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주시 탄현에 ‘참회와 속죄의 성당’이 있다. 과거 전쟁의 상처와 아픔을 치유하고, 우리가
살아가는 한반도에 전쟁이 아닌 진정한 평화가 오고 그 바탕 위에 통일이 이루어지기를 간절
히 기도하는 성당이다. 성당의 이름은 고 김수환 추기경님이 지었다고 한다.
성당 안에는 북한의 성당들을 종이에 먹펜으로 그린 그림들이 전시되어 있다. 그 그림들을
사진 찍었기에 안내문(요약)과 함께 소개한다.
1. 중강진성당(1934년 평양교구) - 이승구, 종이에 먹펜, 34×52cm, 2013
중강진은 우리나라에서 백두산 백무고원(양강도 삼지연군 일대)에 이어 두 번째로 최저 기
온을 기록한다. 이처럼 혹독한 추위를 기록하는 벽지에 복음이 전해진 건 1927년 무렵이다.
벌목과 제재 산업이 발달한 도시답게 중강진성당은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문 통나무로 지어
진 목조성당이다.
지붕에는 너와를 올렸고, 해마다 너와를 갈았다. 성당 입구에 선교사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
고, 꼬마 둘이서 두꺼운 옷을 입은 채 서 있다. 눈이 녹아 내려 성당 너와지붕에 고름이 매달
렸고, 군데군데 눈이 녹아 돌계단이 드러났다.
2. 영흥본당(1931년 함흥교구) - 이승구, 종이에 먹펜, 34×52cm, 2014
1931년에 설립된 영흥본당은 깊은 신앙의 뿌리를 가지고 있었다. 1866년 말 병인박해 당시
영흥에서만 72명이 함흥으로 압송돼 참수형을 당했다는 증언이 있다. 그런 까닭인지 본당이
설립되자마자 교세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1932년에서 1933년 사이에 550명이 세례를 받
았고 1935년에는 신자수가 1,000명을 넘어섰다.
당시 영흥본당은 청소년 위주의 사목활동을 펼쳤는데 성과가 매우 좋았고 가톨릭 소년회가
결성되어 전교에 큰 역할을 하였다. 본당에서 운영하는 야학교에 등록된 학생이 300명이나
되었다.
3. 관후리성당(1934년 평영교구 주교좌성당 - 이승구, 종이에 먹펜, 34×52cm, 2013
1934년 평양에 두 번째 본당인 대신리본당이 신설되기까지 ‘평양대성당’으로 더 오래 불린
평양교구 관후리 주교좌성당이다. 1898년 착공한 성당이 1900년 완공되어 봉헌식이 거행되
면서 가톨릭 전교에 전기가 마련되었다. 1943년 제5대 평양대목구장 홍용호 주교가 착좌하
면서 관후리성당은 주교좌성당이 된다. 그렇지만 태평양 전쟁 막바지인 1944년 말 관후리
성당은 일본군에 강제 징발되는 뜻하지 않은 수난을 겪는다.
4. 원산성당과 해성학교 및 주교관(1924년 덕원 자치 수도원구) - 이승구, 종이에 먹펜, 34×52cm, 2014
원산성당과 내평본당은 함경도 지방에 진출한 베네딕도 회원들의 첫 선교지이다. 1921년 베
네딕도회 선교사들은 원산성당을 인수하였다. 성당이 낡고 협소하였기 때문에 1924년 원산
해성학교 신축교사를 짓고 일부를 성당으로 사용하였다. 원산본당은 원산 대목구의 주교좌
본당이었다.
5. 진남포성당과 해성학교(1933년 평양교구) - 이승구, 종이에 먹펜, 34×52cm, 2013
평남 서남단 대동강 변을 따라 이어진 평남선 철도 종점이 진남포다. 이 성당은 특히 파리외
방전교회 선교사 홍석구 신부와 안중근 의사의 인연이 얽힌 것으로도 유명하다. 1897년 10
월 한낱 작은 어촌 포구의 미래의 내다보고 평안남도 진남포시 용정리 일대 1만평에 평양본
당 관할 공소를 설립했다.
또 훗날 본당 부설 돈의학교 제2대 교장으로 부임, 관서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한 인물
이 안 의사였다. 학교는 비록 1916년 문을 닫았지만, 1921년 해성학원, 1930년 사립학교 인
가를 받은 평의학교로 그 맥이 이어진 문맹퇴치와 인재양성, 성소 계발에 기여한다.
6. 대신리성당(1934년 평양교구) - 조명혜, 종이에 먹펜, 34×52cm, 2013
소박하고 멋스럽게 단층 기와집으로 지은 대신리성당(왼쪽)이 자리를 잡고, 본당 부설 동평
학교 건물(오른쪽)은 성당에 잇닿아 있다. 성당 앞마당에는 메리놀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옹기종기 둘러서 있고, 학생들은 교사 앞에서 놀고 있다.
평양교구 사상 첫 한국인 사제인 양기섭 신부가 초대 주임으로 부임하기도 했던 대신리본당
은 평양시 외곽 지역으로 개발이 이뤄지지 않았던 동평양 일대에 복음의 씨앗을 뿌린 영신적
못자리였다.
7. 순천성당(1928년 평양교구) - 조명혜, 종이에 먹펜, 34×52cm, 2013
1926년 은산본당(평남 순천군 은산면 조산리)이 설립되지만 이 본당은 2년여만에 폐쇄되고
1928년 7월 평안남도 순천군 순천읍 관상리(현 평남 순천시 순천동)로 이전하는 순천본당
이 지역 복음화 사명을 이어받은 설정 5년만인 1933년이 되면서 신자만 600여 명에 이르는
공동체로 성장한다.
순천본당은 해방 직전인 1944년 11월 교구 사제 부족으로 폐쇄되면서 기림리본당 관할이
된다. 이어 1949년 11월 기림리본당 주임 이재호 신부가 공산정권에 연행되면서 순천공동
체는 사실상 와해된다.
8. 고원성당(1933년 덕원 자치 수도원구) - 조명혜, 종이에 먹펜, 34×52cm, 2014
덕원에서 북쪽으로 45km, 영흥에서 20km 떨어진 함경남도 고흥에 1933년 11월 성당이 세
워졌다. 당시로는 지역 유일의 벽돌 건축물인 이 성당은 금장고원에서 가장 아름다운 명소가
되어 장날이면 성당을 구경하기 위해 시골사람들로 붐볐다.
고원성당은 부속학교로도 유명하다. 사제관 옆에 지은 학교에는 3개 학년에 260여 명의 학
생이 공부했고 주일이면 사람들이 이 학교에 모여들어 교리를 배웠다.
9. 의주본당(1919년 평양교구) - 이승구, 종이에 먹펜, 34×52cm, 2013
의주본당은 당시 평안도에서 가장 큰 성당이었다. 평안 남북도가 미국 메리놀외방전교회의
선교 전담지가 된 이후에는 의주성당이 교구설정을 위한 거점이 된다. 1937년이 되면 교세
가 신자 474명에 에비신자 105명, 유치원과 양로원을 운영하는 공동체로 우뚝 선다. 하지만
이 본당 역시 6.25 전쟁 발발과 동시에 10대 주임 김교명 신부가 체포되면서 침묵의 교회가
되었다.
10. 서포성당(1930년 평양교구) - 이승구, 종이에 먹펜, 34×52cm, 2013
평양역에서 북쪽 11.1km 지점에 위치한 서포역 앞 언덕에 세워진 서포성당은 설립 당시만
해도 신자가 단 한 사람에 불과했으나 성당이 세워지면서 신자가 늘어나 1937년에는 420명
에 이를 정도로 공동체가 커졌다. 서포 메리놀센터는 1942년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가
인수, 수도원 본원이 되었지만 1950년 5월 14일 수도원이 해산되면서 공산정권에 몰수됐고,
서포성당도 같이 몰수됐다.
전쟁 중 교구청 건물은 인민군병원으로 쓰였으나 연합군 폭격으로 메리놀센터와 서포성당은
모두 소실되어, 메리놀센터만 현재 라틴어 초석 일부분이 남아 있을 뿐이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귀한자료 잘 보았습니다
형님덕에 북한의 성당도 구경하고,,,고맙습니다
그림 사진이 아니라 흑백사진 같아요. 잘 그리셨는지 잘 찍으셨는지. 타임머신이 있다면 그 시간 그곳을 맨눈으로 보고 싶어요.
흑백사진인줄 알았네요...
참회와속죄성당에서 참회 좀 해야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