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孝寧大君(효령대군)
효령대군 (1396~1486) . 태종의 둘째 아들이다.
첫째가 폐세자된 양녕대군이고 셋째 아들이 후일 세종이 되는 충녕대군이다.
효령대군의 아버지 즉 태종은 1명의 정비(왕후)와 9명의 후궁을 두었고
정비인 원경왕후 민씨와의 사이에서 4명의 아들과 4명의 공주를 두었다.
이 4명의 아들들이 양녕, 효령, 충녕, 성녕대군이다.
이중 넷째 아들 성녕대군은 14세에 홍역으로 인해 죽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름은 보, 초명은 우, 자는 선숙, 호는 연강, 시호는 정효이다.
태조 이성계 시절에 태어나 9명의 임금을 모시면서 성종 17년에 91세의 천수를 누리고 죽었다.
세종대왕의 형님으로 살아가기
태종이 장남 양녕대군과 둘째 아들 효령대군을 뛰어넘어 셋째 충녕대군(훗날 세종)에게
왕위를 계승해 줄 세자로 마음먹고 있을 때 양녕과 효령은 얼마나 가시방석이었을까 ?
아버지 이방원이 어떤 사람인가 ?
할아버지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건국하면서 ..
개성 선죽교를 비롯한 여러 곳에서 손에 피를 묻힌 인물이며 ...
왕자의 난 때 이복동생 방석과 방번을 가차없이 죽여 버린 사람이다.
또한 효령대군이 좌찬성 정역의 딸을 신부로 맞이하여 결혼한 이듬해 할아버지 이성계가 세상을 뜨자
생전에 이성계의 총애를 받았던 신덕왕후( 태조의 계비 강씨 )의 정동에 있던 무덤을 훼손하여
묘지는 동소문 밖 정능으로 보내버리고 석물은 뜯어내어 경복궁에서 숭례문에 이르는
개천에 다리를 놓아 만백성이 밟고 다니게 했던 사람이다.
바로 광통교의 역사이다.
이렇게 무서운 아버지 태종이 동생 충녕에게 마음을 두고 있을 때 두 형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죽느냐 사느냐 바로 그것이 문제이었다.
세자로 책봉되어 왕위 계승이 보장된 양녕대군은 밤이면 개수구멍으로 대궐을 빠져나와 저잣거리에서
주막집 주모와 시시덕거리고 시정잡배와 어울리며 그 소식이 구중궁궐 대궐 담장을 넘어 아버지의 귀에 들어가기를
바랐으며 효령대군은 불경에 푹 빠져 중 아닌 중 노릇을 하며 아버지의 날카로운 시선을 피했다.
이러한 와중에 외삼촌 민무구 사건이 터졌다.
아버지 태종을 도와 계비 강씨의 소생 방석을 옹호하던 정도전 일파를 제거한 민무구, 민무질 두 외삼촌은
누나인 태종비 민씨의 힘을 믿고 세자 양녕대군을 끼고 돌면서 무엄하게도 태종과 각을 세운다.
인척이 발호하는것을 용납하지 않은 태종의 명에 의하여 사약을 받으니...
이때가 1410년으로 효령대군의 나이 14세이었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였으나
한양에 도성을 미처 마련하지 못했을 무렵
개성에 있는 정안궁에서 이방원의 정실 원경왕후의 몸에서 태종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효령대군은
할아버지 이성계의 건국 초기 혼란스러움과 아버지 이방원의 왕자의 난
아우 세종대왕의 태평치세 그리고 조카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과 성종의 태평성대를
두 눈으로 목격한 몇 안되는 인물 중의 하나이다.
태종이 말하는 효령대군이 세자가 되어서는 안 되는 이유
양녕대군이 폐세자된 후 태종이 둘째 아들인 효령대군대신 충녕대군을 세자로 택한 이유가
태종실록 35권에 기록되어 있다.
옛 사람이 말하기를 손 윗사람이 임금이 되는 것이 나라의 복이다..라고 하였다.
효령대군은 자질이 미약하고 또한 융통성이 부족하다.
내 말을 들으면 그저 빙그레 웃기만 할 뿐이다. 나와 왕비는 효령이 항상 웃는 것만을 보았다.
충녕대군은 천성이 총명하고 민첩하여 자못 학문을 좋아하여
비록 추운 때나 몹시 더운 때를 당하더라도 밤새도록 글을 읽었으므로..
나는 그가 병이 걸릴까 두려워하여 밤에는 글을 읽는 것을 항상 금하였다.
또 정사를 다루는 원칙을 알아서 중대한 문제가 있을 때마다 제안하는 것이 진실로 합당하였고...
또 예상을 뛰어넘는 발상도 있었다.
중국의 사신을 접대하는 경우에도 몸가짐이며 언어 동작이 두루 예에 부합하였고 술을 마시는 것은
비록 유익한 일은 아니지만 중국의 사신을 상대하여 주인으로서 한 잔도 마시지 않는다면
어떻게 손님에게 권할 것이며 환심을 살 수 있겠는가 ?
효령대군은 술을 한 잔도 마시지 못하니 이 것도 안 될 일이다.
충녕은 비록 술을 잘 마시지는 못하지만 알맞게 마시고 그만두며 또한 그 아들도 장래성이 있다.
충녕대군은 큰자리를 맡길 만하므로 나는 충녕을 세자로 삼고자 한다.....
효령대군은 조선 개국 초기의 억불숭유정책에 입각한 왕권확립과 종교 변혁기(고려의 불교에서 유교로..)에
동요하는 백성들의 민심 이반을 총화로 이끌기 위하여 유교와 불교의 조화론을 주창하였다.
효령대군과 매월당 김시습
매월당 김시습
그는 세조의 왕위 찬탈에 온 몸으로 항거하며 이 강산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을 정도로 방랑의 세월을 보낸다.
그는 방랑시기를 거쳐 1463년부터 1470년 사이에 경주 금오산에서 그의 중년기를 보낸다.
금오산 시절 김시습은 두 차례 한양 출입을 하였다.
첫 번째는 경주 금오산에 정착한 첫 해 봄에 책을 구하러 한양에 갔다.
그러다가 효령대군의 눈에 띄어 어쩔 수 없이 열흘 가량 내불당에 머물며 ' 묘법연화경 ' 의 언해에 참여하였다.
여러 불경을 간행하던 간경도감을 관할하던 효령대군이 김시습을 불경에 밝은 학승(學僧)으로 대우한 것이다.
이때 김시습은 효령대군에게 받은 얼마간의 돈으로 국영 출판국이던 교서관에서 펴낸
맹자대전, 성리대전, 자치통감, 노자 등을 구입하고 서둘러 금오산으로 돌아왔다.
그후 효령대군이 원각사를 준공한 후에 전국의 스님을 초치한 운수천인도량에 김시습도 불려간 것이다.
이때 효령대군은 김시습에게 급히 올라오라고 말까지 보냈다.
이때 원각사의 일화가 전한다.
낙성법회가 있던날...
김시습은 세조를 만나지 않으려고 미친 척 뒷간에 빠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이 아니다.
사실은 승려로서 평생을 살 수 있는 신분증으로 계권이라고도 하는 도첩을 받고 이렇게 김시습은 찬양하였다.
불법을 널리 반포하니 요임금 하늘이 가깝고 왕도의 강령을 널리 펴시니 순 임금 날이 펼쳐지네 ..
효령대군이 강제로 권하여 지었다.
세조는 기분이 좋아져 김시습을 친견하겠다고 전지를 내렸지만 그러나 김시습은 서둘러 도성을 빠져 나왔다.
도첩을 받았으니 멈칫할 까닭이 없었고 금오산으로 돌아가고 싶었던 것이다.
연이는 추문, 효령대군의 망신
세종 9년(1427년) 2월 19일 의금부에서 보고를 올렸다.
그 보고 내용이 우선 충격적이었다.
돈녕부 지사 이담이 몰래 효령대군의 첩 기생 계궁선과 간통하였으니
법률에 의거 곤장 60대에 도형(오늘날의 징역형) 2년 반에 해당합니다.
돈녕부란 왕실 종친의 범위에 포함시키기 애매한 먼 종친이나 외척을 관리하기 위해 태종 9년에 만들어진 기구이다.
그러면 도대체 이담이란 어떤 인물이기에 현직 국왕의 친형의 기생 첩과 대담하게 간통할 수 있었던 것일까 ?
이담은 이성계의 이복동생이자 초지일관하여 태종 이방원을 후원하였던 이화의 4남이다.
결국 이담은 비록 서자의 후손이기는 하지만 효령대군의 5촌 아저씨이었다.
이때 효령대군의 나이 한창 때인 32세이었다.
보고를 받은 세종은 난감하였다.
이화가 누구인가 ?
개국공신 1등에 자신의 아버지 태종이 주도한 1차 왕자의 난 직후 책봉된 정사(靖社)공신 1등
2차 왕자의 난 직후 책봉된 좌명공신 2등으로 ' 3 공신 '에다가 1등공신 중의 1등공신이었다.
결국 세종은 ' 종실훈친의 후손 '이라는 이유로 직위만 해제하고 공주로 귀양보냈다.
대신 효령대군의 첩 계궁선은 곤장 90대 이담과 계궁선 사이에 다리를 놓아준 중매쟁이 기생
대천교는곤장 80대의 처벌을 받아야 했다.
공주로 귀양갔던 이담은 이드해 윤 4월에석방되었고 후일 복권까지 되었다.
다시 세종 9년...
문제의 의금부 국문이 있은지 석달 후인 5월9일 이번에도 ' 왕실의 추문 '과 관련하여
세종은 대대적인 단죄를 명한다.
조선의 2대 왕인 정종이 후궁이 아닌 궁첩으로부터 얻은 아들들인 이의생, 이무생, 이복생 등을
한꺼번에 각각 강화도나 원주 등으로 유배보냈다.
서얼이기는 해도 자신의 사촌형제들을 대거 중형에 처했다는 것은 뭔가 큰일이 있었다는 의미이다.
이번에도 중매쟁이 기생이 등장한다.
이의생은 기생 매소월을 첩으로 삼은 다음에 매소월로 하여금 이무생에게
자동선, 간설매, 죽간매를 소개하도록 하여 간통을 도왔고
이복생에게는 약계춘과 백정의 딸 보금을 연결시켜 주었다.
사실 조선 초기에 권력에 참여할 수 없었던 왕실 사람들이 땅과 저택 기생첩을 옆에 끼고
한세월 보내는 것을 탓하는 풍조는 아니었다.
문제는 또 효령대군과의 관련이었다.
죽간매와 약계춘은 효령대군이 ' 일찍이 관계했던 여인들 '이었다.
게다가 '보금'은 의성군이 일찍이 관계했던 자이고, 간설매는 봉녕군의 아들이 일찍이 관계했던 여인이었다.
의성군 이용은 효령대군의 큰 아들이다.
봉녕군은 태조 이성계의 장남이자 태종의 친형인 진안대군 이방우의 외아들이다.
현실의 권력 논리를 배제하고 적장자(적장자)로 이어졌다면 조선의 왕이 되었을 수도 있는 인물이다.
효령대군이나 의성군 봉녕군은 따지고 보면 추문의 희생자들이었다.
이에 버금갈 만한 아니 그보다 훨씬 추잡한 스캔들이 세조 9년(1463) 윤7월에 터진다.
옥부향은 일찍이 효령대군과 사통하였던 당대의 명기인데
세종과 신빈 김씨 사이에서 난 익현군 이관과도 사통을 하였다.
익현군은 효령대군의 조카이다.
어우동 , 효령대군의 손주 며느리
어우동은 조선시대를 통틀어 가장 많은 그리고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들과 사랑을 나눈 여인이었다.
조선 성종 때의 실존 인물인 어우동은 본래 세종대왕의 형 효령대군의 손자 며느리이었다.
즉 어우동은 조선시대 외교문서를 관장하는 승문원 정2품 벼슬인 지사 박윤창의 딸로
효령대군의 손자인 태강수 이동의 아내이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과의 간통 문제가 불거져 이혼당하였고
그 이후 노소, 근친을 가리지 않고 숱한 염문을 뿌린다.
어우동은 한 번 관계를 맺은 남자는 절대 헤어나오지 못할 만큼 매력적이었는데
애인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몸에 문신하도록 강요하였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은 애정 행각이 구설수에 올라 풍기문란죄로 처형되었다.
야사에 의하면 당시 어우동의 형량은 고작 곤장형 정도에 불과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와 연루된 고위 과뇨들이 그녀의 입을 막기 위하여 사형을 고집하였다고 한다.
침묵의 지존
효령대군은 또한 침묵의 제왕이었다.
평생 자신의 의중을 들어내지 않고 침묵으로 일관하였다.
나라의 어른으로써 큰 일을 소리없이 추진하여 오던 그가 원망을 들은 일은
수양대군이 조카인 단종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한 일에 대하여도 침묵을 지킨 일이었다.
이를 어떻게 해석하여야 될지?
이 또한 침묵만이 자신이 할 봉사로 생각한 때문일까 ? 하여튼 그는 침묵의 지존이었다.
그러나 그도 말년인 성종시절...
어른으로써 나라의 정사에 쓴소리를 서슴치 않았다고 한다.
아마 그 때 쯤에는 할 말을 해도 무방하다고 생각하였을까?
효령대군은 오래 살았다.
세종이 죽은 후에도 36년을 더 살아 91세에 죽는다.
그리고 그는 자식복도 많아 엄청 많은 자손을 낳아 왕실 종친 중 가장 많은 후손을 남겼고 한편 많은 재산을 남겼다.
현재에도 종친회 소유의 토지가 무척 많아 당시 권력형 부정축재의 의심이 들기도 했다고 한다.
첫댓글 좋은 글 잘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