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라, 주의 손이 짧아서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그의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1)
Behold, the LORD'S hand is not shortened, that it cannot save; neither his ear heavy, that it cannot hear: 1)
지금의 마음에 괴로움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무엇을 잘못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두 아시고
우리의 사정을 이해하시는데 우리가 그분의 뜻에 순종한 이후도 마음이 불편하다면 어떤 다른 문제가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복음을 전함이 좌절됨은 우리의 죄악이 아니나 마음이 아프게되는 경우입니다. 사람들은 많은 경우에 있어서 복음을 거부합니다. 복음을 전파하라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을 하였고, 그들을 위하였으나 그것이 거절됨으로 우리의 마음이 아프고 괴로움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픔이나 잘못이 아니라 우리가 주의 마음을 함께 느끼는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시지만 사람의 자유의지를 존중하시어 그의 종들이 복음을 전하여도 듣지 않는 자들을 내버려 두십니다.
믿음이라는 본질에는 강제가 들어있지 않습니다. 억압에 의한 믿음은 이미 본질의 믿음이 아니라 죽은 형식의 믿음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믿음을 강제로 하지 않으시고 믿음을 거절하는 자를 내버려 두시고 기다려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본질의 믿음으로 사람들이 구원받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그의 뜻에 순종하고 그 원리를 알아야 합니다.
사람의 마음은 이웃이 믿음을 갖게되어 구원의 길로 들어서기를 원하나 그렇게 되지 않을 때 안타까움과 고통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마음에서도 일어나는 것이고, 그러나 그것을 오래 참으시고 인내하시어 본질의 믿음으로 나아오길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음은 아프지만 하나님의 그러한 뜻에 동참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복음이 거절당함을 우리가 거절 당했다고 인간적인 마음에 괴로워함은 자신이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거절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거절한 것이기에 우리는 제 3자입니다.
주께서는 이러한 것을 다아시고 들으시고 오래 참으시는 것입니다. 그가 능력이 없어 방치하시는 것이 아니며, 알지 못하셔서 가만히 기다리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너희 죄악들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나누었고 너희 죄들이 그의 얼굴을 너희로부터 가렸기에 그가 듣지 아니하심이라. 2)
But your iniquities have separated between you and your God, and your sins have hid his face from you, that he will not hear. 2)
But 을 오직으로 번역하였습니다. 이러한 구절이 주기도문이 기록되어 있는 마태복음 6장에 있습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지 않게 하시옵고, 악에서 구하여 주시옵소서.
그 왕국과 권세와 영광이 영원토록 아버지의 것이옵니다. 아멘'
And lead us not into temptation, but deliver us from evil:
For thine is the kingdom, and the power, and the glory, for ever, Amen.
마태복음 6장 13절
개역개정에는 다만이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 59장 2절처럼 오직으로 번역이 가장 적합합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지 않게 하시옵고, 오직 악에서 구하여 주시옵소서.
not ~ but (also)의 구절로 번역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습니다. temptation에서 lead us와 evil에서 deliver us가 대칭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다만은 소극적인 의미로 말씀의 의미를 축소하고 있습니다. 유혹보다 더 위험한 것이 악이며, 우리는 유혹에서 악에 빠져드는 단계를 거칩니다. 그러므로 혼란한 세상에서 우리가 유혹, 시험을 당하는 것을 피할 수 없는 그러한 중에도 오직 악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함이 온전한 의미라고 느껴집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를 방치하심이 아니라 오직 우리의 죄악으로 인하여 하나님과 우리가 분리된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람의 분리됨은 단 한가지 이유 즉 우리의 죄악으로 인함입니다. 이러한 오직의 의미가 빠진다면 말씀이 명료함이 훼손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분리됨은 우리의 죄악으로 인함외에는 다른 이유가 없으므로 혼란스럽게 다른 이유를 찾을 필요가 없이 우리의 삶에 하나님보다 더 위에 두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찾으면 되는 것입니다.
이는 너희 손들이 피로, 너희 손가락들이 죄악으로 더럽혀졌으며, 너희 입술이 거짓을 말하였고, 너희 혀가 사악함을 속삭임이라. 3)
For your hands are defiled with blood, and your fingers with iniguity; your lips have spoken lies, your tongue hath muttered perverseness. 3)
defile
1.…을 더럽히다2.…을 모독하다3.더럽히다4.불결하게 하다5.부정(不淨)하게 하다
mutter
① 불명확한 목소리로 말하다 ② 중얼중얼 말하기 ③ 낮게 울리는 소리 ④ 낮고 불명확한 소리로 말하다
perverseness
비뚤어짐
이사야 58장 3절은 우리의 죄의 모습을 묘사해주시고 있습니다. 손에 피를 묻히고, 손가락을 죄악과 입술로 거짓을 말하고 잘못된 것을 중얼거리는 것입니다.
mutter가 중얼거림은 다른 사람이 듣지 못하게 혼잣말인데 비뚤어진 것을 혼잣말로 내뱉음도 하나님과 우리가 분리되는 우리가 저지르는 죄악인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듣지 못해도 우리의 마음에 지은 비뚤어짐이 우리가 하나님과 상관없게 되는 이유인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제가 회개합니다. 마음이 강팍해지고 원망이 많아 사람들을 혼잣말로 저주하였기 때문입니다. 비록 그 사람들은 듣지 못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저의 모습을 모두 보셨기 때문입니다.
정의를 위하여 요청하는 사람도 없고, 진리를 위하여 변론하는 사람도 없으니 그들이 허망한 것을 의뢰하고 거짓을 말하며, 그들이 행악을 잉태하고 죄악을 낳은도다. 4)
None calleth for justice, nor any pleadeth for truth: they trust in vanity, and speak lies; they conceive mischief, and bring forth iniquity. 4)
이사야 59장 1절 2절 3절 4절
plead
① 탄원하다 ② …을 (변호·변명으로서) 주장하다 ③ 간청하다 ④ …이라고 주장하여 변호하다
mischief
1.장난 2.악영향 3.손해
우리의 죄악은 침묵하는 것에도 있습니다. 우리의 양심은 본질의 죄악에 대해 알고 있습니다. 불의를 보고도 아무말하지 않는 자는 불의에 동참하는 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의 양심은 침묵하는 것으로 아무것도 안했다는 변명이 스스로 잘못되었다고 항변하는 것입니다. 진리를 번호하지 아니하고 거짓을 말하고 악영향을 끼치며 악을 길러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모두 우리가 죄악을 행하지 않아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불의에 침묵하는 것으로 이러한 일은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세상안에 믿는, (앞으로 믿을) 사람들의 구원입니다. 이러한 뜻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세상의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짠맛을 내는 소금이어야 하는 것이죠.
썩어가는 곳에 소금을 뿌리면 부패가 멈춥니다. 우리가 속한 곳에 정의가 외쳐지고, 진리가 변호되며, 허망한 것보다 진실이 말하여지고 좋은 영향으로 선한 일이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O 너희는 땅의 소금이라. 그러나 소금이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쓸모없어진 소금은 밖에 내어 버려져 사람들의 발에 밟힐 뿐이니라.
마태복음 5장 13절
우리는 땅의 소금입니다. 불교의 중처럼 산속에 들어가 분리된 삶으로 세상을 외면하는 도피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이땅에 쓸모있는 소금이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버려져 사람들에게 멸시를 당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의 이땅의 소금이라는 숙명에는 단 두가지의 선택만이 존재함을 알아야 합니다.
소금은 짠맛을 내거나, 맛을 잃고 버려짐을 당하거나 입니다. 오직 단 두가지 입니다. 우리가 세상과 타협하여 짠맛을 내지 못한다면 당장은 충돌이 없으나 결국은 나중에 멸시함이라는 세상과 충돌함으로 느껴는 고통보다 매우 큰 고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당신의 선택은 무엇입니까? 저는 짠맛이 나는 소금이 되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