로 형제가 구원의 길 위에서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도 잘못이라는 지적입니다. 그런 사람은 차라리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내던져지는 편이 낫다.”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데, 그만큼 형제를 죄짓게 하는 행위가 얼마나 무거운 죄인지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합니다.’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라는 권고가 등장합니다. 여기서 ‘일곱’이라는 숫자는 7회만 용서하면 된다는 가르침이라기보다, ‘완성’을 나타내는 숫자 ‘일곱’이 드러내듯 회개하는 형제를 끝없이 용서하라는 뜻입니다.
세 번째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믿음의 힘에 관하여 역설하십니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 겨자씨는 매우 작지만, 돌무화과나무는 웅장합니다. 그만큼 작은 믿음만이라도 간직하고 있다면, 그 믿음으로 공동체 안에서 큰일을 실현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속해 있는 공동체는 저마다 여러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가정 공동체, 직장 공동체, 본당 공동체가 구원의 길 위에서 바로 설 수 있도록 예수님의 세 가지 말씀을 새겨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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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너에게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돌아와 “회개합니다.”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 (루카 17,4)
나에게 죄를 짓고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준 사람을 용서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용서는 사실 인간의 능력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역입니다. "그래 까짓꺼 내가 용서하지 뭐~" 한다고 용서가 이루어지지는 않습니다.
참으로 용서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나와 상대방의 진실한 관계가 전제되어야 합니다. 먼저 사람은 서로 잘못할 수 있음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나도 잘못할 수 있고 너도 잘못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잘못을 저질렀다면 진정성 있는 회개와 사과를 해야합니다. 현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가식적이고 진정성이 결여된 사과는 더 큰 분노를 불러 일으킵니다.
진정성은 나의 상처를 씻어주고 아물게 합니다. 진정성이야말로 참다운 회개의 표시입니다.
요즘 우리나라의 국정농단 사태의 해결 방안도 이런 식이 되어야 할텐데 참으로 걱정스럽습니다. 진실한 사과와 너그러운 용서로 상처 입은 국민들이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아름다운 대한민국을 만들어 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우리 모두 좀더 진솔해집시다. 잘못을 저지르고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우리들이고 하느님과 이웃의 자비가 필요한 우리들입니다.
함께 부등켜 안고 회개의 눈물을 흘리며 다시 시작하는 감동을 누리시는 오늘 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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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없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그러한 일을 저지르는 자!”(17,1)
전례문의 표현이 예전과 달리 조금씩 변경되었습니다, 1980년도엔 죄의 고백을 다 마친 후, 다음과 같은 성찰 기도문을 했었습니다. 『이 밖에 나 성찰치 못한 죄와 남이 나로 인해 지은 죄 있을 터이니 신부는 도무지 저를 벌하고 사하소서.』 그땐 조금은 생소하게 들렸지만, 시간이 지난 요즘은 아주 의미 있는 성찰문이었다, 고 느낍니다. 사실 타인과 살다 보면, 의도하건 의도하지 않았건 본의 아니게 말과 생각과 행동을 통해서 서로 죄짓게 하는 일이 종종 일어나는 게 사람 사는 모습이라고 봅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은 억하심정이 아니면 남을 죄짓게 혹 남을 불편하게 의도적으로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은 많지 않으리라 봅니다. 다만 인간은 불완전하고 나약하기에 우리 각자가 의도하지 않더라도 어쩔 수 없이 나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에게 죄를 짓게 하고, 예수님의 언급처럼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없을 수 없습니다.” (17,1) 그런데 이 말씀에 덧붙여 “그러나 불행하여라, 그러한 일을 저지르는 자!”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표현은 너무 지나치시지 않나 생각이 들며 반감마저 듭니다. 아니 나약하고 불완전한 인간을 이해하신 듯,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다, 고 말씀 해 놓고서는 남을 죄짓게 하면 불행하여라! 라고 저주아닌 듯 저주를 퍼부으시니 저희더러 어쩌란 말씀입니까? 우리가 전혀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우리가 ‘여기 있음’으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이 죄짓게 하는 일이 불행하다면 우리는 어찌해야 하나요? 어찌 하오리까?
오늘 복음의 구조는, 첫째 죄의 유혹에 대한 경고(17,1-3a), 둘째 잘못의 꾸짖음과 용서(17,3b-4), 그리고 믿음의 힘(17,5-6)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사실 저 역시도 다른 형제들과 공동체 생활을 하고 있지만, 예전 ‘양성지도자-양성자’, ‘장상-수하자’의 관계가 아닌 이젠 성숙한 수도자로 대등한 입장에서 살다 보니, 새삼스럽게 신앙의 관점과 접근 태도가 상당히 다르다는 사실을 느낄 때가 자주 있습니다. 사람들과의 관계의 친밀도에 따라서 잘못의 꾸짖음과 용서의 폭도, 깊이도 달라지고 변한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예전 어르신들이 자주 표현하신 말씀, 사는 것이 죄다, 는 말처럼 삶 자체가 사람에게 죄의 원인이 되기도 하지만, 사제 생활 초기에는 한사코 아닙니다, 고 손사래를 쳤습니다. 하지만 이젠 기꺼이 인정하면서, 함께 살아간다는 것이 때론 죄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고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과거에는 세속, 마귀, 육신이 죄의 근원이라고 가르친 적도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살아가도록 창조하신 하느님의 뜻을 어기면서 다른 사람을 떠나 혼자 살아갈 수 없는 게 인간의 운명이며 현실이라고 봅니다. 결국 사람이 어디서 살던지 죄의 유혹은 어디에나 있으나, 남을 죄짓게 하는 행동은 참으로 본인 스스로에게도 불행한 일이라고 느껴집니다. 자신이야 이미 깨닫고 나름대로 자유롭게 산다고 생각하면서 말하고 행동할지 모르지만 더불어 사는 사람의 작고 약한 믿음과 희망을 무너뜨리고 좌절시키는 행동은 철저하게 근절되어야 할 것으로 오늘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이런 맥락에서 “이 작은 이들이 아니라 미처 깨우치지 못하거나 믿음이 약한 사람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것 보다,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내 던져지는 편이 낫다.”(17,2)하고 예수님께서 빗대어 말씀하십니다. 같은 가르침을 마태오 복음에서는, “남을 죄짓게 하는 사람은 차라리 자신의 손과 발을 잘라 던져버리는 게, 눈을 빼 던져버리는 게 불타는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마태18,8~9)라고 듣기 민망할 정도로 강하게 말씀하십니다.
사실 남이 나로 인해 죄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 죄의 원인(?)이라고 여겨지는 신체의 일부인 손과 발 그리고 눈을 잘라버리고 빼낼 수 있는 용기는 어떤 누구에게도 없고 그럴 수는 없습니다. 이를 스스로 보속으로 실행하겠다고 설사 고백자가 말하더라도 저뿐만 아니라 모든 사제는 한사코 반대할 것이며, 이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잘못 이해한 것으로 봅니다. 이와 반대로 자신으로 하여금 죄짓게 한 형제의 손과 발을 그리고 눈을 어떻게 칼로 내리칠 수 있겠으며 눈을 빼낼 수 있겠습니까? 만일 어쩔 수 없이 함께 살아가면서 본의 아니게 다른 사람에게 죄를 짓는 데 있어서 내가 남의 원인이 되고, 남이 나의 원인이 된다면 서로의 잘못을 꾸짖고 용서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해야 할 믿음의 실천이고 사랑의 증거라고 봅니다. 타인의 잘못에 직면하여 화를 먼저 내고 칼로 응징하려는 것은 인간의 본능에 속하지만 꾸짖음과 용서는 인간의 이성적인 믿음과 사랑의 행위에 속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타인의 잘못을 꾸짖는 까닭은 타인을 단죄하고 심판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 사람을 그 사람이 되도록 바로잡아 주기 위한 것인데, 이는 곧 사랑하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17,3)하는 말씀은 상호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이러한 과정, 곧 꾸짖음과 용서는, 죄나 잘못의 횟수와 상관없이 모든 경우에 해당합니다. 오늘 복음의 아름다운 점은 이러한 예수님의 강한 표현에도 불구하고 지금껏 미쳐 이를 깊이 있게 생각하며 살아오지 못했던, 즉 내가 남을 죄짓게 하는 원인이 되었고, 꾸짖음과 용서를 제대로 베풀지 못하고 살아 온 삶을 깨달은 제자들이 마침내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17,5)라고 스스로 스승이신 예수님께 고백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역시 주님의 첫 제자들처럼 이렇게 고백해야 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을 칭찬하고 격려해 주신 것과 똑같이 우리에게도 칭찬과 격려를 해 주시리라 생각합니다. 어쩔 수 없이 타인과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인간의 실존, 그로 인해 본의 아니게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죄를 짓게 할 수밖에 없는 나약함을 알면서도 늘 서로가 서로에게 열린 마음으로 타인의 잘못을 꾸짖고 용서하는 삶을 통해서 더욱 아름답고 거룩한 삶을 이루어 간다고 봅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하고 요구되는 것은 지금보다 더 나은 관계를 위해 필요한 것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면 족하고도 남습니다. 이 믿음은 바로 하느님의 선물이며, 이 믿음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고자 하는 노력 통해서 성장하고 성숙하는 것이기에 그 시초에는 겨자씨 한 알만한 것이라도 충분합니다. “주님, 저로 인해 형제가 죄를 범하지 않게 하여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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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에만 집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의 모든 기도를 지금 당장 들어주시는 분인데 마치 우리의 믿음이 부족해서 기도가 들어지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와 관련해, 저희 누나가 제 조카와의 대화를 들려준 적이 있습니다. 저희 누나가 조카에게 이야기 했습니다.
“무조건 노력도 하지 않은 채 기도만 한다면, 하느님이 들어주시겠니? 그렇지 않아. 최선을 다 하고 하느님께 맡긴다면 기도를 들어주시겠지만 그렇지 않고 노력 없이 들어 달라고 떼만 쓴다면, 그 기도는 옳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들어주시지 않을 거야”.
그러자 제 조카가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노력 하지 않아도 의심 없이 진심을 다해 믿고 기도하면 하느님께서 들어주시는데, 인간은 늘 의심이 많기에 기도를 진심을 다해 할 수가 없는 거에요. 그래서 사람들이 고생고생하면서 열심히 살 수 밖에 없어요. 의심 없이 진심을 다해 기도하면 하늘에서 돈도 떨어질 거에요”.
이러한 질문은 아마 누구나 해봤음직한 질문입니다. 이 안에서 우리는 기도에 바로바로 응답하지 않으시는 하느님의 부재와 기도를 다양한 방식으로 들어주시는 하느님의 현존을 모두 발견하게 됩니다. 이에 대한 저의 답변을 정리하자면, 기도의 범주 안에 인간의 영역과 하느님의 영역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영역이란, 제 누나의 의견대로 인간이 어느 정도 결과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영역입니다. 이를테면 시험, 취업 등등의 문제는 인간의 영역입니다. 이 영역은 반드시 인간의 노력이 전제되어야 하되 하느님께서는 이 노력을 배로 불려주십니다.
시험 혹은 면접 때 보다 안정된 마음으로 임할 수 있는 평안함, 실수를 최대한 줄이는 등등의 은총은, 인간의 노력과 하느님의 은총이 함께 어우러질 때 큰 효과를 드러냅니다.
반면, 인간이 손 쓸 수 없는 하느님의 영역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죽음 앞에서의 존재론적 고통, 인간의 감정에서 나오는 슬픔과 좌절, 자연재해로 발생하는 사건 사고, 마음대로 되지 않는 자녀의 문제 등등이 이 영역에 위치합니다.
이는 인간의 노력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것으로 전적으로 기도와 신앙에 의지해야 합니다. 이 때에 확실하고 항구한 믿음이 있다면 하느님께서는 개인의 노력과 상관없이 우리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십니다.
오늘 복음에서의 겨자씨 한 알 만한 믿음이라도 있다면 나무가 바다에 심겨지리라는 비유는 인간의 ‘죄와 용서’에 대한 권고의 뒤에 위치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죄와 용서’가 인간의 영역에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타인이 죄짓게 하는 것에 대한 잘못을 엄하게 경고하시며 동시에 형제의 죄를 용서할 것을 권고 하십니다. 즉, 인간의 노력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흔히 원수를 미워하고 원망함으로 인해 스스로를 자책하고 고해성사를 하며 마음의 평화를 구하지만 정말로 그를 용서하고 있는지 진심으로 같은 죄를 저지르지 않을 결심을 하고 있는지 돌이켜봐야 합니다.
한편 여기에 확실한 노력과 신앙이 뒤따른다면, 무화과나무가 뽑혀서 바다에 심기듯 마음의 평화와 원수와의 화해는 분명 주어질 것입니다. 다만, 주의해야 할 것은 나무가 언제 어떻게 바다로 옮겨질지에 대해 예수님께서 자세히 말씀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즉, 기도가 이뤄지는 시간과 방식은 전적으로 하느님께 달려 있음을 의미합니다. 한 순간에 나무가 바다로 옮겨질 수 있지만, 아주 많은 시간이 지나 나무의 씨앗이 바다에 움트고, 그 씨앗을 제공한 본래의 나무는 사라지는 방법도 존재합니다.
이처럼 기도를 통한 하느님의 섭리는 인간의 방식이 아닌 하느님의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그 시간이 길어질수록 우리의 마음에는 의심이 피어나고 신앙은 희미해집니다. 이럴 때일수록 하느님의 마음을 헤아리고자 애쓰며 그 결실을 항구한 믿음으로 기다리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때로는 기도가 이뤄질 시간을 기다리느니 차라리 그 마음을 접어버리고 하느님으로부터 등을 돌리는 것이 편해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 시간을 감내하느니 고민을 뒤로 하고 하느님을 원망하는 것이 손 쉬워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정성과 시간을 쏟은 어머니의 음식이 간단하고 값싸게 먹을 수 있는 인스턴트 음식보다 훨씬 맛있고 영양가가 있음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 담긴 사랑과 정성은 결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며 다시금 우리의 신앙을 돌이켜 봐야 하겠습니다. 인간의 영역이든 하느님의 영역이든 이 두 가지에 공통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시는 하느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방식대로 기도가 이뤄지지 않더라도 그 와중에 우리를 위로해 주시는 하느님의 사랑과, 그 안에 주님의 뜻이 숨겨져 있음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에게 바오로는 다음과 같은 말로 우리의 신앙을 채찍질합니다.
“비뚤어진 생각을 하는 사람은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고, 그분의 권능을 시험하는 자들은 어리석은 자로 드러난다. 지혜는 간악한 영혼 안으로 들지 않고, 죄에 얽매인 욱신 안에 머무르지 않는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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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50대 중반을 살면서, 지금까지 주먹으로 누군가를 때려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그런데 한 번 기회가 있기는 했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한 친구와 말다툼했고, 방과 후에 학교 근처 공터에서 싸우기로 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저는 또래보다 키도 몸도 컸습니다. 그래서 그 친구는 저의 힘에 밀려 넘어져서 제 몸 아래에 깔렸지요. 이제 주먹만 뻗으면 되는데, 차마 때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시는 덤비지 마.”라고 말하고는 풀어줬습니다.
몇 년 전, 초등학교 동창 모임에서 이 친구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우연히 그때의 싸움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 친구는 그 싸움에서 자기가 일방적으로 저를 때렸다는 것입니다. 과연 누가 맞을까요? 40년도 훨씬 전의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제가 가지고 있는 기억이 잘못되었을 수도, 그 친구의 기억도 잘못될 수 있습니다.
뇌과학자의 연구를 통해, 사람들은 1년이 지나면 중요한 세부 사항을 잊어 버린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기억의 정확도가 시간이 지나면 현저하게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10년이 지나도, 20년이 지나도, “그때의 일이 어제 있었던 것처럼 정확하게 기억난다.”라고 말합니다. 사실 기억의 정확도가 떨어지면서 부정확한 기억들이 왜곡되어 뇌 깊이 새겨질 뿐이었습니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감정도 그렇습니다. 처음에는 미워할 이유가 분명했습니다. 그러나 기억의 정확도가 떨어지면서, 부정적인 마음이 새로운 기억을 만들어 채우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억은 믿을 게 못 됩니다.
새로운 기억을 어떻게 만들어야 할까요? 부정적 마음으로는 좋은 기억을 만들 수 없습니다. 긍정적 마음, 사랑의 마음으로 자기 머릿속을 채워야 비로소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좋은 기억을 간직하는 방법을 이야기하십니다. 바로 사랑의 길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향한 믿음의 길입니다. 이 길로 나아가기 위해 늘 조심해야 합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라.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
심지어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돌아와 “회개합니다.”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미움 등의 부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계속해서 불편한 마음입니다. 따라서 자기를 낮추는 겸손의 마음을 간직하면서 주님께서 그토록 강조하셨던 사랑의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이 길이 쉬울까요? 쉽지 않습니다. 그 사실을 잘 알았던 사도들은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라고 말합니다. 믿음 없이는 불가능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이라는 표현을 통해, 작은 믿음이라도 불가능한 일을 가능한 일이 되도록 하시겠다고 하십니다.
사랑의 길, 믿음의 길로 나아가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 좋은 기억으로 가득 차면서 행복에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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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행복하여라>
루카 17,1-6 (남을 죄짓게 하지 마라, 형제가 죄를 지으면 몇 번이고 용서하여라, 믿음의 힘)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그러한 일을 저지르는 자!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것보다,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내던져지는 편이 낫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라.”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 그가 너에게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합니다.’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
사도들이 주님께,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주님께서 이르셨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
<행복하여라>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그러한 짓을 저지르는 자!”(루카 17,1)
행복하여라
벗들을 믿게 하는 사람
행복하여라
벗들을 희망하게 하는 사람
행복하여라
벗들을 사랑하게 하는 사람
행복하여라
벗들을 곧게 하는 사람
행복하여라
벗들을 빛나게 하는 사람
행복하여라
벗들을 맑게 하는 사람
행복하여라
벗들을 바르게 하는 사람
행복하여라
벗들을 참되게 하는 사람
행복하여라
벗들을 곱게 하는 사람
행복하여라
벗들을 착하게 하는 사람
행복하여라
벗들을 부드럽게 하는 사람
행복하여라
벗들을 기쁘게 하는 사람
행복하여라
벗들을 깨끗하게 하는 사람
행복하여라
벗들을 아름답게 하는 사람
행복하여라
벗들을 솔직하게 하는 사람
행복하여라
벗들을 어울리게 하는 사람
행복하여라
벗들을 일어나게 하는 사람
행복하여라
벗들을 나아가게 하는 사람
행복하여라
벗들을 살맛나게 하는 사람
행복하여라
벗들을 살게 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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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용서 받았음을 기억하라>
유혹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죄의 유혹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광야에서 단식을 마치신 후 마귀로부터 유혹을 받으셨으니, 사람은 결코, 유혹에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런데 마귀의 유혹은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인간을 이용합니다. 그리고 유혹은 사람들이 자신을 그 도구로 사용되도록 허용함으로써 죄에 떨어지게 됩니다. 내가 동의함으로써 악의 상태에 머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혹이 없기를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오히려 극복할 힘과 능력, 지혜를 키워야 합니다. 유혹은 언제나 곁에 있습니다. 유혹은 나 자신의 연약함을 여실히 드러내 줍니다. 유혹을 받지 않고는 자신에 대해 완전히 알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은 용서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용서가 말 같이 쉽지 않지만, 예수님께서 모범을 보여 주셨기에 우리도 용서를 할 수 있습니다. 성 에드몬드는 “나는 비록 두 팔이 잘리고 두 눈을 빼앗기더라도 복수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주 예수님께서 자기를 못 박은 원수를 위해 기도하시고 용서하시기를 하느님 아버지께 청하지 않았습니까?”하고 말했습니다. 내가 하느님 안에 강해지고 뿌리를 내리면 그 어떤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믿음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기 때문입니다. 용서를 위해서 믿음이 필요합니다. 용서는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 아니라 꼭 해야 합니다. 화해를 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지만, 용서는 주님의 이름으로 지금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그러한 일을 저지르는 자!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것보다,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낫다.”(루카 17,2)고 말씀하셨습니다. 단호한 결단으로 유혹을 극복하라는 말씀입니다. 믿음에 따르는 단호한 결단은 유혹을 이깁니다.
가끔은 사람들로부터‘나는 그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는 말을 듣습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삶의 여정 안에서 크든 작든 알게 모르게 많은 잘못과 허물을 안고 살아왔고, 또 앞으로의 여정 안에서도 끊임없는 자비와 용서를 입어야 할 연약함을 지녔습니다. 결국 우리 자신이 용서가 필요한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할 때 비로소 타인을 용서할 수 있게 됩니다. 또한 남을 용서 하기 위해서는 내가 이미 용서를 받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아무리 잘 살려고 애를 쓰고 남에게 피해를 안 주었다고 장담한다 해도 그것이 오히려 남에게 상처를 주고 아픔을 주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잘한다는 것이 하느님 앞에서는 부끄러움일 수 있습니다.
사람이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지만 피조물인 한 연약함 속에 끊임없는 자비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용서를 시작할 뿐 용서를 완성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용서를 위한 회개를 시작하고 어떠한 상황이나 처지에서든지 앙갚음하고자 하는 유혹에서 자유롭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사랑받는 죄인입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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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대전환’을 촉구하십니다. 그것은 자신을 향하여 있는 시선을 타인에게로 향하게 하는 ‘대전환’ 입니다.
“불행하여라. 남을 죄짓게 하는 자!”(루가 17,1)
이는 단지 자신의 구원만을 바라보지 말고, 타인의 구원도 바라보라는 요청입니다. 자신의 구원만이 아니라 타인의 구원도 우리의 사명임을 말해줍니다. 나아가 타인과 세상의 구원을 위해 일하는 자에게 구원이 이루어지게 된다는 것을 깨우쳐줍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루가 17,3)
형제의 잘못에 대해서는 단죄가 아닌 ‘교정’을, 형제의 뉘우침에 대해서는 채벌이 아닌 ‘용서’를 하라는 말씀입니다. 곧 무턱대고 질책하거나 무작정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꾸짖더라도 용서하더라도 ‘사랑’으로 하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진정한 마음으로 용서할 수 있는 자만이 진정한 마음으로 꾸짖을 수 있을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아픔도 함께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아프더라도 구원의 길을 함께 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한편, 우리는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는 이 말씀을 바꾸어, 자기 자신에게 이렇게 적용해 볼 수 있습니다.
“내가 죄를 짓거든 꾸짖음을 듣고 회개하여 용서를 빌어라.”
다시 말하면, 나는 용서를 해야 할 사람이기에 앞서, 용서를 받아야 할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사실, 우리는 먼저 용서를 청해야 할 사람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타인의 잘못으로 자신이 상처를 입었다고 여기고, 자신을 용서해야 할 사람으로 여기기 쉽습니다. 그러면서도 막상 용서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용서하지 못함은 자신이 ‘먼저 용서 받은 자’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용서받은 자가 용서할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용서를 청한 적이 없으면 용서받을 줄을 깨닫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니 ‘먼저’ 용서를 청해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용서하거나 용서받는 일에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께 청합니다.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루카 17,5). 제자들은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라고 짐짓 자신들이 믿음을 가지고 있음을 말하면서 믿음을 늘려달라고 청하지만, 사실 그들은 그릇된 믿음을 가지고 있거나 믿음이 없는 줄을 모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루카 17,6)
예수님께서는 믿음의 물질적 차원에서 질적 차원으로의 ‘전환’을 촉구하십니다. 믿음을 늘려달라는 그들에게 양적인 믿음이 아닌, 질적인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곧 ‘진정한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비록 작은 믿음일지라도 “겨자 씨”같은 ‘생명이 있는 진정한 믿음’ 말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신의 구원보다 남의 구원을 먼저 찾고’, ‘용서하기에 앞서 먼저 용서를 청하며’, ‘꾸짖더라도 용서하더라도 사랑으로 하고’, ‘많은 믿음이 아니라 진정한 믿음을 가져라’ 하십니다. 바로 이것이 사랑의 길이요, 구원의 길이라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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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루카 17,5)
주님!
왜곡된 믿음을 없애시고, 순수하고 진실 된 믿음을 주소서.
오늘도 쉬이 실망과 절망에 빠지는 것은
당신께 신뢰를 두지 않고 의탁하지 못함이오니, 믿게 하소서!
오늘도 자신도 모르게 슬픔에 빠지는 것은
당신을 향하여 있지 못함이오니, 믿음을 강하게 하소서!
오늘도 제 능력으로 무언가를 이루려고 하는 것은
당신이 전능하신 주님이심을 놓치는 흔들림이오니, 믿음을 굳세게 하소서!
이제는 더 이상은 제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신 당신께 믿음을 두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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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최후의 심판>
-심판의 잣대는 구체적 사랑 실천-
옛 어른의 말씀이 좋은 도움이 됩니다.
“내 안의 고통은 억지로 막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화해해야 하는 것이다.”<다산>
죽음도 고통도 참 알 수 없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때로, 아니 자주 원인을 캐기 보다는 주님 안에서 화해함이 지혜요 겸손이요 믿음입니다.
오늘 우리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은 성 마르티노 주교의 수도생활에 있어서 각별한 인연 때문에 기념이 아닌 축일미사를 봉헌합니다. 서방 수도생활의 아버지라 일겉는 성 베네딕도 보다 거의 백년전 수도생활의 모범을 보여준 성 마르티노 주교 수도승입니다. 저녁 성무일도 후렴도 성인의 삶을 잘 요약합니다.
“복된 마르티노는 임금이신 예수를 한껏 사랑하고, 지상 권력자들을 두려워하지 않았도다.”
안으로는 수도승, 밖으로는 사목자 주교 성 마르티노였습니다. 성인의 생애도 참 파란만장합니다. 당시 유럽은 로마제국 휘하의 한나라였고 성인의 평생 체험 영역이 참 넓고 깊었습니다. 헝가리에서 태어나 이태리에서 성장과정과 15세부터 25년간 군복무기간을 지낸후 전역하는데 전투를 거부함으로 최초의 양심적 병역 거부자가 된 셈입니다.
“저는 그리스도의 병사입니다. 따라서 저는 싸울 수가 없습니다.”
제대후 프랑스에서 성 힐라리오의 제자가 되어 수도생활을 시작했고 371년 시민들의 열렬한 요청에 따라 투르의 주교로 서임되고 수도생활도 병행하면서 주교직도 충실히 수행합니다. 오늘날 프랑스의 대표적 성인인 마르티노의 투르 성당은 대표적인 순례지로 산티아고로 떠나기전 많은 이들이 들리는 곳이기도 합니다. 성인은 특히 본당 사목에 열정을 다했고 397년 81세로 선종했으니 당시로는 천수를 누린 셈입니다. 특히 성인에 관한 “성 마르티노의 외투”라는 유명한 전설적 일화를 소개합니다.
그가 군문에 있으면서 18세에 세례를 받게된 동기가 되었고 수도성소의 계기도 된 생생한 체험입니다. 어느 추운 겨울날 마르티노는 걸인을 만났고 측은한 마음에 외투 절반을 잘라 줍니다. 그날 밤, 마르티노는 꿈속에서 걸인에게 준 외투를 걸친 예수님을 만났고, 예수님께서 “마르티노는 아직 예비신자이지만 나에게 이 옷을 입혀주었다.”라고 천사들에게 하는 말을 듣습니다. 꿈에서 깨어났을 때 그의 외투는 완전히 새로 복구되었음을 보게 되었고 이어 세례를 받게 되었다는 일화입니다. 바로 이 전설적 일화에 근거한 오늘 복음의 최후심판에 관한 마태복음 25장 이야기입니다.
오늘 복음의 최후의 심판 이야기는 비유가 아니라 예언적 장엄한 서술입니다. 사람의 아들 예수님은 각자 곤궁에 처한 이들에게 자비의 선행을 베풀었는지 여부에 따라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굶주렸을 때, 목말랐을 때, 나그네였을 때, 헐벗었을 때, 병들었을 때, 감옥에 갇혔을 때, 자신을 도와 준 이들에게 구원을 약속합니다. 바로 곤궁에 처한 이들과 자신을 일치시키며 이들을 도와줌이 바로 자신을 도와준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참으로 기존 종교의 틀을 벗어나는 놀랍고 놀라운 주님의 말씀입니다. 종파를 초월하여 모든 곤궁중이 이들을 내 형제라 칭하며 이들을 도와 줌이 바로 자기를 도와 준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거룩한 전례가, 기도가, 공부가. 계명 준수가 아닌 이런 구체적 사랑의 실천이 최종 구원의 심판잣대라는 것입니다.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 하여라.
자비를 행한 이들에게 천국행을 선언하는 주님이십니다. 이런 예수님의 사랑의 잣대에 의한 심판은 오늘의 제1독서 이사야 예언의 연장선상위에 있음을 봅니다. 다음 이사야서의 말씀이 그대로 예수님의 말씀처럼 들립니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마음이 부서진 이들을 싸매어 주며,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갇힌 이들에게 석방을 선포하게 하시고, 슬퍼하는 이들을 모두 위로하게 하시고, 슬퍼하는 이들에게 재 대신 화관을, 슬픔대신 기쁨의 기름을, 맥 풀린 넋대신 축제의 옷을 주게 하셨다.”
바로 이런 주님의 사랑의 구원활동에, 해방활동에 종사한 이들에게 자비로운 구원의 심판임을 깨닫습니다. 구원은 멀리 있는게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 이 자리 주위의 곤궁중에 이들을 도와줌이 주님을 도와드리는 것이며 구원의 계기가 된다는 것입니다.
하늘 나라의 구원은 죽어서가 아니라 지금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과 함께 곤궁중에 있는 형제들과 더불어 고해인생이 아닌 기쁨의 축제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주님은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구원의 축제 옷을 입혀주시어 찬미와 감사, 기쁨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영원토록 노래하리라. 내 입으로 그 진실하심을 대대에 전하리라.”(시편 89,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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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죄가 죄를 낳지 않도록 조심!!>
오늘 복음은 죄와 용서에 관한 주님의 가르침인데 솔직히 다루고 싶지 않은 주제이고 특히 죄에 관한 얘기는 그만두고 싶습니다.
그러나 저도 싫고 여러분도 싫으시겠지만 가능하면 밝게 죄 얘기를 다뤄볼까 합니다. 저와 여러분의 행복을 위해. 아니, 더 불행해지지 않고 불행이 확대되지 않기 위해
죄를 왜 짓지 말아야 하냐면 죄가 우리를 불행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죄짓기를 그만두는 것도 행복하기 위해서지요.
그러니 죄 얘기를 우리가 그만둘 것이 아니라 죄짓기를 그만두어야 할 것이고 어쩔 수 없이 죄를 짓고 난 뒤에는 죄가 확대되지 않게 해야 합니다.
우선 죄가 내 안에서 확대되지 않게 해야 합니다. 죄가 죄를 낳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죄 때문에 나를 미워하는 죄를 짓지 않고, 죄 때문에 자포자기해 더 죄를 짓지 않고, 죄 탓을 남에게 돌리지 않는 것 등입니다.
남의 죄로 인해 또한 죄짓지 말아야 합니다. 내게 지은 죄로 그를 미워하지 않음은 물론 나와 상관없는 죄로 흥분하거나 분노하지 말 것입니다.
다음은 내 죄가 남 안에서 확대되지 않게 해야 합니다. 나로 인해 남을 죄짓지 않게 하는 것인데 이에 대해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그러한 일을 저지르는 자!”
오늘 주님은 꼬드겨서 남을 죄짓게 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꼬드기지 않았어도 곧 의도하지 않았어도 죄짓게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무심코 한 말이나 생각 없이 하는 행위가 그에게 상처가 되고 죄짓게 하는 일이 참으로 많습니다.
공인일수록 또 대통령처럼 높은 자리의 사람일수록 그런 일이 더 많고 더 많은 사람을 죄짓게 할 수 있습니다.
남을 죄짓게 하는 것이 의도하지 않았어도 그의 처지나 상태를 고려하고 배려하지 않아 죄짓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너무도 사랑하여 자녀를 너무도 잘 알고, 자녀의 기색을 늘 살피는 엄마조차도 자녀를 죄짓게 하니 공인이나 높은 이들은 그 많은 사람을 어떻게 다 고려하고 배려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주님께서는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조심하지 않으면 무심코 남을 죄짓게 하기 때문입니다. 조심하지 않고 방심하면 더욱더 남을 죄짓게 하기 때문입니다.
어쨌거나 불행을 확대 재생산하는 죄의 생리를,
죄가 죄를 낳는 죄의 생리를 알고 조심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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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루카 17,5)
<메타노이아!>
오늘 복음(루카17,1-6)은 '남을 죄짓게 하지 마라'와 '형제가 죄를 지으면 몇 번이고 용서하여라'와 '믿음의 힘'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것보다, 연자매(큰 맷돌)를 목에 걸고 바다에 내던져지는 편이 낫다."(루카17,2) 이 말씀은 미천한 이들을 무너뜨려서는 안 된다는 강한 경고의 말씀입니다.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합니다.'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루카 17,3ㄴ-4)
이 말씀은, 신앙 공동체 안에 있는 어떤 사람이 죄를 지으면 먼저 그를 꾸짖고, 그가 회개하면 용서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어떠한 죄를 지었든 회개하면 무조건 용서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참으로 어려운 말씀으로 다가옵니다. 한번 원수지간이 되면, 만남 자체가 거부되고,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용서 못한다"고 말하는 우리가 아닌가? 그리고 또한 작은 이들, 곧 미천하고 낮은 곳에 있는 이들을 업신여기는 우리가 아닌가?
남을 죄짓게 하지 않는 것과 회개하는 이들을 조건없이 용서하는 일은 결코 내가 할수 없는 일, 내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힘, 성령의 힘, 믿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루카 17,6)
예수님의 이 말씀은, 사도들이 주님께,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하고 청한 것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이며, 믿음의 힘이 얼마나 큰 지를 드러내주는 말씀입니다.
주님께 참된 믿음을 청합시다! 이 믿음의 힘으로 내가 먼저 '메타노이아(회개.마음과 생각을 바꾸는 것)'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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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루카 17, 3)
참으로
말하기
쉽지 않은
용서를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용서의
본향으로
초대하는 것은
다름 아닌
우리의
형제들입니다.
거기에는
미움이라는
돌덩이가 있고
기대라는 아픈
가시가
있습니다.
부딪히는
형제가 있기에
더 간절한
기도가
따라옵니다.
어쩔 수 없는
반목과
원망이라는
활활 타오르는
비천한
죄가 있기에
우리를 향한
주님의
꾸짖음이 있고
꾸짖음에 따르는
우리의
회개가 있습니다.
이렇듯
회개가 있기에
서로의 마음을
흔드는
용서가 따라옵니다.
용서를
반드시
기억해야 할
우리들
삶입니다.
쉽지 않은
용서이지만
우리가
돌아가야 할
집 또한
용서의
집뿐입니다.
용서를 떠나지
않으시는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과
우리의
용서가 있기에
다시
평화로이
모여살 수
있습니다.
복음은
회개와 함께
자라나는
우리의
용서입니다.
용서를 청하고
용서를 얻는
진심어린
용서의 날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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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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