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사르는 왜 루비콘강을 건넜을까?
외통수’ 로마 진군…폼페이우스 제압 정치권력 장악
폼페이우스와 추종세력 제압 후 위풍당당하게 로마로 귀환
원로원 권한을 약화시키고 종신 독재관으로 중요 권한 장악
로마 군단병 존경받은 카이사르 장군 원로원 의원들 단검에 찔려 생 마감
기사사진과 설명
루비콘강을 건너는 카이사르와 로마 군단 병력. 필자 제공 |
● 결단의 동기와 그 결과
왜 그는 루비콘강 도하(渡河)를 결행했을까? 아마도 정확한 이유는 당시 카이사르 자신 외에는 아무도 모를 것이다. 그가 집필한 『갈리아 원정기』에는 이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고, 단지 강을 건넌 후 처음 만나는 중요 도시인 ‘아리미눔 도착’으로만 적고 있다. 이후에 나온 로마시대 저술에도 도하 이유에 대한 기록은 없고, “주사위는 던져졌다”(수에토니우스의 글)라는 말만 전해지고 있다. 따라서 현재로서는 당대에 카이사르가 처했던 제반 상황을 고려해 추론하는 수밖에 없다.
카이사르가 자신의 목숨 및 정치생명을 담보로 건넜던 루비콘강은 어떤 강일까? 루비콘강은 이탈리아 반도 중북부에 있는 작은 하천이다. 이는 로마시대에 아리미눔과 카이세나라는 두 도시 사이를 통과해 아드리아해로 흘러 들어갔다. 그런데 중요한 점은 이 강의 모양새나 크기가 아니라 그 위치의 상징성에 있었다. 카이사르가 도하하기 이전부터 루비콘강은 이탈리아와 속주인 갈리아 지방을 구분하는 경계선이었다. 군사원정을 위해 국경 밖으로 나갔던 장군이나 군대는 로마로 귀환할 때, 로마 공화정에 충성한다는 서약의 의미로 일단 모든 무장을 해제한 뒤에야 루비콘강을 건널 수 있었다.
따라서 전통으로 시작해 법규화된 이 원칙을 어기고 무장한 채 루비콘강을 건너 이탈리아 영내로 들어오는 모든 군사행동은 로마 공화정에 대한 반역 행위로 간주됐다. 해당 장군이나 군인들은 국가에 대한 반역자로 낙인찍힌 채 자동적으로 사형에 처해질 수 있었다.
이러한 원칙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을 카이사르는 왜 루비콘강을 건너는 모험을 했을까? 당시 그가 처했던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그 해답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카이사르가 루비콘강을 도하한 본질은 로마 원로원을 중심으로 자행되고 있던 특권계층만을 위한 귀족들의 타락한 통치행태를 그대로 수용할 것이냐, 아니면 강력한 권한을 행사해서라도 민중을 위하는 통치체제로 변화시킬 것이냐는 데 있었다. 그는 두 길 중 한 길을 선택해야만 하는 일종의 정치역학적 상황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이 시기에 로마 지배층의 정치 지형도는 크게 세 갈래로 나뉘어 있었다. 즉, 원로원을 구성하고 있던 귀족들, 그동안 카이사르와 뜻을 같이했으나 그의 빠른 부상에 위협을 느끼고 원로원 진영으로 기운 폼페이우스 세력, 그리고 갈리아 원정의 눈부신 성공에 힘입어 민중의 지지를 받으면서 빠르게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고 있던 카이사르 지지세력 등이었다. 누구도 동족상잔을 원치 않았으나 카이사르가 어떠한 행동을 취하든 충돌은 피할 수 없는 현실로 다가왔다.
전광석화와 같은 작전으로 로마로 진군, 일단 공화정의 심장인 로마를 장악한 카이사르는 가차 없이 폼페이우스와 그의 추종세력을 제압하는 국면으로 돌입했다. 그는 먼저 히스파니아를 평정한 후 폼페이우스의 거점이라 할 수 있는 동지중해 방면으로 향했다. 쌍방 간 전투는 주로 그리스 반도에서 벌어졌다. 수차례의 충돌과 조우 끝에 마침내 양측은 기원전 48년 8월 그리스 내륙의 파르살루스에서 최후의 결전에 임했다. 전력상 열세에도 불구하고 승리의 여신은 리더에 대한 충성과 상호 신뢰로 똘똘 뭉친 카이사르 군단의 손을 들어줬다. 패배 후 이집트로 도주한 폼페이우스가 그곳에서 암살당하면서 권력투쟁의 서막은 끝나게 됐다.
위풍당당하게 로마로 귀환한 카이사르는 이제 군사적 영웅이자 명실상부한 최고 권력자로서 제반 개혁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내전 동안 폼페이우스를 지지했던 원로원의 권한을 약화시키고, 그 대신 자신이 종신 독재관으로 취임해 국가의 중요한 권한을 장악했다. 이러한 조치는 당연히 기득권층인 원로원 의원들의 격렬한 반대를 불러왔다. 이들이 내린 결론은 로마의 자랑스러운 전통인 ‘공화정’을 위협하려는 자는 그가 누구든 응징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파르티아 원정 준비로 분주하던 카이사르는 기원전 44년 3월 15일, 원로원의 계단에서 자신이 총애한 브루투스마저 가담한 일단의 원로원 의원들의 단검에 찔려서 56세의 나이로 죽고 말았다. 이후 로마는 또다시 내전에 휩싸이게 됐다.
결국 이 모든 혼란을 수습하고 로마제국의 기초를 놓은 인물은 바로 카이사르의 양자(養子)로서 로마사에서 아우구스투스(존엄자)로 호칭되는 옥타비아누스(B.C. 63~A.D. 14)였다. 카이사르 필생의 꿈이 자신의 입양 아들에 의해 달성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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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비콘강의 현재 모습. 필자 제공 |
● 사건의 역사적 영향
카이사르의 루비콘강 도하 사건은 이후 역사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을까? 직접적으로는 카이사르가 정치권력을 장악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줬다. 국정을 장악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암살당했기에 그가 자신의 정치적 성과를 남기기에는 시간이 짧았다. 만일 그가 그때 죽지 않았더라면, 10여 년 이상을 더 살면서 로마를 위해 역사에 남을 만한 업적들을 더 남겼을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고 그가 이후 로마의 발전을 위해 실제로 이룬 업적들을 과소평가할 수는 없다. 권력을 장악한 그는 우선 하드웨어 측면으로는 도시 로마를 감싸고 있던 성벽을 허물고, 소프트웨어 측면에서는 수천 명의 히스파니아 및 갈리아 속주민들에게 로마 시민권을 부여했다. 이후 로마 문명의 특징으로 표상되는 개방성과 포용성의 기초를 놓은 셈이다. 바로 이 특질 위에서 이후 로마가 강대한 제국으로 장구한 세월 동안 존속할 수 있었음을 고려할 때, 카이사르야말로 진정으로 천 년 제국 로마의 토대를 놓은 인물임을 부인하기 어렵다.
이러한 국내의 개혁 작업보다도 그가 향후 로마제국의 발전을 위해 가장 크게 기여한 점은 로마의 영토를 서북유럽, 즉 갈리아 지방으로 넓혔다는 사실이다. 그는 당시 로마의 지도자로서는 드물게 유럽 서북지방의 잠재적 중요성을 간파하고 자신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그 과업을 완수했던 것이다. 그가 갈리아, 즉 오늘날 유럽의 핵심지역을 로마세계로 편입시킴으로써 당대 경제적 이득은 물론이고 이후 그리스-로마 문명이 오늘날 유럽 문명의 중심축으로 뿌리내릴 수 있었다.
끝으로,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점이 있다. 카이사르는 법률가이자 웅변가로 출발해 정치가로 명성을 날렸으나 그가 로마의 지배자가 될 수 있던 실질적 요인은 로마 군단 병들의 존경과 충성을 얻은 위대한 장군이었다는 사실이다. 총독 겸 군사령관으로서 4개의 로마 군단을 지휘해 갈리아에서 9년이라는 세월 동안 정복전쟁을 수행하면서 그는 결단력, 추진력, 신속한 상황판단 등 탁월한 용병술과 특출한 리더십을 터득할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내란의 소용돌이에 휩쓸렸을 때, 그를 최종 승자로 만들어준 숨은 원동력이었다.