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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천-맥(麥)
-분야: 어문 > 소설 > 중·단편소설
-저작자: 김남천
-원문 제공: 한국저작권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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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3층 22호실에 들어 있던 젊은 회사원이 오늘 방을 내어 놓았다. 얼마 전에 결혼을 하였는데 그 동안 마땅한 집이 없어서 아내는 친정에, 그리고 남편인 자기는 그 전에 들어 있던 이 아파트에 그대로 갈라져서 신혼 생활답지 않게 지내오다가 이번에 돈암정 어디다 집을 사고 신접 살림을 차려놓기로 되었다 한다. 오후 6시가 가까운 시각, 아마 회사의 퇴근 시간을 이용하여 양주(부부)가 어디서 만난 것인지 해가 그믈그믈해서야 회사원은 색시 티가 나는 아내와 함께 짐을 가지러 트럭과 인부를 데리고 왔다. 인부가 한 사람 있다고는 하지만 3층에서 밑바닥까지 세간을 나르고 그것을 다시 트럭에 싣고 하기에는 이럭저럭 한 시간이 걸렸다. 최무경이는 아파트의 사무원일 뿐 아니라 회사원이 있던 방이 바로 제가 들어 있는 옆 방이어서 여자의 몸으로 별로 손을 걷고 거들어줄 것은 없다고 하여도 짐이 다 실리는 동안 아래층 사무실에 남아 있어서 그들의 이사하는 모양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무실에서 일을 보는 늙은 강영감이 제법 위아래로 오르내리며 짐을 챙겨도 주고 양복장이며 책장이며 탁자며 하는 육중한 것은 한 귀를 맞들어서 인부와 회사원과 함께 운반에 힘을 도웁기도 하였다.
짐을 대충 실어놓고 회사원은 아내와 같이 사무실로 들어왔다.
"부금(敷金) 105원 중에서 이번 달 치가 오늘까지 28원, 그것을 제하고 77원이올시다."
미리 준비해두었던 지폐를 손금고에서 꺼내서 최무경이는 그것을 회사원에게로 건네었다. 회사원은 한 손으로 받아서 약간 치켜들듯 하여 사의를 표하고 그것을 그대로 주머니에 넣으려고 한다.
"세어보세요."
그러한 말에 회사원은, 무어 세어보나마나 하는 표정을 지어보았으나 다시 어떻게 생각하였는지 넣으려던 지폐를 꺼내서 불빛에다 대고 손가락에 침도 묻히지 않으면서 한 장 두 장 세어보고 있다.
"꼭 맞습니다."
하고 낯을 들었을 때 무경이는 펜과 영수증을 놓으면서,
"영수증이올시다. 사인하시고 도장 쳐주십시오. 수입인지는 아파트 쪽에서 한턱 내었습니다."
하고는 회사원의 아내를 바라보며 웃었다. 젊은 아내는 무경이의 웃음에 따라서 흰 니를 내놓고 웃었다.
"고맙습니다."
영수증을 받아서 서류와 함께 금고에 챙긴 뒤에 무경이는 두 신혼 부부의 낯을 새삼스레 쳐다보았다. 행복에 넘친 듯한 얼굴들이다. 진부한 형용이지만 역시 행복에 넘쳐 있는 표정이라는 말이 제일 적절할 것처럼 무경이는 생각하는 것이다.
"저어 돈암정 바로 삼선평이올시다. 거기서 바른쪽으로 향해서 들어가면 새로 분할한 주택지가 있습니다. 큰 골목으로 접어들어서 다시 셋째 번 골목 둘째 집이 저희들 집이올시다. 450번지의 17호. 한번 교외에 산보 나오시는 일이 계시건 찾아주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총명한 사람일지라도 이러한 지도의 설명을 잊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건만 사람들은 노상에서 만난 친구들께 곧잘 이러한 방식으로 저의 집의 주소를 가르쳐준다. 그러나 듣는 사람도 또 지금 말하는 설명을 모두 머릿속에 챙겨 넣기나 한 듯이,
"네 네, 한 번 나가면 꼭 들르겠습니다."
하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무경이가 들르겠다는 말을 진심으로 믿는 것인지 아마 그들 자신도 똑똑히 그러한 모든 것을 의식하면서 건네는 인사는 아닐것이나 두 부부는,
"고맙습니다."
하고 가지런히 인사를 하였고 다시 회사원은 문밖으로 아내가 나가버린 뒤에도 문턱 안에 남아서,
"덕택에 참 내 집이나 진배 없는 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하고 사례를 말하였다. 두 사람은 어둠의 장막이 내려 드리우려는 길위로 가벼운 발걸음을 옮겨놓으며 무어라 나직히 소근거리고 있었다. 그것을 최무경이는 한참 동안 바라보고 서 있었다.
강영감은 빈 방의 뒷설거지를 마치고 비와 쓰레기통과 바케스를 들고 위층에서 내려왔다. 물을 담았던 바케스에는 버리고 간 찻그릇 곱부 등속 낡은 모자 같은 것이 그득히 들어 있었다. 신접 살림이라 무어든간 새로 준비했을 것이니 홀아비 살림 때에 쓰던 것으로 소용이 없을 것은 공연히 짐이나 된다고 이렇게 내버려두고 가는 것이리라. 강영감은 그것을 모아다가 넝마장수에게 팔기도 하고 저의 집에 가져다 쓰기도 하는 것이었다. 장부를 정리하고 저녁이 늦어서 손수 지을 수도 없으므로 무경이는 식당으로 갔다. 돔부리(덮밥)를 거의 다 먹었는데 전화가 왔다고 강영감이 부른다.
"방이 있냐구 물어서 한 방 비었다구 했는데……."
하고 식탁에까지 와서 강영감은 여사무원에게 말한다.
"어떤 사람이랍니까?"
차를 마시면서 무경이는 묻는다.
"글쎄, 그건 물어보지 못했는데 하여간 나가서 전화 받아보시지. 여자 목소리던데."
"여자요? 또 여급이나 그런 사람이 아닌가요? 그런 사람들에겐 애초에 방이 없다구 거절하실 걸."
무경이는 앞서서 식당을 나왔다. 사무실로 와서 책상 위에 내려놓은 수화기를 들면서,
"여보세요, 오래 기다리게 하여서 미안합니다. 네 야마도 아파틉니다. 거기 어디신지요? 네? 명치정 청의 양장점이오? 네에 네. 그럼 방을 쓰실 분은 바로 양장점에 계신 선생님이신가요?"
잠시 저편의 설명에 귀를 기울인다.
"대학의 강사 선생님이시라구요? 네 그럼 친히 오셔서 방을 보시지요. 방세는 35원, 정지 가격이올시다. 부금을 석 달 치 전불하기로 되었습니다. 그럼 들러주십시오, 네에 네, 고맙습니다."
대학 강사로 논문 쓸 것이 있어서 임시로 몇 달 동안 방을 구한다고 한다. 전화를 건 분은 대학 강사의 무엇이 되는 여자인가. 그러나 그런 것을 오래 생각하지는 않고,
"지금 찾아오마 했는데 방 구경 시키구 마음에 든다면 저에게 알려 주세요. 전 그럼 방에 올라가 있겠습니다."
하고 사무실을 나왔다. 강영감은 지금서야 벤또를 먹고 있었다.
무경이는 제가 쓰고 있는 3층 2 3호실로 올라왔다. 대학 선생이 책이나 읽고 글이나 쓰고 있으면 뒤숭숭하지 않아서 좋을 것이라고 생각해보면서 그는 회사원이 조금 전에 나가버린 옆 방의 앞을 지났다. 잠갔던 문을 열고 스위치를 넣어서 제 방에 불을 켰다.
방안에 들어와서는 언제나 하는 버릇으로 손을 씻었다. 슈트의 웃저고리를 벗고 얇다란 스웨터로 바꾸고는 가볍게 화장을 고친다. 오래지 않아 3월이라지만 밤은 역시 추웠다. 스팀의 마개를 조절해서 방안에 온도를 맞추고는 잠시 침대에 걸터앉아본다. 아까 아파트를 나간 회사원의 두 부부가 생각되었다. 그들은 행복에 취하여 있는 듯이 보이었다. 남의 눈에 그렇게 보였을 뿐 아니라 당자들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트럭을 먼저 앞세워 놓고 나란히 서서 문밖으로 나가던 두 사람의 뒷그림자……. 그러나 그는 문득 생각해보는 것이다.
‘그들은 끝끝내 행복할 수 있을 것인가. 젊은 회사원은 그의 아름다운 아내를 끝끝내 사랑할 수 있을 것인가. 그들의 사랑과 신뢰는 언제나 무슨 일을 당하여서나 변함이 없이 굳건한 것으로 지니어 나가고 지탱해 나갈 수가 있을 것인가?’
쓸데없는 군걱정이었으나 최무경이는 역시 그것을 믿을 수가 없는 것이라고 생각해보는 것이었다.
누가 그것을 증명할 수 있으랴! 저 회사원이 애띠고 어린 꽃 같은 색시를 언제나 변함없이 사랑하리라고 누가 감히 증명할 수 있을 것이랴!
이렇게 해서 최무경이는 조금 아까 행복된 낯으로 아파트를 하직하고 돈암정의 새 집으로 총총히 마음을 달리던 젊은 부부의 앞날에 불길한 예언을 던져보고 앉았는 것이다.
‘안온한 일생을 평정하게 보내는 부부가 이 세상에는 얼마든지 있는 것을 나는 안다. 그러나 누가 아내의 마음을 보증할 수 있으랴! 누가 남편의 사랑을 보증할 수 있으랴! 아니 누가 감히 저 자신의 마음을 보증할 수 있을 것이랴!’
그는 떠오르는 흥분을 고즈너기 맛보면서 머리를 털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나는 혼자서 산다. 혼자서 살아갈 수 있다.’
바람벽에 걸린 어머니의 사진을 쳐다본다. 무경이와 함께, 어머니가 시집가던 작년 가을에 박은 사진이었다. 둘이 다 뭉틀하고 서서 어딘가 쓸쓸해 보인다. 어머니는 흰 옷으로 몸을 단장하였다. 무경이도 금박이 자주 고름에 치렁치렁하는 남치마를 입고 나들이옷으로 몸을 가꾸었다. 스물에서 마흔 두살까지의 20여 년을 혼자서 딸 하나만을 데리고 살아오던 어머니도 정일수 씨에게 시집을 갔다. 생각해 보면 혼자서 살겠다는 자기의 마음도 또한 보증할 수는 없으리라고 되새겨진다. 그러나 인제 다시 누구를 사랑하고 누구와 함께 그는 새로운 생활을 설계해볼 수 있을 것인가. 상처가 너무도 컸다. 아직도 완전히 끝이 났다고는 보아지지 않는 만큼 보증할 수 없는 저의 마음을 채찍질하면서라도 그는 지금 ‘혼자서 사는’ 것을 다시금 또 다시금 결심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지난 여름의 일이다. 2년 가까이 입감해 있던 오시형이를 그는 백방으로 서둘러서 보석을 시켰다. 오시형이와 무경이의 관계는 양쪽편 집이 모두 반대하였었다. 어머니는 오래인 장로교인으로서 오시형이가 ‘믿지 않는 사람’이라고 꺼려하다가 그가 사건에 걸려서 입감한 뒤에는 더욱더 완강히 그와의 결혼을 반대하였다. 물론 평양서 부회 의원을 지내면서 상업회의소에도 얕지 않은 지위를 가지고 있는 그의 부친이 반대하는 것은 아들이 선택한 최무엇이라는 여자뿐만이 아니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서울서 증권회사조사부 같은 데 취직해 있는 아들의 태도에 반대였고 사상이나 생활 태도 전체에 대해서 그는 아들의 생각과 뜻이 맞지 않았다. 그는 우선 아들이 평양으로 내려와서 자기 앞에서 친히 일을 보기를 희망하였고 자기가 생각하고 있는 도지사를 지냈다는 저명 인사의 총명한 규수와 약혼을 할 것을 바라고 있었다. 그는 그의 생각하는 길이 아들을 출세시키는 최단 거리라고 믿는 것이었다. 그래서 부자가 서로 옥신각신하던 통에 뜻밖에 아들이 그만 온당하지 못한 사건에 걸려서 입감을 하게 되었다. 이것은 아들의 장래를 자기의 연장으로서 설계해오던 아버지에게 있어 놀라운 일이었을 뿐 아니라 그의 명예와 지위를 위해서는 치명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아버지는 세상을 향해서 당황하였다. 그는 노하였다. 그는 드디어 아들과의 관계를 통히 끊어버리듯 하였다. 나이라도 많으면 늙은 마음이 자식을 생각하는 정의에 이겨 나가질 못할 것이나 그는 오십 전후의 정정한 장년이어서 아들의 고생 같은 것은 보고 못 본 척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2년이 흘렀는데 이 2년 동안 무경이는 오시형이를 위하여 직업에 나섰고 어머니의 마음을 움직여서 오시형이와의 관계를 인정하게 하였을 뿐 아니라 보석 운동이 주효해서 그에게 다시금 태양의 빛을 쐬게 만들었다. 지금 무경이가 쓰고 있는 야마도 아파트의 3층 23호실은 보석으로 출감하는 오시형이를 위하여 무경이가 준비해두었던 방이었다.
그러나 오시형이가 출감하면서 동시에 연달아서 뜻하지 않았던 사진이 튀어 나왔다. 우선 오시형이는 그 전에 포회했던 사상으로부터 전향을 하였다. 그의 전향의 이론을 그 자신의 설명으로 들어보면 경제학으로부터 철학에의 전향이요, 일원사관(一元史觀)으로부터 다원사관(多元史觀)에의 그것이라 한다. 이러한 결과로 하여 학문상으로 도달한 것이 동양학(東洋學)의 건설이었고 사상적으로도 세계사의 전환에 처하여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국제 정국에 대처해서 하나의 동양인으로서의 자각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상이나 학문 태도가 변하였다든가 전향하였다고 하여서 그들의 사이에 어떠한 틈이 생길 리는 없는 것이었다. 본시 최무경이는 오시형이가 어떠한 사상을 품게 되든 그런 것에는 깊이 개의하지 않는 것이라고 믿어왔고 또 그러한 것에 대해서 깊이 천착(穿鑿)하고 추궁할 만한 준비나 여유가 없다고 생각해왔었다. 그러므로 오시형이의 이러한 전향이란 것이 어떠한 정신적인 내용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 또 그러한 내면적인 정신상의 문제가 자기와의 관계나 혹은 생활 태도 같은 것에 어떠한 영향을 줄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무러한 생각도 가지지도 못하였다. 그는 변함없는 애정이면 그만이었고 자기가 그 동안 실천한 불요불굴한 행동에서 오는 자긍과 도취로 해서 통히 그런 것에 생각이 미치지도 못하였다. 그러나 오시형이의 내면 생활은 무경이가 생각하는 것보다는 좀더 복잡한 과정을 경험하고 있었다. 2년 동안 독방 안에서 경험하는 내면 생활에 대해서 밖의 사람은 단순한 해석밖에는 가지지 못한다. 아버지, 여태껏 무슨 큰 원수나 되듯이 생각하여오던 오시형이의 아버지가 아들의 출감을 듣고 상경하여 아파트를 찾아왔을 때에 시형이의 내부 생활의 복잡한 면모는 하나의 표현을 보였다. 그는 당장에 아버지와 타협한 것이다. 인정과 격리되어서 애정에 주린 생활을 영위하던 사람이 죽일 놈 살릴 놈 하던 아버지의 돌변한 태도에 부딪쳐서 감격과 흥분을 맞이한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들과 아버지의 사이란 하나의 혈통이니까 커다란 불화가 있었다 해도 칼로 물을 벤 것과 진배 없어서 그들은 언제나 다시 화합해야 할 핏줄을 가졌다고만 해석하는 데도 다소간의 불충분은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런 것과 관련을 가지면서도 결정적인 원인을 지은 것은 오시형이의 가슴에 아버지까지를 포함시켜 그가 여태껏 상대해오던 일체의 ‘대립물(對立物)’을 받아들일 만한 준비가 되어 있었다는 점일 것이다. 여하튼 그는 아버지를 따라서 평양으로 내려갔다. 그러나 그것뿐만은 아니었다. 오시형이의 출감과 전후해서 무경이는 또 하나의 돌발 사건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것은 어머니의 결혼이었다. 어머니가 어떤 남자와 교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채었을 때 무경이는 커다란 실망과 함께 여자다운 질투와 어머니의 육체적인 체취에 대해서 늑찌한 구역을 느꼈다. 그리고 어머니를 잃어버리는 데 대해서 누를 수 없는 서러움을 경험하였다.
단 하나의 어머니도 잃어버리고 단 하나의 애인도 잃어버리었다. 직업에는 오시형이의 차입을 위하여 나섰던 것이요, 아파트의 방은 보석으로 나오는 그를 맞이하기 위하여 얻었던 것이었다. 의지하였던 것도 믿었던 것도 사랑하던 것도 희망하는 것도 일시에 없어져버린 것이다. 산다는 것의 의미와 생존의 목표를 어디서 찾아볼 수 있을까 하여 그는 잠시 동안 멍청하니 공허해진 저의 가슴을 처치해볼 길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 나아가겠다는 하나의 높은 생활력 같은 것을 천품으로서 가지고 있었다. 그러한 생활력은 제 앞에 부딪쳐오는 어떤 어려운 문제라도 꿰뚫고 나아가야 한다는 강력한 의지력으로 나타날 때가 있었다. 사람은 제 앞에 부딪쳐오는 어려운 문제를 회피하지 않고 그것을 맞받아서 해결하고 꿰뚫고 전진하는 가운데서 힘을 얻고 굳세지고 위대해진다고 생각해본다. 어떻게도 할 수 없는 난관에 부딪치고 함정에 빠져서 그가 생각해본 것은 모든 운명의 쓴 술잔을 피하지 않고 마셔버리자 하는 일종의 ‘능동적인 체관(諦觀)’이었다. 그는 우선 어머니와 오시형이를 공연히 비난하고 시기하고 질투하지 않으리라 명심해본다. 자기 자신을 그들의 입장 위에 세워보리라 생각했다.
오시형이는 2년 동안 옥중에서 충분한 사색과 반성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의 생각은 섬세해지기도 하였고 치밀해지기도 하였고 풍부해지기도 하였을 것이다. 그는 자기의 정신상 갱생을 사상과 학문상의 전향에서 찾으려 하였고 그의 육체와 생명은 다시금 빛 없는 생활에 얽매이지 않기를 본능적으로 갈망하고 있을 것이다. 아버지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좀더 원만하고 원숙해지리라 명심하고 있을 것이다. 사실 그는 가정이 있는 평양으로 내려가는 것이 건강에나 또는 당국 관계에 있어서도 편리할 것이라고 믿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오시형이가 아버지를 따라 평양으로 가는 것 그것은 그의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일이라고도 생각되어진다. 그렇다면 이까짓 방 같은 것이 합체 무엇이며 무경이의 마음이 다소 섭섭해지는 것 같은 것이 하상 무엇이냐고도 생각되어진다.
어머니의 입장도 이와 마찬가지였다. 어머니는 이십 전에 홀몸이 되어서 자기 하나만을 믿고 살아왔다. 자기가 어떤 사내와 결혼하면 어머니는 누가 모시며 어머니가 마음을 의지할 사람은 장차 누구일 것이냐? 어머니의 신뢰와 애정을 거역하고 나선 것은 딸이었다. 딸의 문제를 허락하였을 때 어머니가 그를 믿고 팽팽하게 당길 수 있었던 닻줄을 팽개쳐버리면서 갑자기 독신 생활에 대해서 신념을 잃어버렸다는 것도 넉넉히 이해할 수 있지 아니한가. 그렇다면 딸의 마음이 서운해질 것을 염려치 않고 어머니가 장래의 생애에서 행복된 설계를 가지려 하였다고 그것을 탓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오시형이는 그의 앞날을 위하여 영위함이 있어 마땅한 일이며 어머니는 어머니의 남은 생애를 위하여 설계함이 있어 마땅한 일이 아니냐. 그러면 뒤에 남아 있는 최무경이 자기 자신은? 그는 생각해본다.
‘나는 나 자신을 위하여 생활을 가져보자!’ ─ 이것이 그를 구렁텅이에서 구하여낸 결론이다.
시형이를 위하여 얻었던 방에는 제가 들기로 하였다. 어머니가 결혼하여 정일수 씨와 동거하게 되었을 때 어머니와 무경이가 살던 집은 팔아버렸다. 마침 가옥 시세가 가장 대금이던 때이라 그리 새 집은 아닌 것인데 한 칸에 700원씩 받아서 1만 5천 원의 거액이 무경이의 저금 통장에 기입되었다. 살림도 간단히 추려서 대부분은 어머니한테 맡겨두고 신변에 필요한 몇 가지와 취사 도구의 간단한 것만 아파트로 옮겨왔다. 아직도 아버지의 명의대로 남아 있는 70석 남짓한 땅은 으레히 무경이에게 상속이 되었으나 정일수 씨한테 관리시키고 1년에 2000원씩을 받아다가 저금 통장에 기입시키기로 작정하였다. 한 집안에 살기를 권하다가 그들의 뜻을 이루지 못한 정일수 씨와 어머니는 될수록 무경이에게 편의를 도와주려 힘썼고 딸에 대한 그들의 애정을 극진히 표시하려고 애썼다. 무경이는 전과 다름 없는 여사무원의 직업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조처를 대어놓고도 오시형이와의 애정에 대한 신뢰만은 덜지 않으려고 생각하였다. 하기야 시형이가 아버지와 타협하고 평양으로 내려간다는 고백을 들었을 때에 이 사건을 통해서 맨 먼저 느낀 것은 여자다운 직관력만이 날카롭게 간파할 수 있는 애정의 동요이었다. 평양에는 진척시켜오던 약혼설이 있다. 도지사를 지낸 저명 인사의 영양이 있다. 무경이는 고백 뒤에 어물거리는 그림자로서 그것을 눈앞에 그려보았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한가지로 그 문제에 대하여는 아무러한 이야기도 나누려 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오시형이의 마음만은 변하지 않으리라고 믿었던 것일까. 또는 아무리 따져놓고 약속을 굳게 하여두어도 흐르는 수세는 당해낼 재주가 없는 것이라고 단념해버렸던 것일까. 어떤 날 어머니는 딸에게 이런 말을 물었다.
"시형이 아버지가 그 무슨 도지사의 딸이라든가허구 약혼하라던 건 그 뒤 무슨 이야기가 없다든?"
이 날카로운 질문을 받고 무경이는 잠시 당황했으나,
"무슨 별 이야기 없던데요."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나 어머니는 마음을 놓을 수가 없다는 듯이 또 다시 무어라고 입을 나불거리다가 여러 번 주저하던 끝에,
"글쎄, 그렇다면 좋거니와. 손수 올라와서 데리구 가는 바엔 그런 이야기두 있었을 법헌데. 그럼 무어 너허구의 결혼에 대해서두 아직 이렇다 할 의사 표시는 없는 셈이로구나."
하고 나직이 말하였다. 무경이의 가슴속에서는 꿍하고 물러앉는 것이 있었다. 당황해지는 저의 마음을 부둥켜 세우며,
"마음대루 허라지요. 도지사 딸한테 장갈 들려건 들구 귀족의 딸한테 장갈 들려건 들구……."
어머니는 이러한 딸의 언행에서 적지 않은 경악을 맛보았으나 그 이상 이야기를 이어 나아가지는 못하였던 것이다.
서울을 떠난 오시형이한테서는 내려간 지 1주일이 지나서 1장의 편지가 왔다. 윤택이 있는 다정스런 문구는 하나도 없고 적지 않이 고민이 섞인 생경한 문구로 적히어 있었다.
지금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은 나의 장래에 대한 것이오. 내가 어떻게 하면 정신적으로 재생하여 자기를 강하게 하고 자기를 신장시킬 수 있을까 하는 문제입니다. 일찍이 나는 비판의 정신을 배웠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자기 자신에 대한 비판만 되풀이하고 있으면 그것은 곧 자학이 되기 쉽겠습니다. 나는 자학에 빠져버리고 싶지는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외부 세계에 대한 준열한 비판만 있으면 모든 것이 그대로 이루어지리라는 요즘의 지식인들의 통폐에 대해서는 나는 벌써부터 좌단(左袒)을 표명할 수가 없었습니다. 비판해버리기만 하는 가운데서는 창조는 생겨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설령 그러한 결과 도달하는 것이 하나의 자애(自愛)에 그치고 외부 환경에 대한 순응에 떨어지는 한이 있다고 하여도 나는 지금 나의 가슴속에 자라나고 있는 새로운 맹아에 대해서 극진한 사랑을 갖지 않을 수는 없겠습니다. 새로운 정세 속에 나의 미래를 세워놓기 위해서 지금까지 도달하였던 일체의 과거와 그것에 부수되었던 모든 사물이 희생을 당하고 유린을 당하여도 그것은 또한 어떻게도 할 수 없는 일일까 합니다.
물론 결혼에 대한 문구는 아무데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무경이는 애정에 대한 것만은 변치 않았고 또 앞으로도 변치 않으리라고 생각하여보았다. 그러나 무경이는 어떤 급처를 마치 보자기로 송곳을 싸들고 있는 것 같은 위태로운 심리로 가만히 덮어놓고 있는 것도 희미하게 느끼지 않을 수는 없었다. 보자기를 조금만 힘을 주어서 잡아당기면 날카로운 송곳이 보자기를 뚫고 벌처럼 폐부를 찌르기를 사양치 않을 것이다. 그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보자기를 어름어름 가만히 덮어놓아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태는 오래 지속될 수는 없었고 또 무경이의 성격이 그러한 상태에 어물어물 배겨있도록 철부지도 아니었다. 드디어 오시형이의 편지 내용이 결코 추상적인 문구만이 아니고 실상은 생생한 구체적 사실의 진행을 그러한 추상적인 문구로 표현해놓은 데 불과하다는 것이 명백히 밝혀질 시기가 왔다.
그 뒤 무경이의 몇 장의 편지에 대해서 오시형이에게선 도무지 회답이 없었다. 그러다가 어떤 날 짤막한 편지가 1장 왔는데 그것은 정양하러 어느 온천으로 간다, 통신 관계가 빈번한 것은 여러 가지로 재미롭지 않아서 아무에게나 여행한 곳은 알리지 않기로 되었으니 양해하라는 내용의 글이었다.
오시형이가 자기의 사상을 정비하고 정신을 통일시키는 데 방해가 되고 장애가 될 만한 이야기는 될수록 삼가서 편지를 쓰던 무경이었다. 그의 문제를 그 자신이 처리하고 있는 데에 다른 사람의 수작이 하상 무슨 관계냐고 무경이도 생각해보았던 것이다. 그로 하여금 그의 문제를 처리케 하라! 새로운 사상의 체계를 세워서 생명의 구원을 받게 하라! 그것이 무경이의 진심이었다. 그러나 이 편지가 내용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런 것과는 관계없이 최무경이라는 석 자의 이름과 그 이름으로부터 오는 기억 속에서 해방되겠다고 하는 하나의 전혀 별개의 사실이 아닌가.
무경이는 보자기를 뚫고 올라온 송곳 끝이 제 심장을 쓰라리게 찌르고 있는 것을 느끼며 얼마를 보내었다. 가을이 왔다. 겨울이 왔다. 새 해가 왔다. 봄이 닥쳐왔다. 물론 오시형이의 소식은 그대로 끊어진 채로. 그러나 이러한 가운데서 그가 가진 것은 ‘혼자서 산다’는 억지에 가까운 결심과 자기도 누구에게나 지지 않을 정신적인 발전을 가져보겠다는 양심이었다. 나도 나의 생활을 갖자! 나의 생각을 나의 입으로 표현할 만한 자립성을 가져보자! 오시형이의 영향으로 경제학을 배우던 무경이는 또 그의 가는 방향을 따라‘철학을 배우리라’ 방침을 정하는 것이다. ‘너를 따르고 너를 넘는다!’ ─ 이러한 표어 속에 질투와 울분과 실망과 슬픔과 쓸쓸함과 미움의 일체의 복잡한 감정을 묻어버리려 애쓰는 것이었다. ─
무경이는 어머니의 사진 앞에서 머리를 털어버리고 이내 테이블로 왔다. 그는 몇 달 전부터 이와나미(岩波[암파])의 《철학강좌》를 읽어 내려오고 있었다. 알듯 한 곳도 모르는 대목도 많은 것을 이를 악물고 시험 공부하듯이 대들었으나 날이 거듭될수록 어쩐지 제가 점점 어른처럼 되어가는 것 같은 느낌을 금할 수 없었다. 그것이 무한히 반가웠다. 책을 접고 침대에 누우면서 또는 아침에 침대에서 일어나서 책을 들면서 그는 언제나 ‘나는 어른이 되어간다’는 생각을 되풀이하면서 빙그레 웃고 하였다.
9시를 친 지 한참을 지나서 강영감의 발자취 소리와 하이힐이 복도를 울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옆의 방문을 열고 무어라고 중얼거리는 말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방을 보러온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무경이는 그대로 책상 앞에 걸터앉아 있었다.
논문을 쓰는 동안이라면 무슨 논문인지는 모르나 길대야 3,4개월의 기간이 아닐까. 3,4개월밖에 들어 있지 않을 사람에게 순순히 방이 비었다고 말한 곳은 제의 입으로 한 말이었으나 되새겨보면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주택난이 우심한 요즘에 1,2년의 장기간 동안 떠나지 않고 눌러 있을 손님을 골라서 두기도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닐 터인데…… 하고 역시 제가 한 대답이 경솔하였던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지금 거절하여도 결코 늦지는 않다고 생각해보면서도 사람을 오래 놓고서 어떻게 점잖은 사이에 무책임하게 신의 없는 소리를 배앝아놓을 수 있을까고 망설여보는 무경이었다. 실인즉 그는 철학 공부를 시작하면서 은근히 대학이라는 존재에 대해서 마음이 움직이었고 읽은 책 가운데 모를 대문이 많으면 많을수록 학자라는 존재에 대해서 어떤 흠모의 마음이 은근히 동하게 되어 있던 것이다. 이랬거나 저랬거나 주판알처럼 사무에 밝은 그가 특별한 천착도 없이 방을 허락한 데는 이러한 요즘의 그의 심경이 은연히 움직인 데 까닭이 있다고 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무경이의 방문에서 노크 소리가 난다. 뜨즉뜨즉이 두 번씩 두들기는 건 강영감의 노크다. 그는 책상 앞에서 떠나서 문께로 갔다.
"방 보시구 마음에 든다는데……."
하고 나직히 귀띔하듯이 말하였다. 무경이가 신을 신고 복도로 나가니까 양장한 여자는 앞서서 층계를 내려가고 있었다. 그의 뒤를 따라 강영감과 무경이도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이리로 들어오시지요."
하고 무경이는 복도로부터 사무실 안으로 안내하였다. 삼십이 넘었을 짙은 화장을 한 아름다운 중년 부인이었다. 양장점을 경영하는 여자이니만큼 옷도 기품이 있게 몸에 붙도록 지어 입었다. 화장이 좀 지나치게 야단스러워서 무경이와 같은 여자의 눈에는 마치 여배우나 여급과 같은 직업의 여자와 얼른 분간을 세우기 힘든 인상을 주었다.
"아파트에서 일보는 사람입니다. 최무경이라고 여쭙니다."
하고 인사를 드리니까,
"문란주올시다. 밤 늦게 소란스레 굴어서 미안합니다."
그러나 10시 전이니까 그다지 늦은 밤도 아니란 듯이 맞은 바람벽에 걸린 시계를 힐긋 쳐다보고는,
"방이 마음에 듭니다. 오늘 밤으루 이사해두 괜찮겠지요."
한다.
"그러시지요. 원체는 한 두달 계실 손님에겐 방을 거절하라는 것이 아파트의 정칙인데……."
하고 열쩍은 소리기는 하지만 한마디 끼어보지 않고는 태평할 수가 없었다.
"논문 쓰는 동안이라곤 하지만 또 얼마나 빌려놓구 이용하실는지두 모르지 않아요. 동경 같은 데선 소설 쓰는 사람들이 자기 주택 외에 모두 아파트 한 칸씩을 빌려갖구 있다든데요."
그러고는 익숙한 매무시로 호호호 하고 웃어 넘겼다. 웃음을 알맞게 끊고는,
"그럼 곧 이사하겠습니다. 시키킹(전세 보증금) 같은 건 내일 아침에 치르기루 헐까요?"
"그렇게 하시지요. 아침은 될수록 이른 편이 좋겠어요. 그럼."
하고 강영감을 향하여선,
"영감님 좀 늦으셔두 이사하시는 것 보아드리구 방문 잠그십시오. 그리구……."
다시 문란주 편을 향하여 낯을 돌리고는,
"특별히 규칙이랄 건 없지만 여러 사람이 단체 생활을 한다구 무어 이런걸 만들어둔 게 있습니다. 참고삼아 틈 있거든 보아주십시오. 또 그리군 오시는 선생님의 성함자도……."
하고 인쇄물과 카드 조각을 내어놓았다. 문란주는 연필을 들어 종이에 이관형의 석 자를 써주고 인쇄물을 받아서 들고는 사무실을 나갔다.
"그럼 또 뵈옵겠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한 여자는 밖으로 나가고 또 한 여자는 위층으로 올라갔다. 그때에 연회에서 늦게야 돌아오는 회사원의 한 패가 밖으로부터 몰려 들어오며 강영감에게,
"곰방와, 아아 늦어서 미안합니다."
하고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으나 이내 또 아파트 안은 조용해졌다. 무경이는 다시 제 방에 들어와서 문을 잠그고 책상 앞으로 갔다.
[2]
테이블과 양복장 같은 것은 방에 붙은 것이 있으니까 새로이 끌어들일 턱이 없다면 그럴 수도 있는 노릇이지만 참고 서적도 많을 것이요 침구라든가 신변 도구 같은 것의 운반으로 하여 적지 않이 시간을 잡아먹을 이사일 줄 예상하였고 어련히들 주의야 하겠지만 동숙인들이 잠든 시간에 혹시 안면방해가 되는 일이나 없을까고도 생각해보았던 만큼 자정도 되기 전에 발자국 소리 외엔 별반 요란스러운 음향도 없이 아주 쉽사리 간단하니 반이나 끝난 듯싶어졌을 때엔 무경이는 일변 안도하면서도 다소 실망을 느꼈다.
하기는 집이 서울 안에 있으니까 간단히 가방깨나 날라오고 뒷날 차차 소용되는 대로 짐을 날라 들일는지도 모를 것이므로 무경이는 그런 것을 오래 생각지는 않았다. 이관형이와 문란주의 관계가 어떻게 되는 것인지를 상상할 수가 없어서 다소 궁금하다면 궁금하였으나 이사 오는 사람이나 동숙인의 가정 관계를 소상히 알고 싶다는 필요하지 않은 악취미에서 벗어난 지도 이미 오래인 그이므로 이사가 끝나고 한참 있다가 하이힐이 복도를 지나 층계를 내려가버리는 것을 듣고는 그런 것에도 별반 오래 머리를 쓰지는 않았다.
하룻밤이 지나고 아침이 되어도 물론 새로운 일이 생겨날 리 만무였고 여느 때보다 출근하는 사람이 많은 이 집안은 아침이 가장 뒤숭숭한 시간이라 문소리 발자국 소리 말소리 같은 것이 어느 방 어느 사람의 것인지를 분간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무경이는 어느 날이나 진배없이 일찌감치 일어나서 물을 끓여 세수를 하고 간단히 아침을 지어 먹었다. 9시가 출근 시간이므로 그때가 되기까지는 방안에서 책을 읽었다. 9시 치는 것을 듣고야 사무실로 나갔다. 무경이가 나가는 것과 교대해서 사무실을 치워놓고 스팀에 석탄을 지피는 일을 끝막은 강영감이 일단 집으로 돌아간다. 10시가 되어 점심 벤또를 끼고 강영감이 나타나고 조금 있다가 주인이 나타났다. 무경이에게 2년 동안이나 일을 맡겨둔 주인은 오전중에 아무 때나 잠시 얼굴을 내놓고 장부나 검사해보고는 다시 나가버리는 것이었다. 그래도 무경이는 그가 들어올 때를 기다려서 장부를 정비해두었다가 하루 동안의 일을 소상히 보고하였다.
"어제 3층 22호에 있던 회사원이 나가고 밤 안으로 이관형이라고 하는 대학 강사가 새로 들어왔습니다. 나간 사람의 보증금 중에서 이번 달 치를 제하고 지출한 것이 이게고……."
하면서 그는 전표를 가리킨다.
"새로 들어온 사람의 회계는 아직 보지 않았으나 오전중에 계약이 끝날 것입니다. 오늘 들어온 걸루 헐라구요. 그리구 이건 각각 이번 달 치 방세들하고 또 이 지출은 전등료."
주인은 가느다란 도장을 들고 하나하나 장부와 전표 위에 인장을 눌러 치고는 아무말 없이 입금 중에서 얼마를 남겨놓고 사무실을 나갔다. 식당을 한 번 돌고 복도를 삥 시찰하듯 하고는,
"그럼 난 나가우."
하고 뚱뚱한 몸을 길 위로 옮겨놓았다. 주인이 나간 뒤 얼마가 지나서 보일러를 돌아보고 온 강영감이,"어젯밤 새루 들어온 양반 회계 끝났었나?"
하고 물었다."글쎄 여태 아무 소식두 없구먼요."
강영감은 숙직실 앞으로 가다가 멈칫하고 서면서,
"그 양반의 직업이 무엇이라구 허셨지?"
하고 돌아다본다.
"대학 강사랍니다. 왜요?"
"대학 강사."
그렇게 다시 나직이 뇌이기만 하고는 그 이상 이야기를 잇지 않았으나,
"그 한 번 채근해보시지."
하고 무경이 앞으로 걸어왔다.
"글쎄, 오늘 일찍이 회계를 보기루 일러두었는데 세상 물정에 어두운 학자님이시라 그런 건 통히 잊어버린 게로구먼요. 그럼 영감님 수고스럽더래두 한 번 올라가보시구려."
강영감은 잠시 눈을 꿈뻑꿈뻑하고 서 있었다. 오래지 않아 봄이라는데 그는 여태 털 떨어진 방한모를 귀밑에까지 푹 눌러 쓰고 보일러 칸으로 드나든다. 바지 위에 작업복이 낡아서 푸르등등한 놈을 껴 입고 윗저고리 위에도 털 떨어진 체부 옷을 단추가 2개나 떨어진 대로 껴 입고 있었다. 신발만은 아파트의 손님이 신다가 내버린 틀어진 것도 단화였다.
"그럼 내 올라가보지."
모자를 벗어서 놓고 맹숭맹숭하게 갓 깍은 머리를 갈구리 같은 손으로 한번 써억 젖혔다. 그리고는 슬근슬근 복도를 걸어 나갔다.
무경이는 강영감의 태도에서 마땅치 않아 하는 눈치를 느낄 수 있었으나 제 비위에 맞지 않을 때엔 가끔 있는 일이므로 공연한 오해일 것이라고 생각해본다. 연세가 연세인지라 자기가 못마땅히 생각하여도 남의 앞에서 그런 것을 경솔히 지껄이지는 않는 성미였다. 그저 꿈뻑꿈뻑 눈을 감았다 떴다 하는 것이 그러할 때의 표정이었다. 어젯밤 찾아왔던 양장한 여자를 물끄러미 쳐다보면서도 강영감은 그런 표정을 지어 보였었다. 역시 그런 것이 원인이 되어서 일종의 오해까지도 품어보게 된 것일 게라고 생각은 해보는 것이나 아침 일찍이 회계를 보자고 언약해놓고서 일언 반구의 이렇다 할 말이 없는 것도 심상치 않은 일이거니와 11시가 되어오는데 식당에도 내려오는 기척이 없으니 어느 새 취사 도구를 정비해놓고 아침을 손수 지어 먹은 것인가 도무지 어인 일인지 감감 동정을 알 수가 없었다. 양장한 여자가 그런 사연을 통히 전달하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도 없고 또 그랬었다면 그 양장한 여자라도 이르게 얼굴을 보이어야 하는 게 아니냐고도 노상히 생각되어지지 않는 바는 아니었다.
그러고 있는데 한참만에 강영감이 저으기 뚜우한 낯작을 하고 어슬렁어슬렁 위층으로부터 내려왔다. 하회가 궁금한데도 이내 입을 열지 않았다. 대단 불유쾌한 표정이었다. 잠시 책상 언저리를 빙빙 돌다가 혼잣말로,
"고오얀 친구여 젊은 사람이!"
하고 한마디 툭 배앝았다. 무경이는 종시 말썽이 생기나보다고 내심 걱정이 되면서도,
"왜요?"
하고 입술 위엔 웃음을 그려본다.
"흥, 그 사람이 대학교 선생이라구? 원 참!"
또 한 번 그렇게 뇌더니 무경이의 앞으로 와서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하였다.
"당최 어떻게 된 사람인 걸 알 도리가 있어야지. 자아 이거 보겠나. 늘 하는 본새로 떵떵떵떵 그 노크라는 걸 허지 않었나. 대여섯 번 겹쳐 해두 도무지 하회가 없겠다. 그래서 또 한 번 커다랗게 두드렸더니 그제서야 누구인지 들어오시오, 점잖다면 점잖고 또 거만하다면 거만하달 대답이 들리길래 문을 비틀어보았더니 참말 문을 잠그지는 않었어. 그래서 낯을 문틈으로 들여보내려구 허는데 방안에 자욱한 연기 그대루 곰을 잡을 작정인지 그냥 담배 연기가 눈을 뜰 수 없게시리 가득히 찼더란 말이여. 그러나 나야 또 무어 글이래두 쓰면서 딴 정신이 없어서 담뱃내 찬 것두 모르는 줄 알었지. 침대에 번듯이 자빠 누웠는 줄야 알었을 도리가 있나. 그 입은 것허며 그 머리라 낯짝이라……."
차마 입에다 옮길 수 없다는 듯이 주름살진 표정을 잠시 쭈그려뜨려 보이고 말을 끊었다가,
"내 벌써 어젯밤부터 꼬락서니를 보고서 콧집이 찌그러진 줄 알었었지만, 자아 어젯밤 최선생 올라간 뒤에 그 양반들 이사오던 꼬락서니 좀 보았나. 그저 가방 하나만을 들고 차에서 내려서 껑충껑충 들어오는데 그 야단스런 부인네는 조고만 보꾸러미를 하나 들고서 앞서서 뛰어 들어가고 이 대학 선생이란 양반은 모자를 썼겠다, 무어변변한 양복깨미나 허긴 낡아빠진 외투는 꺼칠하게 뒤집어 썼으면서두…… 어쨌던 벌써 콧집이 틀려먹은 걸…… 그런데 이 사람이 오늘은 번듯이 침대에 누워설랑은 그저 담배만 죽여대인 모양이지. 그래서…… 저 여기 규칙대로다 보증금 석 달 치하구 한 달 치 선금일랑을 치르셔야 하겠는뎁쇼 하고 말했을 것 아니여. 그랬더니 그저 암말 않고 나가 있어 한마디뿐이라. ……아니올세다, 규칙대로 한다면 보증금과 선금 치른 뒤에야 이사하는 건뎁쇼. 선생님껜 특별히 규칙 위반으루다 대접해드린 것이올세다. 이렇게 또 한 번 공손히 설명해드렸는데도 그러게 잔말 말구 내려가 있으라는군 그래. 부아가 나서 견뎌배길 도리가 있나. 아니올세다 규칙대로 이행하시기 싫은 분은 부득불 방을 내기로 되어 있는뎁쇼. 하구서 한 번 을러놓았더니 허 허어 거참! 영감은 소용없으니 주인을 보내래눈! 돈은 사무실에 내려오셔서 치르게 되었는뎁쇼. 하고 또 한번 빈정거렸더니 벌떡 일어나면서 잔말말고 나가서 주인을 보내! 하구 호령이겠지. 난 당최 그 입은 것하며 낯바다기가 무서워 수작을 걸기두 싫어서 앵이 문을 찌끈 닫고 내려와버렸지. 거참! 그 무슨 오라질 대학교 선생이람! 대체 어저께 왔던 그 여편네가 잡년야, 그게 바루 여급 아냐, 술집에서 술 따르는 그렇잖으면 활동 사진 박히는 광대년이든지……."
"양장점 경영하는 부인네랍니다."
별로 변호해준다는 의식은 없었으나 좀 과장하는 버릇이 있는 강영감인지라 무경이는 나직이 그렇게 설명해주었다.
"양장점?"
"네 부인네들 양복 짓는."
그랬더니 강영감은 기가 좀 사그러지는지,
"양장점을 허는지 무얼 허는지 모르지만…… ."
하고 숙직하는 방으로 갔다.
"수고하셨습니다. 내 그럼 올라가 만나보지요. 허긴 나두 주인은 아닌데."
무경이는 농말을 지껼여서 가볍게 취급해버리며 사무실을 나왔으나 물론 강영감의 보고는 그를 적지 않게 불쾌하게 만들었다. 22호실 앞에 서니까 제법 마음이 긴장되었다. 노크를 하니까 강영감의 이야기처럼 참말 ‘누구신지 들어오시오’하는 느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남자가 혼자 들어 있는 방이라 주저도 되었지만 가만히 핸들을 비틀고 얼굴보다 스커트 자락과 구두를 먼저 안으로 들여보냈다. 찾아온 사람이 여자라는 것을 알고 그에 합당한 예의를 갖추라는 예고로서 하는 것이다. 잠시 동안을 두고 밖에서 기다리는데 연기에 찬 방안의 공기가 문 틈으로 새어 나왔다. 이윽고 그는 얼굴을 나타내고 열어젖힌 문으로 몸을 완전히 방안에 들여 세웠다. 그러나 침대 위에 누워 있는 사내는 그대로 번듯이 천장을 바라보며 담배만 피우고 있을 뿐 이편 쪽으론 눈길도 보내지 않았고 그러니 무경이가 구두나 스커트를 먼저 들여놓았다든가 하는 세밀한 기교도 알아줄 턱이 만무하여 통히 들어온 사람이 젊은 여자라는 것에도 생각이 미치지 않은 모양이었다. 얇다란 차렵이불을 배통이께로부터 발치 위에 덮었고 상반신은 여자의 것이기 확실한 화려하고 화사한 가운을 두르고 있었다.
"아이 연기."
나직이 그렇게 말하면서 사내의 귀에 들리도록 인기척을 만들었다. 사내는 뻐끔히 머리를 들어 보았다. 여태껏 여자인 줄을 몰랐었던지 이윽고 벌떡 자리에서 상반신을 일으킨다. 머리가 뒤설켜서 구숭숭한데 면도를 넣은지 오래되는 얼굴 전체에는 지저분한 반찬 가시 같은 수염이 쭉 깔렸다. 얼굴은 해사했으나 몹시 창백한 것 같았다. 옆구리에 놓았던 빵 조각이 침대에서 굴러 떨어진다.
사내는 자기의 모양하며 옷 주제하며가 여자의 앞이라 다소 부끄러웠었던지 잠시 당황하는 듯한 표정을 지어보았으나,
"아파트의 주인은 안 계시고 제가 그 대리를 맡아보는 사람입니다."
하는 침착한 젊은 여자의 목소리를 듣고는 다시 무뚝뚝한 낯색으로 표정을 고치고,
"당신네 집에선 어째 손님에 대한 예의가 그렇습니까."
하고 외면을 한 채 항의 비슷한 트집을 쏟아놓기 시작하였다.
"글쎄올시다. 여러 분을 대하게 되는 관계상 소홀하게 되는 수도 많으리라고 믿습니다마는 지금 올라왔던 영감님께서 어떤 실수를 하셨던가요?"
무경이도 지지 않고 따질 것은 따져놓자는 뱃심이었다. 사내는 잠시 말을 끊었으나,
"집세고 보증금이고 치르면 될 거 아닙니까. 손님에게 무례한 짓을 하지 않고도 받을 돈은 받을 수 있지 않아요?"
"그야 그렇겠습지요. 그러나 말씀하셨던 언약이 잘 지켜지지 않고 또 어젯밤에 하신 말씀과는 잘 부합되지 않는 곳도 있으니까 아마 영감님의 욱된 생각에 그만 실수가 된 것 같습니다."
"언약이 잘 지켜지지 않았다든가 어젯밤에 하던 말과 부합되지 않는 곳도 있다니 대체 내가 당신네들과 무슨 굳은 맹서를 하였단 말이오?"
무경이는 잠시 말을 끊었다. 사내는 침대에 다리를 뻗고 앉은 채 자기는 문 지방에 선 채 이런 다툼을 서로 건네고 있는 것이 우습기도 하였지만 아파트를 대표해서 이야기하는 이상 따질 대로는 따져본다고 다시 생각한다.
"선생님과는 지금이 초면이니까 그런 약속이 있었을 리 만무하지만 어저께 오셨던 부인네의 말씀을 신용하고 방을 빌려준 것이지 본시부터 선생님을 친히 뵈옵고 언약이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내의 자부심을 다소 건드려주는 말투였다. 사내는 침대에서 내려섰다. 양복 위에 여자의 가운을 입은 품이 어쩐지 우스웠다.
"대체 어떤 내용의 언약입니까. 손님에게 아무런 무례한 짓을 하여도 움찍달싹 않겠다는 약속이라도 했었던가요?"
사내는 면바로 무경이를 쳐다보았다.
"어제 부인네의 말씀에는 손님의 직업은 제국대학의 강사요, 방을 빌리는 목적은 논문을 쓰시는 데 있다 하였고 방세와 보증금은 오늘 새벽에 치르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사내는 갑자기 말문이 막혀버렸다. 말문이 막혀버렸을 뿐 아니라 몸 자세에서도 기운이 쑥 빠져버리는 것이 옆의 사람의 눈에도 현저하게 보이었다.
그는 가만히 외면하고 침대 옆으로 가 섰다.
"대학 강사"
하고 나직하니 외듯 하는 것이 들려왔다. 그러나 그는 이내 다시 몸을 돌리어 이편 쪽을 보면서,
"내 직업이 대학 강사라든가 내가 이 방안에서 논문을 쓴다고 말했다면 그건 거짓이었으니까 내 입으로 취소하겠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건 결국 보증금과 방세 문제 아냐요. 남에게 방해되는 일이 아닌 이상 논문을 쓰던 글을 읽던 그런 것에 관계할 필요는 없을 테구 또 직업 같은 것두 대학 강사라야 된다는 규정이 있을 턱은 없을 거구……."
"글쎄, 그렇게두 말씀하실 수 있겠지요."
"그럼."
하고 사내는 양복 주머니에다 손을 넣었다.
"돈은 오늘 안으루 해드릴 터이구 또 그때까지 믿으시기 힘들다면 나를 인질로 잡아두는 겸 내가 몸에 지니구 있는 소지품이라곤 이 금시계가 하나 있을 뿐이니까 이걸 그럼 그때까지 맡아두십시오."
시계를 꺼내서 보이었다.
"온 별 말씀을! 여기가 무어 전당폰 줄 아십니까?"
"그럼 어떡하라는 겁니까? 몇 시간의 여유도 할 수 없으니 당장에 나가라는 말입니까?"
이렇게 저으기 난처한 장면이 벌어지려 할 때에 마침 층계에서 발자국 소리가 나고 어저께 왔던 양장한 여자가 커다란 물건 꾸러미를 들고 또 한 사람 운전수에게 이불 보퉁이 같은 짐을 들려갖고 올라오고 있는 것이 무경이의 곁눈에 띄었다.
"아이 안녕하십니까. 늦어서 죄송합니다."
하고 문란주는 문지방에 서 있는 최무경이에게 인사하였으나 그들의 소 닭 보듯 하고 서 있는 엉거주춤한 몰골을 보고는,
"어째 이러십니까. 무어 말썽이 생겼습니까?"
무경이를 향해서는 유쾌한 웃음을 보내면서 일변 운전수의 손에서 보꾸러미를,
"영치기."
소리를 내어서 옮겨놓고 눈살을 찌푸리고 뚜우해서 서 있는 사내에겐,
"왜 이렇게 장승처럼 서 있수."
그러나 곧 무경이 쪽을 보면서,
"내 인제 곧 내려갈께요."
하고 말하였다.
무경이는 어떻게 또다시 이야기를 이어 나갈 멋도 없고 부인네에게 지금 지낸 사연을 옮겨 들려주고 따져볼 맛도 없어서 그대로 멍청하니 서 있었고 또 이관형이라고 하는 방안의 사내도 어떡하라는 것이냐고 따지는 것도 한낱 실없는 일이었다. 생각이 든 것처럼 시무룩해서 침대에 가서 벌떡 누워버린다. 어이가 없어서 무경이는 그대로 문을 닫아주고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사무실에 돌아오니까 강영감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마음이 불쾌하고 노엽다느니보다도 우스꽝스런 생각이 들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대체 어떻게 된 판국인지 저도 한몫 끼긴 하였으나 정신을 차릴 수가 없는 것 같다.
이관형이라는 사내는 어떠한 부류의 사람일까, 모양이나 차림차림은 그 지경이지만 물론 강영감이 보는 바와 같은 인상만을 주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대학 강사가 아닌 것도 확실하고, 그러면 문란주는 어째서 거짓 직업을 주워 부르면서 하필 대학 강사를 골라 대게 되었던 것일까. 회사원이래도 그만이요, 광산가래도 그만이요, 그밖에 어떠구레한 직업으로 손쉽게 불러댈 것이 많은 중에서 하필 대학 강사이었던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문란주가 내려왔다. 그는 사무실로 들어오며서 대강한 사연은 들었는지,
"늦게 와서 미안합니다."
하고만 말하고는 상냥스레 웃어 보였다. 오늘도 역시 화장은 짙으게 이쁘장스럽게 하였다. 눈과 입술과 턱 밑으로 자세히 보면 퍽 솜씨 있고 능숙한 화장이었다. 그는 그 이상 아무말도 않고 핸드백을 열어서 지갑을 꺼냈다. 가느다란 흰 손가락 끝이 빨간 에나멜이어서 이상스레 연약하고 화사스런 인상을 주었다.
"보증금이 석 달 치니까 105원이죠! 그리군 1개월분 방세가 35원, 140원이면 되겠지요?"
무경이는 별로 대꾸도 하지 않고 펜을 들어 서류를 꾸미고 돈을 세어서 금고에 넣었다. 그러고도 숙박기를 꺼내서 정식으로 이관형이의 이름을 기록하였다.
"직업은요?"
하고 새삼스럽게 물어놓고는 직업란 위에 펜 대를 세운 채 가만히 기다려본다.
"글쎄, 직업이 생각해보니 우습게 되었군요."
하고 머리 위에서 문란주가 말하였다. 시방 위층에서 그것 때문에 말썽이 있었던 것인지,
"실상인즉요, 얼마 전꺼정 대학 강사루 있었는데 그만 그 방면에서 실패를 하셨답니다. 그래서 어저께는 그냥 대학 강사라구 했었는데 그러니 지금이야 따져 말하자면 무직이지요. 당자두 무직이 좋다니까 그대루 무직이라구 적어두세요. 연령은 스물 일곱 아니 작년에 스물 일곱이었으니까 지금은 이십 팔……."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