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5일(토) 전도서 2:1-11 찬송 341장
1. 나는 내 마음에 이르기를 자, 내가 시험삼아 너를 즐겁게 하리니
너는 낙을 누리라 하였으나 보라 이것도 헛되도다
2. 내가 웃음에 관하여 말하여 이르기를 그것은 미친 것이라 하였고
희락에 대하여 이르기를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하였노라
3. 내가 내 마음으로 깊이 생각하기를 내가 어떻게 하여야
내 마음을 지혜로 다스리면서 술로 내 육신을 즐겁게 할까
또 내가 어떻게 하여야 천하의 인생들이 그들의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어떤 것이 선한 일인지를 알아볼 때까지 내 어리석음을 꼭 붙잡아 둘까 하여
4. 나의 사업을 크게 하였노라 내가 나를 위하여 집들을 짓고 포도원을 일구며
5. 여러 동산과 과원을 만들고 그 가운데에 각종 과목을 심었으며
6. 나를 위하여 수목을 기르는 삼림에 물을 주기 위하여 못들을 팠으며
7. 남녀 노비들을 사기도 하였고 나를 위하여 집에서 종들을 낳기도 하였으며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자들보다도 내가 소와 양 떼의 소유를 더 많이 가졌으며
8. 은 금과 왕들이 소유한 보배와 여러 지방의 보배를 나를 위하여 쌓고
또 노래하는 남녀들과 인생들이 기뻐하는 처첩들을 많이 두었노라
9. 내가 이같이 창성하여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자들보다
더 창성하니 내 지혜도 내게 여전하도다
10. 무엇이든지 내 눈이 원하는 것을 내가 금하지 아니하며 무엇이든지
내 마음이 즐거워하는 것을 내가 막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나의 모든 수고를
내 마음이 기뻐하였음이라 이것이 나의 모든 수고로 말미암아 얻은 몫이로다
11. 그 후에 내가 생각해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내가 수고한 모든 것이
다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며 해 아래에서 무익한 것이로다 (개역 개정)
- 인간의 감각을 자극하는 육체적 쾌락의 헛됨 -
해 아래 인생의 허무함을 극복하기 위한 인간의 자체적인 모든 노력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전도자의 주장은 오늘 말씀에서도 계속된다.
그러나 전 단락 1:12-18에서는 주로 인간의 정신적인 수고가 헛됨을
논의한 것과 대조적으로 여기서는 인간의 감각을 자극하는 쾌락을 얻기 위한
모든 육체적인 노력이 헛됨을 강조하고 있다.
오늘 말씀은 전도자가 육체적인 쾌락을 누리고자 하였던 목적(1, 2절)과
전도자가 누린 각종 육체적인 쾌락들의 양상(3-10절)
그리고 쾌락을 누림으로써 얻은 헛된 결과(11절) 등으로 세분할 수 있다.
한편 본 단락에서 전도자는 술, 사업, 재물, 예술, 처와 첩 등
해 아래 인생들이 일반적으로 자신에게 기쁨을 줄 것으로 믿고
소유하기 원하는 것들을 원하는 만큼 최대한 소유하고 그것들을 즐김으로써
참된 기쁨과 만족을 얻으려 하였던 과거의 경험을 진술하고 있다.
그는 특히 10절에서 ‘내 눈이 원하는 것’, ‘내 마음이 즐거워하는 것’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자신이 인간으로서 누릴 수 있는
쾌락의 극단까지 경험하였음을 밝혀 영혼을 지닌 존재로 지음받은 인간은
육신의 쾌락을 통하여 참된 만족을 얻을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자격 요건을 갖추었다는 사실을 강하게 암시한다.
그러나 전도자는 온갖 육적 쾌락을 누림으로써 삶의 만족을 얻으려 하였던
시도가 완전한 실패로 끝났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고백하고 있다.
실로 육적 쾌락을 누리고 육신의 욕구를 만족시키는 것만으로는
해 아래 인생에게 다가오는 궁극적인 허무를 극복할 수도,
참된 만족을 누릴 수도 없다는 것이 솔로몬의 경험으로써 증명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본문을 통해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게 된다.
① 육신의 욕구를 만족시킴으로써 일시적, 감각적인 기쁨을 얻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그러한 행위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어 영혼을 지니고 있는
인간에게 영원히 지속될 수 있는 궁극적인 기쁨과 만족을 줄 수는 없다.(갈5:17)
② 육체적 쾌락에 대한 욕구를 만족시키려 하는 행위는
쾌락에 대한 갈증을 더욱 증폭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목이 마르다고 바닷물을 마시면 더욱 목이 마르며 결국 죽음에 이르는 것 같이
인생 허무를 잊기 위해 쾌락에 탐닉하는 자는
영혼과 육신이 함께 파멸하게 되는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한다.(벧후2:10)
10절) 「무엇이든지 내 눈이 원하는 것을 내가 금하지 아니하며
무엇이든지 내 마음이 즐거워하는 것을 내가 막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나의 모든 수고를 내 마음이 기뻐하였음이라
이것이 나의 모든 수고로 말미암아 얻은 몫이로다」
이는 솔로몬이 이 세상에서 그가 원하는 모든 것을 가졌고
해보고 싶은 모든 일을 다 해보았으며
누리고 싶은 모든 즐거움을 다 누렸음을 말해 준다.
이는 물론 솔로몬이 순전히 부정적인 의미의 쾌락만을 좇아
방탕한 삶을 살았다는 의미의 표현은 아니다.
말씀 말미에서 ‘나의 모든 수고로 말미암아 얻은 몫이로다’라고 지적하는 것처럼
이는 그가 정직하게 땀흘려 얻은 대가라 할 수 있으며
그가 수고하고 연구하여 얻은 결과물이다.
그러나 여기서 ‘내 눈이 원하는 것을 내가 금하지 아니하며
무엇이든지 내 마음이 즐거워하는 것을 막지 아니하였으니’라는
표현에서 읽을 수 있는 것처럼
그것은 솔로몬의 마음의 욕구와도 결코 무관하지 않다.
그가 아무리 높은 도덕적 기준을 가지고 있으며
뛰어난 인격이나 지혜를 소유하고 있다 해도
그러한 쾌락 추구는 그의 삶을 타락의 자리로 이끌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 면에서 그는 위험스럽고 그릇된 시도를 한 것이며
결국 그에 대해 허탄하다고 탄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솔로몬의 고백과 그에 대한 자기 스스로의 평가는
오늘날 쾌락을 추구하는 자들, 절제되지 않은 욕구,
그 욕구를 좇아 행하는 사람들에게 분명한 경고를 발하는 것이다.
사람들에게는 각자의 욕구가 있다.
그리고 그 자신의 욕구를 채우기 위해 끊임없이 연구하고 활동한다.
힘들고 어렵지만 열심히 일하면 그래도 먹고 살 만한데,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더 많이 조금만 더’를 외치며 더 열심히 일한다.
그리고 그렇게 일하는 이유는 해보고 싶고, 먹어보고 싶고.
누려보고 싶은 것 정도는 누리고자 하는 꿈이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러한 생각이 나쁜 것만은 아니다.
그러나 사람이 그처럼 자신의 욕구만을 내세우며
그것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만 살아간다면 그것은 결국 해가 될 뿐이다.
왜인가? 사람의 욕구는 어떤 한 가지가 채워진다고 해서
결코 만족하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또 각 사람은 능력에 한계가 있기에 정당한 방법만 가지고는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일도 비일비재(非一非再)하다.
따라서 이처럼 탐욕에만 매달리는 것은
사람으로 채워지지 않은 욕구로 인한 허무와 공허감에 빠지게 하든지
그릇된 방법으로 자신의 욕구를 채우려다
범죄에 빠지게 하는 결과로 귀결될 뿐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탐욕의 굴레에 매이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에 대해 성경은 세 가지 정도의 교훈을 제시한다.
첫째는 탐욕에 빠져들지 않도록 하기 위해 땅의 지체,
곧 악한 생각, 죄된 욕구, 죄된 습관을 자제하고 근절할 것을 권한다.(골3:5)
둘째, 끝없이 탐욕을 좇아 사는 삶에서 자족(自足)하기를 권한다.(빌4:11)
셋째, 단지 탐욕을 절제하고 자족하는 데서 머물지 말고 보다 적극적으로
성령을 좇아 행하며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을 것을 권한다.(갈5:16; 엡5:18)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가르침을 따라 육신의 욕구를 절제하며,
자족하고 성령으로 충만함을 입어야 한다.
성령의 원하시는 바를 따라 행할 때
우리의 삶은 진정한 만족과 행복이 넘칠 것이며
놀랍고도 풍성한 은혜 가운데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한 것은 지나간 때로 족하도다」
(벧전4: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