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머리말
2. 헤세의 프로이트 수용
3. 정신분석적 치료와 그 문학적
반영
4. 정신분석이론의 변용
5. 맺음말
■참고문헌
■Zusammenfassung
1. 머리말
13살
때 시인이 아니면 그 어떤 것도 되고 싶지 않다고 스스로 결심을 한 이래 “실패, 치욕과 추문, 도주 또는 추방”으로 점철된 불행한 소년시절과
공원이나 서점 점원으로 전전하던 실의의 청년시절, 뒤이은 각고의 문학수업 시절을 거쳐 “그야말로 수많은 시련과 희생 하에” 얻은 “최초의 문학적
성공”으로서 1904년 그에게 일약 문명을 얻게 해 준 장편소설 페터 카멘친트를 발표한 후 헤르만 헤세(1877-1962)는 같은 해 9
살 연상의 마리아 베르누이와 결혼한 후 보덴제 호반의 한적한 마을 가이엔호펜으로 이사하여 루소 식의 자연 친화적인 생활을 시작하였다.
시민적 생활과 예술가적 삶 사이의 갈등으로 특징지어질 수 있는 그의 가이엔호펜 시절(1904-1912)은 한편으로 그에게 자연적이고 시민적이며
가정적인 행복을 안겨준 시절이기도 하였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나이 차이나 베르누이의 심약하고 예민한 성격 등으로 인해 처음부터 여러 가지 문제를
안고 있었던 결혼 생활과 시민적 생활로 예술가로서의 삶이 위축됨으로써 내면적으로 위기를 맞이한 시대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위기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헤세는 1911년 친구와 함께 인도네시아 등지로 여행을 하기도 하였다.
1차대전이 일어났을 때 이미 2 년 전부터 가이엔호펜에서 스위스 베른으로 옮겨와 살고 있었던 헤세는
독일인으로서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베른 주재 독일 영사관에서 실시된 징병 신체검사에 응했으며 지원병으로 입대할 의사까지 밝혔다. 이 지원은 약한
시력 때문에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나 그는 얼마 후 베른 주재 독일 대사관 부설 전쟁포로구호소에서 일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전쟁 초기 전쟁 당사국들의 지식인들이나 작가들이 온갖 장광설로 서로 상대방에 대한 증오를 쏟아내고 있었지만 전쟁
열기에 동조할 수 없었던 헤세는 1914년 11월 3일 「노이에 취르혀 차이퉁」 신문에 반전(反戰)을 촉구하는 호소문 「오 친구들이여, 이런
장단을 그만 두라」를 발표했다. 지식인들의 호전적인 발언과 주장으로부터 깊은 충격을 받고 있었던 그는 그 글에서 편협한 국수주의에 영향을 받은 그들의 광기 어린 행동을 신랄하게 비판했으며, 그들이 인간성과 이성에 대한 믿음을 되찾아
줄 것을 호소했다. 그는 학자, 교사, 예술가, 작가 등 지식인들의 “생각의 모자람”과 “정신적
태만”을 비판하였으며 “사상과 내적 자유와 지성적 양심으로 이루어진 초국가적 세계”가 존재함을 상기시켰다. 나아가 그는 “(펜대를
휘두르며!) 부화뇌동해 유럽의 미래를 위한 기반을 더욱 흔들어 놓는 것이 아니라 얼마간의 평화를 유지하고 다리를 놓고 길을 모색하는 것”이
지성인들의 진정한 과제임을 지적했으며 “증오보다는 사랑이, 분노보다는 이해가, 전쟁보다는 평화가 더 고귀한
것”임을 강조했다. 그는 “모든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것을 넘어 보편적인 정신적 가치들을 파괴하고 무시하는 야만성”에 깊은 충격을
받았으며, 그로 인한 고통과 분노 때문에 저항의 의지를 더욱 강화하였다. “나 역시 내 생애의 한때 조용하고
관조적인 나의 전 철학을 내던지고 피가 흐르도록 까지 일상의 문제에 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바로 전쟁이 일어났을 때였는데, 거의
십 년 동안 나에게는 전쟁에 대한 항의와, 피를 바라는 인간의 우매함에 대한 항의와, 정신적인 사람들, 특히 전쟁을 설교하는 사람들에 대한
항의가 의무요 쓰라린 필연이었다.”
헤세는 전쟁이 발발한 직후부터 국수주의와 야만주의를 배격하고 평화를 옹호했던 극소수의 독일 작가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평화주의에 대한 호소가 그에게 가져다 준 것은 그러나 소외와 증오뿐이었다. 위의 호소문에
이어 1915년 10월에 「다시 독일에」라는 글을 발표한 후 헤세는 독일 언론으로부터 “배신자”라는 비난을 받게 되었으며, 「쾰른 일보」같은
신문은 여러 차례 게재된 한 기사에서 헤세를 혹독하게 비판했다. “비겁한 인간 헤르만 헤세는, 마음속으로 이미 오래 전에 신발에서 조국 땅의
먼지를 털어 버린 조국 없는 사나이가 되어서 슬픈 모습의 기사처럼 다가오고 있다.” 헤세는 이런 비난과 비판으로부터 깊은 정신적 충격을 받았으며
그러한 충격은 오래도록 가시지 않았다. (그로부터 10 년 뒤인 1924년 헤세는 스위스 국적을 취득하였다.) 당시 그를 공개적으로
옹호해 준 사람은 콘라트 하우스만, 테오도어 호이스, 헤르만 미센하르터 등 소수의 인사들뿐이었으며, 국제 적십자사 본부에서 전쟁포로 구호사업을
돕고 있던 프랑스의 작가 로맹 롤랑이 그의 평화주의적 운동에 존경과 우정의 뜻을 표시해 주었다.
한편 헤세는 전쟁포로 구호사업에 온 힘을 기울였다. 그는 이 일을 개인적인 의무로 생각하고
있었다. “모든 사람의 인생은 바로 그 자신의 별 아래에서 움직입니다. 나의 별은 영웅적이거나
애국주의적이거나 군사적인 성격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별들을 존중하고 그런 별들을 위해 싸우는 것은 나의 과제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였습니다. 내가 보호해야 했던 것은 기계화와 전쟁과 국가와 대중적인 이상들 때문에 위협받고 있는 ‘사적이고’ 개인적인 생활이었습니다.
영웅적이지 않고 평범하며 그저 인간적이기 위해서는 종종 더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는 사실 또한 나는 모르고 있지 않았습니다.”
전쟁포로 구호사업의 일환으로 헤세는 1915년부터 1919년 초까지 동물학자였던 리하르트 볼테레크과 함께 베른 독일 전쟁포로 문고
센터를 운영했는데, 이 문고 센터의 주요 임무는 프랑스와 미국에 있는 독일 포로들과 스위스에 억류되어 있는 군인들에게 읽을거리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목적을 위해 공식적으로 주어지는 재정적인 지원이 너무도 미미하고 그것마저도 이내 끊어져 버렸기 때문에 문고 센터의
운영은 거의 전적으로 두 책임자의 능력과 활동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헤세는 동료들이나 친구들, 도서관장들이나 출판업자들에게 수많은 편지를
써서 책을 보내 줄 것을 부탁했다. “말할 것도 없이 결코 그저 단순히 인도주의적인 활동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이고 국민 교육적인
활동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전쟁포로들의 정신적․도덕적 위험이 크니까 말입니다.” 수만 권의 책이 수집되고 포장되어서 프랑스 등지에 있는 독일
전쟁포로들에게 보내졌다. “지금 세계 도처에서 들려오는 불행의 소리가 너무도 크기 때문에 나는 내가 서 있는 이 보잘것없는 자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할 생각입니다.” 그러나 기증 받은 책의 수가 워낙 모자라고 상당수의 책은 포로들에게 보내기에 적절하지 않았기 때문에 헤세는
1916년 1월 독일 전쟁포로들을 위한 신문을 창간하고 그 편집 일을 맡았다. 또한 헤세는 볼테레크와 함께 베른 독일 전쟁포로 구호소가 발행하는
「독일 포로신문」의 편집을 책임지기도 했으며, 전쟁포로 문고 센터가 부설로 설립한 출판사를 통해 전쟁 포로들을 위한 일련의 소책자들을 시리즈로
발간하기도 하였다.
전쟁이 가져다 준 정신적 충격, 전쟁포로 구호사업으로 인한 경제적 어려움과 육체적 피로에 더해 헤세는 또
개인적․가정적 생활의 차원에서도 어려움과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1916년 3월 8일 어린 시절부터 존경과 미움이 섞인 복잡한 감정으로
대해오던 아버지가 사망하고 거의 같은 때에 막내아들 마르틴이 심한 정신질환 증세를 보였으며, 이미 오래 전부터 신경쇠약 증세와 발작증세를 보여
오던 아내 마리아는 자주 병원 신세를 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무렵에 쓴 한 시에서 헤세는 자신의 처한 위기적 상황과 고통스런 심경을 이렇게
묘사했다.
“축복 없는 세월/
가는 길마다 폭풍 불고/
어디에도 고향 땅 없고/
미로와 오류뿐!/
가슴 짓누르는 무거운 신의 손길”
이 같은 안팎으로부터의 충격으로 헤세는 1916년 초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매우 심각한 상태에 빠져들게 되어
심한 우울증 증세와 함께 신경쇠약 증세를 보이게 되었으며, 그 때문에 베른에서의 전쟁포로 구호의 일도 중단하지 않을 수 없었다. 로카르노와
브룬넨에서 가진 요양이 별다른 효과가 없었기 때문에 헤세는 1916년 봄 루체른 근교의 존마트에 있는 한
사설병원에서 정신분석적인 치료를 받았다. 이 병원 의사로 심층심리학자 C. G. 융의 제자이기도
했던 요제프 베른하르트 랑 박사로부터 정신치료를 받음으로써, 그리고 프로이트와 융의 저술들을 읽고 연구함으로써 그는 경직된 사고를 다소 해소할
수 있었으며, 어린 시절부터 자신을 괴롭혀 왔던 갈등과 새롭게 직면하게 됨으로써 맞이하게 되었던 정신적 위기를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었다.
1916년 6월부터 1917년 11월까지 72 차례에 걸쳐 헤세는 랑과 정신분석적인 대화를 나누었는데, 이것은 후고 발이 지적한 대로 좁은
의미에서의 의사의 진료라기보다는 흉금을 털어놓는 두 친구 사이의 정신치료적인 담소였다. 랑과의 정신분석적 대화는 헤세의 체험 영역을 결정적으로
확대시켜 주었을 뿐 아니라, 그가 인간으로서나 작가로서 발전해 가고 새로운 출발을 함에 있어서 여러 가지 가능성과 길을 제시해 주었다.
1918년에 쓴 논문 「예술가와
정신분석」에서 헤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기억과 꿈, 연상으로부터 영적인
근원을 탐색하는 작업인 정신분석의 길을 진지하게 얼마간 걸은 사람에게는 불변의 소득으로 남는 것이 있으니, 그것을 우리는 ‘자신의 무의식에 대한
보다 은밀한 관계’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의식과 무의식 사이의 보다 은밀하고 생산적이며 활발한 교류를 경험한다. 보통 ‘바닥에’
머물러 있으며 오로지 꿈속에서만 전개되는 것 가운데 많은 것을 그는 표면 위로 끌어올린다.” 헤세의 문학에서 정신분석으로부터 받은 영향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분석심리학의 이론과 방법으로 헤세의 작품을 모두
설명하려는 태도는 지양해야 하겠지만 정신분석과의 만남이 헤세가 독자적인 세계관을 형성하고 또 그것을 언어로 형상화하는 데 있어 크게 영향을
끼쳤다고 하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으므로 본 논문에서는 헤세와 정신분석의 관계를 그의 프로이트 이론 수용과 그 문학적 반영, 사상적 변용을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2.
헤세의 프로이트 수용
헤세는 토마스 만, 슈테판 츠바이크, 아놀트 츠바이크, 로맹 롤랑, 라이너 마리아 릴케 등과 같은
동시대 작가들처럼 프로이트를 개인적으로 잘 알고 있었거나 그와 정기적으로 서신교류를 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이들 작가들과 마찬가지로
프로이트의 저술들을 깊이 있게 읽고 있었으며, 특히 1914년부터 1920년까지 이 저술들을 집중적으로 연구하였다. 프로이트의 저술과의 최초의
만남에서 벌써 깊은 인상을 받은 헤세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이론을 의도적으로 부정하면서 그 가치를 인정하지 않으려 한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정신분석의 가치를 적극 옹호하였다. 헤세는 1914년 신경질적인 사람들 Nervöse Leute이라는 책에 대해 쓴 서평에서 이 책의
저자인 오이겐 뢰벤슈타인이 전적으로 알프레드 아들러를 옹호하면서 자신의 이론적 토대가 전부 프로이트로부터 비롯하는 것임을 인정하지 않은 것에
대해 비판하였다. 헤세는 이 서평에서 최초로 노이로제 현상을 발견하고 그 치료법을 제시한 사람은 아들러가 아니라 프로이트임을 분명하게 지적하면서
“이에 대해서는 조금의 의심의 여지도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1914년 무렵 프로이트나 슈테켈, 블로일러 등과 같은 정신분석학자들의 저술을
처음으로 접했을 때 헤세는 철저하고 분석적인 독서 방식보다는 오히려 짬짬이 틈을 내어 하는 가벼운 독서의 형태를 취했던 것이었지만,
1918년부터 1920년까지의 기간에 그는 1918년에 출간된 것으로 이미 프로이트의 전체 이론을 잘 대변하고 있었던 두 주요저서, 즉 5
권으로 이루어져 있는 노이로제 이론에 대한 소 논문 모음 Sammlung kleiner Schriften zur
Neurosenlehre과 정신분석입문 강의 Vorlesungen zur Einführung in die Psychoanalyse를
체계적으로 깊이 있게 연구하였는데, 이 두 저서에서는 프로이트의 전 저술을 관류하는 중심이론들이 이미 완전하게 표현되어 있었다. 헤세는 임상기록
적인 성격이 강한 전자의 저서를 “찬탄을 금치 못하며” 읽었으며, 이 5 권의 독서를 통해 정신분석의 근본적인 이론적 가설뿐 아니라 구체적인
정신분석적 치료기술에 대해서도 깊이 있는 이해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헤세의 장서 가운데에는 1918년 이후에 나온 프로이트의 저서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으나 이들 저서들 가운데 어느 것을 그가 깊이 있게 읽었는지는 잘 알 수가 없다. 앞서의 두 저술과는 달리 이들 저술들은 독서의
흔적을 별로 남기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헤세가 1930년에 쓴 한 글로 미루어 짐작해 볼 때 그가 프로이트가 1928년에 쓴
토스토예프스키 연구논문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은 분명한 것 같다. 그 글에서 헤세는 정신분석이 작가를 이해하는 데 어떤 기여를 할 수 있는지를
설명하고 있는데, 그에 따르면 “정신분석은 한 작가의 영혼 속에 내재하는 여러 가지 심리적 메커니즘과 강박적
원리들을 아주 깊이 있게 드러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이 영혼이 도달한 예술성의 정도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말할 수 없다.”
프로이트도 이와 비슷한 견해를 피력했는데, 1930년 프랑크푸르트에서 그의 괴테 상 수상에 즈음하여 행한 연설에서 프로이트는 이렇게
말하였다. “아무리 잘 쓰여진 완전한 전기라 하더라도 예술가의 본질을 이루는 그 놀라운 재능의 비밀을 해명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러한
전기가 우리 마음속의 어떤 강한 욕구를 충족시켜 준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다.” 헤세뿐 아니라 프로이트 역시 특히 예술과의 관련에서
정신분석이 갖는 한계성을 진작부터 예감하고 있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프로이트의 여러 저술로부터 강한 자극과 영향을 받은 헤세는 정신분석 이론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예술가와
정신분석 Künstler und Psychanalyse」이라는 제목 하에 1918년 7월 16일자 「프랑크푸르트 신문」을 통해 공개적으로
표명하였다. 그는 이 논문에서 이 새 이론의 효용성이 바로 나타나고 있다고 주장하였으며, 예를 들어 무의식의 세계와 억압․승화․퇴행 등과 같은
심리적 메커니즘을 관찰함에 있어서 하나의 열쇠를, 하나의 새로운 훌륭한 도구를 더 가지게 되었고, 이 도구의 유용성과 신뢰성은 즉각적으로
밝혀지고 있다고 하면서 정신분석 이론을 높이 평가하였다.
정신분석의 여러 가지 유용성에 대한 이 같은 일반적인 평가에 이어 헤세는 그 논문에서 프로이트의 새로운
심리학적 견해들이 예술가와 그의 창작에 어느 정도로 도움을 줄 수 있는지 하는 문제를 제기한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정신분석에 대한 연구는
예술가에게 세 가지 사실을 확인 또는 강화해 준다. 첫째로 정신분석은 인간 생활에 대해 상상의 세계가 가지는
중요성을 밝혀줌으로써 작가의 존재를 그 자신에 대해 확인시켜 준다. 뿐만 아니라 정신분석은 작가에게 분석심리학의 순수하고도 지적인 활동의 한
영역을 열어 준다. 둘째로 예술가에게는, 즉 “기억이나 꿈, 연상으로부터 영적인 근원을 탐색하는
작업인 정신분석의 길을 진지하게 얼마간 걸은 사람에게는 불변의 소득으로 남는 것이 있으니, 그것을 우리는 ‘자신의 무의식에 대한 보다 은밀한
관계’라고 부를 수가 있다. 그는 의식과 무의식 사이의 보다 은밀하고 생산적이며 활발한 교류를 경험한다. 보통 ‘바닥에’ 머물러 있으며 오로지
꿈속에서만 전개되는 것 가운데 많은 것을 그는 표면 위로 끌어올린다.” 셋째로 정신분석은 평소
우리가 익숙해 있지 않는, 우리 자신에 대한 진실을 요구한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내부에서 억압해 버린 것을 똑바로 보고 진지하게 받아들일
것을 가르친다.
정신분석이 예술가의 창작에 어느 정도까지 도움을 줄 수 있는지를 설명한 뒤 헤세는 예술가에게 제시될 수 있는 몇
가지 요구조건을 설명한다. 그의 설명에 의하면 예술가는 무의식의 세계에서 분출하는 것을 억압해서도 안 되며,
형상화되지 않은 무한한 세계에 지속적으로 빠져들어서도 안 된다. 예술가는 무엇보다도 숨겨져 있는 근원들에 대해 우선 애정으로 귀를 기울여야
하며, 그런 다음에 비로소 비판을 하고 혼돈의 세계로부터 선택을 해야 한다. “어떤 기법이 있어 이 같은 요구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바로 정신분석적 기법이다”라고 하면서 헤세는 그 논문의 결론을 내린다.
헤세의 이 논문 「예술가와 정신분석」에 대해 프로이트는 1918년 8울 23일자의 한 편지에서 이런
찬사를 보내주었다. “페터 카멘친트 이후 당신의 작품들을 즐거운 마음으로 읽어온 독자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프랑크푸르트 신문」에 실린
당신의 논문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기꺼이 당신에게 악수를 청하고 싶습니다.” 프로이트의 이 편지에 대해 헤세는 2 주 뒤에 보낸 답신에서 이렇게
화답하였다. “존경하는 교수님! 교수님께서 저에게 감사의 말씀을 해주시니 부끄러운 마음에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교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할
사람은 오히려 바로 저이니 말씀입니다. 오늘 처음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릴 수 있게 된 것은 저로서는 크나큰 기쁨입니다. 사실 작가들은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교수님의 동료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의식적으로도 점점 더 그렇게 될 것입니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에 대해 헤세가
가지고 있었던 변함 없는 감사의 마음은 2 년 뒤의 그의 일기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나에게 치료와 발전의 길이 되어준 것은 정신분석이었다.”
그때로부터 30 년이 흐른 뒤에 쓴 한 편지에서도 헤세는 “(정신분석적) 치료는 전체적으로 나에게 큰 효과가 있었으며, 특히 프로이트의 몇몇
저술을 읽은 것이 그러했다”고 하면서 정신분석적인 치료를 받은 것과 정신분석 관련 서적들을 독서한 것에 대해 기쁜 마음으로 회상하였다.
앞에서 언급한 논문 「예술가와 정신분석」에서 헤세는 정신분석이 작가에게 “분석심리학의 순수하고도 지적인
활동의 한 영역을 열어 준다”고 했는데, 헤세 자신이 바로 그러한 영역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인 작가였다. 데미안, 클라인과 바그너, 황야의 늑대 등과 같은 작품은 모두 갈등적인 상황이나
까다로운 인물, 한 예술가의 복잡한 발전단계와 성숙에 따르는 고통을 정신분석적으로 탐구하여 기술하고 묘사한 것에 다름 아니다. 헤세의 정신분석에
대한 관심의 흔적은 문학작품 외의 그의 다른 저술활동에서도 지속적으로 드러났는데, 그는 특히 서신교류에서 자신의 개인적인 정신분석 경험에 대해
언급하거나 정신분석에 대한 견해를 피력했으며, 도스토예프스키와 정신분석의 관계를 설명하기도 했다. 그의 수많은 서평과 브로흐, 무질, 카프카
같은 동시대 작가들에 대한 그의 비평도 정신분석에 대한 그의 변함 없는 관심을 잘 보여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코로나」, 「포시쉐
차이퉁」, 「노이에 룬트샤우」 같은 일간신문이나 잡지들에 발표한 글들을 통해서도 정신분석 이론을 옹호하거나 그것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기도
하였다.
3. 정신분석적 치료와 그 문학적 반영
헤세는 정신분석을 프로이트와 융 등의
심리학적 저술을 통해 이론적으로만 접한 것이 아니었다. 헤세는 정신분석을 그 자신의 말대로 “철저하고도 진지하게 자신의 피부로 경험”하기도
하였다. 그는 선배 작가들인 오토 그로스, 에리히 뮈잠 그리고 후배 작가들인 휠젠베크, 아놀트 츠바이크, 헤르만 브로흐, 로버트 무질, 아돌프
무쉬크, 페터 바이스 등이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정신치료의사들로부터 직접 정신분석치료를 받기도 하였다.
사이사이 약간의 중단 시기는 있었지만 헤세는 1909년부터 1921년까지 모두 4 명의 정신과 의사로부터
노이로제 치료 내지 정신분석적 치료를 받았다. 1909년과 1912년에 그는 각각 수주간에 걸쳐 바덴바일러의 요양원 빌라 헤드비히에서 정신과
의사인 프랭켈 박사로부터 치료를 받았으며, 아버지 요하네스 헤세의 사망 후 심한 우울증 증세를 보이게 되었던 헤세는 1916년 루체른 근교의
존마트 신경정신병원에서 심층심리학자 융의 제자인 정신과의사 요제프 베른하르트
랑 박사로부터 정신치료를 받았다. 헤세가 4 명의 정신과의사로부터 받은 치료 가운데 가장 오랜 기간 행해졌던 이 치료는 크게 두
단계로 이루어졌다. 초기 입원치료의 경우 헤세는 전후 12 차례에 걸쳐 랑과 각각 3 시간 여 동안 정신분석적 대화를 나누었으며, 이후 1 년
반 동안 헤세는 그 사이 가이엔호펜에서 떠나와 혼자 살고 있었던 베른으로부터 통원치료를 받는 형태로 전후 60여 회에 걸쳐 랑과의 정신치료 및
정신분석적 대화를 계속하였다. 이를 통해 헤세는 경직된 사고와, 어린 시절부터 자신을 괴롭혀 왔던 아버지와 아버지로 대표되는 세계와의 갈등,
전쟁의 경험으로 인한 정신적 위기 등을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었지만 반년도 채 되지 않아서 그는 또 다시 의사의 도움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베른의 심리학자 요하네스 놀이 운영하는 병원에서 60여 회에 걸쳐 대화를 나누며 정신치료를 받았으나 이 치료 역시 그의 정신적
건강을 안정적으로 담보해줄 수는 없었다. 파경에 이른 결혼생활과 그와 관련된 여러 가지 정신적 이상 증세
등으로 인해 헤세는 결국 당시 저명한 심리학자로서 뿐 아니라 각종의 정신 이상 증세와 특히 정신적인 고통 치료의 전문가로 널리 이름을 떨치고
있었던 융에게서 처음으로 직접 치료를 받게 되었다. 1921년 5월 취리히의 융의 심리학 실험실에서
있은 이 치료는 모두 10 차례의 대화로 이루어졌으나 헤세에게 만족할 만한 결과를 가져다주지는 못했다. 헤세는 다시 랑에게로 돌아와 치료를
받았으며, 그와는 단순한 환자-의사 관계를 떠나 친한 친구 사이로 이후로도 오랫동안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헤세가
1926년 3월 로이톨트 부인에게 보낸 편지에 의하면 헤세의 랑과의 우정관계는 사실에 있어 숨겨진 정신치료의 과정에 다름이 아니었다. 헤세는
일기에 “저녁때 융의 제자인 랑 박사한테서 정신분석 치료를 받음”이라고 쓰기도 했으며, 바로 전에 언급한 로이톨트 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랑의 도움으로 조금씩 나아져가기 시작하고 있습니다”라고 전하기도 했다. 랑에게서 받은 이 치료로 헤세의 직접적인 정신분석 및 정신치료의 경험은
일단 끝이 났다. 그러나 심리학이나 정신치료 분야에 대한 그의 관심이 이것으로 모두 끝이 난 것은 아니었다. 그는 1950년경까지 융과의 서신교류를 계속하였으며, 정신의학자 칼 케레니이와도 여러 해
동안 교류하였다.
헤세가 프로이트에 대해 갖는 감사의 마음도 그의 직접적인 치료 경험의 종결과 더불어 사라져 버린 것이
아니었다. 1931년에 쓴 한 편지에서 그는 프로이트의 생일을 맞아 빈에서 축하연설을 해달라는 요청에 기꺼이 응하고 싶지만 건강상태가 좋지
않아서 그럴 수가 없노라고 썼으며, 그로부터 5 년 뒤인 1936년 나치 정권 하에서 프로이트의 저술들이 공개적인 장소에서 불태워지던 상황에서
190여 명의 작가와 예술가들이 프로이트의 80회 생일에 즈음하여 빈으로 축하인사를 보냈을 때 그도 거기에 기꺼이 서명하였다.
헤세는 여러 차례 스스로 직접 받은 정신분석적 치료의 결과에 대해 그때그때 대체로 만족해하였다. 그는
정신분석적 치료를 받은 뒤 우울한 기분과 각종의 강박증상, 창작에 대한 무력감, 열등감과 고독한 기분 같은 것이 상당한 정도로 해소되는 것을
경험하고 이에 대해 기뻐하였으며, 활동의지와 삶의 의욕이 되살아나는 것을 즐겼다. 예를 들어 1909년 프랭겔 박사한테서 치료를 받은 뒤 헤세는
장거리 여행을 감행하여 이탈리아를 거쳐 멀리 인도와 스리랑카까지 다녀왔다. 각각의 정신분석적 치료 뒤에는 작가로서의 창작 의욕도 되살아났다.
1909년의 첫 번째 치료 뒤에 그는 게르트루트와 여행기 인도에서와 소설 로스할데를 썼으며, 두 번째와 세 번째의 치료
뒤에는 그야말로 창작력이 더욱 왕성해져서 「어려운 길」, 「이리스」 등의 동화와 데미안, 「어린이의 영혼」, 「차라투스트라의 재래」,
귀향, 클라인과 바그너, 클링조어의 마지막 여름 등의 작품이 줄줄이 이어졌다. 이와 관련해서는 헤세 스스로도 일기에서
“9월까지의 1919년은 내 생애에서 가장 풍부하고 화려하고 결실 많고 열정적인 한 해였다”고 말하고 있다. 뒤이은 1920년도 풍요롭고 결실이
많은 해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이 해에 헤세는 「비보스 보코」라는 월간 잡지를 창간하고 장편소설 시타르타와 황야의 늑대의 작업에
착수하였으며, 도스토예프스키 연구 논문집 혼돈의 직시를 완성하였다.
그러나 정신분석을 통한 정신치료가 헤세에게 가져다준 가장 의미 있고
중요한 결실은 무엇보다도 그가 그러한 치료를 통해 자신의 내면적인 세계에 대해 깊이 있고 새로운 인식과 이해를 가질 수 있게 되고 또 그러한
인식과 통찰에 근거하여 자신의 개인적 생활방식이나 예술적 창작의 방향을 결정적으로 수정할 수 있게 된 데 있었다. 1919년 가을
칼 젤리히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가 그때까지의 자신의 창작과 관련하여 내리는 결론에 의하면 그의 이전의 인생과 창작은 “가장 나쁜 의미에서 실패로
끝난” 것이었다. 자기 비판적인 입장에서 그가 계속하는 설명에 따르면 그는 이전의 작품에서
자기 내부의 모든 “어두운 것과 야만적인 것”을 외면하고 선한 것과 성스러운 것에 대한 감각과 경외와 순수한 것만을 강조하고
묘사함으로써 “허위에 찬 세계”를 세운 것이었다. 그럼으로써 카멘친트나 게르트루트 같은 인물이 만들어지게 되었고,
이런 인물들은 “고상한 예법과 도덕을 위해 수천의 진리를
묵살”하게 된 것이었다. 이런 식으로 그는 결국 인간으로서나 예술가로서 “피로에 찬 체념”의 상태에 빠져들고 말았기
때문에, 생의 실패를 경험한 뒤 과거의 아름답고 조화로운 문체를 잃어버린 그는 이제 새로운 내용과 문체를 찾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몇
달 뒤 친구 핑크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헤세는 정신분석의 경험을 통해 완전히 달라지게 된 자신의 인생관과 예술관을 피력하였다. “나는 특히 나의 심리세계를 새롭게 보는 것을 배우고 정신분석을 통해 완전히 새롭게 정돈하지 않을 수 없었네. 나에게
남아 있는 일은 나의 이전의 일들을 다 버리고 새롭게 시작하는 것뿐이었네.” 그는 사적인 생활에 있어서도 새롭게 시작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는 가족을 떠나 혼자 새 집으로 이사를 했으며, 아내 마리아와는 이혼을 하기로 결심하였다. 정신분석을 통해 억압 상태에서 되찾은 생의
활력으로 그는 20년 연하의 처녀 루트 벵어를 열렬히 사랑하기도 하였다.
정신분석적인 치료의 경험은 헤세의 인생관이나 세계관, 사적인 생활의 부분에서 뿐 아니라 1916년 이후에 쓰여진
그의 작품들, 특히 데미안과 클라인과 바그너, 황야의 늑대 등의 작품에서 두드러지게 문학적으로 반영되었다. 헤세의
정신분석과의 만남 이후 쓰여진 작품들 가운데 가장 주목할 만한 작품 중의 하나인 데미안은 거의 그대로 정신분석적 치료의 과정을 숨김없이
기록해 놓은 것으로 이해될 수 있으며, 작품 중의 중요 인물 가운데 하나인 피스토리우스는 작가의 정신분석 치료를 맡았던 의사들 가운데 가장
영향력이 컸던 랑 박사를 모델로 하고 있다. 작품에서 주인공 징클레어가 피스토리우스와 나누는 대화의 바탕에는 작가 헤세가 정신과의사 랑과 나눈
정신분석적 대화가 놓여 있다. 클라인과 바그너, 황야의 늑대에 있어서도 작가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프로이트의 무의식 이론과 본능이론, 자아심리학 이론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하는 것이다. 나아가서 또한 이
소설들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정신치료의 과정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것, 다시 말해 무의식의 세계를 의식화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소위 방어기제의 작동원리를 서술하는
것이다.
4. 정신분석이론의 변용
헤세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이론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또 그것을 자기 작품의 내용과 형식을 통해 문학적으로 반영하기도 하였으나 그의 프로이트 이해와 수용에는 언제나 프로이트의 정신분석과는 거리가 먼
이질적인 요소가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그의 프로이트 이해 방식에는 그것과는 전혀 다른 세계에서 비롯하는 여러 가지 관념들이, 프로이트의
자연과학적 심리학의 세계와는 정반대가 되는 세계, 즉 종교의 세계에서 비롯하는 여러 가지 관념들이 끊임없이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좀 더
자세하게 말하자면 헤세가 어린 시절 고향 칼브의 양친 집에서 집안의 오랜 전통으로 물려받게
되었던 경건주의 사상이 그 엄격한 선악관과 도덕관과 함께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게 되었던 것이다. 헤세는 정신분석적
치료를 받았던 몇 년을 전후한 여러 해 동안 ‘두 세계’ 속에서, 즉 자유스럽고 계몽적인 프로이트의 세계와 유년 시절 이후 그의 사상과 행동에
줄곧 영향을 미쳤던 경건주의의 세계 속에서 사고하고 행동했다. 우선 프로이트의 세계 안에서 사고할 때 그는
온갖 혼란과 착각으로부터 벗어나 진정으로 자아에 이르고, 자신의 내부를 청소하고, 자기 내부의 온갖 혼돈과 야만과 본능과 악을
직시하고 인정하며, 온갖 “괴상하고 태고적인 것과 맹렬하게” 대결하는 것이 자신의 소임이라고 여겼다. 1919년
요하네스 놀한테서 정신치료를 받고 난 뒤에 쓴 한 편지에서 헤세는 이제 자신에게 중요한 것은 무의식적인 여러 요소들을 “은폐하거나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이해”하고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왜냐하면 나는 이미 오래 전부터 더 이상 선한 것과 악한 것이 있다고 믿지 않고 모든 것이, 우리가
죄악, 더러움, 공포라고 부르는 것도 다 선하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깨어 있는 상태에서나 꿈꾸는 상태에서 우리를 범죄자나 동물로
만드는 우리 자신의 환상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으면 않을수록 우리가 실제로 그러한 악 때문에 파멸할 위험성은 더 작아지는
것입니다.”
반면에 다른 세계, 즉 유년 시절 이래의 경건주의적 세계에서는 자기해명이나, 도덕적인 편견으로부터의
해방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이 세계에서 중요한 것은 “개인적으로
성스러워지는 것”이며, 죄악의 덫으로부터의 해방, 즉 본능의 포기였다.
이 세계에서 생의 목표는 “올바른 길”, 즉 “신의
체험”이라는 종교적 체험의 길로 나아가는 것이었다. 바로 이 경건주의적 세계관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헤세는 정신분석을 일종의
종교적 순화의 과정으로 변형시켜 이해한다. 정신분석을 고통에 찬 개체성을 지양할 수 있는 방편으로서 이해하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오늘날의 정신분석은 근본적으로 우리가 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공간을 우리 내부에 만들어내는 것 외에 어떤 다른 목표도 가지려 하지 않으며
또 가질 수도 없는 것”이다. 헤세는 이렇게 정신분석적 치료를 정화의 과정으로, 죄 많은 인간이 벌을 받는 과정으로 이해한다. 인간의 가슴속은
악과 죄의 늪과 살인자의 소굴과 다름없기 때문에 벌을 받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1921년의 한 편지에서 헤세는 “나에게 있어 정신분석은 거쳐 지나가야 할 하나의 불길이 되었으며, 이 불길은 아주 큰 고통을
줍니다”라고 말했으며, 다음 해의 편지에서는 “정신분석은 핏속까지 이르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모든
벌의 과정은 충분한 것이 되지 못했다. 헤세는 이후에도 우울증과 창작상의 무력감, 정신신체의학상의 여러 가지 장애 그리고 자살충동 때문에
시달림을 당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소설 클라인과 바그너에서는 테레지나와의 사랑의 황홀경에 빠져 있는 주인공 클라인에게 겟세마네 동산에서
죽음의 공포에 떨고 있는 예수의 모습이 불쑥 떠오르며, “구원에 대한 향수와 신의 품안으로의 회귀”에 대한 욕구가 그를 엄습한다. 이렇게 헤세는
종교적인 세계에 더 많은 의미를 부여하면 할수록 황야의 늑대에서 일찍이 문학적으로 표현된 바 있었던 그의 그 거친 사생활도 새롭게
해석하지 않을 수 없었다. 20여 년 뒤 이미 유리알유희를 쓰고 있었던 헤세는 “황야의 늑대의 문제 많은 인생 위에는 보다 높은 불멸의
제2 세계가 세워지고 있으며, 그 세계가 황야의 늑대의 그 고통스러운 삶의 길에 초시간적인 믿음의 세계를 대비시키고 있고 [...] 그것은 한
믿는 자의 책이다”라고 하면서 정신분석적 성격이 강한 그 소설에 종교적 의미를 새로이 부여하였다.
5.
맺음말
헤세는 이 두 세계의 조화를 발견하지 못했다. 1922년 금욕주의적인 삶의 단계에 머무르고 있었던 헤세는 자신이
이전에 가졌던 성적 쾌락의 체험을 추후에라도 무가치한 것으로 평가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와는 달리 그는 1924년에는 본능적인 생활을
지나치게 일방적으로 본능에 적대적인 정신의 지배 하에 놓는 것은 위험한 일이라고 경고하였다. 그리고 또 1935년에 그는 “일생 동안 나에게
도움이 될 만한 종교를 찾으려 했다”고 술회하기도 했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종교는 앞서 설명한 것처럼 악에 대한 죄책감, 본능의 포기,
“개인적으로 성스러워지는 것”을 의미한다. 헤르만 헤세는 그의 생이 지니는 이러한 양극성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나의 생애에서는 고도로
긴장된 승화의 시기 및 정신화를 목표로 하는 금욕적인 생활의 시기가 소박하고 감각적인 것, 당치 않은 것, 위험한 것에 헌신하는 시기들과
끊임없이 교체하였다.” 그러나 헤세는 후기의 유리알유희의 세계로 가까이 다가가면 갈수록 더욱더 “정신화를 목표로 하는 금욕”의 생활로
기울어졌다. 그가 언급한 바 있는 인생의 두 가지 가능한 결말, 즉 “몰락과 구원” 가운데 그는 결국 구원 쪽을 택하였다. 이로써 그는 또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의 세계로부터 멀어지게 되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에서는 구원 같은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인간은 갈등적인 상황에 구속받고 있는 존재이며 영원히 비극적인 상태로 남는 존재이다. 헤세는 비극적 존재로서의 프로이트적 인간을 종교적으로 해석하여 죄가 있는 인간으로 이해하고 그런 존재로서의 자신을 견딜
수 없기 때문에, 억압하고 억압당하는 인간의 본능 세계로부터 남성적 자기통제의 명상적 세계로의 해방을 약속해주는 구원의 종교 쪽으로 나아가는
길을 선택한다. 헤세는 바로 이런 순수한 정신의 세계에서 그에게 합당한 종교와, 구원과 평화를
발견한다.
참 고 문 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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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eller, Bernhard: Hermann Hesse in
Selbstzeugnissen und Bilddokumenten, Rowohlt, Reinbek bei Hamburg 1963, (Neue
Ausgabe 1997).
■Zusammenfassung
Hesse und die Psychoanalyse
Noh,
Tae-han
Hermann Hesse ist ein guter Kenner der Freudschen Schriften, die
er besonders zwischen 1914 und 1920 intensiv und systematisch studiert. Die
Lektüre und das Studium der Freudschen Werke vermittelt ihm eine Vertrautheit
sowohl mit den grundlegenden Theorien der Psychoanalyse als auch mit der
psychoanalytischen Behandlungstechnik.
Wie stark Hesse von Freud und seinen
Schriften berührt wird, ist daran zu erkennen, dass er 1918 versucht, seine
Gedanken über die Psychoanalyse in einem Artikel mit dem Titel Künstler und
Psychoanalyse öffentlich zu skizzieren. Dort schreibt Hesse, man habe zum
Beispiel bei der Beobachtung des Unbewussten und der psychischen Mechanismen
einen Schlüssel mehr, ein neues Werkzeug, dessen Brauchbarkeit und
Zuverlässigkeit sich rasch bewähre. Nach der allgemeinen Würdigung der
Verdienste der Psychoanalyse beschäftigt sich Hesse in dem Artikel weiter mit
der Frage, wieweit die neuen psychologischen Theorien Freuds dem Schaffen des
Künstlers zugute kommen.
Hesses psychoanlytisches Interesse widerspiegelt
sich durchgehend sowohl in seinen Dichtungen (z. B. Demian, Klein und Wagner,
Steppenwolf) wie auch in seiner anderen schriftstellerischen Arbeit, wie zum
Beispiel in seiner Korrespondenz und in seinen Rezensionen.
Hesse lernt die
Psychoanalyse nicht nur über Freuds Werke theoretisch kennen, sondern “gründlich
und ernsthaft an der eigenen Haut erprobt.” Zwischen 1909 und 1921 befindet er
sich mehrere Male in psychoanalytischer Behandlung. Und durch den Erfolg dieser
Behandlungen kommt er zu neuen Einsichten über sich selbst, die eine
entscheidende Veränderung seines Lebens wie seines dichterischen Schaffens zur
Folge haben.
Hesses Freud-Verständnis enthält aber etwas anderes, was nicht
mit der Freudschen Psychoanalyse zu tun hat. Seine Freud-Rezeption ist von den
Vorstellungen aus der pietistischen Welt seiner Kindheit stark beeinflusst. Er
findet keine Synthese zwischen diesen beiden Welten, der Weltsicht der
Freudschen Psychoanalyse einerseits und der Tugend- und Moralbegriffen des
pietistischen Glaubens andrerseits. Von den beiden möglichen Ausgängen des
Lebens, die er in einem Text erwähnt, nämlich “Untergang oder Erlösung”, wählt
er zuletzt die Erlösung. Damit entfernt er sich weit von der Psychoanalyse, in
der es nicht um Erlösung
geht.
핵심어 Stichwörter
정신분석 Psychoanalyse
정신분석
치료 psychoanalytische
Behandlungen
문학적
반영 literarische
Widerspiegelung
경건주의 Pietismus
구원 Erlösung
<출처 : http://blog.naver.com/cghn/700050720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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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데미안을 읽으려고 해요...중고품가게에서 샀죠...^ㅡ^
제가 아는사람중 정말 정신적으로 이상이있는 사람이 있는데 그사람의 증상을 알고싶어요.. 이걸보니 갈피가 잡힐듯 말듯하네요 아 그사람의 증상은 대체 무엇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