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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목해야할 인물/안토니오 그람시
ㅡ서구의 변형된 공산주의 혁명 설계자
안토니오 그람시
서구의 변형된 마르크스주의 사탄화 전략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친 이탈리아의 정치이론가
안토니오 그람시(1891.1.22. ~ 1937.4.27.)
1926년 가을, 무솔리니(BenitoMussolini, 1883~1945 / 독일과 함께 1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이탈리아 지도자)는
자신에 대한 암살 기도가 있었다는 것을 구실로 삼아
그때까지 남아있던 모든 반대 조직들과 간행물들을 금지시키고
그에 대해 반대하는 모든 사람들을 검거하기 시작했다.
이때 체포된 사람 중에 안토니오 그람시가 있었다.
당시 그는 의회의 대의원이었으나 무솔리니에게 의원의 신분보장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1928년 5월 그람시에 대한 재판에서 검사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로 그에 대한 논고를 끝맺었다.
"우리는 이 자의 두뇌가 작동하는 것을 20년 동안 중지시켜 놓아야 한다."
(이는 이 자기 얼마나 사악하고 교활한 이론과 괴변의 사상에 사로잡힌 자인가를 알수 있는 표현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파시스트 정권은 감옥에 그를 가둘 수는 있었지만, 그의 두뇌(영혼)가 작동하는 것을 결코 막을 수는 없었다.
그람시는 감옥에서 서서히 죽어가면서도, 오히려 역사와 사회에 대한 분석은 더욱 사악한 쪽으로 교묘하고 예리해져, 몇 년에 걸쳐 2,848 페이지에 달하는 필사본을 남겼다.
그람시가 죽은 후 그가 감옥에 있을 때 작성한 [옥중수고]는, 그를 자주 면회 갔던 처형에 의해 고스란히 전해져, 이후의 서구의 변형된 마르크스주의(WesternMarxism) 형성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된것이다.
안토니오 그람시(AntonioGramsci, 1891~1937)는, 1891년 이탈리아 사르데냐의 알레스라는 조그만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변호사가 되는 것이 꿈이었지만, 집안 형편이 여의치 않아 학업을 포기하고, 사르데냐의 길라르자라는 곳에서 등기소직원으로 일하다가, 그곳에서 그람시의 어머니가 될 사람을 만났다.
그녀는 90퍼센트가 문맹인 그 지방에서 보기 드물게 읽고 쓸 줄 아는 교양 있는 여자였고, 남편이 공금을 횡령했다는 누명을 쓰고 6년 동안 감옥에 투옥되어 있는 동안 ,극심한 가난 속에서 삯바느질과 조그만 텃밭에서 나오는 수입으로 일곱 아이들을 키워내었다.
일곱 자녀들 중 넷째로 태어난 안토니오 그람시는 '니노'라는 애칭으로 불렸으며, 잘생긴 얼굴에 밝은 금발의 곱슬머리를 가졌었다.
그러나 4살 때에 하녀의 실수로 계단 아래로 굴러 떨어져 허리를 다쳤고, 이후 등이 조금씩 굽기 시작하여 결국 크면서 곱사등이가 되었고, 키도 152센티미터밖에 자라지 않았다.
그람시는 1898년(7살)부터 초등학교에 다니기 시작했으나, 아버지의 투옥으로 인해 가세가 급격하게 기울어져, 학업을 중단하고 11살의 나이로 사환으로 일을 했다.
3년 후 아버지가 석방되자, 그는 다시 학교로 돌아갈 수 있었고, 1908년(17세) 입학시험에 합격하여 칼리아리에 있는 고등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그곳에서 군복무를 마치고 돌아온 그의 형 젠나로(Gennaro)와 함께 하숙을 했는데, 그는 이탈리아 사회당(PSI)의 열성당원이었기 때문에 동생에게 사회주의 문헌과 서클들을 접하게 해주었다.
1911년(21세) 그람시는 토리노(Turin) 대학의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이 대학 인문철학부에서 언어학을 공부하게 된다.
그곳에서 그는 역사-언어학자인 마테오 바르톨리(MateoBartoli), 단테 연구가인 움베르토 코스모(UmbertoCosmo) 같은 교수들과 친교를 쌓으면서 언어학 교수로의 길을 진지하게 고려했다.
당시의 토리노는 이탈리아의 가장 선진화된 공업도시였으며, 특히 피아트(Fiat) 자동차공장을 포함한 테일러 방식의 근대적인 생산 공정에서 일하는 수만 명의 노동자들이 있었다.
노동운동 또한 급격히 성장했으며, 토리노 대학의 많은 학생들 역시 이곳의 노동운동 및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처음 그람시를 이끈 것은 학구열이었으나, 안젤로 타스카(AngeloTasca), 팔미로 톨리아티(PalmiroTogliatti), 움베르토 테라치니(UmbertoTerracini) 등, 이미 사회당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던 친구들과 교제하면서 사회주의에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1913년(23세) 마침내 그 역시도 사회당에 가입하게 되었다.
이후 사회당 언론에 기고하면서 본격적인 정치활동을 시작한 그람시는, 1915년에는 사회당 주간지인 [민중의 외침(IlGridodelPopolo)]의 전임기자가 되었고, 이내 주목할 만한 정치평론가로 인정받게 되었다.
하지만 이 시기 그람시의 생활은, 경제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매우 피폐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어렵사리 장학금을 따낼 수 있었지만 금액이 너무 적어, 그것만으로는 세끼 식사조차 제대로 할 수가 없었고, 건강 상태도 악화되어 출석을 제대로 하지 못해 정학까지 당했다.
결국 여러 교수들의 격려, 언어학에 대한 관심과 재능에도 불과하고 1915년 4월에 치른 '이탈리아 문학3' 시험이 그의 마지막 학교 시험이 되었다.
토리노에서는 1917년 초부터 식량부족과 물가상승으로 시위가 빈발했으며, 8월에 들어 빵 공급이 중단되자 노동자들은 대규모의 봉기를 일으켰다.
사흘 동안 계속된 가두투쟁은 기관총과 탱크가 투입된 유혈 진압으로 ,50여 명이 사망했으며 약 1,000명이 투옥되거나 최전선으로 보내졌다.
8월 사건으로 인해 토리노 사회당 지부의 모든 사회주의 지도자들이 검거되자, 그람시는 '잠정위원회'에 선출되어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준지하활동을 하게 된 당 지도부의 일원이 되었다.
전쟁은 1918년 11월 끝났고, 이듬해 11월에 열린 전후 첫 선거에서 사회당은 득표의 1/3을 획득할 정도로 큰 지지를 얻었다.
전쟁 기간 동안 이탈리아 자본주의는 급속도로 팽창했고 자본집중 또한 급격히 진행되었으며, 산업자본의 평균이윤율은 4.26 퍼센트에서 7.75 퍼센트로 증가하고 피아트 같은 회사는 자본이 10배로 불어났다.
공업부문에서의 이러한 자본 집중은 상당수의 소기업을 몰락시킴으로써 많은 소상공인이 프롤레타리아(노동자)화 되었고 이에 따른 불만으로 사회당에 대한 지지가 급증한 것이다.
무엇보다 그 해에는 러시아혁명(1919년)이 일어났다.
그 후 몇 달 뒤인 12월 그람시는 사회당 일간지인 [전진 (Avanti!)]에, <자본론에 거역한 혁명>이라는 매우 흥미로운 글을 써서 그의 이름을 전국적으로 알렸다.
마르크스는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일어난다’고 했으나, 후진 농업국인 러시아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일어났으니 이는 마르크스 이론이 틀렸던 것인가? 아니면 러시아혁명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아니었단 말인가?
당시 팽배한 이 두 의문에 대해, 그람시는 ‘러시아혁명이야말로 진정한 마르크스의 사상을 실천한 것으로, 역사유물론을 결정론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주장을 펼쳤다.
즉, 마르크스주의를 멘셰비키나 제2인터내셔널 방식의 조잡한 경제 결정론으로 다루는 대신, 그는 역사 속에서 집합적인 인간들의 의지 및 실천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러시아혁명은 민중의 각성 및 계급투쟁이 혁명으로 이어진 것으로 어디까지나 자본론에 부합한 혁명이라고 분석했다.
1919년 5월 그람시는 타스카, 톨리아티, 테라치니 등과 함께 주간지인 [신질서(L'OrdineNuovo)]를 창간한다.
[신질서]를 통해 그람시는 '공장평의회'를 설치하고, 이를 혁명의 토대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이는 곧이어 사회당의 토리노지부로부터 승인을 이끌어내어, 1919년 말에는 약 15만 명의 토리노 노동자들이 『공장평의회』로 조직되었다.
노동조합이 노동이라는 상품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임금인상, 노동시간, 휴식 등을 대상으로 자본가로부터 좀 더 많은 양보를 이끌어내는 것에 집중하는 것에 반해, 그람시가 주창한 공장평의회는 조합원과 비조합원 모두가 동등하게 참여한 상태에서 단지 근로조건의 개선뿐만 아니라 생산력 향상 등의 전반적인 공장의 운영까지 모든 것을 함께 토의하는 기구였다.(노조의 경영참여)
그에 따르면 ‘진정한 노동자 민주주의’는 노동자 스스로가 국가의 자산을 통제하고 효과적으로 운영하는 기반 위에서 가능한 것이지,(노동자의 국가 경영참여)메시아적인 혁명 이후에 외부로부터 도래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람시는 "대중봉기를 통해 공산주의자라고 자임하는 사람들의 수중에 권력이 장악된다고 해서 그 자체로 그것이 프롤레타리아적이고 공산주의적인 것은 아니다"라고 말하면서, 비록 혁명적 소수가 폭력적으로 권력을 장악하는 데 성공할 지라도 노동자들의 의식적인 투쟁이 선행되지 않고 구체적인 실천 및 조직 역량이 결여되어 있다면 혁명은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자본주의의 용병 세력들에 의해 파괴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당시 그람시가 이끄는 [신질서] 그룹은 소수였으며, 계량주의로 대표되는 중도파가 장악한 사회당 안팎의 압력으로 와해될 위기에 처했으나, 1920년 7월에 열린 코민테른 2차대회에서 레닌이 [신질서] 그룹의 입장을 지지함으로써 아마데오 보르디가(AmadeoBordiga)를 위시한 이탈리아 대표들을 매우 당황하게 했다.
보르디가는 대회에서 돌아온 후 그람시와 손을 잡고 사회당의 중도파와 대립하였으며, 1921년 함께 사회당과 별개인 이탈리아 공산당(PCI)를 창당했다.
그러나 창당을 주도하고 초기부터 당을 이끌었던 보르디가와 그람시는 여러 면에서 의견을 달리했다.
일례로 보르디가는 당이 올바른 정책을 견지하기만 한다면,노동대중은 당의 지도를 따를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지만, 그람시는 혁명은
노동대중과의 긴밀한 연계를 지속하면서 노동계급을 포함한 모든 피억압계급이 당을 민주적인 정당으로 신뢰하는 기반 위에서만이 가능하다고 반박했다.
그가 생각하는 정당은
"프랑스 자코뱅의 영웅적인 모방을 위해 대중을 이용하는 정당이 아니라, 스스로의 노력을 통해 자율적으로 사회적인 경제를 조직함으로써 정치적이고도 산업적인 노예상태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대중을 대변할 정당"이었다.
1922년 그람시는 당 대표로 소련에 머물렀고, 그 곳에서 바이올리니스트인 줄리아 슈히트(JuliaSchucht)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
그람시는 후일 이 때를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기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이 당시의 이탈리아는 매우 위태로운 상황의 연속이었다.
1922년 10월 무솔리니는 파쇼단을 이끌고 '로마행진'을 벌여 권력을 장악했고, 이윽고 반대 정당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과 검거를 실시했다.
1923년 보르디가 역시 검거 되자, 그람시는 줄리아를 남겨두고 예정보다 일찍 1923년 말 이탈리아로 돌아와 당을 이끌게 된다.
그람시는 노동자와 농민의 계급연대와 대중동원을 통해 파시즘을 극복할 것을 주장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기울였지만, 파시스트 세력은 이미 전국적인 승리를 굳혀가고 있었다.
이 힘든 시기 동안 하나의 위안이라면, 줄리아와 결혼하고 첫아들 델리오를 얻은 것이었다.
1926년 10월 31일, 15살의 한 소년이 무솔리니를 암살하려 했다는 뉴스가 발표되었고, 이는 새로운 탄압의 구실이 되었다.
당원들은 그람시에게 스위스 망명을 요청했으나 그는 로마를 떠나기를 거부했다.
1926년 11월 파시스트 정권은 의원들의 면책 특권을 박탈하고, 무솔리니 암살을 계획했다는 구실로 그람시를 체포하여 버렸다.
그람시는 당시의 심정을 옥중에서 쓴 글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선장은 배가 난파되었을 때 자신의 배를 떠나는 최후의 사람이 되어야 하며
배를 탔던 다른 모든 사람들이 무사하게 된 후에만 배를 떠날 수가 있다. (중략)
왜냐하면 그것 없이는 아무도 자신의 생명을 남의 손에 맡겨야 하는 책무를 지거나 수행하려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1928년 5월 28일부터 그람시 및 다른 정치인들에 대한 재판이 열렸고, 당시 정권은 이 지독한 공산주의자에 대해
"우리는 이 자의 두뇌가 작동하는 것을 20년 동안 중지시켜 놓아야 한다."고 주장했고,
며칠 뒤인 6월 4일 판사는 그람시에게 20년 4개월 5일 형을 선고했다.
그 곳에서도 파시스트 정권에서 공산주의로 정권을 바꾸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자 했다.
그는 받을 수 있는 책이면 무엇이든지 닥치는 대로 읽었고
책을 읽을 수 없을 때에는 잡지와 신문을 읽으면서 문화적 변화에 뒤떨어지지 않도록 했으며,
동시에 읽은 것을 당시의 국내 상황에 공산주의 이론의 기준으로 비판적으로 적용하려 했다.
장기간의 감옥 생활은 원래 병약했던 그람시의 건강을 심각하게 악화시켰다.
이빨은 뽑혀 나왔고, 위장은 상해서 음식을 제대로 먹을 수 없었으며,
고질적인 불면증은 더욱 악화되어 하루에 한두 시간도 제대로 자지 못하는 날이 계속되었다.
그는 경련을 하면서 피를 토해야 했고, 극심한 두통으로 감방의 벽에 머리를 찧고는 했다.
그는 그러한 고통 속에서도,공산주의 혁명에 대한 열망으로 온갖 사악한 혁명이론들을 쏟아내었다
그것이 그의 [옥중 기록]으로 써내려간 그의 영혼의 결정체가되어 세상에 돌아오게 된다.
또한 그는 틈나는 대로 줄리아와 두 아들(둘째 아들은 그가 구속된 후에 태어났으며 죽을 때까지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및 어머니, 누이들, 그리고 가까운 친지들에게 편지를 썼다.
특히 그의 처형, 즉 줄리아의 언니인 타티아나 슈히트(TatianaSchucht)와 많은 편지를 나누었는데, 그녀는 신경이 쇠약해져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었던 동생과 그람시를 연결하는 유일한 고리가 되어 주었다.
그람시의 오랜 친구인 경제학자 피에로 스라파(PieroSraffa) 주도로 그람시의 석방을 요구하는 국제적인 캠페인이 전개되었다.
여기에는 러시아의 작가 막심 고리키(MaksimGorkii), 프랑스 작가 로맹 롤랑(RomainRolland) 등 많은 국제적인 인사들이 참여했는데, 특히 로맹 롤랑은 [안토니오 그람시: 무솔리니 감옥에서 죽어가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팸플릿을 펴내는 등 그람시 석방 캠페인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러한 국제적인 압력에 못 이겨 1933년 11월 이탈리아 혁명 정권은 육체적으로 완전히 소진된 그람시를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포르미아의 교도소 병원으로 이송시켰다가, 계속되는 건강 악화로 1935년 여름 다시 로마의 병원으로 옮겼다.
그러나 이즈음에는 그를 오랫동안 괴롭혔던 척추 질환에 더해 폐결핵을 포함한 온갖 질환들이 엄습해오고 있었다.
그람시는 형량을 10년 가량 사면 받았지만 형을 마친 지 3일 만인 1937년 4월 27일,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했던 바로 그 날, 뇌출혈로 조용히 사망했다. 그의 나이 46세였다.
"왜 이탈리아에서는 가난한 노동자와 농민이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독재를 더 지지하는가?"에서부터 출발한 그람시의 옥중에서의 의문은 곧 "왜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혁명이 일어나지 않는가?"로 확대되었다.
이러한 의문에 스스로 답하기 위해 끌어들인 개념이,러시아 사회민주주의의 아버지라 불리는게오르기 플레하노프(GeorgyPlekhanov)가 도입한 헤게모니(hegemony)였으며, 이는 [옥중기록]에 나타난 그의 방대한 사상을 관통하는 핵심적인 연결고리가 되었다.
러시아에서 사용되었던 헤게모니(한 집단·국가·문화가 다른 집단·국가·문화를 지배하는 것)가 단지 '정치적인 지배'를 뜻하는 것이었음과는 달리, 그람시는 이를 더욱 발전시켜 계급지배의 다차원적인 속성을 분석하는 데에 이 개념을 활용했다.
즉, 한 지배 계급은 단지 힘의 강제(coercion)만이 아닌, 피지배 계급의 자발적 동의(consent)를 통해서 자신의 지배를 유지하며,
헤게모니는 이를 가능하게 하는 '문화적, 도덕적, 그리고 이데올로기적' 지도력(leadership)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테면, 성공적인 헤게모니는 피지배 계급이 지배 계급의 이데올로기를 지극히 자연스럽고 보편적이며 자신의 이익에도 부합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게 한다.
결국 지배 계급의 세계관을 피지배 계급이 적극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피지배 계급은 지배 계급의 이익을 자발적으로 따르고 또한 이에 반대하는 세력을 혐오하고 물리치고자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헤게모니 그룹은
특정 정당 및 지식인 세력과 연합한 특정 자본가 세력이 주축이 되어 형성된다―
이는 자본가 그룹 전체가 될 수도 있고, 아니면 산업 자본가 또는 금융 자본가 등 특정 분야의 자본가들이 그 역할을 맡을 수도 있다.
사회의 헤게모니는 자생적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헤게모니 그룹의 의도적인 노력에 의해 가능한 것이며, 이를 제공해 주는 주요 공간으로 학교, 언론매체, 교회 등을 들 수 있다.
그람시의 시민사회(civilsociety)는
이러한 공간을 포함하는 것으로 우리가 흔히 시민사회를 대표한다고 생각하는 시민단체(civicorganization)는 단지 부수적인 역할을 할 뿐이다.
교육, 언론, 종교 등을 통해
헤게모니 그룹의 이데올로기는 시대의 '상식'이 되며 이들 그룹의 이익은 '국가이익'으로 포장되게 된다.
또한, 사회의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그룹이 국가의 권력마저 장악하게 되면 헤게모니는 더 이상 시민사회의 영역에 머무르지 않고
국가, 즉 정치사회(politicalsociety)의 영역에까지 확장되어 자신의 이익을 실현시키기 위한 강제적 수단(군대, 경찰, 사법부 등) 역시 확보하게 된다.
같은 맥락으로, 만약 선진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회의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그룹이 경제 위기 등의 특정한 상황으로 일시적으로 국가의 권력을 장악하게 된 그룹과 충돌하게 된다면 승자는 언제나 전자가 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다수결이 중요하며
헤게모니를 쥐고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쉽게 대중적인 지지를 다시 끌어 모을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람시의 역사적 블록(historicalbloc)은
헤게모니를 가진 그룹이 그 형성을 주도하고 지속 및 강화시켜 나가는 어느 한 역사적 시기의 사회적 구성체로, 이는 경제적 하부구조와 정치적 및 이데올로기적 상부구조가 결합된 형태이다.
생산관계(productionrelations)의 총합이라고 할 수 있는 하부구조와 국가, 문화, 예술, 종교 등으로 구성된 상부구조를 매개하는 것은, 이데올로기로, 이를 통해 생산관계는 재생산되며 상부구조의 각각의 영역은 이데올로기적인 통일성으로 결합된다.
예를 들어,
'파시즘'이라는 이데올로기는 경제 운용 방식으로 조합주의(corporatism)를 택하여 이에 필요한 생산관계를 재생산하는 역할을 하면서 동시에 일당 독재를 특징으로 하는 국가 형태를 정당화하고 문화, 예술, 종교 등은 이를 강화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역사적 블록의 형성에 있어서 그람시는 특히 지식인의 역할에 주목했다.
그는 '누구나 계란 요리를 만들 수 있지만 모두가 전문적인 요리사는 아닌 것처럼, 누구나 지식인의 역할을 할 수 있으나
모두가 전문적인 지식인은 아니다.'라고 하면서 일반 사람들의 세계관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치는 하나의 사회적 범주(socialcategory)로 지식인을 상정하고 여기에 학자, 작가, 언론인, 관료, 정치인, 종교인 등을 포함시켰다.
이들 지식인은 해당 자본가 세력의 자본 축적 방식을 옹호하는 이데올로기를 사회 전체의 상식으로 변모시키는 데 핵심적인 기능을 수행하며 기존 역사적 블록의 공고화에 이바지한다.
마찬가지로, 지식인은
대항 헤게모니(counter-hegemony)의 창출 및 기존 역사적 블록의 해체에 있어서도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
그들은 지금 상식으로 받아들여지는 것들이 사실은 현 헤게모니 그룹의 이익을 위한 것이며, 자신의 이익과는 오히려 상충한다는 것을 대중에게 깨우쳐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람시가 꿈꾸었던 혁명은
정권 탈취 방식의 기동전(warofmanoeuvre)을 통한 혁명이 아닌, 대중과 깊이 연계된 유기적 지식인(organicintellectual)이 진지전(warofposition)을 통해 서서히 대중의 상식을 바꾸고 세계관을 변화시켜 그들 스스로가 혁명 세력의 진정한 일원이되게 할때 비로소 가능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기동전/진지전
기동전과 진지전은 이탈리아 공산당 창설자이자 사상가인 안토니오 그람시의 정치사상에 쓰인 개념이다.
'진지전'은 시민사회내에서 장기적인 지적, 도덕적, 문화적 헤게모니를 장악하기 위한 투쟁전략이다.
'기동전'은 '진지전'에 대응하는 용어로서, 러시아 혁명과 같은 일차원적인 국가권력을 획득하기 위한 탈권투쟁과 같은 투쟁전략을 통칭한다.
그람시는 서구 자유주의 국가들에선 '기동전'이 아닌 '진지전'이 필요하다고 했다.
까닭은 지적이며 도덕과 문화적으로 정착한 사회에서는 기습적인 기동전이 적합치 않고, 장기적 치밀한 진지전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게되었던 것이다.
기동전은 제정 러시아와 같이 낡고 약한 고리에서나 가능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부르조아 사상이 지배하는 곳에서 프롤레타리아는, 이데올로기 전쟁을 수행하며 새로운 도덕과 이상, 가치관을 구축해 나가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람시는 혁명을 위해 지식인이 민중 속에서 지배자들과 겨룰 수 있는 대항 헤게모니를 얻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러기 위해서 참호 속에 숨어서 싸우듯, 장기전을 펴는 혁명의 '진지전'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던 것이다
오늘날 한국 좌파 운동권세력이 제도권에 침투하여 한국정치의 핵심 주체세력으로 자리잡을수 있었던 그 원동력이 다름아닌 안토니오 그람시의 이론이었고,그 이론에 따라 진지전을 펼쳐나온 것이 대한민국을 좌경화로 새빨갛게 물들여 놓고 말았다.
지금 한국은 좌경화된 암흑의 늪을 벗어나려면, 저들의 이 무서운 진지전(참호전)전략전술을 올바로 깨닫고,그보다 차원 높은 대안의 이념을 하루빨라 찾지않으면 아니된다.
지금 대한민국은 위로는 대통령과 청와대,더불어 민주당이란 집권여당은 말할것도 없고,입법,사법,행정,언론과 문화영역에 이르기까지 모두 좌경화된 붉은 사상이 거의 완벽하게 물들고 말았다.
심지어는 명색이 야당이라는 미래 통합당도, 저들이 쳐놓은 덫에 걸려 보수 우파적 성향을 스스로 포기하고,중도 내지는 좌편향적인 노선을 취하려는 현실은 참으로 답답하고 안타까운 현실이다.
해방이후 김일성 괴뢰도당이 끊임없는 무력도발을 감행해왔던 방법이 무력침투에 의한 1차적 기동전이었다면, 주체사상이란 사상이 대학가를 침투해 운동권학생들을 만들어 대학가를 뒤흔들어 나가는 한편, 이들이 노동계와 농촌등에 파고들어 민주노총과 카톨릭 농민회등의 조직을 만들어 투쟁 전위대가 되도록 했던 작전은 2차적 진지전의 일환이라 할수 있다.
북한은 남한에 김일성 장학금을 주어 대학생을 포섭하고, 그 장학금으로 공부한 학생들이 제도권으로 진출하게도 하고, 문화계와 언론계로 깊숙히 타고든 것 역시 2차적 방법인 진지전인 셈이다.
그러나 이제는 진지전이 성공괘도에 이르렀다고 보기 때문에,기동전과 진지전이 동시에 작동할수 있는 단계로 접어들었다고 보아야 한다.
향후 저들의 방법은 1,2차 방법이 동시에 진행될 확률이 매우 높다.
민주세계는 다수결 원칙이라는 커다란 맹점을 가지고 있다.
아무리 옳은 주장을 펴는 진실이 있다하더라도,다수가 아니라고 부정해 버리면 진실은 꼼짝없이 입을 다물어야만 한다.
좌파세력들은 이러한 민주세계의 맹점을 너무도 잘알고 있기 때문에,숫자만 많으면 무슨 일이든 밀어 부칠수 있다는 신념으로 보수 우파를 제압하려 할것이 명약관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