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유럽의 입헌군주국. 정식명칭은 노르웨이왕국 (Kongeriket Norge). 노르웨이어로는 노르게 (Norge;북방의 길). 면적 38만 6919㎢. 인구 452만 5100(2002). 스칸디나비아반도의 서반부, 반도 면적의 약 40%를 차지한다. 동쪽은 스웨덴·핀란드·러시아연방과 국경을 접하고, 그 밖은 바렌츠해·노르웨이해·북해·스카게라크해협으로 둘러싸여 있다. 수도는 오슬로. 북위 57˚57′31˝ ∼71˚11′08˝ 사이이며 대략 중앙으로부터 북쪽은 북극권에 든다. 북극권은 여름에는 <백야 (白夜)>라고 하여 한밤중에도 대낮처럼 밝은 반면, 겨울에는 낮에도 해를 볼 수 없는 날이 며칠이고 계속되는 지역으로 여행자들에게 잘 알려져 있다. 농지는 국토의 겨우 3%, 삼림은 26%이고, 약 70%는 호소(湖沼)와 빙하·암석산이다. 빙하지대의 흔적인 피오르드가 발달된 가운데, 약 5만개나 되는 도서가 있고, 해안선의 총연장은 약 3만 4000㎞이다. 해외영토로는 스발바르제도·얀마옌섬이 있다. 국기는 스웨덴·덴마크 등과 같은 <스칸디나비아 크로스>라 불리는 십자기이지만, 색깔은 다른 나라와 달리 붉은 바탕에 흰 테가 있는 감청색의 십자로 되어 있다. 국가(國歌) 《우리가 사랑하는 산의 나라》는 1864년에 제정.
1 자연
(1) 지질·지형
페노스칸디아순상지라고 하는 선캄브리아대의 결정질 암석이 분포하는 지역은 남동부지방과 북부의 핀마르크 동부뿐이다. 나머지의 넓은 지역은 캄브리아기(紀)등에 퇴적한 암석이 고생대 중반 무렵의 칼레도니아조산운동을 받아서 습곡산맥이 되고, 그 산지가 그 뒤의 침식·융기, 그리고 빙하작용에 의하여 현재의 지형을 만든 것이다. 노르웨이의 산지는 평균고도가 500m 정도로서 그리 높지는 않고, 산 모양은 대략 고원 모양이다. 그리고 2000m 이상인 고원 모양의 산정은 만년설과 얼음으로 뒤덮여, 평탄한 고원빙하의 끝에서부터 골짜기를 향하여 가파른 곡빙하(谷氷河)가 있는 곳도 보인다. 제 4 기의 빙기(氷期)에 스칸디나비아반도를 뒤덮은 빙상(氷床)은, 산지는 물론 평지에도 빙식의 흔적을 남겼다. 이 나라에서는 가늘고 긴 피오르드와 그에 이어지는 깊은 U자 골짜기를 만들었다. 특히 서부에서는 높이 수백 m에 이르는 양쪽 기슭의 낭떠러지와 강물이 폭포가 되어 낙하하는 현곡(懸谷)의 경치가 웅장하다. 가장 긴 피오르드는 소그네피오르드이며, 200㎞의 만 안쪽 깊숙이 바닷물이 채워져 있다.
(2) 기후·식생(植生)
고위도에 있고 겨울의 햇살이 매우 약한데도 서쪽 연안인 베르겐에서는 제일 추운 2월의 평균기온이 1.2℃로서 따뜻하다. 여름인 7월의 평균기온은 14.1℃로서 비교적 시원하나, 연교차가 큰 것은 주목할 만하다. 강수량은 남서해안이 가장 많고, 베르겐의 연간 강수량은 2006㎜, 북부 또는 내륙으로 들어갈수록 줄어들어, 오슬로의 연강수량은 868.7㎜밖에 안 된다. 삼림은 국토의 약 4분의 1이나 되며, 전나무·소나무가 탁월한 수종이고, 식생은 남동부가 가장 풍부하다.
2 지지(地誌)
(1) 남동부지방
오슬로피오르드로 흘러 나오는 글로마강(연장 598㎞)을 비롯한 큰 하천들의 유역으로 이루어졌다. 삼림면적은 이 나라 삼림 전체의 약 60%를 차지하며, 강의 중·하류는 기름진 토양 지대로, 이 나라 제일의 농업지대이다. 보리 등의 곡물과 야채·과일 등의 재배 외에, 낙농·양돈이 성행된다. 풍부한 수력을 이용한 전력과 수심이 깊은 피오르드해안은 화학·야금·조선·펄프 등의 공업을 발달시켰으며, 인접지역은 노르웨이 최대의 공업지역을 형성하고 있다.
(2) 남서부 피오르드지방
이 나라의 해안에는 도처에 피오르드가 발달되어 있는데, 특히 남서해안지방에는 이 나라에서도 가장 긴 소그네를 비롯한 하드당게르·노르 등 유명한 피오르드가 이어진다. 여러 크고 작은 피오르드 만구부에 발달한 도시들은 수산업·조선업·무역 등에 의존하고 있으며 최근 북해유전의 개발에 따라 인구 증가가 현저하다. 화학·금속정련 등의 공업은 피오르드만 안쪽의 도시들을 발달시켰다.
(3) 트뢰넬라지방
트론헤임피오르드 주변은 보리·감자·실과나무 등을 재배하는 경작지와 소나무·전나무가 무성한 삼림이 펼쳐진다. 그 남쪽에는 도브레피엘과 트롤헤이멘이라는 1500m이상의 산지가 있다. 북의 남소스에 걸쳐서는 굴곡이 심한 아름다운 해안이 계속되며 변화무쌍한 경관이 전개된다. 트론헤임피오르드 남안의 니드강 하구에 발달한 노르웨이 제 3 의 도시 트론헤임은 12세기까지 이 나라의 수도였다.
(4) 북노르웨이지방
대부분이 북극권내에 있다. 여름 수주 동안 보되와 트롬쇠 거리는 <한밤중의 태양>을 보기 위한 관광객으로 붐빈다. 북부사람들은 어업에 종사한다. 제 2 차세계대전 후 수력발전과 철산 개발 등 공업화가 추진되고 있다. 또한 스웨덴의 키루나광산 등에서 산출되는 철광석의 적출항 나르비크와 순록의 방목으로 생업을 삼고 있는 원주민 라프족이 있다.
3 역사
(1) 칼마르연합 이전
노르웨이 최초의 주민은 BC 1만년 무렵의 남방으로부터의 이주자였으며, BC 15∼BC 3세기에 스웨덴·덴마크의 영향을 받아, BC 1세기 무렵부터 로마의 문화가 흘러들어왔다. 8세기 무렵까지는 공동체들이 형성되어 여러 부족으로 나누어졌다. 890년 무렵 하랄왕이 통일하였으나, 다시 분열했고, 그리스도교 포교에 열심이었던 올라프 2세(재위 1015∼28)가 재통일하였다. 1028∼35년 노르웨이왕권은 덴마크의 크누드대왕 등의 지배하에 예속하였으나 마그누스왕은 국권을 회복하였다. 스베레왕이 장자 상속제를 확립한 후, 손자 호콘 호콘손 때에 중세 노르웨이 왕권은 최성기를 누렸다. 마그누스왕은 법전을 제정하였으나, 이 때부터 독일상인이 곡물공급을 장악하며 진출이 두드러졌고, 스웨덴·덴마크 양왕국의 관계는 긴밀해졌다. 마침내 스웨덴과 동군연합(同君聯合, 1319∼43)을 맺고 호콘 6세의 아들 올라프는 1376년 덴마크왕이 되고, 부왕이 죽은 뒤 노르웨이 왕위를 계승(1380), 이후 434년간 덴마크와 동군연합을 하였다.
(2) 덴마크의 영향
1397년 올라프왕의 모친인 마르그레테는 올라프가 죽은 뒤 통치자로 군림했고 덴마크·스웨덴·노르웨이 3개국의 동군연합인 <칼마르연합>을 조직한 뒤, 노르웨이는 덴마크의 영향 아래 편입되어, 크리스티안 3세 때에는 법적으로 덴마크의 한 지방으로 전락하였다. 1536년의 종교개혁은 덴마크에 의한 지배신장 수단이 되고, 니다로스의 가톨릭 대주교의 망명으로 노르웨이의 구교 세력은 힘을 잃었다. 한편, 한자무역의 쇠퇴로 영국·네덜란드 등을 상대로 하는 무역은 경제적 번영을 촉진시켰고, 1687년 크리스티안 5세의 <노르웨이법>은 노르웨이에 중앙집권화를 가져왔다. 또 유럽에서의 전쟁에서 해운국 노르웨이는 <중립>을 지켜 번영하고, 덴마크로부터의 독립기운이 높아졌다. 덴마크가 나폴레옹전쟁에서 패배한 것을 계기로 킬조약에 의하여 노르웨이는 덴마크로부터 해방되었으나, 조문(條文)에서는 스웨덴왕에게 할양되어 스웨덴과의 동군연합으로 옮겨졌다. 노르웨이는 자유주의적 헌법과 연합법을 근거로 외교·방위 이외의 자치권만 획득하였다.
(3) 독립과 중립정책
지식계급과 농민층의 대립은 문화적으로는 덴마크문화의 계승자와 노르웨이문화 재건자의 대립이며, 정치적으로는 우파와 좌파의 대립으로 표출되었다. 좌익정권이 1884년에 성립되고 의회주의가 확립되어, 98년엔 보통선거, 1913년엔 여성 참정권이 인정되었다. 1880년 노르웨이는 세계 제 3 위의 상선 보유국이 되면서 독자적인 영사관설치를 요구했으며, 이 문제의 해결을 추구하여 1905년 독립국이 되었다. 덴마크왕실로부터 카를왕자를 맞았고, 왕자는 호콘 7세왕이 되었다. 제 2 차세계대전중, 중립정책이 나치독일에 의하여 파기되었으므로, 전후에는 중립 지향을 유지하면서도 1945년 국제연합, 49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가입하였고, 경제적으로는 59년 유럽자유무역연합(EFTA)에 가맹하였다.
4 정치
(1) 정치제도
내각책임제 입헌군주국이며, 헌법은 1814년에 제정된 아이츠볼헌법을 몇 차례 수정하면서 현재에 이른다. 의회는 단원제로 165석이고, 임기는 4년이다. 헌법규정에 관계되는 사항을 심의할 때는 기능상 상·하원으로 분리되며 1/4은 상원, 3/4은 하원을 구성한다. 전국 20개 선거구에서 비례대표제로 4∼15명의 대표를 선출한다. 투표권은 18세 이상 남녀에게 주어진다. 주요 정당은 노동당·보수당·그리스도교민주당·중앙당(농민당)·사회주의좌익당·공산당이다. 1935년 이래 단독 또는 연립으로 집권하던 노동당은 81년 이래 보수당과 중앙·그리스도교민주 양당의 연립정부에 정권을 넘겼으나, 86년 소수 단독정권으로 부활하여 여성당수 브룬트란트가 총리가 되었다. 그러나 89년 9월 총선에서 보수당의 얀 시세 당수가 보수·중립 연립정부를 세워 새로 총리에 취임하였다. 그러나 90년 브룬트란트 내각이 부활, 93년 9월 총선거에서도 노동당이 과반수를 차지하여 제 1 당이 되었다. 노르웨이는 92년 11월 EC(지금의 EU)가입을 신청했으나 94년 11월 국민투표에서 부결되었다. 97년 9월 노동당이 총선에서 패해, 10월 그리스도교민주당 본데비크를 수반으로 한 중도소수연립내각이 발족하였다. 2001년 9월 실시된 총선에서는 집권 노동당이 43석을 기록해 참패했으며, 쉘 마그네 분데빅 총리가 취임하였다.
(2) 외교
오랜 타국의 지배·종속관계에서 벗어나려는 의지로 중립정책을 견지하면서도 제 2 차세계대전 당시 5년간 독일군에 점령당했던 경험으로 49년 NATO에 가맹, 현재에 이르고 있다. NATO 가맹시에는 평상시 외국군 기지를 설치하지 않는 것을 조건으로 삼았다. 59년에 NATO군 북방사령부가 설치되기는 했으나, 62년에는 국내에 핵무기 반입 금지의 보장을 받았다. 한편, 북유럽의 지역 협력을 중시하여, 53년에 스웨덴·덴마크·아이슬란드와 함께 북유럽회의를 설치하여 사회·문화·통신·경제의 통합을 추진하였고, 제 3 세계에 대한 경제원조와 국제연합 안에서의 협력을 하고 있다. 2000년 5월 백인농자 강점사태에 대한 항의로 짐바브웨 경제지원을 동결하였다.
(3) 군사
복무기간 12개월의 징병제를 실시한다. 총병력은 2만 5800명(2001)으로 육군 1만 4700명, 해군 6100명, 공군 5000명 등이다. 국방비 지출액은 1985년 30억 6700만 달러(GDP의 3.1%)에서 2000년 28억 5600만 달러(GDP의 1.8%)로 낮아졌다.
5 경제·산업 경제는 제 2 차세계대전 후 공업 비중이 가장 커졌는데, 이는 값싼 수력과 어류·목재·광물 등 천연자원 이용의 촉진 때문이다. 또 서유럽 최대 원유생산·석유수출국이다.
(1) 농림·어업
고위도이고 산지가 많은 불리한 자연조건 때문에 농업은 생산성이 낮다. 농업수입의 약 68%는 축산 수입이다. 경작지에서는 보리·감자·과일·야채를 재배하며, 목재는 16세기에서 20세기 초까지 주요 수출품이었으나 이익이 많은 펄프와 종이로 대체되었다. 삼림의 약 80%가 침엽수이다. 어업은 세계 4대어장의 하나인 북해 해역에서 청어·대구잡이를 주로 해왔는데, 1957년 이후 어획고가 감소되었다. 그러나 어업과 어선장비의 현대화로 95년에는 252만t의 어획고를 올렸다.
(2) 광공업
공업은 노르웨이에서 가장 중요한 경제활동이다. 펄프, 제지, 어유·통조림 등의 수산가공, 질소비료 등의 전기화학, 알루미늄 등의 전기야금은 수출산업으로 발전하였다. 기계·철·금속가공 등은 주로 국내시장을 상대로 발달되었는데, 최근에는 선박용 기계 및 전기기계공업의 발전이 눈부시다. 에너지 소비량은 1730만t(석유환산, 1982)인데, 수력이 46%, 석유가 43%를 차지한다. 전력의 99.8%는 수력에 의한 것이고, 국민 1인당 발전량은 2만 3000kwh로서 세계 1위이다. 석유는 70년에 북해의 노르웨이령 에코피스크유전에서 해저유전이 발견되어 94년에는 약 9억 7737만 배럴을 생산했다. 광물자원은 철·구리·아연·납 등이 있다. 특히 북부의 러시아 연방 국경에 가까운 키르케네스 남방에 있는 철광산이 유명하다.
(3) 무역
노르웨이의 높은 생활수준은 무역으로 지탱되고 있다. 1970∼80년의 10년간에 수출은 7.5배나 대폭 신장되었는데, 이는 북해유전의 개발이 진척되면서 석유와 석유 제품의 수출이 79∼80년 동안 91.8%나 증가하여, 그것이 수출의 확대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수출 구조는 석유·천연가스·석유제품이 52.2%, 기타 기계·수송기계, 알루미늄 등의 비철금속, 식품·종이·종이제품 등으로 되어 있다. 지역별로는 영국 35.6%, 스웨덴 8.8% 등의 순서로 되어 있다. 주요수입품목은 기계·수송기계·철강·섬유 등의 제조품, 석유·석유제품 등이다.
(4) 교통
독립 이후 해운업을 계속 육성해왔으나, 제 2 차세계대전중 상선은 큰 손해를 입었다. 1984년의 상선선복량(商船船腹量)은 총 1766만t이며, 75년 당시의 세계 제4위에서 제 7 위로 후퇴하였다. 대부분의 상선이 외국무역에 종사하며, 특히 과반을 차지하는 유조선은 미국·영국의 큰 석유회사와의 장기계약 아래 운항되고 있다. 육로교통은 험준한 지형의 영향을 받으나, 토목기술의 발전에 따라 도로의 정비가 진척되어 중요한 교통망을 잘 형성하고 있는 오슬로를 중심으로 발달되었다. 항공로는 국내 각지로의 정기편이 3개 회사에서 1일 약 400편 운항하고 있다. 특히 북극권내와 낙도 각지를 단시간에 연결하는 교통수단으로서 중요하다. 연안 항로는 다른 교통수단이 발달된 오늘에도 노르웨이인의 생활과 경제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그중에서도 베르겐-키르케네스항로는 여객 외에도 우편물과 화물 수송에 불가결한 것이 되고 있다.
6 사회
(1) 주민·언어
주민의 대부분이 게르만계에 속하는 노르웨이인이나, 북부에는 약 2만 5000명의 라프인이, 또 특히 핀마르크에는 약 7000명의 크벤으로 불리는 핀란드인이 살고 있다. 라프인은 과거에 순록 방목을 하던 유목민족으로 오랫동안 법적 차별을 받아오다가, 순록 사육의 독점권을 부여받았으나 지금은 그 대다수가 농업 또는 어업에 종사하고 있다. 또한 라프문화를 보호하기 위한 공공단체가 설립되어, 자녀의 학교 교육에 있어 부모가 희망할 경우 교실 안에서 라프어를 사용할 수 있도록 법제화하였다. 공용어는 노르웨이어이나, 그밖에 표준어로 보크몰어와 신노르웨이어가 인정되며, 공문서 및 의무교육에서 양자의 병용이 허용되고 있다. 보크몰어는 전국적인 세력을 가졌으며, 신노르웨이어는 서부를 중심으로 한 지방에서 많이 쓰인다. 정치적으로는 보크몰어는 보수계, 신노르웨이어는 혁신계가 즐겨 쓰지만, 일률적은 아니며, 각각에서도 보수형·혁신형으로 알려진 언어의 차이가 있다. 또 지방마다 문장어가 다른 방언이 있고 그 수는 대략 10가지 이상이 되어 언어의 획일화를 거부하는 국민의 요구를 반영해서 공공방송·신문·잡지를 통해 자유로이 사용되고 있다.
(2) 국민생활
인구의 약 70%가 도시지역에 거주한다. 인구증가율은 해마다 감소하는 경향이며, 60세 이상의 노인 비율은 최근 100년 동안에 2배인 20%를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국내총생산은 1인당 3만 800달러(2001)이다. 실업률은 1980년에는 1.7%에 불과하였으나 95년에는 4.9%로 상승하였다.
(3) 교육·종교
1737년에 지방교육법 제정으로 일찍부터 교육의 기회균등이 추진되고, 1827년에는 의무교육 취학연령의 전국적인 통일이 이루어졌다. 그 뒤 1936년에는 종래 사회계층의 격차를 반영하던 이원적인 교육체계가 일원화되었다. 의무교육은 9년간이며, 중등교육은 74년에 일반교양을 위한 김나지움(보통 중등학교)과 7종의 직업훈련학교(각각 1∼2년간의 기초 및 상급과정이 있다)로 통합되었고, 대학교육의 문은 자격시험에 합격한 모든 국민에게 열려 있다. 공교육과는 무관한 성인교육도 성행한다. 약 30개의 조합·클럽 등이 정부의 지원으로 실시하는 민간교육과, 오랜 전통이 있는 국민고등학교에 약 반수의 국민이 참가하고 있다. 종교는 복음루터파를 국교로 하며, 노르웨이국교회에는 국민의 약 96%가 속하고 있다.
(4) 복지
다른 북유럽 여러 나라와의 밀접한 정보교환과 협력체제 아래에서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로 특징지어지는 복지정책이 행해지고 있다. 의료에 있어서는 모든 주민에 대한 강제 질병보험이 시행되고, 특히 학교아동에 대해서는 의무건강관리 제도가 있다. 사회보험으로는 고용자측에 부담을 지우는 노동재해보험과 국가강제실업보험이 있고, 16세 이하의 아동에 대한 아동수당과, 퇴직 전 수입의 3분의 2를 보장하는 노령연금 등 각종 연금도 정비되어 있다. 신체장애자와 과부·미혼모에게는 연금의 지급과 함께 취업을 위한 교육·훈련 시설을 국가가 마련하는 등 세심한 조치를 취하고 있다.
7 문화 고립되기 쉬운 지형 때문에 지역주의의 전통이 강하며, 문화·스포츠·사회 등 여러 가지 활동이 지역내 민간의 여러 조직을 통해서 실시된다. 특히 스키·스케이트·축구로 대표되는 스포츠활동이 활발하며, 노르웨이스포츠협회에는 2700개의 클럽 밑에 약 33만명이 참가하여, 노동조합과 비견되는 대조직을 이루고 있다. 또한 노벨상은 스웨덴을 중심으로 전형되는 상이지만, 노벨평화상은 노르웨이국회가 선출한 5인위원회가 매년 선정하여 시상하고 있다.
(1) 문화시설
오슬로에는 국립극장·국립미술관·뭉크미술관을 비롯한 역사·공예 등 8개 박물관이 있는데, 정부의 관리와 재정 지원을 받고 있다. 공공도서관은 1947년의 도서관법 개정으로 모든 지방자치단체에 설치토록 의무화하였다. 1895개 이상의 도서관 시스템이 있고, 인구 8000명 이하인 시·읍·면에서는 주민 1명당 10크로네, 대도시에서도 5크로네의 국가 원조가 있다. 벽지에는 버스와 선박에 의한 이동도서관의 편의가 제공되고 있다.
(2) 예술
노르웨이문학은 고대 북유럽신화와 사가(saga;전설·무용담)를 주제로 한 서사시의 전통을 지니며, 중세 민속문학·궁정시인의 창작활동을 거쳐, 19세기에 <국민문학>을 탄생시켰다. 전반기 웨르겔란은 언어와 문학에서 후진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후반기 입센과 뵈른손은 노르웨이 독자적 희곡을 탄생시킨 작가로서 높이 평가되며, 외국에도 그 희곡이 널리 보급되었다. 음악에서는 유명한 그리그가 민족로맨티시즘 운동과 발맞추어 농촌의 민요·댄스를 제재로 작곡하였다. 미술공예는 고대 바이킹선에서 볼 수 있었던 우수한 조각 기술이 있고, 현대 조각가로는 G. 비겔란이 유명하다. 회화에서는 뭉크가 <표현파의 시조>로서 19세기 말부터 세계에 이름을 떨쳤다.
(3) 언론·출판
언론·표현의 자유가 헌법에 명기된 것은 아이츠볼헌법에서이지만, 그 뒤로 스웨덴 지배 아래서 탄압을 받아, 실제로 그것이 인정된 것은 1840년이었다. 현재 노르웨이 정부는 소설 간행의 원조에 특히 주력하여, 1960년부터 신간소설을 정부가 1000부씩 사들이는 적극적인 정책을 폄으로써 침체되어 있던 소설의 발간을 거의 배로 증가시켰다. 일간지는 260만부(1992)로 1000명 당 607부나 된다. 방송국은 국영 1개국 만으로, 라디오 제 1 방송·제 2 방송(FM), 지방프로방송 및 텔레비전 2개 방송을 내보내고 있다.
8 한국과의 관계 노르웨이는 한국전쟁 때 이동 외과 야전병원단을 파견했으며 1959년 3월에 공식적으로 수교하였다. 한국은 72년 12월 노르웨이에 상주 공관을 설치하였고, 노르웨이는 80년 주한 상주대사관을 개설했으며, 73년부터 북한과도 외교 관계를 맺고 있다. 노르웨이의 대한 수입은 3억 5705만 달러, 대한 수출은 4억 172만 달러(2001)이다. 한국의 노르웨이에 대한 수출품의 주종은 선박이며, 노르웨이는 선박의 설계·안전설비·고도 정밀 부품 생산 등 첨단적 선박 건조 기술을 보유하고 있어, 조선관계 기술협력이 활발하다. 또한 두 나라 사이의 해운협력도 추진되고 있다. 노르웨이에는 2001년 현재 243명의 교민과 68명의 체류자가 있고, 한인회가 결성되어 있다. 노르웨이는 한국과 국제사회에서 호의적인 태도를 보여왔고, 앞으로도 양국관계는 정치·외교·국제무역·문화교류 등 여러 분야에서 더욱 지속·강화될 것으로 보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