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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도! 국사봉~호룡곡산~소무의도 안산 연계 산행기>
~기억 속의 섬! 잡힐 듯이 잡히지 않는 빈 가슴
1. 마음을 열다.
섬은 바다가 주는 자양분이 못내 아쉬워 내보이려던 가슴을 다 열지 못했다. 육지에서 희미하게 젖어오는 불빛을 벗 삼아 그나마 조금 연 것은 섬의 속살보다는 겉살인 방파제의 파도뿐이었다. 시렸다. 지난 시절이 시렸고 지금의 시간이 시렸으며 다가올 시간은 시리다 못해 가려웠다. 그래서 돌아앉았고, 그래서 더욱 성난 파도로 스스로의 빗장을 지워야 했다. 그러나 바다의 유혹을 이길 섬이 있었던가? 하나둘씩 섬들은 그렇게 제 가슴 열어 바다의 유혹을 받아들였고 그 틈을 노려 들어온 육지와의 키스도 서슴지 않았다. 한 번 터진 둑은 막을 수 없다. 애초에 하나였던 육지 소년과 섬 소녀의 줄다리기는 오래가지 않았고 섬은 숙명처럼 육지의 구애를 온몸으로 받아들이며 파도의 함성으로 마음의 동요를 대신했다.
그 섬은 언제나처럼 거기에 있었다. 산이 거기에 있어 인간이 찾아가듯이 섬이 그곳에 있어 아쉬움에 찾는 건 언제나 인간이다. 오래전 섬을 찾은 다섯 명의 청년들이 내지에서 재앙을 몰고 왔을 때 비어나간 한 사람의 빈자리는 새로운 생명의 탄생과 더불어 간극이 매워졌으나, 그 기억을 상흔처럼 안고 살아간 청년들에게 그 섬은 언제나 닿을 수 없는 샹그리라(이상향)였다. 광명항의 햇살이 채 마르기 전에 봄은 아지랑이를 보리밭 가득 파종하였고 청년들이 밟고 간 자리마다 보리풀은 사랑이라는 이름의 열매를 맺으며 이삭으로 자라고 있었다. 불행히도 그 시절의 청년들만 몰랐을 뿐, 그때의 그 청보리는 오늘도 자라 장년이 된 청년들의 기억의 숨밭에서 여전히 보리풀을 키우고 있었다. 무의도(舞衣島)는 그 시절의 상흔을 앓는 장년들에게는 영원한 무의도(霧衣島)! 안개를 입은 섬으로 남아 있었다.
2. 그 섬에 가고 싶다.
(1) 국사봉으로 가는 길
무의도 입구에서 내려 마을버스를 갈아타고 장진도를 가로지르는 영종도와 무의도 간 연륙교(連陸橋)를 건넜을 때 내가 본 것이, 철릭을 입고 춤을 추는 조선 시대의 장수(將帥)였던가? 아니면 안개의 옷을 입고 무당춤을 추는 행복한 무녀(巫女)였던가. 아침 11시에 큰무리 선착장 ‘무의도 트레킹 둘레길’ 설명판 아래서 술 추렴에 여념이 없는 라이더들의 함박웃음과 마주하며 꽤 가파른 계단을 오르는 일은 신선한 설렘이었다. 큰무리 선착장 출발선에서 국사봉과 호룡곡산을 지나 광명항까지 얼추 9km. 소무의도 정상인 안산 하도정(鰕島亭)을 다녀오면 10km 정도 걸릴 길, 대무의도의 해안 둘레길과 소무의도의 해안 트레킹 길은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한다. 가파른 계단을 올라 둘레길과 정상으로 오르는 길의 갈림길에서 주저 없이 국사봉 정상으로 향한다. 다시 이어진 나무계단이 꿈꾸는 바람처럼 설렌다. 드문드문 야자매트가 깔린 등산길의 표정은 “오늘 맑음”이다. 무의도는 나에게 어떤 표정이고 이유인가. 생각을 키우는 사이 숲길의 아늑함이 반긴다.
시인 고은은 “미투(Me too)”로 인해 본의 아닌 마음의 감옥(囹圄)에 갇히기 전, 대한민국의 유일한 노벨상 후보였다. 지금은 세계 3대 문학상(노벨, 콩쿠르, 부커) 중 하나인 영국의 부커상을 받은 한강(채식주의자)이 영 순위지만, 바람직하지 않은 고은의 일탈로 대한민국에서 노벨상의 백미(白眉)인 문학상이 나오기는 어려울 것이다. 고은을 노벨상 후보로 만든 결정적인 작품이 바로 감옥에 갇혀 있을 때 구상한 전작 30권의 방대한 시집 ‘만인보(萬人譜)’인데, 총 4,001편의 작품에 5,600명의 인간군상이 등장하는 역사 속의 인물과 소외된 민중들의 자유와 권리를 불교식으로 그려낸 대서사시였다. 만인보를 얼마나 읽었는지 기억나지는 않는다. 다만 처음 대했을 때 그 방대한 스케일에 놀라 고은을 500권의 저작을 남긴 20세기의 정약용이라고 외쳤던 기억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많은 산을 오르고도 얼마 기록하지 않은 산행기(처음 산행부터 10여 개 정도)가 아쉬워 선배가 산행기를 제안했을 때 선뜻 응했던 산행기를 이제는 의무처럼 쓴다.
사실 처음에는 산림청과 블랙야크 지정 국내 100대 명산을 남기려 했으나, 이제는 잘 모르는 산과 둘레길, 성곽길 가리지 않고 쓴다. 고은 같은 대시인이 아니므로 기록으로 남기는 산행기에 별 의미는 없다. 그러나 살아 산행을 계속할 수 있을 때까지 다니는 산은 가능한 모두 남기려 한다. 굳이 말도 안 되는 욕심을 부리자면, 고은이 만인보(정확히는 5,600명)를 썼다면 나는 <천산보(千山譜)> 정도는 써야 하지 않겠냐고 하는 객기다. 생의 포괄적인 지향점은 있다. 그러나 그 지향점이 욕망의 정상인 것은 아니다. 굳이 지향점을 말하자면 살아가면서 접히는 인간과 인간과의 정신적 교류다. 그 중 문학적인 부분은 장편 서너 권, 소설집 한 권, 시집 두 권, 대본집 한 권, 수필집 한 권, 칼럼집 한 권에 연극 몇 편, 영화 두 편, 드라마 한 편 정도인데, 이룬 것도 꽤 있고 이뤄야 할 것도 아직 많이 있다. 그중 시 낭송(詩 朗誦)을 하는 선배님의 제안으로 쓰는 시극(詩劇)을 한 10여 편 썼는데, 나름 잘 아는 시인이 30여 명 되는 관계로 시간 되는대로 시극을 30편 정도 남기고 싶고, 신라 전래 향가 25수 전체에 대한 스토리텔링 화 작업(이제 두 편 썼음)도 다만 욕심으로 남는 과제다. 나의 글은 누가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스스로의 아카이브이자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생각이 생각을 먹는 사이 국사봉으로 오르는 등산로의 첫 번째 조망데크에 닿는다. 여기서는 바로 손안으로 잡힐 듯이 실미도가 들어온다. 열린 모랫길로 사람들이 분주히 오가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이제 실미도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실미도 해수욕장 백사장이 유난히 하얗게 보인다. 마치 버마 비단뱀의 둥근 곡선을 닮은 섬은 외로워 보였다. 아무런 마음의 동요 없이 섬을 바라보다 몇 년 동안 애만 태우다가 끝내는 영화화되지 못한 졸작 시나리오 <북파공작원(HID)>을 생각한다. 북파공작원은 어느 PD의 제안으로 실미도 2탄으로 준비하던 시나리오였다. 북한으로 넘어가지 못하고 청와대로 가다가 몰살된 실미도 북파공작원들과 달리 설악산에서 훈련받던 HID들이 북으로 넘어가 김일성을 저격하고 넘어오다가, 대부분 죽고 두서너 명만이 살아 돌아오는 가상의 드라마였다. 이 세상에 작가는 많다. 그들 모두는 작품을 쓰지만 그것 모두 작품으로 사는 것은 아니다. 극히 작은 몇 개, 말하자면 수천 작품 중 운이 좋거나 ‘오징어 게임’처럼 십삼 년 이상을 줄기차기 기다리며 때를 본 인내자(忍耐者)에게만 작품화의 행운이 돌아가고, 또 그렇게 성사된 작품 중에서도 일부만이 편집과 배급의 지난(持難)한 과정을 거쳐 시청자의 눈으로 들어간다. 그렇게 버려진 것들이 나에게도 적지는 않다. 그냥 그러려니 하면 된다. 항상 말하듯이 ‘인생 뭐 있는가? 전세 아니면 사글세지.’
국사봉에 이르는 길은 무한 포근한 솜이불이다. 그사이 곁길에 슬쩍 보이는 꽤 큰 묘지로 눈길을 돌려봤는데 살아 아직 보지 못한 거창한 묘비명에 비명을 지른다. 거의 가로로 10m는 족히 됨직한 묘비명에는, ‘평산 신씨 판윤공파(平山 申氏 判尹公派)’의 무덤군이고 27대부터 36대까지의 족보(族譜)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이런 것을 보면 신선하다고 해야 하나? 뭐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거창하다. 내리막길이고 내려가니 도로고 이곳을 ‘실미 고개’라고 부른다. 이곳에서 왼쪽으로 가면 실미도 유원지고 오른쪽으로 가면 다시 큰무리 선착장이 나온다. 길 건너 국사봉 정상길로 향한다. 오솔길은 마음의 위안을 준다. 오솔길에서 번다(繁多)했던 인간의 행로는 지극히 편안한 단순함의 의미를 얻는다. 국사봉의 헬기 착륙장은 유난히 넓다. 여기저기 좌석이 구비 되어 있고 넓은 헬기장 이곳저곳에는 차들이 여러 대 정차한 체 텐트를 치고 있다. 그랬다. 이곳이 바로 무의도가 자랑하는 차박과 비박을 할 수 있는 장소인 거였다. 이제 오후로 접어드는 시간, 주말이므로 보다 많은 캠핑족들이 이곳을 찾을 것이다. 그래서인가? 산행 도중 부부 단위나 연인, 친구 단위의 캠핑족들이 속속 헬기 착륙장을 향하는 모습을 보았다. 좋은 일이다. 캠핑이나 글램핑을 한 지가 너무 오래되었다. 더 늦기 전에 해야 한다.
여기서부터는 인도와 오솔길이 함께 한다. 오솔길로 가야 등산로다. 이름을 알지 못하는 풀꽃을 경배하려 고개를 숙일 때 산쾡이 한 마리가 놀라 뛰쳐나온다. 미안하다. 그렇게 뒷걸음질 치듯 오른 나무계단 위에 온통 데크로 포장된 국사봉의 정상(해발 230m)이 있었다. 날씨는 지극히 맑았으나 물안개는 아주 맑은 날이면 허락한다는 원경(遠景)을 윤허하지 않았다. 덕적도를 위시한 서해의 섬들(영종도, 장봉도, 자월도, 승봉도, 신도, 이작도, 굴업도, 문갑도, 소야도, 세어도 등)은 거기에 그대로 있겠지. 섬의 한가운데에서 바라보는 전경이 어찌 좋지 않을쏜가! 원경은 마음속에 그리고 그저 넋을 놓은 채 호룡곡산, 하나개 해수욕장, 실미도와 저 멀리 소무의도의 풍광을 채집하여 배낭 속에 꾹꾹 눌러 넣는다. 나름 오래 살았구나. 되돌아보거나 되새기고 싶은 인생은 딱히 없지만 버릴 인생도 아니었다. 언제나 말하듯이 인생은 내가 만든 것이므로 후회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후회한다는 단어에는 스스로의 생을 통째로 부정하는 의미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나의 생은 내 의지가 만든 작품이므로 그 어떤 생이라도 위대한 것이어야 한다.
(2) 호룡곡산으로 가자
예전에는 포구에서 정답게 무의도 특산물인 가무락조개를 잡던 마을인 포내마을을 감싸고 있는 무의도의 중심이 국사봉이다. 포내마을의 갯벌 체험 대신 하나개 해수욕장의 전경을 보며 국사봉으로 오르는 길이 완만한 솔밭길이었다면, 마당바위, 부처바위와 기암절벽이 수직으로 위용을 자랑하는 용호상박(龍虎相搏)의 산인 호룡곡산으로 내려가는 길은 거친 감각의 길이 마초적 내음을 전해준다. 중턱쯤인가? 등산로 곳곳에 조성해 놓은 ‘조망 쉼터’에 자라는 소나무 한그루가 ‘제법 가파른 바윗길도 운치 있지 않냐?’고 물어볼 즈음, 발길은 어느새 호룡곡산으로 이어지는 구름다리 위를 걷고 있다. 이곳의 지명은 재빼기다. 언덕의 맨 꼭대기 지점을 재빼기라고 한다. 그러니까 이곳이 무의도에서 가장 높은 언덕인 셈이다. 참 정감 가는 이름이다. 소나무와 소사나무 그리고 떡갈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특히 등산로를 유난히 뒤덮은 솔잎의 향연은 호룡곡산의 비경인 개불알난과 함께 산의 운치를 한결 드높인다. 오르막과 내리막에 있는 임도(林島)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좁은 숲길이 이어지는 곳에 쌓인 솔잎은 장관이다. 겨울이며 차가운 해풍에 몸을 한껏 낮춘 나무들은 햇살의 온기를 등산로에 고스란히 전해준다.
물론 해발 246m 낮은 산이지만 호룡곡산은 명산이다. 하여 군데군데 암릉으로 이어진 어려운 길도 제법 산재한다. 그러나 나름 신선하고 평이 한 산행을 즐길 수 있는 대부분의 코스에서는 함께 온 등산객들과 정다운 이야기를 나누면서 걸어도 운치 있으리라. 게다가 햇살과 춤을 추며 유영하는 피톤치드가 향기처럼 온몸을 감싸며 신체를 마사지하듯 두드려주는 경험은 산에서만 느낄 수 있는 인생의 아주 맛있는 별미다. 조망대 쉼터에서 소무의도와 광명항을 바라보는 사이 약간의 안개를 헤치고 잠시 멀리 보이는 제부도와 대부도의 흐릿한 원경, 아! 섬은 시야의 원대한 자유를 뿌듯하게 즐기도록 도와주는구나. 소나무와 소사나무 군락의 호위를 받으며 걷는 길에 하늘이 희망을 뿌려준다. 호룡곡산 정상(해발 245.56m) 정상 석에는 244m라고 되어 있지만 실질적인 해발높이는 245.56m라고 국토교통부 지정 ‘지적삼각점’은 명시한다. 정상의 나무데크는 바위 몇 개를 뚫어 놓은 채 국사봉 정상 데크처럼 평온하다. 나무데크 옆에 있는 ‘호룡곡산 정상 전망 안내판’에는 날이 밝으며 보이는 섬들이 사진틀 속에 빼곡히 적혀 있다. 대부도, 팔미도, 선재도, 영흥도, 해녀도, 승봉도, 자월도, 이작도, 선갑도, 문갑도, 굴업도, 덕적도, 초지도 등의 섬들이 서로를 바라보고 서로에게 의지하며 서해의 이야기를 등산객들에게 들려주고 있다. 인증샷을 누르고 나긋하게 사위(四圍)를 조망한다. 잡힐 듯 보이는 하나개(큰 개펄) 해수욕장에서 짚라인을 즐기는 사람들과 해상관광탐방로를 걷는 연인들이 눈에 들어온다. 표정까지 볼 수는 없지만 틀림 없이 미소짓고 있을 모습이 선하다.
오이와 사과를 먹으며 메모장을 꺼낸다. 그러나 멈춰 있는 생각. 순간 무언가를 쓰겠다는 의지 대신 뮤지컬 ‘헤드윅 헝그리 인치’에서 성전환 수술에 실패한 소년 한셀의 당혹한 모습과, 뮤지컬 ‘레베카’에서 열정적으로 ‘레베카’를 열창하는 댄버스 부인역의 옥주현이 떠오른 이유는 무엇인가? 아마 하나의 응집된 생각을 위하여 수많은 잡념이 오가는 뇌의 불가역 한 상념 때문이리라. 한동안 앉아 전형적인 가을을 반겨 섬의 산을 찾은 등산객들의 면면을 눈 속에 넣는다. 메모지에 ‘무얼 쓰지?’라고 쓴 후 벤치에서 일어난다. 소무의도로 향하며 기억의 넝쿨 속에 상흔을 남긴 광명항의 이기를 마시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세찬 비의 영향으로 군데군데 등산로가 깊이 파이고 제법 경사가 가파른 하산길을 달리듯 내려와 37년 전의 그 집(?)이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는 정경을 카메라에 담는다. 서해의 잿빛 물결이 춤을 추고 능선이 오밀조밀한 산의 온기는 광명항의 풍경에 녹아 그림으로 다가온다. 그사이 주말을 즐기러 온 길손들은 항구 곳곳에 산재한 펜션을 찾아 화기애애한 꾸러미를 ‘샘꾸미선착장’에 풀어놓는다.
(3) 소무의도 정상 하도정(鰕島亭)을 안다.
예전의 그 아늑하고 고요했던 광명항은 이제 무의도에는 없다. 대신 항구라는 의미보다는 위락시설이라는 이름으로 갈아입은 호객의 여행지만 남아 있을 뿐이다. 붐비는 사람들의 이글거리는 눈빛을 보니 일본의 인기 드라마 ‘고독한 미식가’의 이노가시라 고로(마츠시게 유타카 분)도 아닌데 ‘배가 엄청 고프다!’ 딴딴 땅. 호떡을 하나 사서 종이컵에 식혀 먹으며 소무의도 인도교를 넘는다. 대무의도보다 더 먼저 300년 전부터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다는 떼무리(소무의도 별칭) 섬에는 유씨의 ‘시조묘’가 있다 한다. 모자를 날릴 정도로 바람이 거세다. 새우가 많이 잡혀 소무의도에 있는 안산의 정상에 있는 정자의 이름이 ‘하도정(鰕島亭 새우 섬)’이다. 잘 조성해 놓은 무의바다누리길을 따라 몽여해변, 부처깨미, 명사의 해변 등 이른바 ‘누리 8경(인도교길, 마주보는 길, 때무리길, 부처깨미길, 몽여해변길, 명사의 해변길, 때나섬길, 키 작은 소나무길)’이 그윽하다. 백범, 이승만, 박정희의 자취가 있고 박근혜의 비키니 수영복 사진으로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소무의도는 그렇게 고스란히 300년의 역사를 간직한 채 누리길로 살아 정겨운 노래를 부른다. 정상으로 조성된 수백 개의 계단 길을 숨차게 올라 하도정에서 대무의도와 1903년 우리나라 최초로 등대가 설치되었던 팔미도의 정경을 본다.
그래! 그렇게 만 하루 동안 무의도를 안고 섬 안개의 주식을 팔아 바람과 춤을 춘다. 예전에는 배를 기다리며 바다를 보았을 텐데 이제는 40분에 한대 꼴로 있는 1번 마을버스를 기다린다. 산 정상에서 바라본 바다가 여전히 가슴 골짜기에서 너울거린다.
4. 기억의 마음을 순수하게 거닐다.
“그녀는 산을 보면 정신을 잃어요. 산에서 몹시 좋지 않은 일을 겪은 기억이 지배하기 때문이죠.”
그 시절, 그렇게 간 소녀에게 할 말은 없었다. 처음 발을 섬에 디뎠을 때 아무런 이유 없이 산을 오르던 그미의 기억조차 간헐적인 그리움으로 남을 뿐, 기억의 샘은 오래된 의식의 흐름으르 용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억은 영원한 가슴을 동반한다. 나는 분명히 여기에 있었고 기억은 여기에서 자신의 임무를 충실하게 거행했다. 아주 오래전 어느 봄, 동행했던 젊음들의 의식에 살아 숨 쉬던 무의도의 나이테는 지금도 여전히 그 뿌리를 광명항 선착장 그 어딘가에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아주 오래전 생성과 소멸의 기준 원리를 배운 공간이 무의도라면 많은 시간이 지나 위락의 기억 속에 부유하는 사람들이 의식 속 선착장은 그저 즐거움의 공간일 것이다. 거기 거의 40여 년 전의 젊음들이 혼재해 있고 그들의 정신 혼이 지금의 푸르름과 함께하는 한 내가 사는 공간은 푸를 것이다. 그러나 아직 얘기하고 싶지 않은 기억이 고동을 내리는 섬에, 하고 싶은 얘기는 적잖이 꿈틀거린다. 사실 나는 아직 그 시절의 나를 알고 싶다.
“그렇다. 궁금한 것은 장군이 철릭을 입고 호령하는 섬이 무의도인가? 아니면 안개의 주식을 너무 많이 가져 무거운 옷이어서인가? 그 이상의 것은 정녕 나는 모르며 또한 알고 싶지도 않다. 궁금한 것은? 내가 당신을 아는 만큼 당신이 가져야 할 영혼의 무게 값 정도일 뿐이다. 나는 나를 인지한 나고 당신은 당신의 존재를 인지하는 당신일 뿐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