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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녹번동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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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론과묵상 스크랩 2011년 4월 23일 부활 성야
이안드레아 추천 0 조회 13 11.04.22 21:5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2011 4 23일 부활 성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서 나를 만나게 될 것이다."

(마태 28,1-10)

 

Go tell my brothers to go to Galilee,
and there they will see me."

 

말씀의 초대

 부활 성야 미사에서는 다른 주일이나 축일과는 달리 말씀 전례가, 일곱 개의 구약 성경 말씀과 신약의 서간과 복음 말씀으로 구성되어 있다. 독서 말씀은 사람들을 구원하시고자 인류 역사 안으로 들어오신 하느님의 구원 사건을 전한다. 특히 구약 성경의 일곱 독서 가운데 탈출기 14장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를 통하여 이집트 종살이에서 벗어나 홍해 바다를 마른 발로 건너는 놀랍고 경이로운 파스카 사건을 전하는 것으로 부활 성야 미사의 의미를 가장 잘 전달한다(독서). 마리아 막달레나와 다른 마리아가 이른 아침부터 예수님 무덤에 찾아간다. 천사가 나타나 여인들에게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음을 알려 준다. 여인들이 제자들에게 이 소식을 전하러 가는 길에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다. 주님을 향한 애틋한 사랑으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게 된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예수님의 부활을 맨 처음 만난 여인이 있습니다. 바로 마리아 막달레나입니다. 복음서에서 일곱 마귀에 사로잡혔다가 예수님을 만나 낫게 된 여인입니다(루카 8,2 참조). 이런 인연으로 예수님을 만난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기까지, 아니 그 너머 죽음의 장소까지 그분과 함께한 여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마치 아가의 여인처럼 자기 영혼의 사랑이신 예수님을 찾아 날이 밝기도 전 무덤 앞에 와 있습니다.
요한 사도는 사랑은 두려움을 몰아낸다고 했습니다(1요한 4,18 참조). 예수님을 향한 지극한 사랑은 어둠도 죽음도 두렵지 않습니다. 또한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누구신지를 안다고 했습니다(1요한 4,7 참조). 마리아 막달레나는 주님에 대한 지극한 사랑 때문에 부활하신 주님을 가장 먼저 알아 뵙는 기쁨을 누립니다
.
사실 진정한 사랑은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지 않습니다. 죽어서 끝나 버릴 사랑이라면 보이는 것에 대한 집착이지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영혼의 사랑은 삶과 죽음을 넘어 영원성에 가 닿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묻히셨지만 마리아 막달레나의 사랑은 계속됩니다. 부활하신 주님과 만남은 바로 사랑의 영원성을 말해 줍니다
.
아무런 조건 없이 바친 사랑에는 분명히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그 사람이 가족이라도 좋고 이웃이라도 좋습니다. 에로스 사랑을 넘어 자신을 온전히 내어 주는 아가페 사랑이면 분명히 그 안에는 부활의 신비가 담겨 있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가 한 주님 부활의 체험은 오늘날 우리 삶 한가운데 이런 사랑의 관계 속에서 계속됩니다.

☆☆☆

 마리아 막달레나는 이른 새벽 예수님을 만나러 그분의 무덤으로 갑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던 겁니다. 어떻게 만날 수 있을지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 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예수님에 대한 애정과 슬픔이 그녀를 무덤으로 인도했을 뿐입니다.

막달레나는 그분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사랑이 진했기에 죽음을 받아들이기가 무척 힘들었습니다. 그러한 애정을 지녔기에 주님의 부활을 처음으로 맞이하게 됩니다. 그녀는 천사를 만납니다. 경비병들은 천사를 보고 두려워 떨다가 까무러쳤지만 그녀는 두려움 속에서 반가움을 느낍니다. 예수님의 소식을 고대했기 때문입니다. 막달레나는 추호의 의심도 없이 천사의 말을 믿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이에게 부활은 어려운 가르침이 아닙니다. 사랑 없이 머리로만 받아들이려 하기에 부활은 난해한 이론이 됩니다. 사랑하는 마음을 간직한 이에게는 천사가 나타납니다. 천사가 나타나 부활을 알려 줍니다. 막달레나는 이 사실의 증인입니다.
그녀는 제자들에게 달려갑니다. 슬픔이 기쁨으로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그녀의 모습을 우리는 상상할 수 있습니다. 환희로 밝아진 아름다운 모습을 우리는 기억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우리의 빛      

-조성풍 신부-


 오늘 부활성야 미사 전례에서는 ‘그리스도 우리의 빛’이라고 외치는 사제의
노래에, ‘하느님 감사합니다’라는 응답이 울려 퍼집니다. 이어서 인류의
삶 안에 들어오신 하느님 사랑의 손길을 노래하는 ‘부활찬송’이 울려 퍼집니다.
어두운 곳에 들어가거나, 어두운 길을 걷게 되면 왠지 모를 두려움이
마음 한 구석에 자리하게 됩니다. 그때 환한 빛은 아니더라도, 내부 공간 또는
걸어가야 하는 길을 분별할 수 있을 만큼의 희미한 빛이라도 있으면
얼마나 반가운지요?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항상 밝고 맑은 상태만을
유지할 수는 없는 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때때로 감당하기 어려운 탁함과
어두움이 우리를 감쌀 때도 있습니다. 이럴 땐 정말 작은 불빛이라도 있으면
하는 그런 심정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환한, 아니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환한 빛을 만납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바로 그 빛이십니다.
우리의 어두움을 몰아내시고자 오신 빛이십니다. 이제 우리는
그분을 만나야 합니다. 그분을 만나는 곳은 다른 곳이 아닌 갈릴래아입니다.
제자들에게 갈릴래아는 자신들의 일상의 삶의 자리였습니다.
우리도 우리 삶의 자리에서 빛이신 부활한 예수님을 만나고 전해야겠습니다.
 


   무덤

-이동훈 신부-


 빈 무덤은 예수님 부활의 상징이다. 빈 무덤은 죽음에 대한 승리를 보여주는 표징이다. 그리스도인은 빈 무덤을 바라보고 허탈감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무덤에서 사라진 예수님을 선포하는 사람들이다.
성금요일에 우리는 성난 군중이 되어 예수님을 배반하였고 그로 인해 예수님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묻히신 무덤은 바로 예수께 대한 우리의 믿음이 묻힌 곳이기도 하다. 빈 무덤은 죄 사함과 새 출발의 상징이다. 부활절 첫날에 여인들처럼 우리 믿음이 묻혀 있는 무덤을 찾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들려주는 믿음직한 목소리를 듣는다. “왜 너희는 죽은 것에서 생명을 찾고 있느냐? 너희를 향한 나의 사랑이 살아났다. 알렐루야!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
부활절은 단순히 2천 년 전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거룩한 사건이 아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필요함을 발견한 날이면 언제나 작은 부활절이다. 우리의 믿음과 희망을 새롭게 하고, 내적 평화를 감지할 때,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묻어두었던 무덤이 비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빈 무덤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확인하듯이 우리의 부활도 그곳에서 확인한다. 하느님 없이 살아가는 우리 인생의 성금요일은 빈 무덤을 통해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하는 것이다.
우리의 배반과 죄악에도 끊임없이 사랑을 베푸시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죽음으로 우리에게 참다운 생명, 부활의 삶을 주셨다. 알렐루야!


 성토요일에...

-오상선신부-


 깊은 침묵이 흐른다...
아주 깊은 침묵이다.
그래서 이 침묵은
억조창생을 뒤흔들어 깨운다.

침묵은 더 이상 말없음이 아니다.
침묵은 더 이상 조용함이 아니다.
침묵은 더 이상 무기력함이 아니다.
침묵은 더 이상 돌무덤이 아니다.

침묵은 일깨움이다.
침묵은 빛이다.
침묵은 평화이다.
침묵은 구원이다.
침묵은 <텅빈 충만>이다!

그래서
침묵은 미구의 <부활>이다!!!


   주님의 불편한 사랑

-김찬선신부-


 어제 십자가의 길을 하였습니다.
전례 형제들이 잘 준비하여
지금까지 했던 그 어느 십자가의 길보다
깊이 있고, 실감나게 십자가의 길을 하였습니다.
몇 해 전 상영됐던 "Passion of Christ"를
이용한 십자가의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의 길을 하면서
내내 마음이 불편하였습니다.
왜 그럴까 생각해보았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불편한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저토록 고통을 당하시는데,
나는 예수님을 위해서 아무런 고통을 당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모님은 저토록 고통에 함께 하시는데
처음에 억지로 십자가를 졌던 시몬도 십자가를 함께 지는데
베로니카는 그토록 고통을 마음에 새기는데
저는 안주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 큰 괴로움 가운데 있는 사람은
예수님의 수난에서 큰 위로를 얻겠지만
저는 안락을 누리기에 불편했던 것입니다.

제가 북한에 갈 때 마다 느끼는 불편,
죄스러움, 죄송스러움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호텔에서 어두운 평양 시내를 내려다볼 때 마다,
식당에서 식사를 할 때마다,
차를 타고 가며 허름한 사람들을 바라볼 때 마다
내가 이렇게 편한 생활을 해도 되나,
내가 이렇게 잘 먹어도 되나,
내가 이렇게 잘 입어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고
한 마디로 내가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내가 행복한 것이 불편하고,
미안하고, 죄송합니다.
그리스도의 그 Passion이 저에게는 없거나,
부족하기 이를 데 없기 때문입니다.

어제 수난 예식 중에 예수님의 십자가에 동참하는 의미로
십자가 경배 때 자기의 십자가를 봉헌하는 예절이 있었습니다.
저의 십자가는 무엇인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역시 북한 사업이었습니다.

북한 사업이 저에게 십자가로 느껴지는 것이
북한 사람들에게 너무 미안했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안 하고 싶은 이 마음을
예수님의 십자가에 매달았습니다.
용서를 청하면서.......

 


 “안식일이 지나고 주간 첫날이 밝아 올 무렵, 마리아 막달레나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러 갔다.”

-양승국신부-


<거지근성이 가장 심한 여 제자>


소년원 아이들과 함께 넌센스 성경퀴즈를 풀던 시절이 생각났습니다.


“자, 500점짜리 문제 나갑니다! 복음서 주요 등장인물 가운데 가장 ‘거지근성’이 심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정답: 막달라 마리아(막 달란 말이야^^).


또 다른 한 가지 충격적인 주장이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한국인’이었다는 놀라운 주장입니다. 어떤 근거에서 나온 주장인가요?


안식일 다음날 이른 새벽, 예수님 무덤가를 서성이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한 막달라 마리아는 너무나 기쁜 나머지 정확한 한국말로 ‘오라버니!’라고 외쳤는데, 이 외침은 성경에 그대로 옮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오~라뽀니!”


부활의 기쁨이 너무나 컸던 나머지 우스갯소리 좀 해봤습니다.


예수님 시대 당시 ‘마리아’란 이름은 아주 흔한 이름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마리아 막달레나, Maria Magdalena)는 복음서에서 “일곱 마귀가 나간 막달라 여자라고 하는 마리아”(루가 8,2)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 임종을 끝까지 지킨 여 제자이자(요한 19,25), 예수님 부활의 최초목격자(마르 16,9), 그리고 예수님 부활사건의 최초 전달자(요한 20, 11-18)였습니다.


끝까지 예수님과 생사고락을 함께 하겠다고 호언장담하던 남성 제자들이(사도 요한만 제외하고) 다들 혼비백산 달아났었지만, 마리아 막달레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십자가 밑에 서 있었습니다.


끝까지 예수님과 함께 했던 마리아 막달레나는 안식일이 지나가기만을 학수고대했습니다. 왜냐하면 돌아가신 스승 예수님의 장례절차가 너무나 황급했고 부실했기 때문입니다. 대충 적당히 무덤에 안치된 스승의 시신이 계속 마음에 걸렸습니다.


날이 채 밝기도 전, 겨우 여명이 동터오던 이른 새벽, 마리아 막달레나는 겁도 없습니다. 무덤을 향해 냅다 달립니다. 신 새벽에 무덤을 향해 전력 질주하는 마리아 막달레나를 보고 오히려 다른 사람들이 겁을 먹었을 것입니다.


드디어 예수님 무덤 앞에 도달한 마리아의 모습은 가관입니다. 한 며칠 예수님 때문에 잠이나 제대로 잤겠습니까? 먹기나 제대로 먹었겠습니까? 기진맥진한 그녀가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으며 무덤을 바라보는 순간, 기가 막힌 대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그녀의 눈길을 확 잡아끈 것은 ‘빈 무덤’이었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 입장에서 봤을 때 참으로 놀랍고, 슬프고, 안타까운 체험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시신이라도 한번 대면하려고 기를 쓰고 달려왔는데, 빈 무덤이라니요.


그러나 ‘빈 무덤’ 체험은 또 얼마나 소중한 체험인지요?


만일 마리아 막달레나가 돌아가신 예수님의 시신을 자신의 눈으로 확인했다면, 이제 살아나신 예수님은 어디에서 만나 뵐 수 있겠습니까?


참으로 수용하기 힘든 빈 무덤 체험, 백번 깨어나도 이해하기 힘든 빈 무덤 체험이지만, 하느님의 도움으로 눈이 열리고, 귀가 열리고, 신앙의 깊이가 깊어질 때, 이 빈 무덤 체험이야말로 일생일대 가장 은혜로운 사건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빈 무덤의 슬픔, 빈 무덤의 고통을 잘 견뎌낸 사람에게만이 예수님 부활의 영광이 주어질 것입니다.


견디기 힘든 하느님 부재 체험, 끝도 없는 암흑의 세월을 잘 극복한 사람에게만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감미로운 만남이 보장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수많은 다른 사람들을 두고 왜 하필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제일 먼저 발현하셨을까요?


그녀의 예수님을 향한 불같은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그녀의 목숨까지 건 활활 타오르던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그녀의 예수님을 향한 사랑은 얼마나 뜨거웠는지 모릅니다. 얼마나 강인했는지 모릅니다. 얼마나 열렬했는지 모릅니다.


생명까지 바치는 사랑, 목숨조차 두렵지 않은 사랑, 불꽃처럼 활활 타오르는 사랑 안에 예수님의 부활은 계속됩니다.

 


 

 - 장재명 신부 -

 

오늘은 예수님의 죽음을 묵상하며 부활을 기다리는 ‘성토요일’입니다. 지금은 예수님께서 무덤에 묻히셔서 잠들어 있는 때이므로 우리 또한 예수님의 무덤 옆에서 예수님의 죽음에 동참하며 부활을 기다립니다. 죽음은 이 세상에서 사랑하던 사람들과 이별하는 것이기에 우리에게 슬픔과 괴로움을 가져다 줍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인들은 이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죽은 이후에 하느님 나라로 가서 하느님의 빛나는 얼굴을 뵈오며 영원히 살게 되리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또 굳게 믿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믿고 희망하는 근거는 바로 주님이신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입니다.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으로 사셨던 예수님께서 우리와 똑같이 죽으셨지만, 하느님께서 죽었던 예수님을 다시 살리심으로써 이제 우리도 죽고 난 뒤 하느님께서 우리를 다시 살려주시리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바로 우리의 믿음이고 희망이며 우리 신앙의 전부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에 동참하면서 우리 또한 우리의 죽음을 거부하지 말고 기꺼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사랑하던 사람들과의 이별이 죽음을 통해 끝나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우리보다 세상을 먼저 떠난 모든 분들이 이미 하느님 나라에서 우리를 위하여 하느님께 빌어주고 계신다는 것을 우리는 믿습니다. 이 믿음을 우리는 ‘성인들의 통공’이라고 하며, 매 주일 미사 때마다 이것을 고백합니다. 이 믿음을 통해 우리는 살아 있을 때나, 죽어서 하느님 나라에 있을 때나 기도 안에서 서로 만나게 됩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이미 이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사랑은 영원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사랑은 이 세상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상대방이 죽었을지라도 내 마음 속에 영원히 살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비록 지상에서 우리의 삶은 짧을지라도, 우리가 지상에서 나누었던 사랑은 짧을지라도, 그 사랑은 영원합니다. 시작도 마침도 없이 영원하신 하느님께서 바로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잠들어 계시지만, 이 죽음의 잠은 곧 끝날 것입니다. 새로운 생명의 빛이 다시 타오를 것입니다. 그 빛을 기다리는 우리의 마음은 행복할 것입니다. 새로운 생명의 빛이 떠올라 온 세상을 환히 비출 때, 온 세상이 기뻐할 것입니다. 그 기쁨의 순간이 눈앞에 다가왔습니다. 그 기쁨을 예수님과 함께 누리기 전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의 그동안의 모든 잘못과 악습과 죄들을 끊어버리고 그것들을 죽이는 것입니다. 예전의 나를 죽이는 것입니다. 이 죽음을 통해서 우리 또한 새롭게 태어날 것입니다. 이 과정이 없다면,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아무런 기쁨도 가져다 주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온 마음을 다해 예수님의 부활을 고대하고 기다려야 합니다. 누군가를 만날 때, 누군가가 나를 찾아올 때, 기다리는 그 마음은 설레임과 기쁨 그 자체입니다. 이 기다림이 없다면, 만남도 기쁘지 않게 됩니다. 그저 만나고 헤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온 세상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고요한 가운데 그분을 기다립니다. 설레이는 마음으로, 기쁜 마음으로 예수님이 다시 이 세상의 빛으로 떠오르시기를 기다립니다. 우리도 진정 기다려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은 죽음의 시간이지만, 동시에 기다리는 시간, 설렘과 기쁨을 미리 맛보는 시간입니다.


 이 죽음과 기다림 안에서 우리는 곧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순간 하느님께서 나 또한 어둠과 죽음의 골짜기에서 일으켜 주셔서 새로운 삶으로 인도하셨다는 놀라운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기쁜 마음으로 예수님의 죽음에 함께 동참하며, 곧 오실 예수님의 부활을 기다리도록 합시다. 아멘.    

 삶의 희망과 용기를 주시는 주님의 부활
-경규봉 신부-


2,000년 전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온 인류의 역사와 삶을 송두리째 뒤바꾸어 놓으시어 그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에게는 삶의 의미와 보람, 기쁨과 희망, 용기를 선사하셨다.

인류역사 안에서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났다든지, 죽은 이를 환시 중에 보았다거나 죽은 이가 꿈에 나타났다든지 하는 이야기는 많이 있다. 성경 안에서도 엘리야 예언자가 사렙다 과부의 죽은 아들을 소생시켰다거나(1열왕 4,8이하), 엘리사 예언자가 수넴 여인의 아들을 살렸고 (2열왕 4.87이하), 예수님께서 회당장 야이로의 딸과 백인대장의 하인 및 죽은 라자로 등을 소생시켰다는 이야기를 볼 수가 있다. 또한 사무엘 상권을 보면 블레셋 군과 대적한 사울이 겁에 질려 엔도르에 있는 무당을 찾아가 사무엘의 혼백을 불러 이야기를 한 대목도 있으며(1사무 28,1이하), 꿈이나 환시를 통해 예언자들이 하느님을 체험 하거나 죽은 이를 만나곤 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은 이런 이야기와는 전혀 다르다. 예수님의 부활은 단순한 소생도 아니고 꿈이나 환시 중에서의 체험도 결코 아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독특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 예수님께서 필요로 하시는 사람들 안에서 이루어졌다. 예수님을 증오하고 반대하던 사람들 가운데에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체험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

복음을 보면 마리아 막달레나, 살로메, 다른 마리아 등등 예수님을 사랑했던 여인들이 가장 먼저 부활하신 예수님을 체험한다. 오늘 복음에서도 막달라 여자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에 갔으나 예수님의 시신을 보지 못하고, 천사들을 만나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전해 듣는다. 그녀들은 무서움 속에서 무덤을 나와 그 소식을 알리기 위하여 제자들에게 가는 도중에 “평안하냐?” 하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만났다.

루카복음을 보면 예수님의 죽음을 슬퍼하며 침통한 채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들 사이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자연스럽게 접근하셔서 말씀을 건네시고, 성경 말씀을 가르쳐 주시며, 함께 빵을 나누시다가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는 순간 그들에게서 사라지시기도 한다.

예수님께서 죽으신 후 유다인들이 무서워 어떤 집에 모여 문을 꼭꼭 닫다 걸고 숨어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평화를 주시고, 티베리아 호숫가에서 고기잡이를 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신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인을 박해하기 위하여 다마스쿠스로 가던 사울에게 빛의 형태로 나타나셔서 사울로 하여금 그리스도교 최고의 복음 선포자로 변하게 하신다.

이처럼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때로는 빛나는 모습으로, 때로는 닫힌 문을 통과하시며, 예루살렘과 동시에 갈릴레아에서도 나타나시는 등 독특한 방법으로 발현하신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 체험한 제자들은 “유령이다.” 하고 소리쳤고,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기도 했다. 사도 토마 같은 이는 예수님의 옆구리에 손을 대어본 후에서야 믿을 정도였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때로는 제자들과 함께 음식을 나누시고, 당신의 손발을 보여 주시기도 하시며 유령과 다르다는 점을 제자들에게 보여 주신다.

이처럼 예수님의 부활은 단순히 죽음에서의 소생도 아니고, 꿈이나 환시 속에서의 체험도 아니며, 혼백이나 유령의 형태와도 달랐다. 또한 부활하신 예수님을 체험하는 방식이나 장소도 각기 달랐고,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한 것도 아니고, 예수님을 사랑한 사람,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 예수님께 필요한 사람만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체험했다.

유령 같으면서도 유령이 아니고, 죽었던 이의 소생 같으면서도 그와는 전혀 다른 형태이며, 인류 역사 안에서는 결코 찾아볼 수 없는 변화된 모습, 말로서는 도저히 설명하기 어려운 초자연적인 사건이었기에 네 복음서는 예수님의 부활에 대하여 각기 다른 표현 방법으로 묘사하곤 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부활이 어떤 형태와 방식으로 이루어졌으며, 부활하신 예수님을 어떻게 체험했느냐가 아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부활이 그를 체험한 이들로 하여금 어떻게 변화된 삶을 살게 하였는가 하는 점이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께서 붙잡히셨을 때 제자들은 뿔뿔이 도망쳤고, 예수님의 으뜸제자라고 하는 베드로까지도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하며 맹세까지도 하였다. 예수님께서 죽임을 당하셨을 때에는 반대파들이 무서워서 어떤 집에 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 있을 정도였다.

그러한 그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체험한 후 이제 전혀 다른 사람이 된다. 그들은 이제 함께 모여 기도하고, 성령을 받아서 성령께서 시키는 대로 여러 가지 외국어로 말을 하고(사도 2,4) 수많은 군중 앞에 대담하게 나서서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이 예수를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주님이 되게 하셨고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사도 2,36)라고 예수님을 선포하는 용감한 사도가 된 것이다.

그들이 예수님을 따라 다닐 때에는 기적을 행하지 못하여 예수님께로부터 믿음이 약한 자들이라고 책망을 받기도 했지만, 이제 그들은 앉은뱅이를 고치기도 하고(사도 32.1이하), 8년 동안이나 중풍 병에 누워있던 애네아를 치유하고(9.32이하) 여신도 도르가를 죽음에서 소생시키기도 한다(9,36이하). 그들은 박해를 당하고 첫 순교자 스테파노는 죽임을 당하기도 하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선포하며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전한다.

그리스도인을 죽이려고 다마스쿠스로 가던 사울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화되어서 가시로 몸을 찌르는 것 같은 병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예수님을 선포하기 위해서 여러 차례 전교 여행을 하며 부활하신 예수님을 선포한다.

이처럼 예수님의 부활은 그를 따르고 그를 사랑했던 사람, 그가 필요로 했던 사람들로 하여금 새로운 모습의 삶, 변화된 삶을 살도록 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교는 탄생했고, 그리스도교는 예수님의 평화와 복음을 사람들에게 전하여 주었으며, 희망과 용기를 잃고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삶을 살도록 이끌어 주었다.

2,000년 전 제자들을 변화시키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 안에서도 새로운 변화와 삶을 주시는 모습으로 함께 계신다. 다시 말하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2.000년 전 당신을 따르던 사람들을 변화시키셨듯이, 오늘 이 자리에서 우리를 변화시키시어 새사람이 되게끔 하신다.

따라서 우리가 새로운 삶에로의 변화를 이루지 못할 때, 우리는 2,000년 전 부활하신 예수님을 체험하지 못했던 사람들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으며, 우리는 더 이상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도 아니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도 아니라는 사실을 생각해야 한다.

우리가 해마다 예수님의 부활을 축하하며 긴 의식을 통하여 당시의 사건 속으로 들어가며 기도하고 있지만, 우리 안에서 새로운 모습으로서의 변화된 삶을 보이지 못하고, 예나 지금이나 똑같이 우리를 얽매고 있는 악습과 탐욕과 교만에서 헤어나지 못한다면, 우리 안에 기쁨과 평화가 넘치지 못하고 사랑과 용서가 자기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교 안의 이방인으로 남아 있을 따름이다.

예수님의 부활이 새로운 존재양식으로의 변화요, 그 변화를 체험한 제자들이 새로운 삶을 살았듯이 오늘 이 밤을 보내는 우리도 먼저 변화된 새 삶을 살아야하고 나아가 온 세상 사람들이 또한 새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가끔 신문지상에 가슴 아프고 끔찍한 사건들이 적지 않게 보도되고 있다. 초등학생들로부터 시작하여 어른들까지, 많은 이들이 남을 소중하고 귀하게 여기는 아름다운 마음씨를 잃어버린 것 같은 느낌이다. 돈 몇 푼 때문에 같은 반 친구를 여럿이 폭행하거나 죽이고도 잘못을 느끼지 못하는 어린이들, 강도짓이나 성폭력을 일삼은 10대 가정 파괴범, 인신매매와 어린이 성폭행을 저지르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신문지상을 통하여 가끔씩 접하게 된다. 사회가 공업화, 상업화, 물질화 되어감에 따라서 인간성도 점차 상실되어가는 것 같다.

그러므로 바로 이 시대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우리 안에서 인간성 회복의 모습으로, 남을 존중하고 귀히 여기는 모습으로 나타나야 할 것이다. 인간성의 상실이란 나와는 전혀 무관한, 신문에 보도된 한 토막의 기사만이 아니라, 내 주위에,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 안에서도 일어 날 수 있는 사실임을 생각하고, 먼저 우리 안에서 사랑의 마음, 남을 귀히 여기는 마음이 우러나도록, 내 삶을 변화시키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내 안에서 남을 미워하고 증오하며 업신여기는 마음과, 나만이 최고라는 교만과 자만의 마음이 사라지도록 오늘 이 부활의 밤에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예수님의 부활은 오늘 우리 안에 희망과 용기의 모습으로 나타나야 할 것이다. 실의와 좌절에 빠졌던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한 후 용기와 희망이 넘쳐서 예수님을 선포하는 사도의 삶을 살았던 것처럼, 오늘 이 부활의 밤은 우리 마음속에 희망과 용기를, 빛을 던져주는 밤이 되어야 할 것이다.

돈 때문에, 시험 성적 때문에, 자신은 아무런 쓸모가 없는 사람이라는 열등감 때문에 자살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 마약 중독자가 한국 안에서도 50만 명 이상이나 된다고 한다. 이러한 현상은 고난에 대처하지 못하고 고통을 극복하지 못하고, 삶을 직시하지 못하고 도피하려 하는데서 기인한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모든 것을 똑바로 보고 그 어려움을 극복하는 모습으로, 희망과 극기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와야 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좌절과 절망에 처해졌지만 다시 부활하시는 영광과 기쁨을 얻으셨듯이, 오늘 이 부활의 밤은 우리 안에서 기쁨과 희망의 밤, 용기의 밤으로 다가와야 한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가라,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가르쳐라. 내가 세상 끝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19-20)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이 오늘 우리 마음속에 메아리치고 넘쳐흘러서 우리를 만나는 사람들에게도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전파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와 함께 계신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인간성 회복의 모습으로, 삶에 희망과 용기를 주는 모습으로 늘 함께 계시고, 우리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도 그렇게 전파되어야 할 것이다.

오늘 이 밤 예수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평화를 주신다. 말로 헤아릴 수 없는 깊은 평화를 주신다. 우리를 피곤하게 하고 지치게 하는 것들, 힘들고 짜증스럽게 하는 것들, 고통스럽고 괴롭게 하는 것들을 이겨낼 수 있는 깊은 평화를 주신다. 그리고 그 평화를 통하여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이웃 모두에게 인간성의 회복과 희망과 용기의 모습으로 전파되신다..........◆


 주님의 무덤 앞에서 죄와 허물을 벗어던지자.
-이강우 신부 -


오늘은 성 토요일입니다. 오늘은 슬픈 날입니다. 우리를 위해 죽임을 당하시고 무덤에 묻히신 예수님을 생각하는 참으로 슬픈 날입니다.

한 사람이 모든 이를 대신해서 죽고 초라한 무덤에 조용히 묻혀 계십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그것이 끝이 아님을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영원한 생명으로 가는 길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돌아가심으로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그 죽음이 두렵고, 외롭고, 고통스럽기까지 했음을 잘 아시면서도 꿋꿋이 그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그 길을 그대로 걸어가셨습니다. 모두를 살리기 위해 십자가의 죽음과 어두운 무덤을 택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결코 낭만적인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부활을 예상하고 잠시 참아 넘긴 연극이 아니었습니다. 서럽디 서러운 비명횡사, 처절하디 처절한 비극 그 자체였습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하느님의 진리만을 전하고 증거한 그분을 짓밟아 버린 세상의 폭력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당시 사회에서 가장 저주받은 자로 가장 불순한 자로 몰렸습니다. 종교적으로 돌에 맞아 죽어야 할 신성모독자, 정치적으로 사회에서 제거되어야할 체제 전복자였습니다. 그렇기에 그분의 최후는 그토록 외롭고 서글프고 처절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숱한 사람들이 그분을 전부 떠나가고 배신합니다. 일개 갱집단이라해도 우두머리를 따라 목숨을 던지는 졸개가 한두명 씩은 있지만, 예수님의 제자들은 모조리 도망쳐버립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실패하였음을 절감합니다. 그들이 할 수 있었던 것은 골방에 들어가 문을 꼭 잠그고 벌벌벌 떠는 일뿐이었습니다. 예수 추종자로 발각되면 곧 목숨을 내놓아야 할 형편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스승을 배신했다는 죄책감에 휩싸여 고통을 당합니다. 베드로처럼 통곡하는 마음이 다른 모든 제자들의 마음이었던 겁니다. 유다는 죄의식에 못이겨 생명까지 끊지 않았습니까? 제자들의 두려움과 고통과 죄책감은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땅이 꺼져라 한숨밖에 쉴 수 없는 그 어둠과 절망.

우리는 흔히 죽음을 부정하고 싶어 합니다. 그것이 끝이고 모든 것과의 단절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자기를 버리고 죽음을 택함으로서 영원한 생명을 얻으리라는 말씀을 이제 곧 우리들에게 보여주실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 주님은 우리를 대신해 돌아가셨고 묻히셨습니다.

연극을 볼 때 그 연극이 몇 막까지 있는지 모르는 사람은 주인공의 실패나 죽음으로 이제 연극이 끝났구나 생각합니다. 그러나 연극이 몇 막까지 있는지 아는 사람은 이제 그 다음에 시작될 막에서 어떻게 이야기가 전개될지 기대하게 됩니다. 죽음은 분명 사라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로 죽음이 인생의 연극에서 마지막 막이 아님을 믿고 고백합니다. 이제 우리도 그분의 죽음에 동참해야 하겠습니다. 부활의 찬란한 영광만을 바라기 전에 죽고 묻혀야 하는 것입니다.

내 뜻을 죽이고...내 욕심을 죽이는 것...그것들을 지금 내가 죽이고 묻을 수 있을 때.. 진정 그것이 주님의 길을 따르는 모습일 것입니다.

때문에 오늘은 슬프지만 마냥 슬픔에 잠겨있을 수는 없는 날입니다. 우리를 살리실 주님의 무덤 앞에 엎드려 그분께서는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렇게 우리는 우리의 잘못을 돌아보면서 우리 죄 때문에 돌아가신 주님의 무덤 앞에서 죄와 허물을 벗어던져야 할 것입니다.

자기를 버리심으로 우리를 살리신 주님의 부활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사랑의 힘
-
 류해욱 신부

  부활 축하드립니다. 특별히 환우분들과 보호자들에게 부활하신 주님이 주시는 위로와 평화를 전합니다. 복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여인들에게 ‘평안하냐?’ 인사를 건네셨듯이 우리 모두에게 위로와 평화를 주십니다. 그분이 주시는 위로와 평화 안에 머무시기를 바랍니다. 당장 가슴에서 알렐루야가 나오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서서히 기쁨이 차오를 것입니다.

커피를 끓어넘치게 하고
죽은 자를 무덤에서 일으키고
촛불을 춤추게 하는

사랑이 아니라면
밤도 밤이 아니다
술잔은 향기를 모으지 못하고
종소리는 퍼지지 않는다

그림자는 언제나 그림자
나무는 나무
바람은 영원한 바람
강물은 흐르지 않는다

사랑이 아니라면
겨울은 뿌리째 겨울
꽃은 시들 새도 없이 말라죽고
아이들은 옷을 벗지 못한다

머리칼이 자라나고
초생달이 부풀게 하는 사랑이 아니라면
처녀는 창가에 앉지 않고
태양은 솜이불을 말리지 못한다

석양이 문턱에 서성이고
베갯머리 노래를 못 잊게 하는
그런 사랑이 아니라면
미인은 늙지 않으리
여름은 감탄도 없이 시들고
아카시아는 독을 뿜는다

한밤중에 기대앉아
바보도 시를 쓰고
멀쩡한 사람도 미치게 하는
정녕 사랑이 아니라면
아무도 기꺼이 속아주지 않으리

책장의 먼지를 털어내고
역사를 다시 쓰게 하는
사랑이 아니면 계단은 닳지 않고
아무도 문을 두드리지 않는다

커피를 끓어넘치게 하고
죽은 자를 무덤에서 일으키고
촛불을 춤추게 하는
그런 사랑이 아니라면...... 

  최영미 시인의 ‘사랑의 힘’이라는 시를 이 밤에 부활 축시로 읽어드립니다. 제가 성 목요일 만찬 미사 강론에서 예수님의 수난, 십자가, 그리고 죽으심이 담고 있는 진정한 의미는 바로 사랑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부활의 의미도 다름 아닌 사랑입니다. 바로 사랑의 힘이 부활이라는 놀라운 하느님의 현현으로 나타난 것이지요.

  죽기까지 사랑하신 예수님의 사랑에 대한 당신 아버지 하느님의 응답이 바로 부활이지요. 예수께서 스스로 부활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께서는 다만 사랑으로 생명을 내어 놓으셨고 당신의 아버지 하느님께서 이제 예수님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들어 높이신 것입니다. 바로 죽기까지 사랑하신 그 사랑의 힘이 하느님에 의해 부활로 나타난 것입니다.

  여러분들, 모두 부활 계란을 받으셨지요? 우리가 흔히 부활의 이미지를 나타내기 위해 부활 계란을 나눕니다마는 저에게 부활의 이미지는 맑은 물이 흐르는 옹달샘과 같습니다. 마치 옹달샘이 물이 고이듯 모아져서 서서히 땅을 적셔 주듯이 부활하신 그분이 주시는 고요함이 우리의 마음을 평화로 적셔 주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그분이 우리의 마음을 가만히 사랑으로 적셔 주시기 때문에 우리에게도 사랑의 힘이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사랑이라는 위대한 힘이 아니라면 무엇이 죽은 자를 무덤에서 일으키고 촛불을 춤추게 하겠습니까? 사랑의 힘이 아니라면 무엇이 저 같은 바보가 한밤중에 기대앉아 시를 쓰고, 누가 그런 바보의 시를 읽으며 공감해 주겠습니까?
  사랑의 힘이 아니라면, 여러분들 중의 어느 누가 아픈 몸을 이끌고 이곳에서 긴 시간을 기다릴 것이며 교직원들 중에는 누가 병원 언덕을 올라 부활 성야 미사를 함께 하려고 여기 다시 오셨겠습니까? 최영미 시인의 표현대로 사랑이 아니면 계단은 닳지 않고 아무도 문을 두드리지 않습니다. 부활은 바로 사랑의 힘이 얼마나 놀라운지를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아무도 부활을 증명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우리의 가슴을 촉촉이 적셔주는 사랑의 힘만이 부활하신 그분이 이 밤에 우리에게 평화를 주신다는 것을 느끼게 할 수 있습니다.

  이 밤에 그분이 우리에게 사랑의 빛을 비추어 주십니다. 그 빛을 느끼고 그 빛에서 불길을 당겨 우리 가슴의 등불을 켜십시오. 우리가 켰던 부활초는 이 빛의 상징입니다. 이제 실제로 그 빛을 여러분들의 가슴의 등불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들 마음속에 이 빛을 켜서 계속해서 간직하지 못한다면 누가 세상에 새로운 생명의 봄을 가져다주겠습니까? 문정희 시인의 ‘우리들 마음 속에’라는 시를 읽어드리며 다시 한번 부활 축하 인사를 드리고 강론에 대합니다.

빛은 해에게서만 오는 것이 아니었다.
지금이라도
그대 손을 잡으면
거기 따뜻한 체온이 있듯
우리들 마음속에 살아 있는
사랑의 빛을 나는 안다.

마음속에 하늘이 있고
마음속에 해보다 더 눈부시고 따스한
사랑이 있어

어둡고 추운 골목에는
밤마다 어김없이 등불이 피어난다.

누군가는 세상은 추운 곳이라고 말하지만
또 누군가는
세상은 사막처럼 끝이 없는 곳이라고
말하지만

무거운 바위 틈에서도 풀꽃이 피고
얼음장을 뚫고도 맑은 물이 흐르듯
그늘진 거리에 피어나는
사랑의 빛을 보라
거치른 산등성이를 어루만지는
따스한 손길을 보라

우리 마음속에 들어 있는 하늘
해보다 눈부시고
따스한 빛이 아니면
어두운 밤에
누가 저 등불을 켜는 것이며
세상에 봄을 가져다주리

 

살아 있는 이들의 주님

--정하돈 수녀-

“무서워하지 말라. 너희는 십자가에 달리셨던 예수를 찾고 있으나 그분은 여기 계시지 않다.

 

◆날이 밝아올 무렵, 여인들은 사랑했던 예수님 곁에 있고 싶었다. 그래서 그들은 밤새도록 그분 곁에서 깨어 있을 수 있는 용기가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큰 지진이 일어났다. 주님의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오더니 다가가 돌을 굴려내고 올라앉았기 때문이다.”(28,2 이하 200주년 기념 성서 인용) 여인들은 부활하신 분을 보지 못했으나 부활의 순간을 체험하였다. 천사는 무덤에서 돌을 굴려냈다. 천사의 행동은 예수님 부활의 신비를 상징하는 것뿐 아니라 우리의 부활을 상징하기도 한다. 그것은 다만 죽음 후의 부활만이 아니라 항상, 이미, 여기에서 그리고 지금을 의미하고 있다. 천사가 내 삶 안으로 들어와 나를 가로막고 주저하는, 내 위에 놓여 있어서 내가 살 수 없게 만드는 돌을 굴려 치우게 되면 내 안에 어떤 움직임, 떨림이 생긴다. 그러면 부활이 가능하다!
“겁내지 마시오. (…) 그분은 여기 계시지 않소. 말씀하신 대로 부활하셨소.”(28,5­6) 여인들은 부활을 볼 수 없었지만 결과는 볼 수 있었다. 천사는 이제 여인들에게 어서 제자들에게 가서 부활의 소식을 알리라는 사명을 준다. “겁내지 마시오.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떠나가면 거기서 나를 볼 것이라고 알리시오.”(28,10) 천사와 달리 예수님은 당신 제자들을 형제라고 부르셨다.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이제 그들은 예수님의 형제·자매가 되었다.
이젠 부활하신 분이 늘 우리 곁에 우리와 함께 계시어 모든 길을 동행하신다. 우리는 부활을 믿는 신앙을 삶으로 증거해야 한다. 우리는 더이상 부활하신 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서 찾으면 안 된다. 그분은 살아 있는 이들의 주님이시기 때문이다!
  

 무덤과 부활

-강영구신부-


+ 무서워하지 마라. 너희는 십자가에 달리셨던 예수를 찾고 있으나 그분은 여기에 계시지 않다. 전에 말씀하신 대로 다시 살아나셨다. 그분이 누우셨던 곳을 와서 보아라.

그대에게

성주간 토요일은 침묵의 날입니다.
예수께서 무덤에 묻혀 계신 날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이 날 해떨어지기 전까지는 아무 전례도 거행하지 않습니다.

침묵은 무덤입니다.
침묵은 모든 소리를 삼키는 무덤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삼키지는 못합니다.
침묵은 말씀이 더 큰 의미로 되살아나는 자리입니다.
침묵이 없으면 시끄럽고 요란한 소리가 말씀을 삼키고 말 것입니다.
침묵이 있기에 소리는 잦아들고 말씀이 의미로 되살아납니다.

무덤은 부활(復活-Pascha-過越-건너감)의 자리이며 조건입니다.
죽어서 묻히지 않으면 부활도 없습니다.
무덤은 모든 것을 삼키는 블랙홀(Black hole)입니다.
무덤은 부(富)와 권력(權力), 지위와 명예, 젊음과 건강, 업적과 시간까지도 삼킵니다.
그러나 무덤이 삼키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사랑과 진리와 생명을 삼키지 못합니다.
무덤은 사랑과 진리와 생명의 씨앗이 되살아나는 자리입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12,24)
모든 것을 삼키는 무덤도 사랑과 진리와 생명을 간직한 씨앗을 삼키지 못합니다.
오늘 예수님은 죽어서 무덤에 묻혔습니다.
그러나 침묵 속에 잠긴 말씀처럼, 땅에 떨어진 씨앗처럼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당신의 삶이 예수님의 부활에 동참하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一明)
  

 성토요일: 깊은 적막이...  

 

오늘은 성토요일...

예수님이 무덤에 묻힌지 이틀째...

그분은 죽으시고 묻히셨다.

매장되어

더 이상 인간 세계와 교류가 불가능해졌다.

그분은 죽음의 세계로,

아니 죽음 저 너머의 세계로 돌아가셨다....

세상은 깊은 적막으로 뒤덮어있고,

예수님이 살아계시나 돌아가시나 별 관계 없이

여전히 돌아가고 있었다.

오로지 예수 추종자, 예수 제자들에게 깊은 상처와 허탈감, 불안감을 안겨주었다. 

-------------------

 

-제자들: 분열, 당혹, 반신반의.

 

제자들은 이 상황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을까?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한 번은 예수님의 발언 때문에 제자들이 옥신각신...

내분이 일어났었지...

그분은 말했었지:

나는 곧 죽게 된다.

너희들은 내가 가는 곳에 따라 올 수 없다.

그러나 기 죽지 말거라.

나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

 

제자들은 이런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다.

다만 그리스도로 믿었던 그분이 죽게 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스도는 죽지 말아야지...

죽으면 안되지...

아니, 우리가 뭐 때문에 이렇게

가정도 버리고, 일도 버리고, 청춘도 버리고, 진세도 버리고...

그리스도를 따랐는데,

그 양반이 죽어버린다면 이게 뭔가 말이야...?

 

수치의 메시아?

치욕의 메시아?

패배의 메시아?

그건 사전에 없어....

그건 각본에 없어....

 

오로지 영광을 드러내고

승리를 안겨주고

희망을 약속하는 메시아가 있을 뿐이다...!!

 

이래서 제자들이 의분했고, 분열했고, 반신반의했고....

유다는 노골적으로 불만을 토로했으며

나중에는 예수를 고발, 배신했지....

 

결국 예수는 자신이 말한대로

골고타로 십자가를 지고 가고

그 형틀에 매달렸지....

그리고는 죽으셨고 매장되셨지...

아, 불쌍타..

 

-제자들: 실망, 좌절...허탈...

 

그들은 예수를 버리고 어디로 도망쳤을까?

아무도 모른다.

어딘가에 숨어있었다.

갑자기 죽음의 공포가 닥쳐왔고

반신반의하던 심리적 위기감에서 우선 현장에서 도망쳤던 것이다.

 

그들은 분명 엄청난 실망과 좌절...깊은 허탈감, 깊은 불안감에 빠져

극도의 공포심에 떨고 있었을 것이다.

스승이었던 예수와의 관계를 떠올렸을 것이다.

짧지만 그분과 함께 했던 삶...!!

무엇에 끌려서

모든 걸 다 버리고 예수의 일에 동참했을까...!!

그때는 희망에 가득 찼었는데...

이게 뭔가...?

이 허탈감....

이 좌절감....

이 실망감....

무엇을 하랴....?

어떻게 하랴....?

대책이 없다......!!

 

엄습해 오는 죄책감....

엄습해 오는 불안감....

엄습해 오는 좌절감....

오호....

오호통재로다.

 

제자들은 마땅한 대책이 없이

깊은 공포심에 떨고 또 떨고....

한없는 나락 속으로 떨어졌다.

아, 깊은 밤이여...

아, 어둔 밤이여...

그대 밤이여, 얼른 사라지거라...

몬 살겠다...

 

제자들은 깊은 정화의 시간을 겪었다.

 

너무나 힘든 밤이여,

처절한 어둠이여,

캄캄한 먹구름이여....

이 어둠의 세력들이

제자들을 집어 삼켜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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