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동욱의 세계의 산책자 - 경험이 삶의 스승이다
경험통해 알아야 하는것은
개별적인 지식이 아닌
인간존재에 대한 한계 통찰
할수 있는 일, 할수 없는 일
무엇인지 알아가는 과정서
진정한 내가 누구인지 알아
쓰디쓴 약을 목으로 넘기듯 실패의 경험을 통과하면, 뭔가 배우게 된다. 초등학생들은 숙제를 안 하고 밖에서 놀기만 하면 엄청난 부담을 짊어지게 된다는 배움을 고통스러운 경험 뒤에야 얻는다. 수없이 죽어보고서야 엔딩을 맞게 되는 게임 역시 경험을 발판 삼아 배우고 성장하는 예다. 경험이 수행하는 교육의 범위는 이보다 훨씬 크다. 투자 역시 경험의 문제다. 코인이 됐든 주식이 됐든 손해를 보고서야 우리는 비로소 하지 말아야 할 어리석은 짓을 깨닫는다. 누가 친구고 아닌지 식별하는 것 또한 경험이라는 시금석을 가지고서만 가능하다. 연애? 말할 것도 없다. 저런 형편없는 놈과 만났다니! 경험만이 씁쓸히 연애의 지혜를 우리에게 건네준다. 이렇게 배움이란, 기하학 문제나 논리학 문제를 풀 듯 생각 안에서 해결을 볼 수 없고 경험이라는 심연에 자신의 몸을 던져 넣어봐야 얻을 수 있다.
그렇게 경험이란 나와 세상을 연결해주는 통로, 세상에서 내가 넘어지지 않게 의지할 수 있는 소중한 지팡이가 된다.
이러한 ‘경험’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경험에 가장 큰 중요성을 부여했던 철학은 ‘영국 경험주의’다. 영국 경험주의의 핵심은 지식의 원천은 경험이라는 것인데, 이런 사상을 잘 보여주는 개념이 대표적인 경험주의자 존 로크의 ‘타블라 라사(tabula rasa)’다. 저 말은 ‘아무것도 쓰이지 않은 석판’이라는 뜻으로, 우리 마음을 가리키는 개념이다. 우리 마음은 애초에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고 모든 지식은 경험으로부터 얻어진다. 경험으로부터 얻은 것들이 저 타블라 라사에 기록되면서 지식이 형성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경험으로부터 얻는 ‘지식’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인과율 같은 자연과학적 지식을 말한다. ‘특정한 기압에서 불을 붙이면 물은 100도에서 끓는다’와 같은 과학적 인과에 관한 지식 말이다. 이 지식이란 결국 ‘반복 가능한 경험’이다. 어느 경우건 특정 기압이 주어지면, 예외 없이 물이 100도에 끓는 경험을 할 수 있다는 반복 가능성이 이 지식의 핵심이다. 이 예외 없는 반복 가능한 경험, 모든 경우에 통용되는 ‘경험 일반’, 즉 전칭명제(‘모든 경우 S는 P다’)를 보증하는 경험을 얻기 위해 과학은 끊임없이 실험한다.
이는 다르게 말하면, 예외 없이 반복될 수 있는 항구적인 경험(보편타당한 항구적인 진리)을 얻기 위해 예외적인 경험들은 근절해야 한다는 뜻이다. 예외적인 경험이란 무엇인가? 항구적인 진리를 나타내는 경험에 속하지 못하는 개별적인 경험들일 것이다. 그런 개별적인 경험들은 잘못된 경험, 오류로 취급되기도 했다. 벗어나야만 하는 그런 잘못된 경험의 대표적인 예를 우리는 영국 경험주의의 선구적인 인물, 프랜시스 베이컨의 ‘우상론’에서 찾을 수 있다. 우상이란 진리와 거리가 먼 잘못된 경험을 진리처럼 인지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예를 들면 전혀 보편적인 법칙이 아닌데도 우리는 전통이 부여하는 권위에 눌려 그것을 보편적인 것처럼 인지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선입견을 만들어 내는 전통을 ‘극장의 우상’이라 부른다.
잘못된 경험을 판별하는 기준은 보편타당한 항구적인 과학적 진리에 대한 경험인 것이다. 보편타당한 경험을 모범 삼아 모든 일회적인, 그리고 우연적인 경험을 가치 없는 것으로 제쳐 두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우리 삶의 의미 있는 경험은 일회적이지 않은가? 천편일률적으로 반복 가능한 과학적 진리의 경험(물은 100도에서 끓는다) 같은 보편성을 지닌 것이 우리 개개인의 구체적인 삶에서 얼마나 큰 중요성을 지니는가는 매우 회의적이다.
오히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 무엇과도 공통적이지 않은 단 한 번의 경험들이다. 두 번 있을 수 없는 첫사랑의 경험이나, 처음으로 아이의 부모가 되는 경험 등 말이다. 인간의 삶은 무엇과도 공통적이지 않은 이런 일회적인 경험으로 이뤄지지, 보편적인 자연과학적 경험으로 이뤄져 있지 않다.
한마디로 인간의 삶은 개개인의 독자적인 경험, 다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유일무이한 경험으로 이뤄진다. 그러므로 인간 삶에서 과학적 법칙성만을 관찰하려고 하는 일 또한 인간 삶의 본질에서 빗나가는 일이다. 과학적 법칙성 속에서 인간을 파악하려는 시도를 비웃는 멋진 장면을 우리는 게오르크 뷔히너의 희곡 ‘보이체크’에서 마주할 수 있다. 가난한 직업 군인 보이체크는 얼마 안 되는 돈이라도 벌기 위해 의사의 실험 대상으로 일한다. 의사가 하는 실험이란 무엇인가? 의사는 실험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이 인간은 약 삼 개월 전부터 완두콩 이외에는 아무것도 먹질 않았어요. 그 결과가 어떻게 나타나는지 한번 관찰해봐요. 고양이처럼 귀를 한번 움직여보란 말이야! 자, 여러분. 이것이 바로 인간이 당나귀로 변화하는 과도기 현상이오. 완두콩의 결과가 이런 것이오.” 이 과장된 실험 장면은 과학적 실험이라는 ‘경험 방식’이 인간의 본성에 다가가지 못하고, 진실 바깥에서 겉돈다는 것을 풍자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근본적으로 인간은 실험과 관찰을 통해 알게 되는, 반복 가능한 보편적 법칙의 지배 아래 놓이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경험이란 도대체 어떤 것일까? 그것이 자연과학이 말끔히 정리해서 보여주는 언제 어디서나 반복 가능한 보편적인 경험이 아니라면 말이다. 가다머는 ‘진리와 방법’에서 경험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경험은 오히려 기대의 온갖 좌절을 전제하며, 그런 과정을 겪어야만 경험이 체득될 수 있다. 경험이라는 것은 대개는 고통스럽고 불쾌한 경험이다.…… 사람들은 부정적 경험을 통해서만 새로운 경험으로 나아갈 수 있다. 경험이라는 이름에 값하는 모든 경험은 우리의 기대를 배반한다.”(임홍배 역) 이런 것이 인간이 경험하는 방식이다. 이런 경험 속에서 인간은 성장한다. 자연과학이 원하는 보편타당한 법칙의 가시적 표현으로서 경험이 아니라, 계속 버려야만 하는 쓰디쓴 시행착오가 인간의 경험인 것이다. 그러니 경험의 정체는 ‘실망’이라고 일컬어도 좋으리라. 인간의 성장을 그리고 있는 소설들은 바로 이 실망의 경험을 다루고 있다. 가령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그렇다. 들뢰즈는 프루스트 연구서 ‘프루스트와 기호들’에서 이렇게 말한다. “프루스트는 다음과 같은 점을 끊임없이 강조한다. 그 어떤 순간에 주인공은 어떤 사항에 대해서 모른다. 그는 나중에야 그것에 대해 배우게 된다. 또 주인공은 어떤 잘못된 생각, 헛된 기대 속에 있다. 그러나 마침내 거기에서 벗어나게 된다. 여기에서부터 실망과 깨달음의 운동이 생겨나며 이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전체에 리듬을 불어넣어 준다.” 우리는 경험을 통해 실망을 겪으며 과오를 넘어서고 깨달음을 얻는다.
경험을 디딤돌 삼아 전진하는 우리 정신의 본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 바로 헤겔의 대표작 ‘정신현상학’이다. 보통 헤겔은 관념론자로 널리 알려져 있고, 관념론은 경험주의와 상반되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런데 관념론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도, 헤겔이 처음에 이 책의 제목으로 고려했던 것은 ‘의식의 경험의 학문’이다. 어떤 의미에서 그는 ‘경험주의자’인 것이다. 이 책에서 헤겔은 경험을 거치며 움직이는 혼(魂)의 도정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혼이 그의 본성에 따라서 미리 지정된 정류장과도 같은 갖가지 혼의 형태를 두루 거치고 난 뒤에 마침내 정신으로 순화돼가는 그런 도정을 그려 낸 것이다. 이렇듯 자기 자신이 편력해온 경험의 도정을 완벽하게 마무리 지을 때 혼은 본래 그 자신의 모습이 어떠한 것인가를 깨우치게 된다.”(임석진 역) 헤겔의 이 구절은 영혼의 성장을 그리는 모든 독일 교양 소설의 핵심을 요약하고 있는 듯하다. 또는 이 구절은 또 다른 성장의 이야기, ‘구운몽’ 속 성진의 편력마저 연상시킨다. 무엇이 됐건 영혼은 좌충우돌하는 경험 끝에 자신을 완성하는 과정을 진행해 나간다.
경험이란 괴로운 것이며, 반복되길 피하고 싶은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경험 앞에서 그것을 용납하기를 꺼리는 회의주의자가 된다. 불쾌한 경험을 넘어서기 위해 경험은 늘 부정의 대상이 된다. 이렇게 일회적인 경험들에 대한 부정을 거치며 영혼은 앞으로 나아간다. 결코 인간의 경험은 자연과학의 보편적 법칙을 보증하는, 늘 통용되는 일반적인 경험이 아닌 것이다.
쓰디쓴 실패의 경험을 하나하나 넘어서면서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은 무엇일까? 바로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이 무엇인지에 대한 깨달음이다. 사르트르는 ‘문학이란 무엇인가’에서 이 경험의 필수성에 대해 말한다. “우리가 장도리에 대해서 가장 잘 아는 것은, 무엇을 박기 위해서 그것을 사용할 때이다. 마찬가지로 못에 대해서 가장 잘 아는 것은 벽에 못질을 할 때이며, 벽에 대해서 가장 잘 아는 것도 거기에 못을 박을 때이다.”(정명환 역) 장도리로 못을 박는 경험을 실제로 해 보지 않고는 내가 장도리를 잘 다루는지, 못을 잘 박는 재주가 있는지 결코 알 수 없다. 경험만이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려준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경험은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없는지’, 즉 우리가 어떤 ‘유한한 존재’인지 깨닫게 해 준다. 가다머는 말한다. “인간이 고통을 통해 깨우쳐야 하는 것은 이런저런 개별적 지식이 아니라 인간 존재 자체의 한계에 대한 통찰이다. 다시 말해 아무리 한계를 극복해도 결코 신의 경지에 이를 수 없다는 통찰이다.…… 경험이라는 것은 결국 인간의 유한성에 대한 경험이다.…… 경험을 통해 깨우침에 도달한 자는 예측의 한계를 알고 모든 계획의 불확실성을 아는 사람이다.” 이렇게 우리는 경험을 통해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되며, 자신의 유한성 앞에서 겸손의 지혜를 배우게 된다.
서강대 철학과 교수
■용어설명 - 경험주의
영국 경험주의는 대륙합리주의에 맞선 근대 철학의 주요 흐름 가운데 하나다. 로크, 버클리, 흄 등이 그 대표자이며, 기본적인 입장은 지식의 원천은 경험이라는 것이다. 이는 지식의 근본을 경험이 아닌 이성 내재적인 관념에서 찾는 합리주의와 상반되는 입장이다. 현대 철학에 와서 경험주의는 훨씬 다채로운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단지 자연과학적 지식의 경험적 원천을 탐구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가다머는 자연과학과 맞서는 ‘진정한 경험’이란 개념을 내세우기도 했다. 레비나스는 ‘무한의 이념에 대한 경험론’을 모색하기도 했고, 들뢰즈는 무의식적 경험을 탐색하는 ‘초월적 경험론’을 창안하기도 했다.
첫댓글 인간은 지혜가 있어 자신의 경험을 글로 써 대물림해서 오늘날의 과학문명이 탄생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