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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대의 활동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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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으로 모든 정당이 해산된 가운데 軍政이 실시됐다. 김대중은 1962년 5월 10일 전 YWCA 총무 이희호와 재혼하여 안정을 되찾으며 정치적으로 재기할 기회를 노렸다. 김대중은 정치 규제에서 해금된 舊 민주당의 실력자 朴順天 집에 이상철(李相喆)․홍익표(洪翼杓)․조재천(曺在千)․김상돈(金相敦)․엄민영(嚴敏永) 등 선배․동료 30여 명과 함께 1963년 1월 3일 방문했다. 박순천은 이 자리에서 “이제 정치는 그만 두겠다”고 거듭 사양했다. 그러나 그녀는 며칠을 두고 다시 찾아간 엄민영, 김대중 등의 집요한 요청에 마음을 바꾸었다. 당시 사정을 박순천은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결국 나는 민주당 재건에 참여하게 되었다. 인정에 끌린 탓도 있었으나 곰곰 전후를 생각해보니 이렇게 정권을 뺏긴 채 주저앉아 버려서는 안되겠다는 투지가 샘솟았기 때문이다. 전 총재인 장 박사를 비롯해서 김상돈․김선태․김영선․이철승씨 등은 아직 정정법에 묶인 채로 있었고 곽상훈․오위영씨는 완강히 정계 은퇴를 고집하고 있었다. 사람과 돈이 모두 부족했다. 나는 “남의 발을 묶어놓고 같이 뛰자니 이런 법이 어디 있느냐. 이것은 원자탄과 죽창의 싸움”이라고 쏘아대기도 했으나 싸움은 이미 시작된지 오래였다. (박순천, “정치 여성 반세기” 중앙일보 1974년 4월 11일자) 민주당은 1963년 7월 18일 서울 시민회관에서 1천18명의 대의원 중 770명이 참석한 가운데 창당대회를 열었다. 민주당이 이날 발표한 결의문은 다음과 같다. 1) 정부는 긴박한 식량난과 물가고에 의한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라. 2) 군정종식을 위하여 야당연합에 의한 단일 대통령 후보 옹립과 승리를 위하여 본당은 모든 노력을 강조한다. 3) 공명선거의 보장은 군사정부 아닌 민간정부에 의하여 비로서 가능하므로 과도 민간정부 수립을 강력히 요구한다. 4) 정부는 정치사찰에 낭비하는 정력을 반공사찰 강화와 치안 확보에 집중하라. 5) 한일회담에 있어서 지나친 양보나 저자세는 용인할 수 없다. 민주당은 총재 박순천, 간사장 조재천, 총무부장 성태경, 조직부장 배성기, 선전부장 김대중, 정책위원장 김판술 등으로 포진했다. 민주당 신파의 정치적 재기였다. 장면을 보스로 하는 민주당 신파는 일제친일관료 출신이 많았다. 장면이 수상이 되는 등 짧았던 민주당 정권을 주도했던 민주당 신파는 5․16으로 허무하게 정권을 빼앗겼으므로 국민들에게 이미지가 좋지 않았다. 이에 따라 대통령 후보는 내지 않고 허정 후보를 지지하는 입장을 취했다. 윤보선 전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옛 민주당 구파가 만든 民政黨, 허정 전 과도내각수반이 만든 신정당, 박정희의 공화당과 더불어 옛 민주당 신파가 만든 민주당은 1963년의 대통령선거와 국회의원 선거에 나섰다. 민주당은 1963년 11일 26일 실시된 6대 총선거에서 민주당은 13석을 얻어 제2 야당이 되었다. 김대중도 목포에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김대중은 1963년 10월 19일 본적을 강원도 인제에서 서울 마포구 동교동 31-1로 옮겼다). 김대중은 전남의 유일한 민주당 당선자였다. 1954년 목포에서 출마하여 낙선한지 9년만의 일이다. 말이 제 2야당이지 재건된 민주당은 원내교섭 단체도 구성할 수 없는 군소 정당에 불과했다. 이러한 당에서 당선된 김대중의 당내 위상은 급격히 올라갔다. 1965년 5월 民政黨과 군소 야당인 민주당, 자민당, 국민의 당이 통합하기로 결의하여 民衆黨이 탄생했다. 실질적으로는 당 대 당 통합이 아니라 제 1 야당인 민정당이 군소 야당을 흡수통합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6월 14일의 창당 전당 대회에서 민정당의 윤보선과 유진산의 갈등으로 인해 반란표가 발생, 민주당 총재 박순천이 당수가 되는 이변이 일어났다(1964년 민정당 내부에서는 윤보선과 유진산의 극한 대립이 있었다. 이를 제1 진산 파동이라 부른다). 박순천이 통합야당의 당수가 되자 김대중도 제 1야당 당수의 측근 참모로 위상이 올라갔다. 김대중은 민중당의 대변인이 되었다 명목상 재선의원이지만 사실상 초선의원으로 의정단상에 진출한 김대중은 1964년 여름부터 1965년 가을까지 이어진 한일회담 반대투쟁에서 의원직 사퇴를 내건 윤보선 전 대통령의 강경 노선에 맞서 온건 노선을 표방함으로써 주위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김대중은 이에 대해 자서전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나의 아내는 당시 외출했다가 친척들로부터 자주 ‘당신 남편은 정부․여당 앞잡이가 됐어요’라는 야유를 노골적으로 받곤 했다. 뿐만 아니라 고향에서 나의 부친이 내게 보낸 편지에 ‘넌 어쩌자고 여당 앞잡이가 돼 가지곤 세상 사람들한테서 손가락질을 받는 것이냐’ 면서 호되게 나무란 적도 있었다. 내 자식들도 학교에서 친구들로부터 욕을 먹고는 집에 돌아와 나에게 괴로운 심정을 호소하기도 했다. (김대중,『행동하는 양심으로』서울: 금문당, 1985, P 92) 김대중은 그 후 과격하다는 비난을 받을 때마다 한일 국교 정상화 파동 때 보여준 자세를 예로 들며 스스로를 온건파라고 주장했다. 김대중은 활발한 의정 활동을 전개했다. 김대중의 국회 연설은 위력을 발휘했다. 김대중은 의정단상에서 1시간 발언하기 위해 10시간 이상 준비했다. 이 무렵 김대중은 국회 도서관을 가장 많이 이용하는 의원으로 알려졌다. 김대중은 실력있는 의원으로서 정부의 비리를 공격하거나 정부 방침을 옹호하면서 이득을 얻기도 했다. 한일국교 정상화 파동에 이어 월남 파병 때도 정부시책에 근접한 노선을 취했다. 한 정치 평론가는 이 점을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촉망받는 소장 정치가 김대중의 실리 위주 정치행적은 국민들의 눈에 부정적으로 비쳐졌고 장래가 양양한 젊은 국회의원이 지나치게 정치장난이 심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것이 모두 박정희 정부 초창기의 일이었기 때문에 한일회담과 월남파병으로 박정권은 미국의 확고한 지지를 얻게 되었고 김대중은 이를 도와준 장본인의 한 사람이 된 셈이다. 김대중에 대한 ‘사꾸라’ 여론이 비등하고 자기 조직 내에서도 반발하는 기색이 보이자 그는 시내 모 음식점으로 측근들을 불렀다. “내가 정부에 협조하여 사꾸라 노릇을 했다고 하지만 나는 나 혼자 먹지 않고 여러분과 함께 나눠 먹지 않소, 저 쪽에서 뺏어다가 이쪽에다 쓰는 것이 정치 아닙니까?” 이 증언은 당시 그의 조직원이었던 김장곤의 또렷한 기억이다. 이처럼 그는 철저히 실리를 파고들었으며 지금까지 연연이 계속되고 있는 정치철학이라 볼 수 있다. (전대열,『말따로 몸따로-행동하는 욕심의 본보기들』서울: 광월출판사, 1991, p25) 전대열씨는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른 경력이 있다. 박정희 씨는 학생과 교수에 대해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한다고 비판적이었는데 이를 잘 보여주는 연설이 많다. 『그야말로 가난한 나라의 학생들이 후일의 웅비에 대비하기는커녕, 조국을 사랑하고 민족의 앞날을 걱정한다는 소위 현실참여가 바로 이것이라면 실로 가공할 모순이며, 가증스러운 작폐라 아니 할 수 없는 것입니다』 (1964년 6월 3일 비상사태 선포에 즈음한 담화문) 『…과거 일제시대에 우리가 일제와 싸우던 것과 마찬가지인 정신자세, 즉 倭賊이 와서 우리를 점령하고 우리를 식민지화하고 우리가 남의 노예가 되었을 때, 우리가 일제에 대항하던 이러한 정신자세는 근본적으로 뜯어고쳐야 되는 것입니다. … 지금 우리 한국의 지식인 가운데, 인텔리 가운데는, 정부가 하는 일은 무조건 반대해야만, 그 사람이 아주 인텔리이고 지식인이고 애국자연합니다. 정부가 하는 일은 그네가 아무리 생각해도 옳다고 여럿이 있는 앞에서 이야기하였다가는「저 사람은 정부에 아부하는 사람이며 소위 요즘 말하는 사꾸라요, 저 사람은 무슨 정부의 앞잡이다」하는 이런 우리 한국의 인텔리들의 사고방식이 근본적으로 뜯어 고쳐지기 전에는 한국의 근대화라는 것은 어렵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학생들도 좀 얼굴을 보이기 때문에 내 좀 더 얘기를 하려 합니다. 학생들! 지금 정치인들이 국회에서 뭐라고 떠들면 내용도 모르고 덮어놓고 거리에 나와서 플래카드를 들고, 무슨 학교에서 성토대회도 하고,「무슨 정부 물러가라, 매국하는 정부 물러가라」하는 등 이런 철없는 짓도 하는데, 나는 학생제군들에게 솔직이 이 자리에서 얘기해 두거니와, 제군들이 앞으로 이 나라의 주인공이 되자면, 적어도 10년 내지 20년 후에야라만 제군들이 이 나라의 주인공이 되는 것입니다. 제군들의 시대가 오는 것입니다. 오늘 이때에 우리들 기성세대가 모든 것을 책임지고 여러분들 못지 않게 나라에 대한 것을 걱정하고 근심을 하고 노력을 하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잊어서는 안됩니다』 (1965년 5월 2일 진해 제 4 비료공장 준공식에서) 외세에 의존하는 자세, 원조나 받으려는 ‘거지 근성’을 버려야 한다고 박정희씨는 늘 역설했다. 연설에도 자주, 자조라는 단어가 많이 나온다. 김일성 연설에서 자주니 주체니 하는 단어가 나온 것이 훨씬 나중인 것을 보면 주체사상은 박정희씨의 생각을 표절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의원직을 내걸고 한일회담반대 투쟁을 이끈 윤보선, 정일형(鄭一亨), 정해영, 정성태, 윤제술, 김재광 의원 등이 민중당의 노선을 비판하고 탈당하여 新韓黨을 창당했다(1966년 3월 30일). 신한당은 창당과 동시에 윤보선을 총재 및 1967년 대통령 선거 후보로 선출했다. 민중당은 고민하기 시작했다. 신한당은 윤보선 후보가 있는 반면에 민중당은 가망이 없는 박순천 총재를 후보로 낼 수는 없었다. 1966년 가을이 되자 대통령 후보 문제는 민중당의 절박한 고민거리가 되었다. 결국 김영삼 원내총무가 나서서 유진오 전 고려대 총장을 대통령 후보로 영입하는 일을 추진하였다. 유진오는 10월 20일자로 민중당에 입당했다(유진오도 친일 경력이 있다). 1967년 2월 7일 민중당과 新韓黨이 통합하여 新民黨이 탄생하였다. 협상과정에서 유진오 총재-윤보선 대통령 후보로 합의를 보았다. 이렇듯 한국의 야당은 분열하더라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는 통합하는 모습을 보여왔다. 김대중은 신민당에서 정무위원 겸 대변인이 되었다. 1967년 6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씨와 윤보선 후보는 다시 대결했다. 박정희씨는 4월 15일 대통령 출마를 밝히는 연설을 하면서 자립에의 의지를 다시 한번 강조했다. 다음은 그 일부이다. 민족 주체성의 확립이나 자립은 말로서만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생산적 실천에서만 가능한 것이며, 더구나 현실과 동떨어진 원리적인 이론에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일하는 직장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을 나는 강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국민 여러분! 민족적 민주주의의 제1차적 목표는 자립에 있습니다. 자립이야말로 민족 주체성이 세워질 기반이며, 민주주의가 기착(寄着) 영생할 안주지인 것입니다. 민족자립이 없이 거기에 ‘자주’나, 무슨 ‘주의’ 나가 있을 수 없으며, 자립에 기반을 두지 않는 민족주체성이나 민주주의는 한갓 가식에 불과하다는 것이 나의 변함없는 신조입니다. 따라서 노력은 자립성취를 위해 집주(集注)되어 왔으며, 앞으로도 민족자립이 성취될 때까지는 그 노력의 방향에 변함이 없을 것입니다. 국민 여러분! 우리에게 자립의 날은 가까이 오고 있습니다. 국민 여러분의 주변을 살펴보십시오. 거의가 우리 손으로 만든 국산품들입니다. 나라 살림도 대부분 국민 여러분의 세금으로써 꾸려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 신용으로 얼마든지 외국에서 돈을 빌려 올 수도 있게 되었으며, 정부가 가진 외화도 여러분들에게 빌려 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남의 원조에 기대야 할 것은 극히 적은 부분으로 줄어들었습니다. 이 얼마나 금석지감이 있는 이야기들이겠습니까? 국민 여러분! 수년 전 내가 자립을 강조하고 민족적 민주주의를 제창했을 때, 많은 사람들은 우리에게 자립은 달성할 수 없는 먼 곳에만 있는 줄만 알고, 원조 없이는 곧 죽는 것으로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미국의 원조 액수가 얼만가에만 관심이 있고, 우리가 수출할 액수가 얼만가에는 생각조차 없었던 것이, 솔직히 말해서 그 때의 우리 정치인들의 태도가 아니었습니까? 이제 원조 액수보다 수출 액수에 관심을 쏟고 있는 것이 오늘의 한국 국민의 모습이 아닙니까? 그런 국민 여러분! 우리는 아직도, 더 많은 공장을 건설해서 국민 생활을 더욱 풍요케 해야 하겠으며, 더 많은 수출을 하여 경제적 완전자립을 성취해야 하겠으며, 더 많이 증산하고 기업농을 발전시켜 농가소득을 올려야 하겠습니다.… 우리 공화당이 내놓은 백 가지 공약사업도 중요하지마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내가 얼마나 일하고, 또 국민 여러분이 얼마나 일하는가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어떠한 당의 공약사업도 그 당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결국 국민 여러분들이 하는 것임을 나는 분명히 밝혀 두는 바입니다. 우리가 나갈 진로나 계획은 이미 우리가 정성을 다해 만든 제2차 5개년 계획에 다 담겨 있습니다. 문제는 얼마나 노력하고 일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나는 앞으로 4년 동안 더욱 분주히 지방을 다녀 국민 여러분을 격려할 것이며, 또 더욱 일할 것을 국민 앞에 약속합니다. 나는 일하는 대통령이 될 것을 국민 앞에 약속합니다.… 선거 운동 기간 중 박정희 후보는 지방 발전 공약은 일체 하지 않았다. 4월 18일 전주에서 2차 유세를 가진 박정희 후보는 경제 성장과 관련해서 자신의 청사진을 밝히면서 “이러한 일을 거짓말과 소란만 떠는 야당에 맡겨 잘해 나갈 것이라고 생각하는 분이 있으면 아무 생각 말고 야당에 표를 찍으시오. 그러나 박 대통령과 공화당만이 일을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나에게 표를 찍어주시오”라고 했다. 4월 21일 신민당 대변인 김대중은 “약 100억 원으로 예상되는 공화당 선거 자금의 출처를 밝히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김대중은 “대통령 선거운동비가 규정에 따라 2억 8천만 원으로 제한되고 있는데 공화당은 그 몇 십 배를 사용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4월 23일 대구 수성천 변에는 약 30만 명의 청중이 모여들었다. 박정희 후보는 연설을 끝내면서 “야당은 거짓말, 생떼, 중상모략을 하는 데 세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한다”고 비난했다. 4월 27일 광주에서 10만 청중이 몰린 가운데 박정희 후보는 야당의 주장을 반박했다. “요즘 민주주의가 사망했다고 하는데 ‘수염이 석자라도 먹어야 산다’고 배가 불러야 민주주의도 할 수 있는 겁니다” “야당 사람의 몸은 20세기 것이나 머리는 19세기 것입니다. 이 야당인(野黨人) 머리의 근대화가 우리나라 근대화의 첩경입니다.” “야당 유세에 관이 방해해서 청중이 안 모인다는데 우리 국민은 관이 방해하면 샛길로 해서라도 더 많이 모입니다.” 5월 3일 실시된 6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 후보는 윤보선 후보에 116만 표 차로 압승을 거두었다. 1967년 제 6대 대선 지역별 득표 현황 박정희 윤보선 서울 59만 5513 45.2% 67만 5716 51.2% 부산 33만 8135 64.2% 16만 4077 31.2% 경기 52만 5676 40.9% 67만 4964 52.6% 강원 42만 9589 57.1% 34만 9807 41.7% 충북 26만 9830 46.6% 25만 2469 41.2% 충남 48만 9516 45.3% 50만 5076 46.8% 전북 39만 2037 39.7% 45만 1611 48.7% 전남 65만 2847 42.0% 68만 2622 43.9% 경북 108만 3939 64.1% 44만 7082 26.4% 경남 83만 8426 68.6% 28만 1545 23.4% 제주 7만 3158 56.5% 4만 1572 32.1% 합계 568만 8666 51.4% 452만 6541 40.9% 5월 8일 정부는 7대 국회의원 선거일을 6월 8일로 공고했다. 11개 정당이 참가하여 702명이 입후보하였다. 이 선거는 내무부와 정보부가 선거에 관여했을 뿐 아니라 중앙 부처 관리와 국영기업체 임직원이 지역에 파견되었고 공화당은 막대한 자금을 살포하였다. 1967년 6월 8일 실시된 제 7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김대중은 공화당의 김병삼 후보와 대결, 치열한 선거전 끝에 승리했다. 김병삼(육사 3기) 후보의 요청으로 박정희씨는 5월 26일 목포에서 지원 유세를 했다. 이후 목포에서 선거전은 매우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선거 유세에서 공화당 김병삼 후보는 김대중이 낮에는 야당이고 밤에는 여당으로 부정한 돈을 많이 받았다고 비난했다. 김대중은 선거 유세 때「나를 죽이려 한다」「피」「죽음」등의 단어를 자주 써서 유권자들의 감정을 격앙시키는데 능하다. 이 선거전에서 김대중은『공화당 정권이 어떻게든 나를 죽이려 합니다. 여러분 내가 죽으면 내 시체에 꽃다발을 던지지 마십시오. 부정선거를 한 공화당 선거 본부를 먼저 때려부순 후 나의 장례식을 치러주십시오』라고 하면서 청중을 선동했다. 다음은 이 선거에서 김대중의 유세연설 중 일부이다(전문은 자료집 참조). 여러분! 정치인은 거짓말을 해서는 안됩니다. 내가 지난 번에 영국에 갔을 때 영국에서 유명한「킬러」사건으로 陸軍大臣 자리를 그만둔 사람의 얘기를 들었습니다. 이 사람이 陸軍大臣과 國會議員을 그만 둔 이유는 이 사람이 무슨 일개 여자하고 不義의 관계가 있었다고 해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이 사람이 그런 관계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없었다고 거짓말하는 자체가 정치인이 국민을 속인 거짓말 한 것이 국민에게 용납이 못되어서 長官과 國會議員을 그만 둔 것을 보았습니다. 정치인은 국민에게 거짓말을 해서는 안됩니다. 공화당후보인 金炳三씨는 첫마디부터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김병삼씨가 김구 선생 암살에 관련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데 대해서는 오직 여기서 더 말씀을 안하고 내가 좀 두고 보겠습니다. 공화당의 김병삼 후보가 말하기를「한일조약을 국회서 심의할 때에 야당의원들이 資金을 받았는데 그 자금을 김대중이도 받았다.」내가 미안한 말씀이지만 저번에도 여러분한테 이야기를 했는데 여러분 내 눈을 똑바로 보세요. 내 얼굴을 똑똑히 보십시오. 나는 내 장래에 대해서 큰 포부가 있습니다. 나는 돈 몇푼 받아 가지고 내 장래를 망칠 사람이 아닙니다. 나는 내 꿈이 너무도 크기 때문에 더러운 돈 같은 것은 아무리 고통스럽고 괴로워도 안중(眼中)에 없다는 것을 명백히 해둡니다. 다만 한가지 내가 말하겠습니다. 돈은 누가 벌었느냐. 목포시민이 다 아시다시피 내가 사업을 해서 억대의 재산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오늘날은 서울에 전부 팔아보았자 기백만원밖에 안 되는 집 한 채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만일 내가 이 이상의 돈을 벌었거나 축재를 했으면 국회의원후보를 내놓고 무조건 사퇴하겠습니다. 정치운동에 종사하는 중 억대의 재산을 탕진하고 기백만원밖에 없는 사람이 돈을 번 사람입니까? 또한 나는 여러분에게 여러분의 동정을 받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심지어 공화당에서는 이런 운동의 결과를 가지고 자신이 없기 때문에 야당의 후보자인 이 사람을 해치우려는 계획까지 가지고 있습니다. 이 사람을 살해하려는 계획까지 가지고 있습니다. 교통사고 내지는 음식물을 이용해서 해치운다는 계획까지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많은 시민으로부터 몸조심하라는 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이러한 계획이 있기 때문에 이런 점 이런 점은 조심하라는 연락이 왔습니다. 어떤 공화당 유력간부의 부인이 그런 계획을 듣고 자기가 하느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사람을 죽인다는 이 사실에 치가 떨려서 저한테 연락을 해 주면서 하다못해 어디 가서 물 한 모금 마시는데도 조심하라는 연락이 왔습니다. 여러분은 나를 버리지 말고 내 뒤에서 나를 도와주고 밀어 주고 그리해서 목포에서 부정선거 원흉들을 타도하고 3․15를 여기서 다시 못하게 하고, 목포에 제2의 崔仁圭가 나오는 것을 막도록 여러분께서 도와주실 것을 간곡히 부탁드리면서 제 말씀을 끝마치겠습니다. (1967년 5월 31일 목포 북교국민학교에서 열린 합동정견발표회에서) 시민 여러분, 나는 목포에서 자랐습니다. 북교국민학교를 나오고 목포상업고등학교를 나왔습니다. 나는 목포에서 사업을 했습니다. 많은 재산을 벌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부산 정치파동당시 이 나라의 정치가 이래서는 안되겠다고 해서 정치에 투신을 했습니다. 나는 3대 국회의원 선거시 목포에서 입후보했다가 관권을 앞세운 탄압으로 무참히도 패배했습니다. 4대는 목포출신 정중섭(鄭重燮)씨에게 양보하고 전라도 사람이 산설고 물설은 강원도로 가서, 인제에 가서 八割이 넘는 군인 유권자를 바라보고 출마를 했었습니다. 선거를 하는 도중에 자유당후보의 악독한 탄압을 받고 본인의 등록이 강제로 취소가 되었습니다. 대법원에 소송해 가지고 반년만에 이겼습니다. 다시 선거에 나왔더니 최인규, 송요찬 이런 사람들이 3․15 부정선거예행연습을 인제에서 했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나는 그 많던 재산을 다 탕진하고, 또는 형무소를 일곱 번이나 갔다오고 30대의 꽃같은 청춘을 한탄과 눈물속에 바치게 되었습니다. 김병삼씨가 지금 무어라고 말하든 간에 자기의 고향인 진도선거구를 버리고 목포로 안나올려고 굉장히 애쓴 것만은 사실입니다. 따지고 보면, 알고 보면 김병삼씨도 자기 본의 아니게 여기 나와서 싸움을 벌리고, 자기 본의 아니게 같이 전라도에서 자라난 두 친구가 대결해서 칼을 휘두르는 그런 입장에 있는 것입니다. 내 소원은 돈이 아닙니다. 2억도 싫고 20억도 싫고 200억도 싫습니다. 나는 또 하나의 소원이 있습니다. 박정권 아래에서 건설입네, 수출입네, 증산입네 하면서 몇 사람만 잘살게, 몇 사람만 부자되게, 몇 사람만 배떼기 부르게 만들고, 부익부… 재벌은 더욱 대재벌을 만들고 모든 국민은 헐벗는 가난뱅이요, 모든 국민은 더욱 빈익빈하게 만드는 이 특권경제를 타파하고, 내가 주장하고 우리 黨策으로까지 채택된 중산층과 노동대중을 중심으로 한 대중경제체제를 실현해서 나라의 혜택이 국가의 혜택이 여기에 앉아 계신 여러분들 모든 사람의 피부와 뼈끝까지 골고루 돌아갈 그러한 올바른 경제정책이 이 나라에서 실현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나의 절대적인 소원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올시다. 나는 내게 이 정권을 맡겨주면, 내가 이 정권을 가지면 오늘의 독재와 부패와 特定經濟를 타파하고 이 나라의 내일을 위해서, 이 나라 국민 전체가 잘살 수 있는 경제체제를 위해서 내가 이 국정을 바로잡을 수 있는 소신과 포부와 확고한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여러분에 대해서 그렇기 때문에 내가 그러한 자신과 포부를 갖고 있기 때문에 아까 김병삼씨가 여러 가지 말합디다마는 내 근본이 이렇고, 내 소원이 이렇기 때문에 절대로 부정에 가담하지를 않았습니다. 내 지금 6대 국회를 마친 이 마당에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해서…. 여러분 내 눈만을 보시오! 내가 더러운 그러한 국회의원으로서 국민을 배신한 일이 없다는 것을 여러분 앞에 똑똑히 말씀드릴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내 눈을 똑똑이 보십시요. 여러분! 나는 내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 내 목숨을 걸겠습니다. 내가 싸우다가 죽으면, 내가 싸우다가 목숨을 바치면 여러분은 내 시체에 꽃을 던지기 전에 먼저 제2의 최인규를 타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유달산이여! 너에게 넋이 있으면, 삼학도여! 너에게 정신이 있으면, 영산강이여! 네게 뜻이 있으면 목포에서 자라고 목포에서 커 가지고, 그리고 이 나라를 위해서 무엇인가 해보겠다는 이 金大中이를 지금 한 나라가 外地의 사람 목포 사람도 아닌 외지의 사람을 보내 가지고 나를 죽이고 나를 잡으려고 하니 유달산과 영산강과 삼학도가 넋이 있고 뜻이 있으면 나를 보호해 달라는 것을 목포시민 여러분과 같이 호소하고 싶습니다. (1967년 6월 4일 목포역전 광장에서 열린 합동정견발표회에서) 김대중의 선거 유세를 통해 대중이의 숨겨진 경력과 속마음을 엿볼 수 있다. 우선 김대중의 연설은 재산이 많던 1950년대에는 돈을 많이 쓰는 금권선거를 했다는 자백이다. 1954년 무소속으로 목포에서 출마할 때는 노동조합표를 믿었고 1958년 아무런 연고도 없는 인제에서 출마한 것은 군인표를 믿었기 때문이라는데 실제로는 재력을 믿고 출마한 모양이다. 김대중은 스스로 ‘돈 버는 일이 세상에서 제일 쉬운 일이라 생각하였다’ 고 자서전에 쓸 정도로 50년대에는 많이 벌었다. 그때 재산세나 소득세는 제대로 납부했는지 모르겠다. 대중이가 민주당에 입당하자마자 장면, 박순천 등 민주당 신파 지도부의 총애를 받은 이유도 이와 연관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형무소를 일곱 번이나 갔다 왔다는 데 그 이유가 무엇일까. “4대는 목포출신 정중섭(鄭重燮)씨에게 양보하고 전라도 사람이 산설고 물설은 강원도로 가서, 인제에 가서 八割이 넘는 군인 유권자를 바라보고 출마를 했었습니다.”라는 발언에서 거짓과 대중이의 속내가 들어난다. 당시 목포 지역구 현역 의원인 정중섭씨가 목포에서 재출마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런데 ‘정중섭씨에게 양보했다’는 대중이 말대로라면 무소속 낙선자였던 대중이가 민주당에 입당하여 현역의원을 제치고 공천을 받을 수 있었다는 것이 된다. 그야말로 말 같지 않은 소리다. 대중이는 ‘전라도 사람’ 운운하는데 대중이 머리 속에는 ‘나는 대한민국 사람’이라는 의식은 없고 오로지 ‘나는 전라도 사람’이란 생각만 들어있나 보다. 그런데 왜 일찌감치 본적을 서울 동교동으로 옮겼는지 모르겠다. 대중이는 여당 후보인 김병삼을 목포 출신도 아닌 외지인이라 하면서 표를 주지 말자고 선동한다. 김병삼은 전라도 진도 출신이고 목포가 고향은 아니다. 대중이 말대로 라면 ‘목포 사람’이 아닌 것이 결격 사항인 모양이다. 전라도마저 군단위로 쪼개져 투표를 해야 하는 모양이다. 대중이가 강원도 인제에서 출마했을 때 뭐라고 선거 유세했는지는 모르지만 ‘내가 외지인 전라도 사람으로 강원도 사람인 자유당 후보를 때려잡으려 왔으니 나에게 투표하지 마십시오’ 라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국회의원은 사람을 보고 뽑아야지 출신지를 보고 투표해서는 안됩니다’라고 했을 것이다. 대중이는 이후에 대선에 나설 때마다 대한민국에 와서 유세할 때는 언제나 ‘인물을 보고 뽑아야지 지역을 따져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다. 대중이는 공화당이 자신을 죽이려는 계획을 세웠다고 말했다. 대중이는 제보자가 누구인지, 제보받은 경위를 구체적으로 밝힐 수 있을까. 사실이 아니라면 엄청난 중상모략이고 공화당으로서는 너무도 화가 나 정말로 대중이를 죽이고 싶을 일이다. 대중이가 보기에 박정권의 경제개발은 국민을 굶주림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몇 사람만 배떼기 부르게’ 만들고 ‘모든 국민을 헐벗은 가난뱅이로 만드는 것’이 목표인 모양이다. 박 정권이 각별히 정성을 기울인 목포 선거에서 김대중이 승리한 큰 이유 중 하나가 선거 막판에 경향신문기자인 손충무(孫忠武)씨가 공화당 김병삼 후보가 백범 암살에 관계했음을 밝힌 덕분이었다. 그는 추적한 자료를 김대중에게 넘겼다. 김대중 편을 들어서기보다는 백범 암살에 관계한 자가 당선되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서였다. 공화당도 헌병출신의 김병삼이 백범암살에 관계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는 공천을 후회했으나 이미 때는 늦은 뒤였다(손충무씨는 전두환 정권 시절 김대중 구명과 석방에 적지 않은 역할을 하기도 했다.「인사이드 월드」발행인이었던 손충무씨는 1998년에 김대중 명예훼손죄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춘천 교도소에 복역중이다). 이 선거운동 기간 중 김대중의 선거전략을 이끈 사람은 조직참모 엄창록이었다. 엄창록은 선거운동사상 전설적인 인물이다. 함경도 원산 출신으로 원산사범학교를 중퇴했다. 남로당원이었던 엄창록은 강원도 인제에 머무르다 김대중을 우연히 만나 선거참모가 되었다. 엄창록은 점조직과 흑색선거전략을 선거에 종횡무진 활용했다. 김대중은 그를 중용했으며, 그의 활동을 무제한으로 지원했다(공화당은 1971년에 그를 영입하여 대통령 선거에 활용했다. 1987년 가을 민정당에서 그를 찾자 엄창록은 양 김이 동시 출마했으므로 승부는 정해진 것이라고 말했다. 1988년 1월 3일 사망). 1961년 강원도 인제 보궐 선거를 승리로 이끈 이래 1963년 목포선거에 이어 3번째 김대중의 선거를 맡은 엄창록은 막강한 행정력이 동원된 67년 선거에서도 김대중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가 인제 선거 이래 수립․실천한 선거전략의 개요는 다음과 같다. ○ 흑색 선전술의 예 - 야당 운동원이 양담배를 물고 거드름을 피우며 여당 후보를 지지하라고 권유한다. 유권자들에게는 값싼 담배를 피우라고 내민다. 여당 후보에 대한 반발을 유발한다. - 야당 운동원이 극소액을 봉투에 담아 여당 후보의 이름으로 밤중에 돌린다. - 야당 운동원이 여당 후보의 이름으로 고무신 같은 선물을 돌린 뒤 다음날 일제히 “딴 집에 갈 게 잘못 전달됐다”며 회수해 간다. 역시 철저히 여당 후보에 대한 반감을 유발한다. - 돈 많은 여당 후보의 식당 초청 막걸리 대접에 빈털터리 야당 후보가 맞서는 방법도 있다. 가령 야당 운동원이 여당 후보의 이름으로 수백명의 유권자를 특정 음식점으로 초청, 헛걸음을 한 유권자들의 격분을 유발한다. ○ 조직관리 방법 - 후보는 누구나 조직원이 자금을 정직하게 쓰고 성실히 유권자 접촉을 했느냐에 신경을 쓴다. 예컨대 10명의 조직원에게 각각 10명씩의 유권자 접촉을 지시할 때마다 반드시 유령유권자를 한 두 명씩 끼워 내려보낸다. 제대로 뛴 조직원은 유령인을 보고하게 되고 놀다 돌아온 조직원은 “10명이나 만나느라 땀깨나 뺐다” 고 으시댄다. -선거 때마다 후보는 여야 양쪽에 양다리를 걸치고 돈을 우려내는 2중 스파이 때문에 애를 먹는다. A가 공화․신민 후보 양쪽을 오가며 돈을 뜯을 경우 어느 날 밤 A의 집 대문에 커다란 ×표를 그려 놓곤 사람을 넣어 “공화당 쪽에선 쓸모없는 이중간첩들을 표시해서 돈을 주지 말라고 한 것”이라고 귀띰한다. 화가 난 A는 두 번 다시 공화당에 얼씬거리지 않고 신민당 후보만을 응원하게 된다. 1967년 6월 8일의 목포선거는 김대중의 연설과 엄창록의 조직력이 결합한 것이었다. 김대중과 엄창록의 작전은 ‘흑색선전’으로 매도당할 수 있는데 선거 게릴라 전술의 고전으로 남아 있다(흑색선전의 본질은 중상모략과 침소봉대이다). 나중에는 이 선거 전략 책자를 박 정권 측에서도 입수해 공부했다. 김대중은 목포 선거에서서 승리했으나 신민당은 참패했다. 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공화당은 129석을 차지하여 전체 의석 175석의 3분의 2를 넘는 압승을 거두었다. 극심한 여촌야도 현상이 나타나 공화당은 서울 14개 지역구에서 1석만을 얻었다. 신민당은 28석을 얻었고 기타 군소 정당은 몰락했다. 신민당은 “유령 유권자 조작, 관권과 폭력에 의한 공포분위기 조성, 공개투표․대리투표 등으로 부정을 자행한 6․8 선거는 완전 범죄적 선거”라고 주장하면서 전면 재선거를 요구했다. 6월 13일 박정희 씨는 대중이의 정치인으로의 행태와 선거 수법을 질타했다. 명망있는 변호사로 박 정권에 참여한 정구영씨의 회고록에서 박정희씨의 견해가 나온다. 그때 근 두 시간 간곡하게 진언을 했어. 대통령도 여러 가지 보고 느낀 점을 얘기해. 지나친 타락 선거였다는 점도 인정해. 그렇지만 야당의 주장은 또 뭐냐는 거야. 전면 재선거를 하라는데, 그거 정권 내놓으라는 소리 아닙니까, 그러는 거야. 「제가 이번 선거에서 몇 사람은 국회에 들어오지 못하기를 바래서 특히 그 지역의 공화당 후보를 특별 지원했습니다. 그 몇 사람은 내게 반대한다 해서 그런 것 아닙니다. 6대 국회 4년 동안 보니까 그 사람들은 이면에선 뒷거래다 뭐다 해서 제 실속을 차립니다. 그런데 표면에서는 저만이 애국자고 깨끗한 사람인양 행세합니다. 차관 승인 같은 것도 양해한다고 뒤에서 업자에게 약속하고 정작 공식회의에선 내가 언제 그랬더냐는 듯 시치미를 떼고 특혜 아니냐고 짐짓 때리고 그럽니다. 이런 거짓말장이들이 국민한테 도리어 인기가 있고 표를 더 받습니다. 이번 선거에서 여당만 돈을 썼습니까. 야당에도 여당 못지 않게 돈을 쓴 사람이 있습니다. 김대중 같은 사람 선거 운동 한 것은 온통 마타도어 흑색선전입니다. 당해낼 재간이 없어요. 잔꾀와 속임수로 선거를 치러요. 그래 놓고 부정선거다, 재선거하라는 소리 이 사람이 앞장서서 하고 있습니다. 어느 선거나 어느 정도의 타락과 부정은 있기 마련입니다. 우리 같은 형편에선 더욱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이번 선거에서 투표 부정, 개표 부정은 없었지 않습니까.」그러는 거야.「선생님 말씀 충분히 이해는 합니다만 그 방식으로 이 문제 해결은 않겠습니다」대통령이 아주 단호하게 잘라 말해. (『정구영 회고록, 실패한 도전』중앙일보사, 1987, 제 10장 67년 선거와 그 후유증P174~175) 박정희씨는 대중이를 겉과 속이 다른 자로 판단하고 경멸했다. 역대 정권 중 어느 정권도 ‘세계가 인정하는’ 민주투사이며 인권운동가로 ‘유력한 노벨 평화상 후보자’인 대중이를 ‘민주투사’나 ‘인권운동가’로 평가하지 않았다. ‘모리배’ ‘중상모략의 화신’ ‘행동하는 흑심’ 또는 ‘선동정치가’로 여겼다. 역대 정권들이 모두 무식해서 ‘위대한 사람’을 못 알아본 것인가. 김영삼은 민주당 구파, 김대중은 민주당 신파 계열이다. 구파의 대표인물은 김성수, 신익희, 조병옥으로 이어진다. 좌파로부터 우익이라고 비난받았지만 스스로 민족진영이라고 자부하는 사람들이었다. 신파는 장면, 이상철, 오위영, 현석호, 박순천, 김영선 등이 중심인물이었다. 장면이 일제하에서 모범 교장이었듯이 거의 모두가 일제 관료출신들이다. 이들은 이승만 대통령을 추종하는 원내자유당으로 출발했다가 이범석으로 대표되는 원외자유당과의 주도권 경쟁에서 밀리자 원내 그룹으로 남았다. 그러다가 사사오입 개헌을 계기로 일어난 야당운동에 따라 이들 장면 그룹이 유일 야당이었던 민국당에 합류해 민주당을 창당했다. 이들 구파와 신파는 기질도 사고방식도 달랐다. 구파와 신파는 개인적으로 교분을 나누는 일도 드물었다. 김영삼과 김대중은 2년 정도 그러한 민주당에 같이 있었지만 교분이 없었다. 1965년 통합야당 민중당이 출범하고 김영삼 의원이 원내총무가 되었다. 대변인이 된 김대중은 빈번하게 김영삼 총무의 상도동 자택을 방문했다. 김대중은 김영삼 원내총무에게 국회 상임분과위 배정에서 재정경제위를 간절히 청탁했다(전통적으로 재정경제위원회는 국회의원들이 가장 선호하는 분과 위원회이다. 이 상임위에 속하면 돈이 잘 들어온다고 한다). 김영삼과 김대중이 같은 정당에서 경쟁자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67년의 7대 국회 때이다. 김대중은 소장파 의원의 지지를 얻어 원내총무가 되려 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야당의 원내총무는 의원총회에서 자유 경선으로 선출했다. 김영삼 의원은 전임총무였다. 1967년 11월 신민당 의원총회는 원내총무 선출투표를 했다. 42명의 의원이 참가한 투표 결과는 김영삼 22표, 김대중 9표, 김재광 9표, 기권 2표로 김영삼이 1차 투표에서 과반수 득표로 다시 원내 총무가 되었다. 1960년대 후반 북한의 대남노선은 ‘군사화’ 로 특징 지워진다. 북한은 1970년대의 이른바 ‘결정적 시기’ 조성을 위하여 ‘혁명적 대사변을 주동적으로 맞이하자’는 구호아래 모든 정책을 군사력 강화에 집중하였다. 대남정책을 이전의 ‘지하당 노선’에서 ‘유격전’으로 전환하였다. 1967년 5월 노동당 4기 제 15차 전원회의에서 경제건설 중시파로 알려진 대남사업 총국장 이효순이 대남사업 실패에 책임을 지고 사퇴하고 후임에는 허봉학이 임명되었다. 이때부터 대남공작기구가 확대되고 특수부대가 창설, 확대되었다. 8월 12일 북한은 민족보위성 정찰국 직속의 대남 공작 특수 부대를 창설했다. ‘124군 부대’란 명칭을 가진 이 부대는 2400명으로 구성되었고 300명씩 8개 기지로 나누어 유격 훈련을 받았다. 각 기지는 남한의 1개 도(道)를 담당했는데 제6 기지는 서울과 경기도를 담당했다. 또한 1967년 12월 16일 최고인민회의 제4기 1차 회의에서는 남한혁명화를 강조하는 ‘10대 정강’을 발표하였다. 1967년을 넘어서 베트남 전에서 난관에 봉착하자 미국은 한국군의 추가파병을 요청하였다. 북한은 이 같은 미국의 의도를 최대한 저지하기 위해 남한에 게릴라 파견을 적극 추진하였다. 1967년 한 해에만 휴전선과 남한 후방에서 218건의 교전이 있었다. 북한군은 228명이 전사하고 57명이 포로가 되었으며 한국군과 미군은 131명이 전사, 294명이 부상했다. 한국 측 민간인 사상자는 22명, 부상 53명이었다. 1967년에는 한 달 평균 10건 이상의 무장 공비 침투 사건 또는 간첩단 사건이 신문에 실렸다. 신문사에서는 중급 기사 수준으로 취급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1월 21일 북한 특공대의 청와대 기습사건(유일한 생존자는 김신조)이 일어났고 미국의 미지근한 태도로 박정희씨의 미국에 대한 불신은 심화되었다. 1968년 1월 21일 밤 10시경 서울 시내에 31명의 무장 특공대가 침입, 긴급 출동한 군․경찰과 교전이 벌어졌다. 북한 특공대는 서울 세검정에서 청운 2동쪽으로 침입하려다가 비상근무 중이던 경찰관의 임시검문소에서 검문을 받게되자 수류탄을 던지는 등 공격하여, 교전이 벌어졌다. 대간첩작전 본부는 군과 경찰, 헬리콥터 등의 장비를 동원, 밤새 수색작전을 벌였다. 무장 특공대는 분산하여 파주와 고양방면으로 도주하였다. 결국 군경합동부대는 1월 30일까지 27명을 사살하고(자폭 1명 포함) 1명을 생포하였다. 남한 민간인 7명이 사망하고 국군 23명이 전사했다. 북한 특공대가 이들이 청와대로부터 1km 가 채 안되는 지점까지 접근하였던 것은 큰 충격이었다. 이 사건에 대해 박정희 씨 자신이 분개하여 북진보복을 생각할 정도였다. 사건 당일 밤 늦게 주한 미 대사 윌리엄 포터를 불러 미국의 즉각적인 보복을 요구했다. 박정희 씨는 흥분한 목소리로 “대사! 북한군 30명이 쳐들어와 나를 죽이려 했소.”라고 말했다. 북한의 도발에 효과적으로 대응을 하지 못하고 끌려가다가는 한국과 미국은 계속해서 당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면서 박 대통령은 “북을 공격해야겠소. 이틀이면 평양에 닿을 수 있다고 생각하오”라고 결의를 표명했다. 포터 대사는 “하시려거든 혼자 하십시오”라고 받아넘기고 청와대를 나왔으나 내심 몹시 걱정했다. 실제로는 이 당시 한국은 북한을 공격할 역량을 갖추고 못했었다. 한국측의 기대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청와대 습격 사건에 대응하는 아무런 조처도 취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박 대통령의 단독 보복책을 경계했다. 이틀 후인 1월 23일에 미국의 전자 첩보함인 푸에블로(Pueblo) 호가 승무원 83명과 함께 북한에 피납되었다(푸에블로호 함장으로서 납북되었다가 석방된 로이드 부커 씨는 82년 10월 4일 한국에서의 기자 회견에서 “당시 북한은 푸에블로 호를 1․21 사건에 대한 보복 공격을 가하기 위해 출동한 한국의 해군 함정으로 오인해 나포했으리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미국은 승무원의 석방을 위해 박정권을 빼돌리고 비밀협상을 벌였다. 미국과 북한과의 비밀교섭이 진행되고 있던 68년 2월 6일, 정일권 국무총리는 포터 대사와 본 스틸 유엔군 사령관을 불러 청와대 기습 사건을 우선적으로 다루지 않는 데 대해 항의하고 자위권 행사도 불사하겠다는 강경한 결의를 전달했다. 이와 때를 같이 하여 국회에서도 1․21 사건을 국가 안전을 위협하는 중대 사건으로 단정, 한국 단독으로라도 단호한 조처를 취할 것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한국정부의 강경한 자세에 미국의 존슨 대통령은 2월 11일 사이러스 밴스(카터 행정부 시절 국무장관 역임) 특사를 파견하여 한국 정부를 누그러뜨리려 했다. 밴스 특사가 존슨 대통령에게 받은 지시는 간단했다. “박이 북한을 공격하지 못하도록 하라(Do what is necessary to stop Park from invading North Korea.)” 미국 대통령 전용기를 타고 2월 12일 서울에 도착한 밴스 특사는 박 대통령에게 1억 달러의 추가 군사 원조와 M16 소총 공장의 건설을 약속했다. M16 공장은 박정권이 1년에 걸쳐 미국에 요구해온 것이었으나 미국은 시간만 끌고 있었다. 밴스의 약속에 박 대통령도 많이 누그러져 “한국 단독으로 북을 공격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다. 미국측에서 밴스 특사 를 파견하고 방위 지원을 약속하는 등 미국이 저자세를 취한 것도 사실은 한국이 당시 월남에 5만명 규모의 병력을 파견하여 미국을 도와주고 있었던 객관적 현실 때문이었다. 박정권은 미국이 한국을 계속해서 무시한다면 파월 병력을 철수하겠다는 뜻을 미국에 시사했었다. 그러나 미국은 실제로 입장이 변한 것은 아니었다. 본 스틸 주한미군 사령관 겸 유엔군 사령관은 한국군의 단독 행동을 막기 위해서, 한국군에 대한 유류 공급을 일시 중단하는 등 사전 견제 조치를 취했다. 1967년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에서 참패한 신민당은 1968년에 파벌 난립의 해를 보냈다. 윤보선도 박순천도 은퇴한 신민당은 유진오 총재를 중심으로 새출발했다. 1968년 5월의 전당대회에서 부총재 자리를 놓고 계보간의 경쟁이 치열했다. 이때 김대중은 유진오-유진산 라인에 합류했다. 유진산 의원을 수석부총재로 밀 테니 원내총무 자리를 보장하라는 것이 김대중의 합류조건이었다. 이 조건을 보장하기 위해 의원총회에서 선출하도록 되어 있던 원내총무를 총재가 지명하고 의원총회에서 인준투표를 하도록 전당대회에서 당헌까지 고쳤다. 전당대회 후 유진오 총재는 새 원내총무로 김대중을 지명하기 위해 의원총회 인준 가능성을 타진했는데 의원들의 반응이 좋지 않았다. 김대중은 의정활동은 활발히 했으나 동료 의원들에게 신뢰를 얻지 못했다. 유진오 총재가 정성태 의원으로 교체하려 하자 김대중이 반발했다. 김대중은 유진산 수석 부총재를 찾아가 약속을 지키라고 했고, 유진산은 유진오 총재에게 압력을 가했다. 결국 유진오 총재는 김대중을 원내총무로 지명했다. 6월 5일 신민당 의원 총회에서 인준투표 결과는 찬성 16, 반대 23, 기권 2표로 과반수에 미달해 부결되었다. 김대중에 대한 인준 거부는 유진오 총재에게도 타격이었지만 김대중에게는 더 큰 충격이었다. 유진오 총재는 며칠 뒤 중립적인 정성태 의원을 원내총무로 지명해 가까스로 의원총회의 인준을 받았다. 만약 정성태 의원이 원내총무직을 잘 수행했더라면 위계질서나, 선후배 관계를 유별나게 중요시했던 야당의 보수적 질서가 더 오래 유지됐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성태 원내총무는 당의 효과적인 원내전략과 의원 통솔에 실패해 68년 11월 스스로 총무직을 사임했다. 김영삼 의원이 다시 원내총무가 되어 1969년에 신민당의 삼선개헌 반대투쟁을 이끌었다. 1968년 7월 20일 중앙정보부는 목포 앞 임자도(荏子島)를 거점으로 하여 활동해 온 북괴간첩단을 적발, 118명 중 간첩 27명을 구속하여 검찰로 보냈다고 발표했다. 발표문에 따르면 지하당 전남도책(全南道責)인 정태홍(鄭泰洪, 정태묵이라고도 한다) 등 간첩단은 1962~1967년 사이 북한을 오가며 1,845만원의 공작금을 받아 지하당을 조직, 활동했다. 정태홍은 45세로서 전남 목포시 출생, 전 남로당원으로서 국가보안법 위반죄로 징역 7년을 선고받고 복역 중 6․25 전쟁으로 탈옥, 북한에 4회 왕복, 노동당 입당, 공작금 800만원 수령, 지하당 포섭 활동을 벌였다. 김대중의 선거 참모 최영길(崔永吉)이 1968년 임자도(荏子島) 간첩사건의 주역인 것이 우연히 드러나, 김대중은 큰 위기에 몰렸다.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은 김대중을 세종 호텔로 불러 직접 만난 후에 무혐의 처리했다. 김형욱은 회고록에서 이 장면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나는 이른 점심을 하러 간다는 말을 남기고 열한시경 사무실을 나섰다. 몇분 안에 세종호텔에 도착하여「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중앙정보부가 특별조사를 위해 확보하고 있던 특수방 앞에 서서 방 번호를 확인하고 노크를 했다. 거기에는 이미 김대중이 와 있었다. 우리는 간단히 그리고 사무적으로 악수를 교환하였다. 『나, 김대중의원과 단독으로 얘기 할 것이 있으니까 자네들은 나가 있도록.』 나는 옆에 배석하고 있던 조사관들에게 명령하였다. 김대중은 매우 긴장해 있었다. 그는 내가 왜 그에게 점심식사를 같이하자고 초대했는지를 잘 알고 있는 듯이 보였다. 『사실은 오늘 초대한 것은 점심식사를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최영길에 대한 것을 몇 가지 다짐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어서입니다. 괜스리 중앙정보부로 호출을 하면 귀찮은 일이 생길 것이고 김의원의 정치적 장래에 본의 아닌 흠도 생길 것 같아서.』 『그 점, 고맙게 생각합니다. 김부장님.』 『최영길로부터 무슨 이상한 낌새를 느낀 적은 없었습니까? 무슨 특별한 부탁이나 반정부 발언을 하도록 종용받았다거나.』 『김부장께서 잘 아시다시피 반정부발언이라면 이 김대중이가 대한민국에서 두번째가라면 서러워할 만큼 많이 한 사람입니다. 구태여 최영길의 도움이 없었더라도 말입니다. 나도 정치가로서 대망을 가진 사나이요. 최영길이가 그따위 조직에 가담했다는 걸 사전에 알았다면 내가 그를 중용했다는 것이 될 법이나 한 일이겠읍니까.』 『그건 내가 아오. 그러길래 나도 김의원을 다른 정치인과 달리 취급하고 있오. 하나 이번 문제가 된 임자도 사건은 북한이 한국 내 야당을 선동하려는 공작을 그 중심목표의 하나로 하고 있오. 더구나 김의원과 같이 인기있는 진보적 야당 중진은 그들에게 매력적인 목표물이라는 것은 아셔야 할 것이오.』 『알겠습니다. 그러나 그 논법대로 하자면 대한민국에서 야당하는 사람은 죄다 그 사람들의 마수에 걸려둘 수도 있다는 얘기가 되겠지요. 결과적으로 보아 내가 최영길을 선거 참모로 썼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었습니다. 김부장께서 나까지 한사코 연루시키려 든다면 고생 좀 하게 되리라고 각오는 하고 있습니다.』 『내가 김의원을 연루시킬 것 같소?』 『그거야 김부장께서 더 잘 아시겠지요. 한가지만 더 말씀드리자면 최영길이가 그런 지하당 조직에 관계됐다는 걸 내가 알았다면 그가 아무리 수완이 좋고 조직능력이 있다손치더라도 나는 그를 선거참모로 쓰지 않았을 겁니다. 지금 대한민국의 대공사찰망이 어떻습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누가 감히 김부장의 어마어마한 정보망을 속이려 들겠오이까? 쓸데없는 위험을 감수하면서 말입니다.』 『허허, 나를 은근히 비행기 태우시는군. 아무튼 나는 개인적으로 이 나라에 김의원같은 야당 정치인도 있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장래가 촉망되는 야당정치인에게 이만한 일로 결정적인 상처를 안겨주고 싶은 생각은 없소이다. 』 『감사합니다. 그 말씀.』 『그러나 위치가 위치인 만큼 앞으로 사람을 쓰실 때는 각별히 조심을 하셔야 할 것이오. 김의원의 대성을 기원합니다.』 『고맙습니다. 그런 말씀을 다른 사람도 아니고 김형욱 정보부장으로부터 들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그럼 나는 떠나겠오. 곧 우리 조사관들이 간단한 질문을 할터이니 최영길의 배후에 대해서는 방금 나에게 말씀하신대로 그저 모른다고만 진술하시오. 그 사람들이 별 트집을 잡거나 무례를 범하지 않도록 내 얘기해 두고 가리다.』 『잘 알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김부장님. 중앙정보부 최고사령탑 안에 나를 개인적으로 이해해 주는 분이 있다는 것이 놀라울 뿐입니다.』 나는 11시 40분 경 거기를 떠났다. (『김형욱 회고록』제 3권 전주: 아침 출판사, 1985, P245~246) 1980년 5월 20일 김대중이 군 검찰에서 작성한 진술서에는 다음과 같이 서술되어 있다. 임자도 간첩 사건의 주범 정태묵(鄭泰黙)은 본인의 목포상업학교 1년 선배이며 선거 기간에도 2~3차례 만나서 본인의 선거에 협력하는 태도를 표시한 바 있음. 그는 광복 직후의 좌익 활동을 청산하고 가업(家業)인 염전에만 전념하는 줄 알았지 그런 엄청난 일을 하는 줄 몰랐음. 그는 매일 시내의 다방에 나오고 거리를 활보하고 다녀서 일반 시민하고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음. 同 사건이 나자 하루는 당시 정보부의 김형욱 부장의 보좌관이 와서 출두를 요청하므로 시청 앞 뉴 코리아 호텔에서 김 부장을 만났음. 김 부장은 “임자도 사건의 주범 정태묵을 조사 중 김 선생의 이름이 나왔는데 사건과는 전혀 관련이 없으나, 일단 이름이 거명된 이상 서류 정리상 조서를 안 받을 수 없으니 미안하지만 참고인 조서에 응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음. 그리하여 선거 기간 중 타인과 동석으로 2~3차례 만났으며 선거 후도 서울서 1차 만난 것을 사실대로 진술해 주었음. 이것은 후일에 간접적으로 들은 이야기이나 정태묵은 정보부에서 취조받던 중 진술하기를 “선거 기간 중의 김대중의 연설을 들으니 반공 정신이 투철하여 전혀 다른 말을 꺼낼 여지가 없는 것으로 보고 아예 공작하려는 생각을 갖지 않았었다”고 했다는 말을 들었음. 대중이는 박 정권이 교통사고를 위장해 자신을 죽이려 한다고 1967년 선거 유세에서 떠들었다. 그토록 악랄한 박 정권이 왜 임자도 간첩단 사건에 대중이를 연좌시키지 않았을까. 이에 대한 대중이의 변명을 듣고 싶다. 북한은 1968년 10월 30일, 11월 1일, 11월 2일 3차에 걸쳐 120여명의 대규모 무장 게릴라를 울진, 삼척 지구에 침투시켜 한반도에 긴장을 고조시켰다. 2개월간의 소탕작전 끝에 1968년 12월 28일 대간첩작전 본부는 “울진, 삼척지구 무장간첩 소탕작전의 결과 간첩 110명을 사살하고 5명을 생포, 2명은 자수하여 모두 117명을 소탕했다” 고 발표했다. 1968년은 휴전 이후 남북간의 무력 충돌이 가장 심했던 해이다. 휴전선에서 236건, 후방에서 120건 등 모두 356건의 무력 충돌이 일어났다. 북한군은 321명이 전사, 63명이 포로로 잡혔으며 한국군과 미군 162명이 전사, 294명이 부상했다. 한국의 민간인 사망자도 35명에 이르렀다. 1969년 4월 미국의 EC-121 정찰기가 북한에 의해 격추되자 박 정권은 미국에 대한 불신감이 더욱 커졌다. 미국 정부가 북한에 대한 보복을 거절하자 닉슨 행정부의 강력한 재보장에도 불구하고 박정희씨는 동맹국 미국의 방위력에 대해 더욱 의심을 품게 되었다. 12월 11일에는 강릉에서 서울로 비행하던 KAL 여객기가 납북되는 등 북한의 도발은 끊이지 않았다. 승객 47명 승무원 4명 등 모두 51명이 납북되었고 1970년 2월 39명만 귀환하였다. |
첫댓글 그래도 기네요. 한참을 봐도 어려운 이야기네요...
시골시인님, 이 글의 필자 이윤섭 선생과의 약속이 있어서 중단하기가 곤란합니다. 그래서 제목을 '옛 자료"로 바꾸기로 했습니다. 양해바랍니다. 그럼...
요사이 저는 우울증이 도져서 참으로 힘듭니다. 우울증과 알콜은 불가분의 관계인 듯... 오늘부터 또 다시 금주를 하려고 합니다. 이 우울증은 20대 초에 걸렸고 폭주를 한 30년 이상 한 죄값으로 제 이빨들이 엉망진창입니다. 저절로 빠진 이들이 현재 11개이고 빠지려고 꿈틀거리는 게 여러개 더 있고 정상적인 것은 2,3개입니다.
그래서 사람 만나는 걸 기피합니다. 이 이유 때문에 모임에 나가지 않았습니다. 저는 서울 강북구 수유리에 사니 찾아 오시는 분은 만나겠습니다. 019-299-97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