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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봉서방*
김정위 교수닙의 중동사를 정리한 것으로 이슬람의 역사를 자힐리야 시대, 우마이야조, 압바시야조, 맘룩시대, 오스만 제국의 6시대로 나누어 정리한 것입니다.
Ⅰ.자힐리야 시대
1.아라비아 반도의 상황
이슬람 발생 이전의 아라비아 반도에는 베두윈과 오아시스의 정착민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둘 다 부족 단위로 공동생활을 영위하였다. 부족에는 부족장, 점술사, 전시 지도자 및 중재자 등의 요직이 있었으며, 이들은 부족 구성원 회의(Majlis)에서 선임되었다. 부족장은 특별한 권한을 누렸다기보다 동등한 구성원 가운데 제일인자의 역할을 맡아 회의를 주재하고, 다른 부족과의 교섭에 있어서는 부족을 대표할 정도의 역할이었다. 그는 덕망이 높고, 나이가 많은 구성원 중에서 주로 선출되었다.
점술사는 부족의 제사와 축제 및 장례 등의 의식을 관장하였고, 전시 지도자는 다른 부족과의 전쟁, 천재 지변 등 위기 시에 대처하는 역할로써 늙은 부족장의 지휘보다는 군사적 식견과 활동력이 좋은 중년의 구성원이 민첩하게 사태에 대응할 수 있었기 때문에 주로 선임되었다. 중재자는 부족 구성원 간의 분규를 조정하여 해결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으나 중요한 문제는 부족 구성원 회의에서 토의하여 최종적으로 결정하였다. 물론 이러한 결정은 모두 관행(Sunna)을 중요시한 것이다.
베두윈은 넓은 사막을 배회하면서 초원을 찾아 방목하여 생활을 꾸려 나갔으나, 도시의 정착민은 농경 생활을 영위하거나 상업 활동을 통하여 생계를 이어 나갔다. 오아시스의 도시 가운데는 메카와 메디나(당시는 야스리브)가 가장 두드러졌다. 메카는 예멘과 시리아, 이라크와 에티오피아를 잇는 중간지점에 위치하여 상업 도시로서 크게 이름이 나 있었고, 또 인근 부족의 부족신인 偶像을 모시는 종교적인 순례지의 역할도 하였다. 즉, 메카는 예멘에서 실어 온 향료를 각처에 공급하였고, 또 보다 개명한 지역의 물을 가져와 아라비아 반도에 보급하는 기능을 가진 문명의 발상지였다.
한편, 그 주민인 쿠라이쉬(Quraish) 부족은 교역 활동을 통하여 협동력, 조직력 및 자제력을 함양하였으며, 베두윈의 용맹성과 결합하여 후에 이슬람 제국의 창건에 그 원동력이 되었다.
2.이슬람의 가르침
이 곳에서 에언자 무함마드(570∼632)는 570년경에 메카의 정주 부족인 쿠라이쉬의 하쉼家에서 태어났다. 그는 40세가 되던 해에 예언자로 자처하면서 우상 숭배의 그릇됨을 설파하고, 唯一神 알라를 믿을 것을 동료 아랍인들에게 포교하였다. 그는 아랍부족 간의 끊임없는 분교는 血緣으로 뭉쳐진 단위 부족의 우상숭배사상에 있다고 보고, 그것을 타파하는 길은 혈연을 초월한 종교 사상, 즉 유일신을 믿음으로써 아랍族의 통일이 가능하다고 생각한 것 같다.
10여 년에 걸친 메카에서의 포교활동에도 불구하고 성공을 거두지 못한 무함마드는, 결국 수백 명의 추종자를 이끌고 622년에 메디나로 이주하였다. 이 해가 후에 이슬람력의 원년이 된 것이다.메디나에서 무함마드는 이슬람 공동체(움마)를 만들었는데, 이것이 아라비아 반도에서 최초로 생성된 理念 공동체이다.
무함마드는 이 공동체를 세움으로써 단위 부족의 요직인 부족장, 점술사, 중재자 및 전시 지도자의 기능을 자신의 한 몸에 집중시켜 이를 확대, 발전시킨 것이다. 즉, 신의 使聖으로 계시를 받음으로써 공동체의 우두머리와 점술사, 중재자의 기능을 확대 계승하게 된 것이며, 또한 군 사령관으로서 비신자와의 전쟁 수행을 통하여 자기의 권위를 부족의 전시 지도자보다 한층 더 높이 확립하였다.
그가 세운 종교는 유일신 알라에 절대 순종한다는 뜻으로 이슬람(Islam)이라고 명했다. 이 속에서 무함마드는 고대 셈족의 종교적 전통을 계승, 발전시켰다. 쿠란은 구약 성서의 예언자 가운데서 아담, 노아, 아브라함, 이삭, 요셉, 요나, 엘리자 등을 예언자로 받아들였으나, 아모스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특히, 아브라함은 무함마드의 이상적인 선구자로 보았다. 아브라함은 이슬람의 성지 메카에 있는 大聖院 카바의 창건자로 쿠란 14장에 높이 평가되고 있으며, 또 창세기, 노아의 홍수, 소돔의 파괴 등 헤브루족의 이야기도 쿠란에 간단히 번안소개되고 있다. 신약 성서의 예언자와 사도 가운데서는 자카리아, 세례 요한, 마리아 및 예수 등이 등장하고 있으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인정되지 않고 있다. 단지 마리아가 처녀의 몸으로 그를 잉태한 것은 절대신이 만든 기적으로 받아들여지교 있다(쿠란 21장 91절).
이슬람의 교의 가운데 첫번째이며 가장 중요한 것은 유대교, 기독교의 유일신 사상을 더욱 간결하게 표현하여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은 없다(La ilaha illa-l-Lah)."라고 한 것으로, 이 구적은 신자의 입에 가장 많이 오르내리고 있는 것이다. 즉, 애기가 태어날 때 부모의 첫마디가 바로 이 구절이며, 삶을 이어가는 동안이나 무덤으로 들어가는 순간까지 되풀이되는 것이 바로 이 구절이다. 이 교의는 쿠란 112장에 다음과 같이 부연되어 있다.
하나님은 유일자이시고
영생자임을 증언하라.
그는 낳아지지도 낳지도 않으시며,
또 그에 버금가는 것은 없느니라.
이 첫째 교의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이 둘째 번 교의이다. 즉, 무함마드는 하나님의 사성이다(Mu ammad n ras l Allah). 이 두 구절은 이슬람의 핵심신조로서 샤하다(Shahada, 證言)라고 불린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무함마드는 오직 신의 말씀을 전달하도록 신탁받은 한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무슬림은 스스로 일신론자임을 자처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종교처럼 교조의 이름에 따라 무함마드 교도라고 불리는 것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다.
그들의 종교는 이슬람이고 이의 추종자는 무슬림(Muslim, 신의 뜻에 순종하는 자)이라는 사실이다. 즉, 하나님을 믿지 무함마드를 믿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연유한다. 물론, 민간 신앙에서는 신의 使聖에게 신적인 색깔을 칠하고 있으나, 신학상으로 그는 어디까지나 인간인 것이다.
세째 번은 쿠란은 신의 최종적이고 가장 완벽한 말씀을 수록하고 있다는 믿음으로, 무함마드에게 전해진 모든 계시, 즉 태초의 말씀이 빠짐없이 이 성전 속에 복사되어 있다는 것이다. 무함마드가 최후의 예언자이며, 쿠란은 최종 계시라는 사실을 강조함으로써 아브라함, 모제스, 예수 등 다른 신의 使聖보다 그를 더욱 높이는 것이다. 네째 번은 천사에 대한 믿음이다. 천사는 계시를 전해 주는 가브리엘 대천사를 首長으로 位階層을 이루고 있다고 한다.
다섯째와 여섯째가 각각 내세와 인간의 운명은 정해져 있다는 定命에 대한 믿음이다. 물론, 이 정명에 대해서는 각 종파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세계 무슬림의 80%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수니파를 비롯하여 여러 종파가 이를 따르고 있다. 이것을 흔히 六信이라 한다.
그러나, 이러한 믿음의 집을 뒷받쳐 주는 기둥이 필요하다. 이슬람은 믿음의 실행을 중요시하여 육신에 추가하여 '신앙의 다섯 기둥'을 제시하고 있는데, 이것을 흔히 五行이라 한다. 이 五行은 신앙의 고백, 예배, 단식, 종교세, 순례이다. 신앙의 고백은 신의 유일성과 무함마드는 使聖임을, 즉 샤하다를 公言하는 것이다. 누구나 이것을 공언하면 이론상으로는 무슬림이 되는 것이다. 하루 다섯 번의 예배 시간을 알릴 때에도 이슬람 성원에서는 이 샤하다를 크게 낭송하는 것이다. 예배는 단독으로 올릴 수도 있으나 성원에서 식을 올리는 것을 장려하고 있으며, 금요일에는 성원에서 집단 예배를 본다.
단식은 음력인 이슬람력 9월 한 달 동안, 매일 해가 떠서부터 질 때가지 먹지도, 마시지도, 피우지도 못하는 일체의 금욕 생활을 의미한다. 물론 기독교의 성경에는 40일간 모제스와 예수가 단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아마도 셈 족이 신앙에는 단식이 일찍부터 신앙생활에 중요한 몫을 차지한 것 같다.
종교세는 쿠란에서는 기도와 함께 독실성의 표현으로 묘사되고 있다. 고대 셈족에게는 십일조가 있었으며, 남부 아라비아족도 그들의 신에게 십일조를 마친 후에 향료를 시장에 내다 팔았다고 한다. 그러나 무슬림 국가에서는 이것이 개인 자산, 농산물, 상품 등에 부과하는 정규 세금으로 발전하였다. 즉, 소득의 2.3%에 해당하는 이 종교세는 정부관리들이 징수하여 전쟁포로 석방, 가난한 사람의 구제, 공공 사업의 추진 등에 사용할 수가 있다. 오늘날 대부분의 무슬림 지역에서 이 종교세는 강제성을 띠지 않고 자발적으로 양심에 따라 성원에 받치게 되어 있다.
순례는 이슬람 발생 이전의 아랍 관습 중에서 가장 많이 수용된 것으로 이 때문에 일신론적 측면에서 자매 종교인 유대교와 기독교로부터 크게 달라지게 된 것이다. 즉, 카바를 일곱 번 돈다든가, 검은 돌에의 입맞춤, 잠잠이란 샘물을 마시고 악마에게 돌을 던지는 행위 및 양이나 염소 등의 제물을 바치는 것 등은 그대로 답습되어 이슬람화하였다.
쿠란에는 신체 건강한 남녀 성인 신자 모두에게 적어도 일생에 한번 순례하는 것을 의무로 규정하고 있는데, 이 순례는 매년 이슬람력 12월 10일을 전후하여 행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다른 기간에도 메카를 방문하여 순례를 할 수 있으나, 이 지정된 날자의 순례보다 격이 떨어지는 것이다.
순례는 무슬림 사회의 연대 의식을 해마다 새롭게 다짐하고, 무슬림 간의 형제애를 고취시키는 작용을 하고 있다. 이것은 다른 종교에서 거의 그 예를 찾기가 힘들 정도다. 메카의 흙냄새를 같이 마시며, 인종과 국적을 초월한 무슬림들, 즉 아랍인, 페르시아인, 터키인, 파키스탄인, 인도네시아인, 또 흑인, 백인, 황인, 그리고 남녀 노소, 빈부를 가리지 않고 모두 함께 기도하며 같은 의식을 행하는 것이다. 이들 무슬림들은 아랍어에서 유래한 무슬림의 인사말과 규격화된 예배 의식에 공동 참여하여 새로운 종의 교의와 학파 사상을 교류함으로써 신속한 전달을 도모하는 것이다. 그 좋은 예가 18세기 중엽에 아라비아 반도에서 발생하여 무슬림 세계를 풍미한 와하비 운동(초창기의 순수한 이슬람으로 돌아가자는 일종의 개혁 운동)이다.
무함마드의 창의성은 혈연 관계에 바탕을 둔 부족 사회를 종교 교의와 사회 조직의 바탕을 두게 하여 혈연적 형제애를 종교적 형제애로 대체한 데 있는 것이다. 종교적 형제애와 신 앞에서 신자의 평등성을 강조함으로써 이론상으로는 성직자 계층이나 중앙 집권적 권위가 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이슬람 공동체의 안전과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 종교적, 세속적 권위가 필요했던 것이다. 집단 예배시의 인도자는 전시에도 사령관이 될 수 있다. 즉, 정치와 종교는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합일되는 것이다. 예언자 무함마드 자신이 포교의 목적으로 지상에 와서 그의 당대에 국가 원수의 지위에 올랐다. 그가 세운 공동체(움마)는 바로 지상에서 천국으 건설하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슬람은 개인을 위한 종교일 뿐만 아니라 공동체를 위한 종교인 것이다.
이 공동체의 지도자는 자신의 사후에 영생을 누리는 것도 목적이지만, 모든 구성원을 영생으로 이끌 의무를 담당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국가 공동체는 지상에서의 천국을 건설함과 동시에 각 구성원위 사후에도 천국을 보장하는 선교 기굴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또, 이 국가 공동체의 임무는 비무슬림의 개종을 도모하고, 그들의 침략을 방어하는 데 있음은 물론이다. 즉, 모든 무슬림들은 聖戰(Jih d)에 참여할 의무가 있으며, 이 때에 희생당하면 곧 천당에 거의 자동적으로 들어가 영생을 누리게 되고, 그 곳에서 특권적 지위를 가진다고 믿는 것이다.
3.무함마드의 후계자와 정복 사업
교조 무함마드가 622년에 메카에서 메디나로 이주한 후, 메카와의 세 번에 걸친 전쟁 끝에 무슬림군은 630년에 이 곳을 무혈점령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와 함께, 이슬람 공동체는 히자즈(메카와 메디나 지역)에서 아랍인이 세운 최초의 방대한 국가로 등장하게 되었다. 그 후, 이 국가는 빠른 속도로 성장·발전했으나, 632년에 교조가 타계함으로써 최초의 위기를 맞게 되었다. 그러나 원로들의 합의로 예언자의 오랜 동료이며 장인인 아부 바크르(Ab Bakr, 632∼634)가 그 후계자(할리파, 또는 칼리프)로 등극하니, 곧 칼리프制의 시작이다. 그는 신의 계시를 받는 예언자의 기능을 제외하고, 종전까지 무함마드가 누렸던 모든 권한을 계승하였다.
아부 바크르는 교조의 사후에 일어난 반란을 진압한 뒤, 그 기세로 아라비아 반도 전역의 통일에 박차를 가했다. 이 위업에 공헌한 장군이 할리드 이븐 알 왈리드(Khalid Ibn al-Walid)로, 그는 이 공로로 '알라의 칼(Saif All h)'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쿠란의 가르침에 따라 무슬림 형제애가 고양되고, 교우 간의 전쟁은 엄격히 금지되었으며로, 그 돌출구는 자연히 반도 밖의 세계, 즉 이라크와 시리아로 향하게 되었다. 물론, 이 두 지역은 각각 당시 중근동의 대강국이었던 페르시아의 사산 제국과 비잔틴 제국의 영역이었다. 따라서, 무슬림들은 애초에 이 두 강국을 정복하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으며, 단지 베두윈들의 관습인 약탈을 하기 위해 이 두 지역을 침략한 것이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이러한 가운데 아부 바크르가 사망하고 그 후임으로 오마르(Omar, 634∼644)가 칼리프를 계승하여 이슬람 제국의 실질적인 건설자가 되었다.
약탈적인 탐색전에 성공을 거둔 아랍 무슬림군은 두 늙은 제국의 헛점을 알게 되어 본격적인 정복의 길로 매진하였다. 즉, 할리드 이븐 왈리드가 거느리는 이라크 원정대와 아부 우바이다(Abu 'Ubaida)가 거느리는 시리아 원정대가 조직 동원된 것이다. 그러나, 시리아를 잃게 될 위험을 직감한 비잔틴의 헤라클리우스 황제(Heraclius, 610∼641)는 싸움을 독려하기 위해 스스로 이 곳까지 거동하였고, 전투는 그의 동생이 직접 지휘하였다.
아부 우바이다군의 진격이 저지당하게 되자, 메디나의 칼리프는 할리드의 이라크 원정대를 시리아로 급파하였다. 할리다는 18일간에 약 800km의 오아시스도 없는 사막을 가로질러 시리아에 도착하는 놀라운 기민성을 보여, 戰史에 기적적 행군으로 그 이름을 떨치고 있다. 635년에 포위당한 다마스쿠스는 실질적인 전투도 없이 항복하였다. 그러나, 결정적 전투는 636년 야르무크江 연안에서 일어났다. 결국 5만 병력의 비잔틴군은 그 반밖에 되지 않는 무슬림군에 패하였으며, 그 결과 시리아는 640년까지 완전히 무슬림의 소유물이 되었다.
시리아를 발판으로 한 무슬림군은 암르 이븐 알 아스(Amr Ibn Al-' s)의 지휘로 당시 비잔틴 제국의 곡창이었던 이집트로 쳐들어갔다. 639년 12월에 경계선을 넘어 당시의 수도 알렉산드리아로 쳐들어가 비잔틴 제국의 이집트 총독 겸 대주교에게 무슬림이 비무슬림을 대하는 방식으로 전통적이 된 세가지 조건, 즉 이슬람, 조공, 또는 칼을 제시하였다. 결국 2년에 걸친 전쟁 끝에 이 곡창은 무슬림의 손에 들어갔다. 그 후, 비옥한 이집트를 회복하려는 비잔틴의 노력은 여러 번 있었으나 물거품이 되었고, 이 곳은 나일강 상류와 리비아로 진격하는 무슬림의 발판이 되었다.
한편, 할리드 장군이 시리아 전선으로 이동한 후 새로운 이라크 전선 사령관으로 부임한 사드 이븐 아비 와카스(Sad Ibn Abl Waqqas)는 메디나의 칼리프로부터 증원군을 받아 결정적 순간을 준비하였다. 이 예언자의 교우는 페르시아 황제 야즈다지르드(Yazdajird)가 보낸 루스탐(Rustam)이 거느리는 대군을 637년 5월에 히라 근처의 카디시야(Qadisiya)에서 패퇴시키고, 다음 달에 수도 크테시폰(아랍어로 Mad 'in)을 함락하였다. 이 때에 노획한 전리품은 엄청난 거승로 은화마도 90억 개에 달했다고 한다.
그 후, 642년의 네하완드(Nehawand) 전투에서도 아랍군은 계속 승리하여 이라크를 평정하게 되었다. 야즈다지르드 황제는 계속 쫓겨다니다가, 결국 중앙 아시아의 마르브에서 한 방앗간 주인에게 651년에 암살당하였다. 이와 함께 약 1200년간의 전통을 이어 온 페르시아 제국은 멸망하였다. 이 제국은 약 800년 후에 이슬람의 옷을 입고 재흥하지만, 이미 그 성격은 너무나 달랐다.
불과 10년 안팎위 짧은 기간에, 페르시아에서 이집트에 이르는 대제국을 창건한 것은 바로 기적이었다. 이 기적에 대한 전통적 무슬림의 설명은 독신한 신앙심에 두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종교로서의 이슬람이라기 보다 국가로서의 이슬람이 성공을 거둔 것이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일부 구미 역사학자들은 인구의 팽창으로 메마른 아라비아 반도에서의 생활조건이 어려워지자, 반도 밖으로 무장 이민한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즉, 신바빌로니아 제국을 세운 셈계의 아시리아족을 시점으로 아모리족(Amorites), 가나안족(Canaanites), 아람족(Aramaeans), 헤브루족 등이 차례로 본고장인 아라비아 반도에서 중근동의 여러 지역에서 이주했다는 사실에서, 아랍족의 대이동도 결국 그 연속으로 보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설명에도 그 한계성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아랍족의 주체적 요인과 함께 외부적 요인을 들어 설명을 보완하는 것이 통례로 되어 있다. 즉, 비잔틴과 페르시아의 사산 제국은 수백년 동안의 다툼 때문에 국력이 크게 손상되었고, 또 양국의 국경선 근방의 민생고는 이루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시련을 겪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아랍족의 주체적 요인과 함께 외부적 요인을 들어 설명을 보완하는 것이 통례로 되어 있다. 즉, 비잔틴과 페르시아의 사산제국은 수백 년 동안의 다툼 때문에 국력이 크게 손상되었고, 또 양국의 국경선 근방의 민생고는 이루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시련을 겪고 있었다는 것이다. 더구나, 비잔틴 제국의 내부에는 정통파와 시리아, 이집트 등의 단성론자, 또한 메소포타미아의 네스토리아파 사이에는 총과 싸움이 그치지 않았다.
페르시아의 사산조에서도 전통적 조로아스터 교의는 다른 마니교와 마즈닥교 등의 출현으로 종교적 분규가 잇달아 일어나 국가의 기강이 흔들려 있었다. 결국, 아랍인의 대제국 창건에느 주체적 결속력과 외부적 조건이 성숙되어 있었다는 논리이다.
이슬람 신앙의 기치 아래 단결된 아랍족에 대정복에도 불구하고 내부적으로는 칼리프 자리를 놓고 갈등이 일어났고, 또 정복지 거주 아랍인과 아라비아 반도 거주 아랍인 사이,, 즉 중앙 정부와 지방 정부의 알력 등이 얽히게 된 것이다.
우마르는 오직 정복에만 여념이 없었으므로, 중앙과 지방의 경제적 이해관계에서 파생하는 알력의 원인이 누적되고 있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가 페르시아 출신의 노예에게 피살된 후, 오스만('Othm n, 644∼656)이 칼리프로 추대되었다. 제3대 칼리프는 본래 부유한 상인으로, 메카의 쿠라이쉬 부족 가운데 지배적 위치에 있었던 우마이야 씨족 출신이다. 이 씨족은 무함마드의 이슬람에 처음부터 적대적이었으나, 메카가 함락된 후 마지못해 이슬람에 개종했다. 그리하여 제1, 2대 칼리프 선언시에는 그 지위가 약화된 관계로 사회적, 경제적 비중에 맞는 발언권은 얻지 못할 것으로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오스만은 씨족의 의사와는 반대로 일찍부터 무함마드를 추종하여 신임받게 되어 그의 가까운 교우가 된 것이다. 그리하여, 2대 칼리프의 사망을 좋은 기회로 삼아, 이 씨족은 오스만을 적극적으로 밀어주기 시작한 것이다. 칼리프 오스만은 방대한 영역을 통치하기 위하여 자기가 신임할 수 있는 친족을 지방의 총독으로 임명하였다. 이 때문에 그는 반대파로부터 족벌주의자라는 비난을 받게 되었고, 또 쿠란의 正本을 편집하게 하여 이와 조금이라도 어긋나는 것은 모조리 불태웠다. 이것이 또 일부 독실한 신자의 분노를 쌓게 하였다.
중앙 정부의 이익을 대표하는 총독의 세력 강화는 결국 중앙 집권적 권력형태를 초래하였다. 이 세력에는 메카와 케디나의 오아시스 부족 출신들이 대부분이었다. 이 때문에 정복의 제일선에서 싸운 베두윈 부족 출신의 전사들은 불만이 많았다. 결국 정복지 거주 전사들의 불만이 오스만의 살해로 치닫게 되었다. 그 뒤를 이어 예언자의 사촌이며 사위인 ("Ali, 656∼661)가 칼리프에 선임되었으나, 복수를 외치는 오스만 지지 세력과의 충돌은 불가피하게 되었다.
오스만의 지지세력을 대표하는 시리아 총독인 무아위야(Mu' wiyah)의 기치 아래에는 시리아인, 非아랍계의 新무슬림, 정권에서 소외된 남부 아랍인이 모였고, 알리의 깃발 아래에는 히자즈 거주민과 그가 취임 즉시 메디나에서 쿠파로 수도를 옮긴 후 그 주민이 집결하였다. 양군은 657년 7월에 유프라테스강의 서쪽 언덕에서 대진한 결과 무승부로 끝났다.. 이것이 무슬림 사이에 일어난 제1차 내란이었다.
전쟁으로도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공개적인 장소에서 양 파의 협상이 시작되었으며, 이 협상 자체로 칼리프 알리와 총독인 무아위야의 지위는 같은 수준으로 되어 전자에게 불리한 형평이었다. 협상의 결과로 해결책을 제시할 수 없었으므로, 결국 이슬람 공동체는 동쪽은 알리, 서쪽은 무아위야의 지지세력으로 양분되었다. 이러한 분단 상태 중에 알리가 암살당하여 제국은 무아위야 아래 다시 통일되었다.
Ⅱ.우마이야朝(661∼750)
1.무아위야(Mu' wiya, 661∼680)
무아위야가 칼리프에 즉위했을 때의 정세는 평온하지 않았다. 제국의 행정기구가 마비되어 도처에서 무정부적이고 유목민적인 질서가 재발하여 종교적인 유대의식이 약화되고, 민생은 불안정한 상태에 빠졌다. 초창기에 칼리프 체제를 결합시켰던 神政적인 결속은 오스만의 죽음과 그에 뒤따른 내란 및 메디나에서 다마스쿠스로의 천도 등으로 돌이킬 수 없이 파괴되었다. 종교적 권위를 누리고 있었던 소수 상류층은 패배를 맛보면서 신앙심에 대한 신용이 떨어졌다. 따라서 무아위야의 과제는 제국의 융합을 위한 새로운 바탕을 발견하는 것이었다. 이슬람의 神政制에서 아랍부족의 세습적인 신분제에 바탕을 둔 군주제로 출발하는 데에서 그는 이 문제의 해결책을 찾았다.
우마이야조를 뒤엎은 압바시야조 시대에 집필한 후대의 무슬림 역사학자들은 무아위야와 그 후계자에게 칼리프라는 칭호를 붙이지 않았다. 그들은 한결같이 칼리프 알리가 죽은 후에는 무아위야와 그 후계자의 왕정제가 있었을 뿐이었다고 언급하였다. 그러나 오마르 2세(717∼720)만은 독실한 신자였기 때문에 유일한 예외였다. 칼리프 체제는 750년에 압바시야조가 등장할 때까지 중단된 상태에 있었다고 그들은 믿었다. 물론 우마이야조에 세속화의 죄를 씌우는 데도 일리는 있으나 그들의 견해는 과장된 감이 있다.
무아위야와 후계자들은 칼리프의 정치적, 경제적 기능을 강조하여 종교적 요소는 비록 부차적으로 취급했지만 깊은 관심을 두었다. 그들은 비잔틴 제국에 대하여 끊임없는 전쟁을 통하여 이슬람의 용사, 聖戰의 지도자로 자처하며 교묘하게 무슬림들에게 충성심을 바치도록 하였다.
아랍 제국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중앙 집권화가 절실히 필요하였는데, 이 중앙 집권화의 과정에는 몇가지 조치가 요구되었다. 그 첫째가 수도를 시리아로 옮기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시리아는 우마이야조 90년간 제국의 중심부로 남게 되었다. 시리아를 정복할 때 우두머리로 들어와서 사막에다 근거를 세운 우마이야 씨족은 안전을 위주로 했기 때문에 사막의 언저리에 그들의 요새를 세웠다. 그들이 세우고 꾸민 수많은 건축물은 지금도 그들의 정책과 문화에 대한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무아위야는 비잔틴 제국의 동부 수도였던 다마스쿠스에 터전을 잡았다. 이 도시는 시리아의 중심부에 위치해 있고, 또 오랜 기간 문화적, 행정적 전통을 가지고 있어서 거창한 제국의 수도로서 광대한 지역을 통제할 조건을 구비하고 있었다.
악화된 종교적 유대 관계를 대신할 새로운 도덕적 유대는 아랍족이 받아들인 국가원수에 대한 충성심이다. 무아위야가 행사하는 권력은 본직적으로 아랍적이었다. 이 권력은 종교에서 나온 것도 아니고, 또 당시까지는 군주적인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이슬람이 등장하기 전에 존재한 부족장의 권위가 재생되어 확대, 강화된 것이다. 비잔틴의 역사가 테오파네스(Theophanes, 817 사망)는 무아위야를 왕이나 황제로 기술하지 않고 제일통령으로 지칭하였다. 이것은 무아위야가 행사한 권력의 성격을 보면 결코 부당한 표현이 아니다.
그의 정부기구 가운데에서 주된 기관은 부족장의 협의체인 슈라(Sh r )였다. 이 슈라는 칼리프나 지방 총독에 의하여 소집되며, 상담역과 권력 집행의 두 가지 기능을 맡고 있었다. 또, 각 부족의 협의체와 결합되어 있는 기권으로 우푸드(Wuf d)가 있었는데, 이 기관은 각 부족이 중앙 협의체나 지방 총독의 협의체에 보내는 대표자로써 구성되었으며, 각 부족의 자발적인 동의와 충성심을 바탕으로 형성된 것이다. 이 두 기곤이 무아위야의 통치를 정당화한 것이다.
무아위야는 거의 통수권을 지니고 있지 않았으나, 그의 개인적인 위신과 능력을 통하여 설득함으로써 그의 의사를 관철시키는데 매우 능란하였다. 특히 지방에서 그의 권위는 임명딘 총독을 통하여 행사되었다. 각 주의 총독중에 要職은 말썽많고 통치하기 어려운 오늘날의 이란을 포함한 이라크 총독이었다. 당시 무아위야가 보낸 이 지역 총독의 이름은 지야드 이븐 아비히(Ziyad Ibn Abihi, 그 아비의 아들 지야드, 즉 아버지의 이름을 모르는 것을 비꼬아 사생아임을 풍자함)였다.
우마이야 칼리프朝의 행정기구는 페르시아의 사산 제국과 비잔틴 제국의 계승국가로서 옛 기구를 그대로 지니고 있었다. 그 이유는 지배칭 아랍인들은 아직 보다 나은 중앙과 지방의 행정체제를 몰랐기 때문이다. 따라서, 옛 페르시아 영토에는 페르시아식, 옛 비잔틴 영토에는 비잔틴식의 행정체제가 변함없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무아위야 자신은 시리아 출신의 기독교도인 비서실장을 거느린 것이 정통 칼리프 시대와 달랐다.
정권의 계승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이슬람 역사에서 무아위야가 택할 수 있는 先例란 오직 선거와 내란 뿐이었다. 그러나 전자는 이미 기능이 마비되었고, 후자는 회피해야 하였다. 또, 세습제에 따른 계승방법은 아직 아랍인의 의식구조에는 너무나 생소한 것이기 때문에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무아위야는 그의 특색있는 시대와 상황에 대한 감각으로 절충안을 찾았다. 즉, 그와 다마스쿠스 슈라가 공동 의논하여 아들 야지드를 후계자로 지명한 것이다. 이 과정은 부족적인 협의 과정이 그 기능을 발휘하는 좋은 본보기였다. 이 결정은 또 우푸드를 통하여 각 부족의 협의에 의하여 인준되고 난 수에 공포되었다. 이에 대한 반대는 주로 설득과 뇌물로 무마시켰고, 부득이 한 경우에는 무력으로 극복하였다.
무아위야의 통치시기에 영토는 점차 확대되어 갔다. 중앙 아시아 방면에서 아랍군은 헤라트, 카불 및 부하라를 점령하였고, 북아프리카에서는 꾸준히 西進하여 대서양 연안에 도달하였다. 비잔틴 제국에 대한 전쟁은 수그러지지 않고 계속되었다. 더구나 아랍 해군도 급속히 성장하여 무아위야가 아직 시리아 주지사로 있었던 시기인 655년에 벌어진 '돛대 전쟁'에서 비잔틴 해군에 대해 최초이 승리를 거두었다.
그가 재위하는 동안 감행된 가장 커다란 군사작전은 670년에 착수한 콘스탄티노플 공격이었다. 비록 아랍군이 이 수도이 남부지역을 수년간 장악하는데 성공하였으나, 결국 무아위야가 죽음으로 해서 포기되었으며, 비잔틴 제국과의 전쟁도 그의 죽음과 함께 중단되었다. 그러나, 이 전쟁은 무아위야의 종교적인 위신을 높여 주었고, 또 아랍군의 출현, 사기 및 경험을 쌓는 이중의 효과가 있었다.
2.제2차 내란과 압둘 말리크(Abdul Malik, 685∼705)의 등장
680년에, 무아위야의 아들은 야지드 1세(Yazid Ⅰ, 680∼683)는 별다른 어려움 없이 칼리프가 되었다. 그는 아버지를 닮아 유능하고 재치있는 통치자였으나, 그의 불행은 이라크 내에서 일어난 사건 때문에 시작되었다. 이라크 총독인 지야드와 그의 아들이며 후계자인 우바이둘라('Ubaidull h)의 난폭한 통치 때문에 가뜩이나 시리아의 優位政策에 불만을 품고 있던 이라크 거주 아랍인의 감정은 크게 악화되어 제4대 정통 칼리프 알리의 둘째 아들 후세인에게 지지를 보냈다.
680년에 후세인과 그의 추종자들이 남부 이라크의 카르빌라(Karbal ') 전쟁에서 우마이야군에 패하여 학살당하였다. 이 사건으로 인한 즉각적인 정치적 반응은 심각하지 않았으나, 시간의 흐름과 함께 점차 엄청난 결과를 초래하였다. 즉, 칼리프에 대한 알리파의 칼리프 계승권 주창자가 극적으로 죽게 되자, 그의 죽음은 곧 순교로 떠받들어졌다. 그 결과, 우마이야조에 대한 반대세력은 알리의 자손을 그 구심점으로 내세워 그들만이 칼리프의 정당한 계승자라고 주장하게 되었다.
683년에 야지드가 어린 아들 무아위야 2세(Mu' wiya Ⅱ)를 후계자로 남기고 죽자 불안과 이위기의 시기가 뒤따르고, 심지어 아랍부족 간의 대규모적인 분쟁이 일어날 기미가 보이기 시작하였다. 더구나, 즉위 6개월 만에 우마위야 2세가 사망하자 칼리프의 공백기가 나타났고, 곧이어 제2차 내란이 일어났다.
아라비아에서는 한때 칼리프 알리에 반대하여 싸운 주바이르(Zubair)의 아들인 압둘라(Abdullah)가 스스로 칼리프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보수적인 종교 세력과 반 우마이야 세력을 등에 없어 매우 강력했으나, 제국의 중앙州인 시리아에 진출하여 자신의 세력을 확립하지 않고 메카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결국 좋은 기회를 놓쳤다.
시리아 자체 내에서도 아랍부족들 사이에 공공연한 무력대결이 일어났다. 684년에 일어난 마르즈 라히트(Marj R hit) 전쟁에서 우마이야족이 반대 세력에 승리를 거두어 부족전쟁은 시리아에서 일단 끝이 났다. 마르완(Marw n, 684∼685)은 우마이야족 가운데 무아위야家와는 다른 계통에 속했지만, 칼리프로 선임되어 시리아와 이집트를 장악하였다. 그는 죽기 전에 자기 아들 압둘 말리크를 후계자로 삼는 데 성공하였다. 이 칼리프 말리크의 어깨에 제국을 다시 통일하여 중앙 정부의 권위를 회복할 책임이 지워졌다. 더구나, 그에게 무아위야 1세의 부족장적 질서가 무너짐과 아울러 대두한 새로운 국가 권력 체계를 창조할 의무마저 지워졌다.
제2차 내란의 양상은 제1차 내란 때보다 더 복잡하게 얽혀 있었고, 더욱 위험스러웠다. 제국의 분열 경향이 뚜렷이 나타나고, 또 심화되어 갔다. 이 원인은 주로 경제적 문제 때문으로 보이나, 우마이야조 시대의 경제 상황은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아랍의 史料는 시대적으로 너무 늦거나, 후대의 상황을 前代로 전가시키거나, 또는 우마이야조와 그 업적에 대한 노골적인 반감 때문에 문제의 핵심이 너무나 흐려져 기술되어 있는 것 같다. 우마이야조의 경제 정책을 체계적으로 설명하기에는 그들 자신이 너무나 先例와 제도를 경시하여 시행하였기 때문에 더욱 이해하기 힘들다.
3.아랍인의 지위
우마이야 사회는 아랍족의 우위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따라서, 아랍족은 민족이라기보다 오히려 출생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세습적인 계급(Caste)을 형성하였다. 그들은 개인적인 종교세(Zak t), 즉 소득의 40분의 1외에는 어떤 세금도 지불하지 않았고, 자기 소유의 토지에 대한 세금도 없었다. 그들만이 兵營도시인 암사르(Am r)에 살 수 있는 특권이 있었다. 또, 아랍족은 국정의 사무담당 기관인 디완(Diw n)의 人名符에 기재된 戰士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연금이나 수당을 전장에서 나오는 약탈물이나 정복된 지역에서 나오는 세입 가운데서 물자나 현금의 형태로 지급받았다. 이 디완 제도는 오마르 1세(634∼644)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이슬람 호교론자는 주장한다.
우마이야조의 등장 전에 이미 아랍 사람들은 아라비아 반도 밖의 토지를 소유하기 시작하였다. 무아위야 1세의 통치 때부터 이러한 아랍 지주의 수는 꾸준히 늘어났다. 이들은 비아랍 지주로부터 토지를 구매하거나, 칼리프나 총독으로부터 하사받는 방법으로 토지를 획득하였다. 이 아랍 제국 정부는 비잔틴과 페르시아 제국으로부터 광대한 영토를 물려받았고, 여기에 양 제국의 귀족이나 지주들이 버리고 피난간 엄청난 토지가 아랍 정부의 재량 아래 들어오게 되었다. 이와 같은 토지와 황무지, 미경작지는 이슬람법에 따르면 마와트(Maw t, 死地, 소유주가 없는 토지)로 취급되었다.
칼리프는 이러한 토지의 경작과 여기서 나오는 세금을 용이하게 징수하기 위해 친척이나 저명한 아랍인에게 貸與하기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카타이(Qat 'i')로 알려졌다. 이 대여 제도는 비잔틴에서 본받은 것으로, 토지를 대여받은 사람은 일정한 기간 내에 토지를 경작하고, 세금을 징수하여 정부에 바쳐야 할 의무가 있었다. 비아랍 지주나 농민들은 페르시아나 비잔틴 통치 아래서 내는 세금액을 지불하였으나, 이들 아랍-무슬림 지주는 토지세(khar j)로 10분의 1의 세, 즉 우스르('ushr)만을 지불하였다.
이 카타이는 그 수가 급속히 증가하여 옥토의 대부분이 이에 해당하였다. 이 토지는 점차 賣買가 자유롭게 되어 실질적으로는 사유 재산으로 변하였으며, 카타이의 소유자는 대체로 토지가 있는 곳에 살지 않고 암사르나 수도에 살면서 현지으 소작인이나 반노예 노동으로 이를 경작하였다.
정복된 지역에 정착한 아랍인의 수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으나, 현지 거주민의 수에 비하여 얼마되지 않는 소수였음이 확실하다.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의 아랍 정착자 수는 730년경에 약 25만명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이들의 대다수는 군인, 관료들이었다. 그러나, 이슬람의 정복 이전에 아랍인들이 이주한 지역에는 그 수가 비교적 높은 편이었다. 이집트의 사료에 의하면 우마이야조의 왕자는 대부분이 대지주였고, 그 중의 몇몇은 이러한 토지의 개발에 열의를 보여서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이븐 아미르(Ibn Amir)라는 유명한 지주는 '자기 재산을 방어하다 죽은 사람도 순교자'라는 하디스(Hadith)를 전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하디스의 신빙성은 매우 의심스러우나, 여기서 아랍 상류계급 내에서도 지주라는 새로운 계층이 형성되어 지배층의 일부로 등장했음을 엿볼 수 있다.
아랍 정복자가 모은 거대한 자산은 투자나 무역에서 나온 것 같지 않다. 더구나, 메카의 거상들도 자기 직업을 버리고 상급 전사로 활약했음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우마이야조의 칼리프와 부유한 상류인사들은 도시에서 호화롭게 살게 되었고, 또 건물 장식품 및 의류에 많은 돈을 소비하였다. 당시의 경제는 금융 제도가 지배적이었으나, 물물교환도 상당히 활발하였다. 군인과 관료들의 봉급은 현금과 물품으로 지급되었으며, 세금도 역시 현금과 물품으로 납부되었다.
이 우마이야조 때에 주조된 동전이 지금까지 상당한 양이 남아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우마이야 칼리프는 페르시아와 비잔틴 제국에서 주조공장을 인수하여 금화와 은화를 충분히 주조했음이 분명하다.
4.비아랍인의 지위
아랍 지배계급이 막대한 경제권을 행사하게 됨으로써 새로운 사회계층이 나타나게 되었는데, 이 계층은 아랍 상류층을 상대로 생계를 유지하는 비아랍계 무슬림이었다. 마왈리(Maw li)라고 불린 이들은 페르시아, 아르메니아, 이집트, 베르베르 및 다른 비아랍계 개종자였다. 또, 아랍계통이지만 기독교도나 유대교도였기 때문에 이슬람에 늦게 개종해서 아랍 지배계급에 포함되지 않는 사람들도 이 개념에 포함되었다.
이 개념에는 딤미(Dhimmi)로 알려진 비무슬림은 포함되지 않았다. 비무슬림은 고율의 인두세(Jiztya)와 토지세(Khar j)를 납부해야 했다. 본래 이 딤미는 '성서의 추종자'인 아흘 알 키탑(Ahl al-Kit b)과 동일한 개념이었다. 성서의 추종자는 본래 기독교와 유대교도 등이 있고, 이들은 이슬람법에 따라 고율의 인두세를 몰고, 무슬림의 집단행사에 방해만 하지 않으면 보호받을 수 있게 하였다(쿠란 9장 29절). 또 성서의 추종자로 간주되지 않는 배화교도(Zoroaster)들인 이란인에게도 관용을 보여 편의상 딤미 개념에 포함시켰다.
마왈리는 아랍인의 암사르 근처에 몰려와 외곽 도시를 이루어 상류층인 아랍인의 필요에 따라 날품팔이, 상인, 가구 수리 및 세공인 등으로 생계를 꾸려 나갔다. 같은 이슬람 교도로서 그들은 이론상으로는 아랍인과 동등했으므로 경제거, 사회적 평등을 요구하였다. 이 평등권은 우마이야조 아래서는 달성되지 않았다. 일부 마왈리 출신 토지 소유자는 이슬람 국가에 바친 공헌 때문에 무슬림으로서의 세율만 지불하였으나, 대부분은 딤미와 같은 세율을 납부하였다.
압둘 말리크의 통치 때까지 이슬람 정부는 실지로 비아랍인이 이슬람에 개종하는 것을 권장하지 않았음은 물론이고 오히려 말리는 편이었다. 또, 국가의 세입이 줄어들기 때문에 이를 회복하기 위해 마왈리들을 도시에서 쫓아내어 그들의 옛 농토로 돌려보내려고 애썼다. 마왈리는 무슬림군에 편성되어 아랍사람과 함께 전투에 참가하였는데, 이것은 주로 후라산(Khur s n)과 아프리카 서북부와 같은 제국의 변경 지방에서 영역의 확장을 도모하는데 필요한 병력을 충당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주로 步兵으로서 싸웠으며, 대우는 騎兵으로 복무하는 아랍인에 비하여 훨씬 떨어졌다. 마왈리들이 품고 있는 열등감과 불만은 당시의 아랍문헌 속에서도 명백히 드러나고 있는데, 예를 들면 아랍 여인과 마왈리의 결혼은 생각하기 힘들 정도의 파격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마왈리의 수는 급속히 증가하여 아랍인의 수를 능가하였다. 그들은 주로 암사르의 외곽지대에 대규모로 정착하였고 아랍인과의 접촉이 증가함에 따라 점차 자기들의 정치적 중요성, 문화적인 우월성 및 군사적 분야에의 참여도를 인식하게 되어 위험스러운 세력으로 발전하였다. 그들의 주된 불만은 경제적인 것이었다. 우마이야 국가의 구조는 소수의 아랍인이 세금을 내는 다수의 비무슬림을 지배한다는 전제 위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마왈리에게 同等權을 부여하는 것은 곧 세입의 감소와 동시에 세출의 증가를 의미하였다. 이것은 곧 국가구조 전체의 종말을 의미하였다.
비록 마왈리와 아랍인의 구분이 아랍과 비아랍인이란 인종적 구분과 일치되지만, 이것은 본질적으로 경제적, 사회적인 대립이지 결코 민족적인 대립은 아니었다. 디완(Diw n, 인명부, 즉 연금 대상자)에 기재되어 있지 않는 이라크와 바레인의 아랍 하류층도 본이 아니게 마왈리 신분으로 떨어졌기 때문에 그들의 불만도 마찬가지였다.
5.시아 운동
마왈리들의 불만은 시아(Shi'a), 또는 알리의 당(Shi'at 'Ali)으로 알려진 종교운동과 밀접하게 결합되어 나타났다. 시아파는 알리와 그의 후손들이 칼리프임을 주장함에 따라 그들 주위에 몰려든 지지자로 형성되었다. 따라서, 이것은 최초에는 순전히 아랍인이 일으킨 운동이었으며, 또 정치적인 활동이었다. 칼리프 알리가 수도를 메디나에서 이라크의 쿠파로 옮겼으나, 뒤에 우마이야조가 다시 시리아로 이동했기 때문에 시아파는 이라크 남부의 愛鄕主義者의 지지를 받게 되었다. 후세인이 카르발라에 학살되자 시아파는 아랍인만의 파당으로서는 정권장악이 불가능함을 인식하여 이슬람의 宗派로서의 지위를 다지게 되었다.
시아파의 선전요원은 일반 대중, 특히 마왈리의 불만을 불러 일으키는데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다. 또, 세습제의 관습에 젖은 비아랍계의 무슬람에게는 예언자의 후손이 정당한 후계자, 즉 칼리프가 되어야 마땅하다는 논리가 세습제에 익숙하지 못한 아랍인에게보다 그 호소력이 훨씬 더 컸다. 시아 이슬람은 본질적으로 국가와 기존 질서에 대한 반대를 종교적인 용어로 표현한 것이었다. 즉, 국가와 기존 질서에 영합하는 것은 이슬람교의 주류파, 즉 순니(Sunni, 전통주의자)에 자동적으로 속하게 되었다.
반대파는 비아랍인에 국한되지 않았다. 불안한 兵營도시이며 혁명적 시아파의 발생지 쿠파에서는 아랍인들이 시초에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시아 교리를 이란에 처음 가져온 사람은 쿠파의 아랍인이었다. 그 곳의 병영도시인 콤市(Qumm市)는 본래 쿠파市의 영향 아래 있었기 때문에 시아파의 근거지가 된 것이다.
시아파가 이끄는 저항운동은 곧 아랍인에 대한 민족적 반항이라기보다 오히려 교리상의 論点과 그에 따른 국가관을 지닌 추종자의 아랍 상류층에 대한 사회적인 반항이었다. 우마이야조의 지지세력도 오직 아랍인에 국한되지 않았다. 도망가지 않고 남아 있었던 이란의 봉건귀족들 가운데 약간은 이슬람에 개종하여 정복자와 협력한 댓가로 경제적, 사회적 특권과 위신을 그대로 누리고 있었다. 더우기, 그들의 정치적 권력이 일시적으로 쇠퇴한 데 대해서는 체념하였으므로 비교적 아랍국가에 협조적이었다. 그들은 개종할 때에도 배화교에서 정통 이슬람을 택하였다.
그러나, 이슬람화된 이란의 일반 서민, 특히 농민들은 아직도 똑같은 상대인 옛 지주와 맞서고 있었으므로, 배화교 대신에 이슬람의 재야세력인 시아주의를 택하였다. 그들의 반대는 아랍인이거나 이란인이거나 관계없이 지배층인 귀족에게 향한 것이었다.
비아랍계인 마왈리는 시아 교리가 더욱 적극적이고, 또 단호한 면을 가졌기 때문에 이에 끌렸다. 그들은 이 시아 교리에 그들의 옛 종교인 기독교, 유대교 및 배화교적인 배경에서 나온 여러 관념을 첨가하였다. 이 관념 중에 하나는 마흐디(Mahdi, 올바르게 인도된 사람) 사상이다. 이 마흐디 사상은 순수한 정치적 지도자像에서 시작되었으나, 구세주적인 종교 지도자로 급속히 발전하였다. 이 독특한 현상이 처으믕로 나타난 사건이 묵타르(Mukht r)의 반란이었다.
묵타르는 685∼687년 사이에 칼리프 알리의 아들 무함마드 이븐 알 하나파야(Mu ammad Ibn al-Hanafiya)를 위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알리가 예언자의 딸 파티마(Fatima)와 사별한 후, 하나피 부족의 딸과 결혼하여 얻은 아들이다.
반란을 일으킨 묵타르는 주로 마왈리에 호소하였는데, 당시의 아랍 기록에 따르면 아랍인들은 하나님이 토지와 함께 물려준 약탈물인 마왈리를 묵타르가 선동하고 있다고 비난하였다. 무함마드 이븐 알 하나피야가 죽은 후에도 그의 추종자들은 그가 실제로 죽지 않고 메카 근처의 산 속에 숨어 살면서, 언젠가 좋은 시절이 오면 다시 속세로 돌아와서 지상에 정의를 실현시킬 새로운 국가를 건설할 것이라고 믿었다. 묵타르의 반란은 결국 유혈극으로 끝났지만, 여기서 나온 구세주 사상은 뿌리를 내려 자리잡았다.
우마이야조가 망할 때까지, 알리의 자손은 파티마 계통이거나 무함마드 이븐 알 하나피야 계통이거나 상관없이 메시아(Messiah)로 자처하면서, 또 이슬람의 정당한 군주라 주장하고 무슬림의 충성심을 요구하였다. 이러한 여러 구세주의 반란도 실패하여 차례로 죽었으나, 세상의 종말이 올 때까지 은신하고 있다고 믿게 되었다. 이 믿음은 자칭 구세주가 반란에 실패함으로해서 더욱 꽃을 피우게 되었다.
대체로 보면 파티마 계퉁의 자칭 구세주는 시아파 중에서도 온건파를 대표하여 불만으 품은 아랍인의 지지를 어느 정도 받았다. 반면에 무함마드 이븐 알 하나피야 계통의 자칭 구세주는 믿음과 행동에 있어서 극단적인 요소와 결합하여 마왈리의 폭발적인 불만을 대표하였다.
우마이야조에 대한 불만이 일반 민중 사이에 점차 높아짐에도 불구하고, 이 칼리프조는 아랍인들의 단결된 지지에 의존할 수도 없었다. 부족적인 독자성이 아랍 유목민 사이에 아직도 건재하고 있었고, 또 反우마이야조 운동을 반이슬람 공동체적이 것으로 보지 않았기 때문에 많은 모임에서 정치적, 종교적 색채가 나타났다. 무아위야가 타협시킨 아랍주의와 중앙 집권주의 결코 받아들이지 않았던 메카와 메디나의 독실한 신자들은 이상적인 국가형태로 믿고 있는 가부장적인 칼리프 제도의 종교적이고 헌신적인 측면을 강조하면서 神政을 요구하여 우마이야조에 반대하였다.
이들 독실한 신학자가 지는 우마이야조에 대한 편견은 초창기 이슬람의 밑거름이 된 종교와 역사에 관한 그들의 저서 속에 채색되어 있었다. 우마이야조에 대한 그들의 반대는 거의 무장반란의 형식을 띠지 않았지만, 그들의 견해를 계속하여 주장함으로써 중앙정부의 권위를 손상시키는데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6.하와리지 운동
그러나, 더욱 위험한 것은 중앙 정부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이슬람의 기치 아래 본질적으로는 이슬람 이전의 부족 지상주의로 돌아가려는 하와리지(Khaw rij) 운동이었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이들은 처음에는 시핀(Siffin) 전투에서 알리와 무아위야의 협상에반대하여 하나님의 심판, 즉 무력에 의하여 승패를 결정하기를 요구한 칼리프 알리의 추종자였다. 그러나, 알리가 협상을 결행하자 1만 2천명의 하와리지 추종세력이 알리 진영에서 이탈하였다. 알리는 한동안 이들 이탈세력을 설득하여 재결합시켰으나, 약 4천명은 다시 이탈하였기 때문에 알리는 어쩔 수 없이 658년에 이들을 나흐라완(Nahraw n)에서 공격하여 많은 추종자들을 죽였다.
하와리지 운동은 발생 초기에는 순수한 종교운동이었으나 점차 그들은 칼리프를 스스로 선출하고, 또 언제나 폐위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그들이 선출하지 않는 칼리프의 권위는 인정하지 않았다. 결국 그들의 무장 저항운동은 일종의 무정부 운동으로 발전하여 그 저항이 매우 날카로왔다.
알리가 죽은 뒤 20년 동안에, 사소하지만 수많은 하와리지의 소동이 이라크에서 일어났으며, 칼리프 야지드 1세의 사망에 즈음하여 이 소동은 절정에 이르렀다. 그러나, 하와리지 운동은 너무나 노골적으로 제국의 분열을 도모했던 점과 내부 자체의 갈등 및 무질서 때문에 실패로 돌아갔다. 칼리프 압둘 말리크의 통치 아래 하와리지는 이라크에서 진압되었고, 점차 이란쪽으로 쫓겨갔다. 이들은 8세기 초에 이르러 거의 제거되었다. 그들은 이슬람 이전의 '합의에 의한 정부'와 '개인적 판단의 우위성'을 극단적인 형태로 표현하였다.
하와리지 敎義는 현실의 불합리성에 격분하여 광신화된 아랍인 고유의 권위에 복종하지 않는 성격을 합리화내지 조직화하여 종교적 교훈으로 나타낸 것이었다.
7.부족간의 분쟁
우마이야 권력구조의 내적인 취약점은 아랍부족 자체의 반복되는 불화관계였다. 아랍의 민족적 전통에 따르면, 부족은 크게 남부와 북부 계통으로 구분되며, 또 각 계통에 속하는 부족 간의 친근관계를 밝히는 자상한 족보가 있었다.
이슬람 등장 이전에도 아라비아 반도에는 부족 간의 불화는 있었으나, 그것은 주로 이웃부족 간의 충돌이었고, 그들은 흔히 서로 먼 인척관계에 있었다. 그러나, 정복의 겨로가로 점차 정복지역에 이주한 아랍인은 부족들 끼리의 연합을 만들어 대립하였으므로 그 영향이 매우 컸다.
암사르에 이주한 아랍인은 각 부족별로 일정한 구역에 정착하였는데 이들 부족은 상호이해 관계에 따라 서로 연합하여 불화를 일으켰다. 비록 각 부족의 족보가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겻이 대부분이었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 이것은 우마이야조 시대에 아랍인의 일반 생활을 지배할 정도로 중대한 것이었다.
남부와 북부 부족 연합의 불화가 처음으로 희미하게 나타난 것은 무아위야의 통치시였으나, 그 후 급속히 발전하여 중앙정부의 권위가 허약한 지역에서는 곧 노골적인 충돌로 악화되었다.
야지드의 사망에 즈음하여 북부의 유력한 부족인 카이스(Qais)는 그의 후계자 무아위야 2세를 거절하고, 메카에서 반란을 일으킨 이븐 주바이르를 선호하였다. 우마이야조는 남부 부족인 칼브(Kalb)의 도움으로 마르즈 라히트(Marj R hit)에서 카이스를 패퇴시키고 승리하였다. 그러나, 우마이야조는 중립성을 잃고 불화의 소용돌이 속에 빠졌다. 압둘 말리크의 뒤를 이은 칼리프들은 대체로 부족 간의 분쟁에 의한 파당적인 지원으로 즉위, 또는 폐위될 정도로 타락하였다.
이와 같이 집요하고 깊이 뿌리박힌 분쟁의 원인은 주로 아랍부족 간 이해관계의 대립에서 찾아볼 수 있다. 즉, 정복이 시작되기 전에 정복지에 이주한 아랍 부족은 주로 남부 부족이었다. 이들은 후에 승승장구하는 이슬람군과 더불어 들어와, 우위를 차지한 북부 아랍부족과 이해관계가 대립하였다. 이와 같은 분석은 남부 아랍부족들이 시아파의 선전에 호의를 하여 마왈리와 이해관계를 같이하는 데서 찾아볼 수 있다.
8.압둘 말리크의 행정 개혁
제2차 내란이 분쟁지역은 이라크로서, 이 곳에는 모든 分派가 존재하였으며, 또 그 활동이 매우 활발하였다. 쿠파는 점차 확장되어 이라크의 중요한 도시로 발전한 결과 그 중심지가 되어 격변의 소용돌이가 줄을 이었다. 압둘 말리크는 통치 기간 중 최초의 수년간을 주로 아랍부족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는 혼란을 진압하여 질서를 회복하고, 또 북쪽의 비잔틴 황제와 국경분쟁을 조정하여 평화를 확립하는데 사용하였다. 시리아 내의 문제가 정비되자, 그는 690년경에 다른 지역에 관심을 기울여 그 곳의 반란세력을 분쇄하는 작업에 착수하여 3년 이내에 그의 권위를 전 영역에 확립하는데 대체로 성공하였다.
그의 과업은 새로운 행정조직을 창안하는 것이었으며, 이에 대한 해결책은 중앙 집권화를 강화하여 모든 권한을 통치자의 손에 집중시키는 것이었다. 통치자가 권한을 확대할 수 있었던 바탕은 시리아의 군사력이었다. 압둘 말리크의 칼리프 체제는 그 때까지도 전제군주체제가 아니고, 아랍 전통과 神政 체제의 요소가 가미된 군주체제였다. 또한, 세금의 징수와 지출의 철저한 감사를 위해서도 행정개혁은 불가피했다. 그는 새로운 체제의 확립과 더불어, 대부분의 州에서 지속되고 있는 구태의연한 비잔틴과 페르시아의 행정체제를 버리고 아랍체제를 확립하였다.
그리하여, 그리스어와 페르시아어를 폐지하고 아랍어를 행정과 회계상의 공용어로 만들었으며, 나아가서는 696년에 비잔틴과 페르시아 제국 주화의 모방을 중지하고 새로운 아랍 주화를 만들었다. 또, 그의 통치기간 중에 稅制를 개혁하여 이슬람 성법(Shari'a)에 따르게 하였으며, 그의 후계자는 이를 계승 발전시켜 독특한 이슬람 세제로 구체화시켰다. 그는 공공사업과 건축에 국가 경비를 지출함으로써 후계장게 부강하고 평화로운 제국을 물려주었으나, 이것으로 주요 문제가 해결된 것이 아니고 단지 유보되었을 뿐이었다.
9.정복 사업의 전개
압둘 말리크의 후계자 왈리드(Walid, 705∼715 재위)의 통치 기간은 우마이야조의 권력이 정점에 도달한 시기였다. 이 기간 중에는 다시 정복가 제국이 확장이 3대 지역으로 뻗어 나갔다. 이라크州의 총독인 알 하자즈(Al-Hajjaj)는 쿠타이바 이븐 무슬림(Qutaiba Ibn Muslim) 장군을 중앙 아시아 원정에 대한 임무를 맡겼다.
그리하여 그는 705년부터 713년까지 현재의 아프가니스탄 지방과 더 나아가 부하라(Bukh ra)와 사마르칸드(Samarqand)를 점령하여 처음으로 옥수스(Oxus)강의 건너편 땅에 아랍 세력을 확고히 뿌리박고 승전의 명성을 떨쳤다. 총독은 또한 710년에 무함마드 이븐 알 카심(Muhammad Inb al-Q sim) 장군을 인더스강에 파견하여, 인도의 신드(Sind)州를 점령함으로써 오늘날 파키스탄의 모태가 되었다.
그러나, 이 작전은 더 추진되지 않아 이슬람 세력에 의한 전체 인도의 정복은 몇 세기 뒤로 미루어졌다. 더욱 중요한 것은 710년에 아프리카 총독인 무사 이븐 누사이르(Musa Ibn Nusair)가 베르베르(Berber)족 출신의 타릭(T riq) 장군을 스페인에 보내어 이베리아 반도의 대부분을 점령한 것이다. 아랍족과 베르베르인의 무슬림 연합군은 계속하여 진격하였으나, 732년에 파리 동남방에 있는 프와티에(Poitier)와 투르(Tour) 사이의 중간 지점에서 샤를르 마르텔(Charles Martel)의 프랑크군에게 저지당했다.
한편, 술레이만(Sulaim n)의 통치 기간(715∼717) 중에는 비잔틴 수도 콘스탄티노플에 대한 대원정이 있었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이 원정이 비잔틴의 수도에 대한 아랍족의 마지막 대공격으로, 이러한 대원정의 준비와 실행을 위해 경비가 매우 많이 소모되었으므로 재정이 악화되어 난관에 봉착하였다. 더구나, 콘스탄티노플의 해협에서 시리아의 육군과 함대가 완전히 분쇄되어 제국의 바탕인 군사력의 손실은 매우 컸다.
이러한 위기에서 술레이만은 임종에 즈음하여 그의 사촌인 우마르 이븐 압둘 아지즈('Umar Ibn 'Abdul-'Aziz)를 후계자로 지명하였다. 그는 독실한 신자로서 평판이 났으므로 우마이야조를 구하기 위하여 유화정책을 수행할 수 있는 유일한 왕자였다.
10.세제와 급료 개혁
오마르 2세('Omar Ⅱ, 717∼720)가 우선 해야 할 일은 마왈리의 처지에 영합하여 아랍부족과 아랍제국의 통일성을 지속하는데 있었다. 그 때문에 그는 연달아 재정 조치를 취하여 마왈리의 환심을 얻으려고 애썼다.
비록 이 조치는 실패로 끝났지만, 위기를 다소 지연시키는 데는 성공하였다. 실패의 근본 이유는 이 조치로 말미암아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많은 딤미가 이슬람에 개종하였고, 또 아랍 지주의 수가 점차 증가하여 무슬림으로서의 낮은 세율을 지불했으므로 국고의 세입이 크게 떨어졌기 때문이다. 이에, 이라크 총독 하자즈는 세입의 증가를 위하여 마왈리를 본래 일하던 토지로 돌려 보내고, 또 모든 무슬림 지주로부터 비무슬림이 지불해야 하는 고액의 세금을 징수하는 구제책을 마련했으나, 분노만 쌓이게 하고 집행이 불가능하였다.
오마르 2세는 이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 무슬림 지주에게 오직 십일조만 납부하게 하고, 고율의 세금인 하라즈(Khar z, 토지세)는 부과하지 않았다. 또, 헤지라 100년(A.D. 729) 이후부터 하라즈를 납부하는 토지가 무슬림에게 양도되는 것을 금하였다. 이 때부터 비록 무슬림이 법을 교묘히 이용하여 이러한 땅을 관리하게 되더라도 하라즈세를 납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 오마르 2세는 마왈리의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서 그들이 아무런 제약없이 병영도시에 정착하는 것을 허용하고, 비무슬림만이 응당 내야 하는 인두세인 지즈야(Jizya)와 하라즈를 마왈리가 납부하는 것을 중지시키고 면하게 하였다. 그러나, 후라산(Khur s n)을 제외한 모든 지역에서 마왈리 출신 전사는 아직도 아랍 전사보다 적은 급료를 받고 있었다.
한편, 지방에 주둔하고 있는 아랍 전사에게는 모두 시리아 수준으로 급료액을 평준화하여 실질적으로 상승시켜 주었으며, 또 그들의 가족에 대한 수당도 지급하였다. 이 조치로 세입이 줄어들자, 이를 보완하기 위해서 딤미에 부과되는 세율은 더욱 무거워졌고, 이슬람에 개종하지 않으면 여태까지 근무해 오던 행정직도 떠나야 했으므로, 그들은 사회적, 경제적 악조건에 시달려야 했다.
이러한 오마르 2세의 개혁으로 세출은 늘어났고, 세입은 줄어들었으며, 또 행정 기구에 딤미를 채용하지 않고 해고시킨 정책은 혼란과 무질서를 초래하였으므로, 그의 후계자인 야지드 2세(Yazid Ⅱ, 720∼724)아 히샴(Hish m, 724∼743 재위)의 치하에서는 새로운 재정 체계를 마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새로운 체제는 우마이야조가 멸망한 후에도 약간의 수정은 있었지만, 근본적으로는 오래도록 그대로 존속하였다. 중동의 口傳과 대부분의 史料들은 한결같이 히샴을 인색하고 욕심이 많아, 무엇보다 조세의 징수에만 관심을 기울인 통치자로 묘사하고 있다.
현재 우리가 활용할 수 있는 史料나 증거물을 가지고서는 당시 히샴의 재정 정책을 일괄하여 논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히샴의 통치 아래서 우마이야 제국의 중요한 지역인 이집트, 이라크 및 후라산州의 총독이 남긴 조세 정책에 대한 정보 자료는 어느 정도 현존하고 있다.
여기서, 후기 우마이야조의 정책에 대한 상황을 전면 재현시켜 볼 수 있다. 새로운 세제의 바탕은 토지가 하라즈를 납부하는 것이지 결코 그 소유자가 아니라는 법의 전제였다. 여태까지 십일조만 내던 토지는 계속하여 그대로 남아 있었으나 증가되지 않았다. 종래까지 하라즈만을 지불한 딤미들은 인두세도 납부해야 했다. 이슬람 성법(Shari'a)의 법 체계가 된 이 새로운 세제는 과세의 근거 자료로 인구와 재산을 조사하여 세금을 징수하는 임무를 가진 재정관을 총독과는 별도로 임명함으로써 더욱 효과적이었다.
11.우마이야조의 멸망
히샴의 사망 후 우마이야조는 내부 분열을 일으켜, 1년 사이에 칼리프가 4번이나 바뀌면서 급속히 쇠퇴하였다. 부족 간의 분쟁은 더욱 격심해졌고, 시아파와 하와리지파의 반정부 활동은 더욱 활발하게 되어 심지어 744년에는 중앙 정부의 권위가 시리아 내에서도 도전을 받았으며, 다른 지역에서는 유지하기 힘들어졌다.
마지막 칼리프인 마르완 2세(744∼750)는 촟명하고 유능한 통치자였으나, 너무 늦게 권좌에 올랐기 때문에 우마이야조의 운명을 구할 수 없었다. 종말의 선고는 자칭 하쉬미야(H shimiya, 예언자 무함마드의 증조부 이름인 Hashim에서 유래, 즉 예언자 가문을 지지하는 당을 뜻함.)당에서 왔다. 무함마드 이븐 알 하나피야의 아들인 아부 하쉼(Ab H shim)은 극단적인 시아파로서, 일부 마왈리의 지지를 받았다. 그가 716년에 아들없이 죽자, 敎組 무함마드의 삼촌의 후손인 무함마드 이븐 알리 이븐 알 아바스(Muhammad Ibn 'Ali Ibn al-'Abb s)가 양자로 들어와 그 뒤를 이었다.
이 종파가 무함마드를 지도자로 받아들이자, 그는 종파의 혁명적 조직 기구를 지배할 수 있었다. 그들의 거점은 후라산에 있었으며, 이 州의 아랍인들은 주로 바스라(Basra) 출신으로, 670년경에 정착하였다. 그들은 이곳에까지 부족 전쟁의 씨를 가지고 와 주도권 다툼을 벌여 아랍인의 권위를 떨어뜨렸다. 그러나, 아랍인들은 원주민인 페르시아 사람들 가운데 사는 소수에 불과하였다. 후라산 사람은 호전적 기질이 강한 편이었고, 아랍인의 사회적, 경제적인 차별 대우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718년경에 하쉬미야당의 홍보 활동이 쿠파에서 시작되었다. 이 활동은 교조 家門의 사람(Ahi al-bait)만이 이슬람의 정당한 지도자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여, 새로운 정의의 시대가 올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강한 호소력을 지니고 있었다.
처음에는 이 하쉬마야당의 선교 활동은 아랍인들 사이에 뻗어 나갔지만, 곧 마왈리의 관심을 끌었다. 무함마드 이븐 알리 이븐 알 아바스는 남부 아랍 부족 출신의 술레이만 이븐 카티르(Sulaim n Ibn Kathir)와 12인의 위원회에 후라산의 선교활동을 위임하였다. 그 후, 이 선교활동이 크게 빛을 보지 못하고 얼마동안 세월만 보내는 사이에 그는 죽었다. 그의 뒤를 아들 이브라힘이 계승하였고, 또 이 종파 기관도 그를 받아들였다.
745년에 이브라힘은 자기의 마왈리 가운데 한 사람인 아부 무슬림(Abu Muslim)을 자기의 대리인 겸 선교 책임자로 후라산에 보냈다. 아부 무슬림은 그 곳의 아랍인과 페르시아인 가운데서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온건한 시아파들이 그에 대해 어느 정도의 의심과 불만을 가졌지만, 아부 무슮의 지도권은 인정되었다. 747년, 하쉬미야당의 반란이 시작되자 검은 깃발이 후라산에 나타났다. 검은 깃발을 사용한 것은 그 당시 불만에 찬 사람들 사이에 떠도는, 구세주적이며 말세적인 여러 예언을 충족시키려는 시도에서였다. 이 검은색은 또 반란의 상징적인 효과를 가지고 있었다. 이 검은 깃발이 아바스家의 상징이 된 것은 단순히 이 운동이 성공하였기 때문이다. 우마이야조와 압바시야조는 각각 중국의 당대 문헌에 白衣大食과 黑衣大食으로 기록되고 있다.
후라산에 살던 아랍 부족들은 서로 분쟁 속에 있었기 때문에 이 하쉬미야당의 운동에 효과적인 저항을 하지 못하였다. 동부에 기반을 굳힌 아부 무슬림의 군대는 서부로 진격하였다. 우마이야조의 군대가 잡(Z b)江에서 마지막으로 저항했으나 패하고 말았다.
우마이야가와 아랍 왕국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압바시야가의 아불 아바스(Ab l Abb s)가 사파(Saff , 피의 복수자)라는 칭호로 칼리프가 되었으며, 그는 그 사이 옥중에서 죽은 형인 이브라힘을 계승하였다.
Ⅲ.압바시야조('Abb siya朝)
1.압바시야조 前期(750∼945)
1)압바시야 혁명
이슬람 공동체의 우두머리가 우마이야조에서 압바시야조로 바뀌어진 것은 단순히 왕조의 변화가 아니고 그 이상이었다. 이것은 유럽 역사에 있어서 1789년의 프랑스 혁명이나 1917년의 러시아 혁명에 버금가는 이슬람 역사상 중요한 혁명이었다.
이 변혁은 궁정의 음모나 쿠데타에 의하여 초래된 것이 아니고, 강력한 혁명적 조긱과 선전에 의하여 달성된 것이다. 이 조직과 선전은 우마이야조에 불만을 품은 세력의 의사를 대변하여 오랜 기간 활동하여 온 것이며, 이 운동도 대부분의 정치적 변혁활동과 마찬가지로 이해관계가 다른 여러 세력이 기존질서를 전복시키려는 공통된 욕망 때문에 뭉친 연합세력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목적이 달성되자 다시 연합세력은 분열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압바시야조가 무엇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은 이 변혁에 실망한 세력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 변혁의 주역을 맡은 아부 무슬림과 그의 동료들은 계획적이고 교묘한 방법에 의해 처형되었고, 그의 추종자들이 일으킨 반란은 무자비한 수단에 의하여 진압되었다.
이 변혁의 성격은 무엇이며 각 사회계층의 이해관계에 어떠한 변화를 초래하였는가 하는 의문에 대해서 19세기 유럽의 학자들은 이 변혁을 셈족인 아랍인과 아리안족인 페르시아인과의 근본적 이해관계 대립에 의한 분쟁으로 보았고, 우마이야조와 압바시야조 사이의 분쟁 또는 종파 간의 대립은 단순히 명분상의 옷걸이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압바시야조의 승리를 아랍인에 대한 페르시아인의 승리로 보고, 몰락한 아랍왕국의 자리에 이슬람의 옷을 입은 페르시아화된 새로운 이란제국이 창립되었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견해의 근거는 아랍 사료에서도 부분적으로 찾아볼 수 있다. 아랍의 유명한 문호이며 해학가인 자히즈(J hiz, 868 사망)는 압바시야조는 페르시아와 후라산의 것이며, 우마이야조는 아랍의 겻이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는 이와 같은 인종적 분규도 우마이야조를 전복시키려는 선교활동에 상당한 역할을 하였지만, 이 변혁의 주된 원동력은 아니라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비록 이 변혁을 승리로 이끈 집단에는 수많은 페르시아인이 포함되어 있지만, 그들의 승리가 페르시아의 승리이고, 또 아랍의 패배로 보기는 힘들다는 것이다.
이 변혁의 지도층에는 상당한 수의 아랍인, 특히 남부 아랍부족 출신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 아랍인들은 초기 정복사업에 대거 참여하였으나 정권의 핵심에는 들어가지 못한 세력들이었다. 또, 이 변혁의 주동 세력인 마왈리들도 단순히 페르시아인들로만 구성된 것이 아니고 이라크인, 시리아인, 이집트인과 심지어 이슬람에 개종을 늦게 한 아랍인도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페르시아 계통의 지주들인 디칸(dihq n)은 비잔틴 제국의 前職 관료들과 마찬가지로 우마이애조의 행정에 적극 참여하여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들이 곧 각 주의 세금을 책정하여 징수한 장본인이었다. 이 과정에서 그들 자신의 세금은 면제 또는 경감시킨 것은 뻔한 사실이었다.
이 변혁을 이끈 주동 세력의 본거지는 아랍사람들이 세운 병영도시에 집결한 도회지 인구, 특히 마왈리 출신의 상인과 공예인의 사회적, 경제적인 불만에서 찾아야만 정당할 것이다. 우마이야조의 지배층을 형성한 아랍 상류층의 주된 영리활동인 정복사업이 멈추어지자, 농업과 상업과 같은 평화시의 경제에 바탕을 둔 새로운 사회질서가 조성되었다.
그와 함께 유력층인 고급 관료, 거상, 지주 및 울라마('Ulam ', 원로 종교인) 등이 나타났다. 울라마는 주로 종교를 연구하는 신학자, 이슬람법을 다루는 법률가와 사법관, 종교 학교의 교사 및 종교 기구의 관료층 가운데 유력한 사람을 총합하여 지칭하는 것이다.
이 울라마는 다른 종교의 지배층인 성직자층과 유사한 이슬람의 모형인 것이다. 이러한 다양한 직종에는 아랍사람들의 정치적 분열과 능력 부족으로 다른 인종군도 대거 함여하게 되었으며, 또 이들은 압바시야조를 정상으로 하는 정치적 변혁에 신분을 보장 받기 위하여 점차 가세하게 되었다.
2)바그다드 건설
이 변혁의 성격은 압바시야조가 승리한 이후에 더욱 뚜렷이 나타났다. 가장 명백한 것은 제국의 구심점이 시리아로부터 이라크로 옮겨진 것이다.
이라크는 중근동에 세워진 多人種國家의 전통적인 중심지였다. 압바시야조의 제1대 칼리프 사파(750∼754 재위)는 쿠파 근처의 유프라테스강 동쪽에 있는 하쉬미야라는 조그마한 도시에 수도를 정하였으나, 후에 안바르(Anb r)로 옮겼다. 그러나, 영구적인 수도를 건설한 이는 제2다 칼리프이며, 또 실질적으로 신 칼리프조의 건설자인 만수르(Mans r, 754∼775 재위)였다.
만수르는 옛 페르시아에 있는 사산 제국의 수도인 크테시폰(Ctesiphon) 근처의 티그리스강 서안에 있는 조그마한 촌에 압바시야조의 영구적인 수도를 세웠다. 이 때, 세 수도를 건설하기 위해 크테시폰의 낡은 건물에서 많은 건축재료를 이용하였다. 이 도시의 공식 명칭은 메디나 알 살람(Medinat al-S'alam, 평화의 도시)이었으나, 이 촌의 페르시아 이름인 바그다드(Bagdad, 하늘이 준 곳)로 더 많이 알려졌다. 칼리프 만수르는 이 지역을 여러가지 실용적인 이유 때문에 선택하게 되었다. 그는 이 도시 근처에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을 연결하는 운하를 파게 하여 동서남북을 통하는 요지마다 초소를 설치하였다.
이 도시의 건설에 대하여 지리학자인 야쿱(Ya'q b, 891년경 사망)은 만수르가 세 수도의 터전을 찾기 위해 답사하는 도중에 바그다드촌에 도착했을때 한 말을 기록하고 있다.
"통쪽의 티그리스강과 서쪽의 유프라테스강 사이에 있는 이 섬은 세계를 상대로 하는 문물의 집산지이다. 와시트(W sit), 바스라, 우불라(Ubulla), 아와즈(Ahrw z), 파르스, 오만, 야마마(Yam ma), 바레인 및 더 먼 지역에서 티그리스강을 거슬러 올라오는 배들은 모두 여기서 정박할 것이며, 또 모술, 디야르 라비아(Diyr Rabi'a), 아제르바이잔 및 아르메니아로부터 화물을 실은 배는 티그리스강을 타고 내려오며, 유프라테스강을 통하여 디야르 무다르(Diy r Mu ar), 라카(Raqqa), 시리아와 그 국경 지역, 이집트 및 북아프리카에서 선적한 화물도 이 곳에 풀 것이다.
더구나, 이 곳은 자발(Jabal), 이스파한 및 후라산 지역 사람들이 드나드는 요지이다. 또, 내 앞에 온 통치자들이 모두 이 곳에 관심을 두지 않게 하시고, 오직 나를 위해 이 곳으 보전하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하나님께 맹세코 나는 이 곳을 건설할 것입니다. 그 후 나는 한평생 여기 살 것이며, 나의 후손들도 이 곳에 살 것입니다. 이 곳은 틀림없이 세계에서 가장 번영하는 도시가 될 것입니다.
바그다드의 중심지는 지름이 약 3.3km의 성곽으로 둘러싸인 도시이며, 그 속에 칼리프의 궁전과 관료들의 행정 부서 건물, 그리고 칼리프의 근위병인 후라산 병정들의 숙소가 있다. 이 성곽 밖에서는 거대한 상업 도시가 급속히 발전하였다.
바그다드로의 遷都는 큰 영향을 가져왔다. 제국의 중심이 지중해의 시리아로부터 비옥하고 관개시설이 좋은 강의 계곡 평야이며, 수많은 통상로가 교차하는 메소포타미아로 이동한 것이다. 이 사실은 곧 비잔틴 국가로 변모함을 뜻하며, 특히 페르시아의 전통이 점차 커다란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3)칼리프의 성격
압바시야조에 들어와서 이미 우마이야조 때 착수된 국가의 통치체제가 완성되었다. 우마이야의 지배층은 전통적인 부족장 체제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데 비하여, 압바시야 칼리프는 그의 권위가 신으로부터 나왔다고 주장하면서 실질적인 권력의 바탕은 정규군에 두고, 권력의 행사는 봉급 생활자인 관료 기구를 통하여 행사하는 전제 군주가 되었다.
권력 기관으로서의 군의 중요성은 압바시야조의 사형 집행인이 누리고 있는 높은 지위에서도 볼 수 있다. 이 사실은 千一夜話에 잘 나타나 있다. 압바시야조에서는 국가 요직의 등용에 대한 가문의 중요성은 거의 고려되지 않고 오직 칼리프의 총애가 결정적인 요소가 되었으므로, 중래의 아랍 상류층은 고급 관료층에 의하여 교체되었다.
칼리프가 지닌 새로운 위엄은 새로운 칭호 속에서도 엿볼 수 있다. 칼리프는 '하나님의 使聖의 대리인(Khalifa Ras l Allah)'으로부터 바로 '하나님의 대리인(Khalifa Allah)'으로 그 칭호가 바뀌었다. 즉, 그의 권력은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나오는 것으로 보았다. 그가 가진 비슷한 의미의 칭호는 '지상에 있는 하나님의 그림자( ill All 'i al al-ard)였다.
예전의 칼리프는 다른 평범한 사람과 마찬가지로 누구나 쉽게 접근하여 이름을 부르면서 얘기를 나눌 수 있었으나, 압바시야조의 칼리프는 까다로운 궁전 관료층과 그 절차 때문에 점근하기가 힘들었다. 이론상으로 보면 칼리프는 이슬람의 성법인 샤리아(Shari' )에 매여 있었으나, 실지로는 이 제약을 집행할 수 있는 기관이 없었으므로 거의 효과가 없었다.
압바시야조의 칼리프는 이리하여 군사력에 바탕을 두고 神權을 주장하는 전제군주가 되었다. 즉, 칼리프는 아랍부족의 지지에 의존하고 있지 않았으므로 그 권위가 높아서 설득을 통하여 다스린 우마이야조의 칼리프보다는 통치자로서의 지위가 훨씬 강하였다. 그러나, 압바시야조의 칼리프는 확고한 봉건 귀족과 지위가 보장된 성직자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한 옛 페르시아 황제보다는 그 지위가 약화되어 있었다.
4)행정 조직
압바시야조의 행정 조직은 우마이야조 말기의 조직에서 발전된 형태였다. 칼리프 만수르는 이것이 모두 우마이야조의 칼리프 히샴(Hish m)의 덕택임을 공개적으로 인정하였다. 그러나, 페르시아의 사산조(S s n朝)의 행정 조직을 페르시아계의 관료와 문헌에서 배워 그것으 의식적으로 모방하려고 애를 썼다. 따라서, 압바시야조의 행정 기구는 인종차별에 바탕을 두지 않고 국가의 관료층을 마왈리 출신으로 대폭 충원하여 그들도 상당한 사회적 지위를 누렸다.
중앙 정부의 부서(diw n)에는 문서부(diw n al-tawqi'), 군부, 조세부(diw n al-khar j), 우편 정보부(diw n al-barid wa'l akhb r) 등이 있었다. 이들 부처에서 일하는 관료층은 지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모두 재상격인 와지르(Wazir)의 지휘 감독을 받았다. 이 와지르 자리는 압바시야조에서 처음 도입한 것이며, 그 기원은 옛 페르시아 제국이었다. 이 직위느 칼리프의 최고 행정권의 집행자이며, 전체 행정기구의 우두머리였기 때문에 그 권력이 막강하였다.
압바시야조의 초창기에 할리드 알 바르마크(Kh lid al-Barmak)라는 와지르가 있었는데, 그는 중앙 아시아의 이란계 출신이었다. 그의 두 아들도 와지르가 되었으므로, 이 가문은 와지르家로 매우 명성이 높았으나 803년 칼리프 하룬 알 라쉬드(H r n al-Rashid, 786∼809)에 의하여 제거되었다.
각 주의 행정은 총독( mir)과 조세 담당관(' mil)의 공동 관리 아래에 있었다. 양자는 각가 자신의 군과 관료를 가지고 있었으며, 바그다드의 우편 정보부에서 나온 우편 국장의 감시 아래 독자적인 행동을 펴고 있었다.
압바시야조의 등장과 함께 군 조직에도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아랍 민병의 중요성이 감소되고, 그에 따라 아랍족에 지불하던 연금은 중단되었다. 오직 정규군만이 급료를 받게 되었다. 군은 상비군과 또는 어떤 특수한 전투에만 참여하는 지원병으로 구성되었으며, 이들은 모두 급료를 받았다. 군의 핵심은 압바시야조의 창립에 공훈을 세운 후라산 출신의 근위병( aras)이었다. 또, 아랍군도 아랍 알 다울라(Arab al-dawla, 국가의 아랍군)란 이름 아래 새로운 체제에 충성하는 아랍인들로 한동안 유지되었다.
그러나, 그 중요성은 곧 사라졌다. 9세기 정분부터 군은 점차 특수훈련을 받은 중앙 아시아의 터키계 노예들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맘룩(Maml k, 소유된 자)으로 알려졌다. 이 맘룩軍은 제8대 칼리프 무타심(Mu 'Ta im, 832∼842 재위)의 통치 아래 도입되었다.
압바시야조는 종교 운동을 통하여 권력을 장악했기 때문에 칼리프가 가지고 있는 종교적 측면을 강조하여 대중의 지지를 계속 받으려고 하였다. 초창기 압바시야조의 칼리프는 종교 지도자와 율법학자들은 회유하려고 했으며, 적어도 대중적인 종교 의식은 반드시 지키려 하였다. 그리하여, 후대에 나온 한 아랍 사학자는
"이 칼리프조는 종교와 왕권의 혼합책으로 세상을 다스리고 있다. 가장 독실한 신자는 신앙심 때문에 순종하였고, 나머지는 두려워서 순종하였다."
고 기술하고 있다.
종교 기관은 아랍인의 단결이 무너져서 생긴 공백을 채워서 잡다한 인종적, 사회적 구성 요원을 결합시키는 기능을 맡았다. 사회 공동체와 통치자의 종교적 특색을 공개적으로 강조함에 따라 압바시야조의 칼리프는 종종 위선자라는 비난을 받게 되었다.
심지어 한 시인은
"원컨대, 마르완(Marw n, 즉 우아이야조 칼리프 683∼685)의 후손들이 행한 횡포가 되돌아와서 압바스의 후손에 말하는 평등을 지옥으로 보내소서."
라고 읊었다.
5)경제 생활
압바시야 제국은 경제 생활면에서 칼리프조의 변천을 일어난 변화를 가장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다. 농업, 산업, 특히 무역 규모가 우마이야조 시대에 비해 대형화되어 크게 융성하였다. 제국은 풍부한 자원을 가지고 있어 밀, 보리, 쌀의 순서로 관개 수리 시설이 구비된 수많은 강 기슭에서 생산되는 주곡이었으며, 대추와 올리브는 그 다음으로 중요한 생산 식료품이었다.
제국은 또 금속의 생산이 풍부하였다. 銀은 동부 주에서, 특히 힌두 쿠쉬(Hindu Kush)로부터 왔다. 10세기경의 사료에 의하면 힌두 쿠귀에서는 만 명의 광부가 고용되어 은을 캐고 있었다고 한다. 金은 서부 주, 특히 누비아(Nubia)와 수단에서, 구리(銅)는 9세기 경에 5천 디르함(dirham; 2.97g의 화폐 단위)으로 세금을 내었다는 이스파한 부근에서, 철은 페르시아, 중앙 아시아 및 시실리섬에서 들어왔다.
보석은 제국의 여러 곳에서 나왔고, 산호는 페르시아만의 어장에서 구할 수 있었다. 목재는 서부 주에서는 귀했으나, 동부 주에서는 어느 정도 생산되고 있었으며, 부족분은 주로 인도에서 대량 수입하였다.
압바시야조는 관개 사업에 주려갛여 경작면적을 넓히고, 농업 생산을 높였다. 더구나, 농민의 토지 소유권을 확대하고 토지세를 보다 공평하게 부과하였으며, 특히 일정한 토지에 대한 고정세 대신에 수확량을 기초로 하여 일정한 비율을 세입으로 하였다. 그러나, 농민의 지위는 여전히 낮았고,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점차 부유한 상인과 지주들의 투기 행위와 대규모 농장에 노예노동의 도입 등으로 약화되었다. 더구나, 노예노동의 도입은 자유로은 농업 노동자의 경제적, 사회적 지위를 더욱 떨어뜨렸다.
중세 무슬림 세계의 백과사전에는 공예를 포함한 산업을 두가지로 나누었다. 즉, 인간의 기본 필수품과 사치품이었다. 전자는 의식주에 관한 사업이었으며, 그 중에서도 무슬림 세계에서 가장 발달된 것은 의류 산업이었다. 이 산업은 고용인원 수에 있어서나 생산량에 있어서 다른 것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였으며, 이미 우마이야조 시대에 시작되어 더욱 확장되었다.
모든 의류 상품은 국내 및 수출 수요를 감당하기 위해 생산되었다. 그 중에는 옷감, 옷, 양탄자, 융단류 및 방석 종류 등이 있다. 린넨(Linen) 종류는 주로 이집트에서 생산되었으며, 콥트(Copt)교도들이 주역을 맡았고 알렉산드리아 지역이 대생산지였다.
목화는 본래 인도에서 수입했으나, 곧 동부 이란에서도 지배되어 스페인에까지 전해졌다. 비단의 제조는 비잔틴과 사산 제국에서 물려받아, 주르잔(Jurjan)과 시지스탄(Sijist n, 또는 Sist n) 등의 옛 페르시아의 동부 영역에서 발달하였다. 양탄자는 거의 모든 지역에서 생산되었으나, 특히 타바리스탄(카스피아海의 남동부 연안)과 아르메니아산이 가장 좋은 것으로 평가되었다.
산업은 국가의 주도나 개인의 창의에 의하여 설립되었다. 우마이야조 말기부터 정부는 칼리프, 고급 관료 및 군 지도자를 위한 티라즈( ir z)라는 무늬 옷감을 생산하기 위해 작업장과 제조 공장을 유지하고 있었다. 생산 규모는 가내 공업에 불과하였다. 기술자들은 오직 국가 기관이나 또는 재정적 후원을 해 준 개인 기업인에게 팔았다. 그러나, 몇몇 경우에는 기술자들은 급료를 받았으며, 9세기경의 이집트에서는 하루에 반 디르함의 급료를 주었다고 한다.
종이는 기원전 105년에 중국의 채윤이 만든 것이다. 751년에 아부 무슬림(Ab Muslim) 장군의 휘하에 있는 이븐 살리흐(Ibn S lih)가 이끈 무슬림곤이 고구려 유민 출신인 당나라의 안서 도호부 도독 고선지 장군이 지휘하는 唐軍을 중앙 아시아의 탈라스(Talas) 부근에서 대파하였다. 이 때 포로로 잡힌 당군 가운데 製紙法을 아는 몇 사람이 있어서 이 기술이 무슬림 세계에 전달되었다.
종이는 하룬 알 라쉬드의 통치 때 이라크에 도입되었다. 비록 종이의 사용이 무슬림 세계를 휩쓸어 800년경에 이집트에, 900년경에 스페인에 이르렀으나, 그 제조는 먼저 도입된 중앙 아시아의 동부주에 국한되었다. 그러나, 10세기 이후에는 이라크, 시리아, 이집트 및 아라비아 반도에도 제지공장이 세워졌으며, 곧 이어 북 아프리카 및 스페인에까지 들어갔다. 제지공장이 있었던 중요한 도시는 사마르칸드, 바그다드, 다마스쿠스, 카이로, 모로코의 페즈(Fez) 및 스페인의 발렌시아(Valencia) 등이었다.
다른 산업으로는 도자기, 철재, 비누 및 향수 생산 등이 있었는데, 이슬람 제국은 그 자원이 풍부하고 유럽과 동부 아시아 대륙 사이의 육교적 위치에 있었으므로 중개무역이 성하였다.
더구나, 우마이야조는 정복 전쟁을 쉴새없이 진행했지만, 압바시야조가 선린정책을 추구하고 국내의 안녕 질서를 도모하였으므로, 국내외의 상업활동이 더욱 발전되었다.
무슬림 상인들은 페르시아만의 시라프(Sir f), 바스라, 우불라(Ubulla) 항구와 예멘의 아든과 홍해 안의 항구에서 인도, 스리랑카, 동남 아시아 諸國 및 중국에까지 진출하였다. 우리 한반도에도 이들의 출입이 있었다는 것은 중동과 한국의 문헌에 다 같이 기록되어 있다. 동남 아시아 지역에서의 수입품은 비단, 향료, 조미료, 목재 등으로 인도와 중국과의 무역에는 해상로뿐만 아니라, 중앙 아시아를 통한 육로도 있었다. 한 소식통은 중국에서의 수입품에는 향료, 비단 제품, 토기류, 종이, 먹과 잉크 종류, 공작, 빠른 말, 안장, 펠트, 계피, 大黃根 등이 있었다고 한다.
비잔틴 제국으로부터는 금은 그릇, 금화, 약품, 금박의 비단, 노비, 장신구, 실타래, 水力技士, 농업 경영자, 석공 및 환관 등을 가져왔고, 한편 인도로부터는 호랑이, 표범, 코끼리 등의 가죽 제품, 루비, 백단과 흑단 향나무 및 코코넛 등을 수입하였다. 또한, 무슬림 항해사들은 8세기 경에 중국 광동에 그들의 정착지를 확보하였다고 오늘날까지 잔존한 사료가 전해주고 있다.
스칸디나비아 반도, 특히 스웨덴에서 수십만 개에 달하는 무슬림의 금화, 은화 및 銅貨가 발견되었으며, 이것들은 대체로 7세기 말경에서 11세기 초기에 주조된 것으로, 그 표면에 기록된 것으로 보아 그들의 해상활동이 유럽에서도 매우 활발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 볼가강 연안을 따라 주조화가 발견되었으므로 이슬람 제국과 발틱 해안 사이에 상당한 정도의 교역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 교역은 주로 카스피아해, 흑해 및 러시아를 통하여 이루어졌다. 이 지역으로부터 무슬림들은 주로 가죽, 털가죽 및 琥珀 등을 수입하였다.
10세기 말의 지리학자 무카다시(Muqaddasi)는 볼가강과 흐와리즘(Khw rism)을 통하여 수입되는 상품으로 검은 담비, 흰 담비, 잿빛 다람쥐, 족제비, 여우, 수달피, 점이 있는 산토끼, 산양 등의 모피와 밀초, 화살나무, 자작나무 껍질, 털모자, 생선 아교, 생선 이빨, 수달피 모자, 호박, 새그린 가죽(Shagreen), 꿀, 개암, 매, 칼, 갑옷, 할란즈(Khalanj) 나무, 노예, 양과 소 등을 열거하고 있다. 그러나, 무슬림들 자신이 스칸디나비아까지 들어갔다고는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그들은 볼가강에 중개자로 활동하고 있는 하자르(Khazar)족과 불가르(Bulgar)족을 통하여 강변에서 남쪽으로 장사하러 온 북부 사람을 만나 교역한 것 같다.
무슬림들이 북유럽 사람과 교역한 결과 초기의 스웨덴 주화도 무슬림의 은화인 디르함의 무게에 바탕을 두고 있고, 또 아이슬람드의 옛 문헌에도 아랍어 단어가 몇 개 나타나게 되었다. 무슬림은 또 육로를 통하여 아프리카와도 교역이 성하였는데, 그 수입품은 금과 노예였다. 서유럽과의 교역은 아랍인의 정복사업 때문에 한동안 중단되었으나, 유대인들이 지중해를 사이에 두고 적대적인 기독교와 무슬림 세계를 연결시키는 중개인 역할을 하여 간접적인 교역이 이루어졌다.
9세기 초반기의 지리학자 이븐 후르다드비(Ibn Khurdadhbih)는 프랑스 남부에서 온 유대인 상인에 대하여 기술하고 있다.
"그들은 아랍어, 페르시아어, 그리스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및 슬러브어를 말한다. 그들은 서에서 동으로, 동에서 서로, 육로와 해로를 통해 다닌다. 서쪽에서 그들은 환관, 젊은 남녀 노예, 금박 천, 수달피와 검은 담비의 모피와 또 다른 모피 종류 및 칼을 가져왔다.
그들은 서부 지중해의 프랑크 땅에서 배를 타고 파라마(Faram )에 상륙한다. 그 곳에서 가져온 상품을 낙타 등에 싣고, 약 25파라상(Parasang) 떨어진 쿨줌(Qulzum)으로 간다. 그 다음, 그들은 쿨줌에서 동쪽 바다-홍해-를 통하여 알자르(Al-J r)와 제다로 가고, 더욱 나아가서는 신드, 인도 및 중국에까지 항해한다. 중국으로부터 그들은 사향, 심향, 녹향, 계피 및 다른 물품을 가지고 쿨줌으로 돌아온다. 그 다음, 그들은 다시 이 물건을 파라마로 옮겨 서쪽 바다-지중해-에서 배로 운반한다. 일부는 콘스탄티노플로 가서 그리스 사람에게 팔고, 또 일부는 프랑크 족의 왕들에게 가지고 가서 거기서 그들에게 판다.
때때로 그들은 프랑크 땅에서 상품을 싣고 서쪽 바다를 거쳐 안티오크(Antioh)로 간다. 그 후, 그들은 알 자비야(Al-J biya)까지 3일 동안 육로로 가서 그 곳에서 유프라테스 강을 따라 바그다드까지 배를 타고 간다. 그 다음, 티그리스강을 따라 우불라로 내려간다. 그리고는 우불라로부터 오만, 신드, 인도 및 중국 등으로 간다."
국가는 재정적인 이유 때문에 국가 독점 내지 공익 산업을 어느 정도 장려하였으나, 교역에 대해서는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았다. 심지어 도로의 유지와 같은 일에도 국가는 아무런 대책도 강구하지 않았다. 더구나, 상인들은 관료들의 통제에 대항하여 항상 적절한 대책을 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
국가의 경제적 통제는 초기에 식료품의 투기 행위를 감지하는 것과, 또 무흐타십(Mu tasib)이란 관료를 임명하여 시장을 감독하는 정도였다. 이 정책은 효과적으로는 시행되지 않았다. 무흐타십은 시장 상품의 질과 그 가격의 공정성, 또는 정확한 계량기를 감독하는 것이 그들의 임무였다. 그러나, 후기에는 국가가 직접 상업활동에 간섭하고, 심지어 몇몇 상품에는 독점을 추구하였다.
9세기경에 대규모의 교역과 산업활동이 활발하자, 그에 따라 금융업도 발생하였다. 이슬람 제국은 復本位 화폐제도였다. 동부의 옛 페르시아 영토에서는 은화인 디르함을, 서부의 옛 비잔틴 땅에서는 금화인 디나르를 주로 사용하였다.
1디르함은 은 2.97g을, 1디나르는 금 4.25g을 표준으로 하여 주조하였다. 이 두 주화의 상대적 가치를 고정화하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양 금속의 가격이 변화함에 따라 유동적으로 변하였다. 그리하여, 이슬람 제국의 시장에는 거의 빠짐없이 환전상( arr f)이 등장하였다. 9세기 경에는 이 환전상이 금융업자로 그 규모가 크게 발전하였으며, 또 대무역업자도 금융업에 투자하였다.
금융상은 바그다드에 본점을, 다른 지방 도시에 지점을 두고 상호 어음과 신용증서 같은 것도 교환하였다. 심지어 바그다드에서 발행한 어음을 모로코에서 현찰로 찾을 수도 있었다. 동부의 무역 중심지인 바스라에서는 무역상마다 금융구좌를 가지고 있어서, 시장(bazaar)에서의 지불 수단으로 현찰이 아닌 어음만을 사용하였다.
10세기에는 정부도 은행을 만들어 들어올 세금을 담보로 하여 미리 상당량의 금액을 빌어 쓰기도 하였다. 이슬람법에는 이자를 받는 것이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대부분의 금융업자는 유대인이나 기독교도였다. 상업활동이 번영하였으므로 당시의 문헌에는 무역업자의 이상적인 像이 묘사되어 있다.
교조 무함마드의 언행록과 칼리프 오마르 1세와 해학가 자히즈(J iz)에 관한 문헌 속에서도 무역업자에 대한 칭송의 말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6)사회 생활
이와 같이, 경제 생활의 발전에 발을 맞추어 사회 생활에도 변화가 나타나 인구의 인종적, 계층적 구성 형태에 새로운 면이 나타났다. 아랍 戰士층의 지위는 저하되어 국가로부터 연금이나 특권도 잃게 되었다.
압바시야조의 사가들은 아랍부족 간의 불화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고 있는데, 이것은 결코 부족 간의 충돌이 줄어졌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19세기까지 시리아의 북부 아랍부족인 카이스(Qais)와 남부 아랍부족인 칼브(Kalb)의 후손들이 서로 숨막히는 불화 속에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사실은 아랍부족의 상류층은 政事와 같은 공공적인 문제에 관여할 힘을 잃어 영향력이 시들었음을 말하며, 또 그들 간의 불화나 다툼은 이미 사회적인 중요성을 잃어버린 것을 의미할 따름이다.
이 때부터 많은 아랍부족들은 병영 도시 암사르를 버리고 유목생활로 돌아가거나 또는 촌으로 들어가 정착생활을 하게 되었다. 무슬림 세계의 도시는 그 성격이 종래처럼 점령지를 관할하는 주둔군의 병영 도시에서 무역상과 공예인들이 상호 부조하고, 공동 이익을 방어하기 위한 장인 조합을 스스로 결성하는 곳, 즉 시장과 상품 교환의 장소로 변하였다. 그렇다고 하여 아랍인들이 그들의 우위성을 완전히 잃은 것도 아니었다. 정부의 고관직에는 아직도 아랍인이 다수를 차지하였다. 또, 칼리프도 여전히 아랍인이었으며, 스스로 아랍인임을 자랑하였고, 아랍어는 여전히 정부기관의 유일한 공용어였다. 이러한 아랍인들의 우월성이 이론상으로는 유지되었기 때문에 학계나 식자층 가운데는 비아랍계 무슬림이 아랍계와 평등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나타나 슈우비야(Shu' biya) 운동을 일으켰다. 이 운동은 정치적이기보다 문화적인 것이어서 주로 페르시아계 무슬림이 주창하였으며, 그들은 이 때부터 페르시아어로 저술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중요한 변화가 아랍이라는 단어 자체의 의미 속에서도 일어났다. 종래까지의 아랍족이라는 혈연적 개념에서 벗어나, 무슬림이 아랍어를 구사하면 곧 아랍인으로 간주하는 민중의 개념으로 바뀌어졌다. 마왈리들의 사회적 해방, 즉 차별 정책이 철폐됨으로써 그들은 100% 아랍인으로 받아들여졌다. 심지어 칼리프의 근위병인 후라산 병정들도 아랍화하였다.
오늘날 이란의 서부 국경 너머 있는 지역에는 이 아랍화 과정이 암사르의 아랍인이 지방으로 흩어지고, 또 도시의 교통어가 아랍어로 남아 그 주변으로 퍼져 나감에 따라 더욱 촉진되었다. 이러한 잔행 과정은 831년 이집트 반란을 일어난 아랍족과 콥트교도들이 공동으로 무슬림 지배층에 반대하여 반란을 일으킨 사실에서도 볼 수 있다. 결국, 이라크, 시리아, 이집트 등과 북아프리카의 기독교도나 유대인까지도 아랍어를 사용하게 되어 아랍인이란 말 자체도 그 의미가 국한되어 유목민을 뜻하게 되었다.
아랍 상류층을 대신하여 이제 압바시야 제국은 새로운 지배층을 가지게 되었으니, 그들은 곧 부유층과 학자층이다. 부유층은 대체로 그 재산이 엄청난 규모였다. 이 재산은 급료가 높은 관료직에 있으면서 그에 따른 여러 혜택, 즉 무역과 금융의 특전이나 투기할 기회의 포착, 또는 토지의 소유나 토지세 징수권을 통하여 소작인과 농민을 수탈하여 이루어졌다.
한 사료는 관료집안 출신의 한 젊은이가 상속받은 4만 디나르의 투자상황을 밝혀 주고 있다. 즉, 1천 디나르는 낡은 집을 수리하는데, 7천 디나르는 가구, 옷가지, 젊은 노비 및 오락시설의 구입에 소비하고, 2천 디나르는 신용할 수 있는 무역업자에 맡겨 자기를 위해 장사하도록 하고, 1만 디나르는 긴급할 때를 위하여 땅에 묻어 두고, 나머지 2만 디나르로 농장을 사서 그 수입으로 생계를 꾸려 가도록 하였다.
압바시야 제국의 비무슬림 백성인 딤미(Dhimmi)의 지위에 대하여 한동안 논란이 있었다. 일부 학자는 그들이 무슬림 정부가 베푼 관용성에 힘입어 무슬림과 대둥한 지위를 누렸다고 주장하였다. 딤미는 고율의 세금을 납부하였으며, 또 몇몇 불리한 조건에 시달리는 2등 백성이었으나 공개적인 박해는 거의 받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지위는 같은 시대의 서부 유럽에 거주하고 있었던 종교적 소수파에 비하면 월등히 나았다. 그들은 자유롭게 자기들의 종교를 믿는 데 구애받지 않았으며, 또 정상적인 재산권을 행사하였다. 또, 국가 공직에 봉사하여 종종 최고직인 와지르(재상)에 오르기도 하였다. 그들은 공예인 조합에도 가입할 수 있었고, 심지어 몇몇 조합은 그들의 손아귀에 있었다. 그들은 신앙 때문에 순교하거나 또는 망명하는 일은 없었다.
2.압바시야조 後期(945∼1258)
압바시야조('Abb siya朝)가 등장하고 우마이야조(Umaiya朝)가 무너지는 과도기의 혼란한 틈을 이용하여, 서쪽의 변방 지역인 스페인과 북아프리카 지역은 점차 분리현상을 띠고 있었으나, 제국의 중심부인 중근동 지역은 그나마 통일을 지탱하여 9세기 중엽까지 유지되었다. 그러나, 제국의 영토가 너무나 크고, 중앙 정부의 내란이 자주 일어나게 되자 제국은 급격히 아랍, 페르시아 및 터키인의 영죽 다스리는 지역으로 분열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 분열은 결코 경제나 문화의 쇠약을 초래하지 않았다. 반대로, 지역에 따라서는 유능한 통치자 아래서 오히려 경제적, 문화적 활동의 꽃을 피워 이슬람 문화 건설에 크게 공헌하였다. 이 제국은 각 지역 간에 경제적 발전 단계와 역사적, 문화적 전통에 있어서 너무나 커다란 차이점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압바시야조와 함께 노출되기 시작하였다.
각 지역 간의 경제적, 인종적 관계는 너무 소원하여 단일 시장을 형성할 수가 없었다. 또, 맘룩(Maml k, 소유된 자) 출신 장교들의 횡포에 의한 칼리프의 허수아비化 및 환관, 칼리프의 친척, 고급 관료들의 음모 술수, 그리고 칼리프 궁의 생활이 극도로 사치화함으로써 국가재정이 핍박하게 되어 칼리프의 권위는 크게 떨어졌다. 이에 반비례하여 지방의 총독, 군 사령관, 고급 관료의 권위는 더욱 높아졌고, 그에 따라 그들은 위임지역을 사유화함으로써 점차 봉건적인 사유형태로 발전하여 정치적으로 분리, 독립을 갈구하게 되었다. 그러나, 허약한 중앙 정부는 이 현상을 묵묵히 받아들여야 하엿삳. 더구나, 일반 서민드의 반란이 극렬화하여 중앙 정부의 재정이 핍박하게 되었고, 또 권위를 실추시켰기 때문에 지방의 분열현상은 어쩔 수 없었다. 이 서민들의 반란은 대체로 노예, 가난한 농민 및 도시의 천민들이 사회적, 종교적 또는 민족적인 동기에서 지방의 권력자나 종교 지도자를 등에 업고 일어난 것이었다.
1)북아프리카 지역
756년에 먼저 압바시야조의 박해를 피해 나간 前朝의 칼리프 히샴(Hish m, 724∼743)의 손자인 압둘 라만('Abd al-Rahm n)이 시리아 출신 군인의 도움을 받아 스페인에 우마이야조를 건립하여 독립하였다.
그 뒤를 이어 785년에 하산 이븐 알리( asan Ibn 'Ali)의 증손자 이드리스 이븐 압둘라(Idris Ibn 'Abdull h)가 메디나에서 알리파의 반란을 주도하다가 실패하자 모로코로 도망하여 그 곳에서 왕국을 건설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 이드리스 왕조(788∼974)는 거의 200년간 지속되었으며, 역사상 최초의 시아 국가였다. 비록 모로코의 주민은 대부분 베르베르(Berber)족의 순니였지만, 중앙 정부에 대한 반발심에서 그를 지지하였다. 이 왕국은 북아프리카의 파티마조와 스페인의 우마이야조 사이에 끼어 곤경을 겪다가 결국 파티마조의 침입을 받아 망하였다. 이와 같은 적대적인 세력이 스페인과 모로코에 정립하게 되자, 위협을 느낀 압바시야조의 칼리프 하룬 알 라쉬드(H r n al-Rashid)는 튀니지의 카이로완 지역에서 세력을 확립한 순니 출신의 이브라힘 이븐 알 아글라브(Ibr him Ibn al-Aghlab)를 800년에 총독으로 임명하여 그의 현지 기성조직을 임명하였고, 反압바시야 세력의 東進을 막게 하였다.
이 아글라브조(800∼909)의 왕은 아미르(Amir)라는 칭호에 만족하고, 그들의 鑄貨에 압바시야조의 칼리프 이름을 새김으로써 그 종주권을 인정하였다. 이 왕조는 카르타고(Cartago)의 후예답게 강력한 해군을 만들어 지중해의 해상권을 장악했으며, 유럽 기독교 국가의 해안을 괴롭혔고 902년에는 시실리(Sicily)섬을 완전 장악하였다. 또, 아글라브 왕은 수도 카이로완(Qairow n)에 메카, 메디나 및 예루살렘의 성원에 버금가는 이슬람 성원을 지어 서방 이슬람의 본산을 이루었다.
2)이란 지역
하룬 알 라쉬드(H r n al-Rashid, 786∼809)가 통치하던 시절에는 이란 출신의 문인들 사이에 슈우비야(Shu' biya)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하여 아랍인과 페르시아인의 동등성은 물론이며, 나아가서는 이란적인 것이 아랍적인 것보다 우월하다는 주장까지 나오게 되었다. 더구나, 이란 인은 바그다드로부터의 직접통치를 싫어하였다.
당시, 이란 문화의 중심지는 후라산(Khur s n)과 그 이웃인 트란스옥시아나 지역이었고, 또 이 지역은 바그다드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으며, 지리적으로도 별다른 곳이었다. 그리하여 하룬은 그의 아들 마문(Ma'm n)에게 동부 지역의 통치를 맡겼다. 그는 또한 압바시야 공주에게서 난 아들 아민(Amin)을 제1후계자로, 또 페르시아 출신 노예 부인에게서 난 마문을 제2후계자로 임명하였다. 그가 죽은 뒤, 곧 아민(809∼813)과 마문 사이에 형제싸움이 일어나 결국 마문이 승리를 거두었다. 이 때, 페르시아 출신의 타히르(T hir) 장군이 마문을 크게 도왔으므로, 820년에 동부주를 맡게 되었다. 이 타히르 왕국은 수도를 마르브(Marv)에 두었으나, 후에 니샤푸르(Nish p r)로 옮겼다. 이 왕국은 바그다드의 칼리프를 宗主로 받들었으나, 821년에 금요일 집단 예배시에 칼리프의 이름을 생략하였다. 그러나, 마문은 현명하게 아무런 반대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타히르는 완전한 자치를 누릴 수 있었다. 이것이 하산조가 망한 후 이란인이 세운 최초의 왕국이다.
타히르가 죽은 후, 그의 아들 탈하( al a)가 뒤를 이을 때도 마문을 인준하였다. 마문은 당시 페르시아인 바박(B bak, 또는 P pak)의 지도 아래 조로아스터교의 일파인 마즈닥교(Mazdaki)파가 아제르바이잔 지방에서 816년부터 반란을 일으켰으므로 이의 진압에 골몰하였다. 그들은 후라미(K urrami, 즐거운 이들)라 불렸으며, 그들의 교리에는 공산주의적인 요소도 다소 포함되어 있었다. 또, 탈하의 동생이 마문의 군 사령관으로 있었고, 칼리프 군의 將卒들은 대체로 후라산 출신이었으므로 이들은 고향 사람과 전쟁하는 것을 꺼렸다. 더구나, 이슬람 이전에 인도에서 메소포타미아 남부에 이주한 주트(Zutt, 집시族)의 반란이 있었기에 더욱 불가능하였으며, 이들의 반란은 834∼835년에 진압되었다. 타히르 왕국은 옛 페르시아 제국의 전통적인 임무인 중앙 아시아에서 들어오는 유목민의 침략을 방어하는 역할을 하였다.
후라산의 남부에 있는 시지스탄(Sijist n) 지역에는 하와리지파의 반란이 자주 일어났으므로, 이 지역 주민은 스스로 자위대를 조직하였다. 이 자위대에서 야쿱 이븐 라이스(Ya'qub Ibn Layth)라는 세공장이( aff r)가 뛰어난 명성을 얻어 지도자로 부각되었는데, 그는 점차 세력을 확대하여 875년에 타히르 왕국의 수도인 니샤푸르를 점령하여 동부 페르시아와 아프가니스탄 지역을 통합시켰으며, 876년에는 바그다드 근교까지 진출하였다.
타히르조가 순니 지배층의 이익과 사회 구조의 현상 유지에 주안점을 두었다면, 야쿱은 山賊(ayyar n) 출신이고, 그가 세운 사파르조( aff r朝, 867∼913)의 지지기반은 평민이었다. 그의 추종자는 종교적, 사회적인 면에서 다양한 요소를 지지고 있었다. 이 조는 사만조와 가즈나조에 점령되었으나, 시지스탄의 토후국으로서의 명맥은 15세기 말까지 지속되었다. 타히르조가 페르시아의 옛 귀족(dihq n) 세력의 재생이라면 사파르조는 평민 세력을 대표하였다.
페르시아의 옛 귀족세력의 부활을 대표하는 또 다른 왕조가 트란스옥시아나에서 나타났다. 곧 사만조(S m n朝, 874∼999)로서, 조상은 본래 발흐(Balkh)의 배화교 성지자였다. 이 왕조의 창시자는 나스르 이븐 아흐마드(Na r Ibn Ahmad, 874∼982)이지만, 실질적으로 독립된 세력을 형성한 이는 그의 동생인 이스마일(Ism 'il, 892∼907)이었다.
이 왕조는 타히르 왕국의 작은 주지사로서 출발하였으나, 4대 왕인 나스르 2세(Na r Ⅱ, 913∼943) 때에는 트란시옥시아나와 후라산 뿐만 아니라, 사파르 왕국도 예속화시켜 그 영토가 시지스탄, 케르만(Kerm n), 주르잔(Jurj n), 라이(Rayy) 및 타바리스탄(Tabarist n)에까지 뻗쳤다.
사만조는 겉으로는 바그다드의 칼리프에게 충성을 바치는 체했지만 실질적으로는 완전한 독립을 유지하였다. 칼리프의 눈에 사만조의 왕은 단순히 아미르( mir, 총독), 또는 아밀(' mil, 징세관)에 불과하지만, 자신의 영토 안에서 그의 권위는 절대적이었다. 이 사만조는 또 페르시아 문학의 재생을 열어 준 왕조였다. 이슬람이 페르시아 제국을 정복한 이후 무슬림이 된 페르시아인은 문학적 표현 수단으로 아랍어를 사용하였다.
그러나 사만조는 페르시아어를 장려하였고, 수도 부하라(Bukh ra)에 왕립 도서관을 세워 동서고금의 많은 서적을 보유하였다. 이 도서관을 페르시아의 詩聖인 피르다우시(Firdausi, 934∼1020)가 어린 시절에 자주 드나들었다. 또, 루다키(R daki, 941 사망)는 이슬람화한 페르시아어를 사용한 최초의 시인이었으며, 발아미(Bal'ami)는 963년에 타바리(Tabari, 923 사망)의 유명한 역사서를 페르시아어로 요약하였다. 또, 재상 자이하니(Jayh ni)는 지리서를 저술하여 이 분야에 새로운 지식을 가져다 주었다.
3)비옥한 초생달 지역과 이집트
한편, 제국의 중앙부인 이라크에서는 주트족의 반란이 진압된 후, 한 세대가 지난 869년에 바스라 지역에 일하고 있었던 흑인 노예의 반란이 일어났다. 그들은 잔즈(Zanj)로 알려졌으며, 그들의 지도자는 알리 계통이라 하나 하와리지의 만민평등사상을 고취하고 있었다. 그들은 여러 번 바스라시와 남부 이라크를 장악하여 바그다드까지 위협하였다. 만일, 잔즈 반란군이 제안한 사파르조와의 연합이 이루어졌다면 압바시야조는 종말을 고했을 것이다. 이 반란은 끈덕지게 지속되었으며, 883년에 당시 칼리프의 동생이며 실권자였던 알 무와파크(Al-Muwaffaq)에 의하여 비로소 섬멸하였다.
9세기 경에는 이슬람의 수많은 종파와 학파가 다시는 통합할 수 없을 정도로 갈라져 제각기 교회와 학풍의 체계를 완성시켜 가고 있었다. 그와 더불어 8, 9세기에 각 지방에 분리주의적인 성격이 시대의 흐름이 되었다. 하와리지파는 무슬림의 평등 사상에 호소하면서 비아랍계 무슬림의 지지를 얻으러ㅕ고 제국의 모든 영역에서 애썼으나 큰 성공은 보지 못하였다. 그러나 시아파는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사회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시아파에게 동정적으로 변한 때문인지, 이를 무마할 목적으로 칼리프 마문은 자기의 후계자로 제8대 시아파 이맘인 알리 알 리다('Ali al-Ridh , 818 사망)를 지명하였으나, 몇 년 후에는 그를 독살시킨 것 같다.
북아프리카에서는 시아파인 이디리스조(788∼974)가 모로코에서 독립하고, 그 뒤를 이어 아글라브조(800∼909)가 튀니지에서 자치를 확립하였다. 이 영향은 이집트에도 끼쳤다. 나일강 하류는 8세기에 콥트족의 반란과 전염병의 발생 등으로 곤욕을 치렀으나 칼리프에 대한 충성은 변함없었고, 또 9세기에 들어오자 경제력도 회복하였다.
파피루스가 종이에 밀려 그 산업이 쇠퇴하자 아랍인들은 쌀과 사탕수수의 재배로 대체하였다. 특히, 이집트는 귀금속광이 없었기 때문에 주민의 대다수가 주로 농산물 생산에 종사하였다.
압바시야조의 등장과 함께 칼리프의 가문에서 이집트 총독직을 독점해 왔으나, 856년 이후에는 터키족 출신의 장군이 총독직을 맡게 되었다. 이 총독은 이집트에 오지 않고 대체로 칼리프와 함께 바그다드나 사마라(S marr )의 궁전에 머무르면서 자기의 영향력을 보전하였다. 따라서, 총독은 대리인을 이집트에 보내어 관리하게 하였는데, 대리인으로 온 사람 가운데 중앙 아시아의 파르가나(Fargh na)에서 온 맘룩 출신의 아흐마드 이븐 툴룬(Ahmad Ibn T l n)은 자기 지위를 굳혀 868년부터 점차 독자적인 정책을 추구하였다.
그는 칼리프와 와지르(Wazir, 재상)의 소환 명령에도 불복하고, 심지어 중앙 정부에서 보낸 재정관을 몰아내어 재정 자립도를 강화하였다. 금요일 집단 예배시에 칼리프의 이름을 언급하고, 또 선물도 보냄으로써 바그다드의 종주권을 형식적으로 인정하였지만, 그는 883년의 사망시까지 이집트를 사실상 독자적으로 통치하였다. 더구나, 그는 현명한 조세정책과 군조직의 개혁을 통하여상당한 번영을 누렸다. 또, 이집트의 안전을 위하여 877년에 시리아 총독이 죽자 재빨리 팔레스타인과 시리아를 점령하여 이집트에 들어오는 길목을 확보하였다.
그의 아들 후마라와이흐(Khum rawayh)도 부업을 계승하여 독립성을 유지하였으나, 그가 896년에 다마스쿠스에서 급사하자 후계자 계승 문제로 내란이 일어난 틈을 타서 바그다드의 칼리프는 군대를 파견하여 툴룬조(868∼905)를 멸망시키고, 이집트의 통치권을 확보하였다. 이 툴룬 시대에 카이로에 병원, 聖院 등의 많은 건물이 세워져 오늘날에도 일부가 남아 있다. 그러나, 바그다드의 직접 통치는 오래가지 않았다. 역시 파르가나에서 온 터키인의 후손인 무함마드 이븐 투그즈(Mu ammad Ibn Tughj, 935∼946)가 이집트 총독으로 임명되어 왔다. 그는 곧 능력을 발휘하여 칼리프 알 라디(Al R i, 934∼940)로부터 옛 이란 지방 영주의 칭호인 익쉬드(Ikhshid)를 받게 되었으며, 이 칭호를 받음으로써 그는 다른 주의 총독보다 격이 높음을 과시하였다. 그러나, 이 익쉬드조(Ikhshid朝, 935∼966)는 문학과 예술활동에 아무런 공헌도 하지 못했으며, 서쪽에서 쳐들어온 파티마조의 군대에 의하여 망하였다.
4)파티마조(F ima朝, 909∼1171)
8세기 중엽부터 재야세력의 주도권은 하와리지로부터 시아파에게로 넘어갔다. 이런 와중에서도 이스마일파의 활약은 매우 눈부셨다. 이 파의 실질적 창시자인 압둘라 이븐 마이문('Abdull h Ibn Maim n)의 후계자인 사이드 이븐 후세인(Sa'id Ibn usain)은 선전요원(d 'i)인 압둘라 알 후세인 알 쉬이('Abdull h al- usain al-Shi'i)를 북아프리카로 파견하였다.
그는 자기 자신을 구세주(al-Mahdi)의 대변인이라 하면서 9세기 말경에 베르베르족에게 이스마일파의 교리를 포교하고 순니를 비난하였다. 당시 베르베르 부족들은 도시에 기반을 두고 있는 아글라브조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가 상당한 성공을 거두자 사이드는 북부 시리아의 거점을 떠나 북아프리카로 향하였다. 909년에 사이드는 베르베르 부족의 도움으로 아글라브조의 수도인 라카다(Raqq da)를 함락하고 나라를 세우는 데 성공하였다. 그 후, 그는 스스로 이맘 우바이둘라 알 마흐디(Im m 'Ubaidull h al-Mahdi)라 칭하고, 교조의 딸인 파티마(F ima)와 6대 이맘의 아들인 이스마일의 후손임을 주장하였다.
파티마조(F ima朝)의 등장은 이슬람 세계에 새로운 사태를 몰고 왔다. 그는 먼저 모로코에 있는 이드리스 왕조(788∼974)의 수도인 페즈(Fez)를 921년에 점령하여 전 영토를 병합하였다. 이 파티마조느 일곱 이맘파였으므로 압바시야조의 칼리프를 형식상으로도 인정하지 않음은 물론이고, 더 나아가서는 자기들만이 무슬림 공동체(Umma)의 합법적이 지도자임을 주장하였다. 그는 자기가 진정한 칼리프임을 주장함으로써 무슬림 세계는 바그다드, 스페인의 칼리프와 더불어 3명의 칼리프가 난립하였다. 그들의 태도가 이렇게 완강하였으므로, 그들은 북아프리카의 영역에만 만족하지 않고 찬탈자인 압바시야조에 대항함은 물론이고, 그들을 멸망시켜 동부의 통치권도 뺏으려고 하였다.
우바이둘라는 914년과 921년의 두 번에 걸쳐 당시 압바시야조의 통치하에 있는 이집트를 공격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파티마조의 제4대 칼리프였던 알 무이즈(Al-Mu'izz, 953∼975)는 963년에 당시 익쉬드조이 통치하에 있었던 이집트를 정복하고, 수도를 카이로로 옮겼다. 즉, 무슬림 세계는 수니의 동부와 이스마일파의 서부로 분열, 대립되었다. 특히 전통적으로 티그리스, 유프라테스강 지역과 나일강 지역이 정치적으로 분리되어 있는 한 양대 세력은 충돌하지 않을 수 없었고, 또 이러한 대립이 지속되는 한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지역은 각각 자기 방어에 필요한 전략요지였다. 따라서, 이 지역은 세력이 강력한 편에 병합되거나 또는 양 세력이 균형을 잡을 때에는 스스로 독립국가를 형성하여 왔다. 이와 같은 형세는 1517년 오스만 투르크가 카이로를 점령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 파티마조는 제5대 칼리프 알 아지즈(Al-'Aziz, 975∼996)의 통치기간 중 세력이 융성하여 그의 이름은 금요일 집단예배 때 북아프리카 전역과 예멘, 메카, 다마스쿠스 등에도 언급되었다. 그러나, 그는 압바시아조의 무타심(Mu'ta im, 833∼942)처럼 터키족과 아프리카 흑인을 맘룩(Mamluk)으로 받아들였다. 이들 맘룩군은 베르베르족의 근위병과 충돌하게 되어 결국 내란이 일어나게 되었고, 파티마조의 종말을 가져오게 되었다.
5)부와이흐조(Buwaih朝, 945∼1055)
서부가 파티마조를 종심으로 세력이 통일되어 가는 데 비하여, 동부는 계속해서 그 분열상을 나타내고 있었다. 사파르( aff r, 867∼913)가 사만조(S m n朝)에 의하여 망한 후, 약 150년 동안 이란 지역은 혼란을 거듭하였다. 이 틈을 이용하여 타바리스탄( abarist n)의 마르다위즈(Mard vij)는 이스마일파의 이름 아래 배화교적인 페르시아 문명을 재건하기 위해 928년경에는 이란 중부에 상당한 세력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935년에 그가 암살당하자 이 세력은 풀이 꺾어졌다. 대신 등장한 세력이 카스피아해 남쪽의 다일람(Daylam) 지역 출신인 페르시아의 열 두 이맘파 시아에 속하는 부와이흐(Buwaih, 일명 B yeh) 가문을 중심으로 해서 일어났다. 이들 3형제는 본래 마르다위즈의 휘하에서 종군하고 있었으나, 그가 암살당하자 곧 맏형 알리('Ali)는 이스파한(I fah n)과 파르스(F rs)州를, 둘째인 하산( asan)은 지발(Jib l) 지역을, 막내인 아흐마드(A mad)는 케르만(Kerm n)과 후지스탄 지역을 장악하였다.
945년에 메소포타미아에서 기근 때문에 혼란이 일자, 아흐마드는 군을 동원하여 바그다드를 점령하였고, 칼리프의 근위병인 터키계 맘룩 용병들은 저항할 생각도 않고 도망하였다. 이제 바그다드의 수니 칼리프는 터키계 맘룩군의 손아귀에서 벗어났으나, 페르시아 출신의 열 두 이맘파 시아인 아흐마드의 수중에 떨어졌다. 당시 영내 거주민의 절대 다수가 수니였으므로 부와이흐조의 아흐마드는 수니 칼리프를 제거할 수 없었다. 결국 칼리프는 아흐마드에게 무이즈 알 다울라(Mu'izz al-Dawla, 왕국의 간성)라는 칭호를 수여하였다. 그의 공식적 지위는 최고 사령관(Amir al-Umara')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는 통치의 상징으로 자기의 이름도 금요일 집단예배(Khutba)에서 칼리프의 이름과 더불어 기원되기를 주장하여 실현시켰으며, 또 그의 이름을 주화에도 새겼다.
부와이흐조가 바그다드를 지배하는 100여년 동안 그들은 칼리프를 마음대로 즉위 또는 폐위싴켰다. 3형제가 죽은 뒤에는 2세들 사이에 권력다툼이 일어나 내란으로 몰고 갔으나, 그들 가운데 아두드 알 다울라('A ud al-Dawla, 949∼983)가 경쟁자를 물리치고 부와이흐조의 群小諸國을 통일하여 커다란 제국의 세웠다. 그러나, 그가 죽은 후 다시 군소 국가로 전락하여 내분을 일으켰다. 이 제국의 동부 영토는 1029년에 가즈나(Ghazna) 왕국에 병합되었고, 1055년에는 지역이 셀주크(Salj q)투르크의 침략으로 멸망하였다. 부와이흐조 말기에는 이라크에 내분이 너무나 심각했기 때문에 외적에 대하여 국경을 방어할 힘도, 관심도 없었다. 이 왕조가 무슬림 세계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는 기간에는 바그다드의 중앙 정부는 비무슬림 국가와의 직접적인 접촉은 거의 없었다.
890년경부터 비잔틴 제국과의 국경인 모술(Mosul) 지역에 타글리브(Taghlib) 부족 출신이며 시아파인 함단( amd n)家門이 세력을 이루고 있었다. 이 가문은 바그다드의 중앙 정부와 순탄하지 않는 관계에 있었으나, 905년경에는 모술지역 주지사로 이 가문의 출신이 임명되었다. 지사의 아들인 하산( asan)은 929년에 지사직을 계승하여 곧 북부 메소포타미아와 북부 시리아 지역을 확보한 후, 칼리프에게 이 지역에 대한 그의 권위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여 줄 것을 강요하여 결국 나시르 알 다울라(N ir al-Dawla, 왕조의 승리자)라는 칭호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부와이흐조는 945년에 바그다드를 정복한 후 함단조( amd n朝, 905∼1004)를 강요하여 종주권을 인정받았다. 한편, 나시르 알 다울라의 동생인 사이프 알 다울라(Sayf al-Dawla, 왕조의 칼, 944∼967)는 북부 시리아의 알렙포(Aleppo, 아랍名 alab)에 근거를 잡고, 비잔틴 제국에 대한 전쟁으로 이슬람 신앙의 방패로서 명성을 떨쳤다. 그러나, 비잔틴 제국의 세력이 위력을 발휘하여 150년간 무슬림 통치하에 있던 크레타(Creta)와 키프러스(Cyprus) 등의 두 섬을 각각 961년과 965년에 점령하였다.
사이프 알 다울라가 죽은 뒤에 이 알렙포의 함단조는 남쪽에서 올라오는 파티마조 세력의 팽창과 북쪽에서 내려오는 비잔틴 제국의 잠식정책 사이에 끼어 우왕좌왕하다가 결국에는 파티마조의 중주권을 인정하여 망하고 말았다. 이 왕조는 문학과 예술의 후견자로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고전 아랍문학이 말기에 접어들었을 때 나온 최대의 시인인 무탄나비(Mutannabi, 965 사망) 및 이슬람 이전 아랍인들의 시를 수록한 歌謠書(Kit b al-Agh ni)를 만들어 내어 기념비적 존재가 된 이스파하니(Isfah ni, 967 사망) 등도 모두 이 왕조의 후견을 받아 그들의 저서를 출간하였다.
6)중앙 아시아
한편, 무슬림 세계의 동부 변경에서 페르시아의 문화 전통을 부흥시켰던 사만조의 주된 산업은 농업이었으며, 이 농업의 번성은 광범위한 관개시설의 확장과 그 유지에 달려 있었다.
강우량이 적은 이 지역의 관걔시설은 주로 물줄기를 끌어들여 중발하지 않게 지하로 흐르게 하는 수로망(qan t)이었다. 그러나 사회의 안정이 무너지게 되면 이 시설도 곧 훼손을 입게 되고, 그 결과로 농업 수확량은 격감된다. 사만조의 정책도 이 객관적 현실에 제약을 받게 된다. 이 왕조의 전성기를 누린 나스르 2세(Na r Ⅱ, 913∼943)가 죽은 후 내분이 일어났으므로 지방의 영주(dihq n)를 다스리기가 점차 힘들었다. 더구나, 군 내부에 터키계 출신의 장교 수는 점차 늘어나 영향력도 강화되어서 때때로 불만분자와 결탁하여 음모를 꾸몄으므로, 사만조의 통치자는 840년 이후 북쪽의 天山山脈 지역에 세력을 확장시켜 압력을 가하는 동시에 터키계 부족인 카를룩(Qarluk)과 손을 잡거나, 또는 점차 상승세를 타고 있는 카라한조(Qara-Khan朝, 일명 Ilig Khan, 992∼1211)와 협력하여 지탱하였다.
이 카라한조의 이름은 통치자의 칭호 속에 '카라'라는 말이 흔히 나오기 때문에 유럽 학자들이 그렇게 붙인 것으로, 이 왕조에는 대 카간(qaqhan), 부 카간 및 소 카간 등의 수많은 칭호가 있다. 이것은 곧 수많은 부족들이 느슨하게 뭉쳐서 연합국을 형성하였음을 말하고 있다. 권력구조 및 칭호에 대한 연구물이 최근에 많이 나왔으며, 그에 대한 평가도 좋은 편이다. 이 왕조는 터키족이 세운 최초의 이슬람 국가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사만조의 왕인 만수르 1세(Mans r Ⅰ, 961∼976)와 누흐 2세(N h Ⅱ, 976∼997)는 이러한 어려움 때문에 더 지탱할 수 없어 10세기 후반에는 아프가니스탄의 가즈나(Ghazna) 지방의 지사이며 맘룩 출신 군인이었던 가즈나조(Ghazna朝, 997∼1186)의 술탄 마흐무드(Sult n Ma m d, 997∼1030)에게 자주 원조를 칭하였다. 이 술탄이란 칭호는 본래 통치 또는 권위를 뜻하였으나, 10세기 경에 통치자의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물론, 그는 이와 같은 청을 받아들였으나, 그 댓가로 여러 주의 양도를 요구하였다. 결국 옥수스(Oxus)강 남쪽 사만조의 영토는 가즈나조에 넘어가고, 그 북쪽인 트란스옥시아나는 카라한조의 영향권에 떨어졌다.
사만조의 붕괴는 이제 막 부활한 페르시아 문명에 상처를 입히지 않았다. 이 사만조는 이란의 정신적 유산과 이슬람교를 터키족 가운데 퍼뜨리는 데 크게 공헌하였고, 그에 감화된 가즈나조(Ghazna朝)는 사만조의 유업을 계승하여 이어 나갔다. 또, 종교적으로도 철저한 수니(Suuni)였다. 유업을 계승하여 이어 나갔다. 그들이 세운 터키계 인종의 수니적 전통은 터키계에 속하지만, 페르시아의 시아(Shi'a) 전통 밑에 수세기 동안 살아 온 아제르바이잔족을 제외하고는 오늘날까지 그대로 지켜지고 있다.
이들 터키계 인종은 페르시아의 고대 非이슬람적 전통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술탄 마흐무드는 997년에 아버지를 이어 왕위에 오른 뒤, 군사 및 정치 지도자로서의 뛰어난 역량을 발휘하여 인도의 판잡(Panj b), 물탄(Multan) 및 구자라트(Gujar t) 등을 정복하였다. 이 왕조는 라호르(Lahore)에 수도를 정하여 이란 지역에서 세력을 잃은 후에도 150년간이나 지속하였다. 또한 술탄 마흐무드는 문학에도 관심을 기울여, 오늘날까지 세계의 고전문학 가운데 손꼽히는 페르시아의 시성 피르다우시(Firdausi, 1020 사망)가 지은 민족 서사시 샤나메(Shah-Name, 왕서)가 나오게 하였다. 이 서사시는 본래 마흐무드가 다른 시인에게 청탁하였으나 요절하여 결국 피르다우시에 의하여 완성되었다.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마흐무드는 그에게 매 싯귀(詩句)마다 금화 한 닢을 약속하였으나, 막상 싯귀가 2만에 이르자 은화를 대신 주었다. 피르다우시는 이 시를 지어서 페르시아의 민족시인으로 지금까지 거족적으로 추앙받고 있으며, 또 자료로 이븐 알 무카파(Ibn al-Muqaff ', 728 사망)와 타알리비(Tha'alibe, 1038 사망)가 번역한 아랍어본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이 서사시는 이슬람 이전 페르시아인의 역사를 전설적으로 이상화시켜 묘사한 것으로, 시의 주인공들은 모두 배화교 신자였다. 이 작품은 페르시아어를 이슬람의 문화언어로 그 위상을 올려 놓았고, 수많은 문학작품이 뒤를 잇게 하여 현대 페르시아어의 모태가 되었다. 비록 아랍어의 어휘가 최근까지 페르시아어에 도입되었을지라도 이 때부터 페르시아인의 지성적 활동은 독자적인 길을 걸었다.
이 왕조는 천재적 학자인 알 비루니(Al-Bir ni, 1048 사망)도 후원하여 수학, 천문학에 관한 많은 저서를 남기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7)셀주크조(Salj q朝, 1038∼1194)
가즈나조의 마흐무드가 1030년에 죽은 후, 곧 술탄 자리를 놓고 형제간에 싸움이 일어났다. 마수드(Mas' d, 1031∼1041)는 아버지가 후계자로 지명한 형을 무리치고 술탄이 되어 그 능력을 발휘했으나, 1041년에 살해당하였다. 그 후, 이미 970년경에 오늘날의 카자흐스탄(Kazakhst n) 지역에서 부하라(Bukh r ) 지역으로 들어온 오구즈 터키인(Oghuz 또는 Ghuzz Turks)을 이끄는 한 씨족과 내분에 휩싸인 가즈나조는 전쟁을 치러야 했다. 이 씨족장의 가문에 속하는 한 사람의 이름이 살죽(Salj q, 여기서 영어의 Seljuq)이었다. 그들의 자손은 카라한조와 함께 번성하였다.
셀주크조의 창립자는 형제인 투그릴 백(Tughril Beg, 1038∼1163)과 차그릴 백(Chaghril Beg)이었다. 두 사람은 터키 부족의 관습에 따라, 즉 카라한조와 마찬가지로 정복한 영토를 자기 가문의 여러 공자에게 봉건적, 가부장적 원칙을 적용하여 분할하였다. 1040년에 두 사람은 단단칸(Dand nq n)에서 일어난 전투에서 가즈나조의 술탄 마수드로부터 결정적인 승리르 거두어 후라산州를 빼앗고, 내분으로 허약해진 가즈나조를 페르시아의 국경 밖으로 밀어내어 인도에서만 명백을 잇게 하였다. 형제는 또 부와이흐조에 대해서도 연거푸 승이를 거두어 중앙 및 서부 이란을 점령하여 이스파한에 근거를 굳히고, 1055년에는 바그다드를 함락시켜 110년간에 걸친 칼리프에 대한 부와이흐조의 後見을 끝냈다. 비록 칼리프의 존재는 상징적이었지만, 수니 칼리프를 시아인 부와이흐조가 통제하는 모순을 제거하고 수니인 셀주크의 보호 아래 두었다.
무슬림 세계의 동부는 200년에 걸친 분열과 혼란 끝에 셀주크조가 통일의 대업을 이루어 이란 지역, 메소포타미아 및 시리아가 단일 행정 관할 아래 놓이게 되었다. 비록 제국의 영토는 셀주크조의 공자들 사이에 나누어졌으나, 강력한 연장자가 살아있는 한 분열의 위험은 없었다.
강력한 인물은 곧 투그릴 백과 그의 조카이자 후계자인 알프 아르슬란(Alp Arsl n, 1063∼1072)등이었다. 셀주크조는 前世紀에 끊임없이 일어나던 지방에서의 반란을 진압하여 영토 내의 질서를 유지하고, 평온을 확립하였다. 따라서 행정력은 원활히 되었고, 세금의 부담도 알맞게 책정하여 문화활동도 장려되었다. 이러한 정책의 시행에 있어 니잠 알 물크(Ni m al-Mulk, 1092 사망)의 공로는 빼놓을 수 없는데, 그는 무슬림 세계가 배출한 가장 위대한 재상에 속한다. 그의 행정적 수완은 [政治書](Siy s t Name)라는 그의 저서 속에서 정치가의 도리를 역사적 예를 들어서 밝히고 있다. 니잠 알 물크는 알프 아르살란의 후계자인 말리크샤(Maliksh h, 1072∼1092)의 통치기간 중에도 계속 와지르로 남아 있었다.
술탄은 와지르의 後見에서 벗어나려고 애썼으나, 그의 뛰어난 역량과 개성 때문에 성공하지 못했다. 이슬람의 학문적 발전은 이 와지르의 덕을 많이 보았는데, 그는 천문대의 건립을 지원하여 유명한 천문가이며 시인인 우마르 하이얌('Umar Khayy m, 1123 사망)에게 맡겼고, 또 동부 영역에 있는 불교 학교(Vih ra)의 본을 따라 수많은 학교를 세웠다.
이 가운데 가장 이름난 학교는 바그다드에 세운 니자미야(Ni miya) 학원으로, 이 학원은 카이로에 있는 이스마일파 학원인 알 아즈하르(Al-Azhar)에 대항하는 수니 이슬람의 근거지가 되었다. 니잠미야의 가르침은 알 아샤리(Al-Ash'ari)의 신학이론을 기본으로 한 결과 널리 보급되어 오늘날 수니 신학의 바탕이 되었고, 다른 견해는 이단시되었다. 이 대학에 이슬람 신학의 대학자인 알 가잘리(Al-Ghazali, 일명 Ghaz li, 1111 사망)가 다년간 교수로 있었으며, 그는 후라산 출신으로 처음에는 니샤푸르에서 가르쳤었다. 그는 수많은 저서 속에서 아샤리의 견해를 방어하였다. 또, 그는 여러가지 개인적인 체험을 근거로 하여 이스마일파와 시아파의 견해를 공격하였다. 오랫동안 계속해왔던 신학적 연구에 허탈감을 느낀 나머지, 그는 이슬람의 신비주의에 몸과 마음을 바쳤다. 그는 이 수련과정에서 신비주의자의 목표는 이슬람의 교리와 완전 일치된다는 결론을 내렸고, 나아가서 신비적 直觀은 순니의 신학체계 속에 한 자리를 차지할 자격이 있음을 역설하였으며, 이슬람의 교리 구조에 수피(S fi)의 신비주의를 통합시킬 것을 주장함으로써 여생을 보냈다. 그는 이 주장을 뛰어나게 잘 설명하였으므로 결국 수피의 신비주의는 일반적으로 승인되었다.
셀주크조는 神學과 일반 과학을 장려하는 한편, 강경한 외교정책을 추진하였다. 이 정책에 의해 소아시아 반도에 있는 비잔틴의 방위선을 영구히 압도하는 데 성공하였는데, 이 전선에서는 수백 년 동안 국경 충돌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었다.
10세기 중반에는 비잔틴 제국의 국경이 동북쪽으로 확장되어 유프라테스강 상류에까지 이르렀다. 셀주크조는 이 침략을 물리친 것은 물론이고, 무슬림에 유리하게 역전시켰다. 여러 해에 걸친 국경 충돌이 있은 뒤, 또 아르메니아의 반란을 진압한 후에 알프 아르살란은 1071년에 반(V n) 호수의 북쪽 지점에 있었던 비잔틴군과의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 승리의 결과는 중동뿐만 아니라 세계 역사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비잔틴 황제 로마누스 4세(Romanus Ⅳ, 1068∼1071)는 참패당하여 포로가 되었으며, 따라서 무슬림군은 에게해(Aegan Sea)에까지 밀고 들어가서 소아시아 반도의 동부와 중앙부를 모두 셀주크의 통치하에 두었다. 결국, 이 지역은 영원히 기독교 세계의 손에서 벗어난 것이다. 1071년은 곧 소아시아 반도의 터키화 작업이 시작된 해이다. 즉, 오늘날의 터키 공화국이 아나톨리아(Anatolia)에 자리잡게 되는 계기가 된 것이다.
니잠 알 물크가 암살단파( ashishin)에 의하여 살해당하자, 셀주크 국가는 심한 충격을 받았다.그는 1087년에 세제를 개혁하였는데, 종래까지는 국가에 대한 세금 대개는 10분의 1을 납부한 후에 남는 순소득을 자기 몫으로 삼는 토지 제도, 즉 카티아(Qati'a)가 지배적이었다. 또, 이 제도는 세금을 거두어들이고 급료를 나누어 주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다. 이 때문에 일정한 봉토(Fief)를 셀주크 장교들에게 나누어 주고 일체의 봉급을 지불하지 않았는데, 이 새로운 개혁으로 장교들의 수탈이 완화되고 생산이 증진하게 될 것을 기대하기도 하였다. 익타(Iqt )로 알려진 이 제도는 카티아 제도가 오랫동안 발전하여 온 결과로 셀주크조 이후에 크게 보급되어 오스만 치하(1300∼1924)에서까지 지속되었다.
니잠 알 물크가 살해된 몇 주 후, 그의 군주이며 제자였던 말리크샤(Maliksh h, 1072∼1092)마저 죽자 사회제도의 개혁은 중단되었다. 또, 그에 따른 계승문제와 여러 왕자에게 나누어 준 제국의 영역분할 문제 때문에 30년 동안의 평화와 질서는 무너지고, 수많은 왕위 사칭자가 속출하여 지방에서는 분리 운동이 퍼져 나왔다. 이 내란통에 파티마조(909∼1171)는 팔레스타인에서 잃은 땅의 일부를 회복하였는데, 그 가운데에는 1098년에 획득한 예루살렘도 들어 있다, 그러나, 말리크샤의 막내아들인 무함마드 1세(Mu ammad Ⅰ, 1105∼1118)의 등장과 함께 서서히 평온을 되찾았다. 셀주크조는 이 때 내분에 적극적으로 간섭해 온 압바시야조의 칼리프에 반대하는데 주로 정력을 쏟았으므로 파티마조의 진출에 아무런 방비책도 취하지 못했다.
한편, 그동안 더욱 귀찮게 된 암살단파의 활동을 억제하는 데도 힘을 기울여 1118년 알라무트(Alam t)에 있는 그 근거지의 함락을 눈앞에 두고 무함마드가 사망하자, 셀주크 왕조는 여러 公國으로 다시 분열되었다. 다만, 이란에서만 강력한 公子인 산자르(Sanzar)의 영도력 때문에 수십년간 더 지탱할 수 있었다. 각 공국은 점차 젊은 왕자의 스승이었던 아타백(Atabeg)들의 손에 정권이 넘어갔다. 오직 소아시아 반도의 셀주크족만이 약 1세기 동안 그들의 권력을 더 지탱할 수 있었다. 이 왕조는 룸(R m)의 셀주크조(1077∼1307)로 알려졌으며, 곧 오늘날 터키 공화국의 모체가 되었다. 이 기간 동안에 소아시아 반도의 인구 가운데 대부분이 기독교에서 이슬람으로 개종하였고, 또 그 후에는 그리스 말도 버리게 되었다.
8)십자군 원정
셀주크조가 이러한 혼란의 소용돌이 속에 들어가고 있는 동안에 십자군(Crusades) 원정이 무슬림 세계에 들이닥쳤다. 십자군 원정은 동서 분쟁에 있어서 이슬람의 진출에 대한 기독교도에 의한 최초의 반격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이슬람 교도는 이 반격이 스페인의 톨레도市가 1085년에 기독교도의 손에 떨어질 때부터 시작된 것이지 결코 제1차 십자군 원정(1096∼1099)이 아니라고 보고 있다.
기독교 세계의 이슬람 세계에 대한 침략은 서쪽에서는 스페인의 재정복(Reconquista) 노력과 동쪽에서는 예루살렘의 점령이 거의 동시에 진행되었다. 그리하여, 나중에는 십자군 원정이 의식적으로 스페인으로 향하게 되어 1147년에는 리스본을 탈환하였다. 그러나, 이 양 전선에서 거둔 전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스페인에서는 기독교측이 성공하여 이슬람을 밀어냈으나, 동쪽에서의 성공은 잠정적이다. 또, 무슬림 세계는 이 십자군 원정을 단순히 시리아, 팔레스타인 및 이집트 등의 해안에 일어나는 부차적인 사건으로 보았다. 심지어 십자군 원정이 절정에 다다랐을 때에도 이라크의 칼리프, 이란, 중앙 아시아, 중부와 상부 이집트(Middle and Upper Egypt) 등에는 거의 아무 의미도 없었다. 즉, 이들 국가의 정치적 진전에는 아무런 영향이 없었으며, 그 주민들은 십자군 원정으로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았기 때문이다.
십자군 원정의 원인을 중근동에서 찾아보면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하나는 1071년에 비잔틴軍을 반(Van)호 북방에서 패퇴시켜, 동부 아나톨리아와 시리아 해안 뿐만 아니라 기독교 소아시아 반도의 중앙부와 남부가 셀주크조의 손에 떨어진 후 기독교 순례객들이 예루살렘으로 오는 것을 방해한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로마 제국이 동서로 갈라진 후에도 敎會는 형식적이나마 통일성을 유지했으나, 1054년에 교회마저 동서로 갈라져서 극렬한 분쟁을 벌였기 때문에 비잔틴 제국의 운명에 서유럽 각국은 별다른 관심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서유럽 각국은 비잔틴 제국이 당시 이슬람에 대항하여 서유럽과 그 문화를 지켜주는 방파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 것 같다. 이스마일파의 파티마조는 자기 영토인 이집트와 시리아의 주민이 대부분 수니였으므로, 그 견제책으로 기독교도들을 비교적 온전하게 다루었기 때문에 기독교도의 예루살렘 순례에 별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1071년에 셀주크조가 파티마조에서 예루살렘을 빼앗은 후에 기독교도의 성지순례는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그러나 십자군이 팔레스타인에 도착했을 때 예루살렘은 다시 파티마조에 넘어간 것을 유럽의 지도층은 알지 못한 것 같다. 십자군은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해안지역을 점령하여 여러 개의 작은 기독교 국가를 세웠으나, 내력 지방에는 여전히 아미르 국가(Amir, 소왕국)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셀주크조와 파티마조가 메소포타미아 지역과 나일강 지역에서 대처하여 정치적 균형을 이루고 있는 한 완충지역인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은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있었다. 즉, 십자군은 참다운 적과 대결한 것이 아니었고, 인근의 작은 아미르 국가와 싸우면서 지탱해 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모술지역의 아타벡인 이마드 알 딘 장기('Im d al-Din Zangi, 1127∼1246)가 등장하여 알렙포(Aleppo)를 수중에 넣고 나아가서는 해안 도시인 에데사(Edessa)를 1144년에 탈환함과 동시에 전세는 뒤바뀌어졌다. 이 위험이 西유럽에 알려지자, 제2차 십자군이 조직되어 들어왔으나 실패로 끝났다. 이 원정군은 현지사정에 어두워 다마스쿠스에 있는 셀주크조의 통치자를 공격하였다. 이 통치자는 십자군과 더불어 그 때까지 장기軍의 침략을 막는 큰 역할을 하였다.
그 결과, 1154년에 이마드 알딘 장기의 후계자인 누르 알딘 장기(N r al-Din Zangi)는 다마스쿠스 시민의 협조를 얻어 특별하게 힘들이지 않고도 이 도시를 쉽게 점령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남쪽에서 쳐들어오는 십자군의 침략에 방파제 구실을 하고 있던 파티마조는 이제 장기와도 직접 대결하게 되었다. 한편, 이집트는 전략상으로 중요할 뿐만 아니라 풍부한 농산물과 지중해의 매우 중요한 무역국이었기 때문에 모두가 탐내는 곳이었는데, 당시 파티마조는 내분에 휩싸이고 있었기 때문에 국가권력은 여러 장군들의 손에서 손으로 바뀌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파티마조의 와지르 샤와르(Sh war)가 자신의 정적을 제거하기 위하여 누르 알 딘에게 원조를 칭하자, 그는 휘하의 유능한 장군인 쉬르쿠(Shirk h)를 이집트에 파견하여 1169년에는 카이로를 장악하게 되었다. 그 당시, 파티마조의 칼리프 알 아디드(Al-' did)는 쉬르쿠를 와지르로 임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쉬르쿠가 두 달 뒤에 죽자 그의 조카 살라 알 딘 유술 이븐 아유브( al h al-Din Y sub ibn Ayy b, 1138∼1193)가 뒤를 잇게 되니, 곧 유럽 史書에 등장하는 그 유명한 살라딘(Saladin)이다.
그는 쿠르드족 출신으로 장기家의 장교로 근무하였는데, 1171년에 알 아디드가 죽자, 파티마조를 없애고 이집트에 수니 교리를 재건하였다. 또, 명목상 그의 宗主였던 누르 알 딘이 1174년에 죽자 독립하여 아유브조(이집트 1169∼1252, 시리아 1183∼1260)의 창시자가 되었다. 그는 나일 계곡에서 번영하는 경제에 힘입어 이집트를 십자군에 대항하는 근거지로 만들었다. 그에게는 이집트의 안전을 위해서 팔레스타인과 시리아를 장악할 필요가 있었다. 더구나 바그다드에 있는 칼리프는 그 위신이 땅에 떨어지고 모술 지역과 북부 메소포타미아는 부분적으로 그의 사촌의 수중에 들어 있었으며, 나머지 일부는 다른 군소왕(Amir)들 사이에 분할되어 있었으므로 손쉽게 팔레스타인과 시리아를 장악하였다. 또, 예멘과 메카 지역에서도 군사력을 동원하여 영향력을 발휘함으로써 후방으로부터 아무런 근심도 받지 않아, 독실한 무슬림인 그로서는 오직 십자군의 축출에만 골몰할 수 있었다. 1187년에 십자군을 무찌르고 예루살렘을 도로 찾게 되자, 이에 놀란 서유럽諸國은 제3차 십자군을 조직하여 파견하게 되었다.
1192년, 십자군과 휴전에 돌입했을 때 십자군의 지역은 지중해의 동부 해안선에 있었던 몇 개의 항구에 불과하였다. 1193년에 살라딘이 죽었을 때 아유브조의 영토는 이집트, 팔레스타인, 시리아 및 모술에 이르는 북부 메소포타미아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것은 중동의 역사에서 나일강 유역이 정치적 우위성을 확보했을 때 나타나는 전형적인 형태이다. 그는 자기의 영토를 결속, 유지시킬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죽었으나, 죽기 전에 그는 영토를 아들과 동생에게 나누어 주었으므로 상호간의 분쟁은 불가피하였다. 분쟁 끝에 그의 동생인 알 말리크 알 아들(Al-Malik al-'Adil)이 1200년에 형이 갖고 있던 모든 영토를 재결합시켜 알렙포와 예멘의 아유브 자손으로부터도 충성의 선서를 받았다. 이와 같이, 오랜 분쟁에도 불구하고 다행히 서유럽에서는 십자군 원정에 대한 열이 점차 식어 갔으므로, 아유브 가문의 내불을 이용하려 들지 않았다. 십자군은 자신들이 상대할 적이 이집트에 있다는 정확한 판단 아래 이 곳을 공격하여, 1220년에 나일강의 삼각주 일부를 점령하였으나 오래 장악하지 못하고 다음 해에 밀려나고 말았다.
알 아딜은 형의 경험에도 불구하고, 1218년 죽기 직전에 영토를 그의 아들들에게 나누어 주었기 때문에 형제간에 싸움이 벌어지게 되었으며, 그 형제들 중에 알 말리크 알 카밀(Al-Malik al-K mil, 1218∼1238)은 적대적인 동생을 제거하기 위하여 심지어는 독일의 황제인 프리드리히 2세(Friedrich Ⅱ, 1220∼1250)와 시실리 왕에게까지 도움을 청하였다. 비록 독일 황제의 실질적인 도움도 받기 전에 그 동생이 죽었지만, 알 카밀은 1229년에 베들레헴과 나자렛을 포함한 모든 예루살렘을 독일 황제에게 양도하였다. 1238년, 알 카밀의 죽음은 곧 아유브조의 완전한 분열을 가져와 결국에는 망하게 되었다. 아유브 가문의 내분 중에서도 알 말리크 알 살리흐(AlMalik al- li , 1240∼1249)는 몽고군에 쫓겨 온 흐와리즘(Khw rizm)군의 도움을 받아 1244년에 예루살렘을 회복하였다. 아유브조의 통치 기간은 이집트와 시리아의 경제적 번영과 학술문화의 발달을 가져왔고, 또 이집트 땅에 수니 이슬람이 굳게 뿌리를 내리는 계기가 되었다.
1250년에는 터키계와 터키화된 코카서스 출신 군인들이 이집트의 정권을 잡았는데, 이들은 어린 나이에 팔려 와 군사 교육을 받아 근위병에 충원된 자들로, 아랍어로는 맘룩(Maml k, 소유된 자)이라 불렸다. 이 맘룩朝(1250∼1517)는 이집트 역사에 새로운 章을 만들었다.
9)동북 지역의 변화와 칼리프의 세력 강화
한편, 말리크샤(Maliksh h, 1072∼1092)가 죽은 후의 셀주크조는 분열되었지만, 1097년부터 동부 페르시아를 다스리고 있었던 셀주크 왕자 산자르(Sanj r, 1118∼1157)는 분열 전의 셀주크 영토를 거의 재통일하였다. 그러나 그는 시지스탄의 사파르조( aff r朝)의 권위와 흐와리즘의 知思인 무함마드(1097∼1128)의 직위를 인정하였다. 그 대신 이들은 산자르를 宗主로 받들었다. 그러나, 무함마드와 그의 아들 아트시즈(Atsiz, 1128∼1156)는 산자르에 대해 우호적인 편은 아니었다. 이들은 비록 지사였지만, 칭호는 흐와리즘 샤(Khw rizm-Shah)라고 불렸다. 아트시즈는 산자르의 종주권에서 벗어나기 위해 몽고의 부족인 카라 히타이(Qara Khitai)를 트란스옥시아나로부터 불러 들였다.
카라 히타이는 본래 만주를 중심으로 하여 중국의 북동쪽에 있었으며, 동양사에서는 요(遼, 916∼1125)나라로 불렀다. 그들은 여진족에 의하여 망하였고, 그 일족인 耶律大石(야율대석)이 서방으로 도망가서 세운 나라가 곧 카라 히타이다. 그 뜻은 흑글안(黑契丹)이며, 일명 西遼라 부르기도 한다. 1141년에 카라 히타이는 산자르를 대패시켰다. 이 카라 히타이國은 수도 발라사군(Bal sagh n)을 중심으로 예니세이(Yenisei)강으로부터 현 아프가니스탄의 발흐(Balkh)와 투르크메니스탄에 이르는 거대한 제국을 세웠으며, 흐와리즘 샤는 이제 이들의 종주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카라 히타이는 실제로 내정 간섭은 거의 하지 않았으며, 이슬람에 改宗도 하지 않았다. 산자르는 간신히 이 치욕스런 패배에서 회복하는 데 성공했지만, 1153년에 카라 히타이 족에 의하여 쫓겨났고, 이란의 동부에 온 터키계의 오구즈(Oghuz) 부족에게 또다시 참패를 당하여 그 자신은 포로가 되었다. 나중에 그는 자유를 되찾는데 성공했으나, 얼마되지 않아 곧 죽었다.그 후, 산자르의 후계자는 비록 1194년까지 술탄의 자리에 있었으나 단순히 여러 군웅들의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았다.
새로이 흐와리즘 샤로 등장한 일 아르슬란(Il Arsl n, 1156∼1172)은 실질적인 독립을 얻었으며, 더구나 셀주크조가 기울고 군웅들이 할거할 때엔 1194년에 그의 후계자인 타카스(Takash, 1172∼1200)는 셀주크조를 무너뜨리고 북부 이란을 그의 통치 아래 넣었다. 그러나, 이 승리도 한 순간이었다. 군웅들이 하거하는 혼란기을 틈타서 오랫동안 세력이 미약했던 바그다드의 칼리프는 이제 서서히 이라크 지역에서 그의 위신을 회복하기 시작하였다. 이 현상은 칼리프 알 나시르(Al-N ir, 1180∼1225)의 통치기간 중에 이루어졌다. 흐와리즘 샤와 칼리프는 이란에서 대결하였는데, 이 대결은 전쟁으로 발전하지 않았으나, 장기적인 宣傳戰으로 持久化되었다.
당시 이란에서는 서서히 열 두 이맘파 시아가 점차 그 세력을 펴고 있었다. 칼리프와 흐와리즘 샤 양쪽은 모두 수니였지만, 시아파의 지지를 얻기 위하여 회유책을 쓰고 있었다. 칼리프는 푸투와(Fut wah)라는 신심회(信心會, Fraternity)를 이용하였는데, 이 회는 본래 국경선의 경비를 맡고 있는 군인들로부터 유래하였으며, 시아적인 경향을 띠고 있었다. 이 회의의 구성원은 칼리프 알리('Ali, 656∼661)의 인격을 흠모하여 그의 독실한 믿음을 이상으로 하였으나, 결국 친목단체에 그치고 정치적이고 전투적인 종단으로 발전하지는 못하였다. 반면에, 13,4세기에 소아시아 반도에서 일어난 이러한 모임의 물결은 후에 오스만투르크의 핵심세력이 된 예니체리(Yenicheri, 영어로는 Janissary라고 함)로 발전하여 전투세력이 되었다.
칼리프는 시아 운동을 간접적으로 이용했지만, 흐와리즘 샤 알라 알 딘(Al al-Din)은 교조의 후손 중 한 사람을 1217년에 칼리프로 옹립하면서 바그다드와의 결전을 준비하였다.
이에 위협을 느낀 칼리프는 중앙 아시아에 새로이 이주한 이교도 부족을 이용하여 이를 견제하려고 하였다. 무슬림 통치자는 적대적인 무슬림 통치자를 제거하기 위해 이러한 정책을 종종 사용하였다. 그러나, 칼리프의 이러한 정책은 무슬림 세계에 큰 돌풍을 일으켰다. 바로 이 부족이 징키스칸(Jingiz Kh n)의 휘하에 있는 몽고족이었다.
이 첫번째 몽고족의 돌풍은 1218∼1222년 사이에 동북부 이란을 휘몰아쳤다. 그러나, 1277년에 징기스칸의 죽음과 함께 몽고 제국을 재조직해야 한다는 필요성 때문에 무슬림 세계는 40년간의 유예기간을 얻게 되었다. 한편, 바그다드의 칼리프는 그 때까지도 몽고족의 위험성을 느끼지 못하였다.
10)압바시야조의 멸망('Abb siya朝)의 멸망
또한, 칼리프의 경재자였던 흐와리즘 샤 잘랄 딘(Jalal-Din, 1220∼1231)은 몽고족의 진격으로 근거지인 이란을 잃고 서부 이란으로 쫓겨가, 게릴라 지도자로 용맹스럽게 싸웠으나, 1231년에 한 쿠르드(Kurd)족의 자객에 의하여 살해당하였다.
한편, 예루살렘은 1229년에 독일의 프리드리히 2세(Friedrich Ⅱ)에게 넘어갔고, 1243년에는 소아시아 시의 셀주크조가 힘이 부족하여 어쩔 수 없이 몽고의 종주권을 인정했으며, 1244년에는 잘랄 알 딘의 잔존 세력이 예루살렘을 탈환하자는 것 등의 격변이 일어났다. 이러한 외부의 변화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칼리프 알 나시르가 1225년에 죽은 후 그의 후계자는 이라크에서 현상유지에 만족하였으며, 1242년에 즉위한 칼리프 알 무스타심(Al-Musta' im, 1242∼1258)도 앞으로의 변화에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았다. 1253년 징기스칸의 손자이며, 또 몽고제국의 황제였던 몽케(M ngke, 1251∼1259)의 동생인 훌라구(H l -g )는 트란스옥시나에서 중근동을 정복할 군대를 집결시키고 있었다.
그 결과, 몽고 제국의 각 지역으로부터 지원병을 보충받아 이란 고원으로 진격하였으며, 유일한 저항은 알라무트(Alam t)가 이끄는 이스마일파의 한 분파인 암살단파였으나 곧 함락되었다. 1257년에는 이라크를 위협할 수 있었으나, 칼리프의 종교적인 위신이 아직도 강력하였으므로 훌라구는 그의 고문이며 독실한 시아인 나시룻딘 루시(N ruddin si)의 칼리프 제거 주장을 물리치고 협상을 체결하려 하였다. 그러나 칼리프는 찬란한 전통을 믿고, 또 자기의 재물을 몽고군의 조직 확장에 내놓기 싫은 나머지 이를 거절하였다.
바그다드는 불과 수 주간의 포위 끝에 1258년 2월에 함락되었다. 몽고군은 훌라구의 景敎徒(경교도, Nestorian) 출신 아내인 도쿠즈(Doguz)와 그의 고문이며 시아인 나시룻딘의 충고로 기독교도와 시아(Shi'a)를 제외한 수니 주민을 무차별하게 학살하였으므로, 바그다드시에 대한 약탈과 방화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와 함께, 500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압바시야조(750∼1258)는 망하고 말았다. 이것은 즉, 수니 이슬람 공동체 전체가 누리고 있었던 단일성의 상징이 무너졌음을 뜻하였다. 또, 무슬림 세계는 당시에 수많은 군소 국가로 갈라져 있었고, 이 분열이 너무나도 심화되었기 때문에 칼리프의 사형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압바시야조를 위해 원조를 제공하는 세력이 없었다. 이것은 십자군 원정에 오랫동안 시달려 온 지중해 연안 지역에 대하여 압바시야조의 칼리프가 아무런 정신적, 물질적 원조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어난 현상인 것 같다.
아시아 지역의 무슬림 군소 국가는 커다란 저항도 없이 몽고군의 말굽 아래 짓밟혔으나, 이집트의 맘룩朝만은 몽고 군의 진격을 저지하고 이슬람 전통을 보전하여 압바시야朝의 정신적인 계승자가 된 것이다. 그러나, 이 저항도 이집트의 국경 밖에서는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하였다. 압바시야朝의 멸망은 이미 금이 간 무슬림의 단일성을 깨뜨려 지금까지 다시 소생할 수 없게 만든 것이다.
Ⅳ.맘룩 시대
1.개요
압바시야조가 몽고족의 침입으로 망한 것은 곧 이슬람 세계를 향하여 다가오고 있는 돌풍의 정점을 이룬 것이다. 이 돌풍은 서남 아시아의 전지역을 휘몰아쳤으므로 십자군 원정보다 훨씬 더 큰 영향을 끼쳤다.
터키인들은 서남 아시아 지역에 진출하기 전에 이미 부분적으로 이슬람화되어 중동인들에게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몽고인들은 무슬림의 눈에는 완전한 이방인이었고, 또 야만인으로 보였다. 이들의 침입에 상당수의 기독교인이 몽고인의 앞잡이 노릇을 하였으며, 그 때문에 비무슬림에 대한 감정은 점점 격화되었다. 이 침입의 결과로 수만명의 무슬림들이 학살되고, 수천 년간 쌓아 올린 메소포타미아의 관개 시설은 파괴되었으므로, 이슬람 문화는 거의 소멸상태에 이르렀다. 더구나, 몽고족 자신이 이슬람에 개종하자 그들의 독실성을 증명하기 위해 교리에 집착하였으므로, 이슬람은 더욱 완고하게 발전하여 배타적이 되었다. 따라서, 이슬람을 제외한 다른 종교는 결국 없어졌거나 미미한 존재로 전락하였다.
한편, 시나이 반도 근처에서 몽고족의 침입을 물리친 이집트의 맘룩조(Mamluks朝)는 세계 역사에 그 유례를 찾기 힘든 진기한 국가 체제를 지니고 있었다. 맘룩은 본래 노예상인들에 의하여 半야만상태로 흑해 부근에서 수입되어 아유브조(Ayyub朝)의 근위병이 되었다. 이들의 신분은 노예였지만 이들이 지배하는 이집트가 이슬람 문화의 명맥을 한동안 이어 나갔고, 무슬림들에게 희망을 안겨준 곳으로 변한 것은 놀라운 일이다.
1)맘룩국(Mamluks, 1250∼1517)
몽고의 일한국과 맘룩국의 경계선은 오랜 분쟁 끝에 결국 시리아와 이라크 사이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이 때의 소아시아 반도는 오랫동안 몽고의 영향 아래 있었으며, 당시 중근동에는 몽고족이 지배하는 이란 및 그 주변 지역과 맘룩이 장악하고 있었던 시리아, 이집트 지역이 완전한 분리 상태에 있었다. 따라서 몽고족의 점령하에 있는 이라크는 이제 무슬림 세계의 중심적인 지위에서 벗어나 양 세력의 경계선에 있는 전초기지로 탈바꿈하였다. 즉, 무슬림 세계는 이란 중심과 시리아-이집트 중심의 양극화 현상이 나타났다.
이 맘룩 왕조는 아유브朝의 술탄 알 살리흐(Al-Malik al- lih, 1240∼1249)가 죽자, 그의 하렘(harem) 출신 아내인 샤자르 알 두르(Shajar al-Durr)에 의해 통치되었다. 그녀는 80일 동안 중근동 무슬림 세계의 유일한 여성 통치자가 되었다. 결국 그녀는 군의 총사령관인 아이박(Aybak, 1250∼1257)과 결혼하여 이집트를 공동 통치하니 맘룩 통치의 시초이다.
이 맘룩조는 또 바리조(Ba ri朝, 1250∼1390)와 부르지조(Burji朝, 1382∼1517)로 나눌 수 있다. 바리조는 아유브조의 알 살리흐가 그의 노예군을 나일강의 섬에 주둔시켰기 때문에 강(Bahr)이란 말에서 유래하였고, 인종적으로는 주로 터키족과 몽고족이었다. 반면에 부르지조도 역시 근위병으로서 바리 맘룩 술탄 칼라분(Qal w n, 1279∼1290)이 창설하였으며, 그들은 요새의 탑(burj) 근처에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을 얻었고, 인종적으로는 서부 코카서스 지방의 서카시아(Circassia)인이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바리조에서는 때때로 술탄의 세습제가 시행되었으나, 부르지조에서는 전연 인정되지 않았고, 족벌주의는 계승 문제와 정책 결정에 아무런 역할도 못하였다. 두 맘룩조의 술탄은 대부분 비명횡사하였으며, 그들의 평균 통치기간은 6년이 되지 않았다. 이 맘룩조의 실질적인 건설자는 술탄 바이바르(Baybar, 1260∼1277)로서, 그는 1260년 아인 잘루트('Ayn J l t)에서 침입한 몽고군을 격파하고, 자신의 술탄직에 대한 정통성을 강화하기 위하여 그 다음해 이미 망한 압바시야조의 공자를 카이로에 불러 허수아비 칼리프로 만들어 시아파의 극성도 예방하게 하였다. 이것이 곧 카이로에 세워진 허수아비 칼리프조의 시작이다. 맘룩 술탄들은 이 허수아비 칼리프가 자신들을 노예 신분에서 자유인으로 만들어 줌으로써 합법화되었다고 믿었다. 이 칼리프는 궁성도 근위병도 없는 신세여서 실제로 맘룩 술탄의 시신에 불과하였다. 이 카이로의 압바시야조는 1517년에 맘룩조가 오스만 술탄 셀림 1세(SelimⅠ, 1512∼1520)에 의하여 망할 때 그 명맥이 끊어지고야 말았다.
이 맘룩조의 독립 단위 부대는 각기 일정한 농토를 지니고 있었다. 이 농토의 관리에 대한 댓가로 일정한 액수를 중앙 정부에 바치고, 나머지는 자기 부대를 유지하는데 충당하였다. 이것을 고정액 세금 분할 농토(Iq )라고 하였다. 초기에는 군의 통수 계통이 효울적이고 군율이 엄격하였다. 또, 몽고군의 침입에 대처하기 위하여 맘룩군은 아직 남아 있었던 십자군을 팔레스타인 지역의 지중해 연안에서 몰아내어 후환을 제거하였다. 오직 키프러스섬만이 16세기가 될 때까지 기독교 지역으로 남아 있었다. 맘룩의 지배층과 현지민 사이에 교량 역할을 담당한 것이 울라마, 즉 신학자와 이슬람 율법학자였다. 이들은 대규모적인 종교재단 와크프(Waqf)의 재산에서 나오는 수입을 가지고 부유하게 살았다. 이 와크프의 재산은 독실한 신자들이 이슬람 성원에 기증함으로써 생겼지만, 기증자의 유지에 따라 가난한 자를 돕거나 또는 공공사업을 촉진시키는 좋은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와크프의 고용원을 필요없이 늘리는 등의 악습도 많아 장기적으로 보면 국가경제에 손해를 끼쳤다.
또, 이 맘룩 체제가 250년 이상인 지속된 경제적 바탕은 국제 무역에서 찾을 수 있다. 기독교 세계와 무슬림 세계 사이에 있었던 십자군 원정(제1차 1096∼1099, 제7차 1270)에 뒤따른 정치정치적 긴장 상태가 지속되어 지중해권과 인도양 사이의 무역은 거의 중단되었다. 오직 이집트만 중계 무역을 독점하였기 때문에 번성할 수 있었다. 북부를 잇는 교통로는 몽고족이 세운 일한국(Ilkhan國)과 킵착한국(Kipchak khan國)이 1330∼1340년 사이에 분쟁을 일으켜 차단되었다. 더구나, 14세기 말에 티무르(Tim r, 1405 사망)는 전 중근동을 휩쓰는 대원정을 수행하였기 때문에 북부 통상로는 장기간 차단되어 이집트가 그 덕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15세기 말에 유럽에서는 지리상의 대발견 시대가 도래하게 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그 결과, 포르투갈 인이 남 아프리카를 돌아 인도양과 통하는 새로운 항로를 발견하게 되어 이집트의 중계무역은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이 일로 인해 맘룩 이집트는 거의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오스만 투르크에 의해 1517년에 합병되고야 말았다.
이 맘룩조의 시기에 문화와 예술 활동이 비록 향상되지는 못했지만 빛나는 전통은 그대로 계승, 유지되었다. 더구나 이슬람학은 더욱 완고한 경향을 나타내었고, 그 대표적인 학자는 한발리( anbali) 법학파에 속하는 이븐 타이미야(Ibn Taimiya, 1328 사망)였다. 그는 軍과 종교계가 정권을 나누어 가져야 한다고 역설하며 소수파나 외국인에 대한 편협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하였다. 또, 참신한 학문적 발전은 드물지만 백과사전적인 광범위한 지식을 가진 학자들이 베출되었는데 누와이리(Nuwairi, 1332 사망), 아불 피다(Ab 'l-Fid ', 1331 사망) 및 수유티(Suy ti, 1505사망) 등이 유명하다. 이들은 역사 겸 지리학자들이었다. 역사가로서 저명한 이는 마그리지(Magrizi, 1442 사망)이며, 그의 기술에서 우리는 맘룩 이집트에 관한 많은 지식을 얻을 수 있다. 그 밖에도, 이븐 타그리비르디(Ibn Tagribirdi, 1469 사망) 등 많은 사학자들이 있다. 맘룩의 술탄은 건축을 좋아하였다. 병원 시설을 갖춘 술탄 칼라븐(Qal w n) 성원, 또 학교와 자신의 무덤이 들어있는 술탄 하산( asan) 성원, 술탄 카이트바이(Q 'itb i) 성원 등 수많은 건물들이 오늘날에도 남아 있다.
2)이슬람의 전파
이 시대에 이슬람의 선교활동도 인도양 해안에 많이 집중되고 있었다. 북부 인도에 자리를 굳힌 이슬람은 남부 인도로 기세를 몰고 있었고, 예멘의 무슬림 상인은 9세기경부터 예멘 및 페르시아 만의 본거지에서 출범하여 동아프리카 연안과 인도네시아 지역에 무역기지를 만들어 정주하였으며, 포교활동도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더구나, 하나피 법학파에 속하는 오스만 투르크가 이집트를 정복한 후에 샤피(Shafi'i) 법학파에 속하는 많은 학자들이 동아프리카와 말레이, 인도네시아 지역 등으로 이주하여 오늘날 이 지역의 이슬람 울법 체계는 샤피 계통이 되었다. 이슬람이 이 두 지역에 발을 붙이자, 정치조직 형태는 이슬람화하였지만, 사회체제는 그렇게 급변하지 않았다.
동아프리카에 이슬람 세력이 확장되자, 아프리카 유일의 기독교 국가 이디오피아는 더욱 움츠러들게 되었으나, 그 정치 및 교회 조직은 더욱 공고하게 되었다. 이집트를 비롯한 아랍 이슬람이 선교에 박차를 가할 때 이란의 이슬람도 그에 못지않게 시세에 잘 적응하여 그 활력소를 살려 발전시켰다.
일한국의 통치 아래 있었던 이란에서는 몽고 지배층이 적어도 초기에는 모든 종교와 종파를 동등하게 또는 무관심하게 대하였다. 이 틈을 타서 시아파는 적극적인 포교활동을 전개하여 후에 이란의 국교적 지위를 확립하는 주춧돌을 쌓았다. 이 몽고족의 침입으로 인종의 구성에는 터키족의 침입 당시에 비해 커다란 변화는 없었다. 모든 인구의 몽고화는 거의 나타나지 않았으나, 터키화 현상은 두드러졌다. 더구나, 지배층인 몽고인과 인종적인 면에서나 언어적인 면에서도 가까운 투르크만(Turkman)족이 이슬람화하자, 몽고 지배층도 그 영향을 받아 이슬람화되었다. 이 몽고 지배층과 그의 추종세력인 투르크만족은 셀주트 투르크의 지배층과는 달리 농업에 관심이 적었으며, 그 대신 방목을 장려하였다.
3)일한국(Ilkhan國, 1256∼1353)과 티무르(Tim r)
일한국의 행정 기구는 중국식으로 약간의 개편이 있었으나, 전통적인 재상(宰相, wazir) 제도는 그대로 존속하였다. 이 직위에는 대체로 현지인이 임명되었으며, 행정 전반을 관장하였다. 그 중에서도 가장 저명한 재상은 가잔(Gh z ne, 1295∼1304) 왕 때의 라쉬둣딘 파들알라(Rashiduddin Fadlallah)이며, 그는 또한 저명한 역사학자이기도 하였다.
통치자는 군의 총사령관으로 몽고인 장군의 모임인 쿠릴타이(Quriltai)의 자문을 받아 징기스칸의 법률(yasa)에 따라 정책을 결정하였다. 몽고는 거의 모든 아시아 대륙을 통치하였으므로, 통상활동의 범위가 넓어졌다. 또, 종교에 대해 관대하였으므로, 로마 교황청도 흑해를 통해 중국에 선교사를 파견하였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동방견문록을 쓴 마르코 폴로(Marco Polo, 1323 사망)였다. 또, 이탈리아의 상인들도 1204년 제4차 십자군 원정 이후 흑해를 통한 무역의 주역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일한국의 통상활동은 별로 활발하지 못했고, 오직 유럽의 경제적 상승 때문에 중개 무역 기지로서의 역할만 하였다. 일한국의 국위가 왕성한 때에도 맘룩 이집트의 통상활동을 제지하거나 경쟁할 생각은 가지지 않았다. 그러나 14세기 중엽에 들어와서 몽고제국을 비롯한 모든 한국(Kh n國)이 망하자, 유럽의 선교사와 상인들도 아시아의 통상로에서 사라졌다.
한편, 몽고인이 정복을 끝내고 저악하게 되자 정국이 안정되었으며, 이와 함께 문화활동이 다시 시작되었다. 詩에서는 서정시의 대가 사아다(Sa'di, 1292 사망)가 '장미 정원'(Gulist n)이란 시집을 내어 피르다우시(Firdausi, 1020경 사망) 이후 최대의 시인으로 평가되었고, 또 그에 버금가는 가잘(Ghazal, 서정적인 연애시)의 대가인 하피즈(H fiz, 1390 사망)도 이 시대에 나왔다.
학문에서는 박학다식하여 수많은 학술서를 저술했으며, 훌라구의 자문관이었던 나시룻딘 투시(Na iruddin T si, 1274 사망)와 지리학자이며 역사가인 함달라 무스타우피 카즈위니(Hamdallah Mustaufi Qazwini, 1283 사망) 등을 들 수 있다. 훌라구의 비서 주바이니(Juwaini, 1283 사망)는 몽고인의 정복 과정을 집필하여 후에 재상 라쉬룻딘의 '종합사'(J mi'u al-Taw rikh)가 나오게 된 계기를 만들었다. 이 책은 모두 페르시아어로 씌어져 국어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 이후 이란에서 아랍어는 일부 전문가를 제외하고는 외국어로 변하였으며, 그 사용자가 줄어들게 되었다. 이들 이란史家와의 동시대 학자로는 시리아의 주교 바르헤브레우스(Barhebreeus, 1286 사망) 등이 있다.
종교 생활에 있어서는 수많은 전쟁과 사회불안 때문에 신비주의(Sufism)적이 경향이 짙어졌다. 이 기간 중에 시아와 수니 간의 분쟁은 줄어들었으며, 또 신비주의 사상이 깊어진 것은 아지지만 종단(宗團, tariqa)으로 발전하여 이슬람의 교리가 실제의 의식행동과 밀접하게 연관되었다. 이 종단의 구성원은 데르위시(derwish, 페르시아어로 가난한 자, 또는 얻어 먹는 이)로 불렸다. 이러한 종단은 추종자도 소유 재산이 급격히 늘어나게 되자 점차 영토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종단 가운데 하나가 1500년 경에 사파위조( afawi朝, 1501∼1732)를 세웠으며, 이 왕조가 오늘날 이란의 母胎를 이루게 되었다.
일한 시대에는 예술 분야에 커다란 수확을 가져왔다. 특히, 무슬림 지배자를 위해 대규모의 건축 사업을 벌이기도 하였다. 이 시대에 지은 건축물로 지금까지 남아있는 것은 아제르바이잔 주에 새로 만든 수도 술타니야에 있는 술탄 올제이투(Oljeit , Uljaitu, 1304∼1317)의 靈廟(영묘), 테헤란 근처 베라민(Veramin)에 있는 성원과 야즈드(Yazd) 시의 성원 등이다. 이 건축물은 모두 카산(Q s n) 지방에서 나오는 유리 도자기(fayence)로 장식되어 있다. 또한, 세밀화(細密化, miniatur) 부문에서 새로운 양식이 나타났다. 즉, 이란과 중국의 화가들이 양식과 기술의 교환을 통하여 양쪽이 모두 좋은 결실을 얻었다. 이 때부터 다양하고 깨끗한 채색이 그림에 도입되었다.
일한국은 약 80년간 존속하였다. 가잔(Gh z n, 1295∼1304)은 이란이라는 배경에서 오는 문화적, 종교적 압력 때문에 가족과 함께 이슬람으로 개종하였다. 그의 손자인 아부 사이드(Ab Said, 1317∼1335)가 합법적인 계승자가 없이 죽자, 권력장악을 위해 가족 간에 내분을 일으킨 것이 멸망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더구나, 현지민에 비하여 수적으로 열세인 몽고인이 이슬람에 개종은 했지만 결코 동화될 수가 없었다. 농업 생산이 일기불순으로 급격히 감퇴하자 세금 수입도 줄어들었으며, 또 유목 민족인 쿠르드 족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게 발저하였다. 결국 분리주의적 경향인 도처에 싹트기 시작하였으며, 일한국인 몽고, 투르크만 및 현지민 출신의 실력자들에 의하여 14세기 중엽에 분할되었다. 즉, 몽고계의 잘라이르조(Jal yir朝, 1336∼1432)는 이라크와 아제르바이잔에, 무자파르조(Muzaffar朝, 1313∼1393)는 남부 이란에 세력을 굳혔다. 이 두 왕조의 창시자들은 일한국의 중신들로 잘라이르조는 유목민 투르크만 부족의 연합세력은 흑양조(黑羊朝, Qara Qoyunlu, 1380∼1468)와 백양조(白羊朝, Aq Qoyunlu, 1378∼1508)에 의해서 망하고, 그 자리에 이 투르크만의 두 왕조가 다툼을 하면서 1세기 가량을 보냈다. 즉, 흑양은 시아파인 반면에 백양은 수니파였기에 주로 종교적 분쟁이 그들 사이에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이들의 통치 시대에 아제르바이잔은 인종과 언어적인 면에서 터키화하였다. 일한국 외의 다른 몽고 한국(Khan國)도 비록 다른 여건에 처해 있었지만 비슷한 운명을 맞았다.
징기스칸의 원(1206∼1368)나라는 3개의 한국(Kh n國), 즉 일한(Ilkh n, 1256∼1353), 치카타이(Chaghatay, 1227∼1370), 킵착(Qipchaq, 1226∼1481) 등을 두고 있었다. 이 한국의 통치자는 모두 이슬람에 개종하였다. 킵착한국은 볼가강 하류인 현 러시아 남부의 그레미아 근처에 자리를 잡고 15세기까지 지탱되었다. 그러나, 14세기 중엽에 이미 와해상태에 놓여 있었으나, 한 세기 동안 더 연명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기독교도인 러시아인이 너무나 허약했기 때문이었다.
이 나라의 몽고인들은 일한국의 몽고인들처럼 터키인들에 동화되어 버렸다. 그 결과, 타타르(Tatar)라는 말도 본래 몽고인을 뜻하였으나, 오늘날에는 터키계의 말과 인종을 가리키게 되었다. 그러나, 이 나라는 독자적인 문화를 발전시키지는 못하였다. 그 통치자는 형제국인 일한국과 분쟁을 일으켰고, 또 맘룩 이집트에 노예들을 팔아 간접적으로 일한국과 적대관계에 있는 이집트를 도운 셈이 되었다. 이 노예무역의 중개상은 제노아(Genoa)의 상인들이었으며, 그들은 비잔틴 국가를 경유하여 노예를 이집트에 운반하였다.
차가타이한국은 중앙 아시아에 자리잡고 있었으나, 문화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보아 세 한국 중에 가장 허약했고 뒤떨어진 상태였다. 또, 그 거주민이 대체로 유목민이었으므로 그 저항이 매우 강하여 안정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따라서 국가적인 단합의식은 조성되지 않았다.
그 통치자들이 이슬람에 개종하여 원주민과 융화하려 하였으나 성공하지는 못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징기스칸의 후손이라 주장하는 절름발이 티무르(Tim r, 1336∼1405 생존)가 일어나 차가타이 한국을 멸망시키고, 새로운 정복의 시대를 열었다. 그는 인간 백정이란 별며을 얻을 정도로 무자비한 군주였다. 티무르는 몽고적인 전통에 이슬람적인 윤리를 결합하여 강력한 군대를 만들어 낸 천재적인 사령관이 되었다. 14세기 후반에 러시아 내륙에서 북인도까지, 또 중국의 변경에서 시리아와 소아시아 반도에 이르는 방대한 대륙을 정복하였다.
징기스칸은 하늘에 태양은 하나고 지상에 군주는 하나라는 믿음이 있었으며, 또 그의 주변에서도 그렇게 믿고 따랐기 때문에 역사상 최대의 제국을 건설하여 거의 100년간이나 존속하였다. 그러나, 그의 정복은 그의 죽음과 함께 거의 물거품이 되어 후계자 대에 이르러서는 단지 하나의 지방 왕조로 변모하게 되었다.
이에 비하여, 티무르는 정복과 파괴만 계속하였고, 이슬람 신자라는 사실 외에 자기의 개인적인 좌우명은 없었다. 그는 수도 사마르칸드(Samarqand)를 확장하고, 큰 건물을 짓는 데 관심을가진 것 외에 제국의 다른 지역의 발전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가 죽은 뒤, 터키의 부족은 자치를 강력히 희망하여 결국 티무르조(Tim r朝, 1370∼1506)의 영토, 즉 이란과 트란스옥시아나는 티무르의 아들과 손자들에게 나누어진 상태로 남게 되었으며, 종주권을 행사하던 다른 지역에 대한 영향력은 잃어버렸다. 비록 그의 6대손인 아부 사이드(AB Said, 1451∼1469) 때에 와서 티무르의 영토를 재결합하여 막강한 국가가 되었으나, 그 힘은 이미 오스만 제국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티무르조 역시 이란화되어서 건물 양식 뿐만 아니라, 행정 기구의 공용어도 페르시아어를 사용하였다. 이 왕조는 중앙 아시아 초원에서 일어난 최후의 왕조였다. 그 이후 이슬람 세계는 티무르의 후손인 바부르(B bur)가 세운 인도의 무갈제국(Mughal帝國, 1526∼1858), 시아 이란의 사파위조( afawi朝 1501∼1732) 및 오스만 제국(Osman帝國, 1281∼1924)으로 나뉘어졌다.
Ⅴ.오스만(Osman) 제국
1.개요
본래 중앙 아시아에 살던 터키계의 부족은 방목하기 위해 점차 서쪽으로 진출하게 되었다. 이들 부족은 유목 생활을 했기 때문에 활쏘기와 말달리기에 능숙하였다. 따라서 이들은 기동성이 있었고, 부족이 곧 군대와 같이 훈련이 잘 되어 있었다. 더구나, 중앙 아시아의 부족은 인종적으로 볼 때 여러 인종이 섞여 있어서 일부는 황인종의 용모를, 또 일부는 남부 러시아의 코카서스인의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모든 터키 몽고 계통의 부족은 모두 비슷한 사회 조직, 문화, 관습 및 언어 등을 가졌다. 오스만 씨족은 오구즈(Oghuz) 부족에 속하였으며, 그 일부는 7세기 중에 이미 중근동의 변경지방에 머물고 있었다. 이들의 일부는 압바시야조('Abb siya朝) 시대에 맘룩(Maml k)으로 칼리프의 근위병이 되었다. 그 후 터키계 부족은 무슬림 세계의 새로운 활력소로 작용하였으며, 마침내는 셀주크조(Salj q朝, 1038∼1194)를 창설하여 그 정치적, 군사적 우위성을 확보하였다. 이 셀주크조의 통치 하애서 터키족의 세력은 크게 확장되어 소아시아 반도에까지 진출하게 된 것이다.
1)오스만조(Osman朝)의 등장
오스만조의 기원은 신비에 쌓여 있다. 몽고족이 침입했을 때 쫓겨난 터키 부족의 일파가 소아시아 반도에 들어왔다. 그 지도자인 에르토그릴(Ertoghril)은 이 반도의 북서쪽에 룸의 셀주크조의 말기 술탄에 의하여 영지를 받았다. 그의 아들인 오스만('Osm n, 1300-1324, 아랍어의 'Uthm n에서 유래)은 1288년에 비잔틴 제국의 영토를 잠식하는 정책을 실행하였다. 이 확장 정책은 그의 후계자에 의해서도 지속되어 이 술탄 조는 650년 이상 유지될 수 있었다.
당시 오스만은 룸의 셀주크가 망한 자리에 나타난 수많은 터키의 영주 가운데 가장 미약한 존재였다. 그러나, 불과 100년 만에 아시아와 유럽에 걸친 대제국으로 성장하였다. 일한국의 말기인 1355년 이후, 중근동은 혼란상태에 빠져들어갔다. 이러한 정치적인 진공상태를 메워 주고, 이슬람 문명을 파멸의 위기에서 구해 준 세력은 오스만조 뿐이었다.
오스만조가 성공하게 된 가장 큰 정치적 이유는 그 근거지가 지리적으로 반도의 서북쪽에 비잔틴 제국과 접하고 있었기 때문에, 1071년 반(Van) 호수 근처의 만지케르트(Manzikert, 터키명 Malazird) 전쟁 이후 위축상태에 들어가 허약해진 비잔틴 제국을 쉽게 잠식할 수 있었다.
한편, 몽고인이 침입했을 때 중앙 아시아에서 몰려온 수많은 터키계 부족, 공예인 및 書士(서사)들은 소아시아 반도에서 안정된 직업이 없었기 때문에 이들에게는 비잔틴 지역의 침입이 가장 높은 수입을 올릴 수 있고, 또 사회적으로도 聖戰(성전, Jih d)에 참전하는 戰士(전사, Gh zi)라는 떳떳한 구실을 세울 수 있었다. 더구나, 오스만조는 여러 종단 조직과 수많은 공예인단과 밀접한 유대관계를 가지고 있었으며, 아마도 오스만조의 선조는 스스로 이 종단과 공예인단에 속하여 있었던 것 같다. 따라서, 이 정복 사업은 종교적 사명과 더불어 수행되었고, 또 새로 정복한 지역의 행정에는 서사도 필요하였다.
1326년, 오스만의 후계자 오르한(Orkh n, 1324∼1360)은 부르사(Bursa)를 점령하여 수도로 삼았다. 이 때부터 오스만조는 실질적인 국가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고, 행정 체계도 비잔틴 제국의 것을 기초로하여 발전시켰다. 한편, 기독교도들을 용병으로 받아들여 터키계 부족군에 대한 의존도를 줄였다. 결국, 1366년까지 오스만조는 아나톨리아 반도에서 비잔틴 세력을 일소하고, 또 남부 발칸 반도에도 착실히 세력을 길러 발칸 반도에 있는 비잔틴 제국 제2의 도시인 에디르네(Edirne, 그리스 명 Adrianople)도 정복하여 수도로 삼았다.
이 정복은 무라드 1세(Mur d Ⅰ, 1360∼1389)의 통치 중에 달성되었고, 이 일로 인해 비잔틴 제국은 수도 콘스탄티노플 주변에 국한된 도시 국가로 전락하여 풍전등화와 같은 제국의 운명은 시간 문제가 되었다. 그러나, 바예지드 1세(B yezid Ⅰ, 1389∼1402)가 티무르의 침략을 받아 앙카라 전쟁에서 대패하고 자신도 포로가 되었기 때문에 콘스탄티노플의 정복은 반 세기나 늦어져, 1453년에 이르러서야 메흐메드 2세(Mehmed Ⅱ, 1451∼1481)의 영도 아래 달성되었다. 이와 함께, 메흐메드 2세는 무슬림 세계에서 가장 명성 높은 통치자가 되었으며, 또 異敎徒(이교도)와의 전쟁에 있어서 최고 지도자로 인정되어 스페인, 중앙 아시아 및 인도 등지에서 그의 총애와 지원을 얻기 위해 많은 인사가 모여 들었다. 즉,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의 3개 대륙에 걸치는 대제국을 건설하여 무슬림에게는 성전의 전사(Gh zi), 터키족에게는 한(Kh n), 기독교도에게는 황제가 되어 전세계를 통치하려는 야망에 사로잡혔다. 그는 이 야망을 이루기 위한 단계로서 콘스탄티노플을 이스탄불이라 개명하였으며, 또 그의 명칭은 술판 파티(F ti , 정복자) 메흐메드로 불렸다.
오스만군은 1516∼1517년 사이에 시리아, 팔레스타인 및 이집트를 정복하였으며, 이 때 술탄 셀림 1세(1512∼1520)는 카이로의 압바시야조의 허수아비 칼리프로부터 칼리프 칭호와 그 세습권을 오스만조에 양도하도록 하였다. 그의 아들 술레이만 2세(Suleiman Ⅱ, 1520∼1566)는 이라크에서도 제국의 세력을 확장하여 오늘날의 이란-이라크 국경에까지 이르렀으며, 또 1521년에는 유럽 쪽의 벨그라드를, 1541년에는 헝가리를 정복하였다. 더구나, 하이렛딘 바바로사(Khayreddin Barbarossa) 대제독(Qapudani dery )의 지휘하에 함대를 조직한 오스만 해군은 1540년에 베니스를 위시한 유럽 연합 함대를 프레베사(Prevesa) 근해에서 무찔러 지중해의 해상권을 획득하였다. 이와 함께, 알제리 지역도 오스만 제국의 영향 아래 놓이게 되었으며, 또 이러한 정복 사업의 계속적인 성공으로 오스만 제국은 1683년에 절정에 달한 영토의 확장으로 빈(Wien) 근처에서 이란 국경까지, 아라비아 반도에서는 페르시아만 지역의 북부 해안 지대와 홍해안 지역을, 아프리카에서는 모로코를 제외한 북아프리카 전역을 통합하였다. 또, 흑해 연안을 모두 정복하여 수도인 이스탄불의 안전을 도모하였다.
이러한 대정복이 성공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오스만조의 지배층이 스스로 엄격한 규율과 자제 속에 살았다는 점과, 다른 한편으로는 무슬림은 모두 단결해서 하나의 움마(Umma)를 건설해야 한다는 욕구에 있었다. 무슬림은 압바시야조 중기 이후에 분열되어 왔으며, 또 몽고족의 침입 이후 무슬림 단결의 상징인 칼리프조차 없어졌다. 비록 카이로의 허수아비 칼리프는 존재했으나, 맘룩 이집트의 영토 밖에서는 그 존재가 인정되지 않았다. 따라서, 혜성과 같이 나타난 오스만조는 이러한 상황에 불만을 느끼던 무슬림의 욕구를 채워 주었다.
발칸 반도의 기독교 지역에서는 기독교 정교회(正敎會, Orthodox Church)가 농민들을 너무나도 심하게 수탈하였으므로, 농민들 스스로가 오스만 정복자에게 구원을 청할 정도였다. 비잔틴 제국은 카톨릭 세계와의 분쟁과 발칸반도 내에 있는 여러 인종 간의 갈등 때문에 국력이 소모되어 무너지고야 말았다.
2)오스만 제국의 관료 조직과 관료 양성 제도
거대한 오스만 제국의 영내에는 종교적, 민족적 및 언어적으로 다른 수많은 인종군, 즉 터키, 타타르, 투르크만(Turkman), 아랍, 쿠르드, 베르베르, 맘룩, 보스니아, 알바니아, 그리스, 불가리아, 헝가리, 남 슬라브, 루마니아, 아르메니아, 콥트(Copts), 조지아(Georgia) 및 유대인 등이 살고 있었다. 이 잡다한 인종군을 다스리는 데에는 오스만 제국의 우수한 관료 조직이 필요했다. 이 관료 조직의 정상에는 술탄 칼리프(Sultan-Khalifa)라는 종교적 상징이자 세속적인 통치자가 있었다. 술탄은 본래 원시적인 전사의 우두머리로, 그는 부족의 이동을 지도하고, 약탈을 목적으로 하는 기습을 지휘 조직하며, 부족법을 준수할 것을 시행하는 강력한 권력자였다. 이 부족적 조직체는 그 구성원이 자발적으로 받아들였지만, 내부의 규율은 엄격하였다.
셀림 1세가 이집트를 정복한 후 칼리프가 되었다. 이슬람의 정치 원로, 즉 순니에 의하면 칼리프는 오직 예언자 무함마드의 부족인 쿠라이쉬족의 자손만이 될 수 있었으나, 이러한 요구 조건은 이슬람의 장로, 즉 울라마('Ulam ')의 모임에서 간과되었다. 그들은 오스만 술탄이 당시 무슬림 세계의 가장 유력한 지배자이기 때문에 칼리프 자리의 최적임자로 판단하였다.
술탄의 황실, 즉 세라이(Seray)는 모든 관료 조직의 심장부였다. 이 궁성은 술탄의 영예 뿐만 아니라, 私邸(사저)도 관리하는 행정 요원의 양성소가 되었다. 세라이에는 술탄의 사저뿐만 아니라 집무 및 회의실, 말 사육장, 요리실, 목욕실 및 궁성요원을 위한 숙식소, 미래의 최고 행정요원을 위한 수재 강습장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용도에 따라 작은 성벽으로 구분된 세 구역에 독자적인 건물이 세워졌으며, 또 그 전체는 높은 성벽으로 둘러 쌓았다. 외부 성벽에는 展示處(전시처)가 있어서 부정을 저질렀거나 술탄의 노여움을 산 관료의 참수된 머리를 걸어 두었다. 또, 술레이만 1세(1530∼1561) 때에는 하렘(Harem, 아랍어로는 Har m, 즉 금지, 신성에서 유래)이라는 술탄의 여성 가솔과 궁녀를 수용하는 별개의 네 번째 구역이 궁성 내에 세워졌다. 비록 하렘의 여자들은 특별구역에 제한되어 있었지만, 술탄을 통하여 그들의 친지를 고관직에 임명하도록 영향력을 행사하였으며, 또 심지어는 환관들도 상당한 역할을 행하였다.
술레이만 1세 때 완성된 후 수백년간 지속된 관료조직은 술탄이나 그의 대리인(공식명칭 alSadr al-azam, 즉 최대의 지도자)인 와지르를 정점으로 하여 피라밋식으로 정립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의 효율적 운용은 술탄의 성격에 달려 있었다. 이 와지르는 곧 수상에 해당하며, 또 그는 오직 술탄에게만 책임을 지고 있었다. 와지르의 집무 영역에 어느 정도 관여할 것인가 하는 것은 오직 술탄의 재량에 달려 있었다. 술탄은 그를 임의로 해임할 수 있었기 때문에 술탄의 권위를 대행하는 강력하고 독자적인 와지르에게는 때때로 굽격한 권력의 몰락도 있었다. 술레이만 1세 이후 대부분의 술탄은 하렘을 政事보다 더 좋아했기 때문에 와지르의 중요성은 증가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政敵의 책략에 걸려 제물이 되는 수도 있었다. 좋은 예로 메흐메드 4세(1648∼1687)가 통치한 초기에는 일년에 3명의 와지르가, 5년에 13명의 와지르가 임명, 또는 해임되었다. 와지르의 밑에는 아시아와 유럽을 분리 담당하는 2명의 재정 담당 대신(Defterdar), 2명의 사법 대신(Kadiasker), 2명의 총독(Beylerbey), 특수 보병대인 예니체리(Yenicheri, 영어 Janissary)의 사령관(Agha), 해군 사령관(Kaptan Pasha) 및 총무 비서관(Nishanci) 등이 내각을 이루어 일주일에 4번 정도 각료회담을 열었다. 초기에는 술탄도 이 모임에 참석했으나, 후기에는 와지르에게 이 업무를 맡겼다. 와지르는 이 각료회담을 궁성 내에 있는 자기의 특별 관저에서 개최하였고, 술탄의 참석 아래 개최되는 각료 회의는 이례적인 경우에서, 또는 순전히 의식적인 경우에만 하게끔 되어 있었다.
이들 술탄의 고위 행정관은 국내치안의 유지, 세금의 징수, 영토 등의 확장 또는 최소한의 보전 등을 주임무로 하였다. 각 각료는 자기 부서 안에 거대한 행정 기구를 가지고 있어 각 지방의 지사, 재정관 및 군 사령관을 임명할 수 있었다.
군은 경찰 임무도 담당하였는데, 이 관료 조직이 특수성은 거의 모든 관료가 군 출신이라는 점에 있다. 이들 정예관료는 10대의 어린 나이에 이미 군사교육을 받았으며, 실지로 술탄이나 와지르의 지휘 아래 전쟁에 참여하였다. 본래 이 관료는 평범한 가정에서 자란 무슬림들을 기용했으나, 비잔틴 제국을 멸망시킨 후 메흐메드 2세는 궁성 안에 특수학교를 만들어 8∼18세 정도 된 기독교 집안의 소년을 학생으로 받아들였다. 이 소년들은 새로이 정복된 땅의 포로 가운데서, 또는 독특한 소년 징집 제도(devshirme)에 의하여 뽑혔다.
이 소년 징집 제도는 매 5년마다, 또는 필요할 때에는 해마다 실시하였으며, 이 때 관료들이 발칸 지방을 순회하면서 총명하고 신체건강한 기독교 집안의 소년을 뽑아 이스탄불로 데리고 와서, 다시 최종 검사를 한 후에 궁성 내의 각종 학교에 입교시켰다. 이 소년들은 제국의 군인, 술탄의 근위병, 재상 관저의 기병 또는 예니체리의 대원을 만들기 위한 목적에서 교육되었으며, 학교의 규율은 오늘날 사관생도들의 교육처럼 엄격하였다.
2개의 사법 부서를 제외한 모든 각료는 기독교 집안 소년, 즉 특수 징집 제도를 통하여 선발된, 궁성 내의 특수학교 출신이었다. 이들은 등록과 함께 이슬람에 개종하였고, 이슬람 성법(Shar 'a), 아랍어, 페르시아어 및 터키어의 문법과 문학을 공부하였으며, 또 수학, 음악, 터키 역사, 서예 및 직업 훈련이 이 학교의 교과목이었다. 이 궁성 내의 학교에도 등위가 있어서 정예 고급관료는 상위 학교 출신에서 양성되었고, 중위에서는 예니체리 대원과 포병, 기병 및 근위병 장교 등이 나왔으며, 하위에서는 행정 기구에 소속된 중견 직급의 관료들이 나왔다. 이들은 모두 굉장한 후대를 받았으나, 잘못을 저지르면 벌이 엄하여서 대개는 그 벌로 사형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 궁성학교 출신과는 별도로 봉건 기사와 유사한 지방 영주격인 시파히(Sipahi)가 있었으며, 이들은 전장에서 공훈을 세워 그 상으로 일종의 봉토를 받았으며, 이 봉토에서 세금의 징수가 허용되었고, 세입에 따라 일정 수의 군인을 양성하여 명령이 있을 때에는 언제나 출병해야만 했다. 이 시파히의 임무는 자기 봉토의 경찰 업무와 또는 領內나 가까이 있는 도로의 補修가 주였다. 그러나, 시파히는 자기 봉토의 소작인을 추방할 수는 없었다. 궁성학교 출신과는 달리 이들 시파히는 대체로 자유인이었다. 이들의 봉토를 모두 합쳐도 영토의 과반수에 이르지 못했으며, 이론상으로는 술탄의 관용에서 봉토를 관할하고 있기 때문에 증감하거나 처분할 수도 없었으므로 술탄에게 아무런 위협도 되지 않았다.
궁성학교 출신은 비록 관료조직의 상층부를 구성하고 있었지만, 그들의 신분은 술탄의 노예였다. 물론, 우리말의 노예라는 개념 자체가 이 경우에 적합한 용어는 아니다. 이들은 이론상으로 모두 무슬림이었으며, 그들의 자식들은 출생시부터 무슬림이었으므로 궁성학교에 들어갈 자격이 없었다. 그러나, 고급 관료조직에 참여하기 위한 다른 일반 무슬림들의 압력이 계속적으로 술탄에게 가해져서, 17세기 말에는 특수한 소년 징집제도가 폐지되어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그 때부터 오스만 제국이 망할 때까지 무슬림으로 태어난 사람만이 궁성학교에 입교할 수 있었다.
궁성학교 가운데 중위에 속하는 예니체리는 14세기에 생긴 것으로, 기독교 집안 소년을 이슬람으로 개종시켜 군사훈련을 가르쳤기 때문에 유럽에서 가장 잘 알려졌으며, 16세기 후반기까지 그들의 수는 1만∼1만 5천명 정도였다. 그들은 현역에 있는 동안 결혼도 금지되었고, 또 군율이 엄한 대가로 세금을 면제받았으며, 예니체리의 사령관 외에는 아무도 그들을 처벌할 수 없는 특권을 누리고 있었다. 거의 200년간에 걸쳐 나타난 그들의 업무수행 능력은 매우 뛰어났으며, 16세기 초에는 그들의 권력이 막강해져서 술탄 자리를 보다 호전적인 아들에게 양위하도록 강요할 정도였다. 또, 술탄이 즉위할 때에는 현금으로 특별보상을 내리게 하였다.
16세기 말에 무라드 3세(Mur d Ⅲ, 1574∼1595)는 이들의 세력을 약화시킬 목적으로 현역의 결혼 허용, 신병 교육 훈련의 완화, 인원의 대폭 증가 등 군율을 늦추어 주었다. 그 결과 그들의 병영은 텅 비게 되었으며, 여기에서 역효과가 나타났다. 즉, 외적에 대한 전투력은 줄어들었으나 술탄을 핵으로 하는 음모 정치에는 커다란 정치 세력으로 등장하였다. 그 때문에 수도인 이스탄불에서 몇 명의 술탄이 그들의 제지시키려다 폐위되거나, 심지어는 목숨을 잃기도 하였다. 결국 이 예니체리의 폐지만이 유일한 해결책이 되어 1826년에 폐지되고야 말았다.
3)종교 조직체와 밀라 제도
이와 같은 관료조직에 버금가는 것이 곧 종교 조직이었다. 그 정상에는 이스탄불의 무프티(Mufti, 이슬람 율법가), 즉 세이훌 이슬람(Sheikhul-Islam, 이슬람의 원로)이 있었다. 이론상으로는 세이훌 이슬람은 술탄의 결정이 이슬람 성법에 어긋날 때에는 언제나 거부할 수 있었으므로 그 권력이 더 강한 것처럼 보이나, 실제로는 세이훌 이슬람은 술탄이 임명하고 어느 때나 해고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세이훌 이슬람의 파트와(fatw , 터키어 fetwa, 즉 구체적인 사건에 대한 법적인 견해)는 항상 존중되었다. 어떤 술탄도 세이훌 이슬람의 파트와를 받기 전에 새로운 법률(qanun)을 제정할 수 없었다. 종교 조직의 모든 요직은 무슬림으로 태어난 사람만이 차지할 수 있었다.
그 아래 이슬람학의 원로들의 모임인 울라마('Ulam ')가 있었는데, 이 모임의 구성원은 이슬람 성법의 올바른 시행과 교육에 종사하고 있는 종교 지도자들이었다. 무슬림은 쿠탑(Kuttab, 이슬람 성원에 부설된 초등 학교) 과정과 마드라사(Madrasa, 일종의 신학교) 과정을 거치면 울라마의 자격이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따라서 시인, 학자, 왕실의 사가, 점성가, 성원의 관리인,교사 및 재판관 등은 울라마의 구성원이 된다. 이들 가운데서 두 명의 사법 대신이 뽑혀 관료조직에 참여한다. 관료조직의 요원과 오스만 제국의 무슬림 시민은 모두 이슬람 성법의 지배를 받는다.
이 성법을 관리하는 법관은 카지(Q i)라 하는데, 중요 직책의 카지는 세이훌 이슬람이 직접 임명하였다. 부대 안에서는 사령관만이 사법권을 행사하는 예니체리를 제외하고, 모든 관료와 군인은 사법 대신의 재판을 받았다. 사법 대신과 그 산하 요원은 관료 조직체의 재원에서 봉급을 받고 경비를 충당했으나, 종교 조직체의 카지는 그 직무의 보상을 소송 당사자에게 수수료를 부과한 금액에서 받았다.
비무슬림은 무슬림과 분쟁하는 경우에만 이슬람 성법의 관여를 받게 되었다. 종교 조직체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것이 와크프(Waqf, 종교 재단)이다. 여기서 나오는 수입으로 교사와 성원 관리인의 봉급을 지불하게 된다.
오스만 제국의 시민은 종교적 바탕에서 4개의 밀라(Milla, 터키어 Millet, 원뜻은 민족이나 공동체로 쓰임.)로 구분된다. 즉, 무슬림, 그리스 정교도, 아르메니아 기독교도 및 유대교도 등이다. 무슬림 밀라의 우두머리는 세이훌 이슬람이며, 그리스 정교도 및 아르메니아 기독교도의 우두머리는 각각 그들 교회의 總司敎長(총사교장, Patriarch)이고, 유대교도의 우두머리는 최고 랍비(Rabb , 유대 교회의 목사)이다.
아르메니아 기독교도의 밀라에는 그리스 정교도에 속하지 않는 다른 모든 기독교도들이 포함된다. 이 밀라 제도는 정복자 메흐메드 2세(Mehmed Ⅱ)가 1453년에 이스탄불을 함락한 후에 규정하였다. 각 밀라에는 종교, 문화 및 교육 활도에 있어서 광범위한 자치가 허용되었다. 무슬림과 관련된 訟事 외에 각 밀라는 자기 스스로의 사업권의 관할 아래 그들 고유의 언어를 사용할 수 있었다.
비무슬림은 딤미(Dhimmi)라 불리며, 人頭稅(인두세, Jizya)를 지불하였다. 비무슬림 밀라의 우두머리는 각각 자기 관할 하에 있는 교도들로부터 인두세를 징수하여 술탄에게 송금할 의무가 있었다. 비무슬림 밀라에 속하는 딤미의 세 우두머리는 수도인 이스탄불에 거주하며, 오스만 정부는 이들을 통하여 제국 내 딤미 백성들과의 관계를 맺고 있었다. 딤미는 정부 기구의 어떤 직책도 맡을 수 없으며, 또 군대에 복무할 의무도 권리도 없었으나, 그리스 정교도는 기들의 청소년 가운데에서만 특수징집 제도로 인하여 고급관료직을 맡을 수 있었기 때문에 이득과 손해를 같이 보게 된 것이다.
술레이만 1세의 통치기간 중에는 다섯 번째 밀라가 생겼는데, 이들은 모두가 외국인이었고, 주로 천주교도였다. 이 밀라는 1536년 술레이만 1세와 프랑스왕 프랑스와 1세(Fran ois Ⅰ, 1515∼1547 재위) 사이에 맺은 치외법권적 협정(Capitulation)에 따라 이루어졌다. 즉, 오스만 제국 내에서 상행위를 목적으로 여행하거나 거주하는 프랑스 시민들은 과세 대상에서 제외하고 치외법권을 누리는 것이었다. 오스만 시민도 프랑스 국내에서 똑같은 대우를 받았다. 즉, 프랑스 대사가 다섯 번째 밀라의 우두머리가 된 것이다. 16세기 말에 영국과 네덜란드도 비슷한 협정을 맺었으나, 그 우두머리는 프랑스 대사였다. 이 현상은 나폴레옹 1세가 등장할 때까지 그대로 있었으나, 그 후에 많은 유럽 국가와 협정을 맺음에 따라 각국 대사는 자기나라의 국적을 소유한 시민만을 관할하게 되어 이 다섯 번째 밀라는 분산되었다.
4)술탄의 계승
오스만 제국 정부조직의 효율성은 오직 한 사람, 즉 술탄의 성격과 결의에 따라 좌우되었다. 물론, 재상이 술탄의 권한을 대행하기도 했지만, 이것도 술탄의 동의나 전체적인 지지에 의해서만 가능하였다. 술탄 자신이 뇌물을 받거나 다른 관료가 받는 것을 허용하면 이것은 곧 예외적인 행동이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의 관행이 되는 것이다.
술탄은 절대적인 권한을 가졌기 때문에 무엇보다 술탄 계승 문제는 해결하기 힘든 문제였다. 더구나, 오스만 제국이나 그 이전의 터키족이 세운 나라인 가즈나조(Ghazna朝)와 셀주크 투르크 국가에 있어서는 여러 왕자가 주지사 내지 총독이 되어 술탄이 죽은 후에 항상 계승 전쟁을 치르거나 또는 국가가 분열되기 십상이었다. 즉, 하렘(Harem) 제도 때문에 술탄은 수많은 아들을 두게 되었지만, 장자 상속 제도가 없어서 계승전쟁은 더욱 치열하였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메흐메드 2세는 法典(법전, Q n nn me)을 만들어 술탄은 자기의 형제를 모두 합법적으로 죽일 수 있게하여 술탄이 세습적으로 계승될 수 있게 하였다. 그러나, 이 법도 이 문제를 해결하는데 큰 도움을 주진 못했다. 셀림 1세(Selim Ⅰ, 1512∼1520)는 심지어 자기 형제뿐만 아니라, 7명의 조카와 5명의 자기 아들 가운데 4명을 죽임으로써 계승전쟁의 혼란을 제거하려고 노력하였다.
셀림 1세는 아버지인 바야지드 2세(Bayazid Ⅱ, 1481∼1512)가 자기의 계승권을 인정하지 않는다하여 반란을 일으켜 결국 폐위시키고 즉위하였다. 계승문제가 대두될 때마다 오스만 제국은 내란을 겪게 되었다. 그러나, 16세기 말까지 왕자들은 지방 정부의 요직을 맡아 政事를 경험하고, 또 술탄은 유능한 왕자를 후계자로 지명하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그 후에 형제간의 살해와 왕자의 정부 요직 임명이 금지되고, 그 대신 왕자들은 궁성 내에 각자 별궁(Kafe)에 머무르게 되었다. 그 결과, 장자가 자동적으로 술탄을 계승했으나, 즉위할 때까지 정치에 대한 경험은 조금도 가질 수 없었다. 따라서, 주로 하렘 속에서 생활하고 있는 왕자들보다는 오히려 속세에서 성장해서 들어온 하렘 여성들이 정사에 커다란 영향력을 휘둘러 정부 요직의 인사문제에까지 관여하게 되었다. 이러한 하렘 여성의 정사 관여는 부패를 낳게 되어 관료 조직체 뿐만 아니라, 종교와 군사 기구에까지 파급되었다. 즉, 중앙 정부의 부패는 邊境州(변경주), 즉 이집트, 예멘, 아라비아 반도, 쿠르드 족의 거주지역 및 심지어 몰다비아(Moldavia)와 왈라치아(Wallachia, 現 루마니아의 일부) 지역 등의 반독립화를 가져오게 하였다.
레바논 지역의 드루즈(Durse)파는 17세기에 한때 실질적인 독립을 이룩하여 1585년부터 1635년 사이에 유럽 열강과 외교 협정을 독자적으로 해결하였고, 유럽의 기독교 선교사와 기사를 불러들여 각각 학교를 세워 교육과 지역 개발에 힘쓰게 하였다.
이집트에서는 오스만 제국 총독의 명목적인 감시 아래 맘룩들이 행정기구를 장악하게 되었다. 몰다비아와 왈라치아의 토착 통치자들은 자치달성을 뜻대로 이루지 못했는데, 그것은 유럽 국가의 침입이 이 지역으로 들어와 오스만 정부의 감시가 예리해졌기 때문이다.
오스만 제국의 쇠퇴는 유럽 국가의 번성과 거의 때를 같이 하였다. 17세기 말까지 오스만 제국은 유럽 국가의 연합공격에 시달렸다. 그 후, 유럽열강은 서로 경쟁하고 견제하였기 때문에 오스만 제국이 연명하는 데에는 오히려 큰 도움이 되는 편이었다.
5)국경 분쟁
오스만 제국의 쇠퇴를 막아 보려는 노력도 나타났다. 술탄 오스만 2세('Osm n Ⅱ, 1618∼1622), 무라드 4세(Mur d Ⅳ, 1623∼1640), 특히 술탄 메흐메드 4세(Mehmed Ⅳ, 1648∼1687) 치하에서 재상 가문으로 유행했던 쾨프륄루(K pr l )家의 메흐메드(Mehmed, 1656∼1661 재직)와 아흐메드(Ahmed, 1661∼1676 재직)에 의한 부패 제거와 개혁 운동이 바로 그것이다.
메흐메드 쾨프륄뤼의 5년에 걸친 재상 재임 기간 중에 약 3만명의 장교, 관료, 신학자, 법관 등을 부정 부패라는 죄목으로 처형하거나 파면하여 행정 기구의 능률을 높이는 한편, 정직한 공무원의 사기 함양에 힘썼다. 이러한 행정 기구의 정화운동은 1593∼1606년 사이에 걸친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에서 오스만 제국이 고전한 결과 일어난 것이다.
이 전쟁에서 오스트리아는 헝가리와 루마니아의 일부 지역을 점령하였으나, 시트바 토록(Sitva Torok) 조약에서 원상회복 되었다. 그러나, 이 조약이 술탄과 오스트리아 황제가 대등한 지우에서 최초로 체결됨으로써 유럽 열강의 오스만 제국에 대한 두려움도 많이 사라졌다. 한편, 쾨프륄뤼 가문의 재상들이 노력한 결과, 오스만 군은 1645∼1669년 사이에 베니스아의 오랜 전쟁에서 크레타 섬을, 1676년 폴란드와의 전쟁에서 포돌리엔 지역을 정복하고, 1683년에는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을 두 번쨰로 포위하는 등의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1699년까지 계속되는 전쟁에서 불가리아와 세르비아는 일시적으로, 트란실바니아는 영원히 빼앗기게 됨으로 해서 결국에는 오스만 제국의 허약성이 노출되고 말았다. 더구나, 18세기 초부터 러시아가 발칸 반도로 진출하게 되어 오스만 제국은 더욱 외로운 싸움을 벌여야 했다.
한편, 제국의 동부 국경에는 시아 이슬람을 국교로 하는 이란의 사파위조(Safawi朝, 1500∼1722)가 등장하였다. 특히, 샤 아바스 1세(Sh h 'Abb s Ⅰ, 1587∼1629)는 1603년에 아제르바이잔, 코커서스 및 이라크 지역을 정복하였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의 무라드 4세(1623∼1640)는 사파위조와 싸워 이라크를 다시 빼앗았으나, 1638년에 있은 카스르 에쉬린(Qa r-i-Shirin) 조욕에서 아제르바이잔과 코커서스 지역을 이란에 넘겨 주기로 하는 최종적인 국경 조약을 체결하였다. 그 후 18세기 초에는 사파위 조가 붕괴 직전에 처하게 되어 발칸과 지중해 지역에서 고전하는 오스만 제국에는 커다란 도움이 되었다. 더구나, 아프가니스탄의 압샤르(Afsh r) 부족의 침입으로 사파위조가 1722년에 망하게 되자 이란에는 무정부 상태가 나타났다. 술탄 아흐메드 3세(Ahmed Ⅲ, 1703∼1730)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아제르바이잔을 점령하였다.
6)서방의 진출과 개혁 기운
17세기 말까지 오스만 제국의 지도층은 무슬림 세계 밖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하여 거의 아무런 관심도 두지 않았다. 이것은 14세기부터 16세기에 이르는 거의 300년 동안 오스만 제국이 기독교 세계를 침략하여 영토를 확장하였기 때문에 생겨난 자만심 때문이었다.
17세기에는 오스만 제국와 유럽 기독교 세계는 양대 세력 간의 균형이 잡혀 팽팽한 상태였으나, 무슬림 세계는 그 때까지도 유럽인을 열등한 인종 또는 기독교를 열등한 종교로 보고, 이 지역의 발전상에 주의을 기울이지 않았다. 이 두 세계의 접촉은 전쟁을 통해서나, 유럽 국가의 외교관과 상인들이 일방적으로 오스만 제국에 들어오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18세기부터는 입국하는 외국인의 수가 급증하였고, 또 일부 오스만 제국의 외교관과 상인들이 유럽 지역으로 진출하여 점차 그 곳 사정이 일부 지도층에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더구나, 프랑스의 베르사이유(Versaille) 궁전 생활 양식이 알려지면서 의자와 탁자가 수입되고, 또 궁전 건축과 공원 양식 등도 도입되었다. 이러한 궁전 생활 양식은 모방은 재상 이브라힘 파샤(Ibr him Pasha, 1717∼1730 재직)와 코자 라기브 파샤(Qoja R ghib Pasha, 1756∼1763 재직) 때에 절정에 달하였다. 더구나, 이브라힘 파샤가 재직할 때에는 이스탄불 상류 계급의 모임에서 네덜란드로부터 수입한 튜울립을 즐겨 사용하였기 때문에 이 기간을 '튜울립 시대'(Lale Devri)라고 불려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럽에 대한 인식은 일부층에만 제한되었고, 일반 서민들에게는 생소하였다. 또, 유럽의 새로운 행정 기구, 세제, 교육 제도 등의 개혁에는 거의 염두에 두지도 않았다. 물론, 1728년에 아랍 문자로 된 인쇄물이 처음으로 도입되었으나, 그 때까지도 기독교 세계에 대한 무슬림 세계의 우월감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1768∼1774년 사이에 있었던 오스만-러시아 전쟁, 1787∼1792년 사이의 오스만-러시아 및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에서 오스만군이 참패를 당하고, 곧이어 1798년에 프랑스의 황제 나폴레옹 1세(Napoleon Ⅰ, 1821 사망)가 불과 일 주일 만에 이집트를 완전 장악하자, 유럽의 우월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와 함께, 그당시 오스만 제국의 지도층은 유럽의 우월성은 과학기술에 있다고 보았으나, 사회제도 전반에 걸친 근본적인 개혁의 필요성을 이해하지는 못했다. 즉, 오스만 제국의 기존 사회 질서에 새로운 과학 기술만 도입하면 곧 유럽의 군사력에 버금갈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이 개혁을 구체적으로 실천한 술탄은 셀림 3세(Selim Ⅲ, 1789∼1808)로서, 그는 제국의 정부(Divan)를 12부처의 내각으로 개편함으로써 재산의 권한을 축소하는 행정 기구 개편을 단행 였다. 또, 인쇄소의 도입, 유럽 서적의 번역과 발행, 런던, 파리, 빈 및 베를린 등에 대사관을 설립하여 유럽에 대한 새로운 정보를 수집하였다. 그러나, 술탄이 개혁 조치를 통하여 유럽식 제복, 무기, 전술 등을 군대에 도입하자, 정예군인 예니체리가 1807년에 반란을 일으켜 결국에는 다음 해 술탄을 퇴위시켰다.
그 뒤를 이는 마흐무드 2세(Ma m d Ⅱ, 1808∼1839)도 역시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보다 조심성 있게 개혁을 추진하였다. 즉, 그는 자기의 지지세력을 충분히 확보한 후에 군의 개혁을 단행하였으며, 더구나 다시 반란을 일으킨 예니체리는 말할 것도 없고, 전국에 걸쳐 그들의 지지자를 수색하여 무자비하게 처단하였다. 그 후, 프러시아 장교단이 이스탄불에 와서 군사 교육을 담당하고, 또 오스만 군의 장교를 영국으로 파견하여 유학시켰다. 1834년에는 변경 지방의 각 주에도 민병대를 조직하여 군사훈련을 받게 하고, 또 외국의 원조를 받아 사관 학교도 설립하였다. 그는 세로운 군 조직을 바탕으로 총독의 권한을 축소하여, 처형은 반드시 중앙 정부의 동의를 받아 시행하도록 하는 등 거의 200년간 자치를 누려 온 지방 정부도 장악하였다. 그와 함께, 도로 및 우편 제도도 개혁하여 제국의 통신망도 개선하였다.
7)개혁 운동
이 개혁 운동은 대체로 3단계로 구분되는데, 제1단계는 기존 오스만 제국의 질서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단순히 구 관료 조직체가 기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참신한 인사를 등용하여 부정과 족벌주의를 제거하고, 지방의 호족을 중앙 정부에 복종시키는 것이었다. 때문에, 기존의 군대 조직은 그대로 두고 유럽의 군대 조직에 따라 별개의 군 조직을 만들었다. 따라서, 두 개의 군 조직은 서로 경쟁하게 되어 결국 충돌하게 되었다.
이 기간 중에도 반란과 외세의 침입은 끊임없이 일어났다. 즉, 세르비아에서는 두 번이나(1804년과 1805년) 반란이 일어나 자치가 허용되었고, 그리스에서는 독립전쟁(1821∼1830)이 일어나 자치를 이루고 말았다. 한편, 1802년에 영국군이 이집트와 이스탄불을 침입하고, 또 러시아 군도 베사라비아(Bessarabia), 몰다비아 및 왈라치아(1806∼1812) 등을 점령함으로써 더 이상의 개혁은 불가능하였다. 더구나, 예니체리 등의 기존 군 조직이 개혁에 반대하였으므로 개혁을 위해서는 이들을 완전히 제거해야 되었기 때문에, 결국 1826년에 이들을 완전히 제거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개혁을 반대한 예니체리의 제거에도 불구하고 1833년까지 외부의 간섭으로 새로운 개혁은 거의 불가능하였다. 유럽 열강이 1829년의 에디르네(Edirne) 조약에서 그리스의 독립과 세르비아, 몰다비아 및 왈라치아 들의 자치를 강요하자 어쩔 수 없이 이를 허용하게 되었다. 한편으로는 이집트의 총독 무함마드 알리(Mu ammad 'Ali, 1805∼1848 재직)의 군대가 아라비아 반도, 시리아 및 아나톨리아 반도의 동남부를 정복하고, 1832년의 코냐(Konya) 전투에서 오스만 군을 패퇴시켰다. 술탄은 결국 1833년의 휜카르 이스켈레시(H nk r Iskelesi)에서 맺은 러시아 황제와의 조약을 통해 러시아의 지원을 받아 무함마드 알리의 침입을 저지하고, 또 시리아, 아라비아 반도 등의 점령 지역에서 알리 군을 철수시킬 수 있었다. 이 때, 영국과 프랑스 등의 유럽 열강들도 무함마드 알리가 이스탄불에 도착해서 다시 제국을 통일시킬 것을 염려하여 그의 철군을 강력히 요구하여 마흐무드 2세를 도왔으므로, 술탄은 다시 여유를 얻게 되어 개혁에 착수할 수 있게 되었다. 결국 셀림 3세가 시도하였고, 마흐무드 2세가 시작한 개혁운동은 1839년부터 탄지마트(Tan im t-i Khayriyye, 개선 재정비)라 불렸는데, 여기에는 광범위한 법률 제정이 포함되었으며, 이와 함께 개혁운동은 제2단계(1826∼1876)에 접어들었다.
이 탄지마트 운동은 대체로 네 분야에 중점을 두었다.
첫째, 프랑스의 정부조직을 모형으로 삼아 중앙 집권제를 강화하여 통치영역 내의 모든 지역에, 또 사회생활의 모든 분야에 그 영향력을 발휘하려고 하였다. 그 결과, 종래의 주요한 세입 원천이었던 무카타아(Muq ta'a)와 티마르(Tim r) 제도를 폐지하였다.
전자는 술탄의 권익을 분배하여 현직 고급 관료에게 관할권을 위임하여 그 수입을 일부를 술탄에게 지급하고, 나머지를 각 관료에게 지급함으로써 관료들이 생계를 도모할 수 있도륵 하는 제도였다. 이것은 전답, 공예업 및 상업 등의 산업 영역을 술탄이 보호하고 지배한다는 이론적 바탕에 근거하였다. 즉, 고급 관료는 술탄의 영역에서 발생하는 수익에 술탄과 더불어 참여하고 분배받는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는 특정한 직책에 특정한 수익 원천이 결부되는 것이었다.
후자는 상설 단위 부대에 일정한 토지를 주어, 그 수입으로 부대 비용을 충당하는 일종의 세금 징수 청부(tax farming) 제도이다. 이 두 제도를 폐지하고 정부의 모든 관료와 고용원은 일정한 급료를 받도록 개혁하였다. 즉, 행정 기구와 세제 개혁이었다.
둘째, 법의 테두리 안에서 술탄의 臣民은 인종, 종교 및 재능에 관계없이 각자의 생명, 재산의 보호와 인격을 존중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탄지마트의 법률 개혁에는 여전히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구분과 종교에 의한 밀라의 구분은 그대로 존속하였으나, 다만 피지배층의 무슬림과 비무슬림은 법 앞에 평등하고, 각 종교의 우두머리가 종래 누리고 있던 독선적인 자치 체제를 폐지시켰다는 점이 새로운 점이다.
셋째, 군 조직의 대폭적인 개혁이 가장 긴요했으므로, 종래에 없었던 군 보급부대를 창설하여 순수한 전투 부대에서 분리하였다. 또, 술탄이 지닌 모든 오스만 군의 지휘권을 각 지역별로 세분화하여 지역군을 창설, 그 지역의 특수성과 필요성에 맞도록 조직과 무장을 정비하고 전략도 독자적으로 펼 수 있도록 하였다. 또, 종래까지 비무슬림은 人頭稅(인두세, Jizya)를 내는 대신에 군 입대를 금지시켰는데, 이것을 폐지하고 군 복무를 의무화하였다.
넷째는 교육제도의 개혁이었다. 종래까지 종교 원로('Ulam ')가 맡아 온 마드라사(Madrasa, 이슬람 성원 부설 신학교)를 통한 교육 대신에 유럽의 세속적인 학교 제도를 도입하고, 1845년에는 내각 내에 교육 전담 부서를 설치하였다. 특히 기술 교육에 중점을 두어 실업 학교가 많이 생겼다.
이러한 탄지마트 운동은 마흐무드 2세의 두 아들인 술탄 압둘 마지드('Abdul Majid, 1839∼1861)와 술탄 압둘 아지즈('Abdul 'Aziz, 1861∼1876)의 통치 아래서 계속 추진되었다. 더구나, 이 탄지마트 운동 때문에 오스만 제국의 지식인은 유럽의 자유주의 문헌을 접하게 되었으며, 특히 정치, 역사, 철학 및 정부에 관한 서적이 보급되었다. 더구나, 프랑스 혁명(1789)의 여파로 자유주의와 민족주의 사상이 들어와 발칸 반도의 기독교도들 가운데 널리 확산되어 오스만 제국의 개혁 운동에 커다란 짐을 안겨 주기도 하였다.
또, 1853∼1856년 사이에 일어난 크리미아(Crimea) 전쟁으로 탄지마트 운동은 더욱 촉진되었다. 이 전쟁의 원인은 무슬림과 비무슬림, 특히 발칸 반도의 그리스 정교도들에 대한 차별대우 때문이었다. 즉, 그리스 정교도의 보호자 역할을 주장하는 러시아가 그들의 남하 정책의 구실로 이 문제를 내세웠던 것이다. 영국과 프랑스는 이러한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저지하기 위하여 오스만 제국의 개혁운동을 지지하고 촉진시켰다. 더구나, 유럽의 영향을 받은 청년층도 울라마 등의 보수 세력과 대결하면서 개혁을 주장하며 이를 추진하였으나 그 속도는 매우 느렸다.
결국 보수세력과 개혁세력의 틈바구니에서 낭비벽이 심한 술탄 압둘 아지즈의 태도가 우유뷰단하자, 재상 미드핫 파샤(Midhat Pasha, 1876∼1877 재임)를 비롯한 개혁파는 술탄을 퇴위시키고 압둘 하미드(Abdul Hamid, 1876∼1909)를 옹립한 후, 벨기에와 프랑스 헌법을 바탕으로하여 1876년에 헌법을 제정하고 양원제의 국회를 열었다. 이 때부터 오스만 제국은 입헌 군주국이 된 것이다. 이 헌법은 제국의 모든 국민에게 자유와 평등을 보장하였으나,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는 구절은 없었고 이슬람은 여전히 國敎로 남게 되었다. 술탄은 국가 원수로서 칼리프 칭호를 공식적으로 사용하였다.
개혁 운동의 제3기(1876∼1918)는 압둘 하미드의 술탄 즉위와 헌법 제정으로 시작되었다. 상원(majilis-i a'y n, 귀족원) 위원은 술탄에 의하여 임명되고, 하원(majilis-i mab' th n, 민의원) 의원은 국민 직선이었다. 그러나, 미드핫 파샤와 그 추종자들의 개혁은 왕실 재정의 통제, 노예 무역 정지 및 무슬림과 기독교도간의 共學制의 허용 등과 같이 너무 급진적이어서 술탄과 보수 세력은 이에 반대하였다.
보수 세력들은 마침내 1877∼1878년에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일어난 위기를 이용하여 마드핫 파샤를 유배시키고 의회를 정회시켰다. 그러나, 술탄은 개혁에 대한 미련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개혁의 중점을 헌정에서 군 조직 개편으로 옮겼다. 또, 술탄은 과학 기술의 발전이 필요하다고 확신했지만, 정치 권력만은 그의 손에 집중시켰다. 그래서, 전국에 정보 조직을 강화하여 국가 전복 음모를 사전에 탐지하였으며, 언론 통제를 강화하고 자유와 평등 사상에 기울어진 작가들을 무자비하게 처벌하였다. 그러나, 일부 작가들은 해외로 망명하여 그 곳에서 발행한 저작품을 몰래 터키로 반입하였다.
한편, 술탄은 자신의 억압 정책에 대한 원성을 무마시키기 위하여 이슬람의 부흥을 통한 민족적 감정을 고취시키려고 노력하였다. 때문에, 스스로 칼리프라는 칭호를 사용하여 범이슬람주의의 핵심 인물로 자처하며 어느 정도의 성과를 올리는데는 성공하였으나, 이미 유럽의 자유 사상을 접한 젊은 지식층의 늘어만 가는 불만을 해소시킬 수는 없었다. 또, 제국 내의 소수 민족, 특히 발칸 반도의 기독교도와 아르메니아인의 분리 독립 운동은 점차 폭력화하여 제국의 안정을 흔들고 있었다. 이러한 기독교도의 민족주의에 대한 대항 세력으로 범 터키 민주주의도 당시 러시아에 병합된 중앙 아시아의 망명 지도자를 축으로 해서 일어나고 있었으나, 제국의 집권층은 민족주의를 이슬람에 어긋나는 인종주의로 보고, 이슬람을 통한 무슬림의 단결과 제국 영토의 보전을 목적으로 하는 오스만 주의에 충성심을 바치고 있었다.
이 집권층은 젊은 장교, 교사 및 기술자에게 유럽의 기술발전 등을 논하면서 그 곳의 사회 및 정치 제도를 숨길 수는 없었다. 결국 보수 세력은 반대 세력을 분열시킴으로써 정권의 안정을 지탱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반대 세력은 1889년에 학생을 중심으로하여 '오스만 통일 발전 위원회'('Osmanli Ittih d ve Terraqqi Jem'iyeti)를 결성하였다. 이 당은 일반적으로 청년 터키당으로 알려졌다. 한편, 1892년의 술탄에 대한 암살 기도와 1896년의 쿠데타가 모두 실패로 돌아갔기 때문에 이 당에 대한 탄압이 극심해져서 많은 당원이 체포, 처형되거나 국외로 망명하였고, 국 내에서의 활동은 지하로 잠적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지하 활동은 살로니카(Salonika) 市에 주둔하고 있는 군 부대 안에서 매우 활발하였다.
이들은 1905년에 일본이 일·러 전쟁에서 승리하자 이에 크게 고무되어 1907년에 모든 반대 세력을 집결시킨 새로운 정당, 즉 통일 발전 위원회(Ittihad ve Terraqqi Jem'iyeti)를 결성하고, 1908년에 발칸 주둔군 부대의 지지를 받아 술탄에게 1876년의 헌정 회복을 요구하는 최후의 통첩을 보냈다. 결국, 술탄은 불리한 전세를 뒤집기 위한 시간을 벌기 위해 일시적으로 굴복하여 통일 발전 위원회가 수락할 수 있는 내각을 임명하고 해산된 옛 오스만 의회를 소집하였다. 이것이 곧 청년 터키당의 집권이다.
한편, 1908년에 불가리아가 독립하는 등의 오스만 제국에 있어서 수치스러운 사건이 발생하자, 술탄을 중심으로 하는 보수 반동 세력이 일어났으나 軍部가 혁명을 지지했기 때문에 실패하였다. 이와 함께, 오스만 제국은 청년 터키당의 지배(1908∼1918) 아래 정치와 종교의 분리를 주장하는 세속주의가 득세하게 되었다. 이 당의 지배는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터키가 패망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2.오스만조 치하의 아랍 민족
1)17세기 경 중근동의 아랍 지역
1517년, 술탄 셀림 1세(Selim Ⅰ, 1512∼1520)의 이집트 점령, 1534년 술탄 술레이만 2세(Suleiman Ⅱ, 1520∼1566)의 이라크 및 '비옥한 초생달 지역'(Fertile Crescent)의 정복 등으로, 중근동의 아랍인 거주 지역은 거의 16세기 전반기에 오스만 제국의 지배 아래 들어나 수니 이슬람 공동체를 이루어 4세기 가량 지속되었다. 이 공동체에서 아랍어 사용 인종은 피지배자라기 보다는 오히려 동료로서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즉, 관료 조직체에 버금가는 종교 조직체의 우두머리인 세이훌 이슬람(Sheikhul-Islam)은 대체로 아랍인이었다. 또, 오스만家는 通婚으로 피가 많이 섞여 있었고, 스스로도 오스만 투르크라고 부르지 않았다. 이 명칭은 유럽 학자들이 붙인 것이다. 아랍인 거주 지역은 술레이만 2세 때 제정되어 1525년에 공포된 법전에 따라 여러 州로 나누어졌으나, 다양한 행정체제 아래 있었다. 이집트는 행정권과 사법권의 일부를 가진 총독(W li), 재정권(Defterdar) 및 6개 군관구(Ojag)로 나누어져 있었다. 총독의 임기는 1년이며, 연장이 가능하엿삳. 한편, 6개 군관구는 총독의 관할 아래 있지 않고 이스탄불에서 직접 임명되는 사령관(Agha)의 지휘 아래 있었다. 재정관도 이와 비슷하였다.
오스만군이 1516년에 이집트의 맘룩군을 무찔렀을 때 일부 맘룩 배신자들의 도움을 받았으며, 이 배신자가 초대 총독으로 임명되었으므로 맘룩 제도는 그대로 존속될 수 있었다. 그래서 맘룩의 지도자들은 이지브 내 각 지역의 최고 행정관(Q 'im maq m), 재정 담당관 및 순례 집행관(amir al-hajj) 등의 요직을 차지하였다. 그 후, 맘룩 지도자들은 이스탄불의 중앙 집권이 허약하게 된 17세기 중엽에 잃었던 세력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집트의 토착민은 고위 관료층에 거의 발탁되지 않고 단순히 세금 내는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17세기 전반기에 이르러, 오스만 제국이 쇠퇴하여 발칸 반도의 영토를 잃게 되자, 그 영향이 중근동 지역에도 미쳤다. 바그다드는 1623∼1638년 사이에 다시 사파위조의 이란에 점령당하고, 1635년에는 예멘에 대한 종주권도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심지어, 이스탄불의 종주권을 인정하는 여러 지역에서도 지방 토후들가느이 권력 다툼이 일어나 무정부 상태가 나타나게 되었다. 1605년에는 이집트 총독에 대한 군부의 반란이 일어나 총독이 살해되었고, 1609년에는 나일강 하류 지역이 반란군에게 한동안 점령되었다. 비록 이 반란의 진압을 제2의 이집트 정복이라 불렀지만, 그 후에도 오스만 총독의 통치는 확고하지 못하였다.
새로운 맘룩 지도층은 17세기 중엽에 총독과 이집트 주둔 예니체리의 지휘관들과 함께 권력을 나누어 가졌으며, 또 제국의 중앙부에서 멀거나 오스만 군이 접근하기 힘든 지역에서는 지방 토후의 세력이 서서히 형성되었다. 하이렛딘 바바로사(Khayreddin Barbarossa) 대제독에 의하여 1520년대에 오스만 제국의 통치 아래 들어온 튀니지와 알제리도 각각 알제(Algier)의 데이(Dey, 오스만 국의 직위명, 즉 총독의 칭호)와 투니스의 베이(Bey, 오스만 국의 직위명, 즉 총독의 칭호)가 세습적인 準왕조로 발전하였다. 또, 바스라(Basra)주에서는 1597년 경에 아프라시얍(Afrasiyab) 가문이 권력을 장악하여 왕조를 세웠다.
그러나, 가장 대표적인 것은 드루즈(Druz) 파의 首長(수장, Amir) 파르훗 딘(Fakhr al-Din)으로서, 그는 1590∼1635년 사이에 레바논을 휩쓸었다. 그는 레바논 지역의 다른 수장을 제압하여 그 세력을 팽창하였으므로, 한때는 오스만 제국의 '비옥한 초생달 지역'에 대한 통치도 위협하였다. 파흐룻 딘은 유럽 열강과의 독자적인 무역 관계 수립 및 다른 종파에 관용을 베푸는 정책으로 19세기 중근동의 통치자들에게 선구자적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파흐룻 딘의 반란은 술탄 무라드 4세(Mur d Ⅳ, 1623∼1640)의 노력으로 진아되고, 바그다드도 회복되었다. 그의 뒤를 이어, 재상 메흐메드 쾨프륄뤼(Mehmed K pr l , 1656∼1661 재직)와 그의 아들 아흐메드(Ahmed)의 끈질긴 노력에 의하여 반란 지역에서 중앙 정부의 권위는 완전히 확립되지는 못했지만 무정부 상태는 저지되었다.
2)18세기의 동향
18세기에 들어와서도 오스만 제국의 쇠퇴는 계속되었다. 그와 함께, 이집트와 비옥한 초생달 지역의 대도시에서는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서 주의 총독, 주둔군 사령관 및 세금 징수 청부인(tax farmer) 사이에 세력 다툼이 일어났다. 이들은 주로 자기의 私兵을 동원하였는데, 이 가운데서 가장 지속적인 지방 권력자는 바그다드 총독인 하산 파샤( asan Pasha, 1704∼1723 재직)였다.
무라드 4세 때 체결한 조약에 의하여 안정된 오스만-이란의 국경은 사파위조(Safawi朝, 1500∼1722)의 붕괴로 인해 근본적으로 뒤흔들렸다. 1722년, 아프간 족의 침입으로 사파위조가 멸망할 때부터 나디르 샤(N dir Sh h, 1736∼1747)가 죽을 때까지, 25년간 오스만 술탄과 이란의 통치자 사이에 전쟁이 그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 아래서 바그다드에는 강력한 행정부, 즉 총독이 필요하였다. 이런 중대 상황에 있어서 1723년 하산 파샤가 죽자 그의 아들인 아흐메드 파샤(A med Pasha, 1723∼1747 재직)가 그 뒤를 이어 총독이 되었다. 이들 부자 총독은 조지아(Georgia) 출신의 맘룩을 양성하여 전투병과 행정 관료로 기용하였다. 결국 이들 맘룩 지도자 중에 한 사람이 1749년에 권력을 장악하자, 오스만 술탄도 이를 묵인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즉, 맘룩 총독 제도가 확립되어 1831년까지 계속되었다.
한편, 서쪽의 지중해 연안 지역의 다마스쿠스는 해마다 메카 순례객이 집합하여 출발하는 곳이기 때문에 중요한 지점이었다. 순례객의 행렬은 종교적으로 뿐만 아니라 상업적으로도 중요한 행사여서, 이들의 안전은 곧 술탄의 위신과 직결되어 있었다. 더구나 17, 8세기에 오스만의 권력이 허약해지자 북부 아라비아와 시리아 사막의 유목민이 움직이기 시작했고, 또 다마스쿠스 주둔군이 양 파로 갈라져 권력 투쟁을 하고 있어서 순례객의 안전이 크게 위협당하고 있었다.
이 혼란의 틈바구니 속에서 아즘가('Azm家)가 일어나 권력을 장악하여 순례객의 안전을 도모하였다. 아즘가의 전성기는 1725∼1757년 사이이며, 시리아 지역의 대부분을 통치하였다. 그러나, 시리아는 소아시아 반도에 가까이 있고, 이집트 및 아라비아 반도의 홍해 연안을 연결시키는 요지이므로 아즘 가의 통치는 세습제로 발전하지 못하였다. 더구나, 아즘 가는 이라크의 경우와 달리 맘룩 제도를 도입하지 않았으므로, 지방의 자주 독립 세력으로 존속할 바탕이 허약하였다. 또, 알렙포(Aleppo)를 중심으로 한 시리아 북부 지역은 상업상으로도 다마스쿠스 및 소아시아 반도와 밀접히 연결되어 있으므로 양 지역의 정치 변동에 말려들지 않을 수 없었다.
서쪽의 레바논 산악 지역에서는 쉬하브가(Shih b家)가 일어나, 동족이 파흐룻 딘(Fakhr alDin)의 영역을 점령하여 1697년에 토후국(Amirate)을 세웠다. 또, 남쪽의 갈릴리(Galilee) 지역에서는 세금 징수 청부인인 자히르 알 우마르( hir al-'Umar)가 세력을 확장하여, 1746년에 해안 도시 아크레(Acre)를 점령하고 근거지로 삼았다. 그의 권력 바탕은 안정과 세금 완화를 통한 농업 인구의 호감, 유럽 상인들과의 선린 관계에 의한 아크레의 융성, 종교차별의 철폐에 의한 비무슬림들의 지지 획득, 그리고 私兵의 효율적인 관리에 두었다. 그리하여, 그는 술탄의 권력이 간섭하지 않는 한 시리아 내부의 권력 투쟁에서 버틸 수 있었다.
18세기에 들어와서 이집트 내의 권력 투쟁은 더욱 복잡하였다. 이것은 인물 중심이 아닌 파당 간의 분쟁이었다. 가장 유력하고 오래된 파당은 세공인과 부족을 바탕으로 한 니스프 사아드(Nisf Sa'd)와 니스프 하람(Nisf ar m)이었다. 이 두 파당은 17세기부터 경쟁 관계에 있던 파카리야(Faqariyya)와 카심야(Q simiyya) 맘룩 파당과 각각 결합하여 18세기 초에도 세력 확장에 몰두한 세력이었다.
이들 세력 외에도 오스만 주둔군 세력이 있었다. 6군관구로 나누어진 주둔군 가운데 예니체리 관구와 아잡군은 서로 대결하였으며, 나머지 관구군은 후자에 지원을 주는 경향이 있었다. 결국 1711년에 이 분쟁을 제거하기 위하여 한 부대로 통합되었으나 만족한 해결은 보지 못하였다. 17세기 말엽에 시작된 이집트 내의 권력 분쟁은 18세기에도 계속되어 총독은 유명무실한 존재에 지나지 않았다. 실권자는 군관구의 고급 장교와 행정 고위직이나 군관구 외 지역운의 사령관직을 지니고 있는 맘룩 출신의 베이(Bey)들이었다.
이들 맘룩 출신 베이의 한 무리인 카즈두글리야(Q zdughliyya)는 17세기 말경에 생겨나서 파카리야 맘룩 그늘 밑에 세력을 길렀으나, 1748년에 이르러 다은 세력의 추종을 불허하는 강력한 파당으로 성장하였다. 이 파당의 고위 구성원은 영주에 유사한 베이가 되어 19세기 초에 총독인 무함마드 알리(Mu ammad 'Ali, 1805∼1845 재직)에 의하여 제거될 때까지 이집트의 지배세력으로 남아 있었다. 이들 가운데 가장 지도적인 베이는 土侯長(토후장, Sheikhul-balad)이라는 칭호를 가지고 왕위로 발전하는 경향도 있었으나 카즈두글리야 파당의 내부 분쟁으로 성립되지 않았다.
이와 같이, 외래 인사들이 지배층이 되어 이집트의 토착민을 통치하는 시기에 그 중개 역할을 담당한 계층이 종교계의 원로인 울라마('Ulam ')였다. 울라마는 토착민의 존경을 받았고, 또 그들의 어려움을 지배층에 전달하는 중개 역할의 대가로 지배층은 울라마에 免稅의 특전을 주었다.
18세기 후반기는 지중해 연안의 중근동에 처음으로 유럽의 군사력이 나타나서 지금까지 존속하게 되었다. 물론, 그 이전에도 오스만 제국의 유럽 영토는 유럽 열강에 의한 오스만군의 패배로 잠식당했으나, 한편으로 중근동에 대한 방패의 역할도 하여 제국의 아랍 영토에는 외부의 간섭없이 정치 발전이 이루어졌다.
18세기 전반기까지 유럽 열강은 오스만 제국의 아랍 영토에 상인과 선교사를 파견하여 지방 호족의 보호를 받는 것이 고작이었다. 이 방패는 러시아가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1768∼1774년의 러·터 전쟁) 중에 지중해에 함대를 보내어 오스만군을 쳐부수고, 반란의 깃발을 올린 아크레의 자히르 알 우마르와 이집트의 토후장인 알리 베이(Ali Bey)에게 원조를 제공했을 때 뚫렸다. 더구나, 1798년에 나폴레옹 1세가 이집트를 정복하자, 이 방패는 무용지물이 되었다. 알리 베이는 본래 조지아(Georgia) 출신 기독교도였으나 맘룩이 되었다. 그는 이집트와 시리아가 통합되어 있었던 옛 맘룩 왕조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토후장 자리를 이용하여 카즈두글리야 체제를 그의 개인 왕조로 바꿀 야심을 가지고 1770년에 군대를 다마스쿠스로 보냈다. 그는 이 작전에 자히르 알 우마르와 러시아의 원조를 약속받았으나, 동료 맘룩들의 배신으로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 꿈은 무함마드 알리에 의하여 18세기 초에 일시적으로 실현되었다.
한편, 오스만 제국의 입장에서 보면 지방자치 세력의 아성을 부수어 주권이 미치는 영토 내에서 행정 체계도 잡아야 했다. 특히, 러·터 전쟁기간 중에 알리 베이와 자히르 알 우마르의 세력 향상은 놀라운 것이었다. 그래서, 허약한 제국 정부는 이간책을 사용하였다. 즉, 알리 베이의 두 부장, 즉 맘룩 출신인 아붓 다합(Abu'l-Dhahab)과 보스닝 출신의 아흐마드 앗 자자르(A mad al-Jazz r)에게 접근하여 회유책을 폈다. 시리아 원정을 이끌었던 아붓 다합을 다마스쿠스에서 1771년에 이집트로 돌아가게 하여 알리 베이를 죽이고 토후장의 자리에 오르게 하였다. 그러나, 그 자신도 1775년에 자히르의 평정에 나가 전사하였다. 한편, 앗 자자르도 1768년에 알리 베이와의 관계를 끊고 자히르의 토벌에 공헌을 세워 시돈(Sidon, 레바논의 도시)州의 총독이 되었으나, 자히르의 옛 수도인 아크레에 거주하였다. 앗 자자르의 총독 정치는 1804년 그가 죽을 때까지 지속되었으며, 지방 호족 정치의 전통적 본질인 술탄에 대한 충성심으로 일관하였다.
아크레가 1799년 나폴레옹 군에 포위당했을 때 그는 굴하지 않고 저항하여 충성심을 보여 주었다. 오스만 정부의 아붓 다합과 앗 자자르에 대한 정책은 자립적인 총독의 측근을 회유하는 전통적인 정책의 일단면을 보여 준 것이다. 아붓 다합이 죽은 뒤 이집트는 이브라힘 베이(Ibr him Bey)와 무라드 베이(Mur d Bey)의 양두체제 아래 들어갔다.
오스만 정부는 이집트의 지배를 재확립하기 위하여 회유책을 썼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1786년에 자히르의 반란에 공훈을 세운 제독 하산 파샤( asan Pasha)를 파견하여 카이로와 나일강 삼각주를 점령하였으나, 두베이는 상류로 도피하여 계속 저항을 했으므로 할 수 없이 다음 해 철수시켰다. 그 후, 이집트는 양두 체제가 회복되어 1798년 나폴레옹 1세의 원정시까지 계속되었다.
한편, 오스만의 통치가 제대로 미치지 않는 아라비아 반도의 나즈드(Najd) 지방에서는 1744년에 소영주(Amir)인 무함마드 이븐 사우드(Muhammad ibn Sa' d)는 당시 이슬람 계율의 이완을 개탄하여 엄격한 한발리 법학파의 계율을 주창한 신학자 무함마드 이븐 압둘 와합(Mu ammed ibn 'Abd al-Wahh b)과 결합하여 수피(S fi, 이슬람 신비주의자)의 성인 또는 성지 숭배를 배척하고, 초창기 이슬람의 순수한 관행과 믿음에 돌아갈 것을 호소하였다.
1792년, 이븐 압둘 와합이 사망했을 때 사우드가는 중앙 아라비아 전역에 그 세력을 확장하였으며, 와하비(Wahhabi) 운동을 인도 지역에 전파시켰다. 이 운동은 오스만 제국의 통치 아래 있는 홍해 연안의 히자즈( ij z, 즉 이슬람의 성지 메카와 메디나가 있는 지역)와 남부 이라크 지방을 위협하였다. 1802년에 이 와합의 추종자는 시아파의 성지인 카르발라(Karbal ')를 점령, 약탈하였다. 이 약탈 전쟁은 수 년 동안 남부 이라크 지방에서 계속되었다.
와하비 운동은 오스만 제국의 권위를 떨어뜨렸으며, 무슬림 공동체 안의 종교적 권외가 무엇이냐 하는 문제를 제기시켰다. 백성들은 전통적으로 오스만 술탄은 가장 위대한 무슬림 통치자이고, 또 이슬람의 두 성지인 메카와 메디나의 보호자로서 알라의 가호를 받는 것으로 믿었다. 더구나, 17세기 이후 오스만 제국의 쇠퇴기에 술탄은 이슬람의 칼리프로 전세계 무슬림을 지배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무슬림의 원칙이 1803년, 1805년, 1807년에 일시적으로 메카와 메디나가 와합의 추종자에게 점령당하고, 그 후 몇 년 동안 계속하여 당시 와하비 운동의 지도자 사우드 이븐 압둘 아지즈 왕이 순례객을 괴롭히면서 흔들리기 시작했다.
나아가서, 이 운동은 오스만 제국의 종교 체제인 울라마와 이의 보호를 받는 수피 종단에게 커다란 도전이 되었다. 오스만 제국의 공인 이슬람은 성법인 샤리아(Shari' ) 및 일반 관습에 의한 법률(qanun)의 법 체계에 바탕을 두고, 수피 종단의 믿음과 관례를 인정하였다. 수피 종단은 몰아적인 신비주의를 믿어 창조주의 뜻에 창조물이 맞추는 것으로 신의 경지에 도달하고자 하였다. 와하비즘은 결국 이슬람 공동체와 무슬림 개개인의 가슴 한 구석에 남아 있었으나, 한동안 외면당한 신과 인간과의 관계를 다시 문제삼아 새로운 긴장을 일으켰다.
3)무함마드 알리의 등장
프랑스가 동방진출의 교두보를 만들기 위하여 1798년에 단행한 나폴레옹 1세의 이집트 원정은 비록 3년 3개월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무슬림 세계에 심각한 파문을 가져왔다.
프랑스의 이집트 점령으로 영국은 자신의 동방진출에 장애가 될 것으로 우려한 나머지 1801년에 오스만군과 함께 프랑스군을 몰아내자, 이집트 내 맘룩들의 정치력은 크게 위축되었다. 마케도니아 출신의 무함마드 알리(Mu ammad Ali)는 알바니아 여단을 이끌고 프랑스 군을 격퇴하는데 큰 공훈을 세웠다. 프랑스군의 축출에 성공한 영국군이 1801년에 철수하자, 이집트에는 다시 오스만과 맘룩군만 유일한 세력으로 남게 되어 충돌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그러나, 프랑스의 점령 기간 동안 혁명 사상의 영향을 받은 이집트 국민은 무자비한 맘룩의 통치나 현지 사정을 외면하는 오스만 통치를 거부하고 자립하려고 하였다. 울라마를 위시한 이집트 민중은 1804년 3월에 조세의 납부를 거부하고 들고 일어나, 그동안 원한을 가져왔던 맘룩 베이들을 카이로에서 몰아내고 울라마를 통하여 오스만 정부의 이집트 총독에게 조세 감면과 정책 결정에 이집트인의 참여를 요구하였다. 총독이 이를 거절하자 무장한 민중세력이 그를 제거하고, 1805년 5월에 알바니아 여단의 사령관이었던 무함마드 알리를 총독으로 선임하니, 이집트 역사상 민중의 권력 참여가 성공한 최초의 중대한 사건이 되었다.
오스만 정부는 세르비아 반란에 시달려 허약해졌으므로 그의 총독직을 어쩔 수 없이 인준해야만 했다. 무함마드 알리는 그의 정권이 민중의 신임이나 맘룩의 협조나 술탄의 지지에 바탕을 두면 오래 지속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교육 제도, 행정 체계 및 군 조직의 강화를 추진하였다. 그 결과, 1811년에 술탄과 영국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맘룩 지도자를 아라비아의 와하비 운동을 진압시키는 문제를 상의한다는 구실 아래 카이로성에 초대하여 몰살시켜 버리니, 이것이 곧 1250년대 이후 이집트 정치의 핵심역할을 해 온 맘룩 세력의 근절이다.
그는 광범위한 권력을 장악하자, 서방 문물을 받아들여 많은 개혁을 단행하고, 또 총독직을 세습제로 바꾸었기 때문에 현재 이집트의 아버지로 불리우고 있다. 나폴레옹 1세의 이집트 원정은 영·프간의 경쟁을 일으켜, 그 후에도 계속 이 지역을 둘러싼 양 세력의 충돌은 결국 1904년의 영·프 협정(Entente Cordiale)에 의하여 해결될 때까지 지속되었는데, 이와 같은 경합관계 때문에 결국 무함마드 알리는 유럽 열강의 대 이집트 정책 범위 내에서 대처방안을 만들어 그의 야심을 수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집트에서의 그의 지위와 독립성을 확립하기 위해서 행한 경제개혁 가운데는 조세와 토지 소유 제도의 변혁이 중요하다. 맘룩 베이들을 제거한 후 그들의 封土(봉토, Iltiz m t)를 왕실 소유로 만들어 최대의 지주가 되었고, 또 종래까지 면세 혜택을 받아 온 종교 기관의 재산(Waqf)과 공유 토지(Wasiya)에도 과세를 부과하였으며, 또 무역의 국가 독점을 꾀하여 세입을 증가시켰다. 그러나, 산업 혁명을 달성하려는 그의 시도는 시기 상조였기 때문에 실패하고야 말았다. 맘룩 군대가 터키인과 코카서스 등지의 외국인으로 구성된 데 비하여 무함마드 알리는 이집트 농민 출신을 중심으로 군대를 조직하였다. 이것이 이집트 민족 세력의 바탕이 되었다. 또, 행정기구를 유럽식의 부처로 개편하고, 국가 예산 제도를 도입하였다. 이 행정 기구와 군 조직의 기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유럽식 교육을 받은 인재가 필요하였다. 그래서, 많은 학교를 세웠으며, 또 우수한 학생은 유럽으로 유학을 보냈다. 이 학교의 교과서용으로 유럽의 책을 번역하기 위하여 정부 산하에 번역 기관을 설립하였으며, 그 결과 이집트는 유럽의 문물이 중근동에 들어가는 중요한 통로의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유럽식 교육이 정부 관료가 되는 유일한 수단이 됨에 따라 전통적인 종교 교육 기관과 울라마의 지위는 위축되었다.
신속한 개혁을 통하여 무함마드 알리는 자기의 세력 범위를 확대시키고, 또 이집트의 독립성을 확보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추었다. 그의 군대는 1811∼1818년 사이에 아라비아 반도의 메카와 나즈드를 점령하여 와하비 운동에 치명타를 입힌 결과, 이 지역은 1840년까지 그의 영역으로 남게 되었다. 총독의 신식 군대는 1822년과 1827년에 일어난 그리스의 독립운동을 술탄의 요청에 따라 진압하려 하였으나, 1827년 터키·이집트 연합 함대가 영·프 연합 함대에 의하여 그리스의 나바리노(Navarino) 근해에서 참패 당하여 그리스는 독립을 얻게 되었다. 한편, 무함마드 알리는 아무런 이득도 얻지 못하였다.
그 후, 무함마드 알리는 함대 재건을 위한 재목 획득과 세력의 확장을 위하여 1831년에 시리아 정복을 단행하자, 술탄 마흐무드 2세(Ma m d Ⅱ)와 정면 충돌하게 되었다. 총독의 아들 이브라힘 파샤(Ibrahim Pasha)의 지휘 아래 이집트군은 시리아를 점령하고, 1832년 12월에 오스만군을 코냐(Konya)에서 패퇴시켰다. 그 결과, 무함마드 알리는 술탄으로부터 시리아를 양도받아 아들인 이브라힘을 시리아 주지사로 임명하였다. 이브라힘은 레바논의 아미르(Amir)인 쉬하브가(Shih b家)의 바쉬르 2세(Bashir Ⅱ)의 협조를 받았으나, 이 혼란을 이용하여 강성해진 각 지역의 호족 세력을 꺾고 중앙 집권을 확립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는 이집트의 개혁 정책을 시리아에도 적용하여 일반서민의 과세 부담을 경감시키는 조치를 취했으나, 너무나 급진적이었고,또 유목 생활을 하는 베두윈 족을 강제로 정착시켰으므로 1834년 이후 계속 이브라힘 체제에 대한 반란이 일어났다. 그러나, 이집트의 시리아 점령에 끝장을 가져온 것은 이러한 반란이 아니라 영국을 비롯한 유럽 열강의 간섭 때문이었다.
술탄 마흐무드 2세는 유럽식 신식 군대를 사용하여 조급하게 이브라힘을 힘으로 시리아에서 몰아 내려는 시도에서 전쟁을 일으켰으나, 1839년 6월의 네집(Nejib) 전투에서 참패당하고 며칠 후 사망하였다. 또, 오스만 함대도 알렉산드리아에서 무함마드 알리에게 항복하니, 오스만 제국은 붕괴 직전에 도달하였다. 그러나, 그리스 사태에서처럼 무함마드 알리의 성공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자, 프랑스를 제외한 유럽 열강들이 간섭하였다. 지방 반란군의 공격뿐만 아니라, 영국과 오스트리아 연합 함대의 침입을 받자 이브라힘은 1840년 겨울에 시리아에서 철수하였다. 그와 함께, 이집트에 협조하였던 바쉬르 2세도 그 政敵의 압력을 받아 퇴위하였다. 비록 그가 쉬하브가의 마지막 아미르는 아니지만, 그의 후계자도 일 년 뒤에 폐위당하여, 이 가문의 세력은 끝나고 말았다.
1841년에 영국의 주도 아래 열린 런던 협정에서, 유럽 열강(프랑스 제외)은 무함마드 알리에게 이집트와 수단 이외의 지역에서 이집트군의 철수와 오스만 제국에의 반환을 결정하였으며, 또한 이집트군의 수를 1만 8천으로 제한하였다. 더구나, 이집트도 술탄의 통치 아래 들어가게 되었고 무함마드 알리는 단지 총독직의 세습권만 인정받았다.
술탄 마흐무드 2세, 무함마드 알리, 바쉬르 2세 등은 각각 자기의 영역 안에서 전제정치를 행하여 쇠퇴기에 접어든 오스만 제국의 낡은 행정기구에 새로운 활력소를 불어넣어 개혁 정책을 단행하여싸. 비록 이브라힘의 시리아 통치가 성공적이라고 보기 힘들지만, 그래도 기존 특권층의 아성을 부수어 중앙 집권적인 오스만 제국의 탄지마트(Tan im t) 정책에 공헌함으로써 제국이 재통합되는 길을 열어 놓았다.
실제로 무함마드 알리와 이브라힘은 술탄을 대신하여 시리아의 개혁을 단행한 셈이지만, 레바논은 이 때부터 그 특성을 살린 셈이다. 레바논은 1842년 쉬하브가의 몰락 이후 오스만 제국의 직접적인 통치 아래 놓이게 되었다. 그 때부터 몇 년 동안 레바논은 심각한 정치적 불안정의 시기에 접어들게 되었다. 쉬하브가의 전제에서 벗어난 레바논의 호족은 그들의 세력을 다시 주장하게 되었으며, 특히 로마 교황청과 연합한 마론파(Maron派) 기독교도는 전통적으로 레바논 산악 지역을 지배해 온 드루즈파(Druze派) 교도와 동등한 신분을 가지고 권력을 나누어 가지게 되었다.
거의 20년 동안 계속되어 온 양 교파 간의 반목 끝에, 1860년 드루즈파와 무슬림은 레바논과 다마스쿠스에서 오스만 당국의 묵인 아래 기독교도를 학살하였다. 이 사건은 결국 열강의 간섭을 불러들여, 1861년 6월 레바논에 대한 새로운 통치 大綱을 발표하게 되었다. 이 결과, 레바논은 시리아 주에서 분리되어 모든 거주민은 종교적 자유와 평등을 보장하였다. 그 후, 레바논은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날 때까지 안정되어 평화롭게 발전하였다.
한편, 바그다드의 맘룩 출신 파샤들은 무함마드 알리가 이집트에서 쟁취한 형태의 자치권을 이미 오래 향유하고 있었다. 즉, 그 정권이 안정되었기 때문에 술탄 마흐무드 2세의 중앙 집권적 개혁에는 장애물이 되었다. 즉, 무함마드 알리의 反와하비 작전으로 이라크 맘룩이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없었던 남쪽으로부터의 위협을 힘 안 들이고도 제거하였으며, 또 1826년 바그다드에 주둔하고 있었던 예니체리 旅團이 술탄의 칙령이 해산되어 유럽식의 신식 군대에 재편성되어서 그 위협이 둔화되었다.
그 결과, 맘룩의 세력이 다시 생기를 찾았으나, 마흐무드 2세는 1831년에 군대를 보내어 페스트의 유행으로 약화된 바그다드市를 점령하여 맘룩 출신의 총독을 제거하였다. 이 사건은 이브라힘 파샤의 시리아 원정 직전에 일어나 이라크는 오스만 제국에 다시 통합되었다.
4)영국과 프랑스의 이해 관계
이집트에 대한 영·프의 경재은 나폴레옹 1세의 이집트 원정으로 시작되어 중근동에서 100년 이상 지속되었다. 그러나, 제국주의 팽창 정책에 뒤늦게 뛰어든 독일이 19세기 말에 추구한 3B 정책, 즉 베를린-비잔틴(이스탄불)-바그다드의 철도 부설 정책에 따라 독일 황제 빌헬름 2세(Wilhelm Ⅱ, 1888∼1918)가 1898년에 이스탄불을 방문하자, 이에 위협받은 양국은 1904년 영·프 협정(Entente Cordiale)을 체결하여 이 지역에 대한 양국의 필사적인 경쟁심을 다소 식혔다. 그렇지만, 상당히 긴 여운이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에도 남아 있었다.
중근동에 있어서 영·프 양국의 이해 관계에는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었다. 프랑스는 지중해의 동쪽과 남쪽 연안에 대한 영향력 행사에 목적이 있었다. 즉, 심자군 전쟁 당시의 전통적 목적에만 국한되었다. 그러나 영국에게 이 지역, 특히 이집트는 인도라는 거대한 식민지와 페르시아만에 이르는 교두보로서, 무역과 군사적인 요충지였다. 또한, 프랑스는 1830년에 알제(Algiers) 市를 점령하였고, 계속 인근 지역에 그 세력을 확대하여 마그리브(Maghrib, 북서 아프리카) 전역을 정복하였으며, 또 19세기 중에는 끈질기게 레바논의 마론파 기독교도 사이에 그 영향력을 쌓아 올렸다.
이에 비하면, 영국의 중동지역 경영은 1822년 이전에는 매우 소규모였다. 1839년에 아든(Aden)을 기습 점령하였고, 1854년에 무스카트 오만(Musqat Oman)의 술탄으로부터 쿠리아 무리아(Kuria Muria) 섬을 양도받는 정도였다. 그러나, 영국의 근본 목적은 인도 지역으로 가는 전략적, 상업적으로 중요한 통로의 안전을 유지하여, 그 인근 지역을 근거로 움직이는 해적 및 노예 무역 활동을 억제하는데 있었다. 영국은 이 목적을 끈질기게 추구하여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영·프 경쟁 관계의 초점이 되어 온 이집트는 무함마드 알리와 그 후계자들, 특히 이스마일(Ism 'il, 1863∼1867)의 통치 기간 중에 국가 행정 기구가 프랑스식으로 개혁되었기 때문에 그 행정 양식이 오늘날까지 잔존하고 있는 것이다.
프랑스는 주로 이집트에 큰 관심을 두어 그 후견인 역할을 하였지만, 영국은 이스탄불의 술탄에 치중하였다. 그러나, 영국은 이집트의 농업 생산물-초기에는 콩 종류, 다음에는 면화-의 수입국으로 등장하여, 이의 원활한 유통을 위해 카이로를 경유해서 알렉산드리아와 수에즈를 연결하는 육로를 건설하였으며, 나중에는 압바스 1세('Abb s Ⅰ, 1848∼1858)와 무함마드 사이드(Mu ammad Said, 1854∼1863)의 통치 때 이 세 도시를 연결하는 중근동 최초의 철도를 부설하였다.
5)무함마드 알리의 후계자
이집트를 경유하는 국제 통로에 대한 영국의 통제는 1854년에 무함마드 사이드가 프랑스인 페르디낭 드 레셉스(Ferdinand Delessps)에게 수에즈 운하 건설권을 주었을 때 위협받게 되었다. 이 운하 건설이 영국의 위신에 손상을 줄 우려가 있었기 때문에, 영국 정부는 외교적인 압력을 통하여 이 계획의 실현을 지연시키려 하였다.
이 운하는 계획보다 훨씬 늦게 1869년 이스마일 치하에서 개통되었다. 그러나, 이스마일은 이 공사 때문에 빚더미에 앉게 되었고, 외세의 간섭만 더욱 불러들이게 되었다. 즉, 그는 1875년에 수에즈 운하 회사의 주식 가운데 이집트 지분인 44%를 영국에 팔게 되었다. 따라서, 이스마일의 통치 기간은 세습적인 총독제의 황금기와 파탄기가 동시에 교차하고 있었다.
1867년, 그는 술탄 압둘 아지즈('Abdul 'Aziz, 1861∼1876)로부터 케딥(Khediv, 페르시아 어로 군주)이라는 칭호를 받아 오스만 제국의 지방 총독 가운데 그의 지위가 우뚝함을 보여 주었다.그보다 일년 전에 이스마일의 자손 가운데 장자 상속 제도에 의한 총독직의 계승을 술탄으로부터 허락받아 그는 오스만 제국 내에서 제2의 강력한 인물이 되었다. 이스마일은 이 대가로 술탄에 대한 조공액을 배로 늘였으며, 그 대신 독자적인 국제협정의 체결, 국제 차관의 조달 및 군대의 수적 제한 철폐 등의 혜택을 받았다. 그는 할아버지 무함마드 알리가 추구한 이집트의 개혁 정책과 팽창 정책을 추진 계승하였다. 그는 비록 전제 군주였지만, 1866년에 유럽 국가의 의회 제도를 본받아 간접 선거를 통하여 구성된 자문 의회를 만들었다. 이 자문 의회는 정치 의식이 강한 부유한 농업인과 상인의 발언 무대가 되었다.
미국의 남북 전쟁(1861∼1865) 중에 이집트의 농업과 경제는 커다란 전환기를 맞아 면화 단일 재배로 발전하여 상당한 득을 보았다. 그러나, 남북 전쟁이 끝나고 미국의 솜이 다시 세계 경제 시장에 등장하자, 이집트의 농민과 정부는 커다란 타격을 받았다. 더구나, 이스마일은 무분별하게 외국의 차관을 받아들여, 1876년에는 거의 1천만 파운드[英貨]의 부채를 지게 되었다. 이러한 부채는 곧 외세의 강화를 뜻하였다. 즉, 국제 차관단(Caise de la Dette publique)이 조직되어 2명의 조정관-영국인과 프랑스인 각 1명-이 이집트의 세입과 세출을 감시하게 되었다.
영·프 양국의 간섭은 극에 달하여 세출을 감소시키기 위해서 심지어 4만 5천명의 군대를 1만 8천명으로 감소시켰으며, 이러한 외세의 간섭에 자극받아 군부 내의 민족 세력과 진보 세력이 들고 일어나 내각 총사퇴를 요구하였다. 이 기회를 포착하여 영·프 양국을 비롯한 유럽 열강은 宗主인 술탄 압둘 하미드 2세('Abdul amid Ⅱ)에게 압력을 넣어 이스마일을 퇴위시키고, 장남인 무함마드 타우피크(Mu ammad Taufiq, 1879∼1892)가 그 뒤를 잇게 하였다. 그 결과, 케딥조의 위신을 떨어지고 이집트 사태는 더욱 혼미하게 되었다. 이 기간 동안에 영국과 프랑스는 경쟁보다 오히려 협조하여, 양국의 공동 이익을 추구하기에 급급하였다.
그러나, 군부 내에는 여전히 강력한 터키-서카시아(Turkey-Circassia)계가 중심 세력을 이루고 있었지만 그들에게 적대적이고, 또 케딥에 대한 기대도 잃은 민족주의 세력도 도사리고 있었다. 민족주의 세력은 자문 의회 내에도 상당히 강력하였고, 또 국민의 지지도 받았다. 이 세력은 영국과 프랑스의 지나친 내정 간섭에 분노하여 아흐마드 우라비(A mad 'Urabi) 대령을 지도자로 삼아 케딥에게 憲政과 위회 선거를 요구하여 관철하였다. 결국 애국당(al- izb al-Wa ani)이 이끄는 민족주의 세력이 의회를 장악하고, 우라비 대령은 국방장관이 되었다.
이런 돌발적인 사태 변화에 놀란 영·프 양국은 최후 통첩의 형식을 빌어 공동 각서(AngloFrench Joint Note)를 1882년 1월에 발표하여 민족주의 세력의 제거를 요구하고, 케딥의 권위를 높이려 하였으나, 민족주의자들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쳐 오히려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에 영국 해군이 그해 7월에 알렉산드리아港을 점령하니, 케딥은 곧 영국군의 보호 아래 들어갔다.
9월에는 영국 육군이 우라비 지휘 하의 이집트군을 섬멸함으로써 우라비 운동은 끝나고 말았다. 비록 민족주의 세력의 집권은 1년도 되지 못하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울라마를 비롯한 전 국민의 지지를 받았고, 오스만 제국 내의 아랍인 거주지역의 도시, 즉 다마스쿠스, 베이루트, 알렙포 등에서도 대중적인 지지를 받아 오스만 군이 16세기에 아랍 지역을 정복한 후 최초로 아랍족의 단결 의식이 싹트기 시작한 것이다.
한편, 영국의 이집트 점령은 장기화되어 이 나라는 실질적으로 영국의 보호령이 되었다.
6)아라비아 반도
이슬람의 두 성지인 메카와 메디나가 위치한 히자즈( ij z) 지역은 이슬람의 요람지이고 아랍주의의 발생지이기 때문에, 무슬림 특히 아랍 무슬림에게는 마음의 고향이었다. 이 반도의 중앙부인 나즈드(Najd) 지방에서 일어난 와하비 운동은 1810년대에 이집트의 무함마드 알리에 의하여 치명타를 입어 한동안 사라지는 듯했으나, 1830년대에 사우드家의 등장과 함께 재기하였다.
그 후, 오스만 술탄에게 조공을 보내지 않았으므로 술탄은 다시 이집트 총독에게 이의 분쇄를 명령했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술탄은 직접 통치를 도모하고자 1845년에 왈리(W li, 총독)를 보내어 메디나를 점령하였으나, 나즈드에는 그 영향력이 미치지 못하였다. 그러나, 사우드 가에서도 내분이 생겨 그 세력이 위축되었고, 새로 일어난 샤마르(Shammar) 부족의 수장인 이븐 라쉬드(Ibn Rashid)의 세력이 서서히 확장되어 1870년대에 들어와서 중앙 아라비아에 확립되었다. 1891년에는 사우드가의 본거지인 리야드를 점령하자 그 일족은 쿠웨이트로 망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02년, 현 사우디아라비아의 창건자인 압드 알 아지즈(Abd al-Aziz)가 20세의 나이로 약 200명의 추종자를 이끌고 리야드를 탈환한 사실은 이제 거의 전설화되어 있다. 그는 와하비 운동을 재건하여 형제단(Ikhw n)을 조직하였고, 점차 세력을 회복한 그는 1913년에 터키군의 점령하에 있는 알 하사(al-Hasa, 바레인과 마주 보고 있는 페르시아만의 해안 지역)를 점령하여, 영국의 영향권에 들어 있는 연안의 아랍 토후 국가와 접하게 되었다. 제1차 세게 대전이 발발한 시기에 사우드가와 아라비아 반도에서의 주도권을 다투었던 경쟁자는 북쪽의 라쉬드가와 히자즈 지방의 후세인 이븐 알리(Husayn ibn 'Ali)였다.
한편, 예멘 지역은 본래 시아의 한 분파인 자이드 파가 8세기 후반부터 이 곳에서 세력을 키우고 있었다. 이 파는 계속해서 그 명맥을 이어 오다가, 1633년에 이 파의 이맘 카심(Q sim)의 영도 아래 오스만 투르크 군을 사나(S'ana)에서 추방하여 독립하였다. 그 후, 그의 자손은 때때로 중단되었지만, 1849년에 터키 군이 다시 사나를 점령할 때까지 그 명맥을 유지하였다.
그 후, 약 50년 동안 터키의 총독(W li)이 이 지역을 통치하면서 예멘 부족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 골몰하였다. 그러나,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터키 군은 고립되어 철수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으며, 예멘은 에티오피아를 발판으로 하는 이탈리아와 아든(Aden, 남 예멘의 항구 도시)를 근거지로 하는 영국 세력의 각축장이 된 것이다.
7) 비옥한 초생달 지역의 변화
20세기 초 오스만 제국의 아랍인 거주 지역은 형식상으로 술탄의 종주권을 인정하지만, 실질적으로 그 통치를 벗어난 지역과 술탄의 통치가 강화된 지역으로 나눌 수 있다. 전자에는 비옥한 초생달 지역과 아라비아 반도이다.
탄지마트 개혁이 비옥한 초생달 지역에도 적용되어서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게 되었다. 지방 호족을 중심으로 한 세력의 파당 의식은 여전히 남아있었으나, 그 발로 양상은 종래 거리의 무질서와 난동 대신 새로 도입된 지방 의회를 통하여 나타났다. 그와 함께 이스탄불의 중앙 집권적 현상이 두드러졌다. 이것은 교통과 통신망의 발달에 힘입었으며, 1864년에 제정되어 시행된 지방 행정법에서 구체화되었다.
이스탄불 정부는 19세기 중엽부터 이미 200년 전에 자이드(Zaid)파 이맘에게 놓친 예멘에 대한 통치권을 회복하려고 노력하였으나 별 성과가 없었다. 그러나, 히자즈( ij z) 지역에 대한 통치권은 수에즈 운하가 개통되고, 메디나와 다마스쿠스를 연결하는 철도가 1908년에 개통됨으로써 더욱 강화되었다. 그 결과, 1908년에는 메카의 하쉼가(Hashim家) 출신의 샤리프 후세인 이븐 알리(Sharif Husain ibn 'Ali)를 아미르(Amir)로 임명하였다.
이 임명은 술탄 압둘 하미드 2세의 전제 정치에 종지부를 찍은 청년 터키당 정부가 결정한 것이다. 그 이전에 술탄은 아랍계 백성의 불만을 무마시키고 터키 족에 대한 견제 세력을 만들기 위해서 아랍족 출신의 근위병을 창설하고, 아랍의 저명 인사를 요직에 등용하였으므로, 권력 행사에 아랍인은 어느 정도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그러나, 이 술탄의 몰락과 함께 아랍인은 청년 터키당의 오스만화 정책에 직면하여 중앙 정부에 대한 참여도가 위축되었다. 그 결과, 그 때까지 몇몇 불평 분자의 넋두리에 불과하였던 아랍 민족주의는 비록 아직 소수이기는 했지만, 시리아와 이라크의 지식인과 젊은 장교 사이에 점차 불붙기 시작하였다. 이 민족주의는 아직 오스만 제국의 비옥한 초생달 지역과 아라비아 반도에 대한 통치를 위협할 정도는 아니었다.
1914년에 발발한 제1차 세계 대전은 아랍 민족주의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청년 터키당의 치하의 오스만 제국은 발칸 반도에서 잃은 영토의 회복을 꿈꾸고, 樞軸國(추축국, the Central Powers)에 가담했으므로 연합국(the Allies)은 두 가지 당면 문제에 부딪치게 되었다. 즉, 무슬림 가운데 누리는 술탄의 권위와 영향력에 손상을 준다는 점과 연합국이 승리할 경우 오스만 제국 영토의 분할 여부였다.
이집트와 수단을 통치하고 있었던 영국은 오스만 제국의 술탄 칼리프가 제창한 聖戰(성전, Jih d)의 반향이 두렵다는 사실을 잘 인식하고, 이의 효력을 감소시키려고 예언자 무함마드의 후손이며, 성지 메카와 메디나의 실질적인 아미르(Amir, 首長)인 샤리프 후세인 이븐 알리(Sharif Husain ibn 'Ali)와 협상에 들어갔다. 후세인은 당시 히자즈 지역에 대한 그의 통치권을 확립하여 자기 가문의 영달을 추구하고 있었다. 그는 아들인 파이살(Faysal)을 동원하여 시리아의 아랍 민족주의자들과 접촉함으로써 스스로 이제 싹트기 시작한 아랍 민족의 대변인으로 자처하였다.
그리하여, 영국의 이집트 고등 판무관(High Commissioner)인 멕마흔 경(Sir. Henry Mcmahon)은 이 협상에 임하여 영국이 아랍인의 독립을 지지한다는 의도를 후세인에게 전달하였다. 영국은 비옥한 초생달 지역의 지중해 연안에 욕심을 내고 있는 프랑스와 손잡고, 1916년에 양국 외무성 간에 사이크스-피코 협정(Sykes-Picot Agreement)을 공표하여 중근동의 분할 방안을 논의하고, 겉으로는 아랍족의 독립을 약속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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