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을 지나면서
부산에서 이렇게 (무)더운 여름 처음이다.
제 아무리 쎈 여름더위도 말복이 지나면 곧 꺾이는게 부산의 기후이다.
고대하던 말복이 지나고 처서도 지났지만 (무)더위는 여전했다.
우직한 소생 늘푼수 없어 44년째 살고 있는 2층 고물 집. 8m 소방도로를 사이 해서 맞은 편에 하단중학교 담장이다. 3층인 학교본관의 단층 부속건물이 담장 바로 곁에 있다. (무)더위 맹위가 여전한 처서를 전후해, 본관과 부속건물의 페인트공사가 여러 날 계속되고 있다.
오늘도 나는 반바지만 입은 비쩍마른 알몸으로 컴 앞에 앉아 자판에 손가락으로 일을 하고 있다. (창)문을 다 열고 선풍기가 돌고 있는데도 31도, 32도이다. 창밖을 보니 오늘도 긴 바지, 긴 소매의 작업자들이 (무)더위와 싸우면서 3층 벽을 타고 페인트칠을 하고 있다. 그 아래 부속건물에는 20대로 보이는 한 젊은이가, 두 건물 사이의 좁은 공간에서, 걸상높이 발판을 딛고 고개를 한껏 재껴 처마를 올려다보며 일하고 있다. 처마의 들뜬 페인트와 ‘빠다’를 자루 긴 긁게로 긁어내는데 부스러기와 먼지가 그의 맨 얼굴로 내려 앉는다. 저런 데도 마스크를 하지 않다니!
순간 고민이 팍 든다: 저 사태를 어떻게 해야 하나…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고 말아야 하나? 내 눈으로 본 이상,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고 말아야겠다고 해서 말아지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어이 젊은이 마스크를 하고 작업하게’ 하고 내가 고함을 쳐주어야 하나? 옛날 같으면 누구나 당연히 그렇게 한다. 그러나 지금의 세태는
그게 아니지 않은가: 그랬다가 혹시…
하지만, 아무리 혹시… 싶어도 어떻게 그냥 보고만 있단 말인가.
도무지 결론이 나지 않는다.
에이 하고 ‘눈 딱 감고’ 내 손가락 일을 시작했다.
그 고민이 생각에 어른거려 일에 몰입이 되지 않는다.
다시 거기를 내려다본다. 여전히 그 사태이다.
다시 고민했다. 내 일에 몰입하기 위해서라도 그 사태에 개입하기로 결심.
남방을 걸치고 밖으로 나와 그를 향해 고함쳤다: “여보게 젊은이 마스크를 하게. 그 먼지 무지하게 해로워. 독이야 독”.
젊은이는 고개를 두리번 거리다 나를 보고는 무표정하게 다시 일에 집중.
나는 또 다시 그렇게 고함을 쳤다. 이번에는 즉각 알아듣고 나를 몇 초 쳐다본다.
그렇게 처다 보니, 순간 정말 혹시나… 하는 생각이 팍 든다.
몇 초 후 그는 아무런 응답없이 다시 일에 집중한다. 그 독한 화학물 부스러기와 먼지가 그의 맨 얼굴에 계속 내려 앉는다.
도저히 볼 수가 없다. 하지만, 세태가 세태인지라 더 이상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내 할 만큼 했다 생각하고는 다시 손가락 일을 시작했다. 그러나 여전히 일에 몰입되지 않는다. … (여러가지 방안생각 중략) … 드디어 나는 일손을 딱 놓고 KF94 마스크를 꺼내 들고 대문을 열고 그에게 닦아 갔다.
“여보게, 내 말 듣게. 그 먼지 말이지, 지금 괜찮다고 괜찮은 것이 아니야. 치명적으로 해로운 독이야. 나중에 큰 고생하게 된다. 자 내 말 듣고, 이거 마스크를 하고 작업하게”.
이 말에, 그는 “아 그거 하면 더워서 일 못해요” 딱 한마디 하고는 더워 죽겠는데 귀찮다는 표정이다. 팔 소매로 땀을 한번 닦고는 다시 일을 계속한다.
더 이상 길게 말하면 ‘혹시나…’가 늘그이 학수이에게도 현실로 될까 싶어, 마스크를 담에 걸어 두고 대문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오히려 마음은 더 무겁다. 다시 대문을 열고 큰 소리로 “마스크 그거 꼭 하게”.
오후 6시경 손가락 일을 마치고 다시 거기를 내려다보았다.
허— 실망, 그 마스크가 담에 그대로 걸려있다.
어둑해 지기를 기다려 그 마스크를 베껴서 가지고 들어오면서 내 기분이 매우 씁쓸했다.
그리고 한편으로 혹시나… 하는 생각에 마음도 좀 편치 않았다.
서울에 있는 애가, 예매를 일찍 못해, 추석 당일 밤 8시 몇 분에 부산역 도착인 표를 간신히 예매했다고 한다.
그래서 부득이 밤 10시에 차례를 올리기로 하고 있었다.
추석 전 날 밤이다. 집사람이 차례에 필요한 것을 조금 보충하기 위해 가까운 수퍼에 갔다 와서 하는 말 “대문에 무슨 검은 비닐봉지가 걸려있는데 당신 좀 나가 보슈”.
순간, 어?...
그 ‘혹시나’와 관련된 안 좋은 생각이 얼핏 뇌리를 스쳤다.
가서 조심스레 보니, 흰 종이에 따로따로 싼 큰 포도 두 송이가 들어있는 것 아닌가!
그리고 반으로 접은 A4용지에 쓴 글도 있었다: “마스크 고맙습니다. 추석 잘 쇠시고 늘 건강하세요”.
첫댓글 천원짜리 마스크보다 포도가 헐썩 비쌀낀데.
강도사 땡잡았네그랴.
그 친구 마음은 더욱 풍성해졌을테니, 이것이 바로 윈윈게임이고라!
"그 친구 마음은 더욱 풍성해졌을 테니". 허허 역시 수산다운... 쌩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