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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우표 없는 편지 원문보기 글쓴이: 청풍명월
이 책은 김봉수라는 사람의 이야기다. 그의 본관은 김해고, 1646년에 태어나 칠십 한 살까지 살았다. 고향은 경상도 단성현(지금의 산청군 단성면)이고, 아버지는 갓복, 어머니는 숙향이었다. 부모들은 사노비였고, 조부와 증조부는 이름이 없다는 의미인지 족보에 부지(不知)라고 기록돼 있는데, 그것은 이름을 모른다는 뜻이다. 수봉은 부모의 뒤를 이을 수밖에 없는 노비였지만, 노비에서 해방되어 「납속통정대부」(종3품)라는 직역을 얻었고, 그래서 그의 아들과 손자들은 평민으로 살아갔다. 그렇게 되는 데 길고도 험난한 여정이 있었다는 것을 이 책 제목이 말한다.
노비가 평민으로 신분을 전환하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 있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수봉의 주인은 청송심씨, 심정량인데 그는 당시로는 장수한 사람이었다. 주인과 노비는 같은 집에서 아니면 같은 마을에서 살았지만, 그들이 가진 조건은 천양지차가 났다. 한 사람은 양반이자 여러 노비의 주인이었고, 또 한 사람은 그가 소유한 노비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넘을 수 없는 높은 장벽은 그들의 선택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태어날 때부터 운명지어져 있었다. 심정량은 과거급제를 꿈꾸었지만 마음대로 되지는 않았다. 대신 그는 조상을 잘 만난 탓에 물려받은 재산이 아주 많았다.
심정량은 첫째 부인 이씨가 죽고, 34살 차이가 나는 유씨와 재혼했다. 당시에는 이런 나이 차이에도 재혼할 수 있었나 싶지만, 이것은 유씨 부인 친정에서 재혼하는 딸을 부잣집에 시집보냈기 때문이거나 유씨 가문이 심정량 가문보다 품계가 낮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심정량은 벼슬은 하지 못했지만, 노비를 60명쯤 거느린 부자였다. 그는 두 명의 첩까지 두었는데, 첫 부인 이씨와 2녀, 후처인 유씨와 2남 2녀를 두고, 첩한테서도 2남 4녀를 두어, 모두 12명의 자녀가 있었다. 두 명의 처에게서 얻은 자녀는 적자(嫡子女)지만, 첩에게 얻은 자녀는 서자녀(庶子女)였다. 수봉이 노비 되기를 원한 것이 아니듯 서자녀들 역시 그들이 선택한 것은 아니었다.
1678년 심정량의 호적에는 59명의 노비가 기재되어 있는데, 서자녀를 합해 12명의 자녀에게 심정량과 둘째 부인이 죽고 적자인 장남은 30명의 노비를, 차남은 1/3에 못 미치는 8명의 노비를 나누어 가졌다. 이전까지는 딸을 포함에 균등 분배하던 상속제가 적장자 우대로 바뀐 것이다. 이때 수시로 노비들이 도망치기도 했는데, 의거 노비라는 주인과 떨어서 사는 노비도 있었으므로 관리가 어려웠기 때문이기도 하고 사회 분위기에 따라 그런 일이 빈번했다. 도망간 노비가 다시 노비로 살 리는 없었다. 그들은 행상을 하든, 남의 집 소작인이 되든 과거 신분을 숨기고 새 삶을 시작했을 것이다. 노비들의 도망은 끊임없이 이어졌는데, 심정량의 적장자 노비 30명 가운데 8명이, 차남의 노비 8명 가운데 2명이 도망쳤다. 도망간 노비를 찾는 데는 고을 수령에게 추쇄(推刷-도망한 노비를 본래 주인에게 돌려줌)를 의뢰하기도 했다. 그 이야기가 한때 인기 드라마였던 「추노」다.
도망간 노비들 삶은 때로 그냥 노비로 살던 때보다 훨씬 고통스럽기도 했지만, 자신을 둘러싼 억압과 굴레에서 벗어나겠다는 욕망은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수봉은 도망이라는 방법을 선택하지는 않았다. 그는 이미 안정적인 삶을 누릴 만큼 재산을 모았기 때문이다. 도망보다 가진 재산으로 노비 신분을 벗어나는 방법을 택하고자 한 것이다. 수봉에게는 아들이 셋, 딸이 하나가 있었는데, 모두 평민으로 자랐다. 아들들의 이름은 학, 흥발, 갓등이었다. 학과 흥발은 한자식 이름이지만, 갓동이는 한자가 없으므로 加에 ‘ㅅ’발음을 표기할 때 쓰는 질(叱)자를 붙여 표기했고, 동이는 비교적 쉬운 同과 伊를 붙여 표기했다. 옛날 호적에는 갓동이라는 이름이 많은데, 대부분 남자 종인 奴의 이름인 경우다. 갓동이는 개똥이의 다른 표기로 수봉의 막내아들은 원래 개똥이었던 것이다. 개똥이를 한자로는 끼일 개(介), 똥 시(屎)로 표기하는 경우가 많다. 어쨌거나 노비들의 이름을 얼마나 함부로 지어 불렀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임꺽정도 그가 어릴 때 외할머니가 앞으로가 걱정이라고 하여 푸념한 것이 이름이 된 것이라니 참….
개똥이를 빼면 수봉의 아들 나머지 둘은 한자식 이름이었다. 수봉이도 그렇다. 수봉의 아버지 갓복은 加에 역시 叱을 붙여 썼고, 어머니는 숙향淑香으로 한자식이다. 조부와 증조부는 이름은 나와 있지 않지만, 다만 외조부의 이름이 독특하다. 단문(丹文)인데, 한자어 같기도, 아닌 것 같기도 하다. ‘붉을 단’에 ‘글월 문’이니 ‘불글이’로 한자 이름이 아니라면 그냥 불글이다. 수봉의 막내아들 갓동이도 1720년 이후에는 한자식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평민으로 살아가기 위해서였다.
수봉에게는 평민의 신분을 바꿀 기회가 찾아왔다. 1678년까지 노비였던 그는 1717년 자신은 물론 아들들 모두 평민으로 신분이 상승된다. 그것도 ‘납속통정대부’였는데, 통정대부는 정3품의 벼슬이지만 허울뿐인 벼슬이다. 납속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곡식을 국가에 납부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수봉은 국가에 그만한 재산을 바치고 벼슬을 산 셈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그가 32세 때인 1678년부터 사망한 1717년까지는 그에게도 중요한 시기였지만, (그는 상당한 재산을 모으고 있었다) 조선도 이때가 엄청난 시기였다. 『숙종실록실록』25년의 기록을 보면, “병자년(1696)에 호적을 만들 때 흉년 때문에 정지했었는데, 이제(1699년)와 비로소 완성했다. 서울과 지방을 통털어 호수가 1백 29만 3천 83호, 인구가 5백 77만 2천 3백 명이었다. 계유년(1693)에 견주어보면 호수는 25만 3천 3백 91호가 줄었고, 인구는 1백 41만 6천 2백 74명이 줄었다. 을해년(1695) 이후에 기근과 전염병이 참혹했기 때문에 이 지경이 된 것이다.”고 하고 다음 기록은 “진휼청의 당상관 오정위가 교생면강첩, 노비면천첩을 더 만들어서 영남에서 곡식을 모아 굶주리는 백성을 진휼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허락했다.”고 했다.
향교의 교생에게 유교 경전 시험을 면제하고, 노비의 면천을 허락하는 문서를 영남에 판매해 진휼 밑천으로 사용했다는 이야기다. 수봉이 살던 단성현 도산면은 현의 중앙에 위치했고, 수봉의 세 아들은 아버지가 터를 잡고 살았던 원산을 지킨 것은 큰 아들과 막내아들이었다. 둘째 아들 흥발은 1717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뒤 도산면의 고읍대촌으로 이주했다가 1729년 다시 웅응촌으로 옮겨갔다. 쌍둥이 형과 동생이 아버지처럼 원산에 살다가 생을 마감한 것과 달리 흥발은 두 차례나 터전을 옮겼다. 그것은 아마 자신의 출신을 아는 사람이 많은 곳에서 살기가 껄끄러워서 그랬을 것이다.
수봉의 자식들이 새 삶을 찾아 마을을 떠난 것과는 달리 심정량의 자손들은 쉽게 마을을 벗어나지 않았다. 자신들은 터전을 벗어나야 할 만큼 절박한 사정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원산에 살았지만, 마을 이름이 장죽전으로 바뀐 것은 마을이 그만큼 커졌기 때문이었다. 1750년 하나의 리(里)였던 원산이 1759년부터는 원산서변, 원산중, 장죽전 등 세 곳으로 분화되었다. 수봉의 후손들은 노비에서 해방되었으므로, 노비 출신과 혼인하지 않아도 되었다. 혼인대상이 평민이라지만 그전에는 수봉가처럼 노비인 경우가 없진 않았을 것이다.
수봉의 둘째 아들 흥발은 1720년 어영군으로, 그의 두 아들은 역보와 봉수보로 군역을 치렀는데, 한 집에 3명이 군역에 복무한다는 것은 부담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군역 대신에 군포를 낸다면 1년에 2필을 내야했다. 그러니 흥발의 집은 6필을, 그의 동생인 갓동이(김학)의 집에서는 8필을 부담해야 했다. 군포 1필은 오늘의 단위로 환산하면 폭 32㎝, 길이 약 16m로 작은 것이 아니었다. 이것의 가격은 당시 돈으로 2냥, 쌀로는 6말 정도였는데, 실제 시장가격은 이보다도 비쌌다. 이렇게 비싼 군포를 가내노동으로 만들어 바친다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군역은 공평하지도 체계적이지도 않았다. 양반과 노비를 제외한 평민에게 한정된 군역은 중앙과 지방관청이 각기 군역자를 확보하는 과정에 많은 폐단이 낳았다. 한 사람을 이중으로 첩역(疊役)하는 경우도 있고, 60세 이상의 노인과 심지어 죽은 자까지 군역의 대상으로 혹은 16세 이하 아동까지 군역대상자로 만들기도 했다. 그것은 18세기 조선 사회의 최대 현안이었고 폭압이었다.
이때 일반적으로 양반 여성은 ‘씨’로 평민여성은 ‘소사’로 지칭했는데, 18세기 중엽부터는 둘 사이 중간층에 ‘성(姓)’이라는 새로운 지칭이 사용되었다. 양반과 평민 사이 여성을 호적에서 구분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여성의 지칭 역시 태어날 때부터 결정되었다. 수봉의 막내아들 학은 1732년 곡식을 바치고 절충장군이 되었는데, 이때 그의 부인은 여전히 ‘조소사’라는 평민 지칭이었다. 하지만, 1750년에는 ‘조성(趙姓)’으로 바뀌었다.
김흥발의 아들 김소명의 1759년 호적에는 ‘나이 57세, 계미생 본관 김해, 아버지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 흥발, 나이 95세, 조부 통정대부 수봉, 증조부 가선대부 언련, 외조부 가선대부 변해수, 본관 거창, 부인 배성, 나이 51세 기축생, 본관 김해’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김흥발의 손자이자 수봉의 고손자 김종옥은 1825년에 만든 호적에는 ‘김종옥 임오생 나이 64세, 본관 안동’이라고 적혀 있다. 이만큼 당시의 호적을 그대로 믿기에는 의문이 많다. 근대랄까 내가 어릴 때 만해도 리장이 대신 출생신고를 하면서 이름과 생년월일, 한자를 제멋대로 신고한 것을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보는 것과 같다.
죽은 자를 ‘학생’이라 부른 것은 배우지 못하고 죽은 것이 원한이라거나 죽은 뒤에도 배워야 한다는 의미로 쓰인 것이 아니다. 과거에 급제하지 못한 양반 자제를 ‘유학(幼學)’이라고 한 것처럼, 학생은 성균관이나 향교 등에 적을 둔 유생을 가리키는 말로, 유학인 상태로 살다가 죽은 자에 대한 명칭인데 호적에 끌어다 쓴 것이다. 유학이나 학생은 벼슬은 못했으나 벼슬에 나갈 준비가 되어 있었던 유생, 즉 공부할 자질을 가진 양반이라는 직역의 하나였다. 그래서 아버지, 할아버지가 관직을 갖지 못하고 죽은 경우에는 으레 〈학생부군신위〉라는 표현을 썼다. 학생의 부인은 유인(孺人)이라고 했는데, 유인은 원래 9품 관료의 부인에게 부여한 호칭이었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유인이라고 한 것은 죽은 뒤 호칭을 명예롭게 높여준 것이다.
한때 노비였던 수봉의 직계 조상들이 얼마나 긴 세월 동안 노비신분이었는지 알 수 없지만, 수봉이 사슬을 끊고 그의 손자와 증손들은 중간층 직역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5,6세손들은 양반과 같은 직역을 얻는데 성공했다. 수봉가의 긴 여정에서 후손들이 양반이 갖는 유학을 획득한 것은 수봉의 신분 해방만큼이나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수봉이 노비에서 벗어남으로써 최하층민의 예속적인 삶에서 해방되었고, 그의 후손들은 유학이 되어 최상층 양반의 기득권을 향유할 수 있었다.
1678년 도산면에는 전체호수의 40%가 노비였으나, 1780년에는 10%이하로 급감했고, 이후는 겨우 명맥만 유지했다. 수봉은 비교적 빠른 시기에 해방되었지만, 이런 사례로 인해 인근의 다른 노비들도 경제력을 동원하든, 도망을 가든 다양한 방법으로 노비로부터 해방되었다. 19세기 중반이 되면 도산면 전체호수의 70%가 ‘유학’이라는 양반이 되었다. 이는 실로 놀라운 일이다. 엄격한 신분제 사회였던 조선에 양반이 70%가 넘었다는 것이다. 물론 지금은 100% 모두 양반이다. 관직 진출이 용이하지 않았던 심씨가 후손들은 2백 년간 유학으로 정체되어 있었고, 신분 차별을 극복하려고 했던 수봉과 그 후손들은 역동적으로 신분을 상승시켜 유학에 이르른 것이다. 그것은 수봉의 후손에게만 내려진 혜택은 아니었다. 많은 하천민들이 유학에 이르는 문으로 달려갔고, 결국 그 문을 여는 데 성공했다. 17세기 말 10%였던 상층민이 18세기 초에 20%, 18세기 말에는 40%가 넘었고, 19세기 중엽에는 60%를 넘어섰다. 너나없이 양반을 자칭한 것이었다.
이 무렵 수봉의 증손자, 고손자대에 이르면 본관이 김해김씨에서 안동김씨로 바뀌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그만큼 지역에서 안동김씨가 양반으로 여겨졌던 것이 아닌가 싶다. 성은 바꿀 수 없어도 본관은 바꿀 수 있다는 생각도 했다는 것이다. 또 양반들은 대가 끊어지는 것을 불효라 여겨 양자를 들였는데, 이것은 평민에게도 확산되었다. 17세기 후반에는 단성지역의 안동권씨가 양자를 들이기 시작했는데, 비율이 점차 늘어나고 대가 끊기는 일은 낯선 풍경으로 여긴 것이다. 그것은 심정량의 손자 8명 가운데 가계가 단절된 이는 아무도 없었던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족보는 1476년 간행된 안동권씨 〈성화보〉로 안동권씨가 만들어진 것은 고려 태조 때이므로 이후 500년간 안동권씨 조상에 대한 기록은 매우 없다. 그것은 안동권씨의 문제만은 아니다. 성화보 편찬에 간여한 서거정이 “우리나라는 원래 족보가 없어서 명문 집안도 몇 세대가 지나면 조상의 이름을 제대로 모른다”라고 할 정도였다. 그 뒤에 간행된 족보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이후 족보편찬이 활발해지자 기록을 조작하거나 윤색하는 일이 일어났고, 때로는 가계 이력 자체가 바뀌거나 위조된 족보도 만들어졌다.
오늘날 양반은 일부 지역에서 문화적 전통을 내세우는 수단으로 사용될 뿐 더이상 현실적 의미를 갖지는 못한다. 그럼에도 자신의 가계가 노비로 연결된다는 사실을 흔쾌히 받아들일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조선시대 하천민의 신분은 본인의 의지로 획득한 것이 아니었다. 세상을 처음 대면하는 순간 이미 결정돼 있었다. 누가 허름한 초가에서 노비의 자식으로 태어나고 싶어했겠는가? 오늘날도 경제력과 학력이 서서히 특권화되면서 대물림 조짐을 보이고 있다. 태어나면서 이미 출발선이 다른 신양반층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평등하다’는 것은 기회균등을 의미할 뿐 출생과 동시에 획득된 조건의 불평등을 염두에 둔 말은 아니다. 수봉가가 여러 세대에 걸쳐 좁혀 나간 심정량가와의 지위 간극은 근래들어 기회의 균등에도 불구하고 다시 벌어질 조짐을 보이고 있다. 성장해 가는 사다리에서 밀려난 이들은 수봉가처럼 또다시 기회를 엿보며 장기간에 걸쳐 피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할까? 수봉가의 후손들은, 심정량의 후손들은 그것이 반복되지 않고, 현실에서 반복되지 않고, 흘러간 역사로 남기를 바라지는 않을까?
첫댓글 주인공의 이름이 김수봉인데, 맨처음에 김봉수라고 잘 못 쓴 것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