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사용된 독일군 중전차
[현재 유일하게 작동이 가능한 TIGER-I 영국 보빙턴 전차박물관에서 복구한 전차로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고장으로 버려진것을 나포해 수리해서 현재 세계에서 유일하게 작동 가능한 티거전차이다]
<티거 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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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길이 | 8.24m |
차체길이 | 6.20m |
전체너비 | 3.73m |
전체높이 | 2.86m |
주포높이 | 2.19m |
전비중량 | 56.9t |
탑승인원 | 5명 |
엔진 | 마이바흐-HL230 P45 수랭식 V형 12기통 가솔린엔진 |
엔진출력 - 회전수 | 700HP - 3000rpm // 600HP - 2500rpm |
배기량 | 21.35L |
연료적재량 | 534L |
연료소비량 | 535L / 100Km (도로) |
최고속력 | 45km/h(도로), 20km/h(야지) |
항속거리 | 100km(도로), 60km(야지) |
중량당 마력 | 12.3Ps/t |
현가장치 | 토션 바 |
변속기 | Olvar 401216 (전진8단 후진4단) |
조향장치 // 구동륜 위치 | 메리트 마이바흐 // 전방 |
선회반경 | 7.00m |
무한궤도 폭 // 매수 | 72.5cm // 좌,우 각 96매 |
접지길이 // 접지압력 | 3.51m // 1.04Kg/㎠ |
초호능력 | 2.30m |
초월능력 | 79cm |
등판능력 | 35도 |
도하능력 | 1.20m |
주포조준장치 | TZF 9b |
포탑회전방식 | 수동 및 유압겸용 |
무장 | 36식 56구경장 88mm 전차포×1 (92발) |
7.92mm 기관총 MG34×2 (4,200발)[1] | |
9mm 기관단총 MP40×1 (전차병 휴대용) | |
장갑 | 차체 전면 100mm / 66도 |
차체 측면 상부 80mm / 90도 | |
차체 측면 하부 60mm / 90도 | |
차체 후면 82mm / 82도 | |
차체 상면 26mm / 0도 | |
차체 바닥 26mm / 0도 | |
포탑 방패 최대 110mm | |
포탑 전면 100mm / 90도 | |
포탑 측면 80mm / 90도 | |
포탑 후면 80mm / 90도 | |
포탑 상면 26mm / 0도 ~ 9도 |
2.1 개요
- Tiger의 외관 -
전장에 나간 타이거는 마치 맹수처럼 상대를 잔인하게 학살하는 사냥꾼이었다. - 영국 크롬웰 프로덕션, '2차대전사' '독일 전차의 완성, 타이거' 편 |
[티거 전차의 장갑은 당시 어떤 전차도 뚫을수 없는 전명장갑 100밀리 달했다]
[아프리카 튀니지에서 노획된 영국 보빙턴 전차박물관의 Tiger- 1 현재 유일하게 가동되는 진짜 티기전차이다]
형식번호가 6호 전차라곤 하지만 5호 전차인 판터보다도 앞서 개발 배치되었기에, 경사장갑 대신 전통적인 독일전차의 수직방향 장갑을 채택하고 있다. 그래서 티거를 보면 상자곽 혹은 꼭 책을 차곡차곡 쌓아놓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1942년 ~ 1943년의 기간중 티거에 사용된 위장패턴은 매우 다양하지만 올리브 그린(RAL 7008) 과 레드 브라운(RAL 8017)이 주로 쓰였다.
1943년 6월 - 505 重전차 대대
1943년 7월 - 그로스 도이칠란트 사단 제 1연대 - 치타델 작전시
[최초로 레닌그라드 방면에 투입된 티거 ..아직 준비가 안되었지만 히틀러의 독촉으로 502 중전차대대(sPz.Abt.502)로 1942년 8월 레닌그라드 방면에 4대를 투입했다.4대 모두 기관고장으로 제대로 활약하지는 못했지만 다행히 관통된 전차는 없었고 이중 1대가 소련군에 나포되어 연구하는데 이용하게 된다]
하지만 티거의 진가가 드러나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북아프리카에 투입된 티거를 장비한 501중전차대대는 티거를 완편 장비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등장 초기부터 100여대의 미군 전차를 날려버리더니 카세린 전투에서 미1기갑사단을 격파하는 대활약을 펼쳤다. 거기다 티거의 불썽 사나운 데뷔전을 만들었던 502중전차대대는 42년 말부터 계속된 레닌그라드를 해방시키려는 소련군의 공세를 막아내며 독일 중전차 대대 중에서도 특출난 활약으로 수백대의 소련군 전차를 날려버리며 이를 저지하는데 성공했다. 거기다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에선 중대 단위로 투입된 티거가 하르코프 북방에서 펼쳐진 소련군 기갑부대의 반격을 분쇄해 내며 티거의 위력을 톡톡히 보였고[5], 여기서 티거는 설원에서의 기동전까지 수행해 내는 능력을 보였다.[6]
[패색이 짙어진 전장말엽에는 공장에서 출고된채 위장색도 채 칠해지지 않은 삼산화이철 그대로 전장으로 보내지는 일도 많았다 그만큼 한대의 티거라도 급했기 때문이다]
[1943년 쿠르스트전은 티거전치의 본격적인 데뷔전이라 할수 있다. 쿠르스크 전투에 무려 150여대의 티거 전차가 참전하여 소련의 t-34전차를 상대로 맹활약을 하였다]
전설의 호랑이 사냥꾼!! 미하일비트만 (Michael Wittmann)
1914년 4월 22일 ~ 1944년 8월 8일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무장친위대 소속 군인. 가장 많이 적 전차를 격파했던 전차병 중 한 명이자, 전설적인 티거 에이스로 유명하다.
[미하일 비트만 중위는 티거를 이용 혁혁한 전과를 올린 티거에이스로 연합군이 프랑스 노르망디에 상륙한뒤 비트만의 2중대가 전장에 도착한 다음날인 1944년 6월 13일, 비트만은 숙영지 바로 옆에 있는 작은 마을인 빌레르-보카즈(Viller-Vocage)에서 6호 전차 티거I 한 대로 영국 7기갑사단의 선봉 전차부대에 괴멸적인 타격을 주어 그 이력의 클라이막스를 장식했다.그는 티거 한대로 적진에 침투해 무려 25대의 각종 전차와 장갑차를 때려부수었다]
최종 계급은 SS대위로, 그가 격파한 전차 수는 138대이고 대전차포는 132문이었다. 독일군 전차 에이스 순위에서는 5위[1]지만, 대전차포와 합계를 내면 1위. 사실 전차보다 대전차포가 더욱 상대하기 까다로운 적이기 때문에, 그런 대전차포를 130문이나 때려잡았다는 점에서 2차 세계대전 최고의 전차 에이스로 간주하는 견해도 있다.[2]
[히틀러로 부터 백엽검기사철십자훈장을 수여받는 모습]
본격적인 활약은 독소전쟁 중인 1941년 7월 우만 포위전에서 LSSAH사단 소속으로 당시 탑승차였던 3호 돌격포 A형으로 6대의 T-26 경전차를 격파한 것이 시작이다. 이후 1942년 초까지 돌격포를 타고 싸우다가 부상으로 후송, 완쾌 후 사관후보생 과정을 거쳐 42년 겨울에 3호 전차 전차장으로 전선에 돌아왔다. 이후 사단에 티거 중전차소대가 배치되면서 소대장으로 선발, 43년 2월의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에서 티거 에이스로서의 활약을 시작했다. 티거 소대는 곧 중대로 확대, 제1SS전차연대 13중대로 명명되어 쿠르스크 전투를 시작으로 일련의 활약을 거듭했으며, 비트만은 13중대 3소대장으로서 43년 중반~44년 초반을 보냈다. 특히 44년 1월의 체르카시 포위전에서 비트만은 단 3주 만에 50대에 달하는 적 전차를 격파, 100대 격파를 돌파하는 기염을 토했다. 이때의 공적으로 44년 2월에 중위가 되었다.
[그가 보카빌레주에서 홀로 25대의 적 전차와 장갑차를 때려부셨다는 그의 전차의 위장을 재현한 레플리카의 모습]
원래 13중대는 1943년 10월에 제101SS중전차대대로 개편이 예정[3] 되어 있었으나, 급박한 전황 때문에 제대로 개편이 이뤄지지 못했다. 그러다가 체르카시 포위전이 끝난 후 독일로 이동, 본격적으로 대대 재편성을 받았다. 이때 비트만은 2중대장 임무를 맡았다. 그리고 1944년 4월부터 6월까지 프랑스에 머물렀고 결국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시작되면서 전장으로 이동했다.
[포신에 새겨진 100대가 넘는 화려한 전과들 미하일 비트만 대위에게는 4명의 다른 승무원들이 있엇으며 그들의 환상적인 호홉으로 수퍼에이스로 등극할수 있었다 공교롭게도 그들은 같은날 모두 전사하게 된다]
비트만의 2중대가 전장에 도착한 다음날인 1944년 6월 13일, 비트만은 숙영지 바로 옆에 있는 작은 마을인 빌레르-보카즈(Viller-Vocage)에서 6호 전차 티거I 한 대로 영국 7기갑사단의 선봉 전차부대에 괴멸적인 타격을 주어 그 이력의 클라이막스를 장식했다.[4] 빌레르-보카즈 전투에서의 눈부신 활약에 아돌프 히틀러는 직접 그를 관저로 불러 공적을 치하하고 백엽검기사철십자훈장을 수여하였다. 또한, 이 공적으로 대위로 승진하게 된다.
[그의 탑승차량중 하나인 205번 차량 비트만과 그의 부하들은 하나늬 티거전차에만 탑승한것이 아닌 최소 3대이상의 각기 다른 티거 차량이 목격되고 있다]
이후 대대는 계속 전투에 참여했으나 비트만은 특별히 추가 전과를 올리지 못했고 대대의 전력은 계속해서 감소했다. 그러다가 1944년 8월 8일, 대대 지휘전차인 007호에 탑승하고 캉 남쪽 Saint-Aignan-de-Cramesnil 부근에서 캐나다 제4기갑사단과 교전을 벌이면서 최후의 전과인 전차 3대 격파를 기록하지만, 그 직후 적의 공격을 받고 비트만을 포함한 탑승자 전원이 전사하였다.
[영웅의 최후.. 호랑이도 밀물같이 달려드는 적의 전차 앞에서는 불멸할수 없었나 보다. 피격후 유폭으로 차체와 포탑이 날아간 그의 전차로 그의 최후가 얼마차 처참했는지 잘 보여주는 사진이다]
그에게 일격을 가한 것이 누구냐는 데에는 지금까지도 여러 가지의 설이 분분하다. 캐나다군 파이어플라이 전차의 협공설, 영국군의 공격기 호커 타이푼의 지상공격 로켓 피탄설 등이 있으나, 현재는 파이어플라이의 공격에 의한 피탄, 전사설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또한 이 전투의 전개 당시 비트만은 부상을 입고 후송된 대대장 대신 대대장 대리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는데, 이 전투의 경과를 두고 전차장으로서는 유능했으나 중대장으로서나 대대장으로서는 그다지 유능하지 못했다고 평가하는 사람도 있다.
[그가 최후에 탑승했던 차량으로 알려진 007번 차량의 모습]
어쨌든 전사한 비트만과 동료들의 유해는 전사한 곳 근처에 가매장되었으나 전후 그 소재를 파악하지 못해 이장하지 못했고, 1983년에 프랑스 연구자 에릭 르페브르와 그의 동료들에게 발견되어 라 캉브의 독일군 전몰자 묘지로 이장되었다.
[영웅의 묘.. 전사한 비트만과 동료들의 유해는 전사한 곳 근처에 가매장되었으나 전후 그 소재를 파악하지 못해 이장하지 못했고, 1983년에 프랑스 연구자 에릭 르페브르와 그의 동료들에게 발견되어 라 캉브의 독일군 전몰자 묘지로 이장되었다.]
이 사람 뿐이 아니라, 나치 독일의 수많은 에이스들은 대부분이 씁쓸한 최후를 맞이하여, 아랫것들이 X빠지게 고생해서 엄청난 업적을 이뤄봐야 윗대가리가 멍청하면 말짱 황이라는 만고의 진리를 몸으로 증명하고 있다.
---- [1] SS만으로는 1위이다. [2] 하지만 육군이 아닌 SS소속이었던 이유로 오토 카리우스와는 달리 현재 독일육군의 기록으로 인정되지 않는다고 한다. [3] 당시 SS는 기갑군단 직할 독립중전차대대를 편성하기 위해 각 사단의 중전차중대를 차출해서 대대로 확대 개편할 예정이었다. [4] 이 전투에서 27대의 전차를 격파했다.
출처 엔하키미러 http://mirror.enha.kr/wiki/%EB%AF%B8%ED%95%98%EC%9D%BC%20%EB%B9%84%ED%8A%B8%EB%A7%8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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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지만 용맹한 호랑이!! 오토 카리우스 (Otto Carius)
1922년 5월 27일~[1]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육군의 전차 에이스. 150~200대의 적 전차를 격파하며 맹활약했다.
쯔바이브르켄 출생. 군인을 동경하여 1940년 젊은 나이(18세)로 자원입대하게 된다. 왜소한 체격과 그로 인한 저체중으로 인해 입대가 2번 거부되지만, 근성(?)끝에 육군에 들어가게 된다. 의외로 병과지망을 대전차로 골랐는데 TO가 비질 않아 일단 보병이 되었다.
[작전회의 중인 오토카리우스 중위의 모습 그는 그리 잘 생긴것도 그렇다고 기골이 장대한 타입도 아니지만 한치의 오차도 인정하지 않는 철저함과 일단 전투에 들어서면 무모하리만큼 용맹성이 대단했던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하지만 동기들에 비하면 나이도 적고 체격이 왜소해 큰 스트레스를 받은 듯 하다. 오죽하면 사내답게 보이기 위해 수염을 기르려 했는데 솜털이 보송보송하게 나서 더 큰 좌절에 빠진적도 있다. 설상가상으로 행군간 기관총을 짊어지고 가다가 동료의 부축을 받아 복귀하는등 보병으로서는 그리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결국 중대장이 기갑부대로의 전출을 희망하는 지원자를 모집할때 참가하게 된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카리우스 옹의 아버지(이 분도 현역 군인)가 아들이 기갑병과에 들어가는걸 극력 반대했다는 것이다. 아마 효성이 지극한 사람이었다면 전설은 나타나지 않았을지도.....
[위의 사진은 유명한 타미야 킷으로 제품화되어있다 Item #35202번
전차병 훈련을 거친후 제20기갑사단 제21기갑연대에 배속되어 소련 침공에 참전한다.
사단 특성상 체코제 38(t) 전차[2]에 탑승(탄약수)했으며, 숱한 역경과 위기상황, 기본적으로 떨어지는 전차의 성능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실력과 팀워크로 혁혁한 전과를 달성, 1941년 8월에는 간부 후보로 추천받기에 이른다.
이후 본국으로 돌아와 장교훈련을 받은 오토 카리우스는 1942년 봄, 다시 21기갑연대에 원대 복귀하여 한동안은 전차의 부족으로 제설작업에 투입되었다가 새로이 보충차량이 들어오며 자기의 소대를 책임지게 되었다. 하지만 소대장으로서의 첫 임무에서 각 전차의 조종수와 탄약수들이 식사추진을 나간사이에 소련군이 공격을 해오자 공황상태에 빠져 달아났다.(....) 이로 인해 체면을 크게 구기고 본부 중대의 공병소대장으로 잠시 활동하였다. 그러다가 우연하게 온 기회[3]를 잡아 때마침 신형 중전차로 맹위를 떨치고 있던 티거 중대의 소대장으로 부임하게 되니…. 날개달린 호랑이이자 전설의 시작이었다.
[오토 카리우스가 소속된 부대는 제502중전차대대(그 중 제2중대의 소대장)로써, 1942년 겨울 레닌그라드 방면에서 최초로 티거를 실전에 운용한 부대이기도 했다.]
오토 카리우스가 소속된 부대는 제502중전차대대(그 중 제2중대의 소대장)로써, 1942년 겨울 레닌그라드 방면에서 최초로 티거를 실전에 운용한 부대이기도 했다. 오토 카리우스에 대한 부대원들의 첫 반응은, 그들의 티거에 대한 인상 만큼이나 좋지 않았는데[4], 한마디로 "이렇게 허약하게 생긴 새퀴가 대장노릇하며 제대로 싸울 수 있겠어?"였다. 그러나 이후 먼치킨급 실력을 과시하며 모두를 순식간에 닥버로우하게 만든다.(…) 그런데 502 중전차대대 2중대의 경우 중대장들이 너무 자주 바뀌거나 혹은 지휘력에 문제가 있어 카리우스가 한동안 중대장 대리로 사실상 지휘를 책임졌다.[5]
[오토카리우스는 보기에는 왜소해 보여도 일단 전투에 들어가면 어떤 전차장보다 용맹했는데 가장 유명한 전투로는 나르바 방어전과 "오토 카리우스판 빌레르-보카쥬 활극"이라 일컬어지는 마르나파 전투가 있다. 이 전투에서 카리우스는 단 8대의 티거로 선발대인 소련전차 22대를(JS-2 17대, T34/85 5대) 격파하고, 적 여단장의 시신에서 기동계획이 표시된 지도를 노획하고는 후속하던 본대 28대의 적전차를 매복으로 섬멸, 소련군 일개 전차여단을 쓸어버렸다. 이 전과로 오토 카리우스는 백엽 기사검 철십자훈장을 수여받게 된다 자칫 무모해 보이기도 하는 그의 행동은 그의 명성을 천하에 알리는 전설과 같은 일화가 되었다]
제502중전차대대가 주로 동부전선의 북부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발트 3국에서의 지연전에서 활약을 펼쳤는데, 가장 유명한 전투로는 나르바 방어전과 "오토 카리우스판 빌레르-보카쥬 활극"이라 일컬어지는 마르나파 전투가 있다. 이 전투에서 카리우스는 단 8대의 티거로 선발대인 소련전차 22대를(JS-2 17대, T34/85 5대) 격파하고, 적 여단장의 시신에서 기동계획이 표시된 지도를 노획하고는 후속하던 본대 28대의 적전차를 매복으로 섬멸, 소련군 일개 전차여단을 쓸어버렸다. 이 전과로 오토 카리우스는 백엽 기사검 철십자훈장을 수여받게 된다.
1943년,휘하 하사와 함께 IL-2를 티거로 잡으신 전적도 있으시다고 한다. [6]
1944년 우크라이나에서는 단 두대의 티거로 30분만에 근거리 난타전으로 소련군의 IS-2로 구성된 1개 중전차연대를 30분만에 전멸시킨 괴수짓을 벌였다. 그리고 그들의 피해는 헤드라이트 하나...(이런 괴물.. 뭐 두 티거의 전차장들이 둘다 100기 이상의 전차격파대수를 자랑하는 괴물들이었다지만 이건 너무하잖아!!!)
[오토카리우스는 티거만 탄게 아니다..1944년 7월 말, 전선 정찰임무를 수행하던 중 매복한 적의 공격에 의해 모터사이클이 피격되면서 부상을 입고 후방으로 후송되었으며, 두달 뒤에는 신형 구축전차 야크트 티거를 운용하는 제512중구축전차대대 소속 중대장으로 부임하여 서부전선의 미영군을 상대로 한 방어전을 전개하게 된다. 비교적 날렵하고 기동성이 좋았던 티거에 익숙했던 오토 카리우스는 느리고 육중한 야크트티거를 매우 싫어했으며, 특히 고정식 전투실(포탑)의 전투력 한계와 엄청난 무게에서 오는 변속기와 서스펜션의 고장빈도에 대해서는 신랄한 비판을 아끼지 않았다.]
1944년 7월 말, 전선 정찰임무를 수행하던 중 매복한 적의 공격에 의해 모터사이클이 피격되면서 부상을 입고 후방으로 후송되었으며, 두달 뒤에는 신형 구축전차 야크트 티거를 운용하는 제512중구축전차대대 소속 중대장으로 부임하여 서부전선의 미영군을 상대로 한 방어전을 전개하게 된다. 비교적 날렵하고 기동성이 좋았던 티거에 익숙했던 오토 카리우스는 느리고 육중한 야크트티거를 매우 싫어했으며, 특히 고정식 전투실(포탑)의 전투력 한계와 엄청난 무게에서 오는 변속기와 서스펜션의 고장빈도에 대해서는 신랄한 비판을 아끼지 않았다.
[오토카리우스가 탔었던 야크르티거도 타미야에서 제품화 되어 있다 Item No:35307 German Heavy Tank Destroyer Jagdtiger Mid Production Commander Otto Carius 가 바로 그것이다]
1945년 4월 15일에 미군에게 항복하였고, 이로써 2차 세계대전에서 그의 역할은 끝났다. 전쟁 기간동안 약 150대의 연합군 전차를 격파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이것은 당시 독일군 전차 에이스들 전체에서 2위[7]였다. 주로 티거-1에 의해 달성된 전과였다.
전쟁이 끝난 시점에서도 비교적 젊었던 그는 약사자격증을 취득하여 약국을 차렸다. 전장에서 자신과 함께했던 전차를 기리는 뜻에서 '호랑이 약국'이라는 이름을 붙였고, 90세가 넘는 고령의 나이인 지금도 계속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8]
[오토카리우스 영감의 최근 모습 독일에서 그가 한때 탔던 타이거의 이름을 딴 호랑이 약국에 약사로 일하고 있는 그의 모습 오토카리우스는 비교적 이른 나이에 전쟁에 참여했었고 종전시에도 불과 그의 나이 25세였기 때문에 형기를 마치고 약사공부에 도전하여 약사로 일했다고 한다]
전쟁 회고록으로 "진흙탕 속의 호랑이"가 있으며 일본의 유명감독 미야자키 하야오가 이 책을 바탕으로 동명의 만화를 그리기도 했다.
참고로 지금까지도 자신이 티거에 탑승했다는 사실에 매우 큰 자부심을 느끼고 있으며, 1992년에 있었던 어느 기자와의 인터뷰에선 "현대 독일연방군의 레오파르트 전차는 승무원에 대한 배려가 티거보다 떨어진다"며 까기도 했다. (…) [9]
[미아쟈카 하야오 감독과 오토카리우스의 노후의 모습]
이거 내가 현역때 타던거여.
---- [1] 2010년 사망했다는 미확인 보도가 있었으나, 아직 살아계신다. [2] 2차 대전 초기 10개 사단 중 3개 사단(6, 7, 8기갑사단)에 이어서, 1940년 후반에서 41년 사이에 추가 창설한 4개 기갑사단(12, 19, 20, 22기갑사단)은 독일의 전차공급능력 문제로 체코제 전차로 무장했다. 다른 사단들도 기갑사단의 확대개편 과정에서 전차 정수를 절반까지 줄였다. [3] 진짜 우연한 기회다. 어쩌다보니 잠시 파데보른의 장교클럽 관리관역할을 맡게 되었는데, 마침 중대원들과 종종 술자리를 열던 502 중전차 대대 2중대장과 의기투합(...)해서 합류했다. [4] 티거가 처음 보급되었을 때, 독일 전차병들 대부분의 반응은 "고놈 참 딥다리 못생겼다"였다고 한다. (…) [5] 다른 소대장들은 부사관이었다. 본래 독일군은 간부 부족으로 부사관 또는 준사관이 소대장을 맡는 경우가 많은 편이었다. [6] 소련기가 언제나 같은 시간, 같은 고도, 같은 방향에서 매일 날아오자 '포만 잘쏘면 맞출수 있겠는대?' 라고 생각하고 매복하여 실제로 격추(...). 전차포로 대공 사격을 해서 실제 격추기록을 새운 매우드문 사례다. [7] 공인격파기록 150+@. 1위는 쿠르트 크니스펠 상사로 공인격파기록 168+@지만, 비공인 격파기록을 포함하면 카리우스가 200대까지 계산할 수 있어서 순위가 바뀔 수도 있다. [8] 호랑이 약국 홈페이지 : 外http://www.tiger-apotheke.de 현재 파트타임 근무라고 [9] 심지어 회고록의 한 챕터 제목은 "티거 찬양" 이며, 전차의 공격력과 장갑, 기동성의 밸런스가 티거에서 가장 이상적으로 드러났다고 쓰셨다!
출처 엔하키미러 http://mirror.enha.kr/wiki/%EB%AF%B8%ED%95%98%EC%9D%BC%20%EB%B9%84%ED%8A%B8%EB%A7%8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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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 개발
[티거전차가 등장하기까지 시험전차들의 모습의 변천사를 한눈에 볼수 있다]
[포르쉐 박사팀이 개발중이였던 티거전차의 또다른 원형 VK4501(P)의 모습 차체 중앙에 공랭식 디젤엔진을 두어 발전기를 돌리고, 다시 모터를 구동시켜 drive wheel을 회전시키는 electro-mechanical transmission 방식이 적용되었으며, 이로 인해 기존 방식보다 중량이 더 나가게 되었다. 결국 이방식은 복잡한 구동방식으로 최종경합에서 떨어졌다 하지만 이때 만들어진 차체를 이용 페르디란트를 제작하는데 이용되었다]
[드디어 완성된 티거의 시제품 VK4501(H) 의 모습 티거의 전형적인 모습이 잘 드러나는 모습이다]
[VK4501(P) ProtoType 의 모습 헨셀타입과 는 꽤 다른 형태로 포탑이 앞쪽으로 쏠린 형태를 하고 있다. 이는 가솔린 엔진을 이용 전지를 총전하고 충전된 전지를 이용 모터를 돌린다는 상당히 복잡한 방식으로 결국 복잡한 방식으로 최종 경합에서 탈락하게 된다]
요즘에야 연비 때문에 주목받는 기관이지만, 당시엔 사실 기계식 트랜스미션의 신뢰성 확보가 어려워서 50톤 이상 전차를 움직이려면 부득이하게 이것 이외의 방법이 없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았다. 실제로 이 방식은 기계식 트랜스미션보다 속도 제어에 유리하며 효율 측면에서도 나름 유리하다. 또한, 얼간이짓으로 악명 높은 마우스 초중전차도 포르셰 설계답게 같은 방식의 동력계통을 채택했는데, 사실 이놈 정도 되면 이 방법이 아니면 제대로 기동시키기도 어려웠다..
[결국 포르쉐팀과 헨셀팀의 경합의 승자는 헨셀팀의 차량으로 결정나게 되었다. 사진은 막 공장에서 출시되고 있는 시제품 티거 전차의 모습]
2.2 장점
[새로운 중전차의 정식명칭은 6호전차 H형(Panzerkampfwagen VI Ausführung H, 열대용 필터 장착)였으나, 곧 6호전차 E형(Panzerkampfwagen VI Ausführung E)으로 변경된다.]
[새로운 6호전차는 당시의 어떤 전차와도 1:1 상태에서 지지 않을정도로 우수한 성능을 가진 전차였다]
- 76.2mm 포탄 11발, 45~57mm 대전차포탄 14발, 14.5mm 대전차총탄 227발, 대전차지뢰 3발... 을 다 맞고도 적을 유린한 후 살아 달아난 티거가 있을 정도다(…). 즉 "괜찮아! 튕겨냈다!" 전설의 원조인 셈.
- 1943년 1월 10일, 503 중전차 대대의 121호차와 141호차는 각각 적 전차포와 대전차포 250발 이상(....)을 맞고도 버틴 사례가 있다.
소련군이 공포탄만 쐈나.
- 1943년 7월 12일, 시칠리아에 배치된 504 중전차대대 2중대의 티거 2대는 적탄 100발 이상씩 맞고도 포위망을 뚫고 탈출했으나 연료가 없어 자폭해야 했다.
[티거전차의 주포인 주포인 'KwK 36'은 88밀리 대공포를 전차용으로 개조한것으로 2천미터 거리에서 연합군의 전차를 간단히 격파할수 있었다]
[이후 문제점을 해결한 티거는 크루스크 전투에 150여대가 투입되어 소련의 최신 전차 t-34-76형을 상대로 맹활약을 펼치게 된다]
[북아프리카 전선에서서도 티거의 활약은 대단했는데 당시 이에 맞설 전차가 없었다 영국군및 미군등 연합군은 공식적으로 티거를 만나면 도망쳐도 좋다는 아이젠아워 당시 총 사령관의 허락을 받기에 이른다]
[회의중인 전차장들 이때부터 일부 전차병들은 유보트용 가죽자킷을 입기도 하였는데 이는 멋이라기 보다는 피탄시 가죽캐칫이 화염으로 부터 승무원을 보호해주는 역활을 탁월했기 때문이다]
다만 한가지 유의할 것은 이 티거의 가격은 평균가라는 점이다. 티거 극초기형은 80만 라이히스마르크에 달했는데, 소량생산[10]과 노동자 숙련도 부족 등이 원인이었다. 이후 생산량이 늘고, 노동자들이 숙련된 중, 후기형까지 합쳐지면서 평균가가 하락하였다.[11]
[티거전차는 전통적인 토션바방식과 오버랩 방식의 현가장치를 이용하였는데 이것은 바퀴를 여러개 겹쳐 전차의 하중을 지탱하는것으로 57톤이 넘는 티거의 경우 당시 기술로는 적합한 방식이였으나 이로인해 차체의 무게가 무거워지고 제작단가나 방법도 복잡해지는 이유가 되었다]
참전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4호 전차(28톤)보다 오히려 더 기동성이 좋은 면도 많았고, 처음 T-34와 동계전투에서 교전한 전차병들은 심지어 T-34보다도 기동성이 좋다고 느꼈을 정도다. 얼마 안 되는 42년 동계전투 티거 운용 경험자 거의 대부분이 그런 것처럼 느낀 탓에, 이런 느낌이 반영된 보고서가 공식적으로 상부에 올라갔다고.
[대전중반부터는 출력이 강화된 HL 230 P45로 교체되었는데 이후 출력부족 문제는 조금 나아지긴 했다]
2.3 호랑이를 잡아라!
[동부전선에 급파된 티거의 모습 티거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전차였으나 히틀러의 고집으로 동부전선에 3량이 투입되어 격파되거나 노획되는 수모를 당하게 된다]
[티거를 정면에서 맞설 전차는 연합군에 거의 없었다. 물론 대전 후반에는 이를 맞설 전차들이 등장하기도 하였지만 대부분 티거들은 연합군의 공중지원에 의한 피해가 막심했다]
[57톤에 달하는 티거가 바박을 위로하고 뒤집어진 모습 이는 공중에서 공격외에는 이 육중한 전차를 뒤집어 놓을 방법은 없었다]
[파이어플라이가 장비한 영국제 17파운드 포는 보통의 APCBC탄을 쏘면, 1,000미터 이상에서 티거의 정면을 뚫을 수 있었으나 이 포는 탄도변화가 심해 명중률이 극히 떨어진다는 문제점이 있었다. 어찌되었던 티거전차를 원거리에서 격파할수 있는 전차가 있다는 소문이 돌자 독일군은 포신이 긴 셔먼전차는 보는즉시 우선 격파하라는 명령이 떨어졌고 이를 막기위해 연합군은 위장을 하던지 포신 부분에 백색 페인트를 칧 포신을 짧게 보이게 하려는 노력등 각고의 노력을 하기에 이른다]
[대전후반에 이르면 엽합군에서도 티거에 맞설 전차를 개발하게 되는데 그중 하나가 미군의 M26 퍼싱 전차였다 강력한 90mm 주포를 탑재한 이전차는 유일하게 티거를 정면에서 맞서 이길수 있는 전차로 대전 후반에 티거와 맞붙기도 했다. 결과는 판정승.. 티거의 88밀리 주포에 맞은 퍼싱전차를 이처럼 주포가 나가고 포방패의 일부가 파손되었다, 이 전차와 맞선 전차는 이어 동료전차에 의해 피격되어 불타올랐다고 한다]
2.4 생산량에 대한 말들
[152mm Howitzer-gun M1937 (ML-20)를 장착한 구축전차는 KV전차의 차체를 이용한 SU-152와 IS 전차를 이용한 ISU-152로 구분되는데 두 전차다 장갑은 뛰어났으나 엄청나게 느리고 거의 좌우 회전이 어려어 매복 공격하는 방어적 전술을 주로 썼다. 특히 포탄과 장약이 분리되어 장착되는 152mm Howitzer-gun M1937 (ML-20) 포의 특성산 분당 3~4발 (실제로는 분당 2발도 쏘기 힘들었다)밖에 발사할수 없었고 그나마 대전차용으로 개발된 포도 아니여서 탄속이 느리고 거의 곡선을 그리며 발사되어 한번에 명중시키기가 여간어려운게 아니였다고.. 다만 구경이 구경이니만큼 일단 맞기만 하면 어떤 전차로 한방에 보내는건 가능했다고 한다]
2.5 운용상의 문제에 대한 말들
한데 이런 자료를 보면 아예 여타 독일 전차들보다 티거의 가동률이 높을 때까지 있을 정도로 세간의 인식과는 다른 결과를 보여준다.
즉 총 차량 숫자 대비 운용가능 차량 숫자를 따져보면 무난한 수준. 전시 가동율이라는 통계가 갖는 허상 때문에 그런 경향이 더욱 강하게 퍼졌는데, 사실 티거의 가동율이 낮다고 까이는 시기를 보면 다른 전차들의 가동율은 훨씬 낮고 이중 대부분은 애초에 정원조차 채우지 못한 상태인 탓이 크다. 아예 대파돼서 회수, 공장에 들어간 장기수리 차량도 대대/연대 보유 차량에서 빠지지 않는 것이다.
[티거는 특유의 오버랩 방식의 현가장치를 이용하엿기 때문에 독일의 철도에는 규격이상으로 사용할수 없었는데 티거의 캐터필러는 725mm에 달하는 광폭이었으므로, 이것을 실을 경우 화차보다 폭이 넓어지게 되었고, 따라서 520mm짜리 수송용 캐터필러가 별도로 필요했다. 이때는 또 바깥쪽의 로드휠 8개(한쪽 4개씩)를 떼어내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이것을 떼어내고 장착하는 일은 일일히 손으로 해야했기 때문에 승무원들이 가장 싫어하는 일중 하나였다]
거기다 무게가 있다 보니 퍼진 티거를 같은 티거로 견인하려 들면 견인하던 티거도 퍼질 확률이 있기에 티거로 티거를 견인하는 것은 엄격하게 금지했다. 운용 교범상에는 정비대 표준장비인 18톤 트럭 3대를 이어서 견인토록 했으며 후기에는 베르게판터 등의 중전차 회수차량으로 견인토록 하고 있다. 하지만 사실 18톤 트럭 숫자도 적은데다 방어력의 문제로 전선 가까이까지 끌고 오기는 좀 골룸했고, 베르게판터는 수가 적은지라 그냥 다른 티거로 견인하는 사진이 많다. 빌레르 보카쥬 전투 직후 231호차를 다른 티거로 견인하는 유명한 사진도 있고... 동부전선 한정으로 전투시 파손된 티거의 포탑을 떼어 견인차량으로 사용한 베르게 티거도 있었으나 페르디난트/엘레판트 운용대대의 포르쉐 타입 티거를 개조한 베르게 티거 외에는 전부 현지 개조품으로 육군에서는 이를 엄격히 금지했다. 전쟁 말기가 되면 마땅히 견인할 수단과 시간이 없어 고장난 티거는 바로 방치/유기되기 일쑤였다.
[티거를 정면에서 맞설 전차는 연합군에 거의 없었다. 물론 대전 후반에는 이를 맞설 전차들이 등장하기도 하였지만 대부분 티거들은 연합군의 공중지원에 의한 피해가 막심했다]
- 이 고증을 따라 컴퍼니 오브 히어로즈 테일즈 오브 밸러의 캠페인중 하나인 '티거 에이스' 첫 미션에서 엔진이 고장나서 가만히 앉아서 수리될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 툭하면 발생한다. 오죽하면 미션 도중에 "슬슬 엔진 나갈 때가 됐는데..." 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다행히도 승무원이 나가거나 하진 않고 차내에서 수리하는데다가 이 캠페인에서 티거는 전차 무쌍을 찍으니...
[티거전차는 전통적인 토션바방식과 오버랩 방식의 현가장치를 이용하였는데 이것은 바퀴를 여러개 겹쳐 전차의 하중을 지탱하는것으로 57톤이 넘는 티거의 경우 당시 기술로는 적합한 방식이였으나 이로인해 차체의 무게가 무거워지고 제작단가나 방법도 복잡해지는 이유가 되었다]
2.6 전쟁이 끝난 후에는...
[1942년말 북아프리카에 파견된 501중전차대대소속의 차량들은 데저트옐로루 (RAL 8020)으로 도색되었다. 데져트옐로우는 티거전차의 거의 표준도색으로 불리는 색으로 여기에 녹색의 거느다란 선이 더해지거나 갈색이 추가되기도 하면서 점차 다양한 위장패턴이 등장하게 된다]
[아프리카 튀니지에서 노획된 영국 보빙턴 전차박물관의 Tiger- 1 현재 유일하게 가동되는 진짜 티기전차이다]
2.7 티거피벨
2.8 파생형
2.9 총평 ¶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만 봐도... 유사한 외모 덕 좀 봤다는 4호 전차 H형]
[오토 카리우스가 소속된 부대는 제502중전차대대(그 중 제2중대의 소대장)로써, 1942년 겨울 레닌그라드 방면에서 최초로 티거를 실전에 운용한 부대이기도 했다.]
[오토카리우스는 보기에는 왜소해 보여도 일단 전투에 들어가면 어떤 전차장보다 용맹했는데 가장 유명한 전투로는 나르바 방어전과 "오토 카리우스판 빌레르-보카쥬 활극"이라 일컬어지는 마르나파 전투가 있다. 이 전투에서 카리우스는 단 8대의 티거로 선발대인 소련전차 22대를(JS-2 17대, T34/85 5대) 격파하고, 적 여단장의 시신에서 기동계획이 표시된 지도를 노획하고는 후속하던 본대 28대의 적전차를 매복으로 섬멸, 소련군 일개 전차여단을 쓸어버렸다. 이 전과로 오토 카리우스는 백엽 기사검 철십자훈장을 수여받게 된다 자칫 무모해 보이기도 하는 그의 행동은 그의 명성을 천하에 알리는 전설과 같은 일화가 되었다]
2.10 매체 속의 티거
[1] 지휘 전차는 공축기관총을 제거하고 추가 무전기를 장착했으며 탄약수가 조작한다.
[2] 독일어로는 '티거 아인스'
[3] 근데 일본에서는 어째서인지 티게르라는 표현이 더 많다.
[4] 원어 발음은 티이거에 근접하지만, 한글의 외래어 표기법상 장음 표기는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티거라고 표기하는 것이 옳다.
[5] 미하엘 비트만이 티거 에이스로서의 능력을 처음 보인 게 이 때.
[6] 한 예로 이 무렵 티거 2대가 T-34 수십여대와 교전하여 16대를 격파하자 나머지 소련 전차들이 후퇴하기 시작했지만 이들을 추격하여 18대를 추가로 격파했다.
[7] 사실 이양반은 1901년에 이미 하이브리드 기관을 이용한 자동차를 만든 바 있다. 괸히 천재 엔지니어로 불리는게 아니다.
[8] 덕분에 시간이 가면 갈수록 판터만 밀린다.(1945년 1월 가동률은 티거가 58%, 판터가 45%이고. 그 외 듣보잡들은 지못미)
[9] 3.000m 대 에서도 관통당한다.(그 당시 원시적인(현대에 비해서) 조준장치로는 2.500m대는 거의 럭키샷 이라는걸 생각하면 대단한거다.) 그리고 T-35/85는 포탑 후면을 제외하고도, 2,000m 이내에 관통 당한다.
[10] 티거 초기형은 1942년 8월부터 1943년 6월까지 347대가 생산, 중기형은 1943년 7월~1944년 1월 동안 478대 생산, 후기형은 1944년 2월~1944년 8월 동안 530대 생산.
[11] 당대 독일의 야금 기술과 차량 기술의 정점인 티거나 판터가 싼 이유는. 당시 독일은 전시준비를 위해 1930년대 후반부터 철저한 배급제를 유지를 했고, 본국이나 동맹국 국민에게 강제적인 노동을 시킨 덕분에 돈(임금)의 비중은 그리 크지 않았다.
[12] 야지 기동성은 어느 나라나 비슷한 수준, 즉 20km/h 정도였다. 다만 트랜스미션 및 종감속기에 가해지는 부하의 강도는 전차가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큰 편이었고, 그런 점에서 이론상으로는 T-34보다 티거의 야지 기동시 부담이 더 큰 게 정상이었다. KV라면 티거보다 더 사정이 나쁘기 십상이고... 그런데 현실은 부품의 품질유지 및 설계상 배려 문제, 그리고 승무원들의 숙련도 때문에라도 티거가 T-34보다도 나은 편이었다. 물론 제대로 정비가 될 때 한정으로.
[13] 모에! 전차학교에서는 속도와 기동성을 하나의 개념으로 뭉뚱그려서 표현해서 그런 것인지 몰라도 티거의 기동성이 낮다고 나온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헛소리.사실 속도=기동성으로 싸잡아 표현한 듯 하다.
[14] 물론 티거를 전술적으로 유리한 위치에서 몰아낼 수 있기는 했으나, 그렇다고 셔먼이 우세해진다고 보기는 어려웠다.오히려 티거를 빡치게 만들수도
[15] 미국과 소련이 셔먼과 T-34생산을 위해서 십여 개가 넘는 공장을 가동한 것과는 달리 독일은 6천량 남짓한 판터 생산을 위해 3개 공장을 가동했고, 티거에 이르면 단 1개 공장만 가동했다. 만약 티거 생산공장이 3개였다면 티거의 총생산수는 최소한 4천대에 이를 것이다.
[16] 엔진이 다르다. 노획 당시엔 HL210이었지만 당장 가동 가능한 엔진은 전부 티거II용 HL230이었어서 부득이하게 HL230을 탑재했고, 원래 탑재돼 있던 HL210 엔진은 컷오프 전시물로 전용했다.
[17] 탈것(배, 자동차 등)을 여성화시켜 부르는 서양 문화에서는 모에화(?) 자체는 특별할 것 없지만, 이런 매뉴얼이 군에서 정식 채용된 매뉴얼이란 것이 놀라운 점이다.
[18] 13권 일러스트에서는 헨셀형 포탑의 티거 2가 그려져 있지만 14권 일러스트에서는 티거가 그려져 있다. 어느것이 진짜?
[19] 파이퍼 전투단으로 유명한 SS 501 중전차 대대에서 314, 324, 334 세 대의 티거 2가 탑승원이 밝혀지지 않았다. 일러스트의 324호차가 어쩌면 혹시나...
[20] 라이언 일병 구하기와 켈리의 영웅들에서 등장하는 티거 전차들은 T-34전차의 외형을 개조해서 만든 모조품들이다. 오리지널에 비해서 포탑이 약간 앞에 달려 있는 점이 포인트.
[21] 이 부분은 의역이다. bounce는 '통통 튄다'와 '활기가 넘치다'라는 뜻이 있고, trounce는 '완파하다', flounce는 '여봐란 듯하다', pounce는 '공격하려고 덮치다'라는 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