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히 있어야 할 아이가 보이지 않습니다. 장난하나? 처음엔 그렇게 생각하지요. 시간이 조금씩 흐를수록 장난이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해집니다. 그러나 현실로 다가옵니다. 그리고 그 시간이 살을 베기 시작합니다. 차라리 살을 베면 나을 것입니다. 마음의 살을 도려냅니다. 불안과 걱정이 공포와 고통으로 바뀝니다. 이리 뛰고 저리 뛰며 하루가 지나갑니다. 제 정신이 아닙니다. 오로지 아이 생각만으로 시간이 꽉 찹니다. 그리고 정신이 뒤집어질 지경이지요. 어떻게든 찾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덤빕니다. 돕고자 하는 사람들이 모두 굼벵이처럼 보입니다.
용의자가 출현했습니다. 그런데 확실한 증거가 없습니다. 그 날의 정황으로 볼 때 충분한 혐의가 포착됩니다. 시간이 흘러도 별다른 확증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니 경찰은 무작정 붙잡아둘 수가 없지요. 아비로서는 보다 강력하게 윽박지르면 실토를 할 것도 같은데 경찰이 자기 마음처럼 움직여주지 않습니다. 만약 자기 자식이라고 생각해봐라, 이놈들아! 그렇게 쉽게 놓아줄 수 있겠느냐? 외쳐봅니다. 도저히 자기 말이 먹힐 것 같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해보고자 합니다.
용의자는 정신지체아입니다. 나이는 들었지만 그 나이대로 사는 것이 아니지요. 게다가 뚜렷한 범행동기도 없습니다. 그런데 어쩌란 말인가? 하기야 성폭력범이라면 구태여 동기가 필요하겠는가? 아무튼 유일한 용의자요 사고 당시의 정황은 충분히 범인으로 지목하게 만듭니다. 더구나 자기에게만 말해준 한 마디는 스스로 범인임을 확증시켜줍니다. 그러니 단단히 혼 줄을 내면 실토하리라 생각합니다. 스스로 경찰이 되어 개인취조를 합니다. 그것도 무시무시한 폭력을 행사하면서. 친구에게 도움을 청합니다. 내 자식 귀한 줄 알지만, 그러나 이것은 아니야. 마지못해 돕기는 하지만 이내 포기합니다. 내 자식 살리려 또 다른 범죄를 저지를 수는 없는 일 아니겠는가, 과연 옳은 일인가 생각해봅니다.
시간이 갈수록 아이의 생존 희망이 사라집니다. 그러니 마음은 더욱 조급해집니다. 아무래도 용의자에 대한 폭력이 더욱 과격해집니다. 또 다른 범죄를 만들고 있는 것이지요. 물론 본인은 자각하지 못합니다. 오직 자기 자식 찾을 일념에 몰두합니다. 분명 이 녀석이 범인인데 왜 자기한테는 말하고 정작 경찰에게 또는 다른 사람에게는 말을 하지 않는단 말인가? 오히려 괘씸해집니다.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이라는 핑계로 또 다른 폭행을 저지른다는 것이 용서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그 마음을 이해는 하지만 그 악행까지 용서할 수는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정의라는 이름으로 행하여지는 많은 악행들을 익히 보아왔습니다.
세상은 결코 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내가 아무리 급해도 세상은 자기 갈 길을 묵묵히 갈 뿐이지요. 내가 느긋하면 세상은 빨리도 움직입니다. 그런데 내가 급하면 세상은 얄밉도록 느립니다. 그저 자기 생각일 뿐이라는 사실은 삶에 여유가 생겼을 때 깨닫습니다. 물론 똑같은 일을 또 당해도 우리는 그 생각에 다시 빠지고 말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내 중심으로 나가려 하기 때문이지요. 더구나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것에 어떤 해가 닥치면 머리 뚜껑이 열리게 됩니다. 정신이 나가게 됩니다.
집안에 환자가 하나 생겨도 한 가족의 일상생활의 양상이 많이 바뀌게 됩니다. 하물며 뜻하지 않은 사고가 발생하면 그야말로 한 가족의 삶이 풍비박산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겉으로 보이는 삶의 모습만 바뀌는 것이 아니지요. 때로는 정신적으로 심리적으로 긁혀진 상처가 평생을 갈 수도 있습니다. 때문에 그런 사고는 없도록 하는 것이 좋습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참으로 기묘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좋은 의미에서 뿐만 아니라 매우 좋지 못한 뜻에서의 희한한 사람들이 있단 말이지요. 사람이 어떻게 저럴 수가 있을까, 하는 짓을 서슴없이 저지릅니다. 불행한 일입니다.
그런 말이 있습니다. 세상에는 두 가지 죄인들이 살고 있다고요. 하나는 감옥 안에 있는 죄인들이고 하나는 감옥 밖의 죄인들이라고요. 자식을 찾는 아비도 결국은 또 다른 죄인이 됩니다. 그리고 그 값을 치르지요. 참으로 묘합니다. 우리 모두가 사실은 무엇엔가 갇혀 살고 있습니다. 자신의 생각이 감옥이 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자기 본인이 될 수도 있고 반대로 상대방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한번 눈에 찍히면 벗어나기가 어렵지요. 그 사람의 선입관에 갇혀버립니다. 이 경우는 자기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일로 발생합니다. 아이의 실종, 사실 부모의 뜻이 아닙니다.
어린 자식을 잠시라도 잃어버린 경험이 있는 부모는 압니다. 그 심정을. 세상이 절벽으로 다가옵니다. 앞이 캄캄해집니다. 심장이 있는 힘을 다해서 뜁니다. 어찌 할 바를 모릅니다. 정신없습니다. 온몸이 부들부들 떨립니다. 설령 시간이 지나 찾는다고 하더라도 그 때의 공포와 고통은 오래도록 남아 있습니다. 물론 영영 찾지 못하는 경우보다는 한결 빠르게 치유가 될 것입니다. 그래도 두려움은 남아 있습니다. 정말 경험하고 싶지 않은 일이지요. 영화 ‘프리즈너스’를 보고 생각해보았습니다.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도 마음이 불편합니다.
첫댓글 공감합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