낄낄대며 끼적이던 낙서, 창조의 원동력 되다
《인간은 직립보행을 한 이래 손으로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한다. 그중에는 불필요해 보이는 행동도 있으니, 바로 낙서다. 전화를 받을 때도, 수업을 할 때도 손에 펜만 쥐여 주면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낙서하는 사람을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다. 그냥 단순한 ‘끄적거림’으로 간과하기 쉬운 낙서는 사실 수십만 년간 인류의 진화와 함께해 왔다. 디지털 시대에도 낙서가 가진 매력은 여전하다. 서툰 듯한 필체로 익명으로 남은 우리의 조상들이 남긴 낙서의 역사를 살펴보자.》
국보가 된 ‘받아쓰기 숙제’
별생각 없이 끼적인 낙서가 먼 훗날 인류의 귀한 문화유산이 되기도 한다. 1956년 러시아 노브고로드에서 발굴된, 800년 전 일곱 살짜리 꼬마가 끼적인 낙서. 자작나무 껍질에 받아쓰기 숙제를 하다 무료했는지 귀여운 그림과 낙서를 더했는데 러시아인이 사랑하는 유물이 됐다(위 사진).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카자흐스탄의 탐갈리 유적지에서 발견된 바위 위 그림. 약 3000년 전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데 흡사 현대 미국 화가 키스 해링의 작품을 연상시킨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강인욱 교수 제공
누구나 어렸을 적 교과서와 공책에 수업의 지겨움을 못 견디고 낙서를 끄적거린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낙서를 보면서 인상을 찌푸리는 부모님이나 선생님의 모습도 흔하다. 하지만 낙서는 인간의 본성인지라, 교과서에 쓰인 낙서는 학교의 시작과 함께 계속되어 왔다. 토기 조각을 공책으로 쓴 이집트, 점토판을 쓴 메소포타미아 등 그 재질은 달라도 지겨운 공부 사이에 남겨진 학생들의 귀여운 낙서들은 언제나 고고학자의 미소를 자아낸다.
때로는 이런 낙서 중에서 국보가 된 것도 있으니, 바로 800년 전 7세짜리 꼬마가 학교에서 남긴 낙서이다. 1950년대 소련의 고고학자들은 러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인 노브고로드를 대대적으로 조사했다. 대체로 우리나라의 고려시대에 해당하는 12∼13세기에 번성했던 이 도시는 러시아의 다른 도시와 달리 몽골의 침략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마치 우리나라의 경주나 일본의 나라 같은 대표적인 역사도시다. 노브고로드에서는 자작나무의 껍질에 쓴 문서들이 대량으로 발굴되어 슬라브 언어의 기원을 밝힐 수 있었다. 가히 러시아의 ‘훈민정음’급에 해당하는 국보들 사이에서 엉뚱하게도 사람들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것은 ‘온핌’이라 불리는 어떤 아이가 쓰던 받아쓰기 숙제였다. 온핌은 동네의 교회학교에서 글을 배웠는데, 무한한 받아쓰기의 사이사이에 이런저런 그림과 낙서를 남겼다. 말을 타고 동물에게 화살을 쏘는 신나는 장면에 “나는 짐승이다. (한판 붙자)”라고 쓰고 교실에서 수업받는 학생들의 그림에는 “아 벌써 6시인데…(공부하기 싫다∼)”라는 낙서를 남겼다. 수업에 다녀오다 하수구에라도 빠뜨렸는지, 아니면 숲속에서 놀다가 빠뜨렸는지 온핌의 깜지 뭉치는 1956년에 구덩이에서 통째로 발견되었다. 그리고 지금도 러시아 사람들이 제일 좋아하는 유물로 사랑받고 있다.
동굴 벽, 금강경도 ‘낙서판’
50만 년 전 인도네시아에 살던 자바원인이 조개껍데기에 남긴 낙서.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낙서의 역사는 50만 년 전 호모 에렉투스의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인도네시아에서 살던 자바원인이 먹은 민물조개의 껍데기 위에 W 형태를 반복적으로 그은 것이 발견되었다. 남아프리카에서 발견된 현생인류가 7만3000년 전에 살던 동굴에서도 붉은 물감으로 그린 낙서가 발견되었다. 그리고 프랑스 후기 구석기시대의 여러 동굴벽화에서도 낙서 같은 그림들이 종종 발견된다. 지금 흔히 보는 그라피티(길거리 벽화)의 기원도 구석기시대로 올라간다.
문명이 발달하고 필기도구가 고도로 발달하면서 낙서도 함께 발달했다. 인간의 삶이 각박해지면서 은밀한 공간에서 낙서는 터부시되는 인간의 욕망을 담아내기도 했다. 특히나 낙서가 많이 이루어진 공간은 화장실의 담벼락과 도서관의 책이었다. 지금도 공중화장실의 벽에서는 각종 낙서를 흔하게 볼 수 있다. 험한 정치적인 구호는 물론이고 자신의 욕망을 담은 걸쭉한 음담패설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한편, 필기도구가 있고 조용하게 사색할 수 있는 도서관도 낙서의 주요 무대가 되었다. 기독교의 도그마로 인간의 생각을 강하게 지배하던 유럽의 중세시대에도 책장 사이사이에 기기묘묘한 이미지의 낙서들은 계속되어 왔다. 불심으로 가득한 실크로드의 둔황 문서 중에도 낙서가 있다. 실크로드의 학자들은 둔황 17굴에서 발견된 한문 ‘금강경’을 조사하던 중 뜻밖의 낙서를 발견했다. 그 성스러운 불경의 뒷면에 9세기경의 어떤 승려로 추정되는 사람이, 성적인 능력이 과장된 남자를 그려 넣고 자신은 ‘철로 만든 새(iron bird)’이며 ‘자신을 만날 여신을 구한다’는 말을 소그드어로 써놓았다. 그 뜻을 이루었는지는 기록이 없으니 알 수 없다. 어쨌거나 조용히 혼자 사색에 잠길 수 있는 화장실과 도서관에 이런 낙서가 집중되는 것은 오랜 전통이었던 듯하다.
낙서는 21세기에 들어서 하나의 예술로, 그 영향력은 커져가고 있다. 키스 해링(1958∼1990)은 거리의 낙서에서 영감을 받은 독특한 낙서 같은 그림으로 거리예술을 하나의 장르로 정착시켰다. 또한, 20세기 들어서 다양한 만화의 장르에서도 낙서 같은 예술이 도입되었다. 펜 대신에 성냥개비를 이용해서 해학적인 그림을 그린 박수동 화백, 서툰 듯한 그림체로 인터넷상에서 큰 인기를 얻은 이말년 같은 작가가 있다. 지금도 세계 최고 검색사이트 구글은 기념일 때마다 ‘구글 두들’이라고 해서 시작화면을 귀여운 낙서 같은 그림으로 바꿔서 가벼운 듯 큰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인간의 희로애락을 담은 무거운 의미를 낙서 같은 달달하고 귀여운 이미지로 바꿔서 사람들에게 전해 준다. 끄적거리는 낙서는 인간의 본능에 내재하기 때문이다.
낙서할 때 29% 정보 더 얻어
낙서는 비단 종이나 캔버스에 한정되지 않는다. 경주에서 발견된 4∼5세기 신라의 토우는 사람과 동물의 모습을 마치 거친 낙서처럼 표현했다. 당시 신라는 화려한 금관과 고분 등 예술의 절정에 도달한 시점이었다. 사람들이 예술품을 만들 줄 몰라서 못 만든 것이 아니다. 반대로 낙서 같은 그림이 주는 카타르시스를 잘 알았기 때문이다. 예술의 경지에 오른 유려한 신라 토기 위에 놓여진 토우의 해학적이고 거친 모습에 열광하고 웃으면서 세상 사는 시름을 잊지 않았을까.
최근 뇌에 대한 연구가 증가하면서 낙서의 의의가 새롭게 밝혀지고 있다. 인간의 진화는 손을 자유롭게 쓰면서 수백만 년을 이어왔다. 그 과정에서 손의 활동은 인간의 뇌와 함께 연동하여 발달해 왔다. 낙서 역시 게으름의 결과가 아니라 뇌가 손과 연동하여 만드는 창조적인 시간이라는 것이 밝혀지고 있다. 지루한 듣기 과제를 할 때 낙서를 하는 사람이 29%나 정보를 더 얻는다는 연구도 있다. 쓰기와 낙서가 인간의 창조성에 도움이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인간에게 낙서는 단순한 소일거리가 아니라 끊임없이 발달하는 진화의 바퀴를 계속 돌리는 수단인 셈이다. 낙서가 주는 또 다른 위대함으로는 바로 천재들의 노트가 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스티브 잡스, 피카소 등 대가를 연구하는 데 있어 그들이 남긴 노트의 낙서는 그 천재성을 파악하는 주요한 수단이 된다. 실제로 다빈치가 남긴 노트에 그려진 태아를 품은 자궁의 해부도, 비행기, 낙하산 등은 지금도 많은 영감을 준다. 낙서가 주는 정서적인 안정감도 무시할 수 없다. 스트레스가 쌓이면 낙서로 푸는 사람들이 주변에 많다. 원시시대부터 인간은 스트레스의 대상을 간단하고 해학적으로 표현해서 낄낄대고 웃으면서 스트레스를 해소해 왔기 때문이다.
디지털 시대로 빠르게 변하면서 낙서의 기회가 사라지고 있다. 디지털 기기의 발달로 우리 몸을 움직여 자극을 얻는 경우는 최소화하고 대신에 더 빠르고 엄청난 양의 정보를 주입하는 과정이 반복되고 있다. 그사이에 우리의 몸과 마음은 더욱 지쳐 가고 창의력도 사라져 간다. 요즘 더 좋은 조건과 교육에도 불구하고 문해력과 정보 인지력에서 많은 퇴보가 된다고 우려한다. 어쩌면 잠시 뇌를 쉬고 손을 움직여서 낙서를 하는, 수십만 년을 이어온 인류 진화의 지혜가 필요할 때인지 모른다.
강인욱 경희대 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