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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체결됨
겔 20:33-44
33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능한 손과 편 팔로 분노를 쏟아 너희를 반드시 다스릴지라
34 능한 손과 편 팔로 분노를 쏟아 너희를 여러 나라에서 나오게 하며 너희의 흩어진 여러 지방에서 모아내고
35 너희를 인도하여 여러 나라 광야에 이르러 거기에서 너희를 대면하여 심판하되
36 내가 애굽 땅 광야에서 너희 조상들을 심판한 것 같이 너희를 심판하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7 내가 너희를 막대기 아래로 지나가게 하며 언약의 줄로 매려니와
38 너희 가운데에서 반역하는 자와 내게 범죄하는 자를 모두 제하여 버릴지라 그들을 그 머물러 살던 땅에서는 나오게 하여도 이스라엘 땅에는 들어가지 못하게 하리니 너희가 나는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39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내 말을 듣지 아니하려거든 가서 각각 그 우상을 섬기라 그렇게 하려거든 이 후에 다시는 너희 예물과 너희 우상들로 내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지 말지니라
40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 온 족속이 그 땅에 있어서 내 거룩한 산 곧 이스라엘의 높은 산에서 다 나를 섬기리니 거기에서 내가 그들을 기쁘게 받을지라 거기에서 너희 예물과 너희가 드리는 첫 열매와 너희 모든 성물을 요구하리라
41 내가 너희를 인도하여 여러 나라 가운데에서 나오게 하고 너희가 흩어진 여러 민족 가운데에서 모아 낼 때에 내가 너희를 향기로 받고 내가 또 너희로 말미암아 내 거룩함을 여러 나라의 목전에서 나타낼 것이며
42 내가 내 손을 들어 너희 조상들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 곧 이스라엘 땅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들일 때에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 줄 알고
43 거기에서 너희의 길과 스스로 더럽힌 모든 행위를 기억하고 이미 행한 모든 악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미워하리라
44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너희의 악한 길과 더러운 행위대로 하지 아니하고 내 이름을 위하여 행한 후에야 내가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겔 20:33-44 / 나 여호와가 확실히 살아 있음을 걸고 맹세하지만 내가 지금도 너희를 다스리듯이 앞으로도 언제까지나 너희를 다스릴 것이다. 내가 얼마나 강한 능력으로 너희를 다스리며 얼마나 무섭게 분노를 터뜨리는지 너희가 몸으로 느끼게 될 것이다. 34) 지금 온 세상에 흩어져 살고 있는 너희를 내가 무섭게 분노를 터뜨려 강한 손을 펴고 팔을 드높이 뻗쳐 세계 만민 중에서 데리고 나와 35) 광야로 끌어 가겠다. 거기서 내가 너희를 내 심판대 앞에 세워 놓겠다. 36) 내가 너희 조상들을 애굽에서 광야로 데리고 나와 책임 추궁을 하였던 것과 똑같이 이제는 내가 너희를 세계 만방에서 데리고 나와 광야에 모아놓고 책임 추궁을 하겠다. 나 여호와가 하는 말이다. 37) 목자가 자기 양들을 하나씩 자신의 양몰이 지팡이 밑으로 통과시키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도 너희를 하나씩 내 앞에 세워 놓고 조사한 뒤에 너희가 다시 내 백성이 되어 나와 맺은 계약의 규정대로 살게 만들겠다. 38) 그러나 내게 순종하지 않았던 자들과 내게 반항하고 떠나갔던 자들은 모조리 골라 내어 내 백성 가운데 두지 않겠다. 지금 세계 여러 나라에 끌려가 있는 그들을 일단 거기서 데리고 나오기는 하겠지만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면 그제서야 내가 여호와라는 것을 너희가 깨닫게 될 것이다! 39) 너희 이스라엘 사람들아, 나 주 여호와가 하는 말을 들어라. 너희는 각자 자신이 섬기는 우상들을 내버려라. 불을 질러라. 그러면 내 말이 너희에게 들릴 것이다. 너희가 지금까지 온갖 우상에게 바치던 그 더러워진 제물로 내 거룩한 아름을 더 이상 더럽히지 않게 될 것이다. 40) 이스라엘 땅 한복판에 있는 나의 거룩한 산에서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나를 섬기게 되면 거기서 너희가 규정대로 바치는 온갖 제물과 첫 열매와 성물을 내가 기쁘게 받겠다. 41) 그때에는 너희가 나의 제단에 살라 바치는 제물이 큰 기쁨이 되어 내가 다시 너희에게 사랑을 베풀어 주겠다. 흩어져 살고 있는 너희를 세계 각처에서 내가 데리고 나올 때에는 그토록 새로워질 것이다. 이렇게 너희를 다시 구출해 내면 온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내가 거룩한 하나님인 줄을 알게 될 것이다. 42) 또 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주기로 맹세하였던 땅으로 너희를 다시 데리고 들어가면 너희도 그것을 보고 내가 여호와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43) 그때에는 너희가 얼마나 부끄럽게 살아왔으며 또 온갖 죄와 악행을 저질러 자신을 더럽혀 놓았던가를 깨닫고 자신이 미워져 구토를 느낄 것이다. 44) 이스라엘 백성아, 너희가 비록 타락한 인생길을 걸어오고 낯뜨거운 짓을 밥 먹듯 하였으나 내 이름을 위해 너희를 심판하여 없애지 않고 다시 용납하겠다. 그러면 내가 여호와인 줄을 너희가 깨닫게 될 것이다. 내가 이 말을 하였으니 그대로 실천할 것이다.'
패역한 이스라엘의 역사를 지적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심판과 본토 귀환, 선민관계의 회복과 그들의 대각성을 예고하십니다.
분노를 쏟아(33)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을 심판하여 이방 가운데 흩으실 것을 예고하십니다.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라고 하시며 하나님의 심판은 아무도 막을 수 없고 피할 수 없음을 선포하십니다. ‘능한 손과 편 팔로 분노를 쏟아 너희를 반드시 다스릴지라’라고 하시며 그들을 반드시 심판하시고 본토로 귀환하게 하리라고 선포하십니다. 포로귀환은 그들의 패역을 용납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에 합당한 믿음을 회복해야 한다는 놀라운 은혜였습니다.
막대기와 언약의 줄(34-39) 고대 근동의 목자들이 양의 우리 입구에서 돌아오는 양들을 ‘막대기 아래로 지나가게 하며’ 일일이 양들을 점검하고 검사하였던 같이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을 흩어진 이스라엘 자손을 모아 그들을 일일이 점검할 것입니다. 반역하고 범죄하는 모든 자는 제하여 버릴 것이며 우상을 섬기던 자들은 심판하실 것입니다. ‘언약의 줄로 매려니와’라는 말씀은 짐승의 주인이 그 짐승을 단단히 매어서 다른 곳으로 가지 못하게 하고 자기에게 확실히 속하게 하는 것처럼 이스라엘을 회복시키며 의로운 자들을 언약의 줄로 매어서 자기에게 확실하게 속하게 하실 것이라는 언약입니다.
내 거룩한 산에서(40-44)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신실하신 성호로 이스라엘의 변화와 회복을 예언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온 족속이 거룩한 산 이스라엘의 높은 산에서 다 나를 섬기리니’ 이것은 예배 회복에 대한 예언입니다. ‘거기에서 내가 그들을 기쁘게 받을지라’라는 말씀은 회복된 이스라엘 자손들의 예배와 예물과 첫 열매와 성물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것을 보여줍니다. 이는 그들이 여호와로 인해 거룩해지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회복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런 죄악으로부터 완전히 돌아설 것이며, 하나님을 욕되게 했던 그들은 여러 나라 가운데서 여호와 하나님의 거룩함을 드러내는 도구가 될 것이며, 여호와 하나님을 알아감에 따라 자신들이 행한 모든 부끄럽게 여기며 대각성을 하게 되라라고 예언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더러운 행위대로 갚지 아니하시고 자신의 거룩한 이름을 위하여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고 그들을 회복시키시는 자비의 하나님이십니다.
적용: 고난을 겸손하게 받으십니까? 그것은 자포자기, 원망, 거부를 위함이 아니라 회복을 위한 소중한 시간입니다.
당신이 비록 심히 연약하고 천한 존재라 할지라도 믿음으로 씨앗(하나님의 말씀)을 뿌리고 낙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영적인 생명은 씨 뿌리는 자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인 씨앗에 있기 때문입니다.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뜻을 이루며 나의 명하여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사 55:11)
< 설 교 >
언약의 줄
겔 20:33-39 / 피영민 목사
서론
하나님의 택한 백성은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끊임없는 유혹이 있었습니다. 그 유혹은 이방 나라인 애굽, 앗수르, 바벨론이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보다 잘살고, 강대하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의 우상이 여호와보다 강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즉 그들은 이방 국가의 형통함과 번영을 보고 이방 국가가 섬기는 우상들에게 끊임없이 미혹을 받았습니다. 결국, 그들은 우상들이 축복과 번영을 준다고 하여 애굽의 우상과 앗수르의 우상을 들여왔습니다. 심지어 아이들을 불태워 희생 제사를 드리는 몰렉 신까지 들여왔습니다. 이런 유혹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다윗 시대의 성가 대장을 지낸 아삽도 미혹을 받았습니다. 시 73편 12절로 13절입니다 “볼지어다 이들은 악인들이라도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욱 불어나도다 하나님을 섬기고, 성가 대장이 되어 내가 내 마음을 깨끗하게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 하나님을 섬기고, 성가 대장이 되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는데, 세상 사람들을 보니 악인들이 번영하고, 평안하고, 재물을 더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삽은 하나님을 섬기고, 봉사하는 것이 실로 헛된 일이라고 시험을 받았던 것입니다. 시편 73편 2절로 3절입니다.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 하나님을 섬기는 주의 종조차도 이방 나라의 번영을 보고 이방 나라의 우상에 마음이 흔들리고, 실족할 뻔했다고 했습니다. 이것을 볼 때에 일반 백성이 느끼는 유혹이 얼마나 큰지 짐작하고 남음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삶의 고난이 오고, 예수 믿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번영이 오고, 형통하는 것을 보면 우리도 비슷한 유혹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에스겔 20장은 이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에스겔 20장 1절을 보게 되면 에스겔 20장의 메시지가 언제 임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에스겔이 포로로 잡혀 온 것이 B. C 598년입니다. 그로부터 칠 년이 지났으니 B. C 591년에 임한 말씀입니다. 에스겔이 포로 된 지 오 년 째에 말씀이 한 번 임했고, 육 년째에 임했고, 칠 년째에 말씀이 임했습니다. 매년 한 번씩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장로 두어 사람이 와서 에스겔에게 하나님의 뜻을 물으려고 했습니다. 무엇을 물었는지 뻔합니다. ‘하나님이여, 우리가 포로에서 언제 해방되겠습니까? 예루살렘으로 언제 돌아가겠습니까? 이방 나라처럼 언제 번영을 누리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이미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지은 죄가 너무 커서 바벨론의 포로로 칠십 년을 살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바벨론에서 자리 잡고 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장로 두어 사람이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 자신의 마음에 맞지 않았습니다. 입맛에 맞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깐 하나님이 에스겔을 통해서 자기들 입맛에 맞는 말씀을 주시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미 말씀을 주셨는데 말씀을 또 주시겠습니까? 사람들이 우상을 숭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상을 숭배하는 것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의 다른 점이 있습니다.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은 자신의 소원을 갖고 있습니다. 이 소원을 우상에게 빌어 이루려고 합니다. 자신의 뜻에 맞게 신을 조정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소원을 이루는 웨이터입니다. 이것이 샤머니즘(shamanism)의 정신이고, 이방 종교의 정신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은 정신이 다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순종하는 정신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조종해서 욕심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에 순종하려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우상 숭배와 기독교는 이 점에서 결정적으로 다릅니다.
이 장로들은 마음속으로 우상 숭배하는 정신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물으려고 하니깐 하나님이 대답하지 않습니다. 대답 하지 않으신 대신에 장로들 마음속에는 우상 정신이 있다는 것을 지적하셨습니다. 에스겔 20장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설명하십니다. 하나님은 역사에는 귀재이십니다. 너희 우상 숭배는 애굽에서 시작되었고(5-9절), 광야 40년 동안에도 우상 숭배는 계속되었고(10-26절),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도 우상 숭배는 계속되었고(27-29절), 심지어는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가서도 우상 숭배를 포기하지 않고 있다(30-32절)는 것입니다. 에스겔 20장 32절입니다. “너희가 스스로 이르기를 우리가 이방인 곧 여러 나라 족속 같이 되어서 목석을 경배하리라 하거니와 너희 마음에 품은 것을 결코 이루지 못하리라” 하나님이 장로들의 마음속 생각을 정확히 지적하십니다. 너희 마음에 품은 것은 결코 이루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이런 마음을 가지고 나올 때 하나님은 어떤 반응을 보이시겠습니까?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세 가지 반응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Ⅰ. 그런 계획이 성공 할 수 있을까?
택한 백성이 마음에 우상을 품고 우상 숭배하는 사람들이 누리는 번영과 부요를 누리고자 할 때 그런 계획이 성공 할 수 있습니까? 답은 ‘결코 성공 할 수 없다’입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우상 목석을 숭배하고,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이방인과 구별되지 않은 채 살려고 하면 하나님은 그런 계획을 절대 인정하지도 않고, 축복하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불신자들이 우상 숭배하는 것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상관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이 우상을 마음에 품고, 우상 숭배하는 것에 대해서는 결코 성공할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본문 33절입니다.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능한 손과 편 팔로 분노를 쏟아 너희를 단정코 다스릴찌라” 하나님이 그런 마음을 품고 나오는 주의 백성은 맹세하시고 엄하게 다스린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우상 숭배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자녀들 결혼시킨다고 날 받으러 다니지 마시기 바랍니다. 점치러 다니지 마시고, 사주팔자 보러 다니지 마시기 바랍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가진 사람들이 귀신에게 물으러 다니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그런 일을 엄하게 다스리십니다. 또 하나님의 백성은 명절에 유교식으로 제사 드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시기를 바랍니다. 분노로 엄하게 다스리신다는 말씀을 마음에 새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택한 백성이 이방 나라에 숨어 우상 숭배 가운데 번영을 누리도록 내버려 두시지 않습니다. 본문 34절입니다. “능한 손과 편 팔로 분노를 쏟아 너희를 열국 중에서 나오게 하며 너희의 흩어진 열방 중에서 모아내고” 하나님이 구원하시겠다는 말이 아닙니다. 택한 백성이 이방 나라에 섞여 살고, 편하게 사는 것을 내버려 두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분노하시므로 이방 나라에서 모두 끌어내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차피 우상 숭배하는 사람들 속에 섞여 잘 먹고, 잘 살려고 하는 계획은 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하나님이 허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끌어내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세상 속에서 세상의 방식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숨어 살려는 것을 인정치 않으십니다. 요나를 보십시오. 니느웨에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했는데, 그곳 사람들이 싫어서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도망갔습니다. 요나는 배 밑창에서 잠만 잤습니다. 하나님이 그냥 놔두실 리 없습니다. 풍랑이 일어나게 하시어 선원들을 혼란스럽게 만듭니다. 누구 때문에 풍랑이 일어났는지 제비를 뽑았는데, 요나가 뽑힙니다. 하나님은 배 밑창에서 요나를 끄집어내어 고래 뱃속에 집어넣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것처럼 하면 안 됩니다. 아닌 척하고 술집에 앉아 있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주의 백성이 아닌 것처럼 숨어서 우상 숭배하고, 잘 먹고, 잘 사는 것을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잘 알고, 마음에 품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Ⅱ. 택한 백성이 우상숭배하고 이방나라에 숨어 살면 어디로 인도하시는가?
본문 35-36절입니다. “너희를 인도하여 열국 광야에 이르러 거기서 너희를 대면하여 국문하되 내가 애굽땅 광야에서 너희 열조를 국문한 것 같이 너희를 국문하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방 나라에 섞여서 우상 숭배하고, 잘 먹고, 잘살고 있는 사람들을 끄집어내어 열국 광야로 모으십니다(the desert of the nations). 그리고 그것은 우상 숭배했던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땅 광야에서 국문한 것처럼 열국 광야(the desert of the land of Egypt)에서 국문하겠다는 것입니다. 이집트라는 땅 자체가 광야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살게 하실 때 처음부터 노예로 살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요셉이 총리 될 때에는 가나안 땅에 기근이 들어 야곱과 그 아들들을 살려 주시려고 애굽으로 오게 한 것입니다. 요셉은 고센이라는 땅을 주어 이스라엘 백성이 잘 먹고, 잘 살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의 우상에게 이끌리고, 끌어들이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애굽왕을 바꾸어 버립니다. 요셉을 알지 못하는 다른 왕이 일어나 노예로 만든 것입니다.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노예 생활을 하게 된 원인은 우상 숭배에 있다는 것입니다. 노예 생활의 고통을 애굽땅 광야라고 하는 상징적인 표현으로 묘사했습니다. 그리고 모세를 통해 출애굽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젖과 꿀을 먹으면서도 우상 숭배의 못된 습관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열국 광야로 이끌어 가셨습니다. 이 열국 광야는 포로 생활의 고통을 상징하는 표현입니다. 노예 생활의 고통은 애굽땅 광야요, 포로 생활의 고통은 열국 광야입니다. 열국의 우상을 섬기고, 열국처럼 번영을 누리려고 했지만, 포로의 존재가 되었습니다. 열국 광야는 포로 생활의 고통을 상징하는 영적인 광야입니다. 이사야 21장 1절에 보면 바벨론을 광야라고 불렀습니다. 또 에스겔 19장 13절을 보면 바벨론을 광야, 메마르고 가물이 든 땅이라고 불렀습니다. 이것은 물리적인 땅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바벨론은 열국 광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서 우상 숭배를 심하게 하니깐 하나님이 바벨론으로 끌어모아 칠십 년 동안 국문을 받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멀리하고, 우상을 가까이하면 하나님이 영적 광야로 이끌고 가십니다. 고통을 주십니다. 슬픔이 있게 하시고, 눌림이 있게 하는 것입니다. 또 영적으로도 메마르게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이런 영적인 광야가 찾아오면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뜻을 알고, 순종하며 살았는가?’ 또 ‘내가 내 욕심을 가지고 하나님께 욕심을 이루어 달라고 했는가?’ 샤머니즘 자세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지는 않았는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웨이터가 아니십니다. 하나님을 내 욕심을 이루는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 바로 우상 숭배입니다. 우상 숭배하게 되면 나에게 도움을 주리라 생각했던 존재가 도리어 변하여 고통을 주는 존재가 됩니다. 이것이 열국 광야입니다.
Ⅲ. 하나님이 열국광야로 인도하시는 목적은 무엇인가?
에스겔 20장은 보배 같은 세 가지 목적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 막대기 아래로 지나게 하는 것입니다. 본문 37절입니다. “내가 너희를 막대기 아래로 지나게 하며 언약의 줄로 매려니와” 이스라엘 백성은 이 말씀의 의미를 잘 알고 있습니다. 레위기 27장 32절에 보면 막대기 아래로 지나는 것이 무엇인가를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소나 양의 십분 일은 막대기 아래로 통과하는 것의 열째마다 여호와의 거룩한 것이 되리니”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으로부터 소와 양의 십일조를 받을 때에는 문을 다 열어 놓는 것이 아니고 반만 열어 놓습니다. 그리고 문에 막대기를 놓습니다. 한 마리씩만 막대기 밑으로 지나가게 합니다. 하나님이 열 번째를 하나님의 십일조로 받으시는 것입니다. 스무 번째, 서른 번째 받으시는 것입니다. 십일조를 받은 여호와의 것을 묶어 놓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악하니깐 열 번째, 스무 번째를 약한 것, 못생긴 것으로 갖다 놓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소와 양이 자연스럽게 들어가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것아 막대기 아래로 지나가는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어떤 농부에게 소가 두 마리 있습니다. 한 마리를 하나님께 드리려고 하는데 한 마리가 병들어 죽게 되자 죽은 소가 하나님의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식으로 백성도 못된 마음을 품을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법으로 만들어 놓으신 것입니다.
짐승이 막대기 아래로 지나가면 어떤 결과가 나옵니까? 하나님의 것과 아닌 것이 구별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어려운 이 광야를 지나게 되면 참된 믿음이 있는 사람과 가짜 믿음을 가진 사람이 구별되는 것입니다. 신앙도 어려움을 겪고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사람이 있고, 하나님도 별 볼일 없다고 나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좀 어렵다고 나가는 사람은 가짜입니다. 하나님의 소유가 아닙니다. 어려워도 하나님을 더 가까이하고 신앙을 지키는 사람은 참된 백성입니다. 6·25와 관련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인민군이 총을 겨누면서 “예수 믿는 사람은 남아 있으시오! 믿지 않은 사람은 다 나가시오!” 다 나가고 목사님과 장로님만 남았습니다. 그 때야 인민군이 총을 내려놓고 “나도 예수 믿는 사람인데, 이 교회에 진실 되게 예수 믿는 사람 둘밖에 없습니다. 당신 둘만 살려 주겠습니다.” 포로 생활의 고통을 겪으면서 어떤 사람들은 이방인에게 흡수되어 이방인처럼 되고,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택한 자가 되어, 남은 자(the remnant)가 되어 믿음을 지키는 사람이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남은 자를 구별해 내십니다. 그러기 위해서 막대기 아래로 지나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둘째, 남은 자를 언약의 줄(the bond of the covenant)로 매게 하려는 것입니다. 어떤 설교자는 검은 보자기에 싸여 있는 다이아몬드라고 말을 했습니다. 막대기 밑으로 지나서 여호와 하나님의 소유로 된 짐승들을 다 묶어서 구별해 놓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열국 광야 가운데 참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을 하나님이 언약의 줄로 묶어서 참된 구원, 영생을 주시는 것입니다. 스펄전 목사님은 이 언약은 ‘은혜의 언약’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남은 자를 구원하시는 은혜의 언약입니다. 저도 이 말에 동조합니다. 왜냐하면, 에스겔 선지자는 은혜의 언약을 계속 강조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에 36:24-28).
이것은 신약 시대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령을 받게 될 남은 자들, 하나님의 택한 자들을 통해 이루어지는 은혜의 언약(새 언약)입니다. 남은 자들도 다른 사람들과 같습니다. 죄를 지으며 살았고, 우상 숭배에 빠졌습니다. 특별히 거룩해서 택함 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택하시고, 무조건적인 은혜를 주심으로 남은 자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여기에 보면 하나님이 모두 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너희를 막대기로 지나게 하고, 언약의 줄로 묶고, 너희로 하여금 나를 예배하게 하는 백성이 되게 하리라”는 것입니다. 모두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성도들도 잘나서 구원받은 것처럼 자랑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도 불신자와 같습니다. 하나님이 무조건적으로 택하여 은혜를 주신 하나님을 우리는 자랑하고 높여야 할 줄로 믿습니다. 저도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지 않았으면 저는 벌써 술 먹고 죽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로 목사가 되었습니다. 타락하고 부패한 사람을 가리켜 나쁜 사람이라고 말하지만, 하나님이 은혜를 주지 않았으면 우리도 타락하고 부패한 사람이 될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택하시고, 남은 자가 되어 은혜의 언약을 따라 언약의 줄로 구원받게 되었다는 것을 감사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남은 자로 하여금 참된 예배를 회복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1) 참된 예배는 참된 회개(에 20:43)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무슨 죄가 크다고 죄인이라고 하십니까, 무슨 죄가 있습니까?’라고 말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반항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배드리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2) 참된 예배는 참된 지식(에 20:44)이 있어야 합니다. 참된 지식을 가지고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여기서 참된 지식이란 머리로 아는 지식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체험적으로 아는 지식을 말합니다. ‘내가 예수 믿고 기도했더니 내 기도를 들어주셨구나’, ‘내 눈에 보이지 않아도 하나님은 살아계시도다’ 이것이 체험적인 지식입니다. 예수 믿고 장로 되고, 권사 되고, 집사 되었지만 하나님을 한 번도 체험하지 못했다면 얼마나 부끄러운 신앙입니까? 기도해서 한 번도 응답받은 적이 없다면 얼마나 부끄럽습니까? 성령이 내 안에 계신지, 안 계신지 모른다면 부끄러운 일입니다. 이번 양수리 수양관 집회 모두 올라오셔서 하나님을 체험하고, 성령 충만 받기를 바랍니다. 체험적인 지식을 갖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올라와서 부르짖어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3) 참된 예배는 참된 헌신(에 20:40)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첫 열매도 요구하시고, 예물도 요구하실 때에 이것은 하나님의 것이라고 받으시라는 헌신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성도는 불신자들하고는 인생의 성공하는 원리가 다릅니다. 불신자들은 우상 숭배하고 잘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상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상관하십니다. 우리가 우상 숭배해서 절대 성공할 수 없습니다. 예배 생활에서 성공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인생 전체가 성공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주일 되어 예배에 나오셨습니다만, 계속 나오다 보면 매너리즘에 빠질 수 있습니다. 제가 아는 분 중에 이주일 집사라는 분이 있습니다. 이주일에 한 번씩 교회에 나오는 분이십니다. 그렇게 신앙 생활해서는 안 됩니다.
결론
예배 생활에 성공해야 합니다. 한 번이라도 빠지면 내 영혼이 곤비하고, 인생의 모든 일이 제대로 안 돌아간다는 것을 체험해야 합니다. 예배가 먼저입니다. 영혼이 잘 되면, 범사가 잘 되고, 육신의 강건한 복이 따라오게 됩니다. 예배의 대상은 창조주요, 구원자이신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와 하나님만이 예배의 대상입니다. 성도가 마음에 우상을 품으면 인생에 고통이 찾아옵니다. 열국 광야가 찾아옵니다. 또 예배의 동기는 내가 죄인임에도, 지옥 가야 할 마땅한데도, 하나님은 나를 특별히 택하시고, 구원해 주셔서 내가 구원 받은 성도가 되었다는 것, 이것이 은혜다라는 것을 알고 드리는 것이 참된 예배의 동기입니다. 예배의 자세는 이미 저지른 악과 죄를 부끄러워하면서 하나님께 전적으로 헌신하면서 드려야 합니다.
우리의 주인은 누구이십니까? 내 생명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자신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내 생명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피 값을 주고 나를 사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신앙인이 되었다고 하는 것은 내가 주인이 아니고, 예수가 주인이라는 것을 알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지방회가 있어서 월드비전교회에 갔습니다. 오영택 목사님이 담임목사님이십니다. 목양실에 가보니 큰 현수막이 붙어 있었습니다. 현수막에는 “너의 주인은 예수님임을 잊지 마라”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매일 그것을 보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나의 생명, 시간, 물질의 주인이십니다. 이 모든 것을 달라고 하면 드려야 합니다. 이것이 신앙인 것입니다. 주인 뜻을 알고, 그 뜻에 순종하며 사는 신앙인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열매를 요구하시는 하나님
겔 20:40 / 강성창 목사
영국 남동부의 하트포드셔 왓포드 교회의 묘지에서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합니다. 그 교회 묘지에는 네모꼴의 대형 무덤이 있었는데 그 한가운데 큰 무화과나무가 자라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무덤은 무신론자인 한 여인의 무덤이었는데 그녀는 임종 직전까지 하나님께 도전했다고 합니다. 심지어는 임종의 병상에서 '만약 하나님이 계신다면 내 무덤에서 나무가 나와 자라게 할 것이다.'라고 공언했다고 합니다. 평생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고 공언했던 그녀의 죽음이 오히려 하나님은 살아 계시고 전능하신 분으로서 인간이 회개하기를 오래 참고 기다리고 계심을 무언으로 증거하고 있다고 말들 합니다.
종려주일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시고 성전을 정결케 하시고 베다니에 오시어 우하셨던 주님 성에 들어가시려 하실때 매우 시장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주님은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얻으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찾으신 무화과는 열매가 없이 잎만 무성하였습니다. 열매 없이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향해 주님은 저주하셨습니다.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가 주님의 저주를 면치 못했듯이 열매를 맺지 못하는 성도 또한 그리스도의 책망을 받을 것입니다.
주님은 열매 맺기를 원하십니다
요 15:1-2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요15: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예수께서는 자신을 포도나무로, 아버지를 포도원 농부로 비유하시어 성도와의 관계를 설명하셨습니다. 성도는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로서 열매를 맺을 의무가 있습니다. 포도나무에 있어서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는 농부에 의해 잘려지게 됩니다. 다른 열매 맺는 가지의 영양분을 빼앗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과실을 맺는 가지는 농부가 귀히 여겨 깨끗케 해줍니다. 더 좋은 과실을 많이 맺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는 예수께서 자기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믿음으로 열매 맺어야 함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열매 맺지 못한 가지가 제거되듯이 열매 없는 자는 아버지께 심판을 받아 멸망당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기 안에 거하라고 말씀하시면서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듯이 자기 안에 거하지 않는 자는 열매를 맺을 수 없음을 교훈하셨습니다.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말라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은 가지의 생명의 근원이 나무의 뿌리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 안에 거하지 않으면 생명을 잃어 아무런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를 떠나서는 인간이 아무런 선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은 인간의 타락한 본성으로 인한 죄악성 때문입니다. 열매 맺지 못하는 가지가 나무에서 잘리워져 말라지므로 사람들이 불에 던져 사름같이 예수 안에 있지 않은 자들은 불로 사름 같은 멸망의 심판을 면할 길이 없습니다.
많은 열매를 맺음으로씨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그들이 예수의 제자가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요구하신 열매를 요구 하실까요
신령한 열매입니다
회개의 열매
(마3:7-10)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세례 베푸는 데로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세례 요한이 선포한 내용은 죄인을 향한 회개에의 촉구였습니다. 당시 유대인들, 특히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것을, 즉 선민이라는 것을 내세우면서 형식적으로만 율법을 지켰습니다. 세례 요한은 그들의 그러한 가증스러운 하나님 경배를 지적하면서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참된 회개를 하여야만 한다는 것을 선포함으로써 그리스도를 통한 참된 구속의 말씀을 예시하였습니다. 세례 요한은 죄를 회개하되 회개하였으면 회개한 자답게 회개에 합당한 열매, 곧 변화된 생의 모습, 의로운 삶의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실로 세례 요한은 의문의 율법이 지배하는 구약 시대를 넘어서 마음과 육체가 다 하나님께 온전히 향하여야만 구원에 이른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요14:21,24)과 일치하는 진리를 전파하였습니다.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
(롬6:21-23)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냐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라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는 '성화의 열매'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 '성화의 열매'를 성도가 현재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성화의 열매'를 미래에 이루어질 것으로 말하지 않고 성도가 현재 소유하고 있다는 점을 진술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성화의 열매'를 그리스도로부터 받았습니다
(고전 1:30)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고전 6:11)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
동시에 '성화'를 수행해야 할 의무를 지닌 신분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의 가르침대로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습니다
(요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요 6:47)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요 6:5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그렇지만 완전한 의미의 영생은 마지막 부활 때에 거룩함의 열매를 소유한 자에게 주어집니다.
성령의 열매
(갈5:22-23)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입니다. 이와 같은 열매는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 가는 사람들의 삶 속에서 맺어지는 것으로서,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자연스럽게 맺어지는 열매입니다.
포도나무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으면 저절로 열매를 맺음같이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는 자는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빛의 열매(엡5:8-9)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바울은 성도가 구원받기 전에는 어두움에 속해 있었지만 이제은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태어나 빛의 자녀가 되었으므로 빛의 자녀답게 행하라고 명했습니다. 성도가 빛의 자녀가 되는 데에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로만 가능했지만 빛의 자녀답게 사는 데는 성도의 의지적인 결단과 노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빛을 따라 사는 것은 악인들의 부끄러운 행위를 삼가고 오직 거룩한 길로 행하는 것을 의미합 니다. 어두움에서 행하는 부끄러운 죄악들은 드러나지 않을 것 같지만 빛 앞에 서면 다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성도 는 죽은 자들의 행실에서 벗어나 그리스도와 같이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의의 열매
(빌1:9-11)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 삶은 호의호식하는 삶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은 의의 열매를 맺는 삶입니다. 내적인 열매뿐 아니라 외적인 열매도 맺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의지함으로만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게 됩니다(11절).
의와 평강한 열매
(히12:11)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
징계를 능히 감당한 자에게는 의와 평강한 열매를 맺게 됩니다. 사람이 줄 수 없는 참된 평안, 하늘의 평강은 혹독한 시련을 통하여 얻게 됩니다. 그러므로 징계를 받는 사람들은 하늘의 보화인 평안의 열매를 기대할 수 있는 기회를 받은 것입니다. 목마른 사람이 참된 물맛을 알고 배고픈 사람이 빵의 가치를 알듯이 곤고를 경험한 사람이라야 그것을 극복하는 지혜가 얼마나 귀한 것인가를 피부로 느끼게 됩니다. 우리는 징계를 통하여 하나님과 사람에게 기쁨과 유익을 주는 열매들을 맺어야 하겠습니다.
입술의 열매
(히13:15)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입술의 열매'는 감사제와 감사 찬송시 사용하는 '말'에 대한 셈어적인 표현입니다(잠 10:31; 12:14; 13:2; 18:20).
하나님께서 간절히 원하시는 제사는 하나님의 이름을 증거하고 드러내는 찬양으로서(LXX 시 49:23) 그것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은혜와 선함에 대한 응답이며 하나님과의 계약을 진실하게 이행할 수있도록 하는 조건입니다.
친절과 관용 그리고 찬미의 제사는 하나님께서 새 언약하에 있는 그리스도인 공동체에게 요구하시는 예배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구원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응답으로 '말'로는 물론 '행함'으로 제사를 드려야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러한 제사를 통해서 성취되며, 하나님은 이러한 제사를 기쁜 마음로 열납하십니다(Lane).
영적추수의 열매인 영생에 이르는 열매(요4:34-3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너희는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라
사마리아에 내려간 에수님과 제자들은 음식이 필요하였습니다. 음식을 구하려 갔던 제자들이음식을 구해왔으나 예수님과 여인과 대화가 워낙 진지했으므로 끼어들 수가 없었습니다. 대화가 끝나고 여인이 그 자리를 떠났을 때야 비로소 음식 잡수시기를 청하였습니다. 그때 예수께서는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양식'은 '음식물'입니다. 인간은 음식물을 먹음으로써 피로를 회복하고 힘을 공급받습니다. 또한 음식물은 사람에게 즐거움을 제공합니다. 만일 음식물이 기쁨을 제공하지 않는다면 인간들이 매일 먹는 식사 시간은 고역의 시간일 것입니다. 그러나 먹는 일은 인간에게 즐거운 일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즐겁게 먹고 또 식사 시간을 기다립니다. 또한 이 먹는 양식을 얻기 위해 열심히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양식은 인간의 육체만을 즐겁게 하고 만족시킬 뿐이지 인간의 영혼까지 만족시키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의 영혼을 만족시키는 것은 하나님의 일이며, 봉사를 통한 그 일의 성취입니다.
예수께서는 오랜 여행을 하셨고 그래서 갈증과 배고픔을 느끼셨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고 그녀를 회심시키시는 동안 그 기쁨으로 인해 예수의 모든 갈증과 피곤은 다 사라졌습니다. 그녀의 회심은 곧 예수의 양식이 되었던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예수님만이 느끼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교회의 모든 봉사자들이 느끼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순간적인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모든 봉사자들이 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 진리입니다.
교회 봉사자들은 육적 시각을 초월하는 영적 시각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 영적 시각은 현실과 유리되는 그 무엇이어서는 안 되고 현실로 드러나는 것이어야 합니다. 즉 선지자적 혜안을 말합니다.
일하는 자에게 돌아갈 확실한 보상이 있습니다.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 6:8).
사람이 이 세상을 살아가려면 일을 안 할 수 없지만 일을 하고 안 하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슨 일을 하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누구를 위해 하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추수의 열매
(잠3:9-10)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포도즙 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
(출23:16-19) 맥추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이니라 수장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이룬 것을 연말에 밭에서부터 거두어 저장함이니라 네 모든 남자는 매년 세 번씩 주 여호와께 보일지니라 너는 네 제물의 피를 유교병과 함께 드리지 말며 내 절기 제물의 기름을 아침까지 남겨두지 말지니라 네 토지에서 처음 거둔 열매의 가장 좋은 것을 가져다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드릴지니라
(민28:26-31) 칠칠절 처음 익은 열매를 드리는 날에 너희가 여호와께 새 소제를 드릴 때에도 성회로 모일 것이요 아무 일도 하지 말 것이며...그것들을 드릴 것이니라
(느10:35-39) 해마다 우리 토지 소산의 맏물과 각종 과목의 첫 열매를 여호와의 전에 드리기로 하였고 또 우리의 맏아들들과 가축의 처음 난 것과 소와 양의 처음 난 것을 율법에 기록된 대로 우리 하나님의 전으로 가져다가 우리 하나님의 전에서 섬기는 제사장들에게 주고 또 처음 익은 밀의 가루와 거제물과 각종 과목의 열매와 새 포도주와 기름을 제사장들에게로 가져다가 우리 하나님의 전의 여러 방에 두고 또 우리 산물의 십일조를 레위 사람들에게 주리라 하였나니...
하나님께서는 자발적인 섬김도 기쁘게 받으실 뿐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물을 요구하시기도 합니다.
패역한 이스리엘이 드리는 예물은 거절하셨습니다
(사 1:11)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그러나 관계가 회복된 이스라엘에게는 하나님이 끼뻐하시는 예물을 원하십니다. 하나님게 예물은 드림은 성도의 의무임과 동시에 특권입니다.
추수감사주일을 준비하고 새 생명 대축제를 준비하며 하나님게서 요구하시는 열매를 드릴 준비를 하여 드리고 주시는 은혜와 복을 누립시다.
여호와는 어떻게 자신을 알게 하시는가?
겔 20:32-44 / 박우택 목사
여러분은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요소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무엇이라고 대답할 수 있을까요? 저의 대학 시절에 한 교수님이 우리에게 미국의 유니온 신학교의 교수인 루이스 쉐릴이 쓴 『만남의 기독교교육』이라는 책을 소개해 주신 일이 있습니다. 이 책은 제가 성경을 이해하는 일과 또한 가르치는 일에 아주 중요한 통찰력을 주었습니다. 아주 오래된 책이지만 지금도 여전히 제가 자주 참고하는 책입니다. 저자는 이 책에서 우리가 믿는 믿음에 의미를 주고 힘을 주는 가장 중요한 동력적인 요소는 하나님과의 만남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만남은 하나님이 기독교 교회 공동체 안에 자신을 알려주시고 하나님과 인간에게 더 깊은 응답을 할 수 있도록 인도하고 계시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214-215). 대학시절에 이 책을 읽었을 때 이 말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때까지 하나님을 만난다는 개념 자체가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만난다는 개념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신 분도 없었고, 그 세계를 경험해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여러분 가운데도 이 개념이 이해가 되지 않는 분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자세히 연구하면 할수록, 신앙생활의 연륜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하나님을 만나 교제하는 일이 믿음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날 때 죄를 깨닫게 되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만날 때 하나님과 대화하며 긴밀히 교제하는 세계가 있음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날 때 모든 상황을 간섭하시며 그 능력을 나타내시기도 한다는 사실도 알고, 또한 우리 성도들과 함께 세상을 경영하시기를 원하신다는 사실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은혜로운 특권을 처음에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맺으시고 하나님을 만나고 교제하는 방법을 상세하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들이 순종할 때는 하나님을 알려주시며 그 은혜와 능력을 알게 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우상을 숭배하고 불순종하였을 때에는 하나님 자신이 어떤 존재이신지 특별한 방법으로 알려주시기도 하셨습니다.
에스겔서 안에 “그러면(그래서) 그들이 내가 여호와인 줄 알리라”라는 표현이 모두 약 65회가 나타나 있습니다. 이것은 에스겔서의 주제를 보여주는 아주 중요한 표현입니다. 이 말씀이 나타나 있는 문맥을 통하여 볼 때 역사 가운데 어떻게 여호와께서 자신을 알려주시는지 흥미로운 부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설교의 주제는 여호와는 우리가 말씀에 대하여 어떤 반응을 보이느냐에 따라 자신을 다르게 알려 주신다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이 자신을 알게 하시는 일반적인 방법
에스겔서는 모두 48장까지 특별한 방식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에스겔 1-3장은 에스겔의 선지자 소명으로 어떤 상황에서 말씀을 전해야 하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에스겔 4-24장은 이스라엘이 왜 심판을 받아야 하며, 어떻게 받게 될 것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에스겔 25-32장은 주변국에 대한 심판의 당위성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에스겔 33-48장에서는 비록 범죄하여 심판을 받아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게 되지만 하나님께서 이들을 회복시킬 것이라는 예언적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러한 내용을 모르면서 본문을 바르게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성경을 읽고 이해하는 방식 가운데 하나님이 인간의 말을 통하여 만나고, 말의 의사소통의 수단으로 삼으시기 때문에 말을 어떤 방식과 논리로 설명하고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에스겔서 안에 기록된 특별한 양식과 내용을 설교한 일이 있습니다. 에스겔 1장에서는 세상의 운명을 결정하시고 통치하시는 하늘보좌의 환상을 보여주었습니다. 에스겔 12장에서는 이사하되 포로로 잡혀가는 듯 하게 옮기기도 하고, 성벽을 뚫고 도망가는 것처럼 가게 한 퍼포먼스를 하였습니다. 에스겔 16장에서는 알레고리 방식으로 전달합니다. 거기에서 핏덩이채로 버려진 한 아이를 주어다 아름답고 기품있게 길렀더니 배은망덕하여 길러준 부모를 배신하고 음란을 행한 여성의 이야기를 설명하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연구할 에스겔 20장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당위성을 과거 역사적 사실을 통하여 논증하는 방식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내용 가운데 에스겔 20:3-31이 이스라엘의 범죄에 대한 심판의 당위성을 역사를 통해 논증하고, 에스겔 20:32-38은 그 결과로 심판을 받음으로 하나님을 알게 된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에스겔 20:39-44은 오늘날 하나님이 어떻게 자신을 알려주시는지 중요한 원리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본문에 “안다”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야다”(yadaʽ, ידע)라는 말로서 지식적으로 아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적으로 아는 것을 말하고, 상호작용을 통하여 교제하며 알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스라엘의 범죄에 대하여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당위성을 역사적으로 설명하는 내용에 보면 하나님께서 자신을 알려주신 보편적인 방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에스겔 20:11-12을 보십시오. “사람이 준행하면 그로 인하여 삶을 얻을 내 율례를 주며 내 규례를 알게 하였고 또 나는 그들을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줄 알게 하려 하여 내가 내 안식일을 주어 그들과 나 사이에 표징을 삼았었노라.” 여기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알려주신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주신 율례, 곧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알게 해 주십니다. 특히 이 본문에서 “사람이 준행하면 그로 인하여 삶을 얻을 내 율례”라고 하는 말씀을 주의해 보십시오. 여기에 “삶을 얻을”이라는 말은 “생명을 얻는다”라는 뜻입니다. 구약과 신약에 나주 나오는 표현으로 “하나님과 만나 교제하게 된다”라는 뜻입니다. 이 점에 우리 교회의 중요한 성경공부 교재인 『생명의 삶』을 공부할 때 자세하게 설명한 바가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내 율례”를 수식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사람이 준행하면 그로 인하여 삶을 얻을”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을 서술문으로 바꾸면 “하나님을 율례는 사람이 준행하기만 하면 그것을 통하여 생명을 얻게 한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과 교제하는 생명을 얻는 방법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 행할 때 하나님이 자신을 알려주신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사상은 신약성경에 더 분명하게 진술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함께 외우고 있는 말씀인데 요한복음 14:21입니다.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여러분은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사랑의 표현방법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때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을 것이고 또한 주님이 우리와 만나주시고 교제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알려주시는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 말씀대로 준행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이러한 사람을 찾기가 참 희귀합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알게 해 주시는 보편적인 방법으로 두 번째 어떻게 설명하고 있습니까? 에스겔 20:12을 보십시오. “나는 그들을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줄 알게 하려 하여 내가 내 안식일을 주어 그들과 나 사이에 표징을 삼았었노라.” 두 번째 보편적인 방법은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입니다. 여기에 보면 “여호와인 줄을 알게 하려 하여” 안식일을 주셨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알게 하려 하여”(ladaʽath, לדעת)라는 말은 히브리어 성경에 보면 목적을 나타내는 부정사(infinitive)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안식을 주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만나고 교제하도록 하기 위하여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출애굽 당시에 시내산에서 주신 말씀입니다. 출애굽기 31:13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이는 나와 너희 사이에 너희 대대의 표징이니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줄 너희로 알게 함이라.” 또한 출애굽기 31:16-17에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같이 이스라엘 자손이 안식일을 지켜서 그것으로 대대로 영원한 언약을 삼을 것이니 이는 나와 이스라엘 사이에 영원한 표징이며 나 여호와가 엿새 동안에 천지를 창조하고 제 칠일에 쉬어 평안하였음이니라.” 이 말씀에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을 가리켜 여호와와 그 백성이 맺은 언약의 표징이라고 하였습니다. 언약이라는 말은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약속을 주시고 우리가 그 약속을 믿으면 그 약속을 이루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안식일을 지킨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 언약관계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약속을 누리는 것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특히 이 말씀에서 안식일을 지키는 문제를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를 표현하는 “표징”(sign)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나는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입니다”라는 믿음의 표시가 안식일을 지키는 것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자들에게 복을 주심으로 하나님이 우리와 언약을 맺었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표징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이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요 언약의 백성이 아니라는 증명적인 행동이기 때문에 죽이라고 하였습니다. 출애굽기 31:14-15을 보십시오. “너희는 안식일을 지킬지니 이는 너희에게 성일이 됨이라 무릇 그 날을 더럽히는 자는 죽일지며 무릇 그 날에 일하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그 생명이 끊쳐지리라. 엿새 동안은 일할 것이나 제 칠일은 큰 안식일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것이라. 무릇 안식일에 일하는 자를 반드시 죽일지니라.” 여러분! 오늘날 구약의 안식일을 지키지는 않지만 그 대신에 주일을 지킵니다. 주일에 예배에 참석하는 것은 하나님이 자신을 알게 해 주시기 때문에 그 은혜와 능력을 경험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입니다.
지금까지 설명한 이 두 가지 방법, 곧 하나님의 계명을 믿고 순종하는 것과 안식일을 지키는 일은 하나님이 자신을 알게 해 주시는 일반적인 방법입니다. 이 점에 대하여 에스겔 20:19-20에서 한 번 더 설명하고 있습니다.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 너희는 나의 율례를 좇으며 나의 규례를 지켜 행하고 또 나의 안식일을 거룩하게 할찌어다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에 표징이 되어 너희로 내가 여호와 너희 하나님인줄 알게 하리라 하였었노라.”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보호자요 인도자요 싸우시는 자요 능력자라는 것을 알게 하시는 보편적이며 일반적인 방법인 율례를 지켜 행하고,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이 자신을 알게 하시는 특별한 방법
하지만 하나님께서 자신을 알게 하시는 보편적인 방법을 사용하기는 하지만 이 방법이 먹혀들지 않으면 어떻게 할까요? 이 경우에 하나님은 특별한 방법을 사용하시기도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특별한 사건과 고통과 질병 등을 통하여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 백성이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을 참 싫어하십니다. 그때마다 구약시대에는 선지자를 세워 말씀하시지만, 신약시대에는 그의 세우신 종인 목사님을 통하여 경고하기도 하고 훈계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구약시대를 보면 선지자가 말해도 잘 듣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 선지자를 통하여 퍼포먼스로, 알레고리로, 역사로, 말씀으로 전달하여도 듣지 않았습니다. 소위 하나님이 자신을 알려주시는 방법인 말씀에 대한 신호감지기능이 마비된 것입니다. 예를 들어 아이들이 아무리 말해도 잘 듣지 않으면 매를 들듯이 매를 들어 육체적으로 느낄 수 있도록 알게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자신을 알게 하시는 특별한 방법입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하나님이 자신을 알게 하시는 특별한 방법은 어떤 것일까요? 에스겔 20:32을 보십시오. “너희가 스스로 이르기를 우리가 이방인 곧 열국 족속 같이 되어서 목석을 숭배하리라 하거니와 너희 마음에 품은 것을 결코 이루지 못하리라.” 이 말의 뜻이 무엇일까요? 표준새번역에 보면 이 말씀을 좀 더 알기 쉽게 번역하였습니다. “너희가 스스로 이르기를 ‘우리가 이방 사람, 곧 여러 나라의 여러 백성처럼 나무와 돌을 섬기자’ 하지만, 너희 마음에 품고 있는 생각대로는 절대로 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한번 언약을 맺어 사랑의 대상으로 삼으셨다면 절대로 포기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언약백성의 삶의 역사에 직접 개입하셔서 그 존재를 강제적으로 알려주신다는 것입니다. 에스겔 20:33을 보십시오.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능한 손과 편 팔로 분노를 쏟아 너희를 단정코 다스릴찌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역사에 개입하여서 반드시 언약을 배반한 일에 대하여 책임을 묻겠다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하나님께서 당시 세계에서 가장 잔인한 바벨론이라는 나라를 들어서 삼분의 일은 칼에 죽이고, 삼분의 일은 전염병으로 죽이고, 삼분의 일은 비참한 방법으로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게 하시는 방법으로 하나님이 자신을 알려 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또 한 가지 특별한 방법으로 자신을 알려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주전 539년에 고레스의 칙령으로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오게 하시되, 그 말씀을 순종하는 자에게는 돌아와 가나안에 살게 되는 복을 주시지만 순종하지 않는 자는 해방이 되어도 가나안에는 들어가지 못하게 하심으로 알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내용이 에스겔 20:33-38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능한 손과 편 팔로 분노를 쏟아 너희를 단정코 다스릴찌라 능한 손과 편 팔로 분노를 쏟아 너희를 열국 중에서 나오게 하며 너희의 흩어진 열방 중에서 모아내고 너희를 인도하여 열국 광야에 이르러 거기서 너희를 대면하여 국문하되 내가 애굽 땅 광야에서 너희 열조를 국문한 것 같이 너희를 국문하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내가 너희를 막대기 아래로 지나게 하며 언약의 줄로 매려니와 너희 가운데서 패역한 자와 내게 범죄한 자를 모두 제하여 버릴찌라 그들을 그 우거하던 땅에서는 나오게 하여도 이스라엘 땅에는 들어가지 못하게 하리니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그런데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오게 하시는 일에 과거 출애굽 당시에 애굽과 광야에서 하나님이 행하신 대로 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에스겔 20:36에 “내가 애굽 땅 광야에서 너희 열조를 국문한 것 같이 너희를 국문하리라”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출애굽의 역사를 보면 애굽에서 나온 사람들을 다 가나안으로 들어가게 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이 애굽과 광야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거나 주의 종 모세와 아론을 대적하는 자들을 애굽에서 나오게는 하셨으나 광야에서 다 죽이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 일을 하실 때 에스겔 20:37에 보면 “내가 너희를 막대기 아래로 지나게 하며 언약의 줄로 매려니와” 여기에 “막대기 아래로 지나며”라는 말씀은 이미지 언어입니다. 목자가 양들을 보호하거나 계수할 때 사용하는 막대기를 말합니다. 이것은 다시금 하나님의 양떼로서 목자되신 하나님의 보호 아래에 다시금 하나님의 양 우리에 들어가게 하실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언약의 줄로 맨다”라는 말씀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관계를 더 굳건하게 한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그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사람은 출애굽 당시에 애굽과 광야에서 하나님이 하셨던 것처럼 순종하는 자는 가나안에 들어가게 하시고, 불순종하는 자들은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이 되어 거기에서 나온다고 할지라도 가나안에는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일은 주전 539년에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러면 에스겔 선지자가 이 예언은 언제 하였습니까? 주전 591년에 하였습니다. 에스겔 선지자가 말한 이 예언대로 성취되게 하심으로 여호와는 자신을 알게 해 주실 것입니다. 실제로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불순종할 때 에스겔 선지자가 말해도 듣지 않다가 하나님이 이들을 심판하시는 것을 보고 비로소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알려주시는 특별한 방법은 하나님을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그 말씀대로 심판하심으로 자신을 알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 믿음의 가족들이 인간적인 계산 때문에 일반적인 방법으로 말씀하시는 것을 잘 듣지 않아 하나님께서 특별한 방법으로 말씀하여 여러분의 몸과 마음이 느낄 수 있도록 치실 때 알아차리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열왕기하 7장에 보면 엘리사 선지자 시대에 아람 군대로 쳐들어와 사마리아 성을 포위함으로 먹을 것이 다 떨어져 아들을 잡아먹는 사태까지 있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 일의 원인은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서 범죄하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때 엘리사 선지자는 내일 이맘때에 모든 문제가 회복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왕이 보낸 한 장관은 이 일이 불가능하다고 하였습니다. 열왕기하 7:2을 보겠습니다. “그 때에 한 장관 곧 왕이 그 손에 의지하는 자가 하나님의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하늘에 창을 내신들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요” 하나님의 선지자와 그의 말씀을 믿지 아니하는 사람은 항상 이성으로 계산부터 먼저 하지요. 엘리사 선지자는 “네가 네 눈으로 보리라 그러나 그것을 먹지는 못하리라”라고 하였습니다. 엘리사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했던 그 장관은 백성들이 아람 군대가 물러갔다는 소식을 듣고 식량을 얻기 위하여 성문을 나가다가, 그 성문을 지키고 있었던 바로 장관은 사람들에게 밟혀죽었습니다(왕하7:16-20).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일은 참 중요합니다.
3. 오늘날 하나님이 자신을 알게 하시는 방법과 우리의 선택
그러면 하나님께서 오늘날은 어떤 방식으로 자신을 알게 해 주실까요? 하나님은 이 말씀에서 아주 중요한 예언의 말씀을 약속하셨습니다. 에스겔 20:39-40을 보십시오.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내 말을 듣지 아니하려거든 가서 각각 그 우상을 섬기고 이 후에도 그리하려무나 마는 다시는 너희 예물과 너희 우상들로 내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지 말찌니라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스라엘 온 족속이 그 땅에 있어서 내 거룩한 산 곧 이스라엘의 높은 산에서 다 나를 섬기리니 거기서 내가 그들을 기쁘게 받을찌라 거기서 너희 예물과 너희 천신하는 첫 열매와 너희 모든 성물을 요구하리라.” 에스겔 20:39의 말씀은 번역이 조금 잘못 되었습니다. 우리 번역에 보면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내 말을 듣지 아니하려거든 가서 각각 그 우상을 섬기고 이 후에도 그리하려무나 마는 다시는 너희 예물과 너희 우상들로 내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지 말찌니라”라고 하였습니다만 원문은 “… 해라 그러나 나는 이렇게 하겠다”라는 구절입니다. 이 말씀의 뒷부분에 “다시는” 앞에 “그러나”를 넣어서 읽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더럽히지 않게 될 것이라고 읽어야 합니다.
그러면 이 일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이미 에스겔 20:3-31에서 이스라엘 전체 역사에서 순종하지 못하여 우상을 숭배하며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혔던 자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지 않게 될까요? 그것이 에스겔 20:40입니다. 우리 번역에는 나타나 있지 않지만 히브리어 성경에 “키”(ki, כּי)라는 이유 접속사가 있습니다. 그래서 에스겔 20:40을 “왜냐하면”이라는 말을 넣어서 보겠습니다. “(왜냐하면)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스라엘 온 족속이 그 땅에 있어서 내 거룩한 산 곧 이스라엘의 높은 산에서 다 나를 섬기리니 거기서 내가 그들을 기쁘게 받을찌라 거기서 너희 예물과 너희 천신하는 첫 열매와 너희 모든 성물을 요구하리라.” 이 말씀의 뜻은 무엇일까요? 역사적으로 볼 때 하나님의 거룩한 산은 예루살렘, 곧 시온을 말합니다. 그러면 이 시온이 회복된다는 뜻일까요? 성경을 보면 그 뒤의 역사에 보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전 516년에 성전을 건축합니다. 하지만 에스라, 느헤미야를 읽을 때나 말라기를 읽을 때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시는 예물을 드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단순히 지형학적으로 예루살렘에 성전이 다시 세워져 예배하며 교제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새로운 영적인 실재인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예배가 이루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언제 이루어지는 일일가요? 예수님은 사마리아의 수가에서 한 여인과 우물가에서 대화하시면서 자신을 통하여 말씀과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께 예배하는 시대가 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이것도 완전히 성취된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그의 구속사역의 결과로 새로운 마음과 새 영을 주셔서 즐거운 마음으로 하나님께 예배하며 교제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완전한 교제는 주님이 재림하심으로 말미암아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그리스도 안에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일이 이루어질 뿐만 아니라 주님이 재림하시게 되면 이루어질 완전한 구원의 날까지를 말합니다.
이 일의 확실함은 하나님께서 에스겔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것처럼 그들의 범죄로 말미암아 곧 바벨론에 의해 심판을 받게 되겠지만 하나님이 그곳에서 돌아오게 하시는 것을 통하여 분명한 증거를 주실 것입니다. 실제로 주전 539년에 에스겔의 예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이 모든 예언이 이루어진 것이 사실이라면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도 사실이겠지요?
그러므로 여러분! 여러분은 오늘날 당시 에스겔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이 거역하는 자들을 심판하신다고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거역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신 대로 그리스도 안에서 새 마음과 새 영을 주셔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며 하나님과 만나 교제하여 그 은혜와 복을 누릴 수도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에스겔 20:39을 보십시오.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내 말을 듣지 아니하려거든 가서 각각 그 우상을 섬기고 이 후에도 그리하려무나 마는 다시는 너희 예물과 너희 우상들로 내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지 말찌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자는 과거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에스겔 선지자를 위시하여 수많은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듣지 않음으로 심판하신 것처럼 심판하실 것입니다. 여전히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신호를 주시는데도 말씀을 듣고 배우려고 하지 않음으로 신호감지기능이 작동되지 않아서 심판을 자초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에스겔 선지자를 통하여 예언한 대로 거룩한 산, 곧 그리스도 안에서 새 마음과 새 영을 주어서 예배하게 하신 대로 나가기만 하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신을 알게 해 주실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구약시대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사람들과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사람들에게는 약속된 복을 주심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존재를 나타내시고 그 은혜와 능력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하지만 듣는 귀가 마비되어 우상을 좇는 사람들은 아주 아프게 몸과 마음으로 느낄 수 있도록 심판하심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알게 해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만나고 싶지요. 여러분이 방법을 선택하실 수 있습니다. 좋으신 하나님으로 보고 싶다면 말씀을 믿고 순종하십시오.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십시오. 그리고 과거 이스라엘을 바벨론 포로로 보낸 무시무시한 하나님을 보고 싶다면 귀를 막고, 마음의 문을 꽉 닫으십시오. 선택은 여러분의 자유입니다. 하지만 결과는 여러분이 책임을 져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