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례읍내 큰 길 가의 자인산업은 날로 사업이 번창하는 모양이다.
전화기를 귀에 달고 있는 양사장이 12시가 지나자 예약했다고 우리를 옆 식당으로 데려간다.
그 사이에 산동농협 조합장 등이 합류해 5명이서 생선구이 백반을 먹는다.
뻔뻔한 내가 이왕 밥 사려면 반주도 곁들이라고 해 소주 한병을 시킨다.
산동조합장은 한번 본 적이 있는데다 갑장이라며 호의로 대해 준다.
아쉽게도 난 만난 기억이 없지만 갑장이라는 것 때문에 같이 반주를 마신다.
날 데려다 줄 양사장은 술을 마시지 않으면서 소주 한병을 더 시킨다.
배낭 두개를 짐칸에 실고 양사장의 화엄사 신도증을 내 보이고 매표소를 통과한다.
난 참 뻔뻔하다. 내일 피아골로 내려와 차 가지러 화엄사 올라가기 싫다는 핑계를 대지만
화엄사 입장료를 내기 싫어서 양사장께 신세를 지는거다.
연기암까지 데려다주겠다는 걸 말리고 둘이 사진을 찍고 돌려보낸 다음
화엄사를 구경한다.
가을 햇볕에 고찰은 조용하다. 더러 관광객이 있으나 화사한 가을 국화화분을
계단 곳곳에 두어 살짝 화장을 했다.
바보는 보제루 뒷쪽 마당가에 앉아 있고 나 혼자 탑과 각황전과 대웅전을 보고 다닌다.
각황전 앞에 오르지도 않는다.
적멸보궁 사사자삼층석탑은 여전히 가리고 못 가게 한다.
바보는 얼른 산에나 가지 헛짓하고 다닌다는 표정이다. 난 오늘은 여유가 있으니
걱정 말라고 한다.
대웅전을 지나 구층암 가는 대나무 길을 걷는다.
예전에 계곡을 건너다니던 길은 이제 풀이 자라고
새로 시멘트 길이 구비돌아 절마당까지 들어간다.
난 일부러 계곡 징검다리를 건너 돌계단을 올라간다.
구층석탑은 제대로 보이지 않고 큰 탑의 흔적이 보인다.
모과나무 기둥에 모과가 주렁주렁 천불보전 앞에 시위하듯 두 그루가 버티고 있다.
조선 사대부 양반네 사랑채 같은 한옥이 햇볕을 받아 고즈넉하다.
저 안에서는 누가 지낼까? 다향사류 한자 편액이 걸린 마루 위엔
운동 기구인가 곳감말리는 것인가 쇠붙이가 매달려 있다.
오래 된 듯한 편액이 보이는데 가까이 가지 못한다. 대숲사잇길로 들어가
연못 위에 있는 전각은 지나친다.
하얀 물이 둥그런 바위 사이를 흐르는 계곡을 건넌다.
먼저 건너 조심스레 건너는 바보를 사진만 찍는다.
사진 찍기보다는 손을 잡아주는 것이 나을텐데---
연기암 오르는 길도 호젓하다. 배낭을 맨 산객이 혼자 내려오고
가족이나 연인이 내려오기도 한다. 땀이 밸쯤 다리를 건너 대숲을 지나
연기암 찻집에 닿는다. 찻집은 닫혀 있다. 찻집의 수명은 얼마나 될까?
배낭을 배수로 건너 소나무 아래 두고 연기암으로 들어간다.
바보는 마지못해 따라와 오르막 끝의 샘에서 물을 마신다.
난 저 위 산신각?까지 다녀 오고 싶지만 섬진강 강줄기를 보다 대웅전 앞에서 되돌아온다.
다시 배낭을 매고 본격적인 화엄사골을 오르는 아치형 문을 통과하니 3시가 다 되어간다.
대피소까지 넉넉하게 세시간을 잡고 오르면 잘하면 노고단 고개에서 일몰을 볼 수도 있겠다.
바보는 잘 걷는다. 안심하고 느긋하게 걷는데 어느 순간 내가 앞지른다.
한시간 가까이 걸었을까, 연기암까지도 거의 한시간 가까이 걸었으니 지칠법하다.
너른 길의 끝에 배낭을 벗고 잠깐 기다리니 바보가 온다.
오래 쉬지 않고 바로 오른다. 중재에서 한번 기다린다. 바로 올라 집선대로 가는
완만한 길을 걷는다. 오른쪽으로 가파른 골짜기 아래로 하얀 물이 소리내며 흐른다.
집선대에서 하얀 폭포를 보며 여유를 부린다. 거리상으로는 많이 왔지만
정말 힘든 구간은 이제부터라고 한다. 대학 때 멍사모르고 선배들을 따라왔을 때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고 한다.
난 고등학교 때나 대학 때 지리산을 찾지 못했다. 상렬이 등이 고2때인가 배낭을 매고
긴 양말에 바지 가랭이를 넣고 군인 워커나 운동화를 신고 지리산 종주를 나서는 모습을
부럽게 바라보기만 했다. 그리고 20대 후반에 직장생활하며 결혼하고 한결이가 일곱살이었을 때
1995년 7월 16일인가 17일에 창욱이의 안내를 받아 현석이와 규철이와 한결이와
대성골을 올라 장터목에서 잠잤던 것이 처음이었다. 그 후 가끔 혼자 비박짐을 짊어지고 종주도 하고
백무동에서 천왕봉을 하루에 다녀오기도 하지만, 갈수록 더 힘이 든다.
그래도 지리산에 드는 횟수는 많아지는 것 같다. 지리산에 들지 못하면
나의 쇠퇴를 인정하는 것 같아 더 조바심을 내는지 모른다. 이도 욕심이다.
집선대에서 물을 마시며 쉬다가 일어나 이제 본격적인 오르막인 코재를 오른다.
몇 나무에는 노란 단풍이 들기 시작한다. 성벽을 오르는 듯한 검은 돌길의 등산로는
어찌 보면 아름답기도 한데 나의 땀을 요구한다.
뒤쳐진 바보가 걱정되지만 잠깐 돌아보면 저만큼에서 꾸준하게 잘 따라온다.
코재 바위에 배낭을 벗어두고 잠깐 내려가니 생각보다 빨리 바보가 올라오고 있다.
동영상으로 찍어주다가 배낭을 받아 매고 스틱의 손잡이를 잡게 하고 끌고 잠깐 오른다.
잠깐 힘을 내어 오르니 무넹기 큰길이다.
내려오는 이들이 얼마나 걸렸느냐고 묻는데 얼른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냥 3시간 반쯤 걸렸다고 한다. 화엄사 구층암을 나설 때가 2시, 연기암 들러 입구출발이
3시. 무넹기 도착이 5시 반이 못되었으니 3시간 반이 맞겠다.
넓은 길을 올라가는 산객들이 더러 있다.
날씨가 쌀쌀하다. 대피소 오르는 돌길엔 서쪽에서 비춰오는 강한 사광이
물들기 시작하는 단풍을 곱게 비춰준다.
취사장 구석에 들어가 배낭을 푼다. 예약확인을 하고 침상번호를 받으러 가며
버너를 켜보라 하니 지친 바보는 짜증을 낸다. 남자는 노고단 여자는 반야봉의 침상 배정을
받고 돌아와 삼겹살을 굽는다. 옆자리의 라면 끓이는 부부에게
소주를 권하고 삼겹살을 나눠 먹자하니 바보는 반대한다.
다 자기 것은 준비할만큼 했으니 괜히 참견 말란다.
그 말에 동의하면서도 조금 아쉬워 꿍 한다.
술에 반 이상 취해 배낭에 아무렇게나 꾸겨 넣고 반야봉 9번 침상으로 간다.
콘센트 두 개가 잇어 전화기를 충전시키고 와이파이도 구글 사진도 백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