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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06. 묵상글 ( 재의 예식 다음 목요일. - 선택. 등 )
호명환 신부님 글 일부, 조명연 신부님 글: 06:55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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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06. 재의 예식 다음 목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5.03.06 02:17
- 선택
저희 식당의 식단은 아주 간단합니다.
콩나물국밥, 콩나물비빔밥, 된장찌개, 비지찌개, 떡만두국, 잔치국수 여섯 가집니다.
그런데 몇 가지 아닌데도 선택의 고민을 매일같이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오시는 손님 가운데 한 십여 분은 매일 오시고
매일 똑같은 것 곧 콩나물비빔밥을 드십니다.
그것은 저희 콩나물이 직접 키운 것이라 워낙 맛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뭘 먹을까 선택을 고민하는 것이 귀찮기 때문인 것도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어떤 때 또 어떤 사람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은
선택의 자유가 없는 것이기에 불만이지만,
어떤 때 또 어떤 사람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이
곧 선택의 자유가 없는 것이 오히려 편합니다.
저도 뭘 먹을까 이런 것 때문에 고민하고 싶지는 않은 부류인데,
하찮고 귀찮다고 생각하기 때문이고 그것 때문에 고민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먹는 것에 아주 진심입니다.
뭘 먹을까 고민하는 것이 전혀 귀찮지 않고 꽤 시간을 들여 숙고한 다음
원하는 맛집을 찾아가는데 거기 가면 줄 서서 오래 기다려야 하는데도
짜증 나지 않고 그것이 즐거움이며 원하는 것을 먹고 나면 만족스럽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선택에 대해 성찰코자 합니다.
슬기롭고 성숙한 선택을 어리석고 미성숙한 선택과 비교하면서.
계속해서 먹는 것을 가지고 얘기를 이어가면
어렸을 때는 뭘 먹을지의 기준이 달콤함 곧 맛이고,
맛이 있느냐 없느냐이며 내 입맛에 맞느냐 안 맞느냐입니다.
그러나 나이 먹어 어른이 되면 그 기준이 건강입니다.
통풍이나 당뇨가 있는 사람은 건강을 생각하며
어렸을 때 즐겨 먹던 것 그러나 건강에 좋지 않은 것을 끊습니다.
그런데 더 나이를 먹고 더 슬기로운 사람은 기준이 또 달라집니다.
더 영적이고 더 고상하고 더 중요한 것이 기준인데 곧 생명입니다.
건강보다 더 중요한 기준이 생명입니다.
그게 그거 같지만 영원한 생명에 이르면 건강과 생명은 다른 거지요.
그래서 오늘 독서 신명기는 생명과 행복을 선택하라고 합니다.
“보아라, 내가 오늘 너희 앞에 생명과 행복, 죽음과 불행을 내놓는다.
너희와 너희 후손이 살려면 생명을 선택해야 한다.”
선택을 고민한다면 뭘 먹을까 고민할 것이 아니라
생명과 죽음, 행복과 불행을 놓고 고민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생명과 행복과 같이 더 중요한 것에 관해 고민하지 않고
먹는 것 같은 덜 중요한 것에 진심이고 그것을 가지고 고민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도 목숨에 대해 말씀하시며
자기 목숨을 잃어야 목숨을 얻는다고,
목숨을 얻는 방법에 관해서 말씀하십니다.
“정녕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그러므로 더 슬기롭고 더 성숙한 사람은 선택을 잘해야 할 뿐 아니라
그것을 얻는 법까지 잘 알아야 하고,
얻는 법을 잘 알 뿐 아니라 실제로 그것을 얻고 마는 사람이지요.
그런데 그것은 주님께서 주시는 목숨을 얻기 위해 자기 목숨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생명의 동아줄을 위에서 내려주시는데
우리는 그 동아줄을 잡기 위해 내가 잡은 그 줄은 놔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잡고있는 동아줄은 낡고 썩어 곧 끊어질 텐데
그걸 놓으면 죽는다고 꽉 잡고 놓지 못하는 나는 아닌지
그래서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동아줄을 놓치지는 않는지 돌아보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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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06. 재의 예식 다음 목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보편적 슬픔!
하느님의 숨
2025.03.05. 17:31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 2025년 3월 5일 수요일 (호명환 번역) 열 번째 주간: 존재들의 눈물
눈믈은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것의 깊이를 드러내 줍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부활대축일 전 40일간의 사순시기를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리처드 신부는 애도(哀悼: lamentation)가 우리 신앙의 본질적인 측면임을 소상히 설명해 줍니다:
성경에는 오직 하나의 책만이 감정을 제목으로 삼았습니다: 애가(哀歌: book of Lamentation). 예레미야는 기원전 587년에 바빌로니아 제국의 예루살렘 침략으로 사람들이 바빌로니아에서 유배의 삶을 살게 된 것에 대한 슬픔을 표현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고 전해집니다. 그러나 이 책은 인간이 겪는 보편적인 상황에 대한 슬픔, 즉 "인생의 비극적인 상황"을 묘사하는 책이라고 보는 것이 더 좋습니다. 그런데 이 책에는 일화나 명확한 예가 없다는 점이 주목할 만합니다. 다른 예언서들에서는 특정한 통치자들과 왕국들, 그리고 역사의 순간들이 언급됩니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그런 것들이 언급되지 않습니다. 이것을 보면 이 책이 전하고자 하는 바가 우리 인간의 보편적 슬픔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 책은 우리 모두를 보편적 연대로 초대합니다.
팔레스타인 시인 모삽 아부 토하(Mosab Abu Toha)는 슬픔이 가져다주는 황폐함과 평화에 대한 갈망을 표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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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잠에서 깨어나 온 종일 전기가 들어오는 곳에 있고 싶다.
나는 총소리나 드론의 윙윙거리는 소리가 아니라 새들의 노래 소리를 다시 듣고 싶다.
내 책상이 나에게 펜을 잡고 다시 글을 쓰라고 하면 좋겠다.
그게 아니더라도 적어도 소설 하나라도 읽고 시 하나를 다시 만나고 연극을 읽고 싶다.
내 주변의 모든 것은
침묵의 담벼락들뿐이고
소리 없이
흐느끼는 사람들뿐이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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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예언자들, 특히 예레미야는 이와 같은 상황에 대해 분노하기보다는 현실 그 자체에 대한 신성한 슬픔으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그래서 여기서의 언어는 "죄"에 대한 화에서 고통과 상처에 대한 연민의 언어로 바뀌지만, 여전히 구원과 해방을 기다리는 언어가 등장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내가 너에게 건강을 되돌려 주고 너의 상처를 고쳐 주리라. 주님(야훼)의 말씀이다."(예레 30,17). 현실을 마주하는 것은 변함없이 울부짖는 현실을 마주하는 것이고, 울부짖는 현실을 마주할 때 우리 내면에서는 곧 동정과 자애가 흘러나옵니다. 최후에 있을 냉혹한 심판이 흐르는 눈물과 더불어 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사라짐"의 한 예를 들자면, 우리 로마 가톨릭교회가 자살에 대한 공적인 입장을 바꾸었다는 점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전에는 자살에 대해 징벌이 강조되었다면 이제는 당사자와 가족에 대한 공감이 강조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익명의 알코올 중독자 모임'에서 중독이 악의가 있는 윤리적 결함이 아니라 "치유되어야 할 아픔"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도 예로 들고 싶다. 화는 이런 변화를 이룰 수 없지만, 눈물은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변하신 것일까요? 아니면 우리가 성숙해지신 하느님의 말씀을 제대로 들을 만큼 성숙해진 것일까요? 이전에는 감성적이거나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던 구약 성서에 나오는 자비와 연민의 구절들이 이제는 참된 현실로 이해되기 시작했습니다. - 그 성경 구절들이 늘 거기에 있었는데도 우리는 그 구절들이 얼마나 자주 등장하는지를 새삼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울면서 오리니 내가 그들을 위로하며 이끌어 주리라. 물이 있는 시냇가를 걷게 하고 넘어지지 않도록 곧은 길을 걷게 하리라."(예레 31,9). 눈물의 길을 통한 변모의 과정은 대개 숨겨져 있고 의식되지 않기에,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특징으로 받아들여집니다.
눈물이 비록 단순한 감정의 반응으로 보일지 몰라도, 저는 이 눈물에는 그 이상의 의미가 들어있다고 믿습니다: 여기에는 많은 사람이 누리지 못하는 자유로운 행위가 깊숙히 들어있습니다. 눈물은 우리가 참으로 우리 자신이라고 말하는 우리 내면 아주 깊은 곳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눈물은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것의 깊이를 드러내 줍니다.
우리 공동체 이야기
저는 제 에고의 분노로 가득 찰 때 제 내면에서 울 수 있는 공간을 찾습니다. 눈물이 나오게 되면 그 눈물이 저로 하여금 화와 노여움, 그리고 두려움을 거쳐 해방에 이르게 해 줍니다. 그런 다음 모든 것을 내려놓는 단계에 이르게 됩니다. 우리에게 마음으로부터 말하고 배울 공동체의 공간을 마련해 주신 데 대해 감사드립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Claire H.
[1] Mosab Abu Toha, “Sobbing Without Sound,” in Things You May Find Hidden in My Ear: Poems from Gaza (City Lights Books, 2022), 25. Used with permission from City Lights Books.
Adapted from Richard Rohr, The Tears of Things: Prophetic Wisdom for an Age of Outrage (Convergent, 2025), 96–98.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Noé Barnett, Untitled (detail), 2024, oil paint, Albuquerque. Click here to enlarge image. 노에 바넷(Noe Barnett)이 그린 위 그림의 이미지가 리처드 로어의 책 존재들의 눈물에 영감을 주었습니다. 특별히 엄청나게 다정다감하고 엄청난 배려심으로 눈물 한 방울을 붙들고 있는 저 손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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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영성 묵상글
끌어안음의 길 - 아름다운 길!
하느님의 숨
2025.03.06. 05:48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냥 놓아 두어라. 사실 하느님의 나라는 이런 어린이와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마르 10,14; 마태 19,14; 루카 18,16)라는 말씀은 공관 복음서들 전체에 다 같이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그만큼 이 말씀이 지니고 있는 중요성이 크다는 것이겠지요?!
그런데 어떤 옛 영어 성경 번역본에는 이 말씀의 앞 부분이 이렇게 되어 있다고 합니다. "Suffer the little children to come unto me....!"
언뜻 보면 좀 이상하지요?!! "어린이들을 나에게 오게 하기 위해 고통받게 하라..."는 말씀으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suffer라는 단어는 본래 "받아들이다." "허용하다." "놓아 두다."라는 의미를 지닌 말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이 말씀은 어린이와 같이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할 수 있다는 말씀으로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런데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들은 한결같이 우리 인생에는 고통이 있기 마련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이 말씀은 우리가 이 세상의 삶에서 마주하는 기쁨뿐 아니라 고통(아픔)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하느님 나라의 현실을 살 수 있다는 말씀 아니겠습니까?!
몇 년 전에 귀천하신 베트남의 틱낫한 스님은 자주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이 고통받는 법을 알게 되면 고통을 적게 받습니다." "고통을 끌어안으면 고통이 훨씬 더 적어집니다." 그러면서 스님은 고통을 끌어안는 것을 스님은 "삶의 가장 아름다운 예술"이라고까지 말합니다. 고통을 끌어안게 되면 참으로 사랑하고 다른 존재들에 대해 같은 마음을 품어 주는 상태(同情心)에 이르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아름다운 연꽃을 볼 때 그 연꽃이 있기 위해서는 분뇨와 같은 거름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바로 인식하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분명한 현실 아닙니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고난을 받으시고 죽임을 당하셨다가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온 세상을 다시 온전하게 만드는 길, 즉 구원과 완성의 길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말씀에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고통이나 고난 죽음이 마지막 말이 아니라 되살아남, 즉 부활과 완성, 온전함이 마지막 말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이 마지막 목표점까지 가는 데는 과정이 필요한데, 그 과정에서 우리는 이 고통이라는 것과 죽음이라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정말 중요한 것은 이 고난과 죽음이라는 과정을 겪으면서 다른 존재들의 고통과 아픔을 끌어아는 법, 즉 동정심의 예술을 배우게 되고, 자신은 물론이고 다른 존재들을 치유하는 힘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로 가는 과정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과정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거쳐야만이 당신은 물론이고 다른 모든 존재도 부활과 완성에 이른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여러 일이 한꺼번에 주어지면 대개는 먼저 "이거 큰일났네!" 하며 조바심과 걱정에 쌓이게 됩니다. 그런데 그때마다 저 스스로에게 "차근차근 하나씩!" 하고 주문하곤 합니다. 이전에는 마음을 가다듬고 그 모든 것을 받아들여 처리해가면 되는데 먼저 걱정과 조바심을 갖기 때문에 일을 더 어렵게 꼬이게 만드는 경험을 자주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을 망치는 경우도 많았고요.... 사실 이런 상황이 제 삶에는 끊임없이 있어왔고, 또 앞으로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결과는 '내' 삶은 물론이고 온 우주 생명의 책임자이신 창조주요 아버지신 하느님께 맡겨 드리고 차근차근 하나씩 하나씩 이루어가면 되는 것이지요....
이런 받아들임은 어쩌면 우리로 하여금 참된 믿음으로 가는 길이고, 또 참된 희망으로 가는 길이며, 궁극적으로는 참된 사랑, 즉 모든 존재에 대해 같은 마음(同情)에 다다르는 길인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당신의 십자가"를 지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우리 자신의 십자가, 즉 제 십자가"를 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여기서도 아주 중요하고 핵심적인 말씀이 바로 이어진다는 것을 우리는 절대 간과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다음 말씀은 바로 "나를 따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한 편으로는 "해야 하는 무엇", 즉 의무로 이해될 수도 있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당신이 이끌어 줄 것이니 나를 믿고 내 손을 잡고 힘을 내어 따르라"는 말씀으로도 이해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에고의 목숨을 잃고 참 자아의 목숨을 얻는 길일 것입니다.
"아름답다"라는 순 우리말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아는 것'과 관련이 있다고 합니다. 본래 "아름"이라는 단어는 "나"라는 의미를 지닌 말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참으로 '나다운' 사람이 아름다운 사람이라는 말이겠지요?!
둘째는 '앓음'과 관련이 있다고 합니다. 인생의 단맛과 쓴맛을 다 경험하고 받아들여 삶을 알게 될 때, 진정한 자아에 이르게 되는 것이 '아름다운 것'이라는 말이고, 이런 사람이 되는 것이 참으로 아름다운 사람이 되는 것이지, 다른 사람들의 아름다움을 따라하는 것이 아름다운 사람이 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셋째는 '안는 것', '끌어안는 것'과 관련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영어 suffer의 옛 의미와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 셈입니다. 우리 삶의 모든 것을 끌어안을 때 그 안에 있는 고통도 끌어안아야 하겠지만, 이 고통을 상쇄하고도 남을 엄청난 하느님의 사랑과 치유의 힘도 끌어안게 된다는 것입니다.
쉽지 않지요?!
하지만 이 길만이 참된 삶의 길이라니 우리에게 주어지는 십자가를 아픔이나 고통으로 보고 회피하거나 거부하지 말고 참된 사랑(모두를 치유하는 동정심)과 참된 삶을 배우게 하고, 궁극에서는 온전함, 즉 하느님과의 일치에 이르게 하는 길임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끌어안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 시시각각 우리 앞에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일끌어가시는 주님의 손을 꼭 잡고 앞으로 나아가야 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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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06. 재의 예식 다음 목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25.03.06 06:31
인생에서 원하는 것이 있다면 이를 얻기 위한 노력은 필수입니다. 바다에서 물고기를 원한다면 그물이나 낚싯대로 잡아야 합니다. 공부를 잘하고 싶으면 공부해야 하고, 성공하고 싶다면 그에 걸맞게 노력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노력이 고되고 힘들기만 할까요? 그 과정에서 얻는 행복의 크기는 절대로 작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저를 두고 강의 잘하는 신부라고, 강론 잘하는 신부라고 치켜세우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아직 미완성입니다. 미완성이라는 생각이 지금보다 더 나아지게 합니다. 그래서 기도와 묵상을 소홀히 하지 않게 되고, 매일 책을 읽고 또 매일 글을 쓰게 됩니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아직도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과정이 행복합니다. 조금씩 나아지는 저 자신을 보면서, 그 과정에서 얻게 되는 경험도 행복의 한 부분이 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원하는 것이 참 많습니다. 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십니까? 아무 노력도 하지 않고 저절로 되기를 바라는 도둑놈 심보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 노력 역시 행복의 일부분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노력하는 사람이 행복에 가까이에 있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하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병에 걸렸는데, 3년 묵힌 쑥을 먹으면 낫는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전국을 돌아다니다가 드디어 3년 묵힌 쑥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그 찾은 시간이 7년 뒤였습니다. 애초에 쑥을 묵혀놨다면 3년이면 원하는 쑥을 얻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생각 없이 목적하는 바만 쫓다 보니 7년을 소비한 것입니다. 어리석음을 쫓는 우리가 아닌 지혜로움을 쫓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을 지향합니다. 그러나 그 어떤 노력도 하지 않고 당연하게 얻을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요? 나의 노력에 고통과 시련도 분명히 따라옵니다. 이를 무조건 피해야 할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 과정 역시 행복으로 나아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예고하시지요. 하느님이신 예수님도 고통과 시련이라는 과정을 겪으신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하지만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습니다. 분명 사흘만에 되살아나는 부활의 영광이 따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 말씀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이 모습이 참으로 지혜로운 신앙인이 갖춰야 할 덕목입니다. 우리가 얻어야 할 영원한 생명이 확실히 보장되는 길입니다.
오늘의 명언: 누군가를 미워하고 있다면, 그 사람의 모습 속에 보이는 자신의 일부분을 미워하는 것이다(헤르만 헤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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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06. 재의 예식 다음 목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재의 수요일’ 후 첫 번째 날의 <복음>은 예수님께서 첫 번째 수난을 예고하시는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루카 9,20)라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에 이어,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이 땅에 오신 사명, 곧 ‘인류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 죽음을 당하실 것을 제자들에게 밝히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었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루카 9,22)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는 “반드시” 일어날 일 세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반드시”(이백주년 성서; “마땅히”)라는 단어는 이 모든 것이 필연성이나 당위성에 의해 다가오는 것임을 말해줍니다. 그것은 “많은 고난을 겪는” 일이요, “배척을 받아 죽는” 일이요, “죽었다가 되살아나는” 일입니다. 이 세 가지는 모두 수동형으로 표현되어 하느님의 권능이 개입할 것임을 시사해줍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
당신을 따르는 길은 누구에게나 개방되어 있지만, 세 가지를 요구하십니다. 곧 자기 “자신을 버려야” 한다는 것과 “제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것과 이를 “날마다” 지속적으로 지는 일입니다.
오늘은 두 번째의 ‘제 십자가 지고’에 대해서만 보고자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십자가”란 대체 무엇을 의미할까요? 곧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떠올리는 ‘신약의 십자가’ 이전에 있었던 ‘십자가’. 곧 ‘구약의 십자가’란 대체 무엇을 말할까요?
구약에서 ‘십자가’(타브)는 ‘계약의 표’로서 소유, 선택을 나타내는 동시에, ‘구원의 표’로 주어졌으며(에제 9,4.6.), 주님을 따르는 ‘하느님의 종’과 주님을 섬기는 ‘제사장’에게 새겨졌습니다. 그리고 <레위기>(25,55)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나의 종들’이라 칭하며, <탈출기>(19,6)에서는 그들을 ‘제사장의 나라’로 삼으셨습니다. 그러니 ‘십자가’는 하느님의 종으로서, 또 하느님의 제사장으로서 ‘계약’을 ‘구원의 표시’로 지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계약”을 지키는 것이며, 하느님의 소유로 선택되어 거룩한 백성의 삶을 지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 ‘당신을 따르는 이’는 ‘계약’을 짊어지고 ‘구원’의 길을 가는 것이 됩니다. 곧 생명의 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루카 9,24)
이러한 결단은 <제1독서>에서 생명의 길로 이렇게 제시됩니다.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을 들으며 그분께 매달려야 한다.”(신명 30,20)
오늘, 우리도 예수님을 사랑하여, 사랑으로 그분께 매달려 있고, 생명의 길을 가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으시고~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셨다가~”(루카 9,22)
주님!
배척을 받는 고통을 받을 줄 알게 하소서.
사랑하는 이로부터도 배척받을 줄을 알게 하소서.
몰이해와 곡해, 오해를 받아 견딜 줄 알게 하소서.
마침내는 죽임을 당하는 일까지도 받아들일 줄을 알게 하소서.
순명으로, 아버지의 뜻에 따라 가야하는 길이기에
사랑으로, 흔연히 배척받을 줄 알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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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06. 재의 예식 다음 목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오늘은 ‘죄와 벌’이라는 주제로 함께 생각해 보려 합니다. 이 주제는 성경에서도 깊이 다루고 있지만,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죄와 벌』을 통해서도 우리에게 중요한 깨달음을 줍니다. 먼저, 죄란 무엇일까요? 성경에서는 죄를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 그리고 인간을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행위라고 가르칩니다. 창세기에서 아담과 하와는 뱀의 유혹을 받고 선악과를 따먹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어긴 순간, 두려움과 수치심 속에 숨어버립니다. 바로 이것이 죄의 본질입니다. 죄는 우리를 하느님 앞에서 떳떳하지 못하게 만들고, 우리 안에 불안을 심어 놓습니다.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에서도 죄의 본질과 그 결과가 잘 드러납니다. 주인공 라스콜니코프는 가난한 노파를 살해합니다. 그는 자신이 ‘위대한 인간’이라면 법을 초월할 수 있다고 믿었지만, 살인을 저지른 후 극심한 죄책감에 시달립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그를 가장 괴롭힌 것이 법적 처벌이 아니라 양심의 가책과 내면의 고통이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도 죄의 대가는 죽음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죽음보다 더 무서운 것은 죄가 우리의 영혼을 병들게 하고, 우리를 절망에 빠뜨린다는 사실입니다. 라스콜니코프는 끝내 자신의 죄를 숨기고 싶어 하지만, 신앙심이 깊은 소냐를 만나면서 변화하기 시작합니다. 소냐는 그에게 십자가를 건네며 이렇게 말합니다. “무릎을 꿇고, 하느님께 회개하세요. 그러면 구원받을 것입니다.”
이 장면은 우리에게 익숙한 성경 이야기를 떠올리게 합니다. 바로 요한복음 8장에 등장하는 간음한 여인의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은 그녀를 돌로 치려고 했지만, 예수님께서는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을 던져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결국 아무도 돌을 던지지 못하고 떠나갑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여인에게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라고 말씀하시죠.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진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죄를 미워하시지만, 죄인에게는 언제나 새로운 기회를 주십니다. 죄를 지은 사람이라도 진정으로 회개하면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이 절대로 쉽지는 않습니다. 라스콜니코프 역시 쉽게 자백하지 못했고, 계속해서 자기 합리화를 하며 방황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는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법적 처벌을 받으며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됩니다.
우리도 때때로 라스콜니코프처럼 죄를 짓고, 후회하고, 숨고 싶어질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죄에서 벗어나기 위해 진정한 회개와 변화가 필요하다는 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청하며, 새로운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혹시 여러분의 마음속에 해결되지 않은 죄책감이 있지는 않은가요? 혹시 하느님 앞에서 숨고 싶었던 순간이 있지는 않으신지요? 그렇다면 이제는 무릎을 꿇고, 하느님께 나아가야 할 때입니다. 우리가 회개할 때,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따뜻하게 맞아주십니다. 죄는 우리를 짓누르지만,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는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우십니다. 우리가 다시금 하느님께로 돌아갈 때, 진정한 평화와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모두 회개의 길로 나아가고, 하느님의 자비 안에서 새롭게 태어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보아라, 내가 오늘 너희 앞에 생명과 행복, 죽음과 불행을 내놓는다.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주 너희 하느님의 계명을 듣고,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며 그분의 길을 따라 걷고, 그분의 계명과 규정과 법규들을 지키면, 너희가 살고 번성할 것이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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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06. 재의 예식 다음 목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자신의 고난에 관해 말씀하십니다. 특히 메시아의 사명은 고난과 죽임을 당해야 하는 것이고 부활로 이어지는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목적지를 가야 할 때 꼭 거쳐야 하는 길이 있습니다. 꼭 거쳐야 하는 과정이 있습니다.
군인이 되려면 군인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위해 수많은 훈련 시간을 보내야 합니다.
선생님이 되려면 선생님의 면모를 갖추기 위해 수많은 시간을 교습과 교육, 그리고 자신의 학습에 공을 들여야 합니다.
여타의 다른 자격증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격증에 맞는 공부를 해야 하고 시험을 봐야 하고 필요하다면 실기 시험도 봐야 합니다. 이것을 모두 통과 했을 때 우리가 원하는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시기는 그리 달갑지 않습니다. 어쩌면 고되고 힘든 시간일 것입니다. 그러나 목표가 있기에, 가야 하는 목적지가 있기에 이런 고난을 우리는 인내로써 받아들입니다.
제자들은 아직 주님의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을 것입니다. 구세주, 메시아는 하느님의 영광중에 오시는 분이고, 왕이 되어 영화에서처럼 모든 적을 무찌르며 민족을 구해내는 사람으로 여겼을 것입니다.
주님의 기적을 보며 제자들은 영광의 왕, 빛나는 왕을 보았을 것입니다. 고난과 고통과 죽음의 어둠은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사순시기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영광을 압니다. 하지만 기억하세요. 영광으로 걸어가는 길은 고난과 고통이 동반된 다는 것을.
주님의 고난에 참여할 때 우리는 그분을 진정으로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하늘나라의 왕인 주님을 말입니다.
⭐빌런 줄이기
긍정적인 생각을 많이 하는 것과
부정적인 생각을 덜 하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할까요?
의외로 연구 결과는 명확합니다.
부정적인 생각을 덜 하는 것이 더 성과가 크다는 것입니다.
부정적 사고는 머릿속에 있는 빌런(악당)의 목소리와 같아서 우리들의 동기를 저하하고, 가능성을 깎아내리고, 의심을 불러일으킨다고 합니다.
긍정성을 유지하면서도 내 머릿속 악당을 줄여나갈 때 더욱 의미 있는 삶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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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06. 재의 예식 다음 목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행복은 선택
“오늘 늘 새로운 시작입니다”
“행복하여라,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시편40,5ㄱ)
삶은 선택입니다. 행복도 선택입니다.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입니다. 날마다 행복을 선택하여 훈련함으로 행복을 습관화하는 것입니다. 바로 수도생활이 그러합니다. 날마다 행복이신 주님을 선택하여 훈련하고 습관화해 살도록 일과표가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하루하루가 좋은 날의 선택입니다. 날마다 설레는 기쁨으로 시작할 수 있는 오늘 하루였으면 참 좋겠습니다. 예전에 써놓고 좋아하며 나눴던 ‘모든 날이 다 좋다’라는 시가 생각납니다.
“햇빛
밝은 날은
햇빛 밝은 날대로
비오는
날은
비오는 날대로
흐린
날은
흐린 날대로
모든 날이
다 좋다
주님 늘 함께 계시기에”<2023.10.21.>
오늘 옛 현자도 공부중 사람을, 사랑을 먼저 선택해야 함을 가르쳐 줍니다.
“공부는 사람을 깨닫고 사람을 사랑하는 과정이다. 그 시작은 나를 알고 나를 사랑하는 것이다.”<다산>
“번지가 인仁에 대해 묻자 공자가 답했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지知에 대해 묻자 공자가 답했다. ‘사람을 아는 것이다.’”<논어>
어려운 선택이 아닙니다. 사람을, 사랑을 선택하는 공부가 우선이라는 것입니다.
12.3계엄 국회측 장순옥 변호사의 최후 변론에서 감동적인 말마디가 생각납니다.
“이 세상 풍경중에서 제일 아름다운 풍경은 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풍경입니다. 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가고 우리도 빨리 평온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2025.2.25>
제자리를 선택하여 제몫을 다하며 제정신으로 제대로 살 때 참 아름다운 삶이겠습니다.
어제 저의 참 좋은 선택도 잊지 못합니다. 어느 수녀님으로부터 맨먼저 피는 파스카의 봄꽃 영춘화를 선물 받고 즉시 ‘마리아의 집’ 뜨락을 찾았고 연약해 보이는 노란 영춘화를 사진에 담아 복음의 축복을 전하는 마음으로 참 많은 분들에게 많은 시간 할애하여 다음 문자 메시지와 더불어 전송했습니다.
“사순절 재의 수요일 영춘화 봄소식 축복 선물 받으시고 행복하세요. 사랑하는 형제님”
이런 답글도 받았습니다.
“눈 속에서도 봄의 희망을 제일 먼저 알려주는 저 꽃이 참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죽음과 같은 겨울을 통과하여 피어난 생명의 봄꽃, 봄의 전령사 ‘영춘화迎春化’ 꽃이름 그대로 ‘파스카의 봄꽃’입니다. 영춘화의 꽃말은 희망, 사모하는 마음, 새해의 첫 출발입니다. 오늘 제1독서 모세를 통한 주님의 말씀이 참 우렁차게 들립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우리에게 참 좋은 선택을 촉구하는 말씀처럼 들려 많은 부분 그대로 인용합니다.
“보아라, 내가 오늘 너희 앞에 생명과 행복, 죽음과 불행을 내놓는다.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주 너희 하느님의 계명을 듣고,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며 그분의 길을 따라 걷고, 그분의 계명과 규정과 법규들을 지키면, 너희가 살고 번성할 것이다.”
“나는 오늘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세우고, 생명과 죽음, 축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내놓았다. 너희와 너희 후손이 살려면 생명을 선택해야 한다. 또한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을 들으며 그분께 매달려야 한다. 주님은 너희의 생명이시다.”
시공을 초월하여 영원한 현재의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자라면 날마다 오늘 우리의 행복이자 생명이신 주 우리 하느님을 사랑하여 선택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우리 주 예수님은 수난과 부활을 처음으로 예고하신후 이어 모세처럼 생명의 길, 행복의 길, 구원의 길을 선택할 것을 촉구하십니다. 모세의 생명과 축복의 선택이 복음에서 구체화됩니다. 예외없이 누구나에게 활짝 열려 있는 생명과 행복, 구원의 선택입니다. 단숨에 읽히는 전문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를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자발적 사랑으로 자유로운 주님의 선택이요, 삶의 목표, 삶의 방향, 삶의 중심, 삶의 의미이신 예수님을 따름으로 구체화되는 선택입니다. 하루이틀 따름이 아니라 살아 있는 그날까지 하루하루 날마다 평생입니다. 주님 사랑에 나를 버리고 비우고 날마다 내 고유의 책임의 십자가를, 운명의 십자가를 지고 세상 마치는 그날 까지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얻은 것은 부귀영화에 권력의 공허한 삶이요, 잃은 것은 찬미와 감사, 평화와 기쁨, 신망애信望愛와 진선미眞善美의 참된 생명과 행복의 존엄한 품위의 삶이라면 그 인생은 하느님은 물론 믿는 우리가 보기에도 무조건 실패일 것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생명과 행복의 주님을 선택하여 잘 따를 수 있도록 결정적 힘을 주십니다. 끝으로 늘 인용해도 늘 새로운 제 좌우명 고백기도로 강론을 마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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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06. 재의 예식 다음 목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십자가>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루카 9,22)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
누군가는
살기 위해
죽이는
십자가를
지우고
누군가는
살리기 위해
죽는
십자가를
진다
십자가를
지우는 이
죽임으로써
지금여기 살되
마침내 죽고
십자가를
지는 이
살림으로써
지금여기 죽되
마침내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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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06. 재의 예식 다음 목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
큰 장애물인 습관
우리는 자기를 버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고 그분을 따라야 합니다. 자기를 버린다는 것은 과거를 모두 잊고, 자신의 의지를 완전히 내맡기는 것을 뜻합니다. 난집하기 일쑤인 세상에 살면서 철저하게 순종하기란 불가능한 일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게다가 세속 풍습에 물든 삶이 요구하는 사회적 교류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데 큰 장애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죽을 준비를 갖춤, 이 땅에서의 육신의 금욕,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겪게 될 위험을 기꺼이 감수함, 이승의 삶에 초연함, 이런 것이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사람의 자세입니다. 우리는 세속의 생활 습관에서 비롯하는 장해가 가장 큰 방해물이라 여깁니다.
-대 바실리우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16
의지를 버려라
모세는 그의 하느님 야훼께 애원했다(탈출 32,11).
본 설교에서 인용한 탈출기 32장 1-35절은 악의 문제를 다룬 본문이다. 아론은 모세에게 “이 백성이 얼마나 악에 젖어 있는지 당신도 잘 알지 않는가?”(22절) 하고 말한다.
따라서 엑카르트가 이런 맥락에서 하느님의 진노와 인간 고통의 의미를 말한 것은 성서적인 관점에서 볼 때 타당하다고 하겠다. 하지만 엑카르트의 주의를 가장 많이 사로잡은 것은 악이 아니라 어떻게 악한 사람을 선한 사람으로, 고통을 기쁨으로, 죄를 복으로 되돌려 놓을 것인가였다. “내가 너를 들어 올려 크게 하겠고. 너의 후손을 번성하게 할 것이며, 너로 하여금 큰 민족을 다스리게 하겠다." 엑카르트는 어떻게 큰 민족이 될 것인가에 주의를 돌린다. 엑카르트는 자유의지의 본성이라든가 인간의 의지가 자유로운지 그렇지 않은지를 다루는 추상적인 설교를 하지 않는다.
그는 의지를 건져 내고 자유롭게 하는 일, 의지가 복을 주고 다시 복을 받을 수 있게 하는 일에 관심을 기울인다. 의지를 자유롭게 하려면 의지를 버려야만 한다.
하느님도 우리의 행복을 바라고, 우리도 우리의 행복을 바라건만. 어찌하여 우리는 더 행복하지 못한가? 그토록 고통과 이픔이 많다는 말인가? 엑카르트라면 우리가 우리의 의지를 철저히 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우리의 불안한 걱정은, 우리가 주의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아집에서 비롯된다." (우리의) 의지를 버려야 한다고 말하는 대목에서, 엑카르트는 고통도 버려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너무나 자주 우리의 고통에 매달리고 집착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344)
✝️ 목요일 성모님의 날✝️
<파티마의 성모 마리아와 목동 / 세 바르따스>
제 5 장 두 천사 세상을 떠나다
성체의 예수님과 함께 희생이 되다
마지막 날의 사연들
그리고 이번에 성모님이 너무 슬픈 모습이셨다는 것과 그 원인을 설명했다. 성모님의 말씀은 다음과 같다.
“영혼들을 가장 많이 멸망의 구렁으로 이끄는 큰 죄는 육욕이다. 사음의 죄를 끊고 그에 연관된 짓을 없애지 않으면 안 된다. 지금까지처럼 그런 죄에 집착해서는 안 되고 보속을 많이 하지 않으면 안 된다."
히야친따는 성모념의 말씀을 전하면서 탄식하며 말했다.
“아아, 나는 성모님을 생각할 때 슬퍼요. 정말 슬퍼서 못 견디겠어요."
원장이나 간호원이 소녀의 방에 와서 성모님을 뵈옵던 자리에 서거나 앉으려 하면,
“거긴 안 돼요. 성모님께서 계셨던 곳입니다."
하고 부드러운 항의를 했다.
소녀의 임종도 가까와진 듯해서 어머니를 만나고 싶지 않느냐고 묻자,
“우리집 식구들은 머지 않아 모두 천국에서 만날 거예요."
하고 대답했다.
성모님의 마지막 방문을 받고 3일 후 히야친따는 이제 이 세상을 하직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오빠 프란치스꼬처럼 성사받기를 원했다. 금요일 오후 6시였다.
여덟 시쯤 성 천사 성당 주임 사제 페레이라 도스 레이스 신부가 고백성사를 주었다. 소녀는 곧 죽을테니 병자 영성체를 간청했으나 페레이라 신부는 병자가 그다지 위독해 보이지 않아서 다음날 아침까지 기다릴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날 밤 10시 반 히야친따는 숨을 거두었다. 1920년 2월 20일이었다.(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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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06. 재의 예식 다음 목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천국문의 패스워드는 자신이 진 십자가에 있을 겁니다.
강만연 [fisherpeter] 250306. 02:52 ㅣNo.180523
오늘 복음은 너무나도 잘 아는 내용의 복음입니다. 너무나도 단순한 명제처럼 보이는 말씀이지만 이 말씀 속에 숨어 있는 보화는 끊임없이 샘솟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또한 제자입니다. 예수님은 스승님이신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스승이라는 말은 선생이라는 말의 어원이 같은 맥락에서 연유한 것입니다. 선생이라는 말은 액면적인 뜻만을 언급할 때는 먼저 살았다는 뜻과 함께 또한 먼저 경험했기 때문에 뭔가를 가를치고 지도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진 사람을 말할 때도 사용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먼저 살았다고 해서 누구나 다 그런 자질을 가진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런 파워가 있기 때문에 그런 분 앞에서는 존경과 경의를 표하며 예를 다해서 존경을 하는 것입니다. 제자가 된다는 것은 단순히 어떤 스승 밑에서 수학만 했다고 해서 제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진정한 의미의 제자는 스승의 가르침을 받고 그 가르침대로 행동을 하고 그렇게 살아야 진정한 제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르침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지식도 있을 수 있고 지혜도 있을 수 있습니다. 지식은 많은 사람들이 수긍을 할 수 있는데 지혜는 조금 수긍이 되지 않을 수 있을 겁니다. 왜냐하면 지혜라는 것은 뭔가 가르쳐서 생기는 게 아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맞는 말이긴 하지만 완전히 맞는 말은 아닙니다. 사실 지혜의 원천은 지식이 기반 된 상태에서는 더 잘 나오는 법이기 때문에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 것도 좋은 제자가 될 수 있는 덕목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지식과 지혜 둘 중 어느 하나를 선호하신다고 한다면 어떤 것을 더 선호하셨을까요? 지혜를 더 선호하셨을 것입니다.
왜 이런 추론을 할 수 있는가 하면 예수님은 그 당대 사람들의 수준에서 하느님의 나라와 또 하늘나라의 법치를 알려주시는 게 단순히 오늘날 학교에서 지식을 전해주는 그런 모습으로는 잘 전달될 수 없었기 때문에 누구나 알 수 있는 자연현상이라든지 아니면 살아가는 주위 환경을 통해 그 속에 하느님 나라의 비밀을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 비유 속에는 어떤 것은 분명하게 구체적으로 그 모습을 유추할 수 있는 것도 있지만 오늘 복음에 나오는 말씀은 일반적인 비유가 아닌 다른 비유입니다. 이 비유의 상관관계는 바로 십자가와 천국이라는 두 대상이 비유의 대상입니다. 비유의 화법을 든 것은 아니지만 분명한 비유입니다. 이제 그게 왜 비유이고 이게 비유라면 어떤 의미가 숨어 있는가 하는 것을 묵상해보겠습니다.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사람이 되려면 먼저 자신을 버리고 그 다음은 제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이 두 행위는 동시동작일 수도 있을 수 있고 아니면 선후관계일 수도 있습니다. 전체적인 의미를 본다면 선후관계가 좀 더 합리적일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하면 십자가를 진다고 해도 자신을 버리지 않으면 별 의미가 없는 것이 됩니다. 또한 자신을 버린다고 해도 십자가를 지지 않으면 그 또한 의미가 없게 될 것입니다. 사실 두 가지 다 모두 쉽지 않은 것입니다. 아마 많은 사람들은 둘 중 어떤 게 더 어려워할 것 같은가 하고 질문을 한다면 대개 후자가 될 것입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라는 것은 피할 수만 있으면 피하고 싶은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다른 글에서도 언급을 한 적이 있습니다만 굿뉴스에 올라오는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이 예전에 고성 수도원에 계셨을 때 제가 영세 받고 아마 1년인가 2년 후쯤 언젠가 면담을 수도원 정원에 있는 방갈로에서 했는데 그때 신부님께서 지나가시는 말씀으로 십자가를 언급하셨는데 십자가의 원어의 의미는 품는 것이라고 설명하셨습니다. 어느 날 저는 원문은 모르지만 영어 성경을 보니 이해가 됐습니다. 영어에서는 받아들인다는 의미로 사용이 됐기 때문입니다.
이것만 놓고 봤을 때 그럼 십자가를 진다는 의미를 원론적인 의미로만 한정을 해서 보면 십자가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받아들인다의 의미와 진다의 의미는 사실 의미에 있어서 큰 차이가 있습니다. 마치 받아들인다는 것은 순명과 같은 것입니다. 진다는 것은 하긴 하는데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복종과 같은 의미입니다. 실제 마음은 하고 싶지는 않은데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해야 하는 그런 상황에 놓여 있을 때 취하는 행동이라고 보면 아마 적절한 비유가 될 것입니다. 지금까지 수많은 십자가에 대한 묵상을 해봤지만 오늘은 좀 다른 묵상을 하고 싶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골치 아프고 피하고 싶은 그 십자가가 만약 우리가 시간의 좌표를 순간이동을 해 지금 천국에 있다고 가정을 한번 해보겠습니다.
그럼 지금 있는 곳은 천국입니다. 천국에서 다시 지상의 시간으로 백해서 되돌아 봤을 때 지상에서 있을 땐 몰랐는데 천국에서 봤을 때 그 십자가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십자가가 아니고 그 십자가 속에 천국문의 비밀번호가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이 십자가를 소유하고 싶을까요? 아니면 소유하고 싶지 않을까요? 댱연히 소유하고 싶을 것입니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그럴 겁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천국문 앞에 가도 천국문을 열 패스워드를 모른다면 천국문 앞에 있어도 천국은 머나먼 나라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천국을 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서든지 패스워드를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근데 중요한 것은 하느님은 자기만의 천국 비밀번호를 자기가 지어야 할 십자가 속에 숨겨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비밀번호는 누구도 대신 해서 알아줄 수 있는 게 아닌 것입니다. 근데 또 중요한 것은 여기서도 하느님께서 자신이 지는 어떤 불특정 십자가 속에 새겨 놓으셨는가 하면 그렇지도 않으신 것입니다. 그나마 새겨놓으셨다면 그 번호를 어떻게 십자가를 지고는 싶지는 않지만 비밀번호를 알 욕심으로라도 순간은 어떻게 참고 지어보려고도 할 것입니다. 근데 하느님은 그렇게는 하시지 않으셨을 겁니다. 이 세상에서 자기가 지어야 할 십자가가 이미 우리가 이 세상에 오기 전에 다 배정을 해 놓으셨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배당된 그 십자가를 지려고 할 때 그때 하느님께서 하느님 나라의 패스워드가 하나의 퍼즐이 맞춰지는 것처럼 알 수 있게 하시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삶을 이렇게 비유를 한다면 어떨까요? 바로 우리는 이 세상을 사는 동안 마치 천국문의 패스워드를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자기가 알아야 하는 숙제를 우리 각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주신 것이라는 묵상을 해보면 마치 그럴 것 같다는 묵상을 해보게 됩니다. 이 비밀번호는 이미 하느님께서 누구도 대신할 수 없도록 배타적인 권리로 설정을 해놓으셨기 때문에 그 비밀번호를 어떻게 스스로 알아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젠 선택을 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배정해 주신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그 비밀번호를 해독해 천국을 입성하느냐 아니면 지는 게 힘들어서 그냥 지지 않고 천국을 가는 걸 포기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하느님은 전혀 답답하시지 않으실 것입니다. 사람을 창조하시고 자유의지를 주신 것처럼 이 선택에도 우리의 자유의지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은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의 의미를 잘 알 수 없기 때문에 그 십자가를 사랑할 수 없고 피하고 싶은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실제는 십자가는 고통이 아니겠지만 설령 그게 고통이라고 한다고 해도 그 십자가를 그렇다면 왜 하느님께서 고통이라는 걸로 우리를 힘들게 하시려고 그렇게 하셨을까를 묵상해본다면 그건 절대 그럴 리가 없다는 걸 알 수 있을 겁니다.
만약 그렇다면 이미 그 하느님은 하느님이 아니실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은 잘 이해를 할 수 없다고는 하지만 모르긴 몰라도 그 십자가 속에 하느님만의 사랑법이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그렇다면 십자가는 마냥 나쁜 것처럼 생각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를 것입니다. 왜 그냥 쉽게 알려주시면 좋을 텐데 하고 말입니다. 그건 아마도 그럴 겁니다. 세상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쉽게 얻어진 것은 쉽게 나가는 법이듯이 쉽게 천국을 간다고 한다면 그렇게 해서 간 천국이 진정한 천국의 가치를 발휘할 수 있을까를 묵상해보면 답은 나오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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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의 수요일
강만연 [fisherpeter] 250305. 04:31 ㅣNo.180508
오늘은 재의 수요일입니다. 전례력으로 사순이 시작되는 시기입니다. 재의 수요일은 어느 정도 신앙생활을 한 사람은 이날 하는 특별한 예식이 무엇인지 그리고 또 어떻게 하는지 다 알고 있습니다. 머리에 재를 얹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때 이 재의 의미는 다 잘 알고 있습니다. 죽음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죽음을 상징한다고 할 때 단순히 죽음만을 의미할까요?
이 죽음은 생명이 단절되는 죽음을 말하는 것일까요? 물론 이 죽음도 맞지만 단순히 이 죽음만을 본다면 참으로 슬픈 죽음이 될 것입니다. 슬픈 죽음이라고 표현을 했는데 이 슬픔은 슬픔 그 자체만을 놓고 봤을 땐 슬픔이겠지만 이 슬픔 너머에 있는 다른 숨어 있는 의미를 보는 사람에게는 그 죽음이 또 다른 탄생이 될 수 있습니다. 이걸 탄생이라는 개념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딱 한 부류의 사람만 이렇게 생각합니다. 바로 부활 신앙을 가진 사람만이 가진 생각입니다. 죽음이라는 것은 솔직히 아무리 부활신앙을 가지고 있고 또 신앙생활을 하는 신앙인이라고 한다고 해도 두려운 존재라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이 자체를 부인하겠다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 이건 그 사람의 신앙을 무시해서 그런 게 아니고 죽음이라는 것은 죽음 이후의 사건을 직접 경험해서 알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죽음이 두려운 것입니다. 그렇다고 마냥 죽음이 두려운 존재인 것만은 아닙니다.
누군가는 말합니다. 이 세상에 죽음만큼 공평한 게 없다고 말합니다. 부유한 사람이라고 해서 더 많은 생명을 누릴 수 있느냐 하면 그런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죽음을 맞이한다는 그 결과만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피할 수 없는 죽음이라면 이 죽음을 어떻게 대처하고 또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그게 더 중요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활과 영혼의 세계를 믿지 않는 사람이라면 모를까 그렇지 않으면 이 죽음을 잘 준비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죽음을 준비한다고 해서 죽음 그 자체에 매몰돼 죽음을 준비하는 것은 좋지 못한 태도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 말을 잘못 해석하면 사순시기에는 죽음을 묵상하는 시기인데 하고 이렇게 반문을 한다면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것과는 조금은 다른 개념입니다.
지엽적으로 생각을 한다면 우리가 사순시기에 죽음을 생각하자고 하는 의도는 이 시간만이라도 한번 죽음을 생각하며 남은 삶도 생각하면서 지나간 삶도 반성과 성찰의 시간을 가지자는 의미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만약 그런 의미가 없다면 오히려 신앙이라는 게 행복한 삶을 살아야 하는 한 인간의 삶에 족쇄와 같은 역할을 하게 된다면 하느님이 과연 그걸 원하실까요? 제가 답을 드리지 않아도 어떤 답일지 나올 것입니다.ㄷ
만약 만에 하나 그게 이와 반대되는 생각이 하느님이 원하시는 것이라면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일 것입니다. 그건 한 인간인 인간을 피조물로 봤을 때도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그런 걸 생각하시지 않고 창조하셨다면 어쩌면 이런 '사람' 같은 존재만큼 이 세상에 허무한 존재도 없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을 잘 준비하고 기억을 한다는 것은 그 실존적인 의미도 중요하지만 그 이전까지의 삶인 이 지상에서의 삶과도 조화를 잘 이루어야 하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죽음 이후의 삶은 누구나 다 잘 모릅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에 기초하면 분명한 사실 하나는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잘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게 어떤 부와 명예 이런 게 아닐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사는 게 잘 사는 것일까요? 단순하게 생각했을 때 저는 정직하게 사는 것만큼 잘 사는 게 없다고 생각합니다. 정직하게 사는 사람은 자기의 내면 의식과 상관없이 그 사람은 항상 하느님을 의식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이때 이 의식은 자기가 의식하지 않아도 의식이 되는 의식입니다. 이때 정직은 단순히 거짓말을 하지 않는 그런 의미의 정직이 아니고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또 당연히 해서는 안 될 일은 하면 되지 않을 것이고 해야 할 일이면 당연히 해야 할 것이라는 의식이 지배하는 사람이 정직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살기 위해서 하느님을 믿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기 위해서는 하느님을 사랑해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도 원래부터 선천적으로 이런 경향이 강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이미 하느님의 은총을 많이 받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렇지 않은 보통의 사람은 신앙이라는 도구로 자신을 연마해야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은 훈련으로 무장된 사람은 마지막 죽음의 시간이 온다고 해도 담대히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된 사람일 것입니다. 이 준비 과정 일환 중 하나가 회개입니다. 우리는 그런 의미에서 이 사순이라는 전례의 시간을 자신의 영혼을 정화하는 시간으로 생각해 좀 더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내야 할 것입니다. 세상에서도 불변의 진리가 하나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어떤 일을 하기 위해 그 일을 성공적으로 성취하려고 준비를 철두철미하게 한 사람이 좋은 결과물을 얻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무거운 주제로 흐른 것 같아 잠시 세상 밖으로 화제를 돌려서 이 의미를 좀 더 이해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권력을 가진 사람이든지 유명인이든지 그런 사람도 간혹 포털에 보면 부고 소식이 나오는 걸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소식을 볼 때마다 드는 생각이 있습니다. 그 어떤 유명한 사람도 길다면 긴 생애 같지만 하느님의 시간으로 보면 한여름 밤의 꿈 같은 일장춘몽과도 같은 삶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한 번의 우리의 이 생을 듯없는 삶처럼 생각하자는 게 아니라 그런 헛된 것에 망상을 두지 말고 남은 삶을 좀 더 가치롭게 보내는 데 전력을 다해 나중에 언젠가 그 마지막 시간이 왔을 때 한 세상 힘들고 고단한 삶을 살았다고 해도 그래도 나름 충실하게 잘 살다가 간다는 생각은 할 수 있는 그런 삶은 살아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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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06. 재의 예식 다음 목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제 십자가 지는 삶을 살아야만 /
박윤식 [big-llight] 2025-03-05 ㅣNo.180521
어떤 이가 식사시간에 지옥구경을 갔단다. 거기는 먹을 것, 마실 물도 없는 곳으로 여겼단다. 그런데 놀랍게도 식탁엔 풍족한 음식이 차려졌지만, 둘러앉은 이들은 하나같이 삐쩍 말라 있었다나. 왜 그런가 보았더니, 그들 팔은 곧아서 음식을 집어 자기 입에 넣을 수 없었단다. 그리고는 곧장 천국에 갔단다. 물론 그곳도 팔은 구부러지지 않았다. 식탁 음식도 지옥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나. 그런데 그들은 살이 쪄 모두가 행복에 차 있었다. 유심히 보니 그들은 음식을 집어서 자기 입으로가 아닌, 다른 이의 입으로 가져가 그에게 음식을 먹여 주고 있었단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신원 고백에, 예수님께서는 당신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셨다. 그리고 당신을 따르려는 삶은 제 십자가를 지고 날마다 따라다녀야 한단다. 이는 오늘 우리의 삶에도 변함없이 요청되는 말씀일 게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정녕 목숨을 구하려는 이는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는 구할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예수님은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이는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으면 목숨을 구한다나. 나만 살려면 결국 나도 너도 다 죽는단다. 너 위해 나 죽이면 모두 살기에. 날마다 자신을 버리고 당장 죽을 목숨인 죄인으로 취급되며 살아야 한다나. 사실 나날이 죄인으로 사는 게 믿는 이의 삶이다. 이는 의인이 아닌, 죄인으로 자기를 죽이는 삶을 예수님께서는 바라신다. 그것은 인정받는 삶이 아닌, 버리는 삶을 사는 거다. 사순시기에 우리는 부활을 준비하자. 죽어야 부활할 수 있다. 예수님 따르려면 자신의 십자가를 지라셨다. 자기 몫의 십자가가 있단다. 사순 시기는 내 몫의 십자가를 찾는 기간이요, 그 십자가에서 죽는 연습을 하는 시기이다.
그렇다. 죽어야 부활하리라. 인간적 계산으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일 게다. 그러기에 신앙의 신비임에랴. 이런 체험이 없었다면 올 사순 시기에 꼭 겪게 해 주십사고 기도해 보자. 부활은 전혀 예기치 못한 새로운 탄생이요 출발이다. 십자가 없는 영광이 없기에. 그런데도 우리는 본능적으로 십자가를 피하려고만 한다. 주님과 함께 있는데도 말이다. 그분의 그 전능하신 손으로 어려움을 없애 주실 수 있지 않나? 그런데 왜 끝도 없이 시련과 고통을 주시는지.
그건 우리 신앙의 성숙을 위해서일 게다. 쇠가 불에서 단련 받아야 더 단단해지듯이, 시련과 고통에서 하느님을 알고, 신앙이 더욱 성숙하게 될 터이니. 아무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도 인류 구원을 위해 기꺼이 십자가를 짊어지셨다. 그러나 우리는 늘 피하려고만 한다. 때로는 자신의 십자가는 유달리 커 보이는데, 다른 이들의 십자가는 작아 보이기에 서운히 여긴다. 분명한 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고유한 십자가가 있다는 거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르신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십자가를 지는 비참함을 극복해야만 부활의 현실을 만날 수 있는 가르침일 게다. 사순 시기 동안, 아니 일생을 우리는 선택과 결단을 해야 한다. 예수님 제자가 되어야 행복과 새 생명을 얻을 것이리라. 곧 자기를 버리면서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아야만 한다. 우리는 하루하루 자신의 십자가를 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가정에서 가족을 위해, 공동체에서 이웃과 동료를 위해 내가 희생하더라도, 나만이 짊어져야 할 십자가가 무엇인지 늘 묵상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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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06. 재의 예식 다음 목요일. 한창현 모세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담긴 뜻을 깊이 이해하려면 당시 십자가형이 뜻하는 바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예수님 시대에 로마 군정은 노예 폭동과 같은 반란을 꾀한 사람을 붙잡아 십자가형에 처하였습니다.
이는 고난받고 죽임을 당하는 형벌로, 반란을 꾀하다가 잡히면 같은 방식으로 처형된다는 본보기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같은 죄를 지으면 같은 대가를 치르게 된다는 것이 십자가형의 첫 번째 뜻입니다.
이런 점에서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예수님과 같은 일을 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고 세상에 복음을 전하심으로써 창조주이신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고 복음을 전함으로써 그분과 같이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라야 한다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저마다 ‘자신의 삶’이라는 골고타 언덕에 제 십자가를 지고 오르도록 초대하십니다.
우리는 저마다 삶의 자리에서 예수님처럼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런데 가끔은 그 과정이 죽을 만큼 힘들어서 피하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그때는 당신 뒤를 따르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떠올리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은 우리의 고통이 하느님께 향하도록 이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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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2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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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06. 재의 예식 다음 목요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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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06. 재의 예식 다음 목요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루카 9, 24)
목숨을 비추고
목숨을 구하는
예수님의
목숨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참된 목숨의
의미를 다시
만납니다.
사랑이라는
십자가를 지는
목숨입니다.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목숨이며
그 누구도
붙잡을 수 없는
사랑의
목숨입니다.
기다려주지 않는
사람의
목숨입니다.
죽음의 시간을
벗어나는
예수님의
목숨입니다.
목숨의 사명은
목숨을 구하는
것입니다.
다시
살려내야 할
목숨의
가치입니다.
하느님을 위해
이웃을 위해
목숨을 바친
복음의
사람들을
만납니다.
눈앞에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통해
새로이
얻게되는
목숨의 참된
기쁨입니다.
우리의 마음대로
건너뛸 수 없는
십자가와
목숨의
여정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의
목숨을 구하는
진정한
목숨입니다.
목숨을 구하는
저마다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랑의 오늘
되십시오.
십자가의 여정을
받아들이는 것이
사순의 참된
여정입니다.
그 여정을
따르는
살아있는
사순의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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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06. 재의 예식 다음 목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하느님의 시계는 아주 천천히 돌아갑니다!
평소 너무 바빠 미처 보지 못했는데, 바닷가로 내려가는 길목에 기가 막힌 명당자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단 지금은 관리가 전혀 안 된 상태입니다.
잡목에, 가시덤불에, 키가 허리만큼 오는 잡초에...
그래서 톱과 낫을 들고 열심히 정리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벚꽃이며 수선화가 필 무렵에는, 저희집을 찾는 피정객들이 바다가 지척인 명당자리, 키 큰 소나무 아래 설치된 평상에 앉아, 차도 마시고 기도도 할 수 있으리라 희망합니다.
잡목과 잡초 제거 작업이 결코 만만치 않습니다. 특히 가시덤불이 사람을 괴롭힙니다.
자칫 방심하면 가시에 찔리고, 손과 팔에 생채기가 나곤 하니, 아주 조심조심 가시덤불부터 제거합니다.
땀을 뻘뻘 흘리며 일을 하면서, 제 안에 잔뜩 도사리고 있는 가시덤불들, 이번 사순시기 말끔히 제거해야 할 가시덤불들은 어떤 것들인지 묵상해봅니다.
참으로 오랜 세월 동안, 참으로 많은 가시덤불들을 없애버리지 못한 채, 불편한 상태로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가시덤불 속으로 들어가기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조금만 움직여도 따끔따끔 찌르니 두려움도 큽니다.
가시덤불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큰 용기와 결단력이 필요합니다.
지나친 욕심은 금물입니다.
이번 사순시기 동안 하루에 한 줄기씩 차근차근 내 안의 가시덤불을 제거해나가자고 다짐해봅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사순시기는 하느님께로 돌아 서는 기간입니다.
신명기에서 모세는 약속의 땅에 도달하기 위한 첫째 조건으로 하느님께 돌아섬을 강조합니다.
모세의 눈을 크게 거스르는 사람들이 있었으니, 그렇게 주의를 줘도 또다시 이방신에게로 한눈을 파는 우상숭배자들이었습니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시계는 참으로 느리게 돌아갑니다.
하느님께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약속하셨지만, 속전속결로 이루어지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40년의 광야 생활을 겪게 하신 후, 그들을 단련시키시고 정화시키신 후,
마침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조급했습니다. 당장 이번 달 안으로, 늦어도 올해 안으로, 그렇지 않다면 자신이 눈감기 전에 약속의 땅에 발을 들여놓을 것을 간절히 소망했습니다.
그러나 광야 생활은 계속되었습니다.
조급한 마음에 사람들은 눈을 돌립니다.
당장, 순식간에 청을 들어줄 것 같은 이방신에게로 말입니다.
하느님께 돌아선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모세의 가르침에 따르면 하느님께 돌아선다는 것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분께 간절히 매달린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대체 무엇을 듣고 있습니까? 인생에 단1도 도움이 되지 다양한 매체들, 거짓 미디어,
가짜 뉴스를 보고 듣는 데 얼마나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 모릅니다.
정작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데는 너무나 인색합니다.
오늘 우리는 과연 무엇에 매달리고 있습니까? 천박한 자본주의, 극단적 물질만능주의가 온 나라를 사로잡고 있습니다.
돈이 가장 우선적인 가치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집값이 조금이라도 떨어지면, 내가 보유하고 있는 주식이 조금이라도 하락세를 보이면, 세상 다 잃은 표정을 짓습니다.
오늘 우리는 돈이라는 이방신에게 깊이 빠져있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다시금 제반 사항에 대한 가치평가가 다시 이루어졌으면 좋겠습니다.
가장 첫 자리에 두어야 할 대상이 누구인지? 어떤 것인지? 조금 뒤로 물러나도록 조정해야 할 대상은 어떤 것인지 깊이 고민해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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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06. 재의 예식 다음 목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9,22-25: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살 것이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을 예고하시면서 당신을 따르는 길이 어떤 길인지, 그리고 우리가 세상에서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가르치신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을 따르라고 하신다. 당신을 닮는 것만이 우리에게 참된 행복을 가져다줄 수 있다. 우리 인간은 하느님 안에 있을 때만이 진정으로 행복과 자유를 누릴 수 있다. 하느님 안에서만 자유롭다. 이 행복과 자유를 누리면서 살아갈 수 있을 때, 우리는 하느님을 닮는다. 하느님의 모습을 완성할 수 있다는 말이다. 하느님의 모습은 매일 우리 자신의 십자가를 잘 짐으로써 이룰 수 있다. 주님의 말씀대로 자신을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면서, 주님을 닮아가면서 이룰 수 있다. 내가 지고 가는 십자가는 다름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이기기 힘든 상대는 다른 사람이나, 환경이 아니고 바로 나 자신이다. 나 자신이 가장 큰 십자가이며, 이 십자가는 다른 누구도 대신 져줄 수가 없는 나만이 지고 갈 수 있는 것이다. 나의 인생을 누가 대신 살아줄 수 없는 것처럼, 나의 십자가도 꼭 나만이 질 수 있고, 그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는 우리 자신을 완성해야 한다. 이것이 하느님의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헛되이 보내지 말라는 주님의 말씀이다. 우리의 생명은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다. 이 생명을 우리가 마음대로 취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 생명이 살아 있는 한 자신의 안일만을 위해 이기적인 삶을 살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 시간과 능력을 그리고 가진 것을 나누어야 한다. 그래야 자신의 생명을 영원히 살릴 수 있다는 말씀이다. 우리가 입으로만 주님을 부르고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 마음이 주님으로부터 멀리 있다면 주님으로부터 우리도 외면을 당할 것이다. 주님께서 외면하시는 것이 아니라, 아마 우리가 그분을 외면하여 바라볼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이 사순시기가 이제 진정으로 우리에게 은총의 때가 될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이 근본적으로 변화하는 시기가 될 수 있도록, 그래서 영광의 부활에 우리도 기쁘게 참여할 수 있도록 우리의 십자가를 잘 지고 갈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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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06. 재의 예식 다음 목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순교는 십자가의 크기가 아닌 꾸준함에 있다
하퍼 리(Harper Lee)는 젊은 나이에 『앵무새 죽이기(To Kill a Mockingbird)』라는 위대한
작품을 통해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습니다.
이 작품은 1960년에 출판되어, 그해 퓰리처상을 받으며 문학계의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이후 약 50년 동안 새로운 작품을 발표하지 않았습니다.
하퍼 리가 왜 더 이상 글을 쓰지 않았는지,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주된 이유는 그녀 자신이 그 두 번째 작품에 대한 부담감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퍼 리는 그녀의 출판사와 인터뷰에서 “나는 이미 ‘앵무새 죽이기’로 인생의 목표를 이룬 것 같다.”라고 말했습니다.
마거릿 미첼(Sherman Mitchell)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녀는『바람과 함께 사라지다(Gone with the Wind)』라는 역사적인 소설로 유명한 작가입니다.
이 책은 1936년에 발표되어, 미국 문학의 고전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미첼의 첫 번째 소설은 결국 퓰리처상을 수상하게 되었고, 그녀는 문학계에서 큰 명성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도 역시 그 이후로는 어떤 글도 쓰지 못했습니다.
저는 이것이 ‘완벽주의’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완벽주의는 열등감에서 옵니다.
더는 좌절하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최고의 위치에서 또 다른 책을 썼다가 평이 좋지 않고 팔리지 않으면 자기 위치를 잃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평가에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마음이 자존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반드시” 고난을 겪고 죽은 후 부활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이 단지 일시적인 일이 아니라, ‘부활을 위한 필수적인 과정’임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우리도 그 길을 함께 따를 것을 요구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저도 사제가 되라는 주님의 뜻이 있었지만, 따를 자신이 없었습니다.
특별히 결혼 안 하고 산다는 게 넘을 수 없는 산처럼 느껴졌습니다.
어느 날 마음에 드는 자매와 산 정자에 앉았을 때 오늘의 말씀이 들렸습니다.
이 말씀으로 십자가가 나에게 불가능한 무엇이 아니라 할 수 있는 무엇으로 보였습니다.
여기에는 바로 “매일”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평생 혼자 산다고 생각하면 참으로 힘들지만,
하루하루로 생각하면 큰일이 아니었습니다.
아무리 서로 사랑하여 떨어지면 죽을 것 같이 느끼는 신혼부부라도 어떤 한 사람이 여행 가서
일주일 떨어져 있는다고 상사병으로 죽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렇게 십자가의 순교 또한 내가 얼마나 큰 크기의 십자가를 지느냐에 있는 게 아니라 그것을 오늘 하루만 버틸 수 있느냐로 다다를 수 있습니다.
순교자들의 고문과 박해를 생각하면 그것은 넘을 수 없는 산입니다.
그러나 한 발짝씩 올라간다면 언젠가는 그 산을 넘을 수 있는 것입니다.
세계적인 명작을 낸 후에도 두려워하지 않고 계속해서 후속작을 쓴 대표적인 작가로는
존 스타인벡(John Steinbeck)을 들 수 있습니다.
그는 『분노의 포도(The Grapes of Wrath)』와『에덴의 동쪽(East of Eden)』 등으로 유명한 작가입니다.
스타인벡은 『분노의 포도』로 1939년 퓰리처상을 수상하며 큰 명성을 얻었지만, 그 후에도 계속해서 새로운 작품을 써 나갔습니다. 그의 작품들은 영감을 받았다기보다는 매일 글쓰는 습관과 끈기를 통해 이루어진 것이라고 했습니다.
스타인벡은 글쓰기의 중요성에 대해 자주 언급하며, 글쓰기는 ‘영감’이 떠오를 때만 하는 것이 아니라, 꾸준히 글을 쓰는 습관과 일관성에서 온다고 강조했습니다.
그의 말 중 하나는 “영감은 바로 그 자리에 있다. 내가 앉아서 하루에 몇 시간씩 글을 쓸 때마다,
무언가 새로운 것이 떠오른다.”라고 했습니다. ‘분노의 포도’는 1939년 작품이고 ‘에덴의 동쪽’은 1952년 작품입니다.
이 밖에도 그의 작품은 10권이 넘습니다.
장사와 요리의 한국 대표적 전문가인 백종원 대표도 많은 브랜드를 만들었지만, 대부분의 수익은 빽다방에서 나온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 10개 중 1개만 성공한다는 뜻입니다.
그래도 새로운 것에 도전할 수 있는 것이 십자가를 지는 자세입니다.
인도에 아내의 죽음 때문에 평생 산을 깨서 길을 낸 사람이 있습니다.
그의 삶이 영화로 나오기도 하였습니다.
사순을 시작하는 지금 그분의 마음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어떻게 사순 동안 술과 담배를 끊겠어?’, ‘내가 어떻게 사순 동안 단것을 먹지 않을 수 있겠어?’ 그러나 오늘 하루는 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것도 안 되면 한 시간은 할 수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도 광야에서 그렇게 하루하루 사셨을 것이고 그 하루하루가 모여 40일이 되었습니다.
그분의 삶 자체도 십자가의 길이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부활’의 희망으로 합니다.
그런데 하루만이라도 십자가를 지고 나면 부활의 기쁨이 마지막 때 한 번에 오는 것이 아니라 하루의 십자가에도 부활의 기쁨이 벌써 온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책을 한 줄 썼을 때 이미 완성된 명작의 희망이 주는 기쁨이 주어집니다.
그것이 그다음 날도 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평생 지어야 할 십자가는 잠시만 보고 오늘 당장 지어야 할 십자가만 생각하며 살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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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06. 재의 예식 다음 목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십자가는 의무와 멍에가 아니라, 은총이고 특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 하고 이르셨다.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루카 9,22-25)”
1)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죽음은 ‘밀알 하나’를 심는 일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
이 말씀에서 ‘많은 열매’는 ‘많은 사람의 구원’을 뜻합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은, 당신을 하나의 씨로 심어서 ‘많은 사람의 구원’이라는 열매를 맺은 일입니다.
<‘모든 사람’이 아니라 ‘많은 사람’인 것은,
구원받기를 거부하는 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뒤를 따르면서 각자 자신의
십자가를 지는 것은 ‘나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지만, 우리는 ‘내가’ 구원받으려고 십자가를 집니다.
남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십자가는 십자가로 끝나지 않고 부활과 생명으로 이어진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십자가는 신앙생활의 목적이 아니라, 과정일 뿐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지려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부활과 생명에 참여하려고 신앙생활을 합니다.
“눈물로 씨 뿌리던 이들, 환호하며 거두리라.
뿌릴 씨 들고 울며 가던 이, 곡식 단 들고
환호하며 돌아오리라(시편 126,5-6).”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 여러분, 주님의 재림 때까지 참고 기다리십시오.
땅의 귀한 소출을 기다리는 농부를 보십시오.
그는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맞아 곡식이 익을 때까지 참고 기다립니다.
여러분도 참고 기다리며 마음을 굳게 가지십시오. 주님의 재림이 가까웠습니다(야고 5,7-8).”
만일에 십자가만 바라보고 부활과 생명을 보지 않는다면, 그 신앙생활은 힘들기만 하고 아무 기쁨이 없는 생활이 될 것이고, 기쁨 없이 생활한다면 그것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강제노동을 하는 것이 되어버립니다.
<의사가 병자를 살리기 위해서 수술을 권할 때, 병자 쪽에서 살고 싶으면 그 권고를 받아들여서 수술을 받을 것입니다.
또 의사가 어떤 약을 처방할 때, 병자는 살고 싶으면 그 약이 아무리 쓴 약이라도 먹을 것입니다.
십자가는 바로 그런 것입니다.
수술과 약이 십자가라는 뜻이 아니라, 힘들어도 수술을 받아들이고 약을 먹는 일이 십자가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십자가는 어쩔 수 없이 실천해야 하는 의무가 아니라 은총이고, 신앙인들을 부활과 생명으로 연결해 주는 특권과 같은 것입니다.
2)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이 지금 얼마 동안은 갖가지 시련을 겪으며 슬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로 단련을 받고도 결국 없어지고 마는 금보다 훨씬 값진 여러분의 믿음의 순수성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밝혀져, 여러분이 찬양과 영광과 영예를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본 일이 없지만 그분을 사랑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그분을 보지 못하면서도 그분을 믿기에, 이루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기쁨 속에서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믿음의 목적인 영혼의 구원을 얻을 것이기 때문입니다(1베드 1,6ㄴ-9).”
이 말은, 십자가로 생각되는 여러 가지 고난과 시련을 겪을 때, 그것을 참고 견뎌야 하는 이유를 설명해 주는 말이기도 하고, 어떤 마음가짐으로 십자가를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슬퍼하지 않을 수 없다.’ 라는 말은, ‘힘들어 할 수밖에 없다.’로 생각할 수도 있는 말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받아들여야 할
십자가는 누구에게나 괴롭고 힘든 일입니다.
그럼에게도 불구하고 그것을 받아들여서 지고 가는 것은, ‘내 신앙’의 단련과 정화를 위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또 십자가를 지고 가면서도 기뻐할 수 있는 것은,
십자가를 통해서 ‘영혼의 구원’을 얻기 때문이고,
‘그날’이 되면 예수님의 영광에 참여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3) 예수님의 말씀에서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것에 대해서만 집착하면서 영혼의 구원에 대해서는 관심 갖지 않는 사람”입니다.
“목숨을 잃을 것이고”는, 그런 사람은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그 자신이 얻으려고 하지 않아서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고 현세적인 것들과 물질적인 것들을 모두 버리는 사람”입니다.
<‘잃는’으로 표현되어 있지만, 뜻으로는 ‘버리는’입니다.>
“목숨을 구할 것이다.”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입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허무하게 사라질 이 세상 것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 데에는 아무 소용이 없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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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06. 재의 예식 다음 목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루카 9,22-25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미국의 유명한 신학자이자 사회학자인 토니 캄폴로 박사가 95세 이상의 노인 50명에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만약 당신이 다시 태어난다면 어떻게 살고 싶은가?”. 그러자 그 질문에 대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대답이 가장 많이 나왔다고 합니다. 첫째는 “날마다 반성하는 삶을 살겠다”는 것입니다. 하루 하루 온전히 깨어있지 못하고 제대로 된 성찰 없이 무심코 흘러가버린 시간들이 얼마나 소중한 것이었는지를 삶의 황혼기에 접어들어서야 비로소 깨닫게 된 것이지요. 매일 그날의 삶을 돌아보며 자기 잘못을 반성하고 더 나은 내일이 되도록 구체적인 계획을 세운 뒤 실천해야 삶을 가치있고 보람있게 만들 수 있습니다. 둘째는 “용기있는 삶을 살겠다”는 것입니다. 당장의 이익을 쫓아 양심을 져버리고 불의와 타협했던 과거의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진실을 말할 용기가 없어 외면하고 지나간 부정과 불의들이 자기 자신과 이웃에게 얼마나 큰 상처로 남았는지를 뒤늦게 깨달은 것이지요. 셋째는 “죽음 후에도 무언가를 남기는 삶을 살겠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목표로 삼고 달려온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가치들이 얼마나 허망하고 무의미한 것이었는지를 깨닫고 이제부터라도 삶에서 진정으로 가치있는 것들을 추구하며 살겠다는 겁니다.
이 세가지 대답의 공통적 특징은 ‘변화’입니다. 지금까지의 모습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았기에, 더 나은 내일을 위해 즉시 변화되겠다는, 다시 태어난 사람처럼 굳은 결심과 각오로 매일을 충실하게 살겠다는 의지가 담겨있는 것이지요. 바로 그것이 예수님께서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요구하시는 모습입니다.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는 말씀은 단지 당신을 위해 고통과 시련을 참고 견디라는 뜻이 아니라, 매일 마주하는 선택의 순간에서 당장 내 욕망을 채워주는 세상의 것들을 마다하고 주님 뜻에 맞는 올바른 것을 선택하기 위해 노력하라는 뜻인 겁니다. 물론 일상 안에서 주님을 위해 기꺼이 십자가의 길을 선택한다는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참아야 하고 내가 갖고 싶은 걸 외면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해야하고 내가 보고싶지 않은 걸 마주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1독서 신명기의 말씀은 우리에게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지를 알려줍니다. 우리는 죽음 대신에 생명을, 불행 대신에 행복을 선택해야 합니다. 저주 대신에 축복을, 방종 대신에 순명을 선택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참으로 이로운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런 것들을 선택해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내리시고 참 생명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 선택은 물론 어렵지만,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도저히 감당 못할 크고 어려운 일을, 지금 즉시 해내라고 요구하시는 게 아닙니다. 우리의 선택은 아주 사소한 것들에서 시작되는 것이지요. 아주 소소한 나눔 한 번, 아주 평범한 양보 한 번, 아주 일상적인 희생 한 번이 쌓이다보면 우리 삶이 하느님의 충만한 은총과 축복으로 가득 차 참된 행복을 누리며 그분과 함께 영원히 살게 되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이 희망하는 “주님의 뒤를 따르는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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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06. 재의 예식 다음 목요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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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06. 재의 예식 다음 목요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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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06. 재의 예식 다음 목요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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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06. 재의 예식 다음 목요일.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로 살아가는 삶
<2025.3.6> 아침을 여는 묵상 (눅 9:18~27절)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로 살아가는 삶❞
❚ 그리스도를 아는 바른 지식 안에서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르는 제자의 삶이어야 합니다.
✔ 제자는 어떤 신앙이어야 합니까?
➲ 삶에 깊이 뿌리내린 신앙이어야 합니다(18~20절).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신 후에 예수님은 제자들을 동행시킨 채 기도하시다가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이에 제자들은 ‘세례 요한이나 엘리야 또는 옛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전했습니다. 다시 예수님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물으십니다. 제자들의 진정한 신앙을 점검하시고자 하셨습니다. 이때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 이는 곧 하나님께 보냄을 받아 이스라엘의 구원을 이루실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영적인 눈과 영적인 지식을 제대로 갖추고 있지 못하면 예수님에 대하여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게 됩니다. 예수님에 대한 분명하고도 확신 있는 고백을 하지 못하면 더 깊은 헌신과 충성으로 나아갈 수 없게 됩니다. 심지어는 오랜 세월 동안 주를 위한답시고, 여러 가지 일들을 행했다 할지라도 구원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땅속 깊이 뿌리내리지 못한 나무는 조그마한 홍수와 작은 바람에도 쉽게 뿌리 채 뽑히고 맙니다. 가룟 유다는 어찌 보면 예수님의 최측근에 있었던 제자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신앙의 뿌리는 전혀 생성되지 못했고, 그 결과 예수님께 적대적인 군중들 속 한 사람으로 인생을 비참하게 끝을 내고 말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나의 왕이시며, 나의 구원자이시라는 이 믿음의 뿌리를 삶에 깊이 내려 군중들 속에 있는 예수의 팬이 아닌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의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삶을 통해 확신하는 신앙이어야 합니다(21~22절).
베드로의 고백을 들으신 예수님은 엄중히 경고하시면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명하셨습니다. 이는 메시아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이 메시아에 대한 제자들과 사람들의 기대치와는 달랐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단순히 정치적 메시아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첫 번째 수난에 관한 말씀을 하십니다. ‘...고난을 받고....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살아나야 하리라...’(22절).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은 나와 같은 인간을 구원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속 계획의 성취에 반드시 필요한 요소이며, 구약에서 예언된 말씀의 성취입니다. 오래전에 전도 현장에서 한 어르신과 대화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그 어르신에게 십자가와 부활에 관해 설명을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그 어르신이 ‘소설을 쓰고 있네...’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어떤 설명으로도 그 어르신을 설득할 수 없었던 참으로 난감했던 기억이 납니다. 세상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을 터무니 없는 이야기로 취급합니다. 오히려 조롱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그러한 반응에 대하여 기죽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생각할 지언정 내 자신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의 의미에 대해 확신을 갖고 있으면 그것으로 된 것입니다. 고난을 받으시고, 버린 바 되시고, 죽임을 당하시고, 살아나시는 그 모든 과정이 나 한 사람의 구원을 위한 과정임을 분명히 믿고, 확신을 갖고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의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삶을 통해 증명되는 신앙이어야 합니다(23~27절).
예수님은 더 나아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23절)라고 말씀하십니다. ‘자기 부인, 자기 십자가, 예수를 따름’ 이 세 가지는 너무나 중요한 제자도의 핵심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은 예수님을 위해 목숨을 잃으면 자기 생명을 건질 것이고, 예수님의 말씀을 부끄러워하지 않을 때, 영광스럽게 주님을 맞이 할 수 있을 것을 말씀하십니다. 온 천하를 얻기 위해 자신의 영혼을 팔아 버린 이들은 결국 아무런 유익을 얻지 못할 것임을 말씀하신 예수님은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볼 자들도 있느니라...’(27절)..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하나님의 나라는 재림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완전한 나라라기보다는 예수님의 오심과 고난과 부활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통치와 주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분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분의 뜻대로 사는 우리 자신의 삶 가운데 임재하십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매일 매일 그분의 나라와 그분의 통치와 의를 구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삶으로 드러내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당신 스스로를 부인하시고,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셨던 주님의 삶을 본받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아울러 우리 자신의 신앙 고백이 단순히 입술의 고백으로만 그쳐서는 안 되겠습니다. 우리 자신이 몸담고 살아가고 있는 삶의 자리에서 끊임없이 증명되어야 하며,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로서의 삶을 살아내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늘 순종하는 삶을 살아갈 뿐만 아니라 그 말씀의 뜻을 삶 속에서 드러내므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의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주님이 지신 십자가를 지고 그분을 따르는 길이 힘겹고 고통스러운 길이라 할지라도 인내하는 삶을 살아갈 뿐 아니라 진정한 제자의 삶을 살아가므로 참된 자유와 평화와 진정한 기쁨을 일상의 삶에서 전하는 영광스러운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눅 9:18~27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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