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의 살과 피를 먹지 못하면 패륜아가 된다
명문 휘튼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짐 엘리엇을 비롯한 5명의 크리스천 젊은이들이 남미 에콰도르의 와오다니(아우카)족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들어간 뒤 실종된 사건이야기 입니다.
엘리엇과 친구들은 영혼 구원이라는 한 가지 목적으로 아우카족 선교를 계획하고 실행했습니다.
그러나 청년들은 실종되었고 가족들은 이들의 무사 귀환을 위해 눈물로 기도했으나 엘리엇과 친구들은 모두 아우카족의 창에 찔려 살해되었음을 알게 됩니다.
이 끔찍한 비극을 미국 언론은 ‘이 무슨 낭비인가!’(What a waist!)라는 제목으로
대서특필했습니다.
20대에 홀로된 아내들은 풀뿌리 캐 먹는 법이나 도마뱀을 잡아먹는 법 등 정글 생존 훈련을 받았고, 짐 엘리어트의 부인인 엘리자벳 엘리어트는 2년 동안 간호학을 공부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남편을 죽인 아우카족 마을로 들어가 정성껏 그들에게 봉사하였습니다.
아우카족은 남자는 죽여도 여자는 죽이지 않았습니다.
아기 날 때 아기 받아주고, 감염된 상처를 치료해주며 기생충 약을 주고, 그들에게 새로운 농사법도 가르쳐주었습니다.
추장이 물었습니다.
“당신들은 무엇 때문에 우리를 위해 이 고생을 하십니까?”
존 엘리어트의 부인 엘리자벳이 대답했습니다.
“남편들이 다 하지 못한 말을 전해주려고 왔습니다.
그 말이 무엇이냐고요?
‘예수님은 여러분을 사랑합니다.’라는 말입니다.”
그 후 와다니 추장은 그 마을 전부와 함께 세례를 받았고 신학을 공부해 목사가 된 4명 중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그분들에게서 복음을 받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 젊은이들의 희생이 아니었다면 이 귀한 복음을 들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분들의 죽음으로 우리는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엘리자벳은 ‘이 무슨 낭비인가’라고 쓴 기자에게 남편이 휘튼대학에서 썼던 일기장을 보여주었습니다.
“영원한 것을 위해서 영원하지 못한 것을 버리는 사람을 어리석다고 하지 마라.”
“이 쓸모없는 나뭇개비에 불을 붙여 주옵소서.
제 삶을 주의 영광을 위해 태워 주옵소서.
저는 오래 살기를 원치 않습니다.
오직 주님만을 위해 풍성한 삶을 살게 하여 주옵소서.”
이 이야기는 ‘창끝’이라는 제목으로 영화로 제작되었습니다.
피 흘림 없는 태어남은 없습니다.
요한복음은 말합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찌른 이를 바라볼 것이다.”(요한 19,37)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싶으신 것은 당신이 주러 오신 것이 당신의 살과 피라는 사실입니다.
당신이 우리 양식이 되시기 위해 죽으셔야 했다는 사실을 믿게 하러 오신 것입니다.
사람들이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 하며 당신을 떠나가도 예수님은 이 말씀을 멈추실 수가 없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당신 죽음 덕분으로 살게 되었음을 믿지 않으면 당신 구원이 우리에게 아무런 도움도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머니는 가끔 제가 말을 안 들으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지 혼자 큰 줄 알아요!”
그러면 저도 장난으로 “아니, 그럼 더 크게 잡아당겨 주던가?”라고 대꾸합니다.
몸은 밥을 먹으면 크지만, 정신은 부모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성장합니다.
만약 부모가 주는 음식만 먹고 그 안에서 부모의 살과 피를 보지 못하면 그 사람은 성장을 멈춥니다.
어른이 되지 못하여 어른으로 살지 못합니다.
심지어 그런 경우 패륜아가 되기도 합니다.
패륜아들은 음식은 먹었지만, 그 음식 안에 섞인 부모의 살과 피는 먹지 못했던 것입니다.
성체를 영한다고 다 구원받지 못합니다.
그 양식이 하느님의 살과 피임을 믿어야 합니다.
안 그러면 우리도 하느님 앞에서 패륜아가 될 수 있습니다.
TV 드라마 ‘허준’에 스승 유의태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유의태는 허준을 만나 자신의 모든 의술을 전수했습니다.
그러나 당시는 유교 사상 때문에 인체 내부를 공부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어느 날 유의태는 허준에게 얼음골로 급히 오라는 파발을 띄웠습니다.
스승의 부름을 받고 찾아간 허준 앞에는 왕골자리에 반드시 누운 스승의 시체와 유서가 놓여 있었습니다.
사람의 병을 다루는 자가 신체의 내부를 모르고서는 생명을 구할 수 없으니 비록 병든 몸이나마 제자에게 주니 정진의 계기로 삼으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유서 앞에 꿇어앉은 허준은 험난한 의원의 길을 가겠다고 맹세를 하고 나서 스승의 시신을 해부하여 오장육부와 인체 내부를 공부하였습니다.
이처럼 스승의 살신성인 덕택으로 명의가 되어 불후의 명작인 ‘동의보감’을 저술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꾸며낸 이야기라고는 하지만 이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자신의 살과 피를 내어주지 않으면 더는 발전할 수 없는 인간의 한계와 이를 극복하게 만드는 부모와 같은 스승의 희생을 볼 수 있습니다.
자녀도 부모의 그런 희생 없이는 온전한 인간이 될 수 없듯,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주시는 은총이 그분의 살과 피임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변합니다.
우리는 나를 살리시기 위해 나를 위해 나에게 찔리신 그리스도의 희생을 보고 믿어야 합니다.
성체를 마치 비타민으로 여기면 아무리 성체를 영해도 그 사람을 구원으로 이끌지 못합니다.
나를 살리시기 위해 주신 부모의 살과 피입니다.
우리는 성체 안에서, 그리고 모든 성사 안에서 들리는 그분의 목소리를 들어야합니다.
“나는 다 주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