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학주의 정선 이야기1
낙원 정선, 골지천 동천에 세운 구미정사
<골지천의 풍광에 빠진 이자>
정선은 어디를 가나 절경입니다. 경치가 아름답기로 정말 유명하지요. 정선은 자연의 풍광만 아름다운 게 아니라, 정선사람의 마음 또한 아름답습니다. 물, 돌, 밭, 나무, 산 등이 모두 승경(勝景)인지라, 어디를 가나 동천(洞天)입니다.
하늘 동네, 동천은 신선, 성인 등이 사는 장소의 뛰어난 풍광을 일컫는 말이지요. 우리는 가끔 옛 유학자들이 자신이 사는 장소를 일러 동천이라 쓴 암각화를 봅니다. 돌에 새겨 영원히 지속되기를 기원하였지요. 참 많은 동천이 있고, 모두 자신의 동천이 지구에서 최고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어찌합니까. 정선에는 곳곳이 그런 장소인데요.
임계면 봉산리에도 그런 동천이 있지요. 이자(李𤲸)가 정한 구미동천(九美洞天)입니다. 얼마나 뛰어난 풍광이면 이자는 구미동천이라 했을까요. 구미는 아홉 가지 미일 수도 있지만, 최고의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표현이잖아요. 아홉은 동양에서는 가장 높거나 꽉 찬 숫자를 뜻합니다.
이자는 수고당에서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유고를 정리하다가 골지천을 따라 걷기로 합니다. 아마도 몸종 한 명은 딸렸을 겁니다. 강으로 유람을 떠나니, 필요한 물건이 있었겠지요. 수고당을 떠나 바위안으로 걷습니다. 임계천과 골지천이 합수하는 합수머리입니다. 골지천은 꼬불꼬불 양의 창자를 닮았습니다. 곳곳에 뼝대[절벽]를 이룬 바위산을 지나려니 물길인 듯 편하게 흐를 수 없었지요. 이자는 꼬불꼬불 물길을 따라 걸었습니다.
“세상에 이럴 수가.”
이자는 더 걸을 수 없이 다리에 힘이 빠져 털썩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이자는 난생처음 이런 풍광을 접했지요. 바위와 물길이 이처럼 아름다운 조화를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참, 아름답구나. 그래 여기가 바로 내가 찾던 동천이야.”
이자는 그대로 앉아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주변을 둘러보았습니다. 얼마 후 그의 입에서는 연신 감탄이 나왔습니다.
“와! 아! 어쩜!”
조금 후 이자 앞에는 탁주가 놓이고, 낚싯대 들자마자 물고기가 몸부림치며 낚싯줄을 흔들었습니다. 이자는 탁주 한잔 들이키고, 갓 잡은 물고기 배를 툭 따 장에 찍어 한 입 먹었지요.
“그래, 여기야. 기기와(棄棄窩)라 하자.”
이자는 이곳에 정사(精舍)를 짓기로 합니다. 이자는 나무꾼과 어부로 늙고, 가진 땅을 버리고 관료의 삶마저 버리고 자연과 하나가 되는 꿈을 꾸었지요. 그래서 버리고 버린 별장이라 기기와(棄棄窩)라는 편액을 처음 달게 된 것입니다. 버릴 기(棄)자에 별장 와(窩)자를 썼어요. 그 후 세월이 지나 구미계구정사(九美溪搆精舍)로 바꾸고 또 구미정사(九美精舍)로 이름을 바꾸었지요.
<이자가 꿈꾼 낙향의 삶>
이자(李𤲸, 1652~1737)는 당쟁의 소용돌이를 피해 정선군 임계면 봉산리에 낙향했습니다. 봉산리에는 할아버지 이식(李植, 1584~1647)이 받은 사전(賜田)이 있었지요. 사전은 임금님이 하사한 땅입니다. 이자는 낙향하여 수고당(守孤堂)이란 집을 짓고, 자신의 호도 수고당이라 일컫습니다. 수고당! 참 독특하지요. 외로움을 지키는 집이라니요. 여기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당쟁을 피해 왔으니 벼슬은 하지 않을 것이고요. 할아버지 이식과 아버지 이단하(李端夏, 1625~1689)의 유고(遺稿)를 정리하려는 뜻이었습니다. 이자가 낙향하여 한일입니다.
유고는 남긴 글입니다. 조상이 남긴 글을 모아 정리하는 작업을 하려 했습니다. 원래 할아버지 이식은 유명했잖아요. 조상의 글을 모아 문집으로 만들다 보면 결국 자신의 글 실력이 늘잖아요. 사람은 누구나 감상만 하려 하지 않고 모방하여 자신의 글을 쓰려고 하잖아요.
이자는 수고당에서 농장을 돌보고, 조상의 유고를 정리하면서, 틈나면 사을기의 기기와에 와서 학습을 이어갔습니다. 무릇 선비는 평생 공부합니다. 선비는 평소에는 사람 사는 이치를 탐구하고 널리 후생을 기르다가 나라가 위기에 처하면 몸소 창칼을 들고 나라를 구합니다. 조선조 때 선비가 할 일이었지요.
<천인합일을 이룬 이자>
이자는 기기와에 머물면서 참 많은 생각을 이어가고, 그곳에 있는 자연을 감상하였지요. 매일 장구지소(杖屨之所)로 일삼았습니다. 장구지소는 지팡이와 신발을 벗어놓고 쉬면서 절경을 감상하고 공부하는 장소입니다.
“그래 바로 그거야. 구미계구야.”
어느 날 이자는 기기와에 앉아서 천인합일(天人合一)을 꾀하다가 드디어 절정에 이르게 되지요. 천인합일은 자연과 사람이 하나가 되는 경지인데요. 여기서 천(天)은 ‘존재와 가치의 근원’이고요, 인(人)은 ‘현실적 한계와 모순을 지닌 존재’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자연을 따라 배우고 합일을 이루어 최고의 경지에 이르려고 합니다.
이자는 여기서 ‘9미(九美)’를 찾게 됩니다. 이 구미는 이자가 찾던 천(天)입니다. 깨우침을 얻을 자연의 미 9가지였지요. 바로 9미는 전주(田疇, 밭두둑), 석지(石池, 돌연못), 어량(漁梁, 물고기), 반서(盤㠘, 돌섬), 징담(澄潭, 물에 있는 소), 평암(平岩, 너럭바위), 층대(層臺, 층을 이룬 절벽), 취벽(翠壁), 열수(列峀, 바위구멍 또는 늘어진 산)입니다.
이 9미를 찾고, 이자는 기기와라는 현판을 ‘구미계구정사(九美溪搆精舍)’로 바꿉니다. 9미를 찾은 이자는 천인합일을 이루고자 본격적인 수업에 들어갑니다. 여기서 계구(溪搆)는 시내 계(溪)자와 깨닫지 못할 구(搆)자인데요. 이자는 아직 천(天)인 9미는 찾았으나 자신이 합일을 이루지 못했다고 현판에 적은 것이지요.
“그래 합일을 이루어야지.”
이자는 구미계구정사에서 천인합일을 이루고자 부단히 노력합니다.
“그래 바로 이거야.”
이자는 드디어 천인합일을 이룹니다. 9미에서 자연과 하나 되어 노니는 자신의 모습에서 18경을 찾았습니다. 여기서 구미는 이자가 찾은 자연의 본 모습이고요, 18경은 이자가 구미에서 노닐고 학습하면서 깨우친 경지입니다. 18경은 길어서 지면상 하나만 볼게요. 첫째가 어풍대(御風臺)입니다. 어풍대는 시원한 바람이 부는 돈대인데요. 그 바람의 이치를 이자가 깨우쳤지요. 시원한 바람이 부는 돈대에 앉아서 참 많은 자연의 이치와 인간사를 대비해 봅니다. 바로 이를 깨우친 경지가 천인합일을 이룬 경지입니다.
그리고 현판을 ‘구미정사(九美精舍)’라 바꾸고요. 후손이 구미와 18경의 제목을 현판에 씁니다. 이자는 구미정사를 그렇게 사랑하고, 구미정사와 평생을 같이 합니다.
“이렇게 30여 년 구미정사와 있으니 즐거워서 늙음을 잊었다.”
이자가 그 당시 86세의 장수를 누리고, 저세상으로 가면서 한 말입니다.(이학주, 강원대 교양교육원 글쓰기 담당, 한국문화스토리텔링연구원 원장)
※ 아래 구미 18경은 참고로 보냅니다. 제가 정리한 내용입니다.
<구미18경>
(1) 구미(九美)는 이자가 찾은 자연의 본 모습
① 전주(田疇): 밭두둑(전원경치) ② 석지(石池): 구미정 뒤편 반석 위에 생긴 작은 연못의 경치 ③ 어량(漁梁): 개울에 물고기가 위로 올라가기 위해 비상(飛上)할 때 물 위에 삿갓(통발, 뚝발)을 놓아 잡는 장치 ④ 반서(盤㠘): 구미정사 앞 골지천 안에 있는 돌섬 ⑤ 징담(澄潭): 구미정사 앞에 있는 맑은 소(沼) ⑥ 평암(平岩): 넓고 큰 바위 ⑦ 층대(層臺): 층층이 이뤄진 절벽의 돈대 ⑧ 취벽(翠壁): 물총새 둥지 튼 석벽 ⑨ 열수(列峀): 움펑움펑 패인 바위구멍 또는 늘어진 산
(2) 십팔경(十八景)은 구미에서 노니는 깨우침의 경지
① 어풍대(御風臺): 시원한 바람이 부는 돈대 ② 승약연(承躍淵): 고기 뛰어오르는 못 ③ 미원도(迷源渡): 물 건너기 어려운 나루 ④ 장란암(障瀾岩): 물살을 가로막는 바위 ⑤ 환성석(喚醒石): 어리석음을 깨치는 돌 ⑥ 연가석(煉柯石): 어두울 때 불피우는 돌 ⑦ 음홍교(飮虹橋): 물보라에 이는 무지개다리 ⑧ 추잠기(抽潛磯): 물에 잠겼다 나왔다 하는 자갈밭 ⑨ 초주천(招舟遷): 배 건너는 나루 ⑩ 풍뇌탄(風雷灘): 우레 같은 여울 소리 ⑪ 용운대(舂雲碓): 살랑살랑 물이 찧는 바위 확 ⑫ 피우벽(避雨壁): 비 피하는 절벽 ⑬ 혼돈석(混沌石): 포개져 있는 바위 ⑭ 수옥천(嗽玉泉): 달콤한 샘 ⑮ 피서애(辟暑崖): 무더운 날의 물기슭 공명사(筇鳴沙): 지팡이를 끌며 나는 모래 소리 배음준(杯飮樽): 잔 들고 떠먹는 술통 장서굴(藏書窟): 책이 쌓여 이룬 굴(정선향사, 현판, 필자 의견 반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