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사 한국사 일본사는 같은 역사다!
이징옥은 뛰어난 무장으로 관직 생활의 반 이상을 경원첨절제사·경원절제사·영북진절제사·판경흥도호부사·함길도 도절제사 등 함경도에서 보내면서 4군과 6진의 개척에 공을 남겼다.
1453년 수양대군(首陽大君)이 계유정란을 일으켜 김종서(金宗瑞)·황보 인(皇甫仁) 등을 죽이고, 이어 이징옥을 김종서의 일당으로 몰아 파면하고 은밀히 그 후임으로 박호문(朴好問)을 보냈다.
이징옥은 중앙에서 일어난 정변의 소식을 듣고 분개해 박호문을 죽이고 병력을 이끌고 북쪽으로 나가 종성에서 스스로 ‘대금황제(大金皇帝)’라 칭하였다. 그리고 도읍을 오국성(五國城)에 정하고 격문을 돌려 여진족에게 후원을 요청하였다.
이징옥은 일찍이 여진족을 정벌하는 과정에서 얻어진 여진족 사회에서의 명성을 의식하고, 일이 여의치 못할 때는 두만강을 건너 여진족을 배경으로 저항하려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종성부사(種城府使) 정종(鄭種)·호군 이행검(李行儉) 등에게 살해되어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 난은 조선왕조에 대한 최초의 대규모 반란이란 점과 중앙정부로부터 지역 주민에 대한 차별을 가져와 민심을 자극해 후일 이시애(李施愛)난의 선구가 된 점, 황제를 칭하고 여진과의 연합을 도모하였다는 점에서 주목되는 사건이었다.
조선 후기의 명재상 채제공(蔡濟恭)은 『번암집(樊巖集)』에서 이징옥은 세조의 불법성을 명나라에 직소해 단종의 복위를 꾀하기 위한 것이지, 『단종실록』에 전하는 것처럼 대금황제가 되기 위한 것이 아니었으므로 반역이 아니라 충신이라고 암시하고 있다.
이성계가 쿠테타를 일으켜서 조선을 세운 다음, 시애의 난, 몽학의 난, 인거의 난, 괄련의 난, 희량의 난, 인좌의 난, 경래의 난 그리고 갑오란이 있었지만, 스스로 왕이 되었던 사람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조선 왕조가 끝장에 다다르고 마침내 일어났던 갑오농민 전쟁 마저도 이씨왕조를 뒤집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고, 왕의 판단력을 흐리게 하는 간신 무리를 쫓아내야 한다는 데서 머믈렀습니다.
서울을 함락했던 괄련의 난 때도 인조 대신 왕족을 세웠지 이괄이 스스로 왕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금나라는 12세기 초 여진족이 동아시아의 중국 북부에 세운 국가이다.
수도는 초기에 상경회령부였으며 후에 금나라의 제4대 군주인 해릉양왕이 중도대흥부로 옮겼다
그런데, 이징옥은 스스로 大金帝國 황제 라고 스스로 칭하였지요.
大金帝國이라는 뜻은 金나라를 이어받았다는 겁니다. 금나라는 여진족들의 나라인데, 그때 압록강 두만강 주변에서 흩어져 살던 부족이었지요.
금나라는 1115 년 아골타가 만주 시베리아 함경도 일대에 흩어져 있던 여진족을 모아 몽고족 갈래인 요나라를 무너뜨리고 세웠는데, 120 년간 유지하다가 원나라에게 무너졌습니다.
그런데, 금나라를 세운 아골타가 신라사람이라는 겁니다.
신라 마지막 임금이었던 경순왕 김부의 자손들 가운데 마의태자의 패거리는 금강산으로 들어가고 나머지 한패가 백두산을 근거지로 한 만주 땅으로 올라갔다는 겁니다.
그 중의 지도자가 아골타라는 겁니다.
이것은 전해져내려오는 야사가 아니라 역사적 사실이라는 겁니다.
지금의 중국역사는 한족을 근본으로 한 중화사상이 으뜸입니다.
분명 근세까지 중국을 지배했던 청나라 만주족의 역사는 중국 역사에서 이미 변방 취급을 받기 시작한거죠.
한족 역사를 중심으로 동북공정,서남공정,서북공정까지 역사왜곡을 이미 끝을 냅니다.
그들이 청나라 만주족을 역사의 전면에 내세울 수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1778 년 대청제국 건륭황제가 황명을 내려 펴낸 『흠정만주원류고(欽定滿洲源流考)는 금나라와 이징옥의 대금제국 대청제국의 뿌리인 동북아시아 역사를 집대성한 책인데, 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 발해 뿐만아니라 흉노, 숙신, 읍루, 동호, 북위, 예맥, 말갈, 선비, 거란, 몽골, 여진이 모두 한 할아버지 자손임을 밣히고 있습니다.
“우리 해동(海東)은 삼면이 바다에 막혀 있고, 한 모퉁이가 육지에 이어져 있는데, 그 폭과 둘레는 거의 10,000 리(里)나 된다. 고려(高麗) 태조(太祖)가 고구려(高句麗) 땅에서 일어나 신라(新羅)를 항복시키고 백제(百濟)를 멸망시켜, 개경(開京)에 도읍을 정하니, 삼한(三韓)의 땅이 하나로 통합되었다. 그러나 동방(東方)이 처음 평정될 때에는 미처 정리[經理]할 여유가 없었다가, 〈태조〉 23년(940)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여러 주(州)·부(府)·군(郡)·현(縣)의 이름을 고쳤다. 성종(成宗)이 또 주·부·군·현 및 관(關)·역(驛)·강(江)·포(浦)의 명칭을 고쳤으며, 마침내 경내(境內)를 나누어 10도(道)로 만들고, 12주(州)에 각각 절도사(節度使)를 두었다.
그 10도는 첫째는 관내(關內), 둘째는 중원(中原), 셋째는 하남(河南), 넷째는 강남(江南), 다섯째는 영남(嶺南), 여섯째는 영동(嶺東), 일곱째는 산남(山南), 여덟째는 해양(海陽), 아홉째는 삭방(朔方), 열 번째는 패서(浿西)이었다. 관할하는 주군(州郡)은 모두 580여 개였으니, 우리나라[東國] 지리(地理)의 융성함이 여기서 극치를 이루었다. 현종(顯宗) 초에 절도사를 폐지하고, 5도호(都護)와 75도(道) 안무사(安撫使)를 두었으나, 얼마 후 안무사를 폐지하고, 4도호와 8목(牧)을 두었다.
그 이후로 5도(五道)·양계(兩界)를 정하니, 양광(楊廣)·경상(慶尙)·전라(全羅)·교주(交州)·서해(西海)·동계(東界)·북계(北界)가 그것이다. 모두 합하여 경(京)이 4개, 목(牧)이 8개, 부(府)가 15개, 군(郡)이 129개, 현(縣)이 335개, 진(鎭)이 29개이었다. 그 사방 경계[四履]는, 서북은 당(唐) 이래로 압록(鴨綠)을 한계로 삼았고, 동북은 선춘령(先春嶺)을 경계로 삼았다. 무릇 서북은 그 이르는 곳이 고구려에 미치지 못했으나, 동북은 그것을 넘어섰다. 이제 대략 사책(史策)에 나타난 연혁에 근거하여 지리지(地理志)를 짓는다.
신라와 백제는 수도가 두 개였습니다.
백제는 산동성에 큰 수도 있었고, 신라는 지금의 만주 길림성에 큰 수도가 있었다는 이야기도 흠정만류원류고에 있습니다.
명나라를 없애고 청나라를 세운 누루하치의 이름은 愛新覺羅奴兒哈赤 인데 愛新覺羅는 신라를 잊지말자라는 뜻입니다.
청나라가 망하고 제국주의 일본에 의해 만주족이 세워지고 중국의 마지막 황제의 자손들의 타큐멘터리에서도 그들의 원래 성은 김이었다는 증언이 있었지요.
걸출한 장군 이징옥이 스스로 난을 일으켜 대금황제가 되었던 배경에는 이렇듯 숨겨진 역사가 있는 겁니다.
중국의 역사왜곡은 어쩌면 동북아 역사 전체에 대한 반란입니다.
국가주의를 완성하기 위한 편가름이죠.
그래서 저는 동북아 역사는 중국사 한국사 일본사로 나뉘어 쓰기 보다 같이 쓰여져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