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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피레를 꿈꾸는 강석구/ 사진 스포츠인터렉티브
| 지난 9월 12일 일본 시즈오카 후지에다 경기장에서 벌어진 17세 이하 아시아 청소년 선수권 대회 8강전. 한국은 오랜만에 국제대회에서 북한을 상대로 중요한 일전을 치르게 되었다. 최근의 화해 무드로 인해 예전의 격렬했던 경기와는 거리가 먼 양상을 보일 것이라 예상했던 것과 달리 북한 선수들의 플레이는 상당히 저돌적이었다.
그러던 전반 40분, 한국 청소년 대표팀은 수비진과 골키퍼의 의표를 찌른 북한 박철민의 기습적인 롱슛에 당하고 만다. 이후 팀을 정비한 한국은 북한을 거세게 몰아쳤지만 오히려 상대의 효과적 역습에 위험한 상황을 연출하며 결국 0-1로 패하고 말았다. 이 대회 3위까지 주어지는 세계대회의 출전티켓이 날아갔음은 당연한 결과였다.
표면적 결과 이상으로 이번 U-16 대표팀에는 큰 아쉬움이 남는다. 무엇보다 2001년부터 대한축구협회가 야심 차게 추진한 권역별 유소년 상비군 체제의 첫 수혜자들로서 많은 기대 속에 자라났던 팀이었기 때문. 세계 대회 진출에 실패했다는 사실을 질타하기 이전에 더 많은 경험을 쌓고 크게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며 해산되었다는 사실이 그들에게 관심을 갖고 지켜봐온 여러 사람들을 안타깝게 했다.
하지만 선수들 본인만큼 아쉬움이 큰 이는 없을 것이다. 특히 오른쪽 윙백과 센터백을 오가며 예선 경기를 포함, 4경기에 모두 출전한 강석구(16, 보인정산고)는 팀의 주장으로서 누구보다 큰 책임감을 느꼈었다.
“경기가 끝났을 때 머릿속엔 그저 많은 분들에게 죄송하다는 생각 밖에 들지 않았어요. 감독님을 비롯한 코치 선생님들, 부상을 당했을 때 파주에서 재활을 도와주신 트레이너 선생님들, 저희 팀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해 주신 협회 직원분들, 그리고 주위에서 저를 응원해 주시던 분들에게요. 무엇보다 3년이 넘는 긴 시간을 함께 보낸 동료들과 이대로 끝난다는 사실이 너무 싫었어요.”
하지만 강석구는 이번 세계대회 진출 실패에 대한 아쉬움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며 앞으로 자신에게 다가올 더 큰 미래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의 책임감과 어른스러움을 눈여겨보고 주장에 선임한 대표팀 코칭스태프들의 눈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한 셈.
“이번 대회를 통해 제가 많이 모자라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제가 갈 길이 오직 축구 한 길 뿐이라는 것도요. 보다 더 많은 노력을 할 거예요. 2년 뒤 U-19 대표팀에 포함될 수 있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반드시 이번의 실패를 만회할 겁니다. 지켜봐주세요.”
늦은 시작, 탁월한 성실함과 노력으로 만회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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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17 아시아 선수권에서 주장으로 팀을 이끈 강석구/ 사진 스포츠인터렉티브
| 강석구가 축구라는 새로운 세계를 만난 것은 경기도 오산 성호초등학교 5학년 겨울방학의 일이었다. 본래 천안 출신이었던 강석구는 가족들이 이사하게 되면서 오산으로 건너오게 된다. 전학 이후의 서먹함이 있을 법도 했지만 뛰어난 축구실력을 지닌 강석구의 주변에는 자연스레 친구들이 몰렸다.
“학교 마치고 집에 오면 가방 놓고 뛰쳐나가서 밤 9시가 돼서야 집에 들어오곤 했어요. 그때 동네 신발가게에서 부모님께서 처음 축구화를 사주셨는데 하루 만에 스터드가 다 닳았었어요. 정식으로 하는 건 아니었지만 그때보다 축구에 즐겁게 미쳤던 적은 없었던 거 같아요. 정말 축구가 좋았어요, 정말요.”
천안에서 오산으로 전학을 온 강석구는 본래 화성초등학교에 다니던 상태. 하지만 강석구라는 공 잘 찬다는 학생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온 인근의 성호초등학교 축구부 선생님으로부터 ‘전학해서 축구선수가 되어보지 않겠냐’는 제의를 받게 된다. 하지만 부모님은 아들이 땀으로 뒤범벅되는 운동선수가 되길 바라지 않으셨다.
“아버지의 반대가 대단히 심하셨어요. 위로 누나가 있고, 아들은 저 뿐이거든요. 어머니도 그리 좋아하시는 눈치는 아니셨지만 아버지에 비하면 제 편이셨죠. 결국 눈물로 허락을 받아냈어요. 제가 한번 작정하면 끝을 보는 성격이거든요.(웃음)”
그렇게 시작하게 된 축구부 생활. 하지만 남들보다 늦게 시작한 만큼 강석구는 축구부 생활을 거듭할수록 기본기가 부족하다는 생각을 절실히 깨닫게 된다. 그러나 합숙을 하는 다른 선수들과 달리 집에서 통학을 해야 했던 강석구에게 개인 훈련 시간은 쉽게 나지 않았다. 결국 강석구가 내린 선택은 새벽 운동.
“새벽 6시면 집에서 출발했어요. 대부분 새벽달을 보며 학교에 갔는데 아무래도 초등학생이니까 어두운 길이 무섭잖아요. 그래서 막 뛰어갔어요. 그렇게 학교에 도착하면 형들 일어나기 전에 트래핑 같은 기본기 훈련하고. 아침 훈련 같이 한 뒤에 축구부에서 식사하고 수업 들어갔었어요.”
그렇게 시작된 새벽 운동이 고등학생이 된 지금도 곧장 실시될 정도로 성실함은 강석구가 높이 평가받는 가장 큰 이유다. 그렇게 남들보다 갑절의 노력을 기울인 강석구는 타고난 재능이 더해져 빠르게 성장해 나갔고 경기도 선발팀 선수로 뽑혀 해외 원정을 경험하기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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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17 대표팀에서의 강석구(앞줄 제일 오른쪽)/축구협회 여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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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인 발전의 시작, U-14 대표팀 선발
초등학교 졸업 이후 오산중학교로 진학한 강석구는 성장의 속도를 높여갔다. 그리고 2002년, 3학년으로 팀의 리더가 된 강석구는 돋보이는 플레이를 선보이며 창단 역사가 그리 길지 않은 오산중을 전국대회 결승에 연거푸 진출시키는 맹활약을 펼친다. 당시 협회에서 도입하기 시작한 지역별 유소년 상비군의 지도자들이 그런 강석구를 놓칠 리가 없었다. 임세현(중동고, 당시 광주중) 등과 함께 경기도 선발팀 멤버로 뽑힌 강석구는 그해 11월 중국 광저우에서 벌어진 U-14 아시아 유스 페스티벌 참가 최종 엔트리에 합류하게 된다.
“사실 제 스스로를 잘한다고 생각한 적은 없어요. 그런데 선생님들께서 잘 봐주셨는지 계속 상비군에 뽑혔어요. 내가 뭔가를 잘해야 한다는 생각보다 어떻게든 여기에 남아서 더 높은 수준의 축구를 배워가야겠다는 생각뿐이었죠. 그런 절박함에 무슨 훈련이든 최선을 다했어요.”
당시 일본, 괌, 홍콩과 같은 조에 속했던 한국은 조 2위로 준결승에 진출, 중국에게 2-0 승리를 거두고 결승에서는 라이벌 일본을 5-1로 대파하며 우승을 차지하게 된다. 강석구 역시 괌과의 경기에서 2골을 기록하는 등 대표팀의 우승에 공헌을 했다. 그해 한국은 U-19, U-16, U-14 대표팀이 모두 아시아 선수권에서 우승하는 기염을 토했다.
“중국은 체격조건이 다들 성인인 것 같았어요. 그런데 막상 경기력에선 저희가 앞섰어요. 일본도 마찬가지였고요. 당시 일본에 요즘 언론에 신동으로 보도되는 모리모토 선수가 뛰었어요. 잘하던데요. 빠른데다 기술이 좋았고 골 결정력도 높았어요. 근데 결국 축구는 팀플레이니까 저희가 일방적으로 이겼죠.”
이후 U-14 대표팀은 특별한 합숙기간 없이 정기적으로 파주NFC에 소집되어 전술과 기본기에 대한 훈련을 반복했다. 그 과정에서 대표팀 감독이었던 네덜란드 출신의 브람씨가 떠나고 이광종 협회 전임 코치가 잠시 대표팀을 맡게 된다. 이광종 감독 대행 아래 일본 니이가타 국제 청소년 대회에 출전, 또 다시 압도적인 전력으로 우승을 거둔 대표팀은 일본과 중국에 확실한 우위를 점하는 모습을 보였다.
작년 10월 파주에서 가진 U-17 아시아 선수권 예선에서 괌과 홍콩을 가볍게 꺾으며 최종 예선을 티켓을 얻은 그들은 드디어 2004년 초 당시 협회 지도자 전임강사였던 로버트 알버츠 감독과 만나게 된다.
“2002년 당시 감독이셨던 브람 감독님은 이것저것 딱 지적하시기보다는 상당히 자유스럽고 재미있는 분위기 속에서 훈련을 실시하셨어요. 훈련량도 그렇게 많지 않았죠. 우리끼리 '이렇게 해도 괜찮을까?' 싶을 정도였어요. 브람 감독님이 떠나시고 이광종 선생님께서 저희를 지도하셨는데 이광종 선생님도 즐거운 분위기를 강조하셨어요. 올 초부터는 알버츠 감독님이 오셨어요.”
“알버츠 감독님을 뵌 건 그때가 처음은 아니었어요. 브람 감독님이 계시던 때에 체력 측정을 위한 테스트가 있었는데 당시 협회 지도자 전임 강사였던 알버츠 감독님께서 도와주셨어요. 그때 셔틀 런이란 걸 처음 해봤는데 다들 죽는 줄 알았다니까요.(웃음) 그래서 무섭게 생각했는데 감독님이 되시고 나서는 저희랑 많은 얘기를 나누고 친근하게 다가서려고 노력하시는 것 같았어요. 훈련은 이전보다 더 체계적이었구요. 저희가 어느 단계를 완벽하게 넘어가지 못하면 직접 시범을 보여주시며 계속 반복하셨어요.”
강석구가 대표팀의 주장을 맡게 된 것도 이 시기였다. 중앙미드필더와 측면 미드필더, 윙백, 센터백을 고루 소화하던 강석구의 책임감과 리더십을 높게 산 대표팀 코칭스태프에서 그를 주장에 선임한 것이다.
“처음엔 (고)요한이가 주장이었고, (김)태연이와 (원)유현이도 주장을 했었죠.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감독님과 다른 코치 선생님들이 제게 주장을 시키셨어요. 리더십이 좋다고 평가 하시는데 아직은 마음만 앞서는 것 같아요. 대부분 제 또래니까 지시하기 보다는 같이 어울려서 독려하고 뒤에서 외쳐주고, 본인들이 자발적으로 하는 게 중요하죠.”
아시아 대회 출전, 값진 실패를 경험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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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17 대표팀 동료들과 함께. 왼쪽부터 조윤진, 강석구, 임성택/스포츠인터렉티브
| 알버츠 감독의 U-16 대표팀은 5월 중순에 있었던 필드 테스트와 메디컬 테스트를 시작으로 아시아 대회 2연패를 향한 본격적인 시동을 걸었다. 당시 필드 테스트는 선수들의 체력 상태와 운동 능력을 알아보기 위해 셔틀런 테스트가 실시됐었다. 이 테스트에서 강석구는 추상철과 함께 가장 뛰어난 지구력과 체력을 과시했다.
“제가 체력이 좋은 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데 체력 측정에서 꾸준히 상위권에 오른 건 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학교에서 합숙을 하면 동료들이 힘들어서 도망치기도 하는데 전 지금까지 한번도 그런 적이 없거든요. 여기서 내가 포기하면 대표팀에서 뛸 수 있는 기회를 잃는다는 각오로 했어요.”
강석구의 체력을 눈여겨 본 알버츠 감독은 주로 미드필드의 포지션을 소화하던 강석구에게 활발한 공수 가담으로 인해 높은 체력이 요구되는 윙백 포지션을 맡긴다. 현재 보인정산고에서 강석구가 맡고 있는 포지션은 중앙 미드필더. 포지션 차이에서 오는 어려움도 있을 법 하지만 본인은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듯 하다.
“안해 본 포지션이 없어요. 골키퍼요? 해봤죠. 초등학교 시절에 승부차기 가면 제가 골키퍼 유니폼으로 갈아입고 막고 그랬어요. 중학교 올라오고는 거의 중앙 미드필더, 측면 미드필더를 봤는데 대표팀에서는 윙백이랑 센터백도 자주 봤어요. 지금 대표팀의 (고)요한이 같은 경우도 처음엔 센터백으로 시작했다 중앙 미드필더로 올라왔거든요. 저희 나이의 선수들은 구체적으로 포지션이 정해지기보다 신체가 성장하고 기량이 커가면서 포지션도 바뀌어져 가는 것 같아요. 분명 미드필더 쪽이 더 쉽죠. 제가 스피드가 좀 딸리는 편이라 윙백에 서면 어려운 점도 있지만 열심히 노력하면서 적응되는 것 같아요.”
아시아 대회를 두 달여 앞둔 U-16 대표팀은 아시아 선수권을 대비해 중국 U-16 대표팀과의 두차례 친선경기를 결정했고, 중국으로 원정을 떠났다. 하지만 그 경기에서 강석구는 심각한 발목 부상을 당했고, 뒤이어 참가할 예정이던 8월의 일본 도요타 컵에도 불참하게 된다.
“중국과의 경기 이전에 학교에서 시합을 하다 발목을 다쳤었어요. 한번 발목이 나가기 시작하면 계속 나가게 된다는데 중국전에서 발목이 완전 돌아갈 정도로 심하게 다쳤어요. 중국 원정 도중에 저 혼자 한국으로 돌아와 학교에도 가지 않고 곧장 파주로 가서 협회 트레이너 선생님들과 지옥 같은 재활을 시작했습니다. 도요타 컵에서 우승하고 돌아온 동료들 얘기를 들으며 부럽기도 했지만 어서 부상을 치료해 아시아 선수권에 나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어요. 그렇게 보름이 넘게 재활을 하고 8월 중순에 대표팀이 다시 소집될 때는 훈련에 참가해도 좋을 정도로 상태가 좋아졌어요.”
8월 중순 아시아 선수권을 앞두고 마지막 담금질을 위해 파주 NFC에 다시 소집된 대표팀은 FC서울 소속의 선수들이 늦게 합류하는 등 부침을 겪기도 했지만 최정예에 가까운 멤버로 대회를 맞이하게 된다.
예선은 순탄했다. B조에 속한 한국은 오만과 라오스, 베트남을 상대로 12골 무실점을 기록하며 3연승으로 조 1위를 차지한 것.
“첫 경기인 오만전 때는 비가 쏟아졌어요. 그래서 경기 전에는 많이들 당황했었어요. 다행히 이른 시간에 (최)경복이가 득점을 기록해 쉽게 경기를 가져갈 수 있었죠. 라오스와 베트남도 쉬운 상대들이었어요. 다만 예전에는 저희보다 수준이 한참 떨어진다고 생각했던 팀들이 오히려 더 예쁘게 공을 차더라구요. 이젠 그런 팀들을 상대로도 기본적인 능력에서의 차이보다는 경험이나 경기 운영 능력에서 승패가 갈리는 것 같아요.”
그렇게 토너먼트에 진출한 한국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북한. 하지만 선제골을 내어주며 어린 선수들은 흔들리기 시작했고 시간이 갈수록 조급해지는 마음에 기량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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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석구의 훈련 모습/스포츠인터렉티브
| “사실 저희가 경기를 못했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전반전에는 기습적인 골에 실점을 했지만 (최)경복이의 슈팅이 크로스바를 맞고 나오는 등 저희도 만만치 않게 공격을 했거든요. 전반전이 끝나고 알버츠 감독님께서도 질타하기보단 초조해하지 말고 그동안 해왔던 대로 해라. 이대로 끝내고 말거냐며 독려하셨거든요. 후반에 들어가서도 초반엔 측면이 살아나면서 저희가 주도권을 잡는 듯 했어요.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초조해지니까 애들이 올라가기 시작했고 오히려 북한팀 7번의 정확한 패스를 통한 효과적인 역습에 위기를 맞은 거죠.”
그 한 경기의 패배로 U-16 대표팀의 3년간의 긴 여정은 허무하게 끝나고 말았다. 또한 북한과의 경기에서 강석구가 인상 깊게 느꼈던 것은 북한 선수들의 모습이었다.
“저희같이 어린 선수들은 북한을 어렵게 보지 않잖아요? 그래서 경기 입장 전에 옆에 있는 북한 선수들에게 말을 걸려고 했는데 다들 눈빛이 무서웠어요. 경기가 끝나고 지나가면서 꼭 우승하라고 말했더니 그제서야 표정을 풀면서 '고맙습니다' 하는 거예요. 나이도 같은데 꼬박꼬박 존댓말을 하더라구요.”
한국의 피레를 꿈꾼다
인터뷰 당시 강석구는 전국체전에 참가 중인 소속팀과는 별도로 학교에 남아 훈련 중이었다. 경기도에 있는 오산중에서 서울의 보인정산고로 진학하는 과정에 발급된 이전 동의서가 올해에야 풀렸지만, 전국체전에는 아직 참가할 자격이 주어지지 않았던 것.
“사실 중학교 때 운동을 그만두려고 했어요. 집안 사정이 좋지 않았거든요. 마침 그때 서울에 있는 보인정산고에서 운동을 해보지 않겠냐는 제의가 왔어요. 학비도 특기생으로 면제혜택을 받을 수 있었고, 학교 측에서 축구부에 많은 지원을 해서 시설 면에선 전국에서도 손꼽히는 곳이었거든요. 그래서 다른 친구들이 모두 오산고등학교로 진학 할 때 저만 이곳으로 왔어요. 작년에는 동의서 문제로 정식 대회는 못 뛰었고 올 초에 몇 경기 출장했어요. 근데 부상과 대표팀 차출로 큰 기여를 못했죠. 그 점에 대해선 학교에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곧 있으면 저희 학교가 100주년을 맞이해요. 저희 학교 축구부도 역사가 오래 됐는데 최근에야 좋은 성적을 내고 있거든요. 지금 축구부 기숙사도 증축하고 있고, 원래 감독으로 계셨던 문선철 선생님께서 부장 선생님으로 진급하셔서 임근재 선생님께서 새로 오셨어요. K리그 득점왕 출신의 스타플레이어시잖아요. 지금도 가끔씩 시범을 보이시는데 정말 대단하세요.”
강석구가 가장 존경하는 선수는 미드필더이면서도 웬만한 포워드보다 높은 득점력을 자랑하는 ‘아스날의 달타냥’ 로베르 피레다.
“피레와 같은 선수가 되고 싶어요. 측면에서 뛰면서도 중앙을 유린할 수 있는 선수요. 피레의 넓은 시야를 배우고 싶고, 정확한 볼 컨트롤로 섬세한 기술을 펼치고 싶습니다. 득점 상황에서의 확실한 마무리 능력까지요.”
“그러기 위해선 체격을 더 키워야 되죠. 스피드도요. 많이 먹고 웨이트 훈련도 빠짐없이 하는데 아버지를 닮아선지 좀체 근육이 붙질 않아요. 이전에 알버츠 감독님께 스피드를 끌어올리기 위해선 어떤 훈련을 해야 하는지 조언해달라고 부탁드렸는데, 저보고 절대 스피드가 느리지 않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저는 조급해 죽겠는데 말이죠.(웃음)”
1년 전만 해도 자신이 이런 인터뷰를 하게 될지 꿈도 꾸지 못했다는 강석구는 항상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지 않고 겸손한 자세를 취하며 자기 발전을 염두에 두는 유망주다. 그가 정녕 자신이 입버릇처럼 말하는 축구 한길을 위해 꾸준히 노력하며 한국 축구의 큰 자산으로 성장할 수 있을지 기대를 걸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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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멋지시네..
근데 무표정하게 아스날 엠블렘은 왜들고있는거지???
피레가 아스날이라서
한국의 피레가 되고싶어서-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