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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약회 대구광역시지회
 
 
 
카페 게시글
박약회 대구광역시지회 스크랩 국란의 왕 :14 선조(중종의 9번째 아들의 삼남),15광해군(인목대비)/16인조(선조의 손자)/소현세자
이장희 추천 0 조회 455 16.01.06 23:2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제14대 선조 가계도

중종- 창빈 안산안씨 →9남 덕흥대원군 +하동정씨

제 14대 선조

3남 : 선조, 하성군(1552-1608)

재위기간 : 1564.7-1608.2(40년7개월)

부인 : 8명 / 자녀 : 14남 1녀

1부인

의인왕후

반남박씨

(박응순)

자녀없음

2부인

인목왕후

연안김씨

(김제남)

1남1녀

3부인

공빈

김해김씨

(김희철)

2남

4부인

인빈

수원김씨

(김한우)

1남5녀

5부인

순빈 김씨

1남

6부인

정빈 민씨

2남3녀

 

영창대군

정명공주

임해군

제15대 광해군

의안군

신성군

원종(정원군)=>

제16대 인조의 아버지

의창군

정신옹주

정혜옹주

정숙옹주

정안옹주

정미옹주

순화군

 

인성군

인흥군

정인옹주

정근옹주

 

7부인

정빈 홍씨

1남1녀

8부인

온빈 한씨

3남1녀

경창군

 정정옹주

흥안군

경평군

영성군

 정화옹주

 

선조의 즉위   

 

 

조선의 14대 왕 선조는 조선 역사상 최초의 방계 혈통의 임금이었다. 그가 태어났을 때만 해도 그가 왕이 되리라고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럴 만도 했다. 그의 할아버지는 임금(중종)이었지만 그의 아버지는 할아버지가 거느린 여러 후궁들의 여러 아들 중 하나(일곱 번째)라 임금이 될 꿈조차 꾸어보지 못하고 그저 그렇게 살다가 죽었다. 그는 그 별 볼 일 없는 아버지의 아들들 중에서도 막내(셋째)여서 더더구나 임금이 될 가망성이 없었다. 전혀 없었다.

 

 

그러나 할아버지의 두 정실의 아들들(인종, 명종)이 모두 후사 없이 죽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후사가 있기도 했지만 왕자가 요절해버리는 등 어쨌든 후사 없이 죽었다. 갑자기 그에게도 임금이 될 수 있는 확률이 생기게 되었다. 그런데 예상치도 못한 그 행운이 그에게 들이닥쳤다. 그가 그만 덜컥 명종의 후계자로 낙점이 되어 버렸다. 그야말로 호박이 넝쿨째로 굴러 떨어진 것이었다. 그러니까 그의 나이가 겨우 16살 때였다.

 

 

그런데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렇게 되고 나면 이 사람의 남다른 면을 부각시키는 작업이 이루어진다. 미국 역사 이야기다. 가장 아끼는 벚나무가 잘라진 것을 보고 불같이 노해서 “어느 놈이 그랬느냐?”하고 아버지가 소리쳤을 때 어린 워싱턴이 그가 도끼를 가지고 찍었다고 솔직하게 고백을 해서 용서를 받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어릴 때 위인전에서 한 번쯤 읽거나 아니면 어른들로부터 들어본 적이 있는 미국 초대 대통령의 일화이다. 그러나 사실은 워싱턴의 솔직성을 강조하고자 전기 작가가 꾸며낸 이야기이다.

 

 

선조도 즉위하고 나자 어릴 적 남다른 점을 밝히면서 그가 왕이 될 만한 재목이었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심어주고자 하는 이야기가 있다. 하성군(훗날 선조)이 어릴 때부터 자주 궁을 드나들며 명종비의 총애를 받았다고 하면서 먼저 전주곡을 깔아놓고 익선관 이야기로 본격적인 연주에 들어간다.

 

 


명종이 어느 날 왕손들에게 “너희들 머리 크기를 알고자 한다.”면서 익선관을 써 보아라고 했을 때 나이가 가장 어린 하성군이 꿇어앉아서는 “이것이 어찌 상인(常人, 보통사람)이 쓸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하고 사양했다고 한다. 이를 기이하게 여긴 명종이 하성군에게 왕위를 전할 뜻을 가졌다는 이야기로 연주가 마무리된다. ‘부계기문’이라는 역사 기록에 등장한다고 이덕일씨의 ‘조선 왕을 말하다’에 쓰여 있다. 기록 그대로 이 일화가 실화일수도 있다.

 

 

하지만 워싱턴의 일화와 마찬가지로 선조의 어릴 적 이야기도 꾸며냈을 가능성이 있다. 그가 왕이 되자 그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꾸며낸 말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역사 기록에는 명종이 ‘하성군에게 왕위를 전할 뜻을 가졌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그가 미리 후사로 지명한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를 다 쓰면 길어지기 때문에 ‘조선 왕을 말하다’에서 필자가 그렇게 읽었다고 기술하는 것으로 대신한다. 이덕일씨는 명종이 하성군을 후사로 점찍은 점이 없었음을 여러 기록을 제시하며 그 증거로서 밝혔음도 알려둔다.

 

 

결국 하성군이 후사로 지명된 계기가 되는 어릴 적 이야기는 실제로 명종이 그를 후사로 지명한 일이 없었기 때문에 꾸며내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 필자의 추측이다. 왕이 될 사람이 아닌 사람이 왕이 되고나면 그가 범인이 아니었음을 드러낼 필요가 생기게 됨은 당연한 이치가 아닐까? 그래야 사람들이 그에게 신뢰를 가지게 될 수 있으니까.

 

 

그렇다면 형들이 있는데도 서열이 아래인 하성군이 어떻게 해서 조선의 14대 왕이 될 수 있었을까? 아마 당시 권력자들의 결정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그 당시 정치 상황에서 가장 알맞다고 생각한 최고 권력자들의 결정으로 선조가 왕이 될 수 있었다는 말이다.

 

그 결정의 중심에 선 사람들이 바로 명종비 인순왕후와 영의정 이준경이었다고 이덕일씨는 밝히고 있다. 그당시 인순왕후보다 높은 사람으로는 인종의 비인 인성왕후 박씨가 있었다. 원칙적으로는 제일 어른인 인성왕후가 왕을 임명할 자격이 있었으나 이준경은 당시의 정치 상황을 살핀 결과 현실적인 계산으로 인순왕후 심씨를 밀었다는 것이다. 인순왕후는 어린 하성군을 대신해서 수렴첨정을 함으로써 친정인 청송 심씨 일문의 영화를 꿈꿀 수 있으므로 나이 어린 막내를 선택했다는 추론이 나오게 된다

 

 

아무튼 선조는 어찌어찌해서 어린 나이에 왕이 되었다. 그런데 사람이 똑똑했던 모양이었다. 원래는 인순왕후가 선조가 제대로 자리를 잡을 때까지 수렴첨정을 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그가 능숙하게 정사를 잘 처리하자 즉위 바로 다음해인 17세 때 완전히 편전을 넘겨주는 것이다.

 

                                                <출처> 조열태 씀. 진주성 비가 작가 

 

 

불투명한 후계자 계승, 정통성 콤플렉스를 낳다

국란을 겪은 임금들 선조① 방계 승통

| 제106호 | 20090321 입력

 

절차의 투명성은 결과 못지않게 중요하다. 특히 대통(大統)처럼 최고 권력을 잇는 절차는 나라 안의 모든 사람이 납득할 수 있는 투명성을 확보해야 한다. 그 절차가 불투명하면 정국에 혼란이 온다.

 

당사자는 정통성 부족이란 콤플렉스에 시달리고 이는 정국 운영에 큰 부담이 된다.

호문(好文)·호학(好學)의 군주 선조의 가장 큰 문제점은 불투명했던 왕위 계승 과정이었다.

선조는 학문을 좋아하고 예술에도 능한 임금이었다. 『열성어필(列聖御筆)』에 실린 선조의 그림과 글씨. 제목은 난죽도(蘭竹圖). 동아대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사진가 권태균
선조가 태어날 때만 해도 그가 임금이 되리라고 여긴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중종의 7남인 덕흥군(德興君) 이초(李초)의 셋째 아들이 왕위를 이어받을 가능성은 없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가 태어나기 1년 전(1551) 명종은 인순왕후(仁順王后) 심씨에게서 적자(嫡子) 순회세자 이부(이 부)를 낳았다. 이부는 명종 12년(1557) 세자로 책봉되었다. 세자가 있는데 중종의 수많은 서손(庶孫) 중 한 명인 하성군(河成君) 이균(李鈞:선조)에게 왕위가 돌아올 가능성은 없었다.

그러나 순회세자(順懷世子)가 명종 18년(1563) 열세 살의 어린 나이로 죽으면서 하성군에게도 일말의 희망이 생겼다.

 

김시양(金時讓)은 『부계기문(부溪記聞)』에서 순회세자가 죽자 애통해하던 명종이 “내가 어찌 통곡하겠는가? 을사년에 충현(忠賢)들이 죄도 없이 떼죽음을 당하는데 내가 임금 자리에 있으면서 중지시키지 못했으니 내 집안에서 어찌 대대로 군왕이 나올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다고 전한다.

 

김시양은 “크도다! 임금의 말씀이여, 먼 훗날까지 신하를 울릴 만하다”고 칭찬했다. 명종이 실제 이런 말을 했을 수도 있지만 명종은 자신의 핏줄에게 왕위를 넘기려는 계획을 한번도 포기하지 않았다.

『부계기문』이나 『선조실록』 『광해군일기』 등은 명종이 하성군을 후사(後嗣)로 점지한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

 

명종이 왕손들에게 “너희들의 머리 크기를 알려 한다”면서 익선관(翼善冠)을 써 보라고 명했는데, 나이가 가장 어렸던 하성군이 관을 받들어 돌려드리면서 꿇어앉아 “이것이 어찌 상인(常人)이 쓸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라고 하자 기특하게 여긴 명종이 왕위를 전할 뜻을 가졌다는 것이 『부계기문』의 내용이다.

 

이 내용은 『광해군일기』에 실려 있는 소경대왕(昭敬大王:선조)의 행장(行狀)에도 나온다. 하성군이 익선관 쓰기를 사양하자 명종이 경탄하면서 “그렇다. 마땅히 이 관을 너에게 주겠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명종은 하성군을 후사로 지명한 적이 없다
. 『선조실록』 총서(總序)는 명종이 재위 20년(1565) 와병 중일 때 하성군을 후사로 결정한 것처럼 서술하고 있다. 명종이 아프자 대신들이 조카 중에서 후사를 미리 선정하자고 청했고 “임금이 드디어 하성군에게 의약(醫藥) 시중을 들라고 시키고 따로 명을 내려 선비를 사부(師傅)로 삼아 가르쳐 이끌도록 했다”는 것이다. 의약 시중을 시키고 사부를 두어 공부시킨 것이 하성군을 후사로 삼으려는 의사였다는 뜻이다.

반면 『명종실록』의 기사는 다르다
. 명종이 하성군에게 사부를 붙여 공부를 시킨 것은 사실이지만 재위 20년이 아니라 21년이었으며 그 이유도 달랐다.

 

성종의 손자 경양군(景陽君) 이수환(李壽環) 부자가 재산 문제로 서처남(庶妻男)을 때려죽인 사건이 발생하고, 청릉수(淸陵守) 이수하(李壽賀)가 창기를 끼고 놀다가 충의위(忠義衛) 이균(李鈞)를 찔러 죽인 사건이 발생하자 명종은 “종친이 대개 무식해 심지어 중죄까지 범하니 내가 심히 통탄한다”며 사부를 뽑아 왕손을 교육시키라고 명한 것이다.

 

이때 사부의 교육 대상은 하성군 이균(李鈞:선조)뿐만 아니라 풍산도정(豊山都正) 이종린(李宗麟), 하원군(河原君) 이정(李정), 전(前) 하릉군(河陵君) 이인(李인)까지 모두 네 명이었다. 끝내 자식을 낳지 못하면 넷 중에서 후사를 선택하려는 의도였다. 나이가 제일 어렸던 하성군이 가장 불리했지만 그에게는 인순왕후 청송심씨의 총애라는 막강한 무기가 있었다.

율곡 이이(李珥)는 『석담일기(石潭日記)』에서 명종 20년의 와병 때 있었던 중요한 사건을 전해 주고 있다.

 

이이는 “그해 9월 임금이 편찮으신데 순회세자는 이미 세상을 떠나고 국본(國本:세자)이 정해지지 않아 인심이 위태롭고 두렵게 여겼다. 영의정 이준경(李浚慶) 등이 국본을 정하자고 청했으나 임금의 윤허를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명종은 후사를 세우자는 대신들의 청을 거부했다.

 

『부계기문』은 명종의 와병 때 인순왕후 심씨와 영의정 이준경이 하성군을 명종의 후사로 결정하고 하성군의 잠저(潛邸)를 호위시켰다면서 “명종은 이 사실을 몰랐다”고 전해 준다.

 

이이도 『석담일기』에서 “임금의 병이 위중해지자 중전(中殿:인순왕후)이 대신들의 처소에 하성군의 이름을 쓴 봉서(封書) 한 통을 내리고 대신들만 보라고 말했다”고 전하고 있다.

이이는 “대개 중전이 임금의 뜻(上意)을 받들어 임금이 돌아가신 후 하성군을 세우려는 것이었다”고 쓰고 있지만 명종은 그런 뜻을 표시한 적이 없었다. 병에서 회복된 명종은 자신도 모르게 하성군이 후사로 거론된 사실에 불쾌감을 느꼈다.

 

명종은 대신들에게 “내가 지금 황천과 조종의 말 없는 도우심에 힘입어 위기에서 소생했으니 국본의 탄생을 기다리고 소망하는 것이 진실로 마땅하다. 이제 다시 다른 의논이 있어서는 안 된다”(『부계기문』 재위 20년 10월 10일)고 못 박았다. 하성군의 왕위는 물거품이 된 것이다.

명종은 후사를 낳지 못했고 재위 22년(1567) 6월 다시 병이 들었다
. 6월 27일 갑자기 병세가 위중해졌는데 이 날짜 『부계기문』은 “임금은 신음을 그치지 않았고 말하고자 했으나 할 수 없었다. 환관 10여 명이 좌우에서 부르짖어 울 뿐이었다”고 적고 있다. 이미 유언을 남길 수 없는 상태였다.

 

이런 상태에서 다시 명종비 인순왕후이준경의 핫라인이 가동되었다.

 

이이는 『석담일기』에서 명종이 위독해지자 이준경 등이 중전에게 “일이 이미 어찌 할 도리가 없게 되었으니 마땅히 사직의 대계를 정해야 합니다. 임금께서 고명(顧命:유명)을 남기시기가 불가능하시니 마땅히 중전께서 지휘하셔야 합니다”고 말했다고 쓰고 있다.

선조실록』은 “이준경이 울면서 중전에게 대계(大計)를 청하자 중전이 ‘을축년(명종 20년)에 정한 바대로 하려고 한다’고 전교했다”고 쓰고 있다. 하성군으로 결정하라는 뜻이었다.

 

『부계기문』은 도승지 이양원(李陽元)이 삼사(三司:사헌부·사간원·홍문관)의 장관을 불러서 고명을 함께 들어야 한다고 청하자 이준경이 “내가 수상으로서 유교(遺敎)를 받드는 것인데 왜 삼사의 장관을 부르려 하는가”라고 꾸짖자 이양원이 실색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하성군을 후사로 삼는다는 명종의 유교는 없었다. 이양원은 명종의 유언도 없이 하성군이 후사로 책봉되는 데 이의를 제기한 셈이었다.

 

『부계기문』은 선조가 즉위 후 이양원을 처벌하지 않은 것을 높게 평가하면서 “이양원이 만약 성명(聖明)의 세상을 만나지 못했다면 일족(一族)이 전멸되는 주륙(誅戮)을 면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평했다. 하지만 왕위 계승 절차를 투명하게 하려던 이양원의 행위가 잘못은 아니었다.

 

이렇게 하성군 이균은 명종의 유언도 없는 상태에서 명종비 인순왕후 심씨와 이준경의 공모에 의해 후사로 결정되었다. 명종이 사망하자 이준경 등은 도승지 이양원과 동부승지 박소립(朴素立), 주서(注書) 황대수(黃大受) 등을 덕흥군의 집으로 보내 후사를 모셔오게 했다.

이이는 『석담일기』에서 승정원 주서 황대수가 이양원에게 “어느 군(君)을 모셔올 것인지 왜 대신에게 물어보지 않습니까”라고 묻자 이양원이 “이미 정해진 일이니 물을 필요가 없소”라고 대답했다고 전해 준다.

 

황대수가 “비록 정해졌다 해도 반드시 대신의 말을 듣는 것이 옳소”라면서 대신에게 “덕흥군의 몇째 아드님을 맞아 와야 합니까”라고 묻자 대신은 셋째 아들 하성군이시다”고 답했다. 대신은 물론 이준경이다. 이양원 등이 덕흥군의 저택에 갔을 때 위사(衛士)들이 아직 모이지 않아 잡인(雜人)들이 들락거리는 것도 막지 못하는 상태였다. 이때 16세의 하성군은 모친상 중이어서 울면서 사양하다가 궁중으로 들어왔다.

『선조실록』은 “이때 요행을 바라는 무리들이 몰려들어 수레 뒤를 따랐는데, 이들의 이름을 기록한 것이 한 두루마리나 되었다”고 전한다. 임금의 수레를 호종했으므로 녹공(錄功:공신으로 기록됨)될 것을 바란 것이다. 그러나 이준경이 “예전에 결정된 일인데 신하가 무슨 공이 있단 말인가”라면서 태워 버리라고 재촉했다. 이렇게 선왕의 유명도 없이 중종의 서손(庶孫) 하성군 인순왕후 심씨와 이준경의 공모로 국왕으로 선출되었다.

 

선왕의 유명(遺命)도 받지 못한 방계(傍系) 승통이었으니 큰 부담이 아닐 수 없었다.


당쟁 줄타기하던 임금, 서인의 손에 도끼를 쥐여주다

국란을 겪은 임금들 선조② 정여립 사건

| 제107호 | 20090329 입력

 

최고 지도자의 콤플렉스를 씻는 유일한 방법은 성공한 정치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대부분은 콤플렉스에 허우적대다 실패한 정치가로 끝나기 마련이다. 방계 승통의 콤플렉스를 갖고 있던 선조는 성리학을 국시로 삼아 사림의 지지를 받았으나 사림에 대한 콤플렉스를 갖고 있었다.

그것이 정여립 사건을 계기로 밖으로 표출되면서 무수한 비극이 발생했다.

정여립이 자결했다는 전북 진안 죽도의 전경. 죽도에 서실이 있어 ‘죽도 선생’이라 불린 정여립은 성리학의 가치관을 뛰어넘는 혁신적 사고를 하고 있었다.

오른쪽 작은 사진은 충북 진천에 있는 정철 신도비각. 사진가 권태균

선조 1년(1568) 사림의 영수 퇴계 이황(李滉)은 송나라 정이(程 이)의 ‘사물잠(四勿箴)’과 주희(朱熹)의 글·그림 등에 자신의 글과 그림을 덧붙인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선조에게 올렸다.

 

선조는 이를 병풍으로 만들라고 명했다. “좌우에 두고 아침저녁으로 바라보며 성찰하겠다”는 선조의 말에 이황은 드디어 성리학이 명실상부한 조선의 국시(國是)가 되었다고 여겼다. 성학(聖學)이 성리학이었기 때문이다. 선조는 성리학을 받아들여 사림의 지지를 획득한 것이었다.

그러나 사림은 곧 분열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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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인과 서인의 갈림길> 1575년 선조8년

 

심의겸1535(중종 30)~ 1587(선조 20).

심의겸의 글씨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방숙(方叔), 호는 손암(巽菴)·간암(艮菴)·황재(黃齋).

할아버지는 영의정을 지낸 심연원(連源)이며, 아버지는 청릉부원군(靑陵府院君) 심강(鋼)이다. 심홍(泓)에게 입양되었다. 인순왕후(仁順王后 : 명종의 妃)의 동생이다.

 

1562년(명종 17) 별시문과에 급제한 뒤 병조좌랑을 거쳐 정언·부수찬·교리 등을 지냈다.

 

당시 윤원형(尹元衡) 등의 소윤(小尹)이 문정대비(文定大妃)를 배경으로 전권을 휘두르고 있었는데, 명종은 1563년 이량(李樑)을 이조판서로 등용하여 왕권을 강화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이량이 횡렴을 일삼고 사림을 탄압하여 사림으로부터 원성을 사게 되었다.

 

척신(戚臣)이기는 했으나 척신의 전횡을 비판하고 사림을 옹호했던 그는 국왕의 밀지(密旨)를 받고 대제학 기대항(奇大恒)으로 하여금 상소케 하여 외숙부인 이량 일파를 탄핵했다.

 

1564년 지평·검상, 1565년 사간·부응교, 1566년 직제학·동부승지 등을 지냈다.

 이어 1569년(선조 2)에 좌부승지·대사간, 1572년에 이조참의를 지내면서 전배(前輩) 사류와 교유가 많았다.

 

명종대 소윤세력이 우세한 상황에서 심의겸의 도움으로 정계에 진출한 전배들은 심의겸을 척신이지만 사림의 동조자로 받아들이고 있었으나,

 

소윤세력의 몰락 이후에 등장한 김효원(金孝元) 등의 후배(後輩)들은 급진적으로 척신정치의 유제를 척결하고자 했으므로 전배들에게 불만을 품게 되었다.

 

이때 이조정랑 오건(吳健)이 물러나면서 후임으로 신진사류들로부터 추앙을 받고 있던 김효원을 천거하자, 심의겸은 그가 일찍이 윤원형의 집에 기거하면서 아부했다고 하여 임명을 반대했다.

 

결국 1574년 김효원이 이조정랑이 되었는데

 

1575년에 심의겸의 아우 충겸(忠謙)이 이조정랑에 천거되자 이번에는 거꾸로 김효원이 반대했다.

 

이같은 대립은 전·후배 사이의 대립으로 확대되었으며, 결국 전배는 심의겸을 중심으로, 후배는 김효원을 중심으로 결집하여 사림은 2개의 당파로 나누어졌다.

 

심의겸의 집이 서쪽에 있었던 까닭에 심의겸파를 서인으로 불렀으며,

김효원의 집은 동쪽에 있었으므로 김효원파를 동인이라고 불렀다.

 

그해에 동서간의 대립이 심화되는 것을 우려한 이이(李珥)의 상소로 김효원과 더불어 외직으로 밀려나, 개성유수·전라감사를 지냈다. 그뒤 사직하고 파산(破山)에 내려가 있다가 1580년 다시 등용되어 예조참판과 함경감사 등을 지냈다.

 

정인홍(鄭仁弘)의 탄핵을 받았을 때 이이의 변호로 무사했으나, 이이가 죽은 뒤 1584년 동인의 득세로 파직당했다. 청양군(靑陽君)에 봉해졌고, 나주 월정서원(月井書院)에 제향되었다.

 

............

선산김씨 김효원 1532(중종 27)~ 1590(선조 2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선산. 자는 인백(仁伯), 호는 성암(省庵). 아버지는 현감 홍우(弘遇)이다.

조식(曺植)·이황(李滉) 등에게 배웠다.

 

1564년(명종 19) 진사가 되고, 1565년 알성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했다. 병조좌랑·정언·지평 등을 지내고, 1573년(선조 6) 사가독서(賜暇讀書)했다.

 

1572년 오건(吳健)이 이조전랑(吏曹銓郞)으로 추천했다. 이조전랑은 비록 그 지위는 낮으나 관리의 임면(任免)을 장악하고 있는 중요한 자리로 반드시 전임자가 후임자를 추천하도록 되어 있어 그 임명은 이조판서라도 참견할 수 없었다.

 

그런데 당시 이조참의로 있던 심의겸(沈義謙)이 명종 때 공무로 영의정 윤원형(尹元衡)의 집에 갔다가 그곳에 김효원의 침구가 있는 것을 보고, 문명(文名)이 있는 자가 권문(權門)에 아첨한다고 멸시하고 있다가 이때 김효원이 이조전랑으로 추천되자 권신(權臣) 윤형원의 문객이었다 하여 거부했다.

 

그러나 1574년 조정기(趙廷機)의 추천으로 이조전랑이 되었다.

그후 1575년 심의겸의 동생 충겸(忠謙)이 이조전랑으로 추천되자 충겸이 명종의 비(妃)인 인순왕후(仁順王后)의 동생임을 들어, 전랑의 관직은 척신(戚臣)의 사유물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반대하고 이발(李潑)을 추천했다.

 

 이에 심의겸은 "외척(外戚=명종의 비(妃)인 인순왕후(仁順王后)의 동생)이 원흉(1565년 사망한 문정왕후의 오빠 윤원형)의 문객에게 지겠느냐"(1565년 문정왕후 사망)하여 더욱 심하게 대립하게 되었다.

 

이 이조전랑을 둘러싼 대립을 계기로, 김효원을 지지하는 신진사림파와 심의겸을 지지하는 기성사림파가 동인서인으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김효원의 집이 서울 동쪽 낙산(駱山) 밑 건천동(乾川洞)에 있다고 하여 김효원을 중심으로 한 세력을 동인이라고 불렀으며,

심의겸의 집이 서울 정릉방(貞陵坊)에 있었기 때문에 그 일파를 서인으로 불렀다.

 

동인은 주로 신진학자들로 구성되었으며, 이황의 영남학파(嶺南學派)와도 관계가 있었다.

 

이들의 대립이 심해지자 우의정 노수신(盧守愼)과 부제학 이이(李珥)가 사림의 분쟁을 우려하여 이를 완화시키고자 김효원과 심의겸을 외직으로 내보내도록 상소했다. 그후 김효원은 경흥·부령·삼척부사 등을 역임했다.

 

이후 사간(司諫)의 물망에 오르기도 했으나 중앙의 관직에 등용되지 못하고 계속 지방에 머물렀다. 당쟁이 심화되면서 안악군수로 자청해나갔으며 당쟁에 책임을 느끼고 시사에 대해서는 언급하는 일이 없었다. 뒤에 영흥부사로 승진하여 재직중에 죽어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삼척 경행서원(景行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성암집〉이 있다.

▲ 김효원의 묘 ⓒ 임병규

     글.사진  임병규 관장(남양주향토사료관장)

조선 중기 이후 계속된 당파 싸움의 시작은 선조 때의 문신인 성암 김효원(省庵 金孝元 : 1542~1590)과 손암 심의겸(巽菴 沈義謙 : 1535~1587)의 전랑(銓郞)이라는 관직을 둘러싼 암투로부터 시작한다.

 

사람들은 한성의 동쪽인 건천동(乾川洞)에 사는 김효원을 동인으로, 서부에 사는 심의겸을 서인(西人)으로 불렀다.

 

동인은 주로 신진사림과 퇴계 이황(李滉), 조식(曺植)의 문인을 중심으로 구성되었고, 서인은 구사림세력과 율곡 이이(李珥)가 가세하여 그를 중심으로 하는, 즉 신?구의 대립을 벗어나 학연성의 대립으로 발전하여 정치운명의 형태로 굳어지게 되었다.


성암 김효원은 1565년(명종 20) 알성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주요 직책을 두루 역임하였다. 지평을 맡고 있을 때 문정왕후 윤씨가 죽고 척신계가 몰락함과 더불어 새로이 등장한 신진 사림파의 대표적 인물로 부상하게 되었다. 1572년 김효원은 이조전랑으로 오건(吳健)을 추천하였으나 과거 문정왕후의 동생 윤원형(尹元衡)의 문객이었다는 이유로 이조참의 심의겸이 반대하여 뜻을 이루지 못한 적이 있었다.

 

 1575년 심의겸의 동생 심충겸(沈忠謙)이 이조전랑으로 추천되자 이번에는 김효원이 전랑의 관직은 절대로 척신의 사유물이 될 수 없다고 반대하여 좌절된 바,

 

이때부터 동?서로 나뉘어지고 훈구와 척신의 싸움으로 발전하게 된다.

 

심의겸을 척신이라 함은 명종(明宗)의 비인 인순왕후(仁順王后) 심씨의 동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심의겸은 권세와 간계를 배척하고 사림의 입장을 옹호하는데 힘을 씀으로서 당시 사림간에 폭넓게 지지를 받는 인물이었다.

 


두 사람의 대립은 사림의 분열로 이어지고, 점차 심해지자 우의정 노사신과 부제학 이이 등은 분쟁 완화의 조정안으로 두 사람을 한성을 떠나 외직으로 보낼 것을 임금께 아뢰니 김효원은 경흥부사로, 심의겸은 개성부유수로 나가게 된다.

 

그러나 김효원이 더 외딴 외직에 배치되었다는 동인의 반발로 그 조정안은 실패로 끝나고 오히려 골만 깊어갔다.

 

선조 때는 당쟁이 더욱 고조되어 김효원은 자청해서 안악군수로 나갔다. 이때부터 김효원은 입을 굳게 다물고 붕당의 책임을 통감하여 세상 돌아가는 일에 개의치 않았다.

 

선조의 특명으로 영흥부사로 승진하여 재직 중 죽으니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삼척의 경행서원(景行書院)에 제향되었다.


김효원의 본관은 선산(善山)이며 아버지는 현감 홍우(弘遇)이니 선누대 묘소가 별내면 화접6리에 있다.

주을천 옆 묘소 입구에 옥개형 신도비가 있는데 이준(李埈)이 짓고 김세렴(金世濂)이 글씨를, 허목(許穆)이 전액하여 1743년에 세웠다.


남의 허물을 굳이 들추어 싸움만 일삼는 작금의 정치판과 400년 전 동서 붕당과 얼마만큼 다르단 말인가. 국리민복을 도외시한 정치는 결국 국력이 약화될 수밖에 없다.

 ▲ 김효원의 묘갈 

 

묘갈 [墓碣] : 무덤 앞에 세우는 돌비석 또는 한문학 문체의 이름.

 

'묘갈'과 '묘비'(墓碑)는 비석으로 불리기도 했다. 구조는 대개 맨 아래에 반석(盤石), 그위에 비신(碑身), 맨 위에 지붕 모양의 가첨석(加?石 : 蓋石)으로 되어 있는데, 가첨석이 없는 경우도 있다.

 

죽은 이의 이름, 가족관계, 출생과 사망 연월일, 자손관계 기록, 살아 있을 때 했던 일 등을 기록했다.

 

당나라 때는 관직이 5품 이상이어야 귀부이수(龜趺?首)를, 5품 이하는 방부원수(方趺圓首)를 세웠다.

후한서 後漢書〉 주(注)에는 네모진 것을 비, 둥근 것을 갈로 구분했고, 〈문체명변 文體明辯〉에는 반니(潘尼)가 반황문(潘黃門)의 묘갈문을 지어 묘갈문을 만드는 것은 진(晉)나라에서 비롯되었으며, 관직의 등급에 따라 갈과 비를 구분했으나 실제로는 다를 것이 없었다고 했다. 서법(書法)은 명(名)이 있고 없고에 관계없이 갈과 비는 같았다.

 

묘갈은 죽은 이의 이름을 후세에 전하는 것이 목적이었으므로, 대체로 죽은 이의 긍정적인 좋은 점만 쓰는 것이 특징이었다. 그래서 내용의 자료적 가치는 적을 수밖에 없었다.

 

묘갈에 써 있는 명문(銘文)을 묘갈명이라고 하는데, 운문(韻文)으로 되어 있고 대개 4언이 중심이나 5언·7언의 장단구(長短句)도 있다.

 

한국에는 고려시대 최충(崔沖)의 〈홍경사갈 弘慶寺碣〉이 처음이며, 조선 중기에 와서 크게 성행했다. 대표적인 인물인 송시열(宋時烈)은 많은 묘갈명을 남겨 후대 금석문 발전에 큰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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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8년(1575:을해년) 삼사(三司)의 인사권을 가진 이조전랑(吏曹銓郞) 문제로 김효원(金孝元)을 지지하는 동인과 인순왕후의 동생 심의겸(沈義謙)을 지지하는 서인으로 갈렸는데, 이것이 을해당론(乙亥黨論)이다.

 

김효원의 집이 서울 동부 건천동(乾川洞)에, 심의겸의 집이 서울 서쪽 정릉방(貞陵坊)에 있었기에 붙은 당명이다. 율곡 이이(李珥)는 두 당을 화합시키려는 조제론(調劑論)을 제기했으나 동인들에게서 거듭 공격을 받고 본의 아니게 서인이 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당쟁 초기에 선조는 서인 편을 들었다.

 

이황이 재위 3년(1570) 사망한 후 이이가 사림의 영수였기 때문이다.

선조는 재위 16년(1583:계미년) 이이를 공격하는 동인 허봉(許 봉)·송응개(宋應漑)·박근원(朴謹元)을 모두 귀양 보내 ‘계미삼찬(癸未三竄:계미년에 세 신하를 귀양 보내다)’이란 말까지 낳을 정도로 서인을 지지했다
.

 

그러나 이듬해(1584:갑신년) 이이가 사망하자 『당의통략(黨議通略)』이 “임금이 이이를 융성하게 대접하다가 사망한 후에는 은혜와 예절이 박절해졌다”고 적고 있듯이 생각이 달라졌다.

 

김시양(金時讓)의 『자해필담(紫海筆談)』은 재위 18년(1585) 선조가 대사헌 구봉령(具鳳齡)에게 “(귀양 간) 세 신하가 이이를 큰 간신(巨奸)이라고 말했는데 과연 그러한가?”라고 물었다고 전한다. 구봉령은 “‘이이가 비록 간사하지는 않지만 경솔한 사람이며 그에게 나라를 맡기면 나라가 잘못될 것’이라고 답했는데, 그 후 오래지 않아 귀양 간 세 신하가 다 사면되었다”고 쓰고 있다.

선조의 마음이 변한 것을 간파한 동인은 공세에 나섰다
.

 

홍문관에서 심의겸을 공격하자 선조는 “논한 바가 너무 옳아 더할 나위 없다”고 대답하고는 직접 전교를 내려 “국권을 마음대로 천단했다”면서 심의겸을 파직시켰다. 명종의 유조도 없었던 하성군을 임금으로 만들어 준 인순왕후의 동생 심의겸은 이렇게 조정에서 쫓겨났다. 인순왕후는 선조 8년(1575) 이미 사망한 후였다.

동인이 정권을 잡자 당적을 바꾸는 인물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 전 홍문관 수찬(修撰) 정여립(鄭汝立)이 대표적이었다.

 

선조 16년(1583) 10월 이조판서 이이는 ‘정여립을 여러 번 천거해도 선조가 매번 낙점을 거부한다’면서 “혹 중간에 참소라도 있으신 것입니까?”라고 항의할 정도로 정여립을 아꼈다. 그러나 이이 사망 뒤 동인으로 돌아선 정여립은 이이를 비난했다.

 

『부계기문(<6DAA>溪記聞)』은 선조가 정여립의 면전에서 “정여립은 오늘의 형서(邢恕)로구나”라고 비판하자 정여립이 성난 눈으로 물러갔다고 전한다. 형서는 스승인 송(宋)나라 정이를 비판했다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선조실록』에선 선조가 사간원 사간 한옹(韓<9852>) 등을 만나 ‘오늘날의 형서’ 운운한 것이라고 조금 달리 전한다. 이이의 천거를 대부분 수용했던 선조는 정여립에게는 내내 비판적이었다.

이런 와중인 선조 22년(1589) 10월 2일 황해감사 한준(韓準)의 비밀 장계(狀啓)가 도착하면서 유명한 정여립 사건이 시작된다.

 

선조는 야밤임에도 급히 3정승·6승지 등을 불러 모았는데 검열(檢閱) 이진길(李震吉)만은 들어오지 못하게 막았다. 정여립의 조카이기 때문이다. 이 날짜 『선조실록』은 “황해도 안악(安岳)·재령(載寧) 등에서 일어난 역모 사건을 의논하고 선전관과 의금부 도사를 황해도와 전라도 등으로 나눠 보냈는데 전라도의 정여립이 괴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역모 고변은 황해도 감사가 했는데 그 괴수는 전라도에 있었다는 것부터가 의혹이었다.

『연려실기술』은 당초 재령군수 박충간(朴忠侃)과 안악군수 이축(李軸)이 명망이 있던 신천군수 한응인(韓應寅)을 끌어들여 감사에게 연명으로 보고했다고 전한다. 동인 정권에 의해 사노(私奴)로 전락한 송익필(宋翼弼)의 사주설도 있듯이 의혹투성이의 사건이었다.

 

이에 대해 동·서인은 각각 많은 기록을 남겼는데 이긍익(李肯翊)은 『연려실기술』에서 동인의 기록엔 푸른 점(點)을, 서인의 기록엔 붉은 점을 찍어 표시했을 정도로 당파 간 입장 차가 뚜렷했다.

 

이 사건의 진실에 다가가려면 정여립의 사상을 먼저 추적해야 한다.

 

안방준(安邦俊)은 ‘기축기사(己丑記事)’에서 “정여립이 ‘유비(劉備)가 아니라 조조(曹操)를 정통으로 삼은 송나라 사마광(司馬光)이 직필이며 유비를 정통으로 삼은 주자(朱子)가 틀렸다’고 말했다”고 적고 있다.

또한천하는 공물(公物)이니 어찌 일정한 주인(定主)이 있겠는가…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고 한 것은 왕촉(연나라에 저항해 자결한 제나라 충신)이 죽음에 임해 일시적으로 한 말이지 성현의 통론(通論)은 아니다”고 말했다고 전한다.

 

안방준은 정여립의 패역론이 이렇게 심했는데도 사람들이 다 설복당했다”며 “조유직(趙惟直)·신여성(辛汝成) 등은 ‘우리 선생의 이런 의논은 실로 고금의 선유(先儒)들이 말하지 못한 것’이라고까지 말했다”고 비판했다.

 

이로 미뤄 정여립이 당시 성리학자들과는 다른 사상을 가졌던 것과 이런 사상에 그의 지우들이 공감했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가 실제로 이런 생각을 실천에 옮기려고 했는지는 다른 차원의 문제다.

정여립이 전주·금구·태인 등의 무사(武士)와 공사(公私) 천인(賤人)들을 모아 대동계(大同契)를 조직하고 매월 15일 활쏘기를 연습한 것을 문제 삼기도 하지만 선조 20년(1587) 왜구가 침범했을 때 전주부윤 남언경(南彦經)의 요청으로 대동계가 왜구 격퇴에 나섰듯이 비밀 조직도 아니었다.

 

명재 윤증(尹拯)이 ‘황신(黃愼)행장’에서 좌의정 정언신(鄭언信)이 ‘정여립을 고변한 자의 목을 베어야 한다’고 말했다고 적고 있듯이 고변을 사실로 믿는 사람도 많지 않았다.

 

게다가 선전관 이용준(李用濬) 등은 ‘정여립이 자신의 서실(書室)이 있는 진안 죽도(竹島)에서 자결했다’며 아들 정옥남(鄭玉南)만을 잡아와 의혹은 증폭되었다.

 

훗날 남하정(南夏正:1678~1751)은 『동소만록(桐巢漫錄)』에서 “정여립이 진안 죽도에서 놀고 있을 때 선전관이 현감과 같이 죽이고선 자살했다고 아뢰었다”고 기록할 정도였다.

이런 상황에서 국왕 선조는 사건의 실체적 진실 파악에 주력해야 했으나 사림에 대한 콤플렉스와 정여립에 대한 부정적 감정이 겹쳐 그럴 생각이 없었다.

 

『선조실록』은 “(정여립이) 역적의 괴수가 되자 서인은 서로 축하하지 않는 자가 없었고 동인은 간담이 떨어지지 않은 자가 없었다”고 적고 있다.

 

서인 강경파 정철(鄭澈)이역적을 체포하고 경외(京外)에 계엄을 선포하자”는 비밀 차자(箚子:약식 상소문)를 올리자 선조는 그 충절을 칭찬하고 사건 조사를 담당하는 위관(委官:국문 수사 책임자)으로 삼았다.

사실상 동인에 대한 대량 살육을 허용하는 부월(<9207>鉞:도끼)을 준 셈이었다
. 진상이 모호한 사건의 조사를 정적들이 맡았으니 가혹한 고문이 자행될 수밖에 없었다. 좌의정 정언신, 부제학 이발(李潑)·이길(李 길) 형제, 백유양(白惟讓)·최영경(崔永慶)·정개청(鄭介淸) 등 저명한 사대부들이 아무런 물증도 없이 죽어갔다. 조카 이진길은 불복하다가 매 맞아 죽는 등 연루자는 수없이 많았다.

 

북인들이 작성한 『선조실록』은 “이발·이길·백유양 등은 정철이 낙안(樂安)에 사는 선홍복(宣弘福)을 끌어들여 죽게 했다”고 적은 것처럼 동인은 사건 자체를 서인의 정치공작으로 단정했다.

 

이 사건으로 동·서인은 서로 적당(敵黨)이 되었다.

 

그러나 이면에는 당쟁을 이용해 왕권을 강화하려는 선조의 계산이 깔려 있었다.


수많은 전란의 징후, 무능한 정권은 눈을 감았다

국란을 겪은 임금들 선조③ 임진왜란 전야

| 제108호 | 20090405 입력

 

유능한 지배층과 무능한 지배층을 가르는 기준 가운데 하나가 현실인식 문제다. 유능한 지배층은 현실을 냉철하게 바라보지만 무능한 지배층은 자신의 생각과 다른 현실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들으려 한다. 그렇게 머릿속의 바람을 현실인 것처럼 호도하는 동안 나라는 깊숙이 썩어 들어갈 수밖에 없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오사카의 혼간지(本願寺) 자리에 오사카 성을 짓고 조선 침략을 총지휘했다. 사진가 권태균
선조는 재위 8년(1575) 동인 김효원(金孝元)을 함경도 경흥부사로 좌천시켰다. 당쟁을 유발해 조정을 시끄럽게 했다는 견책이었다. 그런데 『선조수정실록』 8년 10월 1일자는 이조판서 정대년(鄭大年)·병조판서 김귀영(金貴榮) 등이 “경흥은 극지 변방으로 오랑캐 지역에 가까우므로 서생(書生)이 진수(鎭守)하기에 마땅하지 않습니다”고 반대했다고 전해 준다.

 

인사를 담당하는 두 판서가 건의하자 선조는 김효원을 조금 내지인 부령(富寧)부사로 보내고, 당쟁의 다른 당사자인 심의겸(沈義謙)도 개성유수로 내보냈다.

 

두 판서가 ‘경흥이 오지이므로 서생이 진수하기 마땅치 않다’고 계청한 것은 조선 지배층의 인식 수준을 말해 주는 것이었다. 문신이 무신을 지휘하는 도체찰사 제도가 법제화된 나라에서 서생 운운하며 변방 근무에 이의를 제기하는 자체가 지배층의 의무를 망각한 것이었다.

임진왜란에 대해선 현재까지 두 가지 오해가 있다. 하나는 선조 25년(1592) 4월 13일 일본군이 느닷없이 부산을 공격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조선통신사 부사(副使)였던 김성일(金誠一)의 ‘일본은 침략하지 않을 것’이란 보고 때문에 전쟁에 대비하지 못했다는 인식이다.

 

둘은 결국 ‘조선은 일본이 침략할 줄 몰랐다’는 것으로 모아진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일본이 침략하리라는 증거는 수도 없이 많았다. 세종 25년(1443) 변효문(卞孝文)이 조선통신사로 다녀온 이래 무려 150년 만인 선조 23년(1590) 3월 정사 황윤길(黃允吉), 부사 김성일로 구성된 조선통신사가 파견된 것 자체가 일본이 공언(公言)하는 침략 의사가 사실인지를 알아보기 위한 것이었다.

 

일본 열도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대마도주 소 요시시케(宗義調) 부자에게 명나라를 공격할 길을 조선에 빌리라는 ‘가도입명(假道入明)’과 조선 국왕을 일본으로 오게 하라는 ‘국왕 입조(入朝)’의 명령을 내렸다.

소 요시시케는
도요토미가 조선통신사를 직접 만나면 두 개의 요구조건이 얼마나 비현실적인지를 알리라는 생각에서 조선에 거듭 사신을 보내 통신사 파견을 요청했다.

 

조선은 소 요시시케에게 선조 20년(1587) 2월 흥양(興陽)을 침범해 녹도보장(鹿島堡將) 이대원(李大源)을 전사시킨 왜구 두목과 조선인 사화동(沙火同)을 압송하고, 붙잡아 간 조선인들을 송환시키면 통신사를 파견하겠다고 답변했다. 사화동은 고된 부역과 공납(貢納)으로 바치는 전복(全鰒)의 수량이 지나치게 많다면서 일본으로 귀화해 왜구를 손죽도로 안내한 조선 백성이었다.

『선조수정실록』 22년(1589) 7월조는 일본에서 긴시요라(緊時要羅) 등 3인의 왜구와 사화동, 그리고 조선 포로 김대기(金大璣) 등 116명을 돌려보냈다고 전하고 있다. 그만큼 대마도주는 조선통신사 파견에 사활을 건 것이었다.

 

그래서 황윤길과 김성일 등이 그 대가로 일본으로 떠났던 것이다. 정사를 서인 황윤길, 부사를 동인 김성일로 삼은 것은 선조 나름의 탕평책이자 다양한 시각을 접하고 싶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당파 차이뿐만 아니라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 자체가 달랐다. 황윤길은 현실에 민감하게 반응한 반면 김성일은 일본을 오랑캐로 여기는 유학자의 시각으로 일본을 얕보았다.

왼쪽 사진은 왜군 장수의 황금가면(위)과 전투 때 입은 갑옷. 오른쪽 사진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초상화.
통신사 일행은 수많은 고생 끝에 4개월 만인 1590년 7월 말 교토(京都)에 들어갔으나 도요토미는 통신사를 즉각 만날 생각이 없었다.

 

도요토미가 동쪽 정벌에 나갔다는 소식에 하염없이 한 달 반가량을 더 기다렸으나 도요토미는 9월 초 귀경한 후에도 궁전인 취락정(聚樂亭)을 수리한다며 만나주지 않았다. 그러자 통신사 일행 중에 도요토미의 측근 호인(法印) 등에게 뇌물을 써서라도 빨리 만나고 돌아가자고 주장하는 인물들이 나타났다.

 

김성일은 “사신이 왕명을 받들고 국경을 나와서는 한결같이 예법대로 해야 한다”며 단호하게 거부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겨우 도요토미를 만나게 되었다.

 

귀국한 사신에게서 상황을 자세히 들은 류성룡(柳成龍)은 『징비록(懲毖錄)』에서 도요토미가 안고 있던 어린애가 옷에 오줌을 싼 이야기를 전하면서 “(도요토미는) 모두 제멋대로이고 매우 자만(自滿)하여, 마치 옆에 사람이 없는 것과 같은 태도였다”고 적고 있다.

우여곡절 끝에 받은 도요토미의 국서(國書)도 문제투성이였다. ‘조선국왕 전하(殿下)’라고 써야 할 것을 ‘합하(閤下)’라고 쓰고, 조선의 선물을 ‘예폐(禮幣)’라고 써야 하는데 신하가 임금에게 바치는 예물이란 뜻의 ‘방물(方物)’이라고 쓴 것 등이 그것이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일본이 명나라를 공격하겠다면서 조선이 군사를 내어 도우라는 구절이었다. 『국조보감』은 김성일이 겐소(玄蘇)에게 강하게 항의해 몇 구절을 고쳤다고 전하면서 “황윤길 등은 ‘겐소가 그 뜻을 달리 해석하는데 굳이 서로 버티면서 오래 지체할 것이 없다. 빨리 돌아가자’고 말했다”고 덧붙이고 있다. 두 사람은 사행(使行) 기간 내내 서로 다투었다.

 

황윤길이 무기(武氣)가 충만한 일본의 숭무(崇武) 분위기에 겁을 먹었다면, 김성일은 오랑캐의 허풍에 지나지 않는다고 얕보았다. 두 사람은 선조 24년(1591) 정월 귀국하는데 황윤길이 도요토미에 대해 “눈빛이 반짝반짝하여 담과 지략이 있는 사람인 듯하였습니다”고 보고한 반면, 김성일은 “그의 눈은 쥐와 같았는데 두려워할 위인이 못 됩니다”고 달리 보고했다.

『국조보감』은 “김성일이 일본에 갔을 때 황윤길 등이 겁에 질려 체모를 잃은 것에 분개하여 말마다 이렇게 서로 다르게 말한 것이다”고 설명하고 있다. 보고 내용이 상반될 경우 정사(正使)의 말을 따르는 것이 원칙이지만 집권 동인은 반대 당파의 말이라고 무시했다.

 

도요토미의 국서에도 명나라를 공격하겠다고 적혀 있었다. 게다가 통신사가 귀국할 때 소 요시토시(宗義智) 등이 회례사(回禮使)로 따라왔는데 이들도 ‘내년(임진년)에 침략하겠다’고 공언했다.

 

『선조수정실록』 24년(1591) 3월조는 일본 회례사를 만난 선위사(宣慰使) 오억령(吳億齡)이 “내년에 (조선의) 길을 빌려 상국(上國)을 침범할 것이다”는 회례사의 발언을 보고했다고 적고 있다. 그러자 조정은 ‘인심을 소란시킨다’면서 오억령을 심희수(沈喜壽)로 갈아치웠다. 자신이 들은 정보를 사실대로 보고했다고 선위사를 갈아치운 것이다. 조선 지배층은 일본이 쳐들어올 것이라고 믿고 싶지 않았다. 머릿속의 상상과 다른 현실을 인정하기를 거부했다.

그러나 국왕 선조는 침략 경고를 마냥 무시할 수 없었다.

 

류성룡은 『징비록』에서 “이때 왜가 침범하리라는 소리가 날로 급해졌으므로 임금이 비변사에 명령해 각기 장수가 될 만한 인재를 천거하라고 하셨다”고 적고 있다. 선조는 전쟁 대비에 나섰던 것이다. 이때 이순신을 천거한 류성룡은 “이순신이 드디어 정읍 현감에서 전라좌수사(水使)로 발탁되었다고 적고 있다.

 

이때가 선조 24년(1591) 2월인데, 이순신의 발탁에 대해 사간원은 “관작의 남용이 이보다 심할 수 없다”며 강하게 반대했다. 선조는 “이러한 때에 상규(常規)에 얽매일 수 없다. 더 이상 그의 마음을 흔들지 말라”고 막아 주었다. 『선조수정실록』 25년(1592) 2월 1일자는 “대장 신립(申砬)과 이일(李鎰)을 여러 도에 보내 병비(兵備)를 순시하도록 하였다”고 전하는데 이 역시 선조가 전쟁 대비책을 지시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류성룡은 『징비록』에서 신립이 4월 초하루에 사제(私第:집)로 찾아왔기에 “머지않아 변고가 있으면 공이 마땅히 이 일을 맡아야 할 터인데, 공의 생각에는 오늘날 적의 형세로 보아 그 방비의 어렵고 쉬움이 어떠하겠는가”라고 묻자 신립이 “그것은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고 대답했다고 적고 있다. 이때가 임란 발발 열이틀 전이었다.

류성룡이 “지금은 왜적이 조총(鳥銃)과 같은 장기(長技)까지 있으니 가벼이 볼 수는 없을 것이요”라고 거듭 말하자 신립은 “비록 조총이 있다 해도 어찌 쏠 때마다 다 맞힐 수가 있겠습니까”라고 일축했다
.

 

서생은 변방에 근무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문신, 쳐들어와도 아무 걱정 없다고 호언하는 무신, 쳐들어오지 않으리라는 머릿속의 상상을 현실로 여기는 사대부가 지배하는 나라에 도요토미는 자신의 공언대로 400여 척의 배를 띄워 보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사라진 나라, 백성들도 버렸다

국란을 겪은 임금들 선조④ ‘요동 파천’ 논란

| 제109호 | 20090411 입력

 

지배층이 피지배층의 신뢰를 받는 방법은 간단하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에 앞장서는 것이다. 로마의 파비우스 가문처럼 어린 후계자만을 남기고 모두 목숨을 바치는 가문을 어찌 백성들이 존경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조선의 사대부는 자기 희생은 커녕 군역(軍役)을 합법적으로 면제받았다. 지배층이 군대에 가지 않는 나라의 피지배층이 전쟁 때 종군할 이유가 없음은 물론이다.
동래부순절도 : 동래부사 송상현은 명나라로 가는 길을 빌려달라는 일본군의 요청을 거부하고 결사 항전을 하다 성민(城民)들과 함께 전사했다. <육군박물관 소장> 사진 권태균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군사체제는 제승방략(制勝方略) 체제였다. 외침(外侵)이 있을 경우 수령들은 군사를 이끌고 배정된 지역으로 가서 대기하다가 조정에서 파견되는 경장(京將)의 지휘를 받아 싸우는 제도였다. 군사를 총 집결시켰다가 경장의 지휘로 단번에 적을 섬멸하려는 계책이지만 반대로 패전하면 더 이상 대책이 없다는 결점이 있었다.

이런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임란 6개월 전인 선조 24년(1591) 10월 좌의정 류성룡은 진관제(鎭管制)로 바꾸자고 건의했다. 류성룡은 진관제에 대해 “앞뒤가 서로 응하고 안팎이 서로 보완되어 ‘토붕와해(土崩瓦解)’의 지경에 이르지는 않는다(『선조수정실록』 24년 10월 1일)”고 말했다.

 

진관제는 감사와 병사가 주재하는 주진(主鎭), 첨절제사(僉節制使)가 주관하는 거진(巨鎭), 고을 수령이 관할하는 제진(諸鎭)으로 나누고, 몇 개의 제진이 거진을 중심으로 자전자수(自戰自守)하는 체제다.

 

제승방략처럼 일거에 적을 섬멸하지는 못해도 한 진관이 무너져도 다른 진관이 방어하기에 일거에 무너지지 않는 장점이 있었다.

그러나 『선조수정실록』은 경상감사 김수(金<775F>)가 ‘제승방략이 시행된 지 이미 오래되었으므로 갑자기 변경시킬 수 없다’고 반대해 채택되지 않았다고 적고 있다. 기존 체제에 대한 모든 변화가 거부되는 상황에서 선조 25년(1592) 4월 13일 새벽 400여 척의 적선(賊船)이 부산 앞바다에 나타났다. 『선조수정실록』은 “병사(兵使)가 ‘적의 배가 400척이 채 못 되는데 한 척의 인원이 수십 명에 불과하니 대략 계산하면 약 만 명쯤 될 것입니다’라고 장계했고 조정에서도 그렇게 여겼다”고 전한다.

 

중종 때의 삼포왜변(1510)이나 명종 때의 을묘왜변(1555)보다 조금 큰 국지전으로 여겼다는 뜻이다.

그러나 일본군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1군 1만8000,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2군 2만2000,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의 3군 1만1000 명 등 도합 16만8000여 명의 대군이었다.

 

4월 14일 부산진성의 수군첨절제사 정발(鄭撥)은 1000여 명에 불과한 병력으로 고니시 유키나가의 대군을 맞아 싸우다가 전사하고 성은 함락되었다. 인근 다대포진도 첨사 윤흥신(尹興信)이 전사하면서 함락되었고, 이튿날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도 정명가도(征明假道: 명나라를 칠 길을 빌리는 것)를 요구하는 고니시에게 “싸워서 죽기는 쉬워도 길을 내주기는 어렵다”면서 결사항전하다가 전사했다.

조선 수군이 훈련하는 장면을 그린 수군조련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선조는 류성룡을 도체찰사(都體察使)로 삼고 그의 천거로 신립(申砬)을 삼도순변사(三道巡邊使)로 삼았다.

 

선조는 신립에게 보검(寶劍)을 하사하며 “누구든지 명을 듣지 않는 자는 모두 처단하라”고 격려했지만

 

류성룡이 『징비록』에서 “신립이 대궐 문 밖에 나가서 직접 무사를 모집했으나 따라가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없었다”라고 전하는 대로 군사도 없었다.

 

중종 때 군적수포제(軍籍收布制)가 실시되면서 양반 사대부들은 군포 납부 대상에서 제외되고 일반 백성들만 납부의 의무를 지게 된 것이 주요인이었다.

 

지배층의 군역이 면제된 판국에 피지배층이 목숨 걸고 체제를 위해 싸울 이유가 없었다.

『선조수정실록』은 류성룡이 모집한 장사(壯士) 8000명을 신립에게 소속시켜 떠나게 했다”고 적고 있는데, 이렇게 급모한 군사들이 조선 병력의 전부였다. 고니시의 1군과 가토의 2군은 서울을 먼저 점령하기 위해 지름길인 새재(鳥嶺)로 모여들었다.

조선에는 좋은 기회였으나 『선조실록』은 “제장(諸將)들이 모두 새재의 험준함을 근거로 적의 진격을 막자고 했으나 신립은 따르지 않고 들판에서 싸우려고 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신립은 기병(騎兵)의 장점을 살리기 위해 들판을 전지(戰地)로 택한 것인데 4월 27일 탄금대에서 일본군의 공세를 네 차례나 격퇴했으나 끝내 패전하고 자결했다. 충주에 무혈 입성한 고니시와 가토는 서울 진공 계획을 짰다.

『선조실록』 25년 4월 28일자는 “충주에서 패전 보고가 이르자 상이 대신과 대간을 불러 입대케 하고 비로소 파천(播遷: 임금의 피란)에 대한 말을 발의하였다”라고 전한다.

 

패전 보고를 받고 패닉 상태에 빠진 선조가 가장 먼저 도주를 계획했다는 뜻이다.

 

대신들이 반대하는 가운데 우승지 신잡(申<78FC>)은 8순 노모가 있다면서 “종묘의 대문 밖에서 스스로 자결할지언정 감히 전하의 뒤를 따르지 못하겠습니다”라고 반대했고, 홍문관 수찬(修撰) 박동현(朴東賢)은 “전하의 연(輦)을 멘 인부도 길모퉁이에 연을 버려둔 채 달아날 것입니다”라면서 통곡했다. 그러자 얼굴빛이 변한 선조는 내전으로 들어갔다. 이때부터 선조의 존재 자체가 임란 극복의 걸림돌이 되었다.

선조의 파천 발언이 알려지자 도성에는 큰 소동이 일었다
. 선조는 “마땅히 경들과 더불어 목숨을 바칠 것이다”라고 진정시켰지만 박동량(朴東亮)은 『기재사초(寄齋史草)』에서 “궁중에서는 몰래 짐을 꾸리면서 외부 사람은 알지 못하게 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모두가 도성 결전을 주창하는 가운데 영의정 이산해가 “예전에도 파천한 사례가 있다”고 파천을 지지하고 나섰다.

 

『선조실록』은 “모두 웅성거리면서 (파천의) 죄를 산해에게 돌렸다”고 적고 있는데 선조는 이산해의 찬성을 근거로 파천을 결정했다. 대신과 승지들이 빨리 세자를 세워 대비해야 한다고 건의했지만 권력이 약화될 것을 우려해 망설이던 선조는 겨우 광해군을 세자로 세우는 데 찬성했다.

선조 일행은 4월 30일 새벽 비가 쏟아지는 궁궐을 나섰다. 그날 『선조실록』은 “점심을 벽제관(碧蹄館)에서 먹는데 왕과 왕비의 반찬은 겨우 준비되었으나 동궁은 반찬도 없었다”라고 전하고,

 

윤국형(尹國馨)은 『문소만록(聞韶漫錄)』에서 “저물어서 동파역(東坡驛)에 이르니 밤비가 죽죽 내리는데, 사람들이 모두 굶고 잤다. 임금이 드실 음식도 난리를 일으킨 군사들(亂卒)에게 빼앗겼다”라고 전하고 있다. 정상적인 국가체제는 이미 붕괴한 것이었다.

더 큰 문제는 백성들의 동향이었다. 류성룡은 ‘전쟁 후의 일을 기록하다(記亂後事)’라는 글에서

 

“거가(車駕: 임금의 수레)가 도성을 나서자 난민들이 먼저 장예원과 형조에 불을 질렀는데, 이 두 부서는 공사(公私) 노비들의 문서가 있는 곳이다”라고 전하고 있고, 『임진록』도 같은 내용을 전한다.

 

류성룡은 “(백성들이) 또 내탕고(內帑庫: 왕실 재산 관리하던 곳)에 들어가 금백(金帛)을 약탈했고 경복궁·창덕궁·창경궁도 불태워 남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면서 “다 적이 이르기 전에 우리 백성들이 불태운 것이다”라고 전하고 있다.

 

류성룡은 “처음 일본군이 입성했을 때는 서울 백성들이 다 도주했으나 오래지 않아 차차 돌아와 마을과 시장이 가득 차서 적(賊)과 서로 섞여서 장사했다”면서 “적이 성문을 지키면서 우리 백성들에게 적첩(賊帖)을 휴대하게 하고 출입을 금하지 않았다”라고 전해 준다. 백성들이 일본이 발행한 새 신분증을 가지고 살아갔다는 뜻이다.

순자(荀子)』 ‘왕제(王制)’편의 “전(傳)에 이르기를, ‘임금은 배요, 백성은 물이다. 물은 배를 띄우기도 하지만 뒤엎기도 한다(君者, 舟也, 庶人者, 水也. 水則載舟, 水則覆舟)”는 말이 현실이 된 것이었다.

나라를 가장 먼저 포기한 인물은 다름 아닌 선조였다
. 『선조수정실록』 25년 5월 1일자는 선조가 아침에 동파관(東坡館)에서 이산해와 류성룡을 불러 손으로 가슴을 두드리며 “이모(李某: 이산해)야 류모(柳某: 류성룡)야! 일이 여기에 이르렀으니 내가 어디로 가야 하겠는가? 꺼리거나 숨기지 말고 마음속의 말을 다 말하라”고 울부짖었다고 전한다. 이는 치밀한 계산 끝에 나온 행위이자 발언이었다. ‘어디’가 압록강 건너 요동을 뜻하기 때문이다.

 

도승지 이항복은 ‘팔도가 모두 함락된다면 명나라로 가서 호소할 수 있다’고 제안했고, 윤두수는 ‘지세가 험한 함경도로 가야 한다’라고 말했으나 선조의 뜻은 곧바로 요동으로 도주하는 데 있었다.

이때 좌의정 류성룡이 “안 됩니다. 대가(大駕)가 우리 국토 밖으로 한 걸음만 떠나면, 조선은 우리 것이 아니게 됩니다(朝鮮非我有也: 『선조수정실록』 25년 5월 1일)”라며 월경(越境)을 반대했다.

 

선조가 내부(內附)하는 것이 본래 나의 뜻이다”라고 말했으나 류성룡은 거듭 안 된다고 반대했다.

내부란 명나라로 도주해 붙겠다는 뜻이었다. 백성은 도성에 불을 지르고 국왕은 도주에 가장 큰 뜻이 있는 조선은 망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밑바닥에서 회생의 싹이 트고 있었다.


신분·조세제도 개혁, 民草들이 전쟁에 나서다

국란을 겪은 임금들 선조⑤ 免賤·作米法

| 제110호 | 20090419 입력

 

위기를 극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민심을 얻는 것이다. 민심 획득의 요체는 차별적이고 불평등한 제도와 관습의 개혁이다. 조선은 신분제와 조세제도의 모순 때문에 백성의 버림을 받았다. 이 구조적 모순을 해결하지 못하면 조선은 멸망할 것이었다.

 

류성룡이 제정한 면천법작미법으로 백성의 마음이 돌아오면서 조선은 바닥에서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다.

 

깊은 시름 하던 차에(95Χ140㎝) 이순신 장군은 한산대첩에서 일본 수군의 주력 115척을 궤멸시켜 ‘조선 회생’의 계기를 마련했다. 그 덕택에 곡창 지대인 호남을 확보하게 돼 일본군은 멀리 본토에서 군량을 조달해야 하는 고달픈 상황에 빠졌다. 우승우(한국화가)
신립의 패전은 조선 정규군의 붕괴를 뜻했다.

 

임진왜란의 생존자인 박동량(朴東亮)은 『기재사초(寄齋史草)』에서 “처음 임금이 서울을 떠날 적에 선비와 서민이 모두 나라의 형세가 반드시 떨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할 뿐 아니라 유식한 벼슬아치들도 결국은 멸망하고 말 것이라 생각했다. 인심이 이미 떠나 버려 모두 책망할 수 없었다”고 전하고 있다.

이런 조선이 어떻게 16만 명의 전문 싸움꾼으로 구성된 일본군을 물리칠 수 있었을까
?

 

크게 세 가지 배경이 있다.

 

의병 봉기이순신을 필두로 한 조선 수군의 분전, 그리고 명군(明軍)의 참전이다.

 

선조 일행이 도성을 버리고 북상하자 궁궐을 불태웠던 백성이 어떻게 의병이 될 수 있었을까?

 

선조는 오직 압록강을 도강해 중국으로 건너가기에 부심했다.

 

재위 25년(1592) 5월 3일 윤두수가 “성상께서 요동으로 건너가실 계획을 세우지 않으신다면 신들이 어찌 감히 치첩(雉堞:성가퀴)을 지키지 않겠습니까?”라고 말하자

 

선조는 “여기서 용천(龍川:압록강 부근)이 얼마나 남았는가?”라고 답했다. 선조는 망명 이외에는 관심이 없었다.

 

영의정 최흥원이 “요동으로 들어갔다가 명에서 허락하지 않으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말하자 선조는 “아무리 그렇더라도 나는 반드시 압록강을 건너갈 것이다”(『선조실록』 25년 6월 13일)라고 답했다.

선조는 그해 5월 윤두수에게 “적병이 얼마나 되던가? 절반은 우리나라 사람이라고 하던데 사실인가?”라고도 물었다. 조선 백성이 대거 일본군에 가담했다는 정보가 횡행했다.

 

류성룡은 『징비록』에서 “임금의 행차가 평양을 떠나온 후로는 인심이 무너져 지나는 곳마다 난민이 곧바로 창고에 들어가 곡물을 약탈했다”고 전한다. 백성은 선조와 사대부에게 파산선고를 내렸다. 이런 상태에서 선조 25년 6월 평양성이 함락되면서 조선은 곧 멸망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다음 달 이순신이 한산도에서 와키사카 야스하루(脇坂安治)와 구키 요시타가(九鬼嘉隆)가 이끄는 115척에 달하는 일본 수군의 주력을 궤멸시키면서 회생의 전기를 마련했다. 이로써 곡창지대인 호남이 안전하게 됨으로써 일본군은 본토에서 직접 군량을 조달해야 하는 상황에 봉착했다

 

 
 
충청남도 아산시 현충사에서 보관하고 있는 충무공 이순신장군의 유품 가운데

 

전쟁 중에서 직접 사용했던 장검이다.

 

이 장검은 길이 197.5㎝로 손잡이에는 남색의 천을 十자로 감고,칼날끝에 덩굴 무늬를 새겼다.

 

칼등에는 홈이 파여있고, 손잡이는 두손으로 잡을수 있게 매우 길
약간 휘어져 있다.

 

칼집 끝에는 은으로 만든 장식이 있고 끈이 달려 있다.

 

 

특히 칼날에는

 

三尺誓天 山河動色(삼척서천 산하동색)

 

'석자 되는 칼로 하늘에 맹세하니 산과물이 떨고'

 

一揮掃蕩 血染山河
(일휘소탕 혈염산하)

 

'한번 휘둘러 쓸어버리니 피가 강산을 물들인다" 라는 글씨를 새겨 그의 다짐을 다졌다

 

한 이 칼은 당시의 명수로 이름난 태귀련이무생에 의해 임진왜란 중인

1594년 만들어진 것임을 검신(劍身)에 새긴 글을 통해 알 수있다.

이 칼은 임진왜란 중에 사용하던 것으로 장군다운 위풍이 서려있는 유물이다.

 

 

선조 26년(1593) 1월에는 명장(明將) 이여송(李如松)이 조명(朝明) 연합군을 이끌고 평양성을 탈환했다. 이여송은 벽제관(碧蹄館)에서 패전하는 바람에 기세가 곧 꺾였으나 전황은 달라졌고 선조도 그해 10월 서울로 되돌아올 수 있었다.

이런 전세의 역전에 중요한 계기를 마련한 것은 의병들이었다. 의병 기의(起義)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사림의 솔선수범이고 다른 하나는 영의정 겸 도체찰사 류성룡이 주도한 개혁 입법이었다.

 

임란 이후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킨 인물은 의령(宜寧) 유생 곽재우(郭再祐)였다. 정인홍(鄭仁弘)·김면(金沔) 등도 곧 군사를 일으켰는데 이들은 모두 남명 조식(曺植)의 제자들이었다.

 

곽재우의 의병은 2000명, 정인홍은 3000명, 김면은 5000명으로 경상우도의 의병만 1만 명에 달했다. 의병을 일으킨 사림들은 먼저 사재를 털어 무기와 식량을 마련하고 의병소(義兵所) 또는 의진소(義陣所)·의승소(義勝所)라고도 불렸던 지휘부를 구성해 체계를 마련했다.

정인홍과 김면 휘하에서 활동했던 정경운(鄭慶雲)의 『고대일록(孤臺日錄)』은
온 경내(境內) 사자(士者)들이 모여 거사를 의논했다…경내 인민을 모두 계산해 그 요부(饒富:부유함) 정도에 따라 군자(軍資)를 내게 했다”고 전하고 있다. 사대부의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살아나면서 의병이 모이기 시작했다.

 

여기에 류성룡은 개혁 입법으로 의병 활동을 북돋웠다. 류성룡은 ‘함경도 감사와 병사에게 지시하는 공문’에서 출신(出身:과거 급제 후 출사하지 못한 사람)·양반(兩班)·서얼(庶孼)·향리(鄕吏)·공천(公賤)·사천(私賤)을 논할 것 없이 군사가 될 만한 장정은 사목(事目:규칙)에 의거하여 모두 대오(隊伍:군대)로 편성하라고 명했는데 과거 군역에서 면제되었던 양반들도 속오군(束伍軍)에 편입시켰다.

양반의 종군(從軍)은 당연한 의무였지만 천인의 종군에는 대가가 따라야 했다. 그래서 만든 법이 면천법(免賤法)이다. 공사(公私) 천인(賤人)도 군공(軍功)을 세우면 양인(良人)으로 속량시켜 주고 벼슬까지 주는 법이었다.

 

류성룡은 ‘정병을 선발해 훗날을 도모하기를 바라는 서장(乞抄擇精兵以爲後圖狀)’에서 “공사 천인·아전(衙前)·서자(庶子) 할 것 없이 모두 정밀하게 뽑고…그중에서 기능과 용맹이 출중한 사람은 군공을 따져 벼슬을 주어야 합니다”고 말했다. 이제 천인도 군공을 세우면 양반이 될 수 있었다.

류성룡이 직접 작성한 『진관관병편오책(鎭管官兵編伍冊)』에는 노비 출신이 하급 간부인 대총(隊總)까지 오른 경우가 눈에 많이 띈다. 우영장군자주부(右營將軍資主簿) 최준(崔浚) 휘하의 1기총 박덕남(朴德男) 산하의 3개 대총 중 2대총 송이(松伊)3대총 춘복(春卜)모두 종(奴) 출신이었다. 1대총 산하 11명 중 종 출신이 8명이었고, 2대총은 6명, 3대총은 8명이었다. 33명의 병사 중 종 출신이 무려 22명이었던 것이다.

 

노비가 대거 종군하게 된 것은 면천법 덕분이었다. 군공청(軍功廳)은 “공사 천인이 적의 머리를 1급(級) 참수(斬首:목을 벰)하면 면천, 2급이면 우림위(羽林衛:국왕 호위 무사) 배속, 3급이면 허통(許通:벼슬 시키는 것), 4급이면 수문장(守門將:4품관)을 제수하자”고 제안하면서 “이미 허통되어 직이 제수되었으면 사족(士族)과 다름없어야 마땅합니다”고 말했다. 노비 종군이 나쁠 것이 없었으므로 선조도 지지했다.

 

실제로 조령의 의병이었던 천인 신충원(辛忠元)이 군공으로 수문장에 임명된 것처럼 신분 상승이 잇따랐다. 물론 반발도 적지 않았다.

류성룡은 시험을 거쳐 뽑는 유급 상비군인 훈련도감(訓鍊都監)을 만들었는데 노비가 대거 지원했다. 선조는 재위 27년 2월 “적이 물러간 다음 그 주인이 찾아간다면 훈련도감의 호령도 시행되지 않을 것이다”고 말했다. 류성룡은 “적이 물러간 뒤를 기다릴 것도 없이 지금도 그러합니다…지금은 처첩(妻妾)까지도 항오(行伍:군대)에 편입해야 할 때입니다…지금이 어느 때인데 감히 노주(奴主)를 따지겠습니까”라고 분개했다.

 

『선조실록』 27년 5월 8일에는 “적을 참수한 수급이 10∼20급에 이르는 경우가 있는데 사목대로 논상한다면 사노 같은 천인도 반드시 동반(東班:문관)의 정직(正職)에 붙여진 뒤에 그만두어야 하니 관작(官爵)의 외람됨이 이보다 더 심한 경우가 없습니다”는 반대도 있었지만 일본군 격퇴가 최우선 과제였던 선조는 류성룡의 의견대로 면천법을 고수했다.

류성룡은 조세제도 역시 혁명적으로 개혁했다
. 류성룡은 ‘시무를 아뢰는 차자’에서 “난리를 다스려 바름으로 돌아가는 것이 비록 군사와 군량이 넉넉한 데 있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민심을 얻는 데 있다고 합니다. 민심을 얻는 근본은 달리 구할 수 없고 다만 요역과 부세를 가볍게 해 함께 휴식할 뿐입니다”고 말했다.

 

류성룡이 주장하는 혁명적 세제 개혁안이 훗날 대동법(大同法)이라고 불렸던 작미법(作米法)이었다. 가난한 사람이 거꾸로 많이 납부하고 부유한 사람이 적게 납부하던 공납(貢納)의 폐단을 조세 정의에 맞게 개혁한 법이 작미법이다. 부과 기준을 호(戶)에서 농지 소유의 다과(多寡)로 바꾸어 부유한 사람이 더 많은 조세를 부담하게 한 법이다.

 

이는 조광조·이이 같은 개혁 정치가들의 단골 주장이었으나 양반 사대부의 반대로 번번이 무산되었던 법이었다.

작미법이 실시되면서 땅이 없는 가난한 백성은 공납의 부담에서 해방되었으니 위화도 회군 직후 단행했던 과전법(科田法) 이래 최대의 개혁 입법이었다. 당연히 반대가 잇따랐다. 류성룡이 ‘공납을 쌀로 대신하는 헌의(貢物作米議)’에서 감사(監司)·병사(兵使)·지방관·아전·부호가 모두 반대한다고 말한 것처럼 모든 벼슬아치가 반대했다. 심지어 이들은 백성이 불편하게 여긴다는 핑계까지 댔는데 류성룡은 “백성이 불편하게 여긴다는 말은 이들 힘 있는 백성에게서 나온 것”이라고 갈파했다.

 

류성룡은 이런 개혁 입법들이 아니면 조선을 회생시킬 수 없다고 판단했다. 과연 면천법으로 노비를 의병으로 끌어들이고, 작미법으로 가난한 백성의 처지를 헤아리면서 조선은 회생하고 있었다.

 

그러자 선조의 마음이 다시 달라지기 시작했다.

 


전쟁 끝나자 도로 ‘특권만 있고 의무는 없는’ 양반 천국

국란을 겪은 임금들 선조⑥ 지배층의 변심

| 제111호 | 20090425 입력

 

모든 위기는 기회를 수반한다. 임진왜란도 마찬가지였다. 민심이 이반된 조선은 망국의 위기에 몰렸다가 면천법·속오군 같은 개혁 입법으로 회생했다. 그러나 종전(終戰)이 다가오자 선조와 사대부의 마음은 달라졌다. 전시의 개혁입법들이 무력화되면서 나라는 껍데기만 남게 되었다.

임란은 우리에게 위기를 기회로 전환시킬 자세가 되어 있느냐고 묻고 있는 듯하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선조 37년(1604) 류성룡에게 내려진 호성공신 녹권. 일등공신에 이항복·정권수 이름이 보인다. 이항복은 도승지로서 선조를 수행했고, 정권수는 명나라 사신으로 가 명군 파병을 성사시킨 공을 인정받았다. 류성룡은 이등공신에 책봉됐으나 이를 사양하면서 국가에서 화원(畵員)을 보내 초상화를 그려 준다는 것도 거부했다(경북 안동 하회마을 충효당 소장). 사진가 권태균
임란은 큰 고통이었지만 동시에 기회이기도 했다. 백성은 ‘특권만 있고 의무는 없는’ 사대부 지배체제에 파산선고를 내렸다.

 

그러나 선조 26년(1593) 10월 영의정으로 복귀한 류성룡이 노비들도 군공을 세우면 벼슬을 주는 면천법(免賤法), 토지 소유의 많고 적음에 따라 세금을 납부하는 작미법(作米法), 양반도 노비들과 함께 군역에 편입시킨 속오군(束伍軍) 제도 같은 개혁입법들을 강행하면서 회생의 전기가 마련되었다.

신분제의 완화 내지 철폐는 궁궐을 불태웠던 백성이 희구하는 것이었다
. 이런 방향성이 견지된다면 임란은 조선에 되레 기회가 될 수 있었다. 선조도 국망이 목전에 다가왔던 임란 초에는 개혁입법들을 지지했다. 그러나 전쟁이 소강상태에 빠지자 생각이 달라졌다. 먼저 ‘전쟁영웅 제거’가 시작되었다.

 

그 희생양이 육전의 영웅 광산김씨 31世 김덕령(金德齡)이었다.

 

조선왕조 타도를 기치로 봉기한 이몽학(李夢鶴)과 연루됐다는 혐의를 받았으나 ‘김덕령이 가담했다’는 이몽학의 일방적 선전 외에는 아무 증거가 없었다.

 

그러나 김덕령에 대한 예단을 지닌 선조는 “김덕령은 사람을 죽인 것이 많은데 그 죄로도 죽어야 한다”면서 직접 친국했다. 광산김씨 31世 김덕령은 선조 29년(1596) 8월 6차에 걸친 혹독한 형장(刑杖)을 당하고 세상을 떠났다.

『선조수정실록』은 소문을 들은 남도(南道)의 군민(軍民)들이 원통하게 여겼다’며 “이때부터 남쪽 사민(士民)들은 김덕령의 일을 경계하여 용력(勇力)이 있는 자는 모두 숨어 버리고 다시는 의병을 일으키지 않았다”(29년 8월 1일)고 적고 있다.

 

5000 의병을 거느렸던 김덕령의 죽음이 물의를 일으키자 선조는 “들으니 그의 군사는 원래 수십 명에 지나지 않는다”고 폄하했다
.

육전 영웅 김덕령 죽이기는 수전 영웅 이순신 제거 작전과 동시에 진행되었다.

 

김덕령이 체포되기 한 달 전쯤 선조는 “이순신은 처음에는 힘껏 싸웠으나 그 뒤에는 작은 적일지라도 잡는 데 성실하지 않았고, 또 군사를 일으켜 적을 토벌하는 일이 없으므로 내가 늘 의심하였다”(『선조실록』 29년 6월 26일)고 비판했다.

 

남인 류성룡천거한 것을 부정적으로 보던 좌의정 김응남(金應南), 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 윤근수(尹根壽) 등 서인선조의 이순신 비난에 적극 동조했다.

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에 있는 충장사의 김덕령 충효비.

김덕령은 현종 때 신원됐으며 비각은 정조 때 세워진 것이다(왼쪽 사진).

충장사에 있는 김덕령의 친필.

거제도에 있는 적의 간계에 속지 말자는 것과 둔전 개발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오른쪽 사진).사진가 권태균

선조가 요동 망명을 포기한 것은 일본군과 싸우기로 생각을 바꾸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명나라에서 내부(內附)를 청한 자문(咨文)을 보고 ‘본국(本國:선조)을 관전보(寬奠堡)의 빈 관아에 두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임금이 비로소 의주에 오래 머물 계획을 세웠다”(『선조실록』 25년 6월 26일)는 기록처럼 명나라에서 선조를 요동의 빈 관아에 유폐시키려 했기 때문이다.

 

요동에서 비빈(妃嬪)들을 거느리며 제후 행세를 하려던 계획이 틀어지자 선조는 망명을 포기했다.

이순신 제거 작전이 진행되는 가운데 한반도 남부 일대를 점령한 일본과 명(明) 사이의 강화협상이 전개되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명나라 사신 이종성(李宗城)에게 조선 남부 4도(道)를 떼어 달라는 ‘할지(割地)’와 명나라 공주를 후비(后妃)로 달라는 ‘납녀(納女)’ 등을 요구해 협상은 결렬되었다.

도요토미는 선조 30년(1597) 정월 다시 대군을 보내 정유재란을 일으켰다.

 

정유재란의 승패가 이순신 제거에 달렸다고 판단한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는 간자(間者:간첩) 요시라(要時羅)에게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어느 날 바다를 건널 것’이라는 역정보를 조선에 제공하게 했다. 유인책으로 간주한 이순신이 움직이지 않자 선조와 서인은 이순신 제거의 기회로 삼았다.

 

선조는 “이순신을 조금도 용서할 수가 없다. 무신이 조정을 가볍게 여기는 습성을 다스리지 않을 수 없다”면서 이순신을 압송해 형문(刑問)하게 하고 원균에게 삼도수군통제사를 대신하게 했다.

 

선조는 우부승지 김홍미(金弘微)에게 비망기(備忘記)를 내려 이순신이 ‘무군지죄(無君之罪:역적죄)’ ‘부국지죄(負國之罪:국가 반역죄)’ ‘함인지죄(陷人之罪:남(원균)을 함정에 빠트린 죄)’를 저질렀다면서 “이렇게 많은 죄가 있으면 용서할 수 없는 법이니 마땅히 율(律)에 따라 죽여야 할 것이다”(『선조실록』30년 3월 13일)고 말했다.

27일 동안 혹독한 고문을 받던 이순신은 류성룡과 정탁(鄭琢) 등의 구원으로 겨우 목숨을 건지고 백의종군에 처해졌다.

 

원균은 선조 30년(1597) 6월과 7월 한산도와 칠천도(七川島)에서 거듭 대패해 조선 수군은 궤멸되고 그 자신도 전사했다.

 

선조는 할 수 없이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삼았으나 수군은 끝났다고 생각하고 수군 해체령을 내리고 이순신을 육군으로 발령했다.

 

『이충무공 행록(行錄)』은 이때 이순신이 “신에게는 아직도 12척의 전선이 있으니 사력을 다해 싸우면 적의 진격을 저지할 수 있습니다(今臣戰船尙有十二, 出死力拒戰, 則猶可爲也)… 설령 전선 수가 적다 해도 미신(微臣:미천한 신하)이 아직 죽지 않았으니 적이 감히 모멸하지는 못할 것입니다(微臣不死, 則賊不敢侮我矣)”라고 장계했다고 전한다.

정유재란도 처음에는 임란 초기처럼 일본군의 우세로 전개되었다.

 

그러나 충청도 직산에서 명군이 일본군의 북상을 저지하고 이순신이 명량해전에서 제해권을 되찾으면서 다시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선조 31년(1598) 8월 18일 도요토미가 병사하자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마에다 도시이에(前田利家) 등 이른바 사대로(四大老)는 8월 28일과 9월 5일 조선 출병군의 철수를 명령했다.

이렇게 종전이 기정사실화되자 다시 전쟁영웅 제거 작전이 개시되었다
.

 

이번 대상은 남인 류성룡이었다.

 

선조 31년(1598) 9월 말께부터 류성룡에 대한 공격이 개시되는데, 남이공(南以恭)은 “(류성룡이) 속오(束伍)·작미(作米)법을 만들고…서예(庶<96B8>)의 천한 신분을 발탁했습니다”고 비난했다. 양반의 특권을 크게 제한한 류성룡의 전시 개혁입법을 폐지하고 ‘특권만 있고 의무는 없는’ 양반 사대부의 천국으로 되돌아가기 위한 공세였다.

선조는 몇 번 반대의 제스처를 취한 후 류성룡을 버리는데,

 

그가 파직된 선조 31년(1598) 11월 19일은 이순신이 마지막 해전인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날이었다
.

 

『 서애선생 연보』는 통제사 이순신은 선생(류성룡)이 논핵되었다는 말을 듣고 실성한 듯 ‘시국 일이 한결같이 이 지경에 이르는가’라고 크게 탄식했다”고 전한다. 의병장 조경남(趙慶男)은 『난중잡록』에서 노량해전 때 ‘이순신은 친히 북채를 들고 함대의 선두에서 적을 추격했고, 적은 선미에 엎드려 일제히 공(公)을 향해 총을 쏘았다’고 이순신이 스스로 죽음으로 나아간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 이순신은 류성룡의 실각이 뜻하는 바를 잘 알고 있었다.

 

좌의정 이덕형이 “왜적이 대패하여 물에 빠져 죽은 자는 이루 헤아릴 수 없다”고 노량해전의 전과를 보고하자, 선조는 “수병(水兵)이 대첩을 거두었다는 설은 과장인 듯하다”고 제동을 걸었다.

선조는 이순신의 전사를 애석해하지 않았다
. 이렇게 이순신의 전사와 함께 7년 전쟁은 사실상 종결되었다. 당연히 전공자 포상이 뒤따라야 했다.

 

그러나 선조는 명나라 제독 유정(劉綎)에게 “우리나라가 보전된 것은 순전히 모두 대인(유정)의 공덕입니다”(『선조실록』32년 2월 2일)면서 임란 극복이 명나라 덕이라는 궤변을 만들어냈다. 선조는 36년(1603) 4월에는 “이제는 마땅히 군공청(軍功廳)을 혁파하여 쓸데없는 관원을 한 명이라도 덜어야 할 것이다”고 말해 논공행상 자체에 불만을 토로했다.

선조 37년(1604)에야 우여곡절 끝에 겨우 공신이 책봉되는데 문신들인 호성(扈聖)공신이 86명인 데 비해 일본군과 직접 싸운 무신들인 선무(宣武)공신은 18명에 불과했다
.

 

호성공신 중에선 내시(內侍)가 24명이고 선조의 말을 관리했던 이마(理馬)가 6명이나 되었다. 선무 1등인 이순신·권율·원균은 모두 사망한 장수들이었는데 당초 2등으로 의정되었던 원균은 선조의 명령으로 1등으로 올라갔다. 선조는 류성룡의 정적이던 서인·북인과 손잡고 류성룡의 전시 개혁입법을 모두 무력화했다.

 

이렇게 조선은 다시 전란 전으로 회귀했다.

임란에서 아무런 교훈을 얻지 못한 조선은 멸망했어야 하지만 성리학을 대체할 새로운 사상이 없었고, 새 나라를 개창할 주도 세력이 없었다. 양명학은 이단으로 몰렸고, 사대부에 맞설 유일한 지식인 집단인 승려들은 호국(護國)의 틀에 안주했다. 그렇게 조선은 만신창이가 된 채로 형해(形骸)를 유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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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대 광해군 가계도

선조- 공빈 김해김씨 김희철의 딸 

제 15대 광해군

차남 : 광해군 (1575-1641)

재위기간 : 1608.2-1623.3(15년1개월)

부인 : 2명 / 자녀 : 1남 1녀

1부인

문성군부인

문화유씨

(유자신)

1남

2부인

숙의 윤씨

1녀

질(폐세자)

 

?

 

 

 

후계가 불투명할수록 政爭 깊어진다

왕위에서 쫓겨난 임금들 광해군① 험난한 세자 책봉

이덕일 | 제96호 | 20090110 입력

 

정치 일정의 투명성과 예측 가능성은 사회 안정의 중요한 요소다. 왕조 국가에서 가장 중요한 정치 일정은 세자 책봉이다. 세자를 조기에 책봉해야 차기를 노린 권력 다툼이 방지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용렬한 리더들은 권력 기반이 약화될 것을 우려해 후계자 결정을 미룬다. 그러면 차기를 둘러싼 정쟁이 발생해 리더의 권력은 강화되지만 사회는 안으로 곪아 든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한 평양성 탈환도의 한 부분. 당시 조·명 연합군과 일본군이 쓰던 무기들이 잘 묘사돼 있다. 광해군은 임진왜란이 없었다면 왕세자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사진가 권태균
조선 중기의 유명한 예언가 남사고(南師古)가 “원주 동남쪽에 왕기(王氣)가 있다”고 말했을 때 사람들은 믿지 않았다. 아무리 남사고라도 왕실과 전혀 무관한 강원도 한 구석에 왕기가 서려 있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선조 때의 문신 이기(李旣:1522~1604)는『송와잡설(松窩雜說)』에서 “임진년 여름 광해군이 왕세자가 된 다음에야 그 말의 효험이 입증되었다”고 쓰고 있다. 광해군의 모친 공빈(恭嬪) 김씨의 부모와 선조들이 살던 손이곡(孫伊谷)이 원주에서 동남쪽으로 1사(舍:30리) 정도 떨어진 곳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그 왕기가 광해군을 위한 것이라고 볼 수는 없었다.

『선조수정실록』은 “공빈이 한창 선조의 사랑을 받을 때는 다른 후궁들이 감히 끼어들지 못했다”고 전하고 있다. 그러나 공빈은 광해군이 세 살 때인 선조 10년(1577) 세상을 떠난 데다 동복 형인 선조의 장남 임해군(臨海君)이 있었다.

공빈의 죽음에 대해『선조수정실록』은 산후병이라고 적고 있지만 공빈은 선조에게 “궁중에 나를 원수로 여기는 자가 있어 내 신발을 가져다 내가 병들기를 저주했는데 전하께서 조사하여 밝히지 않았으니 오늘 내가 죽어도 이는 전하께서 그렇게 시킨 것입니다. 죽어도 감히 원망하거나 미워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따졌다.

 

공빈의 죽음에 크게 상심한 선조는 다른 궁인들에게 난폭하게 대했으나 후에 소용 김씨(인빈)가 선조를 극진히 모셔 신임을 산 후 공빈의 과거 잘못을 들추어 내자 선조가 “공빈이 나를 저버린 것이 많았다”며 다시는 애도하지 않았다.

공빈의 연적(戀敵) 인빈(仁嬪)김씨(= 인목대비)가 광해군의 정적 인조(=정원군)의 모친이었다
. 이 일화는 상황 논리에 따라 중심이 흔들리는 선조의 성격을 잘 말해 준다.

 

정비(正妃) 의인왕후 박씨가 비록 아이를 낳지 못한다 해도 선조의 총애가 인빈 김씨에게 넘어간 상황에서 차자(次子)인 광해군이 국왕이 되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임해군은 성격이 포악했고 인빈의 아들 신성군(信城君)은 어렸기 때문에 광해군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조선 후기 이건창(李建昌)이 쓴『당의통략(黨議通略)』은 조정 신하들은 광해군에게 뜻을 둔 반면 선조는 인빈 김씨(= 인목대비) 소생인 4남 신성군에게 뜻을 두고 있었다고 말한다.

 

서인인 좌의정 정철북인인 영의정 이산해와 함께 선조를 만나 광해군의 건저(建儲:왕세자를 세우는 것)를 요청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약속 날 하루 전에 북인 이산해는 인빈(= 인목대비)의 동생 김공량(金公諒)을 몰래 만나 서인 정철광해군을 세우고 신성군 모자(母子)와 너를 죽이려 한다”고 말했다. 김공량의 말을 들은 인빈은 울면서 선조에게 하소연했는데 선조는 “뜬소문이다”라며 믿지 않았다.

 

다음날 북인 이산해는 병을 칭탁하고 나오지 않았으나 성격 급한 서인 정철은 남인 우의정 유성룡과 선조를 만나 세자 건저를 요청했다. 선조는 크게 화를 내면서 “내가 지금 국사를 주관하는데(尙任) 경은 무엇을 하고자 하는가?”라고 꾸짖으며 정철을 강계(江界)로 유배 보내고 서인을 대부분 조정에서 내쫓았다.

이로써 동인이 정권을 잡는데 이때가 선조 24년(1591)으로, 서인인 계곡(谿谷) 장유(張維)는 이를 ‘신묘년의 화란(禍亂)’이라고 불렀다.

 

자신을 세자로 세우려다 서인 정권이 붕괴된 상황은 광해군의 꿈을 산산조각 내고 말았다.

 

그러나 1년 후 발생한 임진왜란이 상황을 극적으로 전환시킨다.

선조 25년(1592) 4월 13일 조선을 침략한 일본군이 파죽지세로 북상하자 조정은 삼도순변사 신립(申砬)에게 저지하게 했다. 신립은 그달 28일 탄금대에 배수진을 쳤다가 패전했는데 20대 때 임진왜란을 겪은 박동량(朴東亮:1569~1635)은『임진일록(壬辰日錄)』에서 “이날 보고가 올라오자 여항(閭巷:거리)이 한순간에 텅 비어 도성을 지키려 해도 이미 사람이 없었다”고 전하고 있다.

신립의 패전 소식에 놀란 선조가 먼저 파천(播遷) 이야기를 꺼내 서울이 온통 소란스러운 상황에서 신하들이 세자 건저 문제를 다시 들먹였다. 선조는 대신들에게 “누구를 세자로 세울 만하다고 생각하는가?”라고 물었으나 대신들은 “이것은 신하들이 감히 알 수 없는 일로서 성상께서 스스로 결단하실 일입니다”라고 사양했다. 『선조실록』은 ‘이렇게 서너 차례 반복하자 밤이 이미 깊었는데 상은 아직도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세자를 세우지 않으려는 선조의 속마음을 읽은 이산해가 자리를 뜨려고 하자 승지 신잡(申잡)이 “오늘은 반드시 청에 대한 답을 얻은 뒤에야 물러갈 수 있습니다”라고 붙잡았다. 그제야 선조는 “광해군이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하니 국본(國本:세자)으로 삼으려고 하는데 경 등의 생각은 어떠한가?”라고 물었고 대신 이하가 모두 일어서서 “종사와 생민의 복입니다”라고 절했다. 이렇게 광해군은 극적으로 세자로 결정되었다.

이때의 세자 책봉 장면에 대해『임진일록』은 “백관이 조하(朝賀)하는데 허둥지둥하여 동서반(東西班)도 구분하지 못했으며 인장(印章)도 교서(敎書)도 없었다”고 전하고 있다. 그해 6월 평안도 영변까지 도주한 선조는 세자 광해군에게 분조(分朝:조정을 둘로 나누는 것)를 이끌라고 명한 후 자신은 다시 북으로 도주했다.

광해군은 평안도·함경도·황해도·강원도 등을 누비며 의병을 모집하고 전투를 독려하며 민심을 수습했다.
근왕병(勤王兵)을 모집하러 갔던 임해군과 순화군(順和君)이 회령(會寧)에서 조선 백성 국경인(鞠景仁) 등에게 체포되어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진영에 넘겨진 것과 대조적이었다.

광해군이 적진을 헤매고 다닐 때 선조는 “나는 살아서 망국의 임금이니 죽어서 이역의 귀신이 되려 한다. 부자(父子)가 서로 떨어져 만날 기약조차 없구나”라는 편지를 보내 광해군을 위로하면서 명나라에 세자 책봉을 주청했다.
이제 광해군이 선조의 뒤를 잇는 것은 기정사실처럼 보였다. 그러나 명나라는 책봉 승인을 거부했다.

『선조수정실록』에는 명 신종(神宗)이 요동순안어사(遼東巡按御史) 이시얼( 李時얼)을 통해 “적장자(嫡長子)를 후계로 세우는 것은 공통의 의리인데, 귀국의 장자는 어디 갔기에 둘째 아들로 세자를 삼았는가?”라고 비난하는 국서를 보냈다고 전해 준다.

그간 세종·세조·성종 등 적장자가 아닌 왕자의 왕위 승습을 명나라가 거부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이는 원군(援軍) 파견을 계기로 과거의 형식적 조공(朝貢) 관계를 실질적 지배로 바꾸려는 음모에 불과했다.

 

명의 이중성은 선조 28년(1595) 명 신종이 사신 윤근수(尹根壽)를 통해 “황제가 조선국 광해군에게 칙유(勅諭)한다”는 국서를 전한 데서도 드러난다.

명 신종은 이 국서에서 광해군을 ‘영발(英發)한 청년이어서 신민이 복종한다’면서 전라도와 경상도를 맡아 주관하라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세자 책봉은 거부한 것은 선조와 광해군 사이의 이간(離間) 책동이었다. 선조는 자주 선위(禪位) 소동을 벌여 신하들의 충성심을 확인했고 그때마다 광해군은 왕위를 극력 사양하는 거조(擧措)를 취해 부왕을 밀어낼 의사가 없음을 천명해야 했다.

 

그나마 전쟁이 끝나자 선조의 마음은 더욱 흔들렸다.

 


서른세 살 ‘준비된 임금’ 두 살 적자와 후계를 겨루다

왕위에서 쫓겨난 임금들 광해군② 嫡子 옹립 세력들

| 제97호 | 20090118 입력

 

광해군의 왕위 즉위 길은 험난했다. 안으로는 적자 계승의 욕심을 버리지 못하는 선조와 권력의 독점을 원하는 소북(小北)이 흔들었다. 밖으로는 원군(援軍) 파견을 계기로 그간의 형식적 조공관계를 실질적 지배관계로 전환시키려는 명나라가 흔들었다. 광해군은 피를 토하며 이런 상황에 대한 인식의 지평을 넓혔다. 그것은 새로운 군주상의 탄생 과정이었다.

광해군은 즉위 후 대동법을 시행해 민생 개혁의 시동을 걸었다.

큰 사진은 경기도 평택시에 있는 대동법 시행비.

 작은 사진은 대동법 시행세칙을 담은 호서(충청) 대동사목. 사진가 권태균

재위 33년(1600) 의인왕후 박씨가 세상을 떠나자 선조는 2년 후 김제남의 딸을 계비(繼妃)로 맞아들였으니 인목왕후였다. 『당의통략(黨議通略)』은 의인왕후가 승하했을 때 예관(禮官)이 명나라에 다시 세자 책봉을 주청하자고 건의하자 “왕비 책봉은 청하지 않고 세자 책봉만 청하는 것은 무슨 까닭이냐”고 꾸짖었다고 전한다. 이런 상황에서 인목왕후(= 인목대비)는 선조 39년(1606년) 3월 영창대군을 낳았다.

 

방계 승통의 콤플렉스를 갖고 있는 선조는 서른두 살의 광해군 대신 강보에 싸인 어린 적자(嫡子)에게 자꾸 눈길을 주었다. 영창대군이 탄생하자 영의정 유영경(柳永慶)은 세종 때 소헌왕후 심씨가 임영대군 등을 낳았을 때 백관들이 하례한 전례를 들어 백관을 거느리고 진하(進賀)하겠다고 요청했다.『선조실록』은 선조가 처음에는 반대하다가 유영경의 사주를 받은 예조에서 거듭 권하자 허락했다고 전하지만『당의통략』은 좌의정 허욱(許頊)과 우의정 한응인(韓應寅)이 ‘대군 한 명 낳았다고 백관이 진하할 것까지야 있느냐’고 반대해 중지되었다고 전한다.

이런 상황에서 명나라 예부(禮部)는 선조 37년(1604) 11월 “조선의 세자를 세우는 의논을 단연코 따를 수 없다”는 자문(咨文)을 보내 광해군의 세자 책봉을 다시 거부했다. 장남 임해군이 있다는 명분이었지만 원군 파견을 계기로 조선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려는 속셈이었다.

 

원임 영의정 이항복(李恒福) 등이 선조 39년(1606) 4월 명 사신에게 “적장자(嫡長子)를 세우는 것이 상경(常經)이긴 하지만 공을 우선하고 현인을 택하는 것도 예법의 권도(權道)”라고 말한 것처럼 광해군은 현명했으며 임란 극복에 공이 있었다.

또한 책봉 주청사 이호민(李好閔)이 훗날 북경에 가서 광해군은 “성지(聖旨:명 임금의 지시)를 받고 전라도와 경상도에서 적을 막은 공로가 있었다”고 말한 것처럼 명 신종(神宗)의 직접 지시를 받은 적도 있었다.

 

임란 때 백성들에게 체포돼 일본군에게 넘겨졌던 임해군은 선조 35년(1602) 전 주부(主簿) 소충한(蘇忠漢)을 궁궐 담장 밖에서 몽둥이로 때려 죽이고 그 노복들이 백성들의 재산을 수없이 빼앗아 원성이 하늘에 닿아 있었다.

 

그러나 명에서 세자 책봉을 거부하고 선조도 적자(嫡子)에게 관심을 갖자 갓난아이에게 줄을 서는 인물들이 생겨났다.

차기 임금을 두고 집권 북인은 둘로 갈라졌다.

 

정인홍을 중심으로 한 대북(大北)은 광해군을 지지했고,

 

유영경을 중심으로 한 소북은 영창대군을 지지했다.

 

14년 동안 세자였던 광해군 대신 영창대군을 바라보는 정치세력이 있다는 것 자체가 광해군에게 타격이었다.『선조실록』은 유영경의 대군 탄생 진하 소동이 일어난 선조 39년 3월 이후 광해군의 심적 불안을 보여주는 기사를 싣고 있다. 그 전까지 광해군은 대략 2~3일에 한 번 정도 선조에게 문안했다. 그러나 진하 소동 이후 거의 매일 아침저녁으로 문안했던 것이다. 갓난아이와 다투는 형국이 된 것이다.

 

『당의통략』은 선조가 영창대군이 태어난 후 광해군이 문안하면 “명나라의 책봉도 받지 못했는데 어찌 세자 행세를 하는가? 다음부터는 문안하지 말라”고 꾸짖어 광해군이 땅에 엎드려 피를 토했다고 전한다.

선조는 말할 것도 없고 소북도 문제였다. 서인·남인보다 소수 당이었던 북인의 처지에서 내부가 갈라져 싸울 상황이 아니었다. 근왕병 모집에 단 한 명도 응모하지 않는 민심의 이반을 겪었던 나라 집권당의 처신이 아니었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왕위 계승 정쟁이 아니라 현실에 대한 뼈아픈 자기반성이었다. 사대부 중심의 정치체제 자체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할 때였다.

선조가 조금 더 살았다면 광해군의 운명은 예측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선조는 영창대군이 탄생한 이듬해(1607) 3월부터 병석에 누웠다. 그해 10월 9일 미명(未明)에 선조는 기침하며 밖으로 나가다가 기가 막혀 넘어졌고 자리에 누워 “이게 무슨 일인가”라고 반복해 소리 질렀다. 회복될 가망이 없자 만 두 살짜리 아이에게 왕위를 물려줄 수는 없다고 판단한 선조는 이틀 후 원·시임(原時任:전·현직 관리) 대신들을 불러 “세자가 장성했으니 고사에 따라 전위(傳位)하는 것이 좋다. 만일 전위가 어렵다면 섭정(攝政)도 가하다”라고 광해군에게 왕위 계승을 명했다.

그러나 영의정 유영경, 좌의정 허욱, 우의정 한응인은 전교를 거두어 달라고 요청했다. 물론 유영경이 주도한 것이었다.

 

그러자 인목왕후가 삼공(三公:삼정승)을 빈청으로 불러 선조의 병세를 설명하면서 “지금 이 전교를 따르지 않는다면 심기가 더욱 손상돼 더욱 심해지실까 우려된다. 대신은 상의 명을 순순히 따르기를 바랄 뿐이다”라는 내지(內旨)를 내렸다
. 전위까지는 몰라도 섭정은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유영경은 영창대군에 대한 미련을 접지 않았다. 이때 일을 기록한 박정현(朴鼎賢)의『응천일록(凝川日錄)』은 유영경이 선조의 비망기를 감추어두고 조보(朝報)에도 게재하지 않았다고 전하고 있다. 이뿐만 아니라 같은 소북인 병조판서 박승종(朴承宗)과 공모해 군사를 동원, 대궐을 에워쌌다. 일촉즉발의 위기였다.

 

이런 상황에서 선조 41년(1608) 정월 전 참판 정인홍(鄭仁弘)이 상소를 올려 유영경을 공격해 전세 반전을 꾀했다.

 

정인홍은 “신이 보기에 전하의 부자(父子)를 해칠 자도 유영경이고, 전하의 종사(宗社)를 망칠 자도 유영경이고, 전하의 국가와 신민에게 화를 끼칠 자도 유영경입니다”라고 거친 공세를 펼쳤다.

 

유영경이 그해 정월 24일 사직 상소를 올리자 선조는 정인홍을 ‘무군반역(無君叛逆)의 무리’라고 강하게 비판하며 ‘안심하고 출사하라’고 유영경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러나 선조는 열흘 후인 재위 41년(1608년) 2월 1일 57세의 나이로 사망하고 말았다.

선조가 사망하자 유영경인목왕후를 찾아가 영창대군을 즉위시키고 수렴청정할 것을 종용했으나 인목대비는 16년 동안이나 세자 자리에 있었던 33세의 광해군 대신 두 살짜리 아기를 임금으로 삼는 것이 현실성이 없다고 판단하고 광해군의 즉위를 결정하면서 선조의 유서를 공개했다.
 “동기(同氣) 사랑하기를 내가 있을 때처럼 하고 참소하는 자가 있어도 삼가 듣지 말라. 이를 너에게 부탁하니 모름지기 내 뜻을 몸으로 따르라”라는 내용으로서 영창대군을 부탁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어린 영창대군을 위험에 빠뜨린 인물은 선조 자신이었다.

이렇게 광해군은 험난한 길을 걸어 즉위에 성공했다
. 준비된 임금인 광해군은 즉위 석 달 후 영의정 이원익(李元翼)의 건의를 받아 경기도에 대동법을 시범 실시했다.

 

『광해군일기』는 이에 대해 “기전(畿甸:경기) 백성들의 전결(田結)의 역이 이후부터 조금 나아졌다”고 박하게 평가했지만 대동법은 백성들의 삶을 크게 향상시키는 선정으로서 민생을 위한 새로운 개혁 정치가 시작될 것임을 선포한 것이었다. 그러나 아직 난관이 남아 있었다. 명나라에서 광해군의 왕위 계승 승인을 거부하는 것이었다.

광해군은 즉위 직후 이호민을 사신으로 보내 왕위 승인을 요구했으나 명나라는 다시 거부하고 그해 6월 차관(差官) 엄일괴(嚴一魁)·만애민(萬愛民)을 파견해 왕위 계승이 정당한지 조사하게 했다.

 

당시 생존했던 윤국형(尹國馨:1543~1611)은『갑진만록(甲辰漫錄)』에서 명 사신이 입국할 때 “의주에서 벽제까지 인민이 길을 막고 전하(殿下:광해군)의 현명함을 노래하며 이진(李진:임해군)의 무상한 역절(逆節)을 말했다”고 전하고 있다. 두 사신이 서울에 들어오는 날에는 “근기(近畿:경기도)의 사대부부터 아래로는 선비, 노소 백성이 무려 수만 명이나 몰려 서교(西郊)를 메웠다”고 전하고 있다. 광해군에 대한 지지는 절대적이었다. 명 사신은 그해 6월 20일 서강(西江)에서 임해군을 만나고 귀국했다.

명의 두 사신은 수만 냥에 달하는 은화(銀貨)를 이미 챙긴 후였다.

 

이 사건은 광해군의 명에 대한 신뢰를 근본에서부터 흔들었다. 이런 자각은 동아시아 격변기 조선의 국왕으로서 바람직한 것이기도 했다.

 

 

 시대를 앞서갔지만 신하를 설득 못 한 군주의 비극

왕위에서 쫓겨난 임금들 광해군③ 동북아 정세 급변

이덕일 | 제98호 | 20090123 입력

 

아무리 좋은 정책도 주위의 뒷받침이 없으면 성공할 수 없다. 광해군은 당시 명나라를 성리학적 관점이 아니라 현실적 관점으로 바라본 유일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광해군의 이런 외교관을 야당인 서인·남인은 물론 여당인 대북의 당론으로도 삼지 못했다.

 

서인은 ‘강홍립의 투항이 광해군의 지시에 따른 것이었다’며 쿠데타 명분으로 삼았다.

 

시대를 앞서간 군주의 비극이 여기에 있었다.
조선 후기 김후신(金厚臣)이 그린 양수투항도. 강홍립이 후금에 투항하는 장면을 그린 것으로『충렬록(忠烈錄)』의 일부분이다. 사진가 권태균
임진왜란 이후 명 사신들의 태도는 이전과 달라졌다. 임란 전에는 최소한 대국의 체통을 지키느라 국왕이 주는 선물도 사양하는 경우가 더러 있었으나 임란 후에는 노골적으로 뇌물을 요구했다.

 

그런 최초의 사신이 선조 35년(1602) 명의 황태자 책봉을 알리러 온 고천준(顧天埈)이었다. 『선조실록』의 사관은 고천준에 대해 “의주에서 서울까지 수천 리 동안 이리같이 탐욕스럽고 계곡처럼 무한한 욕심으로 마음껏 약탈해 인삼·은·보물을 남김없이 가져가 조선 전역이 병화(兵火)를 겪은 것 같았다”고 비난하고 있다.

윤국형(尹國馨)이『갑진만록(甲辰漫錄)』에서 그의 행위에 대해 “말하면 입만 더러워진다(言之wl口)”고 할 정도였다. 고천준은 문관인 한림(翰林)이었다. 환관인 태감(太監)들이 올 때는 말할 나위 없었다.

 

광해군 1년(1609) 조선 국왕의 책봉례(冊封禮)를 주관하기 위해 왔던 태감 유용(劉用)에 대해『갑진만록』은 “처음 국경에 들어올 때 반드시 은자 10만 냥을 얻겠다고 말하더니 서울까지 오는 동안 얻은 은자가 거의 5만~6만 냥에 이르렀다”면서 “은으로 바치면 차나 식사 대접이 없어도 좋다”고까지 말했다고 전한다.

광해군 2년(1610) 사신으로 온 태감 염등(염登)에 대해 윤국형은 “은을 탐내는 것이 유용보다 배나 더했다. 나라가 장차 어떻게 지속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다”고 한탄할 정도였다. 이는 비단 환관들만의 문제가 아니라,『선조실록』에 “이때 중국 조정에는 탐욕스러운 풍조가 크게 일어 뇌물이 공공연히 행해졌다”(1935년 6월 14일)는 사관의 평처럼 명나라 전반의 문제였다. 명나라는 말기적 증상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이때는 만주에서 여진족 통일의 기운이 높아지고 있을 때여서 뇌물이나 챙길 때가 아니었다.

 

중원의 한족(漢族)은 평소 여진족을 비롯한 주위 민족들을 기미책(羈미策)으로 다스렸다. 기(羈)는 말의 굴레를, 미(미)는 소의 고삐를 뜻하는데, 겉으로는 자치권을 주는 듯하지만 속으로는 한족이 고삐를 쥐고 지배한다는 뜻으로 현재도 중국 공산정권이 소수민족을 통치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기미정책의 핵심은 해당 민족들을 서로 싸우게 하는 이이제이(以夷制夷)인데, 이 무렵 여진족은 셋으로 나뉘어 있었다.

흑룡강과 연해주 지역에 거주하던 야인(野人) 여진,

 

송화강 유역의 해서(海西) 여진,

 

그리고 목단강 유역에서 백두산 일대에 거주하는 건주(建州) 여진이었다
.

 

명나라는 이 셋을 서로 반목시켜 다스려 왔는데, 임란 직전 명나라 요동총병관(遼東總兵官) 이성량(李成梁)은 이여송(李如松)의 부친이기도 했다.

『명사(明史)』 이성량 열전은 “그의 고조할아버지 이영(李英)이 조선에서 귀화(內附)했다”고 적고 있으니 원 뿌리는 조선 사람이었다. 이성량은 1583년 해서 여진의 아타이(阿台)가 명나라에 반기를 들자 건주 여진을 거느리고 토벌에 나섰다. 이때 이성량의 향도(嚮導)로 나섰던 타쿠시(塔克世)교창가(覺昌安)가 명군의 오인 사격으로 사망하는데, 이들은 각각 누르하치(努爾哈齊:1559~1626)의 부친과 조부였다.

누르하치는 이때부터 여진족 통일에 나서 5년 후인 1588년께에는 건주 여진을 대부분 통일했다
.

 

4년 후 발생한 임진왜란은 누르하치에게 날개를 달아줘 누르하치는 선조 25년(1592) 9월과 선조 31년(1598) 1월 조선에 구원군을 보내 주겠다고 자청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

 

조선은 파병을 거절했지만 그간 조선의 벼슬을 받기 위해 서로 싸우던 여진족이 새롭게 대륙의 강자로 등장했음을 말해 주는 사례였다.

드디어 광해군 8년(1616) 누르하치는 스스로를 영명칸(英明汗)이라 칭하면서 금(金)나라를 재건하고 천명(天命)을 연호로 사용했다.

 

2년 후인 광해군 10년(1618) 4월에는 “명나라가 내 조부와 부친을 죽였다” “명나라가 우리 민족을 탄압한다”는 등의 내용을 담은 ‘7대한(七大恨)’을 발표하고 현재의 요령성 무순(撫順)시를 공격해 함락시켰다.

 

충격에 휩싸인 명나라 경략(經略) 왕가수(汪可受)는 그해 윤4월 27일 광해군에게 글을 보내 군사 파견을 요청했다. 수만 군사를 보내 여진족을 협공하면 반드시 승리할 것인데, 이것이 명나라에 보답하는 길이자 조선에도 무궁한 복을 안겨 주는 일이 될 것이란 논리였다.

그러나 광해군은 조명군(助明軍)을 보내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명이 임란 때 파병한 것은 명나라가 아닌 조선을 싸움터로 결정한 고육지책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광해군은 고민 끝에 그해 5월 1일 전교를 내렸는데 국경 너머로 군사를 보내는 대신 “급히 수천 군병을 뽑아 의주(義州) 등지에 대기시켜 놓고 기각(기角:협격)처럼 성원하는 것이 지금의 상황에 적합할 듯하다”는 내용이었다. 군사를 파견하지 않겠다는 것인데, 광해군의 이 결정에 조정이 발칵 뒤집혔다.

집권 대북의 실세 이이첨(李爾瞻)광해군의 처남 유희분(柳希奮)까지 군사 파견을 강력히 주장했다
. 대북은 다섯 달 전 서인·남인의 격렬한 반발을 무릅쓰고 인목대비를 폐위시켰다.

 

폐모(廢母)라는 소모적 정쟁에는 목숨 걸고 싸우던 당파들이었지만 국익에 반하는 조명군 파견에는 당론이 일치했다.

 

대제학 이이첨은 승문원 관원을 통해 “신은 성상께서 염려하시는 뜻을 잘 알고 있습니다만 중국에 난리가 났을 때 제후가 들어가 구원하는 것이『춘추(春秋)』의 대의이자 변방을 지키는 자의 직분입니다. 더구나 우리나라는 재조(再造:조선을 구해 줌)의 은혜로 오늘에 이른 것이니 추호라도 황제의 힘을 보답할 길을 모를 수 있겠습니까?(『광해군일기』 10년 5월 5일)”라고 항의했다.

여야 모두에게 고립된 광해군으로선 파병을 피할 방법은 없었다. 할 수 없이 광해군은 강홍립(姜弘立)을 도원수로 삼았다. 강홍립은 문과 급제자였지만 어전통사(御前通事)까지 겸할 정도로 중국어에 능했다.

 

강홍립은 광해군 11년(1619) 2월 1만30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창성(昌城)에서 압록강을 건넜다. 강홍립이 접해 본 명군은 이미 후금의 상대가 아니었다. 명군 도독 유정(劉綎)의 군사가 적은 것을 보고 ‘왜 군대를 요청하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양 대인(大人:양호)과 나는 전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으므로 반드시 내가 죽기를 바랄 것이다”고 답할 정도로 명군은 분열돼 있었다. 열흘치 식량만 갖고 국경을 넘은 조선군은 식량 공급도 원활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때 종군했던 조선 장수 이민환(李民환)은『책중일록(柵中日錄)』에서 3월 2일 심하(深河)에서 처음으로 후금군 600여 명을 격퇴했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조선군은 승전의 기쁨 대신 양식을 찾아 헤매야 하는 형편이었다. 조선군은 후금의 주력부대와 3월 4일 심하에서 다시 맞붙는데 공명심에 눈이 먼 명의 총병(摠兵) 두송(杜松)이 계획보다 하루 일찍 출발했다가 복병을 만나 전멸했고, 도독 유정의 선봉부대까지 전멸당한 상태로 후금의 정예와 맞붙었다.

선천부사 김응하(金應河)가 이끄는 좌영은 화포로 후금의 기병을 격퇴시켰으나 갑자기 서북풍이 거세게 불면서 화약을 잴 수 없는 상태가 되었을 때 후금의 막강한 철기군이 공격하자 패할 수밖에 없었다. 강홍립은 전원 전사의 길을 택할 것인지 항복할 것인지 갈림길에서 항복을 선택했다.

『광해군일기』 11년 4월 8일조의 사관은 “(광해군이) 강홍립에게 비밀리에 하유하여 노혈(虜穴)과 몰래 통하게 했기 때문에 심하의 싸움에서 오랑캐 진중에서 먼저 통사를 부르자 강홍립이 때를 맞추어 투항한 것이다”고 비난하고 있다. 이것이 광해군 축출의 명분이 된 사전 각본에 의한 항복론이었다.

그러나 여러 사료를 종합해 보면 후금에서 먼저 여러 차례 투항을 권유했고 강홍립은 막다른 궁지에서 자신과 부하들의 생존을 택했을 뿐이다
. 광해군은 동아시아의 운명을 가를 이 싸움이 청(후금)의 승리로 끝날 것을 예견한 조선의 유일한 인물이었다. 그는 재위 13년(1621) 명나라가 크게 승전했다는 보고를 듣고 “중국인(唐人)의 허풍은 전부터 한두 번이 아니니 어찌 경솔히 믿을 수 있겠는가(『광해군일기』 13년 12월 6일)”라고 일축했다.

그러나 허풍 센 중국인을 부모의 나라로 섬기던 서인은 광해군의 현실적 외교관을 ‘황제의 은혜에 대한 불충’이란 명분으로 몰아세우면서 쿠데타를 준비했다.

 

.........

민생 위해 손잡은 연립정권, 스승의 명예 위해 갈라서다

왕위에서 쫓겨난 임금들 광해군④ 문묘종사 논란

이덕일 | 제99호 | 20090131 입력

 

광해군의 출발은 좋았다. 자신을 지지했던 대북만이 아니라 각 당파를 아우르는 연립정권을 구성해 전후 복구에 나섰던 것이다. 각 당파는 전후 복구에 전념한다는 데 암묵적으로 합의했다. 그러나 문묘종사라는 사변적 현안이 등장했을 때 광해군은 각 당파의 이해를 조절하는 데 실패했다. 그런 사변적 문제로 연립정권은 무너지고 있었다.
정인홍과 삼천의병(100Χ73cm): 남명 조식의 수제자 정인홍은 임란이 발생하자 57세의 나이에 의병을 일으켜 경상우도의 의병 총지휘자 역할을 했다. 조식의 제자 대다수가 의병을 일으킨 것은 임란 말기 북인의 집권 명분이 되었다. 우승우(한국화가)
1608년 2월 2일 왕위에 오른 광해군은 그달 14일 남인 이원익(李元翼)을 영의정으로 삼았다. 이원익을 영의정으로 삼은 것은 의외였다. 북인은 임진왜란 말엽 남인 정승 유성룡을 쫓아내고 정권을 장악한 터였기 때문이다. 북인은 굳이 유성룡을 희생양으로 삼지 않아도 집권 명분이 충분했으니 당시 무리한 정치 공세를 펼쳤던 셈이다.

 


남명(南冥) 조식(曺植:1501~1572)의 제자들인 북인은 임란이 발생하자 수제자 정인홍(鄭仁弘)을 필두로 곽재우(郭再祐)·김면(金沔)·조종도(趙宗道)·이노(李魯) 등이 대거 의병을 일으켰기 때문에 집권 명분이 충분했다.

남인 이원익의 영상 제수는 연립정권으로 전후 복구에 임하겠다는 광해군의 정국 구상을 표출한 것이었다.
세자 시절 도움을 받은 대북만으로 정국을 운영하지 않겠다는 의도였다.

 

광해군은 즉위년 2월 25일 내린 ‘비망기(備忘記)’에서 “근래 국가가 불행히도 사론(士論)이 갈라져 각기 명목(名目:당파)을 만들어 서로 배척하고 싸우니 국가의 복이 아니다”며 “지금은 이 당과 저 당(彼此)을 막론하고 오직 인재를 천거하고 현자를 등용해 다 함께 어려움을 구제해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런 견지에서 광해군은 즉위년 5월 서인 이항복(李恒福)을 좌의정으로 발탁했다. 남인·북인·서인을 아우르는 연립정국이었다.

 

그러나 광해군의 속마음이 대북에 있다는 사실은 다 알고 있었다. 대북의 핵심은 정인홍이었다. 그는 선조 41년(1608) 1월 영창대군을 추대하려던 소북 영수 유영경을 비판하다 선조로부터 ‘무군반역(無君叛逆)의 무리’라는 꾸짖음과 함께 평안도 영변으로 유배돼 있었다.

 

율곡 이이가『석담일기(石潭日記)』 선조 14년(1581)조에서 “정인홍은 청명(淸名)이 있어서 세상에서 중히 여겼는데 장령(掌令)에 제수되니 사람들이 다 그 풍채를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고 말한 것처럼 산림(山林)의 존경을 받았다.

임진년 4월 왜란이 발생하자 57세 고령으로 곧바로 의병을 일으켰는데
『선조실록』 26년 1월자는 그 숫자를 3000명이라 적고 있다. 정인홍은 광해군 즉위 이전부터 영남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선조 35년(1602) 윤2월 서인 강경파 부사과(副司果) 이귀(李貴)가 호남의 폐단으로 토호(土豪)들의 탈세를, 영남의 폐단으로 선비들의 수령(守令) 핍박을 지목하면서 정인홍을 장본인으로 지목하는 상소를 올린 것이 이를 말해 준다. 그러자 경상도의 유생 오여은(吳汝穩)이 정인홍은 봉황 같은 사람인데 이귀가 없는 사실을 날조했다’는 반박 상소를 올렸고, 그때의 사관은 “정인홍은 조식의 고제(高弟)로서 기절(氣節)로 자부했는데 많은 선비가 내암(萊庵) 선생이라 높였다”고 말했다.

광해군이 즉위하자마자 정인홍을 석방하라는 상소가 잇따르는 가운데 과거 그를 비판했던 함흥 판관 이귀(李貴)까지 “신과 정인홍이 원래 서로 용납하지 않는 것은 국인(國人)이 다 알고 있다”며 “정인홍은 선비(儒)라는 이름이 있고 나이도 70세인데 만 리나 먼 유배지로 가다가 길에서 죽는다면 성세(聖世)의 아름다운 일이 아닙니다”라고 석방을 주청한 것처럼 광해군이 복귀한 이상 그의 복귀는 시대의 당위였다.

 

광해군은 선조의 시신이 채 식기도 전에 부친의 결정을 뒤엎는 것에 부담을 느꼈으나 2월 23일 ‘정인홍이 길에서 죽는다면 선왕의 뜻이 아닐 것’이라며 석방했다. 3월에는 그를 한성부 판윤으로 임명하고 5월에는 대사헌으로 임명해 그에 대한 속마음을 드러냈다.

이런 상황에서 광해군 정권에 참여한 다른 당파들도 전란 극복에 힘을 보탰다
. 전후 복구에 초당적 합의가 이루어진 것이다. 광해군 즉위년 남인 영의정 이원익의 건의로 경기도에 대동법이 실시되고 재위 2년 허준(許浚)의『동의보감(東醫寶鑑)』이 편찬되고 문란해진 토지제도를 바로잡기 위한 양전(量田)사업도 추진되는 등 광해군의 주요 업적이 이 시기에 집중되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었다.

물론 이때도 당파 간 충돌은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임해군 문제인데, 남인 이원익이 임해군을 살려주어야 한다는 전은론(全恩論)을 주창한 반면 북인 정인홍은 대의를 위해 사연(私緣)을 끊어야 한다는 할은론(割恩論)을 주창했다. 임해군은 광해군 1년(1609) 4월 유배지에서 사형당해 할은론이 승리하지만 그는 당파를 막론하고 인심을 너무 잃었기에 문제가 확대되지는 않았다.

각 당파가 정면충돌한 사건은 문묘종사(文廟從祀) 문제였다.

 

성균관 문묘에 공자와 함께 제사 지내는 것이 문묘종사인데 종사되는 인물들의 사상이 국가의 지도 이념이 되는 것을 의미했다. 광해군 즉위년 7월 경상도 유생 이전(李琠) 등이 오현(五賢)의 문묘종사를 청한 것을 시작으로 성균관 유생과 홍문관에서 거듭 오현종사를 요청했다.

 

오현은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조광조(趙光祖)·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을 뜻한다.

당초 이 문제가 나왔을 때 광해군은 “어진 이를 좋아하는 정성을 알았다”고 칭찬했으나 막상 그 시행은 ‘선왕도 어렵게 여겼다’며 유보하고 재위 2년(1610) 3월에는 이 문제의 제기를 금지시켰다. 그러나 요구가 거세지자 재위 2년(1610) 9월 문묘종사를 허락했다. 이것이 연립정권 운영자였던 광해군의 한계였다. 광해군은 오현 그대로를 문묘에 종사해서는 안 되었다. 오현 선정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김굉필·정여창·조광조는 모든 당파에서 동의하는 인물이지만 이언적과 이황은 아니었다.

 

남인의 지주인 이언적·이황은 포함된 반면 집권 북인의 종주인 남명 조식은 누락된 것이다.

과연 조식의 수제자 정인홍은 광해군 3년(1611) 3월 상소를 올려이언적과 이황이 지난 을사년(1545)과 정미년(1547) 사이에 벼슬이 극도로 높거나 청요직(淸要職:승지 또는 대간 등)을 역임했는데 그 뜻이 과연 벼슬할 만한 때라고 여겨서입니까?”라고 직격탄을 날렸다. 명종 때 문정왕후의 동생이었던 척신 윤원형이 주도한 을사사화와 정미사화(양재역 벽서사건) 때 이언적과 이황의 행적에 문제가 있다는 비난이었다.

 

남인 이언적 명종 2년(1547) 윤원형 등이 주도한 양재역 벽서사건에 연루돼 귀양 가지만 율곡 이이가『석담일기』에서 “을사사화(1545) 때 직언으로 항거해 절개를 지키지 못했다”고 비판했듯이 을사사화 때 종1품 의정부 좌찬성으로 있었다.

이황도 명종 7년(1552) 6월 윤원형의 심복인 정준(鄭浚)이 사헌부 집의로 임명된 날 홍문관 부응교로 임명됐다
. 같은 날 사관(史官)이 “이황은 학행이 참으로 뛰어난 선비인데, 윤원형의 조아(爪牙)인 정준과 같은 날 관직을 제수했으니 향기 나는 풀과 악취 나는 풀(훈유)을 어찌 한 그릇에 담을 수 있겠는가?”라고 비판한 것처럼 이황도 명종 때 관직에 있었다.

 

반면 조식은 명종 10년(1555) 단성현감에 제수되자 사직 상소에서 전하의 국사(國事)가 이미 잘못되고 나라의 근본이 이미 망해 천의(天意)가 떠나갔고 인심도 떠났다”고 비판하면서 윤원형의 누이 문정왕후를 “궁중의 한 과부(寡婦)에 지나지 않는다”고 시대의 금기까지 거론했다.

이때 사림은 조식에 환호하고 열광했으므로 광해군은 조식까지 포함한 육현(六賢) 종사로 유도해야 했으나 그렇게 하지 못했다.

 

이언적과 이황을 비판한 정인홍에 대해 서인과 남인은 선현을 헐뜯었다고 일제히 공격했고 태학생들은 유생들의 명부인『청금록(靑衿錄)』에서 정인홍의 이름을 삭제했다.

 

그러자 광해군은 “이 사람은 임하(林下)에서 독서하면서 시종 바른 선비의 길을 고수한 사람”이라며『청금록』삭제 주동자를 조사해 아뢰라고 명했으나 오현 문묘종사를 허락할 때부터 이 문제는 예견돼 있었다. 연립정권은 이렇게 문묘종사라는 민생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사변적 현안으로 무너지고 있었다.

 

 소통과 통합에 실패한 군주, 외롭게 몰락하다

왕위에서 쫓겨난 임금들 광해군⑤ 소수파의 임금

| 제100호 | 20090208 입력

 

모든 권력에는 독점 추구의 속성이 있다. 그러나 국왕은 각 당파의 당론을 조절하는 방향으로 왕권을 행사해야지 한쪽의 권력 독점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 즉위 초 광해군은 연립정권을 구성해 전란의 상처 극복에 나섰으나 곧 소수 강경파에게 경도되어 조정자의 지위를 포기했다. 그 결과 그는 대북을 제외한 모든 당파의 공적이 돼 몰락하고 말았다.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면에 있는 광해군 묘. 광해군은 대북 강경파에게 경사돼 인목대비의 생부와 친아들을 죽이고 인목대비까지 폐위시키는 바람에 유교정치 체제의 공적이 되었다. 작은 사진은 인목대비가 병 치료에 관해 쓴 서한이다. 인목대비는 한문에도 능했다. 사진가 권태균
집권 북인은 현실적으로 소수당이었다. 서인이 제1당, 남인이 제2당, 북인이 제3당이었다. 그러나 절의(節義)를 숭상했기 때문인지 북인은 다른 당파와 충돌이 잦은 것은 물론 당내에서도 분란이 잦았다. 선조 32년(1599) 11월 남인 남인인 영상 이원익(李元翼)이 선조에게 “동론(東論: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갈렸는데 북인은 또 대북(大北)과 소북(小北)으로 갈렸습니다”고 개탄한 것처럼 북인은 뿌리가 같은 남인과 합당하는 대신 대북·소북으로 나뉘었다.

북인 분당의 계기는 선조 32년 3월 북인 홍여순(洪汝諄)의 대사헌 임명 때문이었다. 홍이 대사헌에 임명되자 석 달 후 다른 부서도 아닌 사헌부에서 “‘홍여순은 평생 경영한 일이 모두 재산을 불리고 사치를 일삼는 것’이고 북도순찰사(北道巡察使) 시절에는 사람을 풀처럼 여겨 함부로 죽였으므로 온 도(道)의 사람들이 그 살점을 먹으려 했다”고 탄핵할 정도였다.

 

훗날 백호(白湖) 윤휴가 좌참찬 윤승길(尹承吉)의 ‘영의정 추증 시장(諡狀)’에서 ‘윤승길이 병조참판일 때 병조판서 홍여순이 뇌물을 멋대로 받아 챙기자 병조의 인사가 있는 날(政日)이면 그와 한자리에 앉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병을 칭탁하고 나가지 않았다’고 기록할 정도다. 조광조로 대표되는 대사헌의 이미지로는 맞지 않았다.

예나 지금이나 당론이 앞서면 진실을 외면하듯 홍여순을 지지하는 이산해·이이첨 등의 대북홍여순을 비판하는 남이공(南以恭)·김신국(金藎國) 등의 소북으로 분당됐다.

 

그나마 대북은 선조 33년(1600) 홍여순과 이산해 사이에 다툼이 발생해 이산해가 육북(肉北), 홍여순이 골북(骨北)으로 다시 나뉘었다.

 

소북도 세자 광해군을 지지하는 남이공 중심의 청북(淸北: 또는 남당)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유영경(柳永慶) 중심의 탁북(濁北: 또는 유당)으로 나뉘었다.

광해군 즉위에 결정적 공을 세운 대북은 권력을 독차지하려 했으나 즉위 초 광해군은 이조판서와 이조전랑, 승지와 대간 등의 실직(實職)은 대북에게 주었으나 최고위직인 정승은 서인(이항복)남인(이원익·이덕형)에게 주어 연립정권을 구성했다. 대북은 광해군의 통합적 정국 운영에 불만을 가졌으나 전란 극복에 전 당파의 합심이 필요하다는 논리에 수긍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연립정권은 문묘종사(文廟從祀) 문제로 공존의 기반이 크게 흔들렸다. 집권당이면서도 종주(宗主) 남명 조식을 종사하지 못한 상황에 큰 불만을 가진 대북은 연립정권 내 다른 당파들의 축출을 구상했다.

 

광해군 4년(1612) 김직재(金直哉)의 옥사가 대북의 이런 정국 구상에 이용되었다. 봉산(鳳山) 군수 신율(申慄)에게 ‘김경립(金景立: 일명 김제세)의 군역(軍役)을 면제하라’는 관문(關文: 상급 관청의 공문서)이 내려왔는데 예조에는 없는 예조참지(禮曹參知)란 직명이 쓰여 있었다. 조사 결과 관문에 사용된 어보(御寶)와 병조인(兵曹印) 등이 모두 위조된 것이었다.

승려였던 김경립은 환속 후 군역의 과중함을 견디다 못해 관문서를 위조한 것인데
, 이 단순한 사건은 순화군(順和君: 선조의 6남)의 장인 황혁(黃赫)이 순화군의 양자 진릉군(晋陵君) 이태경(李泰慶)을 왕으로 추대하려 한 사건으로 확대되었다.

 

이 사건의 추관(推官)이던 판의금 박동량(朴東亮)은 무리한 옥사라고 주장했고 김시양(金時讓)도『하담파적록(荷潭破寂錄)』에서 “도적이 죽음을 늦추고자 모반했다고 고변했다”고 전한다. 하지만 이이첨 등의 대북은 이 사건을 이용해 서인·남인·소북 계열의 반대파들을 쫓아냈다.

광해군 5년(1613) 4월에는 ‘칠서(七庶)의 옥(獄)’이 발생한다
. 조령(鳥嶺)에서 한 상인이 살해당하고 은자 수백 냥을 탈취당한 사건인데 수사 결과 범인은 고(故) 정승 박순(朴淳)의 서자 박응서(朴應犀), 고 목사 서익(徐益)의 서자 서양갑(徐羊甲) 등 명가의 서자 7명이었다. 현실에 불만을 품은 서자들이 여주(驪州) 강가에 거처를 마련하고 공동생활을 하는 도중 일어난 사건이었으나 이 역시 대북에 의해 역모 사건으로 비화되었다.

작자 미상의『광해조일기(光海朝日記)』는 포도대장 한희길(韓希吉)·정항(鄭沆)이 ‘역모로 고변하면 죽지 않을뿐더러 큰 공도 세울 수 있다. 김제남(金悌男: 인목대비의 부친)과 영창대군을 끌어들이라’고 박응서를 유혹했다고 전한다.

 

반면 안방준(安邦俊)이 묵재 이귀(李貴)에 대한 이야기를 적은 『묵재일기(默齋日記)』는 “이이첨이 ‘살길이 있다’면서 박응서에게 ‘김제남과 짜고 영창대군을 추대하려 했다’고 말하게 꾀었다”고 전한다. 김제남은 이에 대해 “얼굴도 이름도 모른다”고 부인했고 아들 김규(金珪)와 여종 업이(業伊)도 마찬가지였으나 아무 소용없었다.

김제남은 광해군 5년(1613) 5월 사약을 받기 직전 “원컨대 한마디 할 것이 있다”고 청했으나 이마저 거부되고 사형당했다. 영창대군도 이 사건으로 서인(庶人)으로 강등되었다
1614년 2월 강화부사 정항(鄭沆)에 의해 살해되고 말았다.

 

광해군은 이 사건의 진실을 추구하기보다 정적 제거라는 시각에서 사태를 바라봄으로써 대북 이외 다른 당파들의 불만을 샀다. 게다가 내친김에 인목대비까지 폐모하려는 대북을 제어하지 못했다.

 

『묵재일기』는 서인 이귀(=인조반정 기획)남인 영상 이덕형에게 “(김제남의) 옥사 이후에는 반드시 대비를 폐할 것이니 이 옥사를 구제하지 못하면 폐모할 때 목숨을 바친다 해도 어찌할 수 없을 것입니다”라는 편지를 보냈다고 전하는 것처럼 서인들은 김제남의 사형을 폐모로 가는 중간 절차로 보았다.

폐모는 유교국가 조선에서 왕권의 범위를 넘는 문제였다
. 『광해군일기』는 남인 이덕형은 물론 영의정을 지낸 대북 기자헌(奇自獻)까지 광해군에게 “『춘추(春秋)』에서 아들이 어머니를 원수로 대할 의리가 없다고 한 것은 선유(先儒)가 정한 의논이고, 아들이 어머니를 끊는 도리가 없습니다”라고 반대한 것처럼 대북도 폐모에 모두 찬성하지 않았다. 서인과 남인은 말할 것도 없었다.

 

남인 이원익·이덕형, 서인 이항복은 폐모론에 반대하다 귀양 가거나 쫓겨났으며, 소북 남이공도 반대했고 심지어 정인홍의 제자 정온(鄭蘊)은 사제 관계를 끊으면서까지 폐모론에 반대했다.

그러나 광해군은 대북 강경파 이이첨 등에게 휘둘려 당론 조절의 역할을 포기하고 내심 폐모론을 지지했다. 드디어 다른 당파를 모두 내쫓은 대북은 광해군 10년(1618년) 인목대비의 호를 삭거(削去)하고 서궁(西宮)에 유폐시켰다.

 

이복형제와 선왕의 장인을 죽인 것도 모자라 계모를 폐서인하는 광해군과 대북의 과잉조처는 조선의 사대부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광해군을 유교정치 체제의 공적(公敵)으로 여기게 만들었다.

대북은 폐모론을 주도해 권력을 독점했으나 소수 정당의 한 파벌에 불과한 당세로서 무리한 권력 독점이었다.

 

광해군 말기 사방에서 고변이 잇따랐으나 정작 가장 중요한 광해군의 이복동생 능양군(綾陽君: 인조)과 서인 핵심부의 쿠데타 기도를 알아채지 못한 것이 이를 말해준다. 기초 정보망조차 붕괴된 것인데 이런 대북에게도 쿠데타 당일 마지막 기회가 있었다.

 

광해군 15년(1623) 3월 12일 광평대군의 후손 이이반(李而頒)은 길에서 만난 친족 이후원(李厚源)으로부터 “오늘 반정에 함께 참가하자”는 요청을 받았다. 이이반의 부친 이유홍(李惟弘)이 대북에 의해 귀양 갔기 때문에 권한 것이지만 이이반은 급히 광해군에게 고변했다.

하지만『광해군일기』는 어수당(魚水堂)에서 술에 취한 광해군이 이이반의 상소를 보고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다 유희분·박승종이 두세 번 비밀리에 아뢰자 조사하라는 명을 내렸다고 전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쿠데타 군이 들이닥치자 광해군은 북쪽 후원으로 도망가 사복시 개천가에 있는 의관 안국신(安國信)의 집에 숨었으나 곧 체포되고 말았다. 대외 문제에서는 탁월한 현실 인식을 갖고 있었으나 대내 문제에서는 소수 강경파에 휘둘려 당론 조절과 사회 통합을 포기했던 대북 군주의 허무한 종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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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역곡절 끝에 광해군은 집권했다. 그러나 집권하자마자 가지치기부터 해야 하는 난관에 봉착한 것이다. 인목대비와 영창대군도 살아 있을 뿐 아니라 그들을 지지한 유영경도 살아있었다. 게다가 친형인 임해군까지 살아 있으니 광해군의 앞날이 순탄할 리 없었다.

 

가지치기하는 악역을 도맡은 사람이 이이첨이었다. 제일 먼저 소북의 영수인 유영경부터 죽이고 나서 차례차례 반대파들을 제거해 나갔다. 그다음은 광해군의 친형인 임해군 차례였다. 임해군의 성격 자체도 문제가 있었다. 현실을 자각하고 고개를 숙이고 있을 줄 알아야 하는데 조심성이 없었고 절제도 없었다. 역모로 몰렸을 때 광해군이 목숨만은 빼앗고 싶지 않아 귀양을 보냈지만 이이첨이 사람을 써서 암살하고 말았다. 1608년의 일이었다.

 

1613년, 이이첨은 7명의 서자가 관계 된 옥사를 일으켜 여기에 김제남(인목대비의 아버지)을 억지로 연루시켜 영창대군을 결국 옭아맨다. 죄목이야 간단하다. 영창대군을 왕으로 옹립하려 했다고 덮어씌우면 그만이다. 광해군은 김제남을 죽이지 않으려고 했으나 임금 혼자서 처리 할 문제가 아니었다. 삼사의 빗발치는 요구로 결국 사약을 내린다. 그리고 영창대군은 강화도로 유배를 보낸다. 이 사건은 이이첨이 꾸며냈다고 하나 칠서가 불온한 기색을 보인 것도 사실이었다고 한다.

 

강화도로 유배를 간 영창대군은 이듬해에 이이첨의 사주를 받은 강화부사 정항에게 참혹하게도 증살된다. 겨우 아홉 살 때였다. 증살이라 함은 방안 가두어 놓고 구들에 계속 불을 때어 결국에는 질식시켜 죽이는 것을 말한다.

 

1615년 이이첨은 임진왜란 때 탄금대에서 적을 막다가 죽은 신립의 조카인 신경희를 옥사로 몰아 죽이면서, 거기에 능창군도 같이 엮어서 죽인다. 영창대군처럼 증살시켰다고 한다. 이 능창군이 바로 훗날 반정을 일으키는 능양군(인조)의 친동생으로 광해군의 조카가 된다. 광해군은 권력을 다지는 과정에 여기저기에서 그 자신을 향한 역모의 씨앗을 뿌리고 있었던 것이다.

 

1618년 1월, 벼슬아치들이 창덕궁 뜰에 모여 정식으로 폐모를 요청했다. 그동안 조정에서 폐모에 관한 격렬한 논쟁들이 있었으나 광해군은 반대했다. 이에 대해서는 사관이 그렇다고 기록해놓은 것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임금 혼자서 정치를 할 수 없는 노릇. 이미 대세는 폐모론으로 기울었다. 결국 인목대비는 왕비와 대비의 자격을 박탈당하고 한낱 후궁의 지위로 강등 당해 서궁에 유폐된다. 형과 동생과 조카를 죽이고 어머니마저 폐했으니 민심이 이반되는 것은 당연했고, 반대파들에게는 역모의 명분을 계속 제공하는 것이었다. 

 

1618년 8월, 이이첨은 정치적인 라이벌인 허균을 역모로 몰아 그와 추종자 수십 명을 처형시킨다. 옥사는 이외에도 계속되었다. 이이첨이 완전한 권력을 틀어쥐기 위해서 옥사를 일으키기도 했고 반대파들이 대북파를 타도하기 위해서 거듭 모의를 한 것에도 그 연유가 있었다.

 

한마디로 광해군이 집권하고 바람 잘 날이 없었다. 광해군은 계속되는 옥사에 질려버렸다. 종당에는 이귀가 역모를 꾀한다는 고변이 연달아 올라 왔으나 옥사라면 지긋지긋했는지 적극적으로 체포령을 내리지 않았다. 이때 병에도 시달리고 있어서 만사가 귀찮았을지도 모른다.

 

1623년 3월 13일 밤, 홍제원에 있는 장만의 집에 모인 반란군은 200여 명에 지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게 어설프게 시작했는데도 결국 광해군은 쫓겨나고 말았다.

 

이이첨은 후세에 간신의 대명사로 이름을 남겼다. 광해군의 안정된 집권을 위해 그 나름대로 애를 섰지만 승리한 자들의 역사는 패배한 그를 간신이라 평했다. 또다시 전란의 위기에 빠진 나라를 광해군은 명과 후금 사이에서 슬기로운 외교 정치로 잘 헤쳐 나갔지만 결국 안에서 무너지고 말았다.

 

광해군은 앞에서 밝혔듯이 개혁자가 가져야 필수 조건이 부족했던 것이다. 전임자가 그를 도와주지 못한 이상 그 스스로 헤쳐 나가야 하는데 그러기에는 사람이 유약했고 또 숙종처럼 신하들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면서 오히려 신하들을 떡 주무르듯 한 노련미도 없었다. 이왕 칼을 빼들었으면 반대하는 자들을 인정사정없이 몰아쳐서 완전히 뿌리를 뽑아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 고려의 광종과 같은 과감함과 냉정함이 부족했다.

 

반대파를 완전히 뿌리 뽑을 만큼의 냉정함이 없을 것 같으면 반대파들에게도 적절하게 권력을 배분해 주어 함께 다스려 나가는 유연함과 노련미가 있어야 하는데 그것도 없었다. 오로지 대북파에만 의존하다보니 결국은 무너졌다. 광해군의 나이를 따져 볼 때 그가 무너진 모든 잘못을 신하들 탓으로만 돌릴 수 없다. 모든 일의 책임은 일단 임금에게 있는 것이다.

 

인조를 왕으로 세워 광해군을 무너뜨린 서인은 명에 대한 사대주의로 회귀했다. 그들은 안쪽은 볼 줄 알았지만 바깥쪽은 볼 줄 몰랐다. 결국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왕이 적국(청)의 왕에게 무릎을 꿇고 절을 해야 하는 치욕을 당하고 만 것이다.

 

인목대비 유폐 논의가 한창 진행 중 일 때, 이귀는 평산 부사였다. 그는 이항복, 김류와 마찬가지로 서인이었다. 이 당시 개성과 평산 사이에 호랑이가 자주 출몰해 사람들을 잡아먹는 바람에 파발이 끊길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평산에 부임한 이후 이귀는 군사를 동원해 여러 마리의 호랑이를 잡아 임금에 바치면서 효과적인 방법을 건의했다. 호랑이가 도의 경계를 넘어 가버리면 추적하는 군사들이 규정에 따라 더 이상 추적을 못하고 중도에 발길을 돌려야 하므로 호랑이를 잡을 때만이라도 규정에 구애받지 않게 해달라고 광해군의 허락을 구한 것이다.

 

광해군은 승낙하면서 장단과 개성에서도 평산과 힘을 합쳐 호랑이를 잡으라고 명을 내렸다. 이귀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의 본심은 호랑이를 잡는다는 핑계로 군사를 모아 장단 등지에 출동하면서 서울을 칠 계획이었던 것이다. 이미 서울에서는 그의 아들 이시백이 최명길이나 김자점 등과 내통해 거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들은 은밀하게 움직여 신경진, 김상헌, 이정구, 장유 등을 끌어들였다.

 

어떤 사람이 이들의 음모를 눈치 채고 이귀가 반역을 도모하고 있다고 조정에 고변했다. 이귀는 곧 잡혀 와서 문초를 받았다. 그런데 이이첨이 집권 내내 벌인 옥사의 후유증이 엉뚱한 방식으로 나타나게 된다.

 

담당자인 박승종과 유희분이 이이첨이 또 옥사를 벌여 한바탕 피바람을 몰아치게 할까 두렵기도 하고 질리기도 해서 이귀의 벼슬을 떼는 정도로 마무리 짓고 말았다. 정작 가장 모질게 숙청할 자리에서 이이첨은 손을 대지 못했으니 그동안 스스로 제 발등을 찍은 꼴이 되었다.

 

이귀는 풀려나서 계속 거사를 도모했다. 안협에 있는 농장을 아지트로 삼아서 사람들을 모아 나갔다. 무인 이괄과 장만도 합류시키는데 성공했다. 이들은 이귀와 절친한 사이인 김류를 총대장으로 추대한 뒤 홍제원에 있는 장만의 집에 군사를 집결시키기로 밀약했다.

 

그리고 새 임금으로는 선조의 손자이자 광해군의 조카가 되는 능양군을 추대하기로 결정하고 그의 동의를 받아냈다. 능양군의 친동생인 능창군은 이미 이이첨이 일으킨 옥사의 제물이 되어 죽은 바가 있었다.

 

아무리 보안을 유지한다 할지라도 새로운 임금까지 정해놓은 마당이라 거사에 대한 소문이 퍼져 나가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무렵 이귀의 역모에 관한 고변이 잇달아 조정으로 올라왔다. 그러나 옥사라면 지긋지긋했는지 광해군은 적극적으로 체포령을 내리지 않았다. 이때 병에도 시달리고 있어서 만사가 귀찮았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이이첨은 그가 계속적으로 일으킨 옥사의 대가를 제대로 치르고 있었다.

 

저번에 이귀를 풀어줬던 박승종이 훈련대장 이홍립도 반군 측에 가담했다는 사실을 알아챘으나 두 사람 사이가 사돈 관계라서 머뭇거리고 말았다. 그는 광해군 밑에서 벼슬이 영의정까지 오른 인물이었으나 이이첨의 사주를 받은 이인경이 인목대비를 해치려 할 때 이를 막아냈고 폐모론에도 적극 반대한 사람이었다.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그는 아들과 자살함으로써 삶을 마감한다.

 

이홍립은 거사 전날 밤 불온한 기색이 있으니 군사를 풀어 서쪽 창의문 밖을 수색하라는 지시를 받고도 대충 핑계를 대고 군사를 보내지 않았다. 1623313일 밤 아홉시 경, 홍제원에 있는 장만의 집에 모인 반란군은 겨우 200명 정도였다. 총대장 김류도 약속 시간에 나타나지 않았고 장단에서 오기로 한 군사들도 도착하지 않았다.

 

김류는 역모에 대한 고변이 조정으로 들어갔다는 소식을 듣고 꾸물거렸다. 장만의 집에 모인 반란군들도 고변 사실을 전해 듣고 서둘러 행동을 개시했다. 즉석에서 이괄을 총대장으로 추대해 도성으로 출발한 것이다. 이들이 모화관에 이르렀을 때 뒤늦게 나온 김류와 만나게 되어 총대장의 자리는 다시 김류에게로 돌아갔다. 이어 능양군과도 합류했고 심기원이 이끌고 온 200, 이서가 이끌고 온 700명까지 합세했다. 그리하여 도성에 진입하기 전의 반란군의 규모는 1400명까지 늘어났다.

 

반란군이 창덕궁 돈화문 앞에 도착했을 즈음 동쪽 하늘에 먼동이 트기 시작했다. 반란군은 돈화문 문짝을 도끼로 부수고 들어가 영문도 모르는 문지기와 궁내를 살피던 선전관을 죽이고 미리 준비해 놓았던 장작더미에 불을 질렀다. 성공적으로 궁궐에 진입했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이때 죽음을 무릅쓰고 반군을 진압해야 할 훈련대장 이홍립이 반군 편에 가담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이홍립의 가담으로 이미 사태가 기울어진 것을 눈치 채고 궁궐의 다른 호위 군사들은 도망치거나 흩어졌다.

 

떠들썩한 소리에 잠을 깬 광해군이 불길이 치솟는 것을 보고 연유를 알아보라고 내시에게 지시했다. 반란이 일어났다는 보고를 접하자 광해군은 황급히 북문으로 도망쳤다. 광해군은 청계천가에 있는 의원 안국신의 집으로 찾아갔다. 안국신은 두려움에 떨다가 사태가 기운 것을 확인하고서는 광해군이 자기 집에 숨어 있다고 알렸다. 광해군은 곧 창덕궁으로 끌려갔다.

 

능양군이 옥새를 가지고 서궁에 갇혀있는 인목대비를 찾아가 옥새를 바쳤다. 옥새를 거머쥔 인목대비는 살기가 등등한 채로 광해군 부자의 목을 가져올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능양군이 예로부터 임금을 쫓아낸 일은 있으나 죽인 일은 없으므로 들어 줄 수 없다고 버티자 마지못해 다시 능양군에게 옥새를 내렸다. 마침내 서궁 뜰에서 조선 16대 임금의 즉위식이 거행되었다. 의식은 궁중의 법도를 따르지 않고 약식으로 거행되었다. 능양군이 새 임금(인조)이 되었다. 

 

이후 인목대비는 전국에 교서를 내려 광해군의 죄상을 알렸다. 수많은 광해군의 죄상을 조목조목 나열했는데, 그녀에 따르면 광해군이 잘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쫓겨난 왕의 비애라고 말 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웃기는 것은 광해군의 잘못 중 으뜸으로 꼽은 것이 명에 대한 사대의 예를 저버렸다는 것이다. 광해군을 끌어 내린 서인들이 시대를 거스르려 억지로 버둥거렸으니 조선의 비극은 예고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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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대 인조 가계도 

선조- 인빈 수원김씨(김한우의 딸) →5남 원종(정원군)+인헌왕후 능성구씨 구사맹의 딸

제 16대 인조

장남 : 인조,능안군(1595-1649)

재위기간 : 1623.3-1649.5(26년2개월)

부인 : 3명 / 자녀 : 6남 1녀

1부인

인렬왕후

청주한씨

(한준겸)

4남

2부인

장렬왕후

양주조씨

(조창원)

자식없음

3부인

귀인조씨(폐)

2남1녀

소현세자

제17대 효종

(봉림대군)

인평대군

용성대군

 

 

숭선군

 악선군

효명옹주

 

국익 위에 당론, 임금 갈아치우는 쿠데타 명분으로

국란을 겪은 임금들 인조西人들의 왕

이덕일 | 제101호 | 20090215 입력

 

왕조국가의 기본 의리는 군위신강(君爲臣綱)이다. 신하는 임금을 섬기는 것이 근본이란 뜻이다.

 

그러나 당쟁이 격화되면서 서인들은 당론의 시각으로 광해군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명나라 황제가 자신들의 임금이 되고 광해군은 그 신하에 불과하게 되었다. 그래서 황제에게 불충한 광해군을 축출하는 것이 충성이란 해괴한 논리가 쿠데타의 명분으로 성립되었다.
서울 은평구 역촌동에 있는 인조 별서 유기비(別墅 遺基碑) 비각. 인조가 쿠데타를 일으키기 전 살았던 곳을 기념해 세운 것이다. 당시 백성들은 쿠데타를 지지하지 않았지만 이원익이 영의정으로 임명되자 민심이 안정되었다. 사진가 권태균

 

광해군이 어린 영창대군에게는 신경 쓰고 장성한 능양군(인조)을 주시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 능양군의 부친이 정원군(定遠君)이기 때문일 것이다
.

 

광해군의 모친 공빈(恭嬪) 김씨의 연적(戀敵)이던 인빈(仁嬪) 김씨 소생의 정원군은 백성들의 공적(公敵)이었다.

 

정원군은 임진왜란 때 백성들이 체포해 일본군에게 넘긴 임해군(臨海君)·순화군(順和君)과 함께 악명 높은 세 명의 왕자였다.

 

임해군과 정원군은 심지어 사노(私奴)를 잠상(潛商)으로 삼아 일본군과 내통하며 이익을 취했다.

 

선조 30년(1597) 1월 사노 희남(希男)이 간첩 혐의로 포도청에 체포되자 정원군은 임해군과 함께 포도대장에게 서신을 보내 석방을 요구했다. 이를 안 사헌부에서 임해군·정원군의 파직을 요청했으나 선조는 들어주지 않았다.

그해 6월에는 정원군의 하인들이 길을 다투던 좌의정 김응남(金應南)의 하인을 집단 폭행해 유혈이 낭자한 채 실려가는 사건도 있었다.

 

9월에는 정원군이 지방으로 행차할 때 하인들이 쇄마(刷馬:지방 관아의 말) 200필에 실을 정도의 금품을 약탈했다. 전란에 피폐해진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해지자 사헌부에서 추고(推考:수사) 요청을 했으나 선조는 “주인이라고 해서 하인들이 한 일을 다 안다고 할 수 없다”며 거부했다.

선조실록』 35년(1602) 6월조의 사관은 “여러 왕자 중 임해군과 정원군이 일으키는 폐단이 한이 없어 남의 농토를 빼앗고 노비를 빼앗았다”며 “가난한 사족(士族)과 궁한 백성들이 자기의 토지를 잃고도 항의할 수도 없어 중외가 시끄러웠다”고 비난하고 있다.

 

그해 9월에는 정원군의 하인들이 선조의 맏형인 하원군(河原君:정원군의 백모)의 부인을 납치하는 사건까지 발생했다. 사간원에서 ‘인간의 도리상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비난했으나 선조는 “살펴서 조치하겠다”고 무마했을 뿐이다.

『선조실록』에는 정원군의 패륜 행위에 대한 사실이 수없이 실려 있으나 서인들이 작성한 『광해군일기』는 정원군에 대해 “어려서부터 기표(奇表:우뚝한 외모)가 있었고 천성이 우애가 있었다”라고 극찬하고 있으니 지금처럼 당론(黨論)에 눈이 멀면 흑백(黑白)을 불분(不分)함을 알 수 있다.

 

정원군이 조야에서 버림받은 인물이기 때문에 광해군은 그 아들 능양군이 쿠데타의 주역이 될 줄은 생각도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능양군은 동생 능창군(綾昌君)이 ‘신경희의 옥사’에 연루돼 처형당했기 때문에 쿠데타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능양군의 친동기인 정숙옹주(貞淑翁主)의 남편인 신익성(申翊聖)이 쓴 『연평일기(延平日記)』에는 인조반정이라 불린 쿠데타의 진상이 자세하다.

 

쿠데타 주역 이귀(李貴) 자신의 부인상에 문상 온 신경진(申景진)을 모의에 끌어들였다. 광해군이 재위 14년(1622) 8월 이귀를 황해도 평산(平山) 부사로 임명하자 부임 도중 장단(長湍) 방어사 이서(李曙)를 끌어들였다.

 

이때 평산과 개경 사이에 호랑이가 출몰해 인명을 살상했는데 이귀는 큰 호랑이를 잡아 바치고 기뻐하는 광해군에게 “호랑이 사냥을 하다가 경계를 넘어가면 쫓을 수 없는데 경계에 국한되지 않도록 해달라”고 요청했다. 속셈을 모른 광해군은 허락해주었다.

그해 12월 이귀는 장단방어사와 함께 발병(發兵)하려 했으나 유천기(柳天機)가 고발해 사전에 발각되었다.

 

『연평일기』는 “다행히 소북(小北) 유희분·박승종 등의 주선으로 파직에 그치고 말았다”고 적고 있다. 인목대비 폐모에 반대했던 소북(小北) 유희분·박승종으로선 이 사건의 여파가 인목대비에게 미칠 것을 염려했다는 것이다. 북인들도 인목대비 문제에 발목이 잡혀 역모를 눈감아 준 형국이니 광해군의 몰락은 인목대비 폐모로부터 나왔다. 김시양(金時讓:1581~1643)의 『하담파적록(何潭破寂錄)』에는 반정 일등공신이 되는 김자점(金自點)이 김 상궁에게 뇌물을 써서 막았다고 달리 전한다.

광해군(1623) 15년 3월 12일 반정 당일, 쿠데타 세력은 밤 2경(9~11시) 홍제원(弘濟院)에 모이기로 했는데 그 전에 광평대군의 후손 이이반(李而頒)이 고변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군사는 절반도 모이지 않았고 거의대장(擧義大將) 김류(金류)도 나타나지 않았다.

 

『연평일기』는 김류가 “고변 소식을 듣고 집에서 잡혀갈 때만 기다리면서 감히 나오지 못했다”고 전한다. 북병사(北兵使) 이괄(李适)이 대신 쿠데타군을 지휘했는데 김류는 집까지 찾아온 심기원(沈器遠)·원두표(元斗杓)의 재촉을 받고 뒤늦게 나타나 지휘권을 넘겨받았다. 이렇게 쿠데타군 진영이 우왕좌왕하고 있을 때가 광해군의 마지막 기회였으나 이마저 놓쳐버렸다.

 

『계해정사록(癸亥靖社錄)』에 따르면 영의정 박승종(朴承宗)의 아들인 경기감사 박자흥(朴自興)이 쿠데타 소식을 듣고 양주(楊州)로 달려가 광해군의 처남 유희분의 사위인 수원 방어사(防禦使) 조유도(趙有道) 등에게 군사 진압을 명했다. 그러나 결국 진압에 실패하고 박승종·박자흥 부자는 자결하고 만다.

인조반정은 성공했으나 백성에게 환영받지 못했다. 폐모는 양반 사대부에게는 강상(綱常)의 문제였지만 백성에게는 늘 있던 궁궐 권력 다툼의 하나에 불과했다
. 반정 일등공신 이서(李曙)는 반정 직후 백성들의 반발을 기술하면서 ‘성패가 확실히 정해지지 않은 터에 위세로써 진압할 수도 없었다’라고 적어 내심 당황했음을 말해준다.

 

이때 서인들이 난국타개책으로 제시한 것이 남인 이원익(李元翼)영의정 제수였다. 이원익은 폐모에 반대하다 여주에 유배 중이었는데 『인조실록』 1년(1623) 3월 16일자는 “인조가 승지를 보내 재촉해 불러왔다. 그가 도성으로 들어오는 날 도성 백성들은 모두 머리를 조아리며 맞이하였다”고 적고 있다. 서인들이 남인을 영상으로 영입한 것은 그만큼 쿠데타에 대한 지지가 높지 않았음을 뜻한다.

광해군은 서인들에게는 몰라도 백성에게는 나쁜 임금이 아니었다. 『연려실기술』은 ‘이원익의 연보(完平年譜)’를 인용해 쿠데타 직후 인목대비와 반정공신들이 광해군을 죽이려 하자 이원익이 “그를 섬긴 노신(老臣)으로서 차마 들을 말이 아니니 조정을 떠나겠다”고 반발해 죽이지 못했다고 전한다.

쿠데타 당일 광해군의 부인 유씨는 대궐 후원 어수당(魚水堂)에 이틀 동안 숨어있었다. 조선 후기 성해응(成海應)의 ‘초사담헌(草사談獻)’에는 유씨가 궁인(宮人) 한보향(韓保香)에게 “중전이 여기 계시다”라고 소리치게 한 뒤 체포하러 온 대장(大將)에게 “오늘의 거사는 종사를 위한 것인가 부귀를 위한 것인가”라고 따졌다고 전해준다. 유씨는 남편이 쫓겨나야 할 이유를 알지 못했다.

광해군과 왕비 유씨는 강화에 위리안치되고 세자 이지(李지)와 세자빈 박씨는 강화 교동(喬桐)에 안치되었다.

 

세자는 그해 5월 땅굴 70여 척을 파서 탈출을 시도하는 조선판 ‘쇼생크 탈출’을 연출했으나 나졸 최득룡(崔得龍)에게 붙잡혔다. 그가 소지하고 있던 ‘황해순영 서간(黃海巡營書簡)’ 등은 군사를 일으킬 계획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 날짜 『인조실록』은 “최근 도성 안에서 유언비어가 날로 생겨난다”라고 적어 쿠데타를 인정하지 않는 민심이 상당함을 말해주고 있다.

 

세자가 체포된 지 사흘째 세자빈 박씨는 목을 매 자결했고, 인조는 한 달 후 세자를 사형시켰다. 세자는 ‘자결할 줄 몰랐던 것이 아니라 부모의 안부를 알고 나서 죽고자 했던 것’이라면서 의관을 정제한 다음 손톱과 발톱마저 깎으려 했으나 금부도사가 허락하지 않았다. 세자는 “죽은 뒤에 깎아주면 좋겠다”고 말한 후 황천(皇天)·후토(后土)와 광해군이 있는 서쪽을 향해 절한 후 목을 매 자결했다.

조경남(趙慶男)의 『속잡록(續雜錄)』에는 세자가 교동에서 “어떻게 이 새장을 벗어나, 녹수청산 마음대로 오고 갈까(綠何脫此樊籠去 綠水靑山任去來”라는 시를 지었다고 전해준다. 인조반정은 특정 당파가 당론으로 국왕을 갈아치울 수 있는 상태까지 왔음을 말해주는 것으로서 왕조 정치의 파탄이었다.

 

광해군의 중립외교를 명에 대한 반역으로 규정한 이들은 숭명반청(崇明反淸)을 기치로 내걸었다.

 

대륙의 만주족과 전쟁을 예고하는 정책전환이었다.


피의 보복이 부른 政治 실종, 전란을 부르다

국란을 겪은 임금들 인조② 정치보복과 자체 분열

| 제102호 | 20090221 입력

 

정치는 상대방이 자신과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폐모론에 반대하는 자신들을 조정에서 대거 내쫓은 대북에 대해 서인은 대거 살육으로 보복했다.

 

폐모는 명분일 뿐 본질은 정적 제거여서 폐모에 반대한 소북까지 모조리 죽였다. 정치가 사라진 빈자리는 혼란이 차지하는 법이어서 이괄의 난이 발생하고 그 여파로 청(淸:후금)까지 남침을 생각하게 되었다.
일본 덴리(天理)대학이 소장 중인 오리(梧里) 이원익의 영정. 남인이었으나 서인에 의해 영의정에 발탁된 이원익은 기자헌 등 37명이 하룻밤 사이에 처형당한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

 

집권 서인은 대대적인 정치보복에 나섰다
.

 

대북 영수 정인홍을 사형시키고 이이첨과 네 아들 이대엽·이익엽 등도 사형시켰다.

 

이이첨의 처형 반교문(頒敎文)은 온갖 비난으로 가득 차 있지만 그 한구석의 “계씨(季氏)보다 사치스럽고 부유한데도 사람들은 도리어 베 이불을 덮는 검소한 자라고 칭송했고, 이리처럼 백성을 침해하고 탈취했는데도 사람들은 거꾸로 선비에게 자신을 낮추는 공손한 자라고 일컬었다”는 구절은 다른 일면을 보여 준다.

유몽인(柳夢寅)은 『어우야담(於于野談)』에서 이이첨이 부모의 삼년상을 치를 때 “3년 동안 묽은 죽만 마시다가 삼년상이 끝난 후에야 염장(鹽醬:소금과 간장)이 들어간 음식을 먹었다. 매일 물을 10여 사발씩 들이켜 온몸이 부어 거의 죽게 되었다가 겨우 살아났다”고 전하고 있다.

 

쿠데타 측에서 작성한 『계해정사록(癸亥靖社錄)』은 백관이 둘러보는 가운데 정형(正刑:사형)한 16명의 이름을 적고 있는데 명분은 폐모였지만 자의적인 기준이었다.

이이첨부터가 그랬다. 『묵재일기(묵齋日記)』는

 

폐모론이 일자 반정 주역 이귀(李貴)가 유순익(柳舜翼)을 이이첨에게 보내 중지를 요청했는데, “그 후 이이첨이 폐모론을 현저하게 주장하지 않은 것은 대개 이 때문이었다”고 적고 있다. 처형당할 때 이이첨은 이귀에게 “전에 유순익을 통해 대감의 말을 듣고 폐모론을 극력 정지시켰으니 대비께서 지금까지 보존하신 것이 다 나의 힘”이라면서 “왜 죽이느냐”고 물었다. 이에 이귀는 “당초에 이 논의가 누구에게서 나왔느냐”고 싸늘하게 답했다.

계해정사록』은 정형당한 16명 외에 복주(伏誅:사형)당한 64명의 명단도 싣고 있다. 폐모를 빙자한 정적 숙청인데 그중에는 쿠데타 당일 역모를 고변했던 이이반도 들어 있었다.

 

한 당파가 정권을 잡아 다른 당파의 씨를 말리는 살육정치의 시작이었다. 이원익(李元翼)·이덕형(李德馨)처럼 쿠데타에 대해 싸늘한 민심 수습 차원에서 등용된 남인은 이런 대살육이 자행될지 몰랐다.

 

조경(趙絅)의 『용주집(龍洲集)』은 충청감사에 임명된 이덕형이 광해군의 처남 유희분(柳希奮)에 대해 “대비를 돕고자 했던 마음은 신명(神明)에게 질정해도 분명히 알 수 있다”고 변호했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인조가 이괄의 난을 피해 거처하던 충남 공주시 공산성(公山城) 안의 영은사

(왼쪽 사진). 공주 석송정은 인조가 피난 길에 잠시 쉬던 곳으로 전해진다(오른쪽 사진). 사진가 권태균

김천석(金天錫)의 『명륜록(明倫錄)』에 따르면 인조가 “유희분 등을 죽이지 않으면 의거를 한 보람이 어디 있느냐”고 말했다고 전해져 쿠데타의 목적이 정적 살육이었음을 말해 준다. 폐모는 명분일 뿐 북인의 씨를 말려 재기를 막으려는 정치적 살해였다. 그러니 광범위한 정치보복이 자행되었고 광해군 주변의 여성도 숱하게 죽였다.

 

광해군이 총애했다는 김 상궁과 그 어미의 재가한 남편 유몽옥(劉夢玉), 광해군의 후궁 숙의(淑儀) 윤영신(尹永新)을 사형시켰고 소원(昭媛) 정씨는 목매어 자살했다. 여옥(女玉)·난향(蘭香)·도란(道蘭)·추영(秋英)·생이(生伊)·난이(蘭伊)·숙진(淑眞) 등의 궁녀도 모두 사형시켰는데 인목대비 김씨가 ‘비망기(備忘記)’를 내려 사형을 요구한 데 따른 것이었다. 목숨은 겨우 건졌으나 유배지에 가시울타리를 치는 위리안치(圍籬安置)를 당하거나 삭탈관작(削奪官爵) 등의 형벌을 받은 인물들은 셀 수조차 없다.

광해군을 복위하려는 기도도 있었다. 『어우야담』의 저자 유몽인·유약(柳약) 부자 등이 그들이다. 유몽인은 광해군 13년(1621) 파직된 후 금강산 등지에서 은거생활을 하다 광해군이 쫓겨났다는 말을 듣고 거병하려 했다. 조익(趙翼)의 『포저집(浦渚集)』에는 “유몽인은 형신(刑訊:고문)을 많이 받지 않고도 모의한 사실을 일일이 자복했으며 심지어 자신의 시를 공술하면서 폐주(廢主:광해군)를 위해 복수하려 했다고 말하기까지 하였다”고 적고 있다.

 

반정공신 이귀는 인조 2년(1624) 11월, “유몽인이 백이(伯夷)에 관한 설을 주창하자 학식 있는 사람까지도 따라서 화답했다”고 말했다. 『사기(史記)』 백이 열전은 은(殷) 주왕(紂王)을 치러 가는 희발(姬發:주 무왕)에게 백이가 “신하로서 임금을 죽이는 것이 어찌 인이겠습니까(以臣弑君 可謂仁乎)”라고 간했다고 나온다. 유몽인의 백이설은 인조와 쿠데타 주역들이 역신(逆臣)이란 의미였다.

게다가 피의 살육을 자행한 서인은 자체 분열되어 전국을 혼란으로 몰아넣었다.

 

이괄(李适)은 쿠데타 당일 이이반의 고변 소식을 듣고 집결 장소에 나타나지 않은 의병대장 김류(金류)에게 깊은 반감을 갖고 있었다. 『연평일기』는 이괄이 쿠데타 당일 뒤늦게 나타난 김류의 목을 베려 했다고까지 전하는데 막상 모화관(慕華館)에서 열린 쿠데타 성공 기념 잔치에서 김류의 자리는 이괄보다 상석이었다. 이괄은 “김류는 무슨 공이 있어서 우리의 상석에 앉는가”라고 소리쳤다.

이괄은 논공행상에서도 소외되어
김류·이귀·김자점·심기원·신경진·이서·최명길 등은 정사(靖社) 1등공신에 올랐으나 이괄은 2등공신으로 떨어졌고 쿠데타에 가담했던 아들과 손자도 훈적(勳籍)에서 누락되었다. 당초 이귀가 이괄의 자리로 천거했던 병조판서도 김류가 차지했다.

 

쿠데타 두 달 후인 인조 1년(1623) 5월에는 후금(後金)의 동태가 심상찮다는 이유로 장만(張晩)을 팔도도원수(八道都元帥)로 삼아 관서지방으로 보내면서 이괄을 부원수 겸 평안병사로 삼아 영변(寧邊)으로 내보내 장만의 지휘를 받게 했다. 영변으로 떠나던 날 1등공신 신경진이 “영공(令公)이 돌아오면 내가 가겠다”고 위로했으나 이괄이 성을 내며 “나를 쫓아내는 길이면서 속이지 마시오”라고 말했다고 『연려실기술』은 적고 있다.

조정은 지방으로 쫓겨간 이괄을 다시 자극했다. 인조 때 김시양(金時讓)이 지은 『하담파적록(荷潭破寂錄)』은 “원훈(元勳:1등공신) 등이 특출 난 공을 세웠으나, 인심이 불복할까 우려해 사방에 감시하고 밀고하는 문을 크게 열어놓은 것이 ‘이괄 난’의 발단”이란 시각을 보인다. 쿠데타에 대한 지지가 높지 않아 감시와 밀고를 장려하자 문회(文晦)·이우(李祐) 등이 기자헌(奇自獻)과 이괄·이전(李전) 부자, 한명련(韓明璉) 등이 모반(謀反)한다고 고변했다. 기자헌은 광해군 때 북인의 영수로서 영의정이었으나 폐모에 극력 반대해 홍원(洪原)에 유배되었던 인물이다. 조정에서 기자헌을 체포하고 이괄과 함께 있는 아들 이전도 체포하겠다며 금부도사를 이괄의 진영에 보내자 이괄은 폭발했다.

이괄은 쿠데타 9개월 만인 인조 2년(1624) 정월 17일 선조의 10남 흥안군(興安君) 이제(李提)를 임금으로 추대한 뒤 군사를 일으켰다. 능양군(인조)이 아니라도 선조의 핏줄은 많았다. 이괄의 군사가 파죽지세로 남하하자 인조는 급기야 서울을 버리고 도주했는데 그 직전 옥에 갇힌 기자헌에게 사약을 내리고 이시언(李時言)·유공량(柳公亮) 등 나머지 36명은 목을 베어 죽였다. 인조 2년(1624) 1월 25일의 일인데, 이귀는 국문하여 사실을 가린 후 죽이자고 주장했으나 김류가 “변란이 서울에서 일어난다면 장차 어찌하겠는가”라면서 모두 죽이자고 주창해 인조가 따랐던 것이다.

폐모를 반대하다 귀양 간 기자헌마저 죽였으니 폐모란 정권을 탈취하기 위한 허울에 불과했다.
영의정 이원익은 다음 날 이 소식을 듣고 “하룻밤 사이에 이렇게 많은 사람을 죽였는데 수상(首相)의 자리에 있으면서 참여치 못했으니, 이제 나는 늙어 폐물이 되었구나”라고 혀를 찼다고 전한다. 서인이 구색 맞추기용으로 끌어들인 남인의 현실이었다. 서울까지 점령하고 흥안군을 국왕으로 추대했던 이괄은 장만이 이끄는 관군과 길마재[鞍峴]에서 맞붙었다가 패배했다. 이괄은 2월 15일 이천에서 부하 장수에게 죽임을 당했다.

이때 살아남은 한명련의 아들 한윤(韓潤)은 후금으로 도주하는데, 『청사고(淸史稿)』 조선 열전은 그가 “향도(嚮導:길잡이)가 되겠다고 자청해 병단(兵端)으로 이끌었다”고 적고 있다.

 

쿠데타 후 친명반청(親明反淸) 정책으로 급격히 전환해 청의 분노를 산 것으로도 부족해 쿠데타 세력의 내분으로 청의 길잡이를 만들어 주었으니 이래저래 인조반정은 청의 침략을 불러들이고 있었다.

 

 

 명분 때문에 현실을 외면한 정권, 끝내 삼전도 굴욕

국란을 겪은 임금들 인조③ 外患 부른 쿠데타

이덕일 | 제103호 | 20090228 입력

 

인조와 서인이 변화하는 국제 정세를 몰라서 친명반청(親明反淸) 정책을 고수한 것은 아니었다. 친명 사대는 정권 획득과 유지의 명분이었다. 군사는 없지만 전쟁불사론이 횡행했고 현실적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입을 열지 못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국제 정세는 국내 정세에 파묻혀 마치 없는 것처럼 치부되었다. 이 양자 사이 모순의 충돌이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었다.
남한산성(55Χ42㎝): 주화론과 척화론의 대립 속에 남한산성에 갇혀 있던 인조는 이불조차 없는 한겨울을 보내야만 했다. 우승우(한국화가)
인조반정은 혼돈의 끝이 아니라 시작에 불과했다. 광해군 폐출에 대한 반발이 계속되었다. 인조 1년(1623) 8월에는 김덕원(金德元)·주대윤(朱大允) 등이, 10월에는 황현(黃晛)·이유림(李有林) 등이 사형당했다. 군사를 동원한 기찰이 대폭 강화된 가운데 인조 2년(1624)에는 광해군 때 좌의정이었던 박홍구(朴弘耉)가 다시 사형당했다. 저항이 잇따르자 의정부는 ‘통유문(通諭文)’을 반포했는데, “전후 여러 역적들의 공초나 흉한 격문에서 말한 바는 다 동일하게 ‘폐주를 마땅히 봉환(奉還:받들어 모시고 돌아옴)해야 한다’는 것이었다”고 적고 있다. “지금의 반정은 정(正)이 아니다. 자기가 군사를 거느리고 쳐서 자기가 왕위에 올랐으니 어찌 정인가”라고 반발했다는 것이다.

인조반정이 부른 것은 내란뿐이 아니었다. 광해군이 명나라 황제에게 불충했다는 것을 쿠데타 명분으로 내건 인조정권은 욱일동승(旭日東升)하는 후금(後金:청)에 적대정책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누루하치는 인조 4년(1626) 2월 13만 대군으로 산해관의 길목인 영원성(寧遠城)을 공격하다가 홍이대포(紅夷大砲)의 반격을 받아 그해 7월 세상을 떠난다. 그런데 『명사(明史)』나 『청사고(淸史稿)』 같은 중국 사료에는 이런 사실이 나타나지 않고 조선의 이성령(李星齡)이 쓴 『춘파당일월록(春坡堂日月錄)』에만 기재되어 있다. 9월 누루하치의 여덟째 아들이자 대(對)조선 강경파인 황태극(皇太極:태종)이 즉위한다. 황태극은 후금의 실세였던 4패륵(貝勒:버일러, 皇子의 뜻) 중 넷째 서열에 불과했다.

조선의 김종일(金宗一:1597~1675)은 『노암문집(魯庵文集)』에서 “노한(老汗:누루하치)이 죽으면서 ‘나의 뜻을 이룰 능력이 있다’며 황태극을 후사로 지명했다”고 전하지만 실제 그랬다면 『청사고』가 기록하지 않았을 리 없다. 『청사고』 태종 본기는 “여러 패륵이 의논해 (황태극에게) 자리를 이을 것을 청하자 재삼(再三) 사양하다가 마침내 허락했다”고 전한다.

 

이 무렵 조선은 평안도 철산 가도(가島)에 주둔한 명나라 장수 모문룡(毛文龍)을 지원해 후금을 자극했다. 『인조실록』 2년(1624) 6월조는 “모문룡이 군사를 풀어 놓아 횡포를 부리면서 소와 말을 약탈하고 집에 감춘 것까지 수색해 빼앗아 연로(沿路)가 텅 비고 백성이 모두 호곡(號哭)했다”고 전하지만 인조 정권은 임진왜란 때의 원군(援軍)처럼 생각했다.

드디어 인조 5년(1627) 1월 청 태종은 대패륵(大貝勒) 아민(阿敏) 등에게 3만 군사를 주어 압록강을 넘게 했다. 향도(嚮導:길잡이)는 이괄의 난에 가담했던 한윤(韓潤)이었다.

 

인조 정권은 아무런 국방 대책이 없었고 이순신의 조카인 의주부윤 이완(李莞)은 의주성에서 분전하다 전사했다. 후금군의 기세를 묻는 인조의 질문에 이원익이 “철기(鐵騎)로 거침없이 쳐들어온다면 하루 동안에 8∼9식(息:1식은 30리)을 달릴 수가 있습니다”고 답변했으니 서울까지 닷새면 도달할 속도였다.

“오랑캐를 멸망시키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고 큰소리치던 모문룡은 후금군이 철산을 공격하자 신미도(身彌島)로 잽싸게 도주했다.

 

인조가 병조판서 이정구(李廷龜)에게 “군병의 숫자를 아는가?”라고 묻자 “모른다”고 답변했다. 인조는 “판서가 군병의 숫자를 몰라서야 되겠는가?”라고 힐난했으나 이것이 인조 정권의 현실이었다. 대간(臺諫)에서 ‘전하께서 국문(國門)에 나가셔서 직접 정벌에 나서겠다고 군민(軍民)을 효유하시고, 맨 먼저 도성을 떠나자고 제창한 자를 빨리 목 베어 군문에 효시하소서’라고 요청하자 인조는 “태반은 현실성이 없는 의논”이라고 반대했다.

 


인조는 다음 날 분조(分朝)를 편성해 세자를 전주로 보내고 자신은 강화도로 들어갔다. 임란과 달리 의병이나 근왕병도 달려오지 않자 그해 3월 3일 강화부 성문 밖에 단(壇)과 희생(犧牲)을 마련해 제천(祭天)하고 정묘약조를 맺을 수밖에 없었다.

형제지맹(兄弟之盟)을 맺고 군사를 철수시킨다는 것이 핵심 조항이었다. 정묘호란은 쿠데타 정권의 무능을 만천하에 공개한 셈이어서 다시 봉기가 잇따랐다.

 

인조 5년 9월에는 전 세자익위사 익찬(翊贊) 이인거(李仁居)가 창의중흥대장(倡義中興大將)의 기치로 군사를 일으켜 횡성 관아를 점령했다. 제천에 유배 중인 유희분(광해군의 처남)의 조카 유효립(柳孝立)인조 6년(1628) 1월 4일 궁내 사람들과 짜고 궁중에 들어가 인조를 살해하기로 계획했다. 그러나 하루 전인 1월 3일 동지였던 전 세마(洗馬) 허유(許유)의 친족 허적의 고변으로 무산되었다. 허적은 악명 높던 인조의 부친 정원군(定遠君)을 국왕으로 추숭(追崇)하자는 상소를 여러 번 올렸다가 공론(公論)에 용납되지 못해 시골로 가 있다가 횡재한 셈이었다.

쿠데타에 대한 반발이 거셀수록 쿠데타 정권은 후금 적대정책을 강화해야 하는 모순에 빠졌다. 청 태종은 1635년(인조 13년) 찰합이(察哈爾:차하르)를 정벌해 전체 몽골족을 병합하고 이듬해 4월 국호를 청(淸)으로 개칭했다. 청 태종이 황제(皇帝)를 자칭하면서 조선을 ‘너의 나라(爾國)’라고 비하하는 국서를 보내자 격분한 조야는 전쟁불사론이 횡행했다. 그러나 이념과 입은 있었지만 군사는 없었다.

 

정묘호란 이후 9년이 지났지만 국방력은 전혀 강화되지 않았다. 판윤 최명길(崔鳴吉)은 인조 14년(1636) 9월 척화론(斥和論)을 비판하면서 “강물이 얼면 화가 목전에 닥칠 것”이라고 경고했으나 인조는 묵묵부답이었고 척화파는 최명길의 목을 베어야 한다고 목청을 드높였다. 척화에 동조하자니 군사가 없고 강화를 따르자니 쿠데타 명분을 부인해야 하는 모순에 빠진 것이었다.

인조는 재위 14년(1636) 11월 특지로
교리 조빈(趙贇)을 평안도 도사로 임명했는데 『인조실록』은 “척화론을 극력 주장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문신을 평안도에 두면 안 된다는 건의가 잇따라 충청도 도사로 이전시켰다. 척화는 주장하되 전쟁터에는 가지 않겠다는 것이 입만 살아있던 성리학자들의 본질이었다.

 

인조 14년(1636) 12월 9일 청 태종은 12만 병력을 거느리고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넜다. 휘하의 예친왕(豫親王) 다탁(多鐸)은 선봉 마부대(馬夫大)의 기병부대에게 의주 백마산성을 우회해 곧바로 서울로 남하시켰다. 14일에 개성 유수가 청군이 개성을 통과했다고 보고하자 인조는 다시 강화도로 파천하기로 결정했으나 이미 길이 끊긴 상황이었다.

인조는 할 수 없이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들어갔는데 『인조실록』은 “성 안 백성 중 부자·형제·부부가 서로를 잃고 통곡하는 소리가 하늘을 뒤흔들었다”고 전해 주고 있다. 게다가 남한산성은 겨울 농성 장소가 아니었다. 1만3000여 병력과 1만4000여 석의 양곡이 있었으나 혹한은 청나라 군사보다 무서운 적이었다. 추위에 강한 청군이 눈 덮인 산성을 포위했으나 구원군은 오지 않았다. 얼어 죽는 군사들이 속출하는 가운데 인조 15년(1637) 1월 26일 강화도가 나흘 전에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인조는 그달 30일 신하를 뜻하는 푸른 남염의(藍染衣)를 입고 소현세자를 비롯한 백관을 거느리고 삼전도(三田渡)로 나가 황옥(黃屋)을 펼치고 앉아 있는 청 태종에게 항복했다.

 

백성들에게는 권력욕에 사로잡힌 성리학자들의 시대착오적인 세계관이 부른 외환(外患)에 불과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는 광해군을 제주로 옮겼는데, 신경진(申景진)·구굉(具宏)·신경인(申景<798B>) 등 반정공신들이 경기수사(京畿水使) 신경진(申景珍)에게 “잘 처리하라(善處)”고 연명서를 보냈다. ‘몰래 죽이라(潛害)’는 뜻이었으나 신경진이 따르지 않았다고 『연려실기술』은 전한다. 병자호란은 세상이 이미 성리학적 세계관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실례였다.

 

인질로 간 소현세자는 이를 깨달았으나 혼자만의 깨달음이었다.


새 세상을 봤지만 권력에서 소외된 후계자의 좌절

국란을 겪은 임금들 인조④ 날개 꺾인 소현세자

| 제104호 | 20090308 입력

 

모든 역사에는 음양이 공존한다. 인조반정과 병자호란도 마찬가지다. 인질로 끌려간 소현세자는 북경에서 예수회 선교사 아담 샬을 만나 성리학 이외의 다른 사상과 세계의 실상에 대해 알게 되었다. 세자는 더 이상 성리학적 세계관으로 조선을 이끌 수 없다는 사실을 절감하고 개방을 결심했다. 그러나 이는 인조반정에 대한 부정이어서 양자의 충돌은 불가피했다.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에 있는 소현세자의 무덤인 소경원. 사적 제200호로 지정됐으나 아직 일반에 공개되지 않고 있다. 사진가 권태균
정묘호란 때인 인조 5년(1627) 1월 만 15세의 소현세자는 분조(分朝)를 이끌고 전주로 향했다. 능한(凌漢)산성을 함락당하자 인조는 강화도로 파천하면서 세자를 전주로 보낸 것이다. 정묘약조 체결 후 상경한 세자는 그해 11월 강석기(姜碩期)의 딸과 혼인했다. 그해 12월 4일 인조는 숭정전(崇政殿)에 나가 세자빈 책봉례를 행했다. 긴 악연(惡緣)의 시작이었다.

세자와 강빈(姜嬪)은 전운이 감돌던 인조 14년(1636:병자년) 3월 원손(元孫)을 낳았고 그해 겨울 병자호란이 발생했다. 세자는 인조와 함께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농성했다. 인조는 12월 17일 홍서봉을 청군 진영으로 보내 강화 협상을 지시하면서 “먼저 전날의 실수를 사과함이 마땅하다”고 말했다. 전날 능봉군(綾峯君) 이칭(李稱)을 인조의 동생이라고 속여 강화 대표로 보냈으나 사실이 탄로나 함께 갔던 무신 박난영(朴蘭英)이 청군에게 살해된 사건이 있었다.

 

정묘호란 때도 원창군(原昌君) 이구(李玖)를 왕제(王弟)라고 속여 후금군 진영에 보낸 적이 있었다. 청장(淸將)이 “너의 나라(爾國)는 지난 정묘년에도 가짜 왕자로 우리를 속였는데 이번에는 진짜 왕제인가?”라고 추궁한 결과 가짜임이 드러난 것이다.

청군은 강화 대표로 세자를 요구했는데, 인조는 전 좌의정 홍서봉(洪瑞鳳)을 보내면서 “일이 여기에 이르렀으니 비록 동궁(東宮:세자)을 청한다 한들 어찌 감히 거절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인조실록』은 “이때 세자가 상(上:성상)의 곁에 있다가 오열을 참지 못해 문 밖으로 나갔다”고 적고 있다.

 
이렇게 시작된 강화 협상의 가장 큰 걸림돌은 세자를 인질로 보내라는 요구였다. 조선으로선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였으나 세자 자신이 비국(備局:비변사)에 봉서(封書)를 내려 결자해지(結者解之)했다.

 

세자는 “일이 너무도 급박해졌다. 나에게는 동생이 있고 또 아들도 하나 있으니 역시 종사(宗社)를 받들 수 있다. 내가 적에게 죽는다 하더라도 무슨 유감이 있겠는가”(『인조실록』 15년 1월 22일)라면서 인질을 자청했다.

 

청이 육경(六卿:판서)의 아들까지 인질로 요구하자 강화 대표의 한 명이던 호조판서 김신국(金藎國)이 병을 핑계로 사직해 인질을 피하려는 상황에서 나온 자기희생의 결단이었다.

인조 15년(1637) 4월 세자는 개국 이래 처음 인질로 끌려갔다
. : 심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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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자 일행은 조선관(朝鮮館)이라고도 불린 심양관(瀋陽館)에서 거주했는데, 정조 14년(1790) 부사로 다녀온 서호수(徐浩修)의『연행기(燕行紀)』는 심양성 동쪽에 조선관이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명·청(明淸) 교체기라는 대륙 정세의 변화 한가운데에서 소현세자는 한편으로는 국제 정세의 변화를 주시하면서 한편으로는 시종일관 조선의 국익을 지켜냈다. 청의 파병 요구에 따라 조정군(助征軍)을 파견해야 했으며, 반청 행위로 끌려온 조선인들을 보호해야 했다.

심양 남탑(南塔) 거리에는 조선인 포로를 매매하는 노예시장도 있었다. 소현세자 측에서 조정에 보고한 『심양장계(瀋陽狀啓)』 인조 15년 5월조는 ‘조선 노예들의 속환가(贖還價)가 수백, 수천 냥이나 되어 희망을 잃고 울부짖는 백성들이 도로에 가득 찼다’고 전한다. 많을 때는 300여 명에 달했던 심양관의 유지 비용도 큰 문제였다. 청나라는 야리강(野里江) 근처 4곳에 모두 600일갈이(하루갈이는 장정이 하루에 갈 수 있는 면적)의 농토를 제공했다.

조선 측은 ‘세자를 영구히 붙잡아 두려는 속셈’이라며 거부했으나 세자는 이를 받아들여 농사를 지었다.

 

심양장계』는 인조 20년에 3319석을 거두었다고 전하고 있다. 세자는 이 곡식으로 포로로 끌려간 조선사람들을 속환시켜 농사를 지었다. 『인조실록』 23년 6월조는 “곡식으로 진기한 물품과 무역을 하느라 관소(館所:심양관)의 문이 마치 시장 같았으므로, 상이 그 사실을 듣고 불평스럽게 여겼다”고 적고 있다. 

(병자난 7년이 지난 해) 인조 22년(1644) 3월 역졸(驛卒) 출신의 유적(流賊) 이자성(李自成)이 북경을 함락시키자 마지막 황제 의종(毅宗)은 목매어 자결했다. 총병(摠兵) 오삼계(吳三桂)가 지키는 산해관의 병력이 명(明)의 마지막 무력이었다.

 

『청사고(淸史稿)』 세조 본기는 “(북경 함락 소식을 들은) 오삼계가 사신을 보내 군사를 동원해 적(賊:이자성)을 토벌하자고 청했다”고 전한다. 청의 섭정왕 구왕(九王) 다이곤(多爾袞)은 “인의(仁義)의 군대를 동원하여 유적 이자성을 멸하고 중국 백성을 구원한다”는 명분으로 받아들였다. 명목은 연합군이었으나 오삼계가 성을 나와 항복서를 바친 데서 알 수 있듯 청군이 명군을 흡수한 것이었다.

다이곤은 북경으로 남하하면서 명의 멸망을 목도시킬 목적으로 소현세자를 대동했다. 인조 22년(1644) 4월 산해관을 떠난 청군은 질풍노도의 속도로 한 달 만에 북경에 입성했고 이자성은 도주했다. 세자는 일단 심양으로 되돌아갔다 그해 9월 다시 북경에 와서 약 70일 동안 머물게 된다. 이때 세자는 북경에서 예수회 선교사이자 천문학자였던 아담 샬(Adam Schall)을 만나 사상의 큰 변화를 겪는다. 세자는 성리학 이외에 서학(西學)이란 사상과 서양이란 문명세계의 실상을 접하게 되었다.

세자는 성리학만이 조선이 나아갈 유일한 길이 아니라는 깨달음을 얻었다. 북경 남(南)천주당의 신부였던 황비묵(黃斐묵)은 그의 『정교봉포(正敎奉褒)』에서 세자와 아담 샬의 교류를 전하면서 “세자가 때때로 남천주당을 찾아와 천문학 등을 묻고 배워 갔고 샬 신부도 자주 세자의 관사를 찾아가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어 두 사람은 깊이 뜻을 같이했다”고 전한다.

그해 9월 북경을 수도로 정한 청나라는 더 이상 인질이 필요하지 않았다. 인조 23년(1645) 2월 세자는 만 8년 만에 영구 귀국길에 올랐다. 세자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한 해 전인 인조 22년(1644) 정월 장인 강석기의 사망으로 일시 귀국했을 때 인조가 냉담하게 대했을 뿐만 아니라 빈소에 왕곡(往哭)조차 허락하지 않았던 전례가 있었다. 인조는 세자가 청의 힘으로 국왕 자리를 빼앗지 않을까 의심했다.

인조 23년 3월 세자가 청으로 돌아간 직후 반정 1등 공신 심기원(沈器遠)은 군사를 일으켜 인조를 축출하려 했다. 심기원은 ‘인조가 반정 뒤로 잘못하는 일이 많아 주상을 추존하여 상왕(上王)으로 삼고 세자에게 전위(傳位)시키려 했다’고 말했다. 심기원은 호란 이후 인조가 청에 유화적이어서 불만을 품은 것인데, 실제로는 ‘세자를 받들어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면서 회은군(懷恩君) 이덕인(李德仁)을 추대하려 했다. 회은군은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잡힌 15세의 딸이 청 황실의 시녀가 되었던 인물이었다. 광해군에게 향했던 칼날이 자칫 인조에게 향할 뻔한 일이었다. 심기원 등은 사형당했으나 어수선할 수밖에 없었다.

인조는 심기원이 세자를 추대하려 했다는 사실 자체에 큰 충격을 받았다. 이런 상황에서 성리학에 비판적인 견해를 가진 세자의 귀국을 환영할 리 없었다
. 인조는 세자에 대한 신하들의 진하(進賀)조차 막을 정도로 냉대했다.

 

세자는 귀국 두 달 만에 학질에 걸려 병석에 누웠다가 발병 사흘 만에 급서했다. 34세의 건장한 세자가 급서하자 독살설이 잇따랐다. 『인조실록』의 기사도 이를 뒷받침한다.

온몸이 전부 검은빛이었고 얼굴의 일곱 구멍에서는 모두 선혈(鮮血)이 흘러나와 검은 천으로 얼굴 반쪽만 덮어 놓았으나, 곁에 있는 사람도 그 얼굴빛을 분변할 수 없어서 마치 약물(藥物)에 중독되어 죽은 사람과 같았다. 그런데 외인(外人)들은 이 사실을 아는 자가 없었고, 상도 알지 못했다.”(『인조실록』 23년 6월 27일)

인조는 치료를 담당했던 의관(醫官) 이형익(李馨益)을 비호했고, 장례도 박하게 치렀다. 세자의 후사도 종법과 달리 아들이 아니라 동생으로 결정했다는 점에서 인조가 몰랐다고 볼 수는 없다. 소현세자가 즉위하여 새로운 사상에 기반한 현실적 개혁정책을 펼쳤다면 인조반정으로 야기된 모든 내란과 외환은 새 시대의 출산을 위한 산고쯤으로 평가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인조와 반정 세력은 변화를 거부했다. 그리고 세자를 죽인 칼날은 세자 부인 강빈과 그 아들들에게 향하고 있었다.


어린 손자들까지 죽음으로 내몬 ‘어질 인’ 仁祖

국란을 겪은 임금들 인조⑤ 세자 일가의 비극

| 제105호 | 20090314 입력

 

명분과 현실의 괴리는 비극을 초래한다.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를 섬겨야 했던 인조는 청나라를 인정하려던 소현세자를 제거했다. 청나라에 맞서 싸우지는 못하면서 청나라를 인정하면 난적(亂賊)이 되는 모순은 이후 조선 지배층의 정신세계에 숱한 악영향을 끼쳤다. 말과 행동이 따로 노는 모순은 분노의 표적을 찾았고 남은 세자 가족이 그 대상이 되었다.
소현세자의 부인 강빈은 심양을 관통하는 혼하(渾河:옛 야리강) 근처에서 벼농사를 지어 청나라 고관에게 팔아 큰 이익을 남겼다. 그런 행위는 인조의 분노를 샀다. 큰 사진은 현재 이용하는 혼하의 다리. 작은 사진은 다리 위에서 상인이 생선을 팔고 있는 모습. 사진가 권태균
소현세자의 급서는 많은 의혹을 낳았다.

 

학질 환자에게 사흘 동안 침만 놓았던 어의 이형익(李馨益)에게 의혹이 집중되었다. 세자 사망 다음날인 인조 23년(1645) 4월 27일 양사(兩司:사헌부·사간원)는 “세자께서 한전(寒戰:오한)이 난 이후 증세도 판단하지 못하고 날마다 침만 놓았다”며 이형익 등의 국문을 청했다. 그러나 인조는 “국문할 필요가 없다”고 거부했다.

 

인조는 이형익 보호를 위해 청나라의 연호(大年號)를 쓰지 않은 상소의 봉입을 금지시켰다. 병자호란 때 순절한 김상용(金尙容)의 아들 김광현(金光炫)이 대사헌으로서 계속 이형익의 처형을 주청했기 때문이다.

김광현은 강빈의 오라비 강문명(姜文明)의 장인이었다
. 세자 죽음의 배후가 차차 드러났다. 인조는 관에 재궁(梓宮:임금의 관)이란 호칭 대신 사대부·서인에게 쓰는 널 구(柩)자를 쓰게 했다. 무덤의 이름도 원(園)자 대신 묘(墓)자를 썼다.

 

장남의 상사(喪事) 때는 부모도 삼년복을 입어야 했으나 영상 김류(金류), 좌상 홍서봉(洪瑞鳳) 등은 기년복(일년복)으로 의정해 올렸고 인조는 한 달을 하루로 치는 역월제(易月制)를 실시해 12일간으로 정했다가 7일 만에 끝내 버렸다.

더 큰 문제는 살아남은 사람들이었다.

 

세자시강원 필선(弼善:벼슬 이름) 안시현(安時賢)은 세자 사부(師傅)가 아무도 세자빈 강씨에게 조문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안시현은 인조 23년 5월 6일 세자의 장남인 원손(元孫) 이석철(李石鐵)을 “세손(世孫)으로 정하셔서 신민의 소망에 부응하소서”라고 상소했다. 종법(宗法)대로 장손을 인조의 후사로 삼으라는 주청이었다. 인조는 “이런 소인의 행태는 내가 차마 똑바로 볼 수 없다”며 꾸짖고 쫓아냈다.

 

이상 조짐이 계속되었다. 인조는 술관(術官:풍수가)들이 영릉(英陵:세종과 부인의 능) 동쪽이 길지(吉地)라고 천거했지만 인조는 ‘길이 멀고 폐단이 크다’며 효릉(孝陵:인종과 부인의 능) 등성이로 결정했다. 이의를 제기한 술관 장진한(張鎭漢)은 국문에 처했다.

 
세자빈의 오라비 강문명(姜文明)은 “장례일이 자오(子午)가 대충(對沖:방위가 서로 마주침)되어 원손에게 불리하다”고 불평했다. 정북(正北:자)과 정남(正南:오)이 맞서는 날 장례를 치르면 원손에게 좋지 않다는 뜻이었다.

 

조짐을 간파한 안시현은 5월 27일 상소를 올려 ‘예관(禮官)이 원손을 세손으로 삼자고 주청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윤6월 2일 인조는 조정의 주요 대신을 모두 불러 속셈을 털어놓았다. “나는 숙질(宿疾)이 이따금 심해지는데 원손은 저렇게 미약하다. 금일의 형세를 보건대 어린아이가 성장하기를 기다릴 수 없다. 경들의 의사는 어떠한가?”

장남이 사망할 경우 차남이 아니라 장손이 뒤를 잇는 것이 종법이었다. 그래서 대다수 신하도 모두 원손의 사위(嗣位)를 기정사실로 여겼다. 청나라에 물든 소현세자는 제거되어야 했지만 산림(山林) 송준길(宋浚吉)이 ‘억만 겨레 신민의 희망이 원손에게 있다’며 척화파 김상헌에게 원손의 보도(輔導)를 맡기자고 주장한 것처럼 원손은 잘 교육시키면 반정 명분에 어긋나지 않는 임금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긴 것이다.

 

『인조실록』은 신하들이 원손 교체에 반대하자 “임금의 분노가 심했으므로 좌우에서 다 감히 말하지 못했다”고 적고 있다. 그러자 영의정 김류는 “만약 상(上:임금)의 뜻이 이미 정해졌다면 신이 어찌 감히 그 사이의 가부를 논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한발 물러섰다. 인조는 당일 결정하라고 다그쳤고 영중추부사 심열(沈悅)은 “국본(國本:세자)을 바꾸는 일을 어찌 말 한마디에 당장 결단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항의했다. 그러나 결국 당일 원손은 교체되고 차자(次子) 봉림대군이 후사로 결정되었다.

원손은 졸지에 차기 임금 자리를 빼앗겼으나 이것도 끝이 아니었다. 인조는 재위 23년(1645) 8월 강빈의 궁녀들을 내옥(內獄)에 가두고 국문시켰다. 저주했다는 혐의였다. 인형 따위에 바늘 등을 꽂아 저주하는 것은 얼마든지 조작 가능한 일이었다. 인조의 목적은 저주의 배후가 강빈이라는 자백을 받아내는 것이었다.

 

인조 23년(1645) 8월과 9월 원손의 보모(保姆)였던 상궁 최씨와 강빈의 궁녀 계향(戒香)·계환(戒還) 등은 심한 고문 끝에 강빈의 이름을 대는 것을 거부하고 죽어갔다. 이 저주 사건으로 모두 14명이 죽었으나 인조는 아무런 증거도 찾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인조는 포기하지 않았다. 재위 24년(1646) 1월 인조는 전복구이에 독이 들었다고 주장하며 정렬(貞烈) 등 강빈의 다섯 궁녀와 어주(御廚:주방) 나인 세 명을 또 국문했다. 『인조실록』이 “임금이 궁중 사람들에게 ‘감히 강씨와 말하는 자는 죄를 주겠다’고 했기 때문에 양궁(兩宮)의 왕래가 끊겨 어선(御膳)에 독을 넣는 것은 불가능한 형세였다(24년 1월 3일)”고 쓴 것처럼 인조의 억지였다.

인조는 강빈을 후원 별당에 가두고 문에 구멍을 뚫어 물과 음식을 주게 했다. 궁녀 난옥(難玉)은 고문사했고 강빈이 신임하던 정렬(貞烈)·유덕(有德)은 압슬(壓膝)과 낙형(烙刑:살을 지지는 것)을 받고 죽었다. 아무도 강빈을 끌어들이지 않았다. 그러자 인조는 재위 24년(1646) 2월 3일 비망기(備忘記)를 내려 억지를 부렸다. “강빈이 심양에 있을 때 왕위를 바꾸려고 몰래 도모해 미리 홍금적의(紅錦翟衣:왕비 복장)를 마련해 놓고 참람하게 내전(內殿)이라 칭호했다…이런 짓을 차마 하는데 어떤 일인들 못하겠는가?”(『인조실록』 24년 2월 3일)

이에 대해 사관(史官)은 세자가 심양에 있을 때 수종자들이 저들(彼人:청인)이 보고 들으라고 세자를 동전(東殿), 세자빈을 빈전(嬪殿)이라 칭한 것이지 세자와 빈이 자칭한 것은 아니라고 부기했다. 그러나 인조는 “예부터 난신적자(亂臣賊子)가 어느 시대는 없었겠는가만 그 흉악함이 이 역적처럼 극심한 자는 없었다. 군부(君父)를 해치고자 하는 자는 하루도 숨을 쉬게 할 수 없으니, 해당 부서는 율문을 상고해 품의해 처리하라”고 명했다. 강빈을 사형시키라는 뜻인데 공조판서 이시백(李時白)이 “시역(弑逆)이 어떤 죄인데 짐작만으로 단정지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반대한 것처럼 무리한 요구였다.

 

인조는 강빈의 사형에 반대하는 대신들을 성문 밖으로 내쫓고 병조판서를 숙직시키며 경호를 엄하게 하게 했다. 대사헌 홍무적(洪茂績)은 “강빈을 폐할 수는 있으나 결코 죽일 수는 없습니다. 강빈을 죽이시려면 신을 먼저 죽이신 연후에야 하실 수 있습니다”라고 항의했다가 귀양 갔다.

인조는 24년(1646) 2월 29일 강빈의 두 오빠 강문명(姜文明)·강문성(姜文星)을 장살(杖殺:곤장을 쳐 죽임)시키고 3월 15일에는 강빈을 덮개 씌운 검은 가마(屋黑轎)를 이용해 사저로 내쫓고 당일 사약을 내려 죽였다. 『인조실록』은 세자빈이 쫓겨날 때 “길가에 구경꾼들이 담장처럼 둘러섰고 남녀노소가 분주히 오가며 한탄했다”며 “중외(中外)의 민심이 모두 수긍하지 않았다”고 비난하고 있다.

강빈을 죽인 인조는 과거의 저주 사건을 재심했다. 강빈이 죽어 버린 상황에서 희망을 잃은 궁녀들은 고문자의 의도대로 강빈의 이름을 댔고 인조는 안사돈인 강빈의 어머니를 처형했다. 그리고 소현세자의 세 아들을 제주도로 유배 보냈다.

 

인조 25년(1647) 7월 12세의 어린 석철은 동생들과 제주도에 도착했는데, 사관(史官)은 “큰 바다 외로운 섬 가운데 버려두었다가 하루아침에 병에 걸려 죽기라도 한다면…소현세자의 영혼이 어두운 지하에서 어찌 원통해하지 않겠는가”(25년 8월 1일)라고 개탄했다.

 

사관의 예견대로 석철은 다음해 9월 18일 제주도에서 죽고 말았다. 둘째 석린도 석 달 후 세상을 떠났다. 친손자를 줄줄이 죽인다는 비난에 직면한 인조는 나인 옥진(玉眞)에게 책임을 지워 고문해 죽여 버렸다.

 

시대착오적인 쿠데타의 끝은 가족 참살로 끝을 맺고 있었다. 인조는 재위 27년(1649) 5월 8일 창덕궁 대조전 동침(東寢)에서 세상을 떠났다. 당초 그의 묘호(廟號)는 열조(烈祖)였으나 인조(仁祖)로 고쳤다.

신하로서 임금을 내쫓고, 아버지로서 아들과 며느리를 죽이고, 할아버지로서 손자를 죽인 인물에게 쓴 어질 인(仁)자가 부끄러울 지경이었다. 내란과 외환으로 점철되었던 한 시대는 역사에 숱한 어두움을 드리우고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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