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석규의 대몽골시간여행' - 223. 한.몽 전격 수교 어떻게 가능했나?
▶620년 접촉이 없었던 한국과 몽골
원나라의 마지막 황제 토곤 테무르는 1368년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에게 밀려 북쪽 내몽골 응창(應唱)으로 도망갔다가
그곳에서 숨을 거둔다.
그리고 토론 테무르와 고려인 출신 기왕후 사이에 난 아들 아유시리다라는 몽골 초원으로 돌아가 북원(北元)제국을 세운다.
이때 고려는 공민왕 집권 후반기 시절이었다.
이 시점이 바로 몽골과 한반도 사이에 접촉이 중단되는 시기다.
그 이후 각자 제 갈 길을 살아왔던 두 나라다.
20세기 초 독립투사이자 의사인 이태준이 복드칸의 어의(御醫)가 되면서 몽골과 인연을 맺는 등
몇 건의 개인적인 연이 생겨나기는 한다.
하지만 나라와 나라 사이의 공식적인 관계는 무려 620년 동안 단절돼 있었다.
그 긴 세월을 뛰어넘어 한국과 몽골은 공식적인 관계를 잇게 된다.
무려 6백 20년 만의 재회였다.
▶한국과 몽골 전격 수교
한국과 몽골은 1990년 3월 26일, 대사급 외교 관계를 전격 수립하게 된다.
이때는 몽골이 사회주의 국가에서 시장경제 체제로 전환하기 직전의 시기였다.
그러니까 한국에게는 아시아에서 최초로 사회주의 국가와 수교하는 첫 사례가 된 셈이다.
새롭게 맺게 되는 외교 관계가 대부분 그렇지만 한국과 몽골의 수교는 양측 모두의 필요성에 의해 이루어졌다.
소련의 고르바초프의 등장과 함께 개혁과 개방의 바람이 일면서 몽골 안에서는 소련과 동구권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틀에서
벗어나 서방세계와 관계를 개선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그 흐름 속에서 몽골은 1987년 미국과 정식 외교 관계를 수립하게 된다.
같은 흐름에서 한국과도 수교해야 한다는 주장도 몽골 안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당시 몽골 내각 입법위원인 게렐 같은 사람들이 그들이었다.
▶對 한국 인식 바꿔 놓은 88 서울올림픽
소련, 북한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수십 년을 살아온 몽골인들은 한국에 대한 정보나 지식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대부분 몽골인은 한국은 미국의 아시아지역 침략을 위한 전진기지이고 아주 못사는 나라로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몽골인들의 인식을 결정적으로 바꿔 놓은 것이 바로 88 서울올림픽이었다.
올림픽 중계를 통해 한국을 접하게 된 몽골인들은 발전된 한국의 모습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올림픽에 참가했다가 돌아온 선수들의 전하는 얘기는 그들의 생각을 바꿔 놓았다.
아시아에서 잘 사는 나라 중의 한 나라가 바로 한국, 그들이 솔롱고스라고 부르는 나라라는 인식이 확산되기 시작했다.
민주화 바람을 탄 신칠렐 운동을 펼치면서 몽골은 한국과의 관계 발전 필요성을 충분히 인식했다.
하지만 쉽사리 행동에 옮기지는 못했다.
그것은 그동안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 온 북한을 의식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민간 차원 교류 수교에 큰 몫
그러한 상황을 타개하는 데 큰 몫을 한 것이 바로 한국이 주도한 민간 차원의 교류였다.
당시 국제 한국 연구원 최서면(崔書勉)원장과 이세기(李世基) 前통일부장관,
그리고 몽골학을 공부하던 교수 같은 사람이 그들이었다.
특히 최서면 원장은 수교 전에 몽골을 17차례나 방문하면서 수교를 위한 분위기 조성에 큰 역할을 했다.
그는 일본 몽골의원연맹 등의 도움을 받아 몽골을 오가면서 민간 차원의 유학생 교류 사업과 문화교류 사업 등을 추진했다.
한국 민간인들의 움직임과 관련해 몽골 주재 북한 대사관은 몽골 측에 여러 차례 유감을 나타내고
어떤 때는 북한대사가 직접 항의하기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민간 차원의 활동은 지속적으로 이루어졌고 그 결과 수교 직전에 ‘한국 몽골협회’가 공식적으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이 협회의 회장은 게렐 내각 입법위원이, 부회장은 도루지 몽골국립대 총장이 맡았다.
▶6백 년 이상 뛰어넘어 새 관계 수립
이런 축적된 분위기 속에서 정부 차원의 수교 협상은 도쿄에서 진행됐다.
당시 이원경(李源景) 주일한국대사와 주일 몽골 대사 사이에 진행된 협상이 결실을 맺어 결국 수교 합의를 끌어냈다.
그 결과 1990년 3월 26일 한국의 이기주 (李旗周)외무부 제2차관보와 욘돈 몽골 외무부 1차관보가 울란바토르에서
수교 의정서에 정식 서명하게 된다.
이로서 한국과 몽골은 6백 년 이상의 세월을 뛰어넘어 새로운 관계 설립을 위한 발걸음을 내딛게 됐다.
국교 수립 직후 몽골은 몽골 사회과학원 부설 동양연구소에 연구원 5명으로 구성된 한국 연구 특별반을 만들어
한국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에 착수했다.
▶수교 다음 해 몽골 대통령 방한
초대 몽골 주재 한국대사는 이미 수교 전에 내정된 권영순교수가 취임했다.
그리고 한국 주재 몽골대사는 김일성대학을 나오고 5년간 북한 주재 몽골대사를 지낸 우르진룬데브대사가
초대 한국 주재 몽골대사로 취임했다.
그는 무려 17년간 한국 주재 대사로 지내면서 우진로(禹進路)라는 한국 이름을 가진 지한파가 됐다.
그는 몽골로 돌아간 뒤에는 몽골의 한반도 전문가로 역시 한국과 몽골의 발전적 관계를 이어가는 데 기여하고 있다.
한국과 몽골이 수교한 직후 몽골은 사회주의 체제를 버리고 시장 경제체제로 전환한다.
그리고 과도기 대통령으로 의회에서 오치르바트를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오치르바트 대통령은 취임 다음 해인 1991년 한국을 방문했다.
그만큼 한국과의 관계 개선과 경제 협력이 몽골에게 필요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간접선거로 과도기 대통령을 맡았던 오치르바트는 1993년 치러진 직선 대통령 선거에서
사회민주당 후보로 나서 대통령에 당선된다.
지한파 인물이 몽골의 최초 직선 대통령이 됨으로써 한국과 몽골이 급속히 가까워지는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조성됐다.
▶무지개 같은 나라 한국
다음 달이면(3월) 두 나라가 수교한 지 34주년이 된다.
짧지 않은 기간 동안 한국과 몽골 사이에는 인적 물적 교류와 문화적 교류가 활발하게 이어졌다.
그동안 코리안 드림을 안고 무지개의 나라 ‘솔롱고스’를 다녀간 몽골인들이 상당수에 이른다.
몽골에서 그들과 함께 호흡하며 살아가는 한국인들도 적지 않다.
지금 몽골인들에게 한국은 그들이 ‘솔롱고스’라고 부르는 한국의 이름 그대로
비가 멎은 뒤 초원에 뜨는 무지개 같이 느껴지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